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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던전은 나만의 기회 (291)화 (290/517)



〈 291화 〉25.NTL판타지

율령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마우스만 딸깍이던 그녀, 한사랑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있을 거야?"

율령의 지적에 '으음...'하고 신음하며 자신을 돌아봤다.

통통하게 오른 살에 거뭇한 눈가.


오랜 훈련과 규칙적인 생활리듬으로 다져진 환상적인 몸매는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통통해진 지금도 운동을 아예  하는 일반인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갈 정도의 몸매다.

게다가 쓰레기로 가득 찬 방.


모니터 앞만 봐도 각종 과자비닐에 다 먹은 맥주캔이나 콜라캔 등이 쌓여 있고, 바닥에는 치킨박스나 피자박스 따위의 배달음식 흔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는침대 위에도 옷이나 속옷 등이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방구석 폐인의 모습.


아니,어지간한 폐인이라도 이 수준에 도달하긴 힘들 것이다.

평소 전형적인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절제된 삶을 살아왔던 여자와 동일한 인물이라고는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키우던 개들도 본가로 보내버리고 멀쩡한 집도 내팽개치고...인생 포기했냐?"
"...냅둬."


유은의 소식에 잠시 갈등하나 싶더니만 결국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아니  이 지랄인데?? 이유라도 제대로 설명하던가!"

답답해 소리쳐 보지만, 그녀도 짐작가는바가 없는 건 아니다.


인천사태가 끝난 후,
한사랑은 뒤늦게 강한 충격을 받았다.


상황중엔 정신이 없어 견디고 있었지만 막상 지나고나니 너무나 큰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


바르카나라고 하는 웬 외계도시가 등장해서 난장판을 벌일 때, 그녀가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휘하던 연대는 거의 전멸하여 생존자를 찾는 게 힘들 정도이고, 주둔하고 있던 인천은 쑥대밭, 더불어 희생이라는 이름 하에 포로로 잡혀갔더니  이상한 여자에게 온갖 폭행과 성추행을 당했고, 다행히 하렘궁에 의해 구해져 끝났구나 싶었을 땐 유은과 유나가 실종되어 버렸다.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곤 하지만 이토록 처참하게 무능력을 실감하게 되었으니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의 자존심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동시에 지난 인생에 대한 회의감마저 속속 올라왔다.


아버지가 군인이기 때문에 군인이 된 것이 아니다.
이 나라와 겨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군인이 되었다.

그러한 군인이 항거불능의 벽에 부딪쳤을  느끼는 허탈감과 무능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클 지 상상이 되는가?

군인을 넘어 군대 자체가 아무 의미 없이 찢어지고 소모되는 장면을목격했을 때, 그 군대의 일원이 받는 충격이 어떨지 상상이 되는가?

군대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지키고 그 자긍심으로 말미암아 본인의 자존감마저 받쳐 올리던 사람이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 회의감이 어떨지 상상이 되는가?

인생의 성취를 거부당하고, 쌓아온 발자취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인간은 본능의 노예가 된다.


그렇게 한사랑은 무너졌다.

하렘궁의 병실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방구석 폐인모드.

가족과의 개인적인 연락도 끊어버리고 키우던물랑이와 말랑이는 일방적으로 본가에 데려다 놨다.
그리고는 아예 가출을 시전하는 멋진 방랑아가 되어 동료이자 부하인 율령의 집에 반쯤 얹혀사는 패배자스런 잉여인간이 되었다.

군에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일종의 PTSD로 진단하고  다음 배치때까지 넉넉한 휴가를 주었지만, 과연그녀가 제대로 복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동료이자 부하인 율령이 봤을 땐 가망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쯧쯧쯧."

결국 은율령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젓고는 맥주캔 몇 개와 함께 방문을 열었다.


벌써 이런 대화가 오간 것도  수 없을 만큼 많다.
 동안 한사랑은 한 톨도 변하지 않았다.


"딴 건 몰라도 청소는 좀 해 씨발년아. 내집이니까."
"...."

쾅 하고 닫힌  너머로 율령이 사라진 뒤, 대략 1분간 강한 현자타임에 씁쓸히 입맛을 다신 한사랑은  다시 게임에 몰두하며 하루만에 일본트리 6티어 전함을 뽑는 기염을토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
.
.



다음날.

온 뉴스가 하렘궁과 한국, 그리고 핵복제 등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될 즈음, 퍼질러 자고 있던 한사랑은 쾅쾅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으음...."


-들어간다.


형식적인 노크  열리는 문.
 너머로 누가 있든지 관심 없는 한사랑은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와.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네."

비웃음 섞인 말투에 눈이  뜨였다.

탁!
화륵.

"...금연인데."
"뭐 어때."
"뭐 어때가 아니라 금연이라고."
"괜찮아."
"내 집이야 이양반아;"
"어허. 손님한테 무슨."
"...."

막무가내로 개념없는 짓을 하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율령은 참고 넘어갔다.
어쨌든 지금은  안에 박혀있는 잉여인간을 끌어내는 게 먼저였기 때문.


"당신이 여긴 왜...?"


부스스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인어공주의 포즈가 된 한사랑.
그녀는 의문과 당황으로 은율령과 은소령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은의 여자라는  제외하면 엮일 일이 없는 여자들인데 무슨 연고로 같이 있는 걸까.

"왜긴. 동생년이 잘 있나 마음씨 좋은 언니가 친히 방문해 주신 거지. 뭐 별 거 있겠어?"
"...."

능글맞게 담배연기를 내뿜는 은소령.
정말이지  대 쳐주고 싶은 얼굴이다.

대체  이렇게 싫은 지는 이해할 수 없으나, 어쨌든 얼굴만 봐도 싫다.


아니 그 이전에,


"동생?"

동생이라니.
설마 자매란 말인가?

저 재수없는 년이랑 은율령이 자매라고?
하긴. 은율령도 은근히 재수없지. 성씨도 같고.


얹혀사는 주제에 묘하게납득한 한사랑이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갑자기 기분이 나쁜데."
"그나저나  장난 아니다. 청소  하고 살라고 이 언니가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었니?"
"뭐래 병신이.내가 한 거 아니거든."
"니가 했든 아니든 집 주인이 책임 져야지. 안 그냐? 뚱땡이."


양말 신은 발로 침대에 올라가 한사랑을 툭툭 건드리는 은소령.
빠직 하고혈관 마크가 박혔지만, 한사랑은 귀찮은 마음에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동생 만나러  거면 이만 나가요."
"오? 엉덩이 커진 거 봐라. 이 정도면 가슴도 커졌을 거 같은데, 일부러찌운 거 아냐? 앙큼한 년."

큼직한 엉덩이를 발로 밟고 문질러대는 그녀.
한사랑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대꾸하기 귀찮아 무시했다.

"와...얘 중증인데? 완전히 망가졌잖아.  뭔 짓 했냐."

은소령이 입을  벌렸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상대로 거리낌 없이 발포 명령을 내리고,
그로 인해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까지 거론되며 심지어는 신상까지 털려 욕이랑 욕은 다 쳐먹고도 멀쩡했던 인간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유은이라는 개망나니 애인을 만나더니 대놓고 첩질을 해대는 유은에게  소리 하나 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애인이라는 놈이 다른 여자  명에게 청혼하는 장면까지  앞에서 목도했다. 그로 인해 트러블이 좀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그러고도 멘탈이 멀쩡했던 인간이다.

그런데 그 한사랑이 이렇게까지 무너졌을 줄이야.

"왜나한테 지랄이야. 지가 이렇게 된 걸 어쩌라고."
"부하가잘 받쳐줘야 상사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라고. 군인이든 경찰이든 알겠니? 하여간 요즘 애들은 책임감이 없다니까."
"...뒤지게 맞을래?"
"쯧쯧쯧. 애 하나 아주 망쳐놨구만."


쌍심지를 켠 은율령을 무시하고 마저 담배를 핀 후 적당히 껐다.
한사랑도 은율령도 비흡연자이기 때문에 재떨이가 있을  없으므로 그 피해자(?)는 근처에 널브러진 맥주캔이 되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가 이렇게 살겠다는데."
"...."
"게임 좀 하면서 살면 어때. 좋은 취미잖아. 돈도 얼마 안 들고."
"갑자기 왜 이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은율령이 소름끼친다는 얼굴로 두어걸음 물러났다.


"살다 보면 폐인생활 할 수도 있지.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거야."

그녀는 은율령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축하한다 동생아. 강력한 라이벌이 한  줄었네. 직업이든 연애든."
"뭔 소리여."
"저상태로 군인 복귀는 글러먹었고...저 몸매면 글쎄. 그놈이 어떻게 생각할런지 모르겠네."

피식 하고 웃은 그녀가 마지막까지 한사랑의 염장을 긁었다.

"앞으로 평생 자위하면서 살게 되겠지만 뭐 힘내렴. 너 같은 뚱땡이 니트년도 좋아해줄 남자가 생길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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