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25.NTL판타지
"...."
사람들은 혀를 차며 흩어졌다.
여자에 이어 도전하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저마다 하던 곳으로 가 게임을 시작했다.
"한사랑님도 한 번 해보시겠어요?"
한사랑을 안내해주던 시녀가 슬쩍 물었다.
거기에사랑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비어버린 맥주캔을 근처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저건 마물이다.
말 그대로 '인생'을 갈아 넣는 마물.
리스크에 대한 체감을 둔하게 만들어 마치 보상에 손이 닿을 것처럼 만든 후 나락으로 끌어 내린다.
남자라면 인생의 파멸을, 미모의 여인이라면 평생의 성봉사를.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담보로 홀랑 가져가 버리는 악마 그 자체.
아무리 그녀가 절망과 나태에 찌들었다지만, 이런 막장 도박에 발을 디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 정신력은 있었다.
하지만,
"사랑님이라면 빌려드리는 게 아니라 무료로 제공해 드릴 수도 있는데요. 골드칩쯤은."
"...무료?"
"예.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님이니까요."
"...."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죠. 그저 유희를 즐긴다 생각하시고 한 번 해보셔요."
시녀가 손을 펼쳤다.
'인생'쪽으로.
그리고 그곳을 봤을 때, 마치 그 기계는 천상에서 내려온 것처럼 휘황찬란한 후광을 두르고 있었다.
'뭐,뭐야...?'
"2억 스탯을 얻을 수있는 인생 최대의 기회. 이 수치를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스탯 1당 공격력 4가 오르는 '힘'에 '1억 개'만투자해도 공격력이 무려 4억이 된답니다."
"4억?"
스탯 카지노가 생기고 나서 지각변동이 일어나긴 했지만,그래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모험가들의 공방은여전히 몇 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데 공격력 4억? 그것도 절반을 투자한 것 만으로?
"물론 혼자 다 사용하지 않고 부하들이나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지요. 가령 살아남은 부대원들이라거나."
"...!!"
시녀의 말은 그녀에게 적중했다.
그래.
미래는 스탯이다.
좋든 싫든 스탯으로 여는 거다.
그런 스탯이 2억개.
천 명이서 나눠 가져도 한 명당 20만씩 가져갈 수 있다.
100명이라면 무려 200만.
군대가 제 힘을 쓰지 못한다면, 힘을 쓸 수 있는 특별한 부대를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마치 경찰의 특무대처럼.
꿀꺽.
그래.
생각해보자.
아까 그 여자는 자기 돈으로 백개가 넘는 구슬을 돌렸고, 이어 본인의 몸을 담보로 3천개나 되는 구슬을 돌렸다.
대충 생각해 보면 지금쯤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골드칩을 제공해 준다지 않았나.
최소 천 개의 구슬이다. 심지어 무료로.
해도 손해는 없다.
무조건 하는 게 이득이다.
게다가그녀는 빚이 있다.
금전적인 빚이 아닌, 사명이라는 빚.
그녀가 조금이라도 지휘에 능숙했더라면, 어쩌면 훨씬 많은 연대원들이 살아 남았을 지도모르고,
어쩌면 조금이라도 많은 민간인들을 구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떠오르는 과거.
살아나는 책임감.
이 절묘한 순간에 맞아 떨어진 그녀의 감정은, 그녀를 '인생'으로 내몰았다.
"그럼...."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발은 이미 '인생'을 향해 걸어가고, 시녀들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사랑이 생애 첫 도박을 시작하려 할 때,
갑자기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어...어?"
"뭐,뭐야?"
"뭘 꼬라봐요? 계속 즐기세요~. 예~. 편하게 하세요~ 안 잡아가요."
익숙한 목소리의 등장.
한사랑이 떫은 마음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 얼굴은 가까이에 있었다.
"야 이 븅신아."
"?"
아니 정정.
얼굴보단 발이 더 가까이에 있었다.
뻐억!
은소령의 날라차기가 한사랑의 배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스탯의 힘을 쓰진 않았지만, 육중한 날라차기 만으로도 한사랑을 날려버리기엔 충분했고, 덕분에 그녀는 '산'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전부 쇠구슬로 꽉 들어차 있는 곳에 떨어졌으니 무사할 리 만무.
아니, 애초에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
시녀들이 놀라 힐을 날리고, 몇몇은 은소령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은소령 역시 엄연한 유은의 여자.
시녀들로서는 지켜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년이 이제 하다하다 도박까지 손대네. 에휴 이 쓰레기 같은 년아. 어디까지 떨어지려고 그러냐? 어?"
"...."
힐을 받아 치료가 된 한사랑은 방금 전의 격통을 생각하곤 곧바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갔다.
표정으로 봐선 당장이라도 뺨을 날릴 듯한 얼굴.
"뭐? 할 말 있냐? 패배자년아. 그래도 설마하니 이딴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아주 가관이네."
한사랑은 말로 하지 않았다.
곧바로 주먹으로 은소령의 뺨을 가격했고, 찰진 소리와 함께 은소령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로 회복한 은소령은 한사랑의 머리채를 붙잡고 손바닥으로 뺨을 갈겼다.
"이게 언니한테 주먹을 들이대? 어?"
짜악! 짜악!
"크익!"
한사랑은 주먹으로 은소령의 배를 때렸지만, 그래봤자 일반인의 주먹이다.
제대로 데미지가 먹힐 리 만무.
오히려 그녀의 화만 돋궈서 더 얻어 터질 뿐이었다.
"...."
"오늘은 이만 문 닫을까요."
사태가 점점 더 심각하게 흘러간다는 걸 감지한 시녀들이 카지노의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십여명이 나와 손님들을 몰아내며 폐문, 혹시나 하는 응급상황을 대비해 은소령과 한사랑의 싸움터 주변에 대기했다.
"이 씨발년이! 아까부터!!"
한사랑은 줄곧 얻어 터지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손과 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에 맞썬 은소령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길거리싸움처럼 한사랑의 머리채를 붙잡고늘어지며 그녀의 전신을 구타했다.
경찰과 군인.
그것도 한 명은 모험가인데 제대로 된 싸움이라 하기에는 심히 모양이 우습다.
"누가보면 지 혼자 실패란 실패는 다 겪은 줄 알겠네. 이 멍청한 년이!"
"닥쳐 이 씨발아!"
감정이 격해져서일까,
원래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은소령은 물론이고, 평소 그런 것과는 담을 쌓고 살던 한사랑의 입에서도 각종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냐?"
"놔둬. 서로 죽이기야 하겠어?"
할 게 없어진 시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맥주캔을 뜯으며 한사랑과 은소령의 싸움을 관전했다.
역시 좆밥싸움이야 말로 꿀잼.
관중(?)은 점점 늘어났다.
+++
"어이."
"...."
담배를 태우던소령은 쭈그려 앉은 한사랑에게도담배를 하나내밀었다.
"안 펴."
"뭐냐. 또 그놈의 자존심이냐? 뒤룩뒤룩 살 찐 주제에 꼴사납다 진짜."
"비흡이거든 또라이년아."
"언니한테 년년거리는 거 봐라. 싸가지 없는 년."
꼴깝떤다면서 담배 한 개피를 한랑의 머리에 던졌다.
아무런 타격이 없지만 기분은 최악.
그녀가 매서운 눈초리로 소령을 노려봤다.
"뭘 꼬라봐? 그따위 꼴로 노려봐도 전혀 안 무섭거든."
그녀의 꼴은 가관이었다.
머리를 감지 않은 채 모자만 눌러쓰고 나온 상태에서 대판 싸워대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엉망이겠는가.
거기에 옷도 여기저기찢어지고 얼굴에도 상당부분 상처가 나 있다.
그에비해 은소령은 머리카락이 좀 헝클어진 걸 제외하면 데미지 제로.
너무나 수지에 맞지 않는 딜교를 해버린 셈이다.
카지노 한복판에서 대판 싸우기 시작하던 둘의 싸움은 한쪽이 기절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그 한 쪽은 당연히 일반인인 한사랑이다.
마지막까지 은소령의 머리채를 잡고 놔주지 않으며 노려보다 기절.
이런 걸 보면 참 대단한 의지를 가진 여인인데 이렇게 망가지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은소령은 담배를 뻑뻑 피며 침묵을 유지하다, 거의 10분 만에 입을 열었다.
"인생이 원래다 그런 거야."
"?"
뜬금없는말.
하지만 지금까지완 달리 제법무게가 있는 어조였다.
그래서인지 감정이 심히 좋지 않은 한사랑도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씨발 좆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그런데 주변에선 자꾸 뭘 요구한단 말야. 마치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존나 웃겨. 희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면서 정작 능력은 안 준다니까."
그녀는 피우던 담배를 대충 버리고 새로 하나를 물어 불을 붙였다.
고위 경찰이 길빵도 모자라서 길거리투척이라니.
누가 보면 신문에 대문짝하게 걸릴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리낌 없이 행했다.
마치 어쩌라는 듯이.
"조직도그래. 막상 진짜 필요할 때 존나 무능하거든. 던전이 열리고 나서 경찰이 모험가를 제합한 적이 있을 거 같냐? 없어. 씨발. 나를 비롯해서 특무대라는 말만 번지르르한 시녀경찰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야 간신히 가능해진 거야."
"...."
"그나마도 강남에서나 통용되고 있지, 지방은 난리다 난리. 별의 별 같잖은 것들이 활개치고 다닌다고. 그 변태새끼가 워낙 어그로를 왕창 끌어대서 묻힐 뿐이지."
그녀는 도넛모양의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굴러간다. 어떻게든 쓸모가 있어. 정 없어보이면 니가 바꾸던지. 넌 할 수 있을 거 아냐.그놈 애인이니까. 누구는 좋아하지도 않는 놈이랑 엉기면서 일하고 있는데 누구는 연인이라는 칭호까지 달아놓고 멘탈이 쿠크다스마냥 부서져서 지랄떨고 있으니...쯧쯧쯧."
마지막으로 한 모금 빨아들인 소령은 아직 많이 남은 담배를 던져 버리고는 몸을 돌렸다.
"정 못하겠으면 걍 그대로 포기한 채 살아. 딱히 상관 없어. 율령이한테 맡기지 뭐. 이 넘쳐나는 인구 중에 너 대체할 인간 하나 없을 거같냐?"
끝까지 성질 건드리는 소리를 하며 그녀는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