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29.다시 지구로.
29.다시 지구로.
"으...음...."
내리쬐는 햇빛.
창문을 투과하는 그것은 방 안과 두 사람을 강렬하게 비추었다.
감겨있는 눈을 부스스 뜬 여인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몸을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는 유은과, 난장판이 된 방 안. 채 빠지지 않아 코를 자극하는 뜨거운 밤의 잔향.
창 밖으로 보이는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으니 완전히 아침이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후...."
소라는 다시 고개를 떨구며 유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기 자신을 잊었을 정도로 오로지 하나에만 집중하여 탐한 그녀는 이제와그 기억에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운현.
그래서 완전히 떠나보냈던 운현.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직접 죽이기까지 했다.
그에 대한 후회는 없다.
만약 그가 다시 등장해서 또 같은 말을 한다면 역시 그때도 망설임 없이 제거할 것이다.
그에게 남은 감정은 미안함과 안쓰러움, 씁쓸함 등이지 애정이나 사랑 애틋함 그리움 따위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래도 그녀가 그를 배신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기에, 만일 다시 살아난 그가 그녀와 유은 앞에 나타나지 않고 제 삶을 살아가겠다 한다면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할 생각이 있다.
"하지만더 이상 그럴 일은 없겠지."
"으응...?"
작은 중얼거림에 유은역시 깨어났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됐던 소라와의 섹스는 밤을 넘어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무언가를 잊어야 한다는 것처럼 매섭게 몰아붙이는 그녀의 모습이 의문스러웠을 테지만, 그래도 물어본다거나 제지한다거나 하지 않고 그저그녀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그것이 고마웠다.
혹시 이녀석도 성장하는 걸까.
"으음....섹...스...."
"...."
하지만 요상한 말을 해대며 다시 잠에 드는 유은의 모습에 그 생각은 1초만에 깨져버렸다.
"그럴 리 없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그녀가 유은의 팔을 풀고 일어났다.
매끄러운 나신에 각종 액체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 모습.
그래도 더럽다는 느낌은 받지 못할 것이다. 워낙 아름다웠으니.
-아직도 안 일어났단 말입니까? 대체 얼마나 나태한 것입니까!
-뭐래...진짜 쳐맞을래요? 기다리기 싫으면 돌아가던가.
-그,그건 안 됩니다.
씻기 위해 방문으로 걸어가니, 마침싸우는 듯한 두 여인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들.
이 나라 공주의 호위를 맡고 있는 베로니카라는 여인과 서현의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어제 유은의 요구로 인해 부인후보에서 시녀후보로격하(?)된 상황.
애초에 진짜로 부인후보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는 꽤나 애매했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여기사를 그냥 두고 갈 리는 없으니 적어도 언젠가는 그에게 다리를 벌리게 될 것이다.
'시녀후보인가....'
소라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상술했듯 나신에 각종 음란한 액체가 말라붙어 있는 모습이었지만, 거리낄 건 없었다. 서현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베로니카도 언젠가는 서로의 나신을 보게 될 지도 모르니까.
말하자면 외부인이 아니라고나 할까.
"아, 일어났...???"
문이 열린 즉시 화색을 보이던 베로니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끄럽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자기들 때문에 깼다고 생각했는지, 서현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면서 베로니카를 째려보더니 머리를 콱 하고 눌렀다.
"큭...놔,놔라!"
뿌리치려 해보지만 베로니카의 실력으로 서현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베로니카 역시 이 대륙에선 괴물처럼 강한 여인이지만 그래봤자다. 왕국제일검이던 소드마스터조차 고작 '드론'따위로 죽여버리는 하렘궁에겐 그저 예비 좆물받이일 뿐.
"아니예요. 제가 더 미안하죠."
"예?"
"어제요. 괜히 저 때문에...."
"아."
소라의 의도를 짐작한 서현이 슬쩍 웃었다.
"아닙니다. 사모님이 우선이죠."
물론완전히 환한 미소는 아니다.
그녀 역시 아쉬웠고 일이 일어났던 즉시에는 '이 여자 뭐지?'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소라가 유은의 부인인 이상 그녀 역시 섬겨야 하는 대상.
결국 깔끔히 마음을 접고 유은의 명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흡!...흠흠. 그 모습은 대체 뭡니까? 최소한 옷이라도 입고 나오시죠."
서현의 신경이 흩어진 틈을 타 간신히 뿌리친 베로니카가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 해도 마냥 보고 있기엔 민망한 모습.
하지만 소라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추위는 타지 않거든요."
"아니...제가 안 괜찮습니다만."
"그건 됐고,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일단 안으로들어와요."
"아니...옷을...."
"자.들어오세요. 그러려고 찾아오신 거잖아요?"
"그건...."
막무가내로 초대하는 소라.
제발 옷이라도 입어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지만, 결국 베로니카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떨떠름함을 안고 안으로 들어온 베로니카.
그녀는 굳은 다짐을 했다.
아무리 그녀가 남자에게 담백하여 처녀지신을 유지하고 있다 해도, 바보 멍청이는 아니다.
성인이라면, 그리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소라의 몸에 묻은액체를 보고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정액...이겠지? 냄새도 듣던 거랑 대충 유사한 거 같고....'
서현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소라의 몸에는 정액이 말라붙어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어젯밤 섹스를 한 뒤 잠에 들었다가 지금 일어난 것이겠지.
'안에 그 남자가 있다...!'
당연히 그 대상은 유은일 것이고.
최악의 경우 그 유은도 알몸일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방 안을 살폈다.
"..!!!"
혹시나가 역시나.
침대 위에는 완전히 알몸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유은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정말 말 그대로 나신. 전라.
기사에다 기사국 부국장을 역임하고 있는그녀다. 당연히 남자의 알몸 정도는 본 적 있다.
아랫도리만 빼고.
"...."
미려하게 자리한 잔근육과 엄청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세 번째 다리.
분명 자고 있는 걸 텐데 왜 발기한 걸까. 혈액순환 탓인가.
설마 모든 남자들의 사이즈는 저런 건가?
그건 아닐 텐데.
남기사들이 하는 얘길 엿들었을 땐 10센티 전후라고 들었는데.
대체 뭘까 저 사이즈는.
유은의 물건을보자마자 오만가지 잡생각이 들었다.
"공주는 없고 당신 혼자 왔다는 건 은이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죠?"
방 입구 부근에서 멀뚱히 서 있는 베로니카의 뒤로 소라가 다가왔다.
"아...."
"공주가 알면 당연히 노발대발하면서 반대할 테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온 거잖아요?"
"...."
정곡.
베로니카의 생각을 정확히 맞혔다.
하긴.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공주와 붙어 지내던 베로니카가 갑자기 홀로, 그것도 시녀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그 다음날 찾아오다니. 딱 봐도 목적이 보인다.
"부인으로서 당연히 딴년이랑 섹스하는 게 좋을 리 없지만...이미 포기하기도 했고, 몇 명 더 늘어난다고 해서 티가 나는 것도 아니니 어쩔 수 없죠."
혼자서 결론을 내린 소라가 베로니카의 어깨를 턱 짚었다.
"자. 은이 깨워봐요. '시녀'씨. 어떤 식으로 깨워야 할 지는 곰곰히 생각해 보시고. 잘못하면 서현씨가 화낼지도 몰라요."
"그,그 전에...."
베로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확실한...거겠죠?"
"뭐가요?"
"이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독점교류권을...공주님께 맡긴다는...그 얘기.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전...."
결의에 찬 눈동자가 서현을 향했다.
"얼마든지 제 몸을 바칠 수 있습니다."
목소리는 아직도 조금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공주 루드밀라를 향한 충성과 나라에 대한 사랑.
가히 기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그 모습에 소라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거 가지고 거짓말 할 애는 아니니까 걱정 마요."
"...알...겠습니다."
"참, 이쪽에서도 설명을 제대로 해줘야겠죠? 시녀가 된다는 거에 대해. 그건...."
소라는 잠시 생각하다 곁에 있던서현을 스윽 보더니 그녀의 팔을 잡고 베로니카 쪽으로 끌었다.
"...사모님?"
"서현씨가 잘 알고 있을 테니, 배우도록 해요."
"...."
어제 일에 대한 사과 겸 배려였다.
유은의 시녀가 해야 할 일이라면 여러 가지 일이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밤시중. 당연히 이를 알려주다보면 서현 역시 유은에게 안기게 될 것이니 그녀에게 베로니카를 맡길 생각이었다.
"저는 샤워도 해야 하고 사랑이 만나서 할 얘기도 있고 하니까 서현씨가 수고 좀 해줘요."
"맡겨 주십시오. 사모님. '철저하게' 시녀의 예를 가르치겠습니다."
"아,아니...이왕이면 소라님이...."
"닥쳐 말단시녀주제에 어디서 사모님께 말대꾸야?"
"아,아직 아니다!"
"아니, 넌 이미 좆물받이야."
소라가킥 웃으며 방을 나서고, 서현은 강제로 베로니카의 팔을 잡아 유은이 있는 침대로 끌어왔다.
"뭐, 어차피 주인님의 눈에 든 이상 좆물받이 결말이라는 건 변치 않았겠지만, 넌 본인이 스스로 그리하겠다고 선언까지 했으니 이미 좆물받이인 거야. 알겠어?"
"...최소한 사람에 대한 예의 라ㅡ,"
뻐억 - !
서현은 베로니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녀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꺽...!"
기사국 부국장이자 국재(國材) 6위인 그녀가 순식간에 무력화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의? 야, 너 뭘 착각하고 있는 거야? 넌 그냥 말단 시녀, 좆물받이야. 주인님께서 원하시면 니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든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든 언제 어디서든 데려다가 다리 벌리고 마음껏 박아댈 수 있는 소유물이라고. 이게 보지구멍 주제에 어디서 자존심을 세워?"
"큭...!"
다짜고짜 공격에 이리도 심한 인격모욕이라니.
베로니카가 분노한 얼굴로 서현을 노려봤다.
능히 시선만으로 찢어죽일 수 있을 만한 매서운 표정이었지만, 서현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자, 사모님 말씀 들었지? 시녀로서 올바른 방법으로 주인님 깨우는 거야. 해봐."
"...."
베로니카는 부들부들 떨면서 서현을 노려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다 엎고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교류 독점권과는 영영 거리가 멀어질 것이고, 최악의 경우 그녀가 충성해 마지않는 공주마저 이 미친년의 마수에 걸려 시녀...아니 성노예로 바쳐질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아, 이거 교육이니까 틀릴 때마다 쳐맞는 거야. 알지?"
베로니카는 이를 뿌득 갈면서 유은 쪽으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