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28.재회, 재회.
전 남자친구.
전 약혼자.
대학시절부터 무려 5년간 사귀어왔고, 서로의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그러다 소라가 유은을 만나게 되어 뜨거운 밤을 보낸 뒤, 아파트 단지 앞 정문에서키스하다 들키고 말았다.
그 날로 관계는 파토.
파혼은 당연한 것이고 운현의 가족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유은이 나서 해결해 주곤 했지만 운현과 얽힌 일이 터질 때마다 그녀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유은과의 바람으로 인해 감정정리를 할 시간도 없이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았고, 외도로 인한 이별이 으례 그렇듯 두 사람의 끝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운현의 인생도 그 불편함에 한 몫 했다.
소라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이별을 선언했던 운현은 소라와 유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모험가로 입문. 꽤 많은 재산을 들여 장비까지 맞추고 증오를 태웠다.
그러다 그에게 항상 마음을 갖고 있던 유명 그룹의 손녀딸인 강세희의 계속되는 대시를 받고 마침내 모든 일(소라와 유은에게 복수하는 것)이 마무리 되면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 기쁘고도 착잡한 마음을, 세희는 직접 궁에 찾아와 소라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애틋한 사랑마저 운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니..
세희는 유은의 수작으로 인해 그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다시는 다른 남자의 손을 탈 수 없는 여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유은은 세희를 강제로 범하는 걸 영상으로 찍어 운현에게 보내 도발까지 했다.
이런 도발을 받고 참을 사람이 있을까.
평생, 10년을 넘게 그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던 여인을 강제로 빼앗기고 심지어 그 여인이 범해지는 걸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누구라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유은의 목을 따고 싶었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역부족. 결국 법의 조력을받기 위해 경찰서장을 넘어 변호사까지 찾아가게 되었고,
마침 그 변호사가 이미 유은의 여인이 된 '이소냐'였다.
이소냐의 소개로 강간 사건의 '전문가'를 찾아가게 되는데, 그 인간이 바로 증오해 마지않는 유은이었고, 거기서 그는 소냐에게 고간을 얻어 차임과 동시에 가게 아가씨와 이소냐를 상대로 한 성폭행 미수 및 성추행 혐의로 고발되었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서현의 수작질로 인해 성기 막대기까지 제거된 후였고, 그 허전함은 인생의 모든 걸 포기하기에 충분했다.
사랑했던 여인을 빼앗기고, 자신을 사랑해주던 여인도 빼앗기고, 나중에는 고환파열에 성기까지 제거된 것도모자라 성폭행 미수 및 성추행으로 고소까지 당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며 살육을 자행하다 결국 은소령에게 걸려 공개처형 당하고 말았다.
그 거의 모든 상황에 유은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고, 그 상황을 바로 옆에서 보는 소라로서는 항상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사망한 뒤 운현의 무덤에 찾아가 볼 면목이 없음에도 술대작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잊지도 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어떻게 보면 소라가 그를배신했기 때문에그의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마침내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것.
"운..현...이야?"
"그래...내가...바로...운..현...너의...연인...."
그렇게 죽었던 그가 대체 무슨 경로로 여기에 있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알고 있고,
그녀와 운현의 관계를 알고 있다.
그리고 유은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운현이 맞을 것이다.
전 남자친구이자 전 약혼자가...맞을 것이다.
"너의...사랑...."
소라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흉측한 얼굴, 몰골, 목소리...
생전 그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끝에 환생 마저도 저런 몰골이다.
그녀 자신으로 인해 이런 꼴이 된 것 같아 도저히 그를 볼 낯이 서지 않았다.
"잊지...않았다...너를...너의...말대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현은 살점이 군데군데 떨어진 두 팔을 좌우로 벌렸다.
"용서...하지...너의...모든 죄..."
마치 달려와 안기라는 듯이 소라를 응시한다.
"나는...관대하다...."
"...."
소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부들부들 떠는 몸.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재회인지라,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돌아와라...내게로...이..품으로...!!"
저벅.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운현이 천천히 걸어왔다.
더러우면서도 끔찍한 몰골이 된 두 발을 앞으로 앞으로 내딛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소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꾹 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죄책감.
미안함.
배덕감.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밀물처럼몰려왔다.
유은을 통해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워낙 충격적인 인생을 살다 가버려서인지 잊혀지질 않는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도 가시질 않는다.
어느덧 운현은 지척으로 다가왔다.
"나와...함께...놈을...유은을...죽이는...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그것은 작게 흐느끼던 소라의정신을 바짝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리고...함께...이 우주를...누비는...거다...!!"
거의 다 왔다.
두 사람의 간격은 채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운현은 마지막 한 걸음에 속도를 더해 소라를 껴안고자 했다.
지금껏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피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
소라는 피했다.
뒤로 걸음걸음 걸어가 그의 손짓을 피했다.
시선은 여전히 그를 마주치지 못한 채 내리깔고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소...라...?"
"......"
흉측한 얼굴이 의문으로 일그러졌다.
"......미안."
가까스로 열린 그녀의 입술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거부'를 나타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그래선 안 된다는 그런 말.
따로 덧붙인 말은 없었지만, 그녀의 심경과 입장이 전달되기에는 충분했다.
"...또냐."
운현이 두 팔을 내렸다.
흉측한 얼굴에 어두운 표정까지 섞여, 한 층 보기 힘든 몰골이 되었다.
"또...나를...배신하는...거냐...."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소라를 질타했다.
움찔 하고 몸을 떤 소라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미안...정말 미안...."
눈물 몇 방울을 떨구더니,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운현의 몰골을 직시했다.
살점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심지어 뼈 조차 군데군데 터져나가있다.
오히려 좀비 보다도 더 최악의 형상이다.
하지만 소라는 더 이상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자신으로 인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이렇게 망령이 되어 떠도는 자에 대한 정말 최소한의 예의.
물론 '환생'하였으니 망령은 아니었지만 소라가 그걸 알았다 해도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난 은이를 사랑해. 운현씨와 함께 할 수 없어."
"...."
울먹이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리고,
"은이를 죽이는 것도...용납할 수 없어."
운현이 몸을 떨었다.
분노.
극심한 분노.
지금 그를 구성하고 있는주체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바람 핀 주제에...약혼까지 해놓고 남한테 다리 벌리는 주제에...감히 두 번이나날 배신해?
애틋함은 증오로
사랑은 혐오로
욕망은 살의로.
끈적한 기운이 그의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으으...으으으....!...용서...용서못...해...!!!!"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바람이 분노하며 회전한다.
"운현...."
미안함이 남아 있는 목소리.
죄책감이남아 있는 목소리.
그의 무덤 앞에서 정리한 줄 알았으나, 막상 앞에 놓고나서 깨달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외면했을 뿐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오늘이야 말로,
지금 이곳이야 말로,
완전한 정리를 해야 할 때.
그녀는 음울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그에 감싸인 운현을 바라봤다.
분노를 토해내며, 모든 것을 죽여버리겠다는 그의 살기가 주변의 대지와 하늘, 그리고 둘을 둘러싼 몬스터들을 갉아 먹고 있다.
"미안해 운현씨...배신해서 미안해...잊지 말라고 해서 미안해...다음에 또 나 없는 곳에서 태어나거든...그땐...."
"소라아아아아!!!!!"
파앙 - !!
휘몰아치던 검은 바람이, 언제 그래냐는 듯 흩어졌다.
어두침침하게 내려앉아 있던 하늘마저 개운하게 개어졌다.
마치 소설속 이야기의 결말처럼, 최종보스의 사망씬처럼, 주변은 고요하고 웅장한 자연조차 숨을 죽였다.
오직 인간의 몸 하나 쓰러지는 소리와 꾹꾹 눌러참은 울음만이 조용히 울렸다.
"그냥 날 잊어...행복하게 살아..."
"소...라...."
가슴 한 쪽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회복도 되지 않는다.
분노의 힘으로 재생하려 해봐도, 되지 않는다.
죽음.
모든 행위의 결말이자 노선의 끝.
그것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또...인가...."
쓰러진 운현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또...배신당하고...."
눈꺼풀이 한 없이 무겁다.
"또...얻지 못하고...."
감각 따위 이제 사라졌다.
"또...이렇게...."
살아온 인생 만큼이나, 맺었던 끝 만큼이나 시야가 어둡다.
"죽는...건가...."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분노의 힘이 서서히 흩날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십만의 군세가 뿜어내던 기운도 하늘로 빨려가기 시작했다.
한 없는 상실감.
죽어가는 와중에 힘까지 빨려간다.
"원통..하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
스으으으.
수십만의 군세와, 죽어버린 운현에게서 나온 검은 기운은 사이한 소리를 울리며 허공 한 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일며, 기운을 빨린 몬스터들이 하나 둘 지면에 쓰러졌다.
"......"
상황 종료인가.
모든 게 끝났는가.
소라는 가만히 다가가 무릎 한 쪽을 꿇더니, 운현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나 한데 뭉치는 검은 기운과 드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좆같다 진짜...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