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30. 왕의 귀환
+++
"이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까요? 안그래도 어수선한 상황인데 그 사람이 돌아오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돌아가긴."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있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어깨에 매고 있는 두꺼운 가방과, 들고 있는 수첩, 그리고 그를 선배라 부른 남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카메라가 그들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 같이 망한 거지."
심플한 대답에는 지독한 절망이 들어차 있었다.
유은이 이세계에 가 있는 동안, 세계는 하렘궁에 대한 강력한 제제를 발휘했다.
비록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행위.
심지어 중국은 무력까지 동원하여 한국과 함께 쓸어버리려 했을 정도인데 주인이 돌아왔을 때 과연 그걸 두고 볼 수 있을까.
"그 인간이 아니어도 자기가 주인으로 있는단체가 그런 취급을 받아왔다면 응당 그에 준하는 반격을 할 거야. 그러지 않으면 조직이라는 건, 그리고 권력이라는건 무너져버릴 테니까."
"바,반격이라뇨...이미 충분히 한 거 아닌가요? 솔직히 제제 명분도 다 그쪽에서 준 거나 다름없는데...."
"그딴 게 중요해? 중요한건 우리의 생각이나 입장이 아니라 그놈들의 입장과 생각이지. 세상의 상식이나 도덕 같은 건 쥐뿔 좆도 상관 없는 거야."
"...."
그의 말에 후배기자도 덩달아 풀이 죽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간신히 입사했나 싶더니, 유은이 돌아와 깽판을 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오늘 연 기자회견에서 도대체 얼마나 경악스런 말을내뱉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상황.
어쩌면 그 일로 세계 경제가나락으로 빠져 허우적대는 바람에 간신히 입사한 그도 나락으로 처박힐지도 모른다.
그렇게 으슬으슬 떨고 있을 때, 선배기자가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도 우린 괜찮을 수도 있어. 나름."
"네?"
"전 세계가 궁을 제제할 때, 우리나라만 줄곧두둔해 왔잖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아래에서."
"아."
"그가 귀환했을 때 가장 먼저환영한 게 누구냐? 우리나라 경찰 아니냐. 심지어 총경이 직접 의전까지 했다고."
"그건...그렇네요."
"무릇 리더라 하면 은원이 확실하고 상벌이 명확해야 하는 법이다."
"근데 그 사람이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요. 솔직히 지금까지 했던 행동이나 말을 들어보면 그냥 사춘기 어린애 수준이던데...과연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일처리를 할까요?"
"그렇게 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 없어."
"...네?"
"은원과 상벌을 확실히 하지 못하면 그 조직은 오래 못 가."
"과연...그럴지...."
영 미덥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 말이야말로 희망이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한국만은 유은의 화에서 넘어가길 바라면서....
"왔다!!"
찰칵!
찰칵찰칵!
십여 분 남짓의 기다림 끝에 누군가가 등장했다.
심히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남자.
나이 만큼이나 앳돼 보이는 인상에 남자라도 감탄을 낼 만한 외모. 매일같이 해대던 추악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아이돌취급 받으며 팬덤까지 생겼을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기관총처럼 연달아 반짝이고, 유은과 실질적으로 궁의 일을 처리하는 임서현 등의 여인들이 자리에 앉은 후에도 그것은 계속되었다.
"아.아."
간단히 마이크를 두드리며 테스트하는 그.
떠들썩하던 회장이 곧장 조용해졌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모험가이자, 인류 역사상 최대 길드인 『하렘궁』의 수장, 유은입니다."
그는 답지 않게 시작부터 각종 수식어를 붙였다.
그러고보니 지난번 카지노 발표때 보여주던 익살스런 표정 같은 것도 없었다.
"모두가 저에 대해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여기 이 자리에 수백 명의 기자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죠."
유은의 기자회견이라 하기에는 상당히 정상적이다.
물론 어쩌면 원래 이것이 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봐 온 그의 모습이라 해봤자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지난 카지노 발표때의 모습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워낙 뒤에서 했던 일들이 상식 밖이었기에 사람들은 조금 충격 받았다.
"오늘 여기서, 당시 제게 일어났던 일, 이세계에 가서 겪었던 일,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궁에 일어났던 일과 궁이 행했던 일들에 대한 저의 입장, 그리고 앞으로 궁이 어떻게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대해 모두 말씀드릴겁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엄청난 특종이라고.
게다가 그는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설명하겠다 하면서 이미 '이세계에 가서 겪었던 일'이라 말했다. 즉, 항간에 떠도는, 그리고 궁이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한국 정부에서도 받아들인 그 음모론 같은 얘기가 '사실'이라는 걸 처음부터 밝힌 것이다.
"우선, 그때 당시에 있었던 일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바르카나의 수장 쟌다르크와의 싸움 도중,그의 부인(공식적으로는 약혼녀)인 이유나가 난입, 성공적으로 쟌다르크를 물리치고 사태를 수습하려는 찰나 그녀의 수작으로 유은과 이유나가 이세계로 날아가게 되었다는 걸 살을 넣어 설명하는 유은.
기자들은 열심히 받아 적었다.
인천을 습격한 바르카나에 대한 것은 들어 알고 있지만, 그의 수장 『쟌다르크』라는 인물은 처음 밝혀진 것이었다.
"안 믿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세계는 실존합니다. 제가 거기서 왔으니까요. 저는 거기서 인간과 동일한 생명체가 이룩한 일종의 『문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지구의 현대문명에 비하면 미진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만, 『마법』이라는 미증유의 힘을 기반으로 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며, 분명한 메리트가 있는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유은은 이세계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남겼다.
전반적인 문명 수준, 사람들이 가치관, 추정인구 등 흥미롭게 들을 만한 것들을 간단히 나열했다.
궁에 건설된 게이트를 통해 교류할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때는 회장이 거의 폭발할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사실상 본론이라 할 수 있는 그 동안의 궁이 당해왔던 것과, 했던 일에 대한 입장과,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말이 이어졌다.
이세계로 인해 잔뜩 달아올랐던 기자들이 이 대목에선 쥐 죽은듯이조용해졌다.
긴장감.
그것만이이곳에 자리했다.
"우선,제가 없는 동안 본궁을 향한 전 세계적인 제제가 있었다는 것을 시녀들을 통하여 충분히 들었습니다."
"...."
카리스마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단지 거기까지 말했음에도 입 안이 바싹 마르며 손에 땀이 맺혔다.
"그 와중에 한국만이 홀로 우릴 지지해주고 인정해 주었다는 것 역시 들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궁의 주인으로서 한국 정부와 그리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참고 견뎌준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는 인사하듯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모습에, 사람들이 꽤나 놀랐다.
"아울러 우릴 제제했던지, 지지했던지, 그에 대한 저의 입장을 말하기 전에 성경에 있는 구절 하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뜬금없이 웬 성경?
이라고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서현이 앞에 있는 마이크를 살짝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각 사람의 행한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상당히 광오한 말이었지만, 그 만큼 두려운 말이기도 했다.
특히 『보지니아』라는 희대의 괴생물체를 통해 중국 인민군을 끔찍하게 학살한 장본인이 그 구절을 읊으니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다.
그 분위기 속에서, 유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제와 지지가 있기 이전에, 본궁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경악하고 슬퍼했던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궁의 수장으로서, 주인으로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본궁을 업신여기거나 낮게 보아 감히 제제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직접적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본궁과, 궁을 감싸고 지지해준 대한민국까지라도 제하려했던 중국에게는 강한 유감을 표하며, 이후 저를 통한 충분한 대응이 있을 것을 이 자리에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미 중국은 분열의 수순을 밟았다.
임서현의 대학살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은을 통한 '충분한 대응'이 있을 것이라 한다.
도대체 그게 무엇일지 벌써부터 기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까지 제가생각없이, 소위 꼴리는대로만 행동을 해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줄로 압니다만, 착각이십니다. 저는 앞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리더로서 다른 어떠한 것 보다도 은과 원을 확실히 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어차피 저놈은 멋대로 할 녀석이라 잘 대해줘도 의미 없다.' 같은 생각으로 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앞서 말한 바, 우릴 향해 무력을 겨누었던 중국은 따로 대응을 할 생각이며, 끝까지 우릴 감싸면서 저를 환대하기까지 한 한국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생각입니다."
기자들의 손이 뻗어졌다.
수십, 수백.
카메라 셔터가 연신 번쩍이며 회장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중국에 대한 충분한 대응이라는 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한국에 대해 어떤 보답을 하실 지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은 이미 대가를 치른 것으로 보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궁을 보호하는 것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여러 가지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유은은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질문은 추후에 제 회견이 끝난 이후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몇 마디를 이어간 그는 지지와제제에 대한 입장을 대강 설명했다 생각했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앞으로 본궁이 어떻게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전 지구의 정상화를 목적으로 일을 벌려나갈 생각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추후 시녀들을 통해, 그리고 궁의 본격적인 입장설명을 통해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지구에는 던전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국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지상의 던전화까지 진행된곳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상의 던전화.
던전 방어전에 실패하거나, 역류현상을 막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로서, 말 그대로 지상이 던전처럼 되는 것이다.
다행히 사방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 마기가 축적되어현대병기가 먹통이 되는 일은 없지만, 일반 시민이 절대다수인 만큼 심각한 위협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며, 전 지구적인 힘을 모아 해결해야만 하는 난제입니다. 하지만 UN을 비롯하여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세계 각국은 이 일에서 눈을 돌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이세계로 넘어가기 전, 던전화가 진행된 곳에 시녀들을 파견한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아마 기사를 통해 이를 들어봤거나, 직접 해당 기사를 작성하신분도 이곳에 있을 겁니다.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항구적으로 던전화를 몰아낸 것인지 아직은 모릅니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당장 해당 지역의 몬스터들을 던전 속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를 전격적으로 확대하여, 적어도 민간인이 던전화 때문에 고통 받는 일은 없도록 할 것입니다."
유은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동안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나몰라라 했던 지구의 현실.
일부 선진국을 제외한 국가들은 거의 붕괴상태에 다다라 있으며, 던전의 난이도가 올라갈 수록 선진국들 역시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는 끔찍하고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그 일에 대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는 세계기구에 대한 비판을 더불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이 해결하겠다 자원했다.
"또한, 지난 『인천 사태』처럼, 외계로부터의 침략 역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와 확실한 방비를 마련하여 다시는그때와 같은 슬픔을 인류가 경험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확실함에 몇몇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감화된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운명은 멸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점점 상승하는 던전의 난이도와 밝혀지는 외계의 위협 등. 본래 인류가 가지고 있던 역량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을, 아니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몰랐을 그런 일들이 하나 둘 지구를 향해 오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이 본궁을 받아들이고, 적대하지 않는다면, 본궁 역시 여러분을 받아들일 것이고, 적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류의 미래를 하렘궁이 책임질 것입니다."
+++
열화와 같은 회견장을 빠져나왔다.
아. 답지 않게 하려니 좀 긴장했었지.
"이 정도면 됐냐."
"...."
평소대로 하지 않은 이유는 베로니카의 말 때문이다.
요녀석 현대에 처음 왔을 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더니 금새 담담해져서는 막 이것저것 참견하기 시작했다.
아니, 시녀잖아? 내 말에 따라야 하잖아?
근데 꼴에 기사라고 '주인이 불명예를 떠안는 건 용납할 수 없다.'라는 괴상한 사명감에 불타면서 막 이것저것 코치하기 시작했어. 엄청 피곤하다고.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회견의 형식은 베로니카의 의견을 반영하긴 했어도 결국 전부 내가 하려던 거다.
겉으로라도 명예를 쌓아야 내가 하고 싶은 짓도 더 스케일 크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 해도 우릴 적대할 놈들은 차고 넘친단 말이지. 그넘들에 대해서는...쿠쿠. 진짜 대놓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야.
"뭐, 충분합니다."
"왜 주인인 내가 노예인 너한테 검사를 받아야 하는 지 모르겠다. 얼탱이 없네. 이따 두고봐."
".....어차피 매일 하지 않습니까."
한숨을 푹 내쉬며 걸어간다.
아, 그러고보니 이세계 얘기할 때 얘얘기도 꺼낼 걸 그랬나? 얘가 바로 이세계에서 데려온 여자입니다. 라면서.
"주인님, 중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현이 인이어를 꾹 누르며 나를 쳐다봤다.
"중국 분열됐다며? 여러 군벌로."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형식적으로정부는 존재합니다."
"무시해."
"알겠습니다."
"중국은 진짜 크게 꿀밤 맞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