〈 386화 〉33.개문(開門)
"...."
그녀는 말없이 셜리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렇게 의견을 많이 내는 건 처음이라 적응이 좀 안 되는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그래, 이 건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두 말해봐."
"...그럼 직언 좀 하겠습니다."
"...."
셜리는 심호흡했다.
뭔가 엄청난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사령관님은 엄청나게 모순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순?"
"예. 말로는항상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한다 하시지만, 정작 하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가?"
"만일 사령관님이 정말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신다면, 당장 유은이라는자부터 적대하고 처리해야 할것입니다."
"아니 그건...."
"물론 너무나 강한 상대이고, 지금 당장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다수의 인류에게 이득일 것입니다."
"그,그래. 그런 거다."
생각도 못한 말에 당황한 한사랑.
폐급 병장으로 인한 피카츄 사건 때보다 지금이더 당혹스러웠다.
"근데 그건 지금의 얘기일 뿐이고, 그의 행적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부하들의 성정을 보나 장기적으로는 인류에 막대한 해를 끼칠 것이 분명하고, 얼마 전 들어온 소식을 생각해 보면 아예 인류 자체를 개조하여 오로지 그에게 충성하는 노예생명체로 만들 가능성도 충분히 높습니다."
"...."
"그런데도 사령관님은 눈을 닫고, 귀를 닫아서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시죠. 그저 당신께서 믿고 싶은 '유은은 비록 개인적으로 망나니지만 인류적으로 생각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끌어올 거야.'라는 '망상'을 신봉하고 계실 뿐입니다."
"...."
폭언에 가까운 직언.
사랑은 상당히 불쾌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사령관님도 내심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꺼내고 싶지 않으셨던 거겠죠. 그 증거로 사령관님은 애인관계에 있는 그자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계십니다. 사방팔방떠들고 다니진 않더라도 가끔 '보고싶다'같은 말을 할 수는 있을 텐데 말이죠. 그냥 그 자에 대한 언급을 피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모순된 자신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결론이 뭐지?"
"사령관님이 따르는 건 '가치관'이 아닌 '감정'이라는 겁니다. 그 자와 만나고서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행동들, 심지어 대통령의 계획을 받아들인 것 까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던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거창한 대의가 아닌, 그저 사령관님의 소박한 욕망. 그것을 따라 오셨습니다."
한사랑이 발끈했다.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공격적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네가 날 만난 건 내가 이 직업을 얻고 난 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전의 내 행각에 대해 모두보기라도 했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세력을 키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르나? 강력한 군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을 전복해서ㅡ,"
"잘 있는 나라를 굳이 전복하시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사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셜리와 한사랑,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봤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회피하지 마십시오. 대통령의 계획 때문입니까? 그 계획은 왜 받아들이셨습니까? 하렘궁과 국민이 부딪히면 큰 피해가 생긴다ㅡ, 그러니 그 전에 언론이든 뭐든 막아야 한다. 그래서 받아들이셨습니까?"
"그건ㅡ,"
"그런 건 궁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이 무슨 경험이 있으시다고 이런 시대에 언론을 통제하고 정보를 통제하겠습니까? 설령 된다 해도 하렘궁이 그저 보고만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 있습니까?"
"...."
"대통령의 계획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허점 투성의 망상입니다. 사령관님도 얼마든지 간파하고 계셨을 겁니다. 그 날, 그 자리에서요. 그럼에도 이를 받아들인 것은 사령관님의 오랜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난 욕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나는 대의를 위해, 민족을 위해 움직인다."
"아니요. 그 신념은 이미 욕망에 먹히셨습니다."
꾸욱.
심한 모욕.
고작 욕망이라니.
한다는 소리가 고작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라니.
너무 심한 모욕 아닌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바로 옆에서 끔찍한망나니짓을 하는 유은조차 눈감고 넘어가는 그녀다.
바로 민족과, 민족을 넘어 전 인류를 위해!
그런데 그 모든 게 망상이고 단지 욕망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니.
그녀에게 이보다 심한 모욕이 있을 수 있을까.
"너...."
당장 나가라고 하려 했다.
0.5초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말을 끝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셜리가 치고 들어왔다.
"당신은 그냥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고 싶을 뿐입니다. 나란히. 함께. 그게 전부입니다."
막 입을 열려던 그녀의 입술을 닫게 만드는 한 마디.
생각을 멎게 만들고 머릿속을 하얗게 칠해버리는 한 마디.
"무,무슨...."
"우주적 민폐덩어리인 그자와 어떤 대가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진짜 애인관계라는 것이 모든 것의 증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옆에 있고 싶으니까 끔찍한 망나니짓도 눈감고 넘어가는 겁니다. 옆에 있고 싶으니까 주변에서 애매하게 맴도는 겁니다. 옆에 있고 싶으니까 중증 망상인 대통령에게 꿰이신 겁니다."
"...."
"옆에 있고 싶으니까...여기까지 와서 힘을 키우시는 겁니다. 대의가 아닌, 옆에 있고 싶으니까. 당신은 이미 '대의'를 잃어버리셨어요. 사랑때문에."
발끈해 있던 한사랑은 그렇게 폭언을 얻어맞고 멍하니 주저앉았다.
마치 망치로 한 대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셜리는 '실례했습니다.'라며 경례를 이어붙이더니, 조심스레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한사랑은 무언가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혼이 빠져나간 건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분노가 치민 것인지,그저 멍하니앉아 더듬더듬 책장을 매만져 술병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대의를 잃어버렸다니.
모순이라니.
욕망이라니..
하나같이 받아들이기 힘든 말들이다.
"뭘 안다고..."
벌컥벌컥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오늘따라 따가웠다.
알코올마저 그녀를 질책하는 느낌이다.
"크윽...부관 주제에...건방져...."
그녀는 그렇게 내뱉고는 거칠게 술병을 내려놨다.
카펫이 깔려 있어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술을 홀짝거렸을 때,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서일까, 조금은 생각이 열렸다.
셜리는 그녀의 부관이다. 그것도 시스템에 의해소환된 병사이며, 오로지 그녀에게 충성한다.
그런 그녀가 잘못된 말을, 최소한한사랑에게 해가 되는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 당신은그냥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고 싶을 뿐입니다. 나란히. 함께. 그게 전부입니다. -
그녀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사랑..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
스물일곱 평생을 살면서 그와 근접한 것을 겪었던 건 단연 유은밖에 없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이미 호감을 품었고, 그날 유은과 잠자리를 가졌다.
생애 첫 키스였으며,
생애 첫 섹스였다.
그 뒤로 그녀는 급격하게 유은에게 빨려 들어가, 거의 국가 공인 커플쯤으로 인식되었다.
두 번 만에 그녀는 유은에게 빠졌다.
아니, 어쩌면 그냥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빠졌는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는 매운갈비집과 매운갈비탕간의 갈등을 해결해야 했고, 거기서 민간인과 모험가를 향해 발포라는 거의 세계 역사급의 행동을 보였다.
과연 정말로 '가치관'에 의한 행동이었을까?
과연 정말로 '잠재적 위험분자'라는 명분 만으로 모험가와 민간인에게 총을 겨누고 발포한 것일까?
그런 거라면 왜 유은은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냥 유은의 눈에 띄려고, 저도 모르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건 아닐까.
유은이 두 여인과 성대한 약혼식을 올렸을 때, 굳이 거기에 참가해서 은소령에게 시비를 걸거나 괜히 얼쩡거리며약혼녀들의 눈에 띈다거나 하는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 거기서자신이 '내연녀 포지션'이라는 걸 알고도 유은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계속된 시련과 본인의 무능함에절망했을 때, 은율령이나 은소령의 갖은 모욕에도 끄떡하지 않았지만, '유은'을 언급했을 때 그녀는 폭발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다시 일어섰다.
그래..
어쩌면 셜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느니, 민족의 부흥이라느니 하는 건 다 핑계고,
그냥 자격을 갖추어 그의 옆에 서고 싶을 뿐인지도 모른다.
함께, 나란히 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곁에 있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게 사실이다.
"하...."
2시간 가량이 흘렀을 때, 그녀는 다시 간부들을 소집했다.
"...."
"...."
"...."
"...."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가라앉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한사랑.
간부들, 특히 셜리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정면만을 응시했다.
"국호는...."
한참만에 나온 목소리.
동시에 얼굴을 숙이고 있던 한사랑이 고개를들었다.
"대한제국이다."
"...!!"
"사령관님...!"
가지각색의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특히 셜리가.
"나는 황제가 될 거다. 그래서...그의 옆에 있을 거다. 같은 자격으로."
"저의 모든 것을 사령관님께...아니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한사랑의 눈빛이 처음으로 강한 욕망에 물들었다.
+++
쨍그랑!
"...."
끊임없이 밀려오는 업무를 처리하던 중, 멀쩡하던 전시용 접시가 떨어졌다.
대통령은 이를 별 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여 업무를 속행했지만, 이번엔 고이 걸어두었던 액자가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
대통령 본인이 거대한 태극기 앞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찍은 사진.
깨진 건 유리였지만, 마치 그 사진, 그리고 사진 속 소망이 깨진 것 같았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그의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