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26.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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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릿한 방.
분홍색의 벽지에 푹신푹신한 카펫으로 분홍분홍한 느낌을 내고 있다.
게다가 인형이나 쿠션 따위의 것들도 사방에 배치되어 있고, 바로 옆에 딸린 욕실이라던가, 쓸데 없이 여러 개 놓여 있는 가지각색의 침대등등이 이 방의 용도를 짐작케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는 여인과, 그녀를 수행하는 이들의 표정은 대단히 싸늘했다.
방이 여기 하나밖에 없다면 모를까, 하고많은 방 중에서 굳이 자신을 이곳에 안내해놓고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 건 대체 어느나라 예의인가.
당장이라도 이 성을 엎고 눈 앞의 돼지를 난도질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법.
작위는 낮을 지라도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마르 영지는 상당히 질좋은 곳이다. 요즘 표현으로 '꿀땅'이라고나 할까.
자급은 물론 잉여생산물을 바깥에 팔 수 있을 정도의 농업 생산력을 갖추었고, 바깥으로 타국, 혹은 자국의 다른 도시와 교류할 수 있는 항구도시, 그리고 양질의 철광석을 생산하는 광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발군의 기사전력까지.
잠재력만 따지자면 바로 옆에 있는 레이샤 백작령보다도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중이라 많은 귀족모임에도 초대받고 있으며, 일종의 귀족회의 및 사교모임인 '중앙귀족회'에서도 점차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그녀라 해도 고작 기분이나 뉘앙스 때문에 엎어버릴 순 없는 것이다.
물론 그가 정면에서 대놓고 그녀를 무시한다거나 희롱했다면 자작이 아니라 후작,공작이라 해도 영지째로 날아갔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일전에 멀찍이서 뵀을 때도 눈이 부셔 고개를 조아렸습니다만, 이렇게 눈 앞에서 뵙고 있으니 한 없는 아름다움에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르 자작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여인을 쳐다봤다.
잘 익은 사과가 떠오를 정도로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내린 그녀는 그의 부인이나 첩, 시녀들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왕실의 품격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 여자라면 '걸어다니는 왕실'이라 감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아니, 불가능하더라도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다는 검은 욕망이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그 욕망이 어찌나 강한지, 바로 앞 대면하고 있는 여인이 너무도 쉽게 눈치챘다.
벌레가 전신을 기어다니는 듯한 오한이 일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 즈음,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기사가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베겠습니다."
"예?"
"그만둬요."
씨잉!
아마르 자작의 넋없는 내뱉음과 여인의 나직한 명령이 시작됐을 때, 이미 기사의 도는 검집에서 빠져나와 그의 목을 향해 달렸다.
광폭의 질주.
당장이라도 연약한 인간의 목을 베고 이야릇한 방마저 역겨운 분위기와 함께 베어낼 듯했다.
그러나 공주의 지엄한 말을 듣고 회수.
목 근처까지 갔던 검은 어느덧 검집 안에 틀어박혀 언제 나와 있었냐는 듯조용했다.
단지 아마르 자작의 목덜미에 긴 실핏줄이 생기고 그 뒤편의 방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자작이 들고 있던 과자를 멍하니 떨어뜨릴 때, 제대로 반응조차 못한 그의 기사들은 움찔하며 검집에 손을 가져갈까 말까 맹렬히 고민했다.
그를 지키기 위해 고용되고 키워진 기사인 만큼 응당 검을 뽑아야 하겠지만,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대하다.
무려 자국의 공주.
만약 검에 손가락이라도 가져갔다가 잘못 와전되어 '자작의 기사가 공주에게 검을 겨누었다.'라는 식으로 얘기가 퍼지게 되면 해당하는 기사는 물론이고 자작가 자체가 멸망할 수도 있는 일이다.
순식간에 굳어버린 분위기에도, 공주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고고하게 세운 새끼손가락은 포인트.
"경고도 없이 그게 무슨 에티튜드야? 품위없게."
조용한 가운데 혼자서 차를 마시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우아하게 행동하세요."
"...죄송합니다."
기사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 안에 있는 모두를 단 1초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사를 찍 소리없이 따르게하는 저 카리스마.
참으로 아름답고 늠름하다.
"당신도, 그 불쾌한 시선은 거두세요. 내가 당신 첩은 아니잖아요?"
"흠...흠..죄..송합니다."
자작역시 쓸데 없는 시선을거두며 고개를 조아렸다.
어쨌든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아울러 착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여기 와 있는 건 기사국의 수장으로서, 기사전의 공정함을 지키기 위함이지 당신의 힘이 왕실까지 미쳐서가 아니랍니다."
"무,물론입니다. 공주 전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하는 자작.
나름 예의를 보인답시고 절절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공주의 기분을 하락시켰다.
일단 외모부터가 아웃.
거의 대머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벗겨진 머리에다 늙어빠진 피부, 뒷골목 돼지마냥 뒤룩뒤룩 살찐 몸매는 비단 여자라서가 아니라 기사로서도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거기에 저렇게 주룩주룩 땀까지 흘려대고 있으니기분 나쁜 걸 넘어 혐오감마저 느껴질 정도.
그녀가 오랫동안 예의범절에대한 교육을 받고늠름한 기사로서 단련해 오지 않았다면 그 혐오감을 표정으로 드러냈을 것이다.
그리고 싸늘한 말투로 얘기했겠지. 꺼지라고.
물론 지금도 순간순간 이 자리를 벗어나고픈 엄청난 유혹을 받고 있었다.
톡.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접시에 놓여 있는 다과에는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최우선이니까.
"전 여기서 2일을 머문 뒤, 라이젠 남작령으로 갈 거예요. 자료는 다 준비해 두셨겠죠?"
"물론입니다. 공주전하."
자료라 하면 기사전을 통해 상대방에게 양도할 품목들을 정리한 리스트와, 그 리스트에 적힌 것들 중 당장 이동이 가능한 물품들을 뜻한다.
보통 서로가 합의하여 일어나는 경우 서로 비등비등한 조건을 걸게 되지만, 이 경우 아마르 자작가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영지전을 걸었기 때문에 리스크는 아마르쪽이 훨씬 높았다.
가령 예를 들어, 라이젠 남작령의 경우, 라이젠 남작이 아마르 자작의 첩이 되는 것과 일부 재산목록, 영지의 일부 등을 리스트에 올렸다면, 아마르 자작은 상대방의 첩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무려 자작신분과 자작령을 라이젠 남작에게 양도함과 동시에 본인은 평민이 되겠다는 것이 리스트에 적혀 있다.
심지어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양도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지게 된다면 그나마 조금 살만한 평민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지경이 된다면 그의 많고많은 첩들과 시녀들도 모조리 잃어버릴 테니 어쩌면 삶의 이유마저 사라질 지도 모른다.
"공문을 통해 말씀 드렸듯이, 리스트에 적힌 물품들은 일시적으로 저희 기사국에서 보관할 거예요. 일이 끝나면 그때 다시 돌려드리든, 아니면 양도하든 하도록 하죠."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일어서는 공주를 따라 일어서며, 돼지 자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 전 까지 삐질거리던 그와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럼이만 나가도록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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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돼지새끼 진짜."
자작의 방에서 나와 공주 일행만이 남았을 때, 기사 한 명이 걸걸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도저히 상급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친 언동.
미수에 그쳤다곤 하나 자작의 목을 망설임 없이 베려 했던 과격함이 말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공주님, 왜 말리셨습니까? 그 돼지놈의 행동은 목을 베여도 할말 없다고요."
누가 봐도 일부러 선정한 야릇한 방과, 번들거리는 시선, 그리고 혐오스런 모습까지.
3박자를 고루 갖춘 그 모습에 모두 분노했다.
그녀처럼 대놓고 나서지 않았을 뿐, 마음속으로는 골백번이고 자작의 몸을 난도질한 후였다.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것 만으로 처벌할 순 없죠. 야만인이 아니잖아요 우린?"
"그래도...."
공주는 훗 하고 미소지었다.
"언제라도 할 수 있어요. 그런 소양 없는 변태를 베는 것 쯤은. 그러니 오늘 할필요는 없죠."
"그렇습니까?"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모습에, 그녀가 자그맣게 쿡쿡댔다.
"예. 언젠가 필시, 큰 실수를 할 거예요 그사람."
그리고 그때가 되면 망설임 없이 베어 주겠다ㅡ,
뒷말을 생략한 그녀가 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라도 저 돼지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데 공주님."
이번엔 다른 기사가 질문을 던져왔다.
다혈질의 여기사가 아닌, 정갈하게 갈무리된 미남자였다.
"이번 기사전, 정말 성사되어도 되는 겁니까? 솔직히 라이젠 남작령이 너무 불리합니다."
"마,맞아요! 라이젠령은 불과 얼마 전에 기사전력을 거의 잃어버렸다고 들었습니다. 부단장 빼고 전멸이라고요."
다른 기사들도 그에 동조했다.
왕국의 기사들을 총괄하는 기사국, 곧 기사도 그 자체라 해도 좋은 그들로서는 시작부터 불리한 이번 기사전이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공주 역시 마찬가지.
그녀도 한 명의 기사로서 이번 기사전은 공정하지 않다고 여겼다. 적어도 아마르 자작은 비겁한 수를 부렸다. 상대방이 과도하게 약해진 틈을 타 영지전을 걸어오다니.
하지만 주변 영주들이 하나같이 이번 영지전을 찬성한 이 상황에 이를 뒤엎기엔 아무래도 근거가 부족했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돌아가는 걸요 이 세상이."
아마도 라이젠 남작은 이번 기사전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저 역겨운 돼지에게 패하여 참혹한 인생을 보내게 되겠지.
그것은 필시 안타까운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섭리 중 하나라는 것도 인정했다.
여기서 그녀가 공주의 지위를 이용하여영지전을 없는 것으로 한 들, 나아지는 건 없다.
오히려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더욱 심각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기사전력이 거의 전멸하였으니, 암살자를 보내는 건 너무 쉬울 것이고, 그렇게 살해되거나 심하면납치되어 성노로 굴려질 수도 있다.
그리 되면 라이젠 남작으로서도 최악이다. 하다못해 귀족의 신분이라도 유지한 채 첩으로 들어가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저로서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죠. 바랄 수밖에 없고요. 그 자의 실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