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화 〉30. 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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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시지요."
"반가워요. 며칠 안 된 거 같은데, 그새 분위기가 변하셨네요."
"그렇습니까?"
이소냐를 불러 대면한 대통령은 하하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저번 대면 이후 꽤 시간이 지났지만, 그거야 대통령 입장. 소냐로서는 매일 같이 뉴스 등으로 그의 모습을 보다가 이세계로 넘어가고 나서야 그것이 끊겼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돌아왔을 땐 그의 분위기가 꽤나 다르게 느껴졌다.
평소의 소신이나당당함은 대폭 사라지고, 대신 두려움에 관한 감정들이 빈자리를 채운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소냐에겐 왠지 모를 고양감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이여사님을 뵙는 것도 벌써 3번째가 넘는 군요."
"그러게요. 자주 불러주시네요. 일개 변호사인데."
"일개 변호사라 하기에는 좀 너무 거물이시지 않습니까? 하하."
궁을 제외하더라도 그녀는 발이 매우 넓은 편이다.
일류 변호사로서 무수히많은정재계 인사들을 변호해 왔고, 의도치 않게 방대한 양의 약점 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경력이 있는 만큼 면식이 있는 법관들도 상당히 많아 검사 판사 할 것 없이 상당부분 그녀의 입김이 닿아 있는 상황이다.
일전에 그가 정치할 생각 없냐고 물어본 것도 다 이런 이유.
그저 변호사로 활동하기에는 지닌바 세력이 너무크다.
"그나저나 유은 회장님이 복귀하셔서참 다행입니다. 이제 국민들도 던전에 대한 걱정은 한 시름 놓아도 되겠어요."
"어머, 그 말씀 정말인가요?"
후후 웃으며 묻는 소냐에게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분이야말로 한민족의 역사를 세계적인 엯로 끌어올릴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과장된 표현이시네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과장이 절대아닙니다. 물론 많은 시련이 있겠지만...잘만 한다면 한민족의 최대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소냐는 그의 표정에서 일종의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무언가 하나에 올인한, 매진한 그런 사람들의 표정. 그들에겐 오직 그것만이 삶의 이유이며, 그것만을 광명삼아 달려간다.
마치 불나방.
가는 길이 설령 본인의 마지막일지라도, 기꺼이 걸어가는 자의 광기.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기에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인가.
두려움의 종속 속에서 무엇을 보아 광기를 낼 수 있는 것인가.
소냐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 앞 남자의 행보가궁금해질 뿐.
"뭘 꾸미고 있는 건가요? 대통령님."
일개 변호사가 대통령을 향해 추궁하듯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꾸미든 궁과 대적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사님."
"꾸미고 계시다는 거네요."
"추후 알게 되시겠지요."
소냐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확실히 흰머리가 늘었다.
분명 꽤 젊은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모습만 본다면 젊다고는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그로 인한 적막감을, 대통령이 끊었다.
"아무튼, 회장님도 돌아오셨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귀궁과 본국이 관계정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산하지 못한 문제들도 있고요."
"흐음."
숨을들이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살짝 기울이는 소냐.
곱게 관리된 눈썹이 살며시 모였다.
청산하지 못한 문제.
산더미다.
소라의 원자로 테러나 임서현의 보지니아 테러 및 중국 대도시에서 자행한 무수한 납치, 그로 인한 세계적인 대궁제제 흐름 속에 한국홀로 궁을 지원했다.
대통령의 결단력과 뒤에서 의원들과 각종 단체들을 움직인 소냐 플러스 기타 등등의 활약으로 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반대여론을 형성했고, 한때는 상당한 인파가 모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일도 있다.
고위공직자인 민예린 검사와부하검사를 단지 '유은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라는 의혹 만으로 납치하여 아직까지도 둘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이며, 거기에 페미를 소탕하겠다는 황당한 이유로 일개 지검을 무력점거하여 군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국민들은 이를 알고 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무력 때문에 그저 공론화 하지 않고 쉬쉬하고 있는 상황일 뿐, 언제든지 도화선에 불이 붙을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건 그쪽들 상황이고, 이미 철저하게 유은의 사람이 된 소냐는 굳이 『지나간 일』을 언급하는 것에 불쾌함을 느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궁과 대적할 생각은 없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문제들을 다룬다 해도 귀궁에 해가 되는 일은 최대한 피할 생각이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한국의 법을 들이민다면 우리 그이는 최소 무기징역일 텐데요."
"후후. 알긴 아시는군요."
"...."
더욱 차가워지는 표정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집행할 수 있는 힘』이죠. 힘 없는 정의는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제가 볼 때 이 대한민국이 귀궁을 상대로 형을 집행할 힘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알긴 아시네요."
그가 했던 말을 고대로 돌려주는 소냐. 차가워진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국민들도 그리 생각할까요?"
"아니겠죠."
"네. 아닙니다. 지금이야 압도적인 힘, 그리고 몰아치듯 벌어지는 사건들 때문에 발화되지 않고 있지만, 궁과 관련된 일이 계속해서 터진다면 언젠가 반드시 들고 일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파멸이지요."
"...정부가 국민의 손을 들어 우릴 제제하려 하면 물리적으로 파멸하게 되고...그 반대라면 정권이 뒤집히고."
"예. 어느쪽이든 결코 이롭지 않은, 최악의 사태입니다."
대통령이 그 말을 하면서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한 번 보시죠."
"..."
서류를 꺼내 살펴보니, 대검에서 하렘궁을 타겟으로 조사한 수사자료였다.
분명 영장도 없었을 거고 압수수색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참 잘도 조사해 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은이 저질렀던 각종 강간과 폭행, 납치 및 살인교사, 살인 등등과 그의 시녀인 임서현과 기타 무수히 많은 시녀들의 범죄 중에서 특히 중하다 여겨지는 것들이 서류화 되어있어, 누구라도 보는 순간 하렘궁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단체인 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소냐가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 넣고 돌려 주었다.
"이걸 제게 보여준다는 건, 모종의 거래를 하자는 뜻으로 비춰집니다만."
"그렇지요."
"그게 뭐죠? 일단 들어는 드릴게요."
본인의 범죄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본래부터 깡은타고난 사람이었지만 궁의 소속이 된 이상 무서울 게 없었기 때문.
아니, 궁을 떠나 그녀 혼자만 하더라도 이미 대적자가 없는 상황이다.
"민예린 차장검사를 다시 사회로 복귀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그녀의 머리가 대통령의 말을 듣는 순간 멈추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요구였기 때문.
내심 더 많은 기술제휴와 향후 n년간의 동맹 같은 것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어버렸다.
"...이해가 안 되네요. 시녀가 된 사람을 모두 풀어달라는것도 아니고, 그녀 하나만 콕 찝어서 해방시켜 달라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그렇죠. 이미 시녀가 됐겠죠."
"...."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에게 반기를 들 수 없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에게, 크게 숨을 들이쉰 대통령이선언하듯 말했다.
"저는 귀궁의 시녀가 된 민예린 차장검사를 이 나라의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할 생각입니다."
"...뭐라구요?"
얼이 나간 그녀에게 확인사살하듯 또박또박 말해준다.
"『법무부장관』 말입니다."
"...."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소냐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하지만 그 답을 파악하기도 전에 대통령의 말이 먼저 나왔다.
"저는 말이죠, 한민족이 부흥할 수 있다면, 그래서 세계를 호령하고 어딜가든 떳떳하고 당당하게 허리를 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병들게 하고, 마침내는 붕괴의 첨병이 된다 해도 말입니다."
"...."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말한 것 만으로 그의 의도는 전달됐다.
그의 각오도 전달됐다.
대통령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고,
본인 스스로 하렘궁과 대적할 일은 없을 거라 말했다.
그리고는 유은의 시녀가 된 민예린 검사를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한다고까지 했다.
거기에 지금까지의 대화까지 합쳐진다면, 그의 생각은 명백.
"예린이는 우릴 조사하다 결국 인생의 나락...아니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죠. 그리고 결국은 그 수사자료가 이렇게 남아 제 앞에까지 오게 되었고요."
"그렇습니다."
"덮을 생각이군요? 앞으로의 모든 일을."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요. 『그 일』이 있을 때까지."
"...그 일이 대체 뭐죠? 뭘 꾸미는 거예요?"
『그 일』.
조금의 편린을 엿보긴 했지만, 아직 대통령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한 소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아니 소냐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계획.
한사랑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여 그녀가 막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을 때, 그 힘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을 뒤집어 엎는다.
말하자면 쿠데타.
그리고 완전한 군부독재를 이루어 하렘궁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철저한 언론통제를 개시, 유은과 궁의 추악한 범법행위를 수면 아래로 영구히 눌러 보관함으로 국민과 궁의 마찰을 한민족의 일대기 속에서 『삭제』한다.
더불어 유은의 애인인 한사랑을 중심으로 수립된 군사정권은 궁과 연계하여 세계를 상대로 뻗어 나가고,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구원을 이끌어낸다.
대한민국이 무너져도 상관 없다.
전후의 피땀어린 노력 끝에 쌓아올린 탑이 모조리 무너져도 상관 없다.
앞으로 있을 한민족의 항구적인 번영과 세계 속에서 오롯한 민족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내어 주리라.
"그건 언젠가 알게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