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화 〉33.개문(開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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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제압 완료됐습니다. 적절한 곳에 대대급 병력만 배치해 두어도 절대방어가 가능합니다."
부관의 보고에 한창 책을 보고 있던 한사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복전쟁을 시작한 지 고작 며칠.
하지만 그 며칠은 그녀에게 새로운 본거지를 마련해 주었고, 방어를 위한 절대방어선을 비롯한 무수한 지역들을 손에넣어 주었다.
이 세계의 문명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힘.
그 힘으로 말미암은 무자비한 정복은 벌써 나라급의 영토를 함락시켰다.
인력으로 잡아온 포로만도 수십만에 달하며, 각종 생산활동을 위해 남겨둔 자들은 족히 백만을 넘겼다.
그리고 그 만큼 학살된 이들역시 많았다.
대륙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규모 재앙.
정복과 학살을 통해 한사랑은 엄청난 속도로 스탯을 올렸고, 이는 곧바로 전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병력의 소환은 곧장 추가적인 정복으로 이어졌고, 정복된 땅에서 얻어지는 자원들을 본거지로 가져와 각종 카테고리화된 자원으로 비축했다.
덕분에 20만 정도의 규모를 갖고 있던 티무진의 성도의 인구는 순식간에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로 변모했다.
물론 제대로 된 수용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포로로서 대우받고 있을 뿐, 자유로운 활동은 불가했으니까.
그리고 그나마도 공장에서 무장할 수 있는 복장과 개인화기가 충분히 생산되면 차근차근 훈련병 신분이 되어 가혹한 훈련을 받게 될 것이었다.
"1차 점령은 여기서 종료한다.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하도록 일단 '도' '시' '구' '동' 순으로 행정구역을 나누고 책임자를 선별해 보고하도록."
"더 하지 않으십니까? 아직 군의 여력은 충분합니다."
셜리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군의 여력은 충분하다못해 차고 넘친다.
제대로 된 본거지도 얻은데다 스탯도 많이 상승하여 정복시작 당시 2천에 한참 못 미치던 병력은 어느새 3천을 넘어 4천에 육박하고 있었고, 전차나 장갑차와 같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군수공장도 이곳에 건설하고 있다.
게다가 라이제르 왕국의 제국령 라르나르에서도 꾸준히 보급물자를 나르고 있었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넓게 퍼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미 며칠만에 대한민국에 버금가는 영역을 점령했고, 이것만 해도 상당히 많은 행정력이 소모된다. 그리고 그녀는 잘 훈련된 '군인'이지,'지도자'가 아니었다.
"군의 여력은 충분하지만 행정력은 미달이다. 최대한 빨리 행정구역을 나누고 '시'급 행정구역마다 1개 대대를 배치하여 혹시모를 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나머지 군은 한양에 배치한다."
"적의 왕에게 항복권고도 할까요?"
"굳이 그럴 필욘 없겠지. 그쪽에서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내정으로 기세를 돌렸다.
뭐, 그렇다 해도 한 달 이상 가진 않겠지만.
"참, 국호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는데.... 이곳의 이름을 '한양'으로 지으신 걸 보면 '신 조선'이라던가?"
셜리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한사랑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중요한 사안이니 회의가 필요하겠어. 오늘 밤 중진회의에서 결정한다."
"그럼 국호와 관련된 것도 생각해 두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래."
셜리가 나가고, 한사랑은 침대에 누웠다.
'국호'를 정해야 한다 했을 때, 뭔가 묘한 감정이 꿈틀댔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
'뭐지...이 느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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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회의.
한사랑군의 별들이 한데모여 향후 군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다.
"국호라는 건 민족의 통치이념을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사령관께서, 그리고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 한민족의 최대다수 최대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만큼 그에 걸맞는 국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지구로 돌아가 대한민국을 계승할 계획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호 역시 그대로 계승하는 편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국호 계승은 반대입니다. 기존의 대한민국과 앞으로 우리가 세울 국가는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체제는 그대로 있겠지만, 월등한 기술력과 산업, 군사력, 그리고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우리의 통치이념 등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ㅡ,"
"저는ㅡ."
"전ㅡ."
간부들은 제각각의 의견을 냈다.
한사랑이 기존에 생각하고있던 것과, 대통령과 나눈 얘기등을 활용해 각종 국호가 쏟아져 나왔다.
옛 한반도 국가의 이름을 딴 국호는 물론이고, 나중에는 심지어 '임시정부'라는 이름까지 나왔다.
"흐음."
차근차근 모든 의견들을 듣고 있을 때, 셜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한사랑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엄청난 결심의 얼굴로 말했다.
"저는 일단 사령관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응?"
"따로 생각해 두신 국호는 없으신겁니까?"
"음."
그녀의 물음에 한사랑이 몸을 뒤로 젖혔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을 그대로 계승해도 좋다고 보고 있다만."
"민주주의를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렇지. 민주주의, 인권, 자유경제 등은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그럼 우리는 건국이후 4년이나 5년이면물러나야 하는 것입니까?"
"...?"
"사령관께서도, 물러나실 겁니까? 모든 군을 해체하고 정치를 떠나 어딘가로 은둔하시는 건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셜리가 드물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흰 사령관님의 군대입니다. 그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명령도 듣지 않을 것이고, 하렘궁 황제의 명령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사령관님의 명령만을 듣는 사병입니다. 현대의 그 어떤 국가도 사병을 허용하지 않는데, 사령관님께서 국가수장의 자리를 내려놓게 되면 그 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일개 군인이다. 국가의 지도자가 될 생각은 없어."
이곳에서 무력을 키우고, 차원을 건너가 대한민국을 전복시킨 뒤 '안정'될 때까지 통치하며 하렘궁과 국민들이 부딪히지 않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한다.
그것이 한사랑과 대통령이 계획한 작전이다.
과정상 잠시동안 국가의지도자가 되겠지만, 그걸 영원히 끌고갈 마음이 그녀에겐 없었다. 대통령의 계획에도 없었고.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지도자가 아닌 장군으로 머문다 하셔도 언젠간 은퇴하실 것이고, 그리되면 결국 군을 해체하든, 아니면 명령권을 국가에 이전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흰 사령관님 외에 다른 자의 명령은 듣지 않습니다."
셜리를 비롯한 부하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물론이고 심지어 '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계승을 주장했던 간부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저흰 형태와 상관 없이 사령관님의 나라를 세우고 싶습니다. 국호 역시 그에 걸맞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사랑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보고 왕이 돼서 장기집권이라도 하라는 건가?"
왕이라니.
그녀의 가치관과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방법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를 위해서는 왕정이나 제정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 어떤 왕이, 그 어떤 황제가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항상 그들만을 생각한단 말인가.
극히 소수가 그리한다 해도 국가의 시스템이, 통치 이념이 그들을 쥐어짜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니 애초부터 논외.
생각할 가치도 없는 얘기다.
"왕은 탐욕의 상징이다. 나는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러니 그 제안은...."
거절하려 했다.
애초에 생각도 안 하던 내용이니 깔끔하게 자르려 했다.
하지만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그녀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정말 괜찮나?
내 군대의 피를 흘리고, 자원을 사용하고, 마침내 온 국민의 욕까지 얻어먹으며 희생을치른 결과가 정말 민족의 번영이면 되는 것인가?
나의 욕망은 없는가?
이루고픈 소망과 갖고 싶은 재화는 없는가.
영구적인 나의나라를 일구고픈 그런 마음은 없는가.
역사의 갈림길 앞에, 망설임이 일어났다.
어떤 욕망의 발현인지는 아직 그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동안 굳게 믿고 실천하려 했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정확히는, 무언가에게 먹혀가고 있다.
"솔직히 저는 한국 대통령의 제안도 맘에 안듭니다. 결국 사령관님을 욕받이로 세우고 본인은 뒤로 빠지겠다는 거 아닙니까! 왜 우리가 그런 자의 계획에 휘둘리며 이용받아야 하는 겁니까? 사령관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고모든 욕을 감수하신다면,마땅히 그로 인한 전리품도 사령관님이 가지셔야 합니다. 민족이 아니라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군."
머리가 아픈지, 그녀가 이마를 꾹꾹 문질렀다.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다 결국 회의를 파하고 셜리만을 따로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