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화 〉27.커맨더.
불쾌함과 서먹함의 사이.
소라와 사랑의 관계는 딱 그 정도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불쾌함 쪽으로 추는 더 기울어 있을 것이다.
그냥 스쳐가는 여자도 아니고, 유은이 꽤나 공을 들이는 여인인 만큼,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대면하고 싶지 않다.
"일주일 뒤, 은이가 있는 세상으로 점프할 건데, 같이 갈생각 있어요?"
"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열린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소라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났어요. 좌표 특정도 완료했고, 게이트 여는 것도 4일이면 끝나죠. 남은 건 거기로 넘어가서 은이를 데려오는 것 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게 얼마만이야. 근 4개월인가."
웃기게도 유은과 함께했던 시간과, 유은이 사라져서 강제로 헤어져 있던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
바꿔말하면'유은'이라는 희대의 망나니 모험가가 이세상에 등장한 지 고작해야 8~9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사이 세상은 너무도 크게 변화했다.
국제적인 수호를 목적으로 움직이며 던전과 모험가를 관장하던 D10의 힘은 대폭 줄어든데다 아녜스라는 신생 회장이 등장하여 반쯤 독재기관이 되었고, 던전 선진국 중 하나인 일본은 두어차례의 큰 타격을 입으면서전반적인 국력이 수직하락했다.
특히 수도이자 가장 중요한 도시중 하나인 도쿄에 B급 던전이 생겼다. 던전 방어전에서는 꽤나 선방하여 도쿄 자체가 무너지는 등의 피해는 없었지만, 이후 그 던전의 역류현상 - 이라 쓰고 유은의 침략이라 읽는다 - 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피해를 입은데 더불어 하렘궁에게 도쿄의 일부, '도쿄 시티'를 넘겨주게 되었고, 한국군의 주둔을 허용하게 되어 큰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졌다.
나중에는 유은이 사라지고 난 뒤 괜히 하렘궁의 심기를 건드려서 원전폭격이라는 대재앙을 얻어 맞았고, 이후 소라의 스킬로 인한 방사능 정화를 받았다지만 이미 엄청난 경제적피해, 인명피해를 입은데다 국민의 정신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아 사실상 재기불능 식민지로 추락했다.
일본만 그런 꼬라지가 된 것이 아니라, 중국역시 비슷했다.
던전에 의한 게 아닌 순전히 하렘궁에 의한 일이라는 게 좀 다르지만.
중국은 유은이 없는 틈을 노려 하렘궁에 선전포고에 가까운 행위를 하였고, 심지어는 북한과 한국까지 함께 찜쪄먹으려는 아주 불쾌한 계획을 수립했다. 그 일환으로 만주지역에 있는 집단군을 동원한 것인데, 이는 가뜩이나 유은이 없어 신경이 곤두서 있는 궁을 제대로 건드린 꼴이 되었고, 결국 각성(?)한 임서현에 의해 수십만의 병사들이 보지니아의 씨를 받아 학살당했다.
이후 중국의 4대 직할시에서 한 달간 무차별로 인원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궁에 강탈당하여 지금도 실시간으로수만 명의 노예들이 징발되는 현실이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충분히 노답인데, 수십만의 인민군이 증발한 상황에 기타 소수민족이나야심을 품고 있는 군벌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아직 하나의 중국이지만 머지 않아 내전과 함께 분열될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
이렇게 동북아시아의 2개 축이 무너져내린다면,당연히 나머지 1국인 한국은 상대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비록 하렘궁을 두둔하는 행동으로 인해 전 세계적인 빈축을 사면서 무역제제까지 얻어맞고 있었지만, 덕분에 하렘궁의 우수한 기술(정확히는 흑흑이의)과 자원등을 제휴받아 특히 군사기술에 있어 점프에 가까운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핵무장을 갖추고 일본에 군을 주둔시키는 등의행적을 통해,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다지만 양차대전 이전의 제국주의처럼 열강의 입지를차츰 굳혀가고 있었고, 향후 지리적인 요건도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
만약 이 상황에서 중국이 분열된다면, 그 순간 북한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
핵무장까지 갖춘 한국으로서는 얼마든지 북진하여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고, 이에 대한 방해를 할 만한 국가는 그나마 러시아인데 러시아가 북한으로의 개입을 결정한다면 미국으로서는 한미관계가 어떻든지에 상관 없이 무조건 개입을 해야한다.
차라리 일본이 살아있어서 어느 정도 전진기지 및 방어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한반도를 버리고 일본에 자원과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군사기지화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도쿄 양란(도쿄 방어전, 도쿄역류사태)의 피해조차 복구를 못한 상황에 원자로 폭격까지 얻어맞았고, 그로 인한 증시폭락, 도미노 붕괴 등등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힘든 재앙의 연속이다.
결정적으로도쿄에는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다.
이를 모조리 해결하면서 중러 남하의 방어선 역할을 부여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자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본을 방어선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했고, 그렇다면 결국 한국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동북아에 개입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만, 하렘궁과 제휴를 맺고 있고 핵무장도 갖추게 된 한국인 만큼, 이전처럼 순순히 미국의 의도에 끌려갈 리는 미지수. 오히려 북진통일과 관련하여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미국을 동북아에서 몰아내고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면서 아예 동북아의 패권국으로 가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동북아에서 미국의 세력이 사라져서 좋고, 한국은 평범한(?) 지역강국의 위치에서 일본과 중국을 끌어내리고 나아가 고토회복까지 노려볼 수 있는 위치가 되었으니 좋다.
물론 고작해야 러시아+한국 이 된다 해서 미국을 몰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두 강대국의 세력균형을 좌우할 수 있는 카드를 손에 넣은데다 이전과는 달리 그걸 자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서 한국의 전망은 상당히 밝았다.
작년 동월의 상황에 비하면 거의 천재격변 수준.
이런 엄청난 변화들이 고작 1년도 안 된 사이에 모조리 일어났다면 쉬이 믿기겠는가.
'그녀석 오면 좀 놀라겠네.'
소라는 왠지 유은의 놀라는 얼굴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괜찮은 겁니까? 제가 가도."
사랑이 물었다.
그녀와 유은이 애인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부인은 소라와 유나, 그리고 소냐다. 그런데 빼박 불륜관계인 자신이 그런 곳에 가도 되는 것인지 강한 의문이 들었다.
"그 전에 가고 싶긴 해요? 나나 유나는 스킬로 꿰였다지만...당신은 아니잖아요.충분히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탈출?"
"그렇잖아요. 솔직히 별로 매력있는 애는 아니고.성격 파탄자라는 말이 부족한 인간인데 굳이 그놈이어야 하나 하는 거죠."
"...."
확실히 그렇다.
한사랑은 유은의 시녀도 아니고, 그의 스킬로 묶인 건 아무것도 없다.
완벽한 자유인.
그녀의 그럴만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유은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편하다.
고작해야 섹스 몇 번 한 게 다인 관계 아닌가?
처녀라서 첫 남자에게 집착하게 된다고?
그것도 정도가 있지. 그 첫 남자가 인간말종이라면 있던 정도 뚝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사랑은 그게 뭐냐는 식으로 붙어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광경.
"음...."
한사랑은 고민에 빠진 채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고, 그런 관점에서 유은의 존재가 득이 된다지만, 그래도 유은의 행적을 생각하면 너무 심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녀석, 앞으로도 여자 무한대로 늘려댈 텐데, 그거 감당할 자신 있어요? 텃세 부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당신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뭐 솔직히...저도 좀 의문이긴 합니다만...아직까진 가고 싶은 거 같아요. 그의 옆에."
"...."
그녀의 대답에 소라는 다소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정말 진심으로 이해 안 된다는 표정.
"그리고...."
한사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소라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 사람이 절 놔주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건...."
너무나 정답에 가까운 말이었기 때문.
"...말하고 보니 너무 염치없네요."
한사랑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내되는 사람에게 그래도 아직까진 남편을 만나고 싶다니.
보통이라면 도끼로 머리찍혀도 할 말 없다.
'진짜 비정상이긴 하네.'
그렇기에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상황.
하지만 그 의문과는 별개로 묘하게 유은에게 끌리고 있었다.
이유 같은 건 그녀도 모른다.
이것이 첫 남자에 대한 집착일 뿐인 건지, 아니면 그냥 일종의 오해인 건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그녀의 취향이 유은 같은 인간인 건지.
아무튼 곁에 있고 싶다.
그리고 얼굴을 보고 싶다.
4개월 만의 재회.
비록 부인들도 함께 있는 그곳에서 품에 안긴다거나 같이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등의 꽁냥거림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
'나 역시 히든직업을 얻고 스탯을 열었다는 걸 알게 되면...무슨 표정을 지을까?'
괜시리 궁금해지는 유은의 얼굴.
그녀가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뭐 염치 없긴 한데. 어쩌겠어요. 그놈한테 꿰인 내 잘못이지. 아니, 아니지 이거 다 스킬 때문이니까 그놈 잘못이네. 이 개새끼."
소라는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유은을 욕했다.
진심도 어느 정도 담겨 있었지만, 대충 빨리 보고 싶다는 말 정도로 해석되었다.
"어쟀든 알았어요. 가고 싶다는 거죠? 말해둘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군에 미리 말도 해두고."
"고마워요. 이렇게 배려해줘서...."
"...."
소라는 잠시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 이미지 엄청바뀐 거 알아요?"
"네?"
그녀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땐 웬 미친년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천상 여자네."
"...."
"역시 남자든 여자든 한 번 이성맛을 보면 확 변해."
"그건 무슨...."
"욕은 아니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요."
그 말을 끝으로 소라는 문을 나섰다.
"후...."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
한사랑이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리고 이어지는 중얼거림.
"변하기는 했어. 내가."
그녀가 생각해도 유은을 만나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가치관도, 중요시 하는 것도, 모조리 바뀌었다.
이걸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르게 성장한 걸까.
온갖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은 몸을 뉘었다.
+++
"오늘 이 자리를 통해, 한사랑 중령을 '대령'으로 임명합니다."
짝짝짝짝.
삼일 뒤.
병실에서 나온 한사랑은 마침내 대령을 달았다.
본래 이렇게 급하게 진행할 만큼 상황이 급박한 건 아니었지만, 던전 내부에서 일어난 암살사건 등 그녀의 진급을 방해하고 시기하는 이들이 많아 또다시 특진으로 처리하였다.
여기에는 무려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했고, 실제로 한사랑을 대령으로 임명하는 자리에 얼굴을 비추었다.
"축하합니다. 한사랑 대령."
"감사합니다만 제겐 너무 과분한 계급입니다."
"이미 충분히 잘 수행하고 계십니다."
대통령은 그렇게그녀를 축하해주며 슬쩍 운을 띄웠다.
"대령까지 다셨는데, 슬슬 청와대에 한 번 오실 때가 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어떤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그녀의 말에 대통령은 그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