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26.분노
어디 감히 걸어다니지도 못할 것 같은 거대돼지가 유나에게 눈독을 들인단말인가?
돼지라면 돼지답게 땅바닥에 앉아서 밥이나 처먹으면 될것을.
"저자식죽이자."
"지,진정하세요 공주님."
그 성격 급한 베로니카가 말릴 정도로 지금의 공주는 제정신을 잃고 있었다.
"고작 의혹 만으로 그를 처벌할 수 없다 하신 건 공주님이셨잖습니까."
"...쯧 괜히 말했어."
"아니...."
대체 뺨이 뭐길래 이렇게 홀릭이 됐을까.
베로니카가 진지하게 뺨때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거대돼지에게 유은이 다가갔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꽤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응? 뭐냐 네놈은."
다가오는 유은을향해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젖는 아마르 자작과, 그런 그를 보호하듯 검에 손을 가져가는 기사들.
유은은 그 모두를 같잖게 여기며 노크하듯 허공에 손을튕겼다.
팡!
"꺽...?!"
어마어마하게 나와있던 아마르 자작의 배가 심각하게 출렁거리더니 혐오스런 입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액체가 튀어 나왔다.
"꾸엑...우웩!"
"자작님!"
"아 미안. 실수."
쿡쿡거리며 명백한 비웃음을 날리는 주제에 실수라면서 뒷머리를 긁어댄다.
자작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만! 지금 뭐 하는 거죠?"
유은과 기사들이 충돌하기 직전, 공주와 기사들이 달려왔다.
"공식적인 기사전이 시작되기 전에 제 앞에서 검을 뽑는 건 반역행위로 간주합니다. 알겠어요?"
"아,아니...하지만...."
기사들이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조아렸다.
자작쯤 된다면 상황을 설명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일개 기사. 감히 공주에게 말대꾸란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꾸억....!"
공주는 아직도 혐오스런 액체를 바닥에 쏟아내고 있는 자작을 흘겨봤다.
명백한 경멸이 서린 그녀의 눈빛을 본 기사들은 뿌득 이를 갈았다.
"1시간 뒤에 기사전을 시작하겠어요."
"아,아니 그렇게 일찍...말입니까?"
본래라면 기사전을 치르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도 할 일이 꽤 있다.
대상자들끼리 서로 리스트를 교환하여 대조도 해보고, 추가로 가감할 일이 있다면 그것도 의논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1시간으로는 택도 없는 것.
게다가 지금 아마르 자작은 유은의 공격을 받은 상태가 아닌가.
"...공...정하신 공주전하...부디조금만 더 시간을...."
"오오. 일개 기사나부랭이가 감히 공주에게 요청도 하네. 너 권위가 땅에 떨어졌구나."
막 안 된다고 말하려던 공주가 유은의 말에 팍 인상을 찡그렸다.
일개 기사나부랭이라니?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니?
"...너나 잘하세요."
그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용병 주제에...공주에게 찍찍 반말이나 해대는 주제에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 정도는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뭐라 한다니...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 아닌가.
"나는 항상 잘 하고 있는데."
"하...."
한숨도 안 나온다.
대체 어디서 이런 인간이 튀어나왔을꼬.
유나의 남편만 아니었으면 진작에목을 베는 건데.
공주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거...대체 뭐였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유은의 노크(?)에 주목했다.
성격이야 어차피 답이 없으니 실력에 주목하는 것이다.
"아까 그건 뭐였죠?"
"뭐가?"
"허공을 때렸을 뿐인데 자작이...."
스윽 하고 옆을 바라보자, 기사들의 토닥임을 받으며 아직도 우웩거리는 자작이 있다.
먼 거리에서, 그것도 살짝 두들겼을 뿐인데 저정도 충격을 받다니.
물론 피를 토한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협이 되는 기술임에는 틀림없다.
"아 그거? 별 거 아냐."
"?"
유은이 다시 한 번 허공에 노크했다.
물론 이번에도 대상은 아마르 자작.
"푸웩!!"
거대한 공 같은 뱃살이퉁 하고 말려 들어가더니, 육중한 몸체가 멀리 튕겨나갔다.
"!!!"
그를 수행하던 기사가 놀람과 동시에 분노하고, 공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아마르가 맘에 안든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공격을 해버리면 제제할 수밖에 없다.
"...공격은 하지 말아요. 아직 기사전은시작도 안 했다구요."
"응. 아무튼 엄청 강하고 쎄게 허공을 두들기면 돼. 충격파로 저 돼지를 날려보내는 거지. 이 정도는 유나씨도 할 수 있을걸?"
"...."
전혀 강해보이지 않았는데.
그런 기술을 할 수 있다면 필시 보통 실력은 아니리라.
공주는 유은에 대한 내면의 평가를 살짝 수정했다.
"공주전하!!"
아마르의 기사들이 잔뜩 분노해서 달려왔다.
"저 자를 왜 가만 두시는 것입니까!!"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아까완 달리 적극적으로 공주에게 항의했다.
눈 앞에서 비겁한 공격을 목격하고도 별 조치를 취하지 않다니. 너무한 처사다.
"기사전이 시작하기 전 무기를 뽑으면 반역으로 간주한다하지 않으셨습니까!"
"...."
공주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자, 유은이 이죽거렸다.
"응? 난 아무짓 안 했는데? 얼마나 뚱뚱하면 걸어가다 갑자기 튕겨나가냐. 그러게 적당히 좀 처먹지 그랬어."
"이자식!!!"
"뭐 임마? 증거 있어? 내가 했다는 증거 있냐고."
"아니 이...!"
증인이라면 넘치지만 증거따위 있을 리가 없다.
"지가 갑자기 구역질하면서 뒤로 굴러간 걸 왜 나한테 지랄이실까."
유은이 킥킥대며 기사들을 놀려대자, 그들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공주전하!!"
"후...당신, 유나씨의 반의반의반이라도 좀 닮지 그래요? 부부라면서요? 어쩜 이렇게 다를까."
결국 공주도 한 소리 했다.
그래봤자 별 거 아니었지만.
이런 말 쯤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들었던 말이다.
"유나씨가 날 닮으면 큰일나지."
"아니...당신이 좀 닮으라고요."
"사람에겐 각자의 개성이 있는 법이란다."
"하...."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답이 없는 인간.
도대체 어떻게 유나씨를 꼬셔서 결혼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품위도 없고 개념도 없고 상식도 없다.
오죽하면 공주의 기사들조차 유은을 포기했을까.
이젠 그가 반말을 찍찍 내뱉어도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됐으니까, 저쪽에 가 있으세요. 방해하지 말고."
"방해라니. 난 그냥 정찰온 건데. 정찰."
공주의 말에도 유은은 능글맞게 아마르진영을 쭈욱 훑어봤다.
마침 아마르 자작도 유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지 배를 붙잡고 있긴 했지만.
뿌득.
아마르 자작가의 기사들은 왠지 친해보이는 공주와 유은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이를 갈며 물러났다.
"네놈...! 반드시 죽여주마."
"응? 뭐라고? 죽 만들어 준다고? 이거 고마워라. 난 한우만 먹는다. 참고로 양송이는 안 먹어. 알았지? 간 제대로 맞춰야 돼."
"...."
기사들이 고개를 저으며 자작이 있는 쪽으로걸어갔다.
.
.
시간이흘러 드디어 기사전.
"사전에 설명했던 대로, 각 10명의 기사들이 1대1 승부를 벌여 더 많은 승리를 따낸 영지가 승리하게 돼요. 만약 양측의 승리수가 동일할 경우 대표로 1명씩을 뽑아 승패를 가릅니다. 승패는 누군가가 항복을 하거나, 누가봐도 전투불능이 되었을 경우, 혹은 사망했을 경우 판별됩니다. 아시겠나요?"
라르나르와 아마르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기사분들 앞으로 나오세요."
공주의 말에 따라 20명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먼저 아마르측은 전원 남자.
라르나르에 비해 월등한 기사전력을 보유하고 있어서인지, 한 명 한 명이대단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감은 덤.
보고 있자면 절로 주죽들정도라 라르나르는 괜한 불안감에 손을 떨었다.
"휘유~ 기사들이라기 보단...시녀들 아닌가?"
"듣자하니 마을처녀들 데려다가 수련을 시켰다던데."
"하하하하! 남자도 아니고 여자를 데려다 수련을 시켰다고?"
"어차피 제대로 키울 수 없을 테니 우리의 방심이라도 노리려 한 게 아니겠나."
"그렇겠군."
라르나르측의 기사들은 유은을 제외하면 9명 전원 여자였다.
시에스타와 유나, 그리고 기타 7명의 여인들.
아마르측의 기사들은잔뜩비웃었고, 공주와 기사들은 안쓰러움과 걱정을 마음에 품었다.
"저놈도 나왔네."
"저건 내가 맡도록 하지."
"괜찮겠냐? 이왕이면 여자를 상대해 줘야 하지 않겠어?"
쉴 세 없이 잡담을 늘어놓는 모습에 공주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제제를 가하진 않았다.
"흐흐. 드디어 라르나르가 나의 것이 되는구나...그리고 저 여자들도...!"
아마르 자작은 라르나르쪽의 여성진을 보며 침을 흘렸다.
나름 작게 말한답시고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기사들과 유나들은 물론이고 공주조차 똑똑히 들었다.
'더러운 놈.'
모두가 욕하며 찌릿한 시선을 보냈으나,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자작은 계속해서 헤벌레한 얼굴로 훑어봤다.
공주가 뒤로 물러나자, 베로니카가 앞으로 나왔다.
"첫 번째 기사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순서를 제외한 기사들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녀의 말에 따라 첫 번째 순서인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각 진영으로 돌아갔다.
와들와들.
라르나르측의기사는 딱 봐도 실전이 처음인 초짜.
보는 사람이 안쓰럽게 떨고 있는 그녀는 마을 처녀들 중 처음으로 유은에게 안겼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었다.
"히야~ 귀여운 아가씨, 그냥 항복하는 게 어때? 응?"
아마르측의 기사가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기댄 채 이죽거렸다.
"아으...아,안 돼요...."
여인은 공포 가운데서도 거절했다.
유은의 시녀가 된 이상 항복따위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으래애? 그럼 이 몸이 좀 괴롭혀도 너무 원망하지 마려무나."
"...."
명백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기사.
베로니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거기까지.
딱히 직접적인 개입을 하진 않았고, 오히려 시합시작을 선언해 버렸다.
"난 우는 여자가 제일 좋더라!!!"
타앙!
반쯤 광기에 물든 얼굴로 그가 튀어 나왔다.
서 있던 바닥이 움푹 패이는 걸로 보아 상당한 각력!
"히익!"
검은머리의 여인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눈을 감아버렸다.
"기사가 눈을 감으면 쓰나!!"
어느덧 지척까지다가온 아마르측의 기사가 크게 웃으며 여인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보아하니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 여자고, 설령 휘두른다 쳐도 피해 따윈 없을 것이다 ㅡ,
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꺄아악!! 싫어어어어엇!!!!"
겁에 질린 여인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검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퍼엉 - !
호기롭게 손을 뻗던 기사의 머리가 끔찍하게 터져나갔다.
날이 아닌 검면에 맞은 탓이었다.
"히...이...잇...!"
머리가 터지면서 각종 피와 뇌수 따위가 여인에게 달라 붙었고, 이어 목 없는 시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풀썩.
"...?"
그 광경.
베로니카를 위시로 한공주의 기사들과, 아마르 진영의 모두가 눈을 뿌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