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26.분노
"...뭐?"
시합종료를 선언하고 승자를 외쳐야 할 베로니카조차 얼어붙었다.
누가봐도 초짜, 아니 그 이전에 싸움을 논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관련 없어 보이는 평범한 여인인데 그런 자가 휘두른 칼에 머리가 터져버렸다.
칼이 아닌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도 그렇게 될까 말까 할 텐데, 고작 검면으로 쳤다고 이런식이 되다니.
연무장을 중심으로 사방이 침묵에 잠겨들었다.
라르나르 진영도,
아마르 진영도,
공주측도,
그리고 이번 기사전을 참관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몰려온 귀족들 및 관중들 측도 모두 침묵에 잠겼다.
"히이익?!!"
그렇게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경악의 중심에 있는 검은머리 여인이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피범벅이된 몸을 내려 다보며 와들와들 떠는 모습이 영락없는 마을처녀.
베로니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검은머리 여인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이겼어...!"
라르나르는 진짜로 여인들의 실력이 먹힌다는 것에 감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안 돼!!"
반면 아마르측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항의.
필시 저여자가 뭔가 비겁한 수를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각.
베로니카가 판단했을 땐 그저 엄청난 힘이 실린 검면에 맞아 머리가 터진 것에 불과했다.
속임수라던가 비겁한 수라던가 하는 게 개입했을 여지는 전무.
결국 첫 번째 대결은 라르나르측의 승리가 되었다.
"수고했어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있는 여인에게 시에스타가 다가왔다.
얼굴과 몸 이곳저곳에 묻은 끈적한 액체들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주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괜찮습니까?"
베로니카도 다가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첫 살인인 것 같은데, 심한 트라우마가 될 수 있기에 꽤나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번 아마르측의 기사는 베로니카도 얼굴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의 실력자.
그런 그를일격에 죽였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인재다.
언젠가 살살 꼬셔볼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가 마음을 추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네...네..."
여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기쁨에 찬 라르나르가 그녀를 안아주는 모습이 포착됐다.
"...어떻게 된 거지?"
아마르 자작은 갑작스레 느껴지기 시작한 불안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다 뜻대로 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대체 저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아니, 누군지는 알고 있다.
라르나르 남작령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흔해빠진 처녀로 살다가 불과 일주일쯤 전에 영도(領都)에 불려가 기사작위를 수여 받았다.
그 전까지는 검은 고사하고농기구 한 번 만져본 적 없는 여인이다.
한 마디로 초보중에 왕초보.
그런 여자가 자신의 자랑스런 기사를 일격에 죽여버렸다.
이게 말이 되는가.
숨어 지내던 고수?
그것도 정도가 있지.
그녀는 외견상 20세가 될까말까인데, 은거고수들은 보통 60~70세 이상의 노인이다.
그 나이에 익스퍼트에 올라 젊어졌다 해도 40~50대 정도의 모습으로 보이는 게 보통이고,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환골탈태를 통해 20대의 모습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라면 부모가 아직까지 존재할 리가 없고, 있더라도 거의 다 죽어가는 나이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멀쩡.
그녀의 부모님은 지금도 해당 마을에 남아 영지의 보조를 받으며 나름 잘 살고 있다.
"밀레드가...단숨에...!"
기사들도 믿지 못하는 얼굴로 연무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밀레드의 경지는 소드 메이저 미들. 몸과 무기는 물론이고 옷에도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경지로서, 일반인과는 절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영지의 주요 전력이다.
그런데 한 방.
그것도 겁에 질려 아무렇게나 휘두른 검에 맞아그자리에서 즉사했다.
"다음 순서 나오십시오."
뜻 밖의 사태에 모두가 신음할 때,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전이 시작하기 전 까지만 해도 모두가 유들유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지금은 온통 긴장 속.
만에 하나라도 저런 여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땐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승패?
지금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을수도 있는데.
"뭐,뭣들 하는 거야! 다음 순서 나가라잖아!!"
괜한 불안감에 아마르 자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사태를 지켜보고 싶은 것이다.
"...내가 나가지."
그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과묵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거운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멜 아카드'라는 이름의 준남작으로, 아마르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으며 실력은 영지 2순위, '소드 메이저 라이징'의 경지였다.
그가 움직이자 기사들, 그리고 저편의 라르나르 진영과 사방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레드도 강자이지만, 로멜쯤 되면 이미 국가의 인명록에 기록되어소속,작위와는 별개로 대우를 받는다.
그런 존재가 두 번째 기사전에 출전하는 것이다.
"벌써...말입니까?"
"위험하거든. 이런 분위기는."
30세 전후로 보이지만 실상 40대 후반인 그는 꽤나 많은 실전경험을 갖고 있었다.
"타파해야 한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승리로서 끌어올린다.
그것이 그의 전략.
비록 예기치 못한사태로 인해 사기가 떨어졌지만 그렇다면 끌어 올리면 그만이다.
마침 라르나르측엔 그를 상대할 만한 기사가 없다.
그나마 로이드가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자리를 비웠고, 방금 전의 여인이라 해도 그런 하찮은 멘탈로는 경험 많고 경계심 많은 그를 상대할 순 없었다.
물론 유은으로 인해 익스퍼트급의 기사가 양산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착오를 하지 않았겠지만, 그가 가진 상식과 정보로는 최상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그가 연무장 중앙에 발을 올렸을 때, 라르나르측에서도 기사가 나왔다.
"호이!"
"...."
건방지게 자작을 두들겨 패고 모른척 한 것도 모자라 공주에게 반말까지 지껄이는 희대의 망나니무개념, 유은이었다.
"너 꽤 강하다면서? 그래서 내가 나왔어."
유은은 친근하게 손을 접었다 펴면서 깐족거렸다.
"...가만히좀 있으십시오."
베로니카가 한 마디 하자 그제서야 풀죽은 강아지처럼 '힝'하며 손을 내린다.
도무지 뭐 하는 인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너 로이드랑 비슷한 실력이라며? 참고로 로이드는 나랑 마지막으로 싸울 때 익스퍼트로 돌파했거든. 그거 알아?"
"흥. 허언증 환자로군."
"허언증이라니. 사실인데. 아무튼 그 로이드는 내 사랑스런 부인인 유나씨에게 왕창 두들겨 맞았단 말씀. 지금도 찾아보면 멍든 자국이 있을 거야 아마. 엄청 아프다고."
딱히 쓸모 있는 말이 아닌데도 쉴 새 없이 떠들고 있다.
"너 같은 놈이 기사로 출전한걸 보면 우리가아니라도 라이젠 영지는 몰락할 듯 싶구나."
"뭐래.로이드도 못 이기는 게. 참고로 로이드는 나한테 한 방이었거든. 넌...0.1방? 아니지. 원래 로이드도 0.0000001방도 안 되는 놈이었으니까넌...."
"시작하시죠."
베로니카가 유은의 말을 끊고 시작을 선언했다.
들어주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계속 듣자니 아무 영양가 없는 말이다.
"감히자작님을 해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로멜이멋드러지게 검을 뽑고 달려들었다.
"오오오."
그러자 관람하고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 미약한 환호성이 튀어 나왔다.
개중에 몇몇은 검술에 관심이 있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쭉 뺀 채로열심히 그의 모습을 지켜봤다.
"꽤 인기 있잖아? 솔로부대들이 싫어하겠는걸. 물론 난 아냐. 난 솔로 이전에 남자라는 것 자체를 싫어하니까."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 로멜.
그러나 유은은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날카로운 기세에 꿰뚫려 폭사.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다.
쐐애액!!
"죽어라아!!"
공간마저 뚫어버릴 듯한 찌르기.
그리고 그것은 유은의 미간까지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즉사.
벌써 몇몇의 귀족은 로멜의 승리를 확신하고 와인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찰나.
짜악 - !
로멜의얼굴이 홱 돌아가더니 그의 몸도 함께 딸려 저만치로 날아가 처박혔다.
꽤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무장을 박살낸 로멜의 몸체.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중간 정도의 부상.
"아 모기가...."
그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유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아니 현대에서도 모기땜에 짜증났는데 여기서도 모기가 판치네. 훠이~!"
대충 차려입은 반바지에 스윽 손바닥을 닦은 그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멜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왜 그러고 있냐?"
"...이자식!!"
뺨을 맞았다.
검에 찔린 것도 아니고, 베인 것도 아니고, 뺨을 맞았다.
이런 수치가 있을까.
로멜이 당장에 일어나 다시 검을 겨누었다.
"아!"
그러다 갑자기 유은이 손뼉을 치며 뭔가를 깨달은 듯한얼굴을 했다.
"실수했다...저기 베로니카?"
"...뭡니까."
"지금이라도 리스트 고칠 수 있나? 빼먹은 게 있는데...하아. 나라는 인간이 이런 실수를."
"당연히 안됩니다."
"으으...."
생명을 걸고 기사전을 치르는데 당당히 한눈을 팔고 있다.
이런 모욕이 또 있을까.
로멜이 발끈하려던 그때, 유은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너네들 꽤 잘나가는 애들이잖아?"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려고 저런 포석을 까는 걸까.
"저 뚱땡이는 말할 것도 없고, 너희들도 기사니까 나름 잘 살겠지. 그럼 당연히 부인이나 애인도 이쁠거고. 그렇지? 하아...그걸 리스트에 올렸어야 했는데...그래야 쉽게쉽게 뺏을 수 있는 건데."
"...."
베로니카는 뭐 이런 쓰레기가 다 있냐는 눈으로 유은을 쳐다보고 로멜은 대노했다.
"너도 부인이 있겠지? 뭐 어쨌든 여기서 니가 죽으면 과부가 되는 거니까 리스트에 없더라도 내가 데려가도 상관 없겠지."
"이놈!!!"
"아, 혹시 여기 와 있나?"
유은은 대놓고 아마르쪽을 훑어봤다.
그 모습에 로멜의 퓨즈가 나갔다..
평소 과묵하단 평을 많이 받는 그였지만, 지금 만큼은 극대노 할수밖에 없었다.
감히 가족을 언급하다니.
이런 쓰레기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으아아아아아!!!!"
다친 몸을 이끌고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
그 광폭한 패기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며 인공으로 만든 구조물등이 바사삭 부서지기 시작했다.
비록 미약한 수준이긴 하지만 이대로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분명 근방의 모든 것이 재가 될 것이다.
"흐암...넘나 약하다. 나한테 아내를 바치겠다는 거지? 고마워. 맛있게 잘 먹을게. 아, 혹시 딸도 있나?"
"죽어어어어!!!"
필사의 의지를 담아 가하는 검격은 그야말로 로멜의 모든 것을 담은 정수.
마치 세상의 모든 기운이 집약된 것처럼 보기만 해도 전신이 가루가되어 흩날릴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건 약자의 시선일 뿐.
유은에겐 아무런 해당사항이 없었다.
"뒷 순서도 있으니까 이번엔 그냥 보내줄게."
유은이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방심한 채로 죽어라!! 네놈의 시체는 내가 반드시!! 개한테 던져 ㅡ,"
팍!!
"아 모기가 또."
"...."
이번에도 터졌다.
허무하게.
연무장 전체를 떨게했떤 맹렬한 기세도 언제 그랬냐는 듯 소멸하고 없었다.
풀썩.
첫번째 기사전의 밀레드가 그랬듯, 머리 없는 시체가 무릎을 꿇고 옆으로 쓰러졌다.
"와. 진짜 약하네. 생각보다 100만배는 더 약한듯. 나름 강한 기사라면서 이래도 되는 거야? 너무 실망스럽잖아."
유은이 피묻은 손을 탈탈 털었다.
익스퍼트에 거의 근접한 기사를 죽였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모습.
그의 말마따나 마치 모기를 잡은 정도의 표정이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전율에 휩싸였다.
비록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무려 라이징의 기사.
영지전의 세계에서는 한 두명만 있어도 전쟁 그 자체를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며, 국가끼리의 전쟁에서도 주력으로 활용되어 전술로 전략을 깨부수는 것도 어느정도 가능한, 말 그대로 엄청난 전력이다.
그런데유은에겐 고작해야 모기 수준.
너무도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연무장은 다시 한 번 침묵과 경악에 빠졌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유나가 유일했다.
유은의 강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시에스타조차 식은땀을 흘리며 놀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의 놀라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특히 가까이에 있던 베로니카의 놀라움은 더했다.
그녀또한 타고난 무재를 바탕으로 익스퍼트에 오른 국재(國材)로서, 왕실에 대한 충성심 만큼이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은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로멜이 그의 품으로 들어온 순간, 좌우로 벌렸던 양팔을 안으로 모았다는 정도는 알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어? 하는 순간에 이미 유은의 손뼉은 마주쳐 있었고 로멜의 머리는 터졌다.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