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던전은 나만의 기회 (303)화 (302/517)



〈 303화 〉26.분노

공주는 아직도 멍한 얼굴로 유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을 뽑지도, 일어나지도, 욕을 하지도, 심지어 뺨에 댄 손을내리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멍.




"감히!!"


스릉!

먼저 행동을 보인 건 기사들.
미처 반응하지 못했던 죄를 갚겠다는 듯이 곧바로 검을 뽑아들었다.
단단하면서도 연성이 좋은 검신이 샹들리에의 빛을반사하며 번쩍거렸다.

"베겠습니다!"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유나를 향해 날아오는 검들.
당장이라도 그녀를 토막낼 것처럼 매서운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


닿기 일보직전.
조금만 더 전진하면 될  같은 순간에 공주가 외쳤다.

"?"


기사들이 멈칫하고, 공주를 더 패려 했던 유나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이 공주는 일어나 무릎 부근을 툭툭 털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네요 서로. 정인 앞에서 그런 말을    실례죠."

왜인지 본인 잘못이라고 쿨하게 인정한다.

"그냥  말 자체가 문제인데."
"맞아요. 제가 사과드릴게요."
"공주님!!"

 자리에 있는 모두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특히 몇년간 옆에서 그녀를 보아온 기사들은 더욱 놀랐다.


그녀가 비록 기사도를 중시하고 매너와 품위를 갖춘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뺨까지 얻어맞고 되려 사과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인격자는 세상에 얼마 없다. 하물며 만인의 떠받듬을 받는 공주라면 오죽할까.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깔끔하게 고개까지 숙여보였다.

"다음부터는 언행에 주의하도록 할게요."
"아...그래요...."

이쯤되니 유나도 김이 샐 수밖에.
팍 하고 치솟던 분노가 순식간에 갈곳을 잃어버렸다.

"응? 뭐야?"

유은도 어리둥절.

"그쪽 남성분께도 사과드릴게요."
"어...."


공주는 이후로도 두어번 정도 사과를 하더니 기사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지. 혹시 당신 뭐 했어요?"


유은에겐 호감도라는 시스템이 있다.
공주의 행동이 너무 이상하여 혹시나 하고 물어봤지만 역시 그건 아닌 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했습니다만."
"근데 왜 저래요?"
"원래 저런 성격인 게 아닐까요."

유나와 유은이 서로 얘기를 나눌 때, 라르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영지가 통째로 날아갈 뻔 했는데, 어째선지 공주가 그냥 넘어갔다.
그야말로 천운이자 성은이다.

'저 여자도 정상이 아니었어....'


라르나르는 아직도 달달달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며 묘한 신음을 냈다.

유은 일행중에서는(그래봤자 두명이지만) 그래도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대차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정상은 개뿔. 자국 공주의 뺨을 사정없이 갈겨대는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 본 건 물론이고 각국의 역사와 여러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다.

"그나저나대신 칼을 막아준 것도 모자라 때문에 이렇게 발끈해 주시다니. 싸랑의 키스를 해드리죠~."


유은이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앞으로 내민 두 팔은 덤.
몇 번이고 몸을 섞었던 사이였지만, 유나는 왠지 저 얼굴이 심히 짜증났다.


"...꺼져."





+++



"공주님!"

한편 방 밖으로 나온 공주와 기사들.
공주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시선으로 마냥 걷고 있었고, 그 뒤를기사들이 따라 붙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런 대역죄인을 그냥 용서하신 것도 모자라 심지어 사과까지 하시다니요!!"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저 건방진 년놈들을 모조리 죽여야 해요!!"


여자를 죽여야 한다, 건방진 손의 가죽을 벗겨내고 소금물에 절여야 한다, 사지를 잘라 평생 불구로 살게 해야 한다 등등 듣기만 해도 몸이 떨리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 기사들.
그러나 공주는 듣는건지 아니 듣는 건지 반응이 없었다.


"잡겠습니다!!"

결국 성격 급한 베로니카가 공주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걱정이 잔뜩 섞인 그녀의 말에, 가까스로 공주의 입이 열렸다.

"나...."
"네?"
"...이야."
"뭐라구요?"


기사들은 귀를 의심했다.
아니, 눈도 의심했다.

"처음이야...날...이렇게 대한 건...!!"

분명 분노로 얼룩져 있어야 할 공주의 얼굴이, 때아닌 뜨거움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
"아무도 날 이렇게 대하지 못했는데...당당하던 남성분도  앞에선 고개를 숙일 뿐이었는데...저 여성분은 너무도 단호하고 늠름했어요...."
"...."

일동침묵.
침묵을 넘어서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대체...저 열띤 얼굴은 뭐란 말인가.
숱한 귀족 남자들과 자제들이 다가와도 눈길 하나 주지 않던 사람이, 뺨 한 대 맞았다고 이렇게 붉은 얼굴을 하고 있다니.
사람들이 알면 기겁할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알면 통탄을 금치 못하겠지.


"저...혹시나 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흥. 알아요. 동성애는 불법이라는 거."

그래도 상식까지 무너지진 않았구나 하며 간신히 안심했다.
귀족들이야 암암리에 동성의 첩을 거느린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왕실의 여인까지 그래서는 안 되는법.
하물며 기사도의 꽃이라고까지 불리는 그녀라면 더더욱 해선 안 되었다.


"아마 실력이 뛰어난 부부용병쯤 되겠죠? 잘 포섭해 봐야겠어요."

공주는 유나를 기사국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실력은 이미 본 거나 마찬가지. 베로니카의 검을 손등으로 막아낸 시점에서 이미 합격선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아마르 자작이 탐낼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베로니카의 걱정에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 변태라면 그럴법 하지만 명분이 없는걸요."
"명분이라면 애초에 이번 영지전 자체가 오류입니다."
"이미 리스트 제출도 끝난 상태에요. 양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리스트가 추가될 일은 없어요. 게다가,용병이라면 남작과 군신계약을 맺지도 않았을 테니 더더욱 불가능하죠."
말을 마친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만약그 모든 걸 무시하고 같잖은수를 써 우리 용병씨를 탐낸다면...."
"'우리' 용병이요?"
"그 뒤뚱뒤뚱한 몸매를 토막토막 베어내서 꼬치구이를 만들 거예요."

섬뜩한 소리.

대체 뺨대림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마음을 빼앗긴 걸까.
주변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어이없는 얼굴을 했으나  분위기에도 공주는 끄떡 없었다.

"맛없을 테니 그건 하지 말죠."
"어머, 먹을 거예요?"
"설마요. 들개한테 던져주려고 했습니다만, 들개에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베이컨?"
"그렇게 얇게 베면 100년은 걸릴겁니다. 좀 뚱뚱해야죠."
"그럼...통구이? 후추까지 뿌려서!"
"그만하죠."





+++


시간이 흘러 마침내 기사전 당일.
아마르 자작과 라이젠 남작측은 각자 기사들을 대동하고 중립상태인 영지로 모여들었다.
물론, 주변에 있는 영지는 사실상 아마르자작과 연계되어 있다 해도 무방했기에 완전히 중립적인 영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라이젠 남작령이나 아마르 자작령에서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싫으신가요?"
"...몇 번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예요? 오는 내내 싫다고 했잖아요."

시무룩해하는 공주에게 유나는 답답한 얼굴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또 뺨을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더 반할  같아서 차마 할  없었다.

세상에  때렸다고 반하다니 무슨 소설속 히로인인가.


"애초에  용병도 아니라고요. 이것도  번은 말한 거 같은데."
"그건 상관 없어요. 실력만 있다면."
"아니...싫다니까;"

으으! 하며 머리를 흔들더니 유은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공주는 유은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비록 사과하긴 했지만 여전히 급 낮게 보는 모양.

"칫."

유나가 유은 곁으로 가면 저렇게 혀를 차며 멀어지곤 했다.

"친하게 지내봐요. 유나씨 좋아하는 같던데."
"그걸 말이라고 해요?"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유은의 등을 때려준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아직도 당신을무시하기만 하는데...제가  친하게 지내요."
"오! 저 때문인가요.유나씨 너무 사랑스러운데요!"

괜히 발동걸린 유은이 꼭 안아주자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히익! 이거 놔요!"



둘의 그러한 모습을 짜게 식은 얼굴로 바라보는 공주.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유은을 노려봤다.

"쯧...우리 유나씨한테 저런 이상한...크으...!"

품위 같은 건 사라지고 없었다.


"...체통을 지키시죠."

베로니카의 말에 자신의 추태를 인식한 그녀는 대용(?)으로 아마르 뚱땡이를 바라봤다.
절대 그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감정이 있는  아니고, 그의 엽기적인 몸매와 혐오스런외모를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수련이 되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새끼."


공주의 입에서 새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마르 뚱땡이가 음욕어린 눈으로 유나를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