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16.사랑스런 사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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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이곳은 심연.
심연과 같은 곳.
마음이 어지럽거나 극도로 혼란한 때,
인간은 종종 이곳에 온다.
"난...?"
여기선 고통 따위 없다.
그런 것 지워버렸다.
느껴지는 거라곤 오로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찰 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컴컴한 공간이기에 지루할수도 있는공간.
그러나 그렇지 않다.
후회를 느낄지언정 지루하진 않다.
분노를 느낄지언정 지루하진 않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왜 이런 곳에서 멀뚱히 서 있는 걸까.
나는 지금...어떤 현실에 처해있는 걸까.
"...."
무심코 내려다봤다.
보이는 거라고는 두꺼운 몸뚱아리 하나 뿐이다.
잘 관리되어 근육질로 울긋한 몸.
뭇 여성들의 얼굴을 붉힐만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중요한 것들이 없다.
팔과 다리.
사지가 전부 일정 부분에서 전진하질 않는다.
자세히 보니 두 팔은 어깨 부근에서부터 뜯겨져 있고, 왼쪽 다리는 무릎 바로 위 허벅지부터, 오른쪽 다리는 가랑이 부근의 허벅지부터 뜯겨져 있다.
사지가 없는 것도 억울한 마당에 균형마저 맞지 않는다.
"아...!"
본인의 상태를 인지한 그는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결코 놀라움이나 분노, 억울함의 수위가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긴 비명을 지르기에는 오히려 그 정도가 너무 강해서 짧은 비명 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혹시 이건 꿈인걸까.
현실인 걸까.
현실이다.
그럼 대체 왜 이런 꼴이 된 걸까.
무슨 짓을 당한 걸까.
좀비에게 뜯어 먹혔다.
그 속에서 난 어떻게 살아온 걸까.
누가 구해준 걸까.
구해준 그년이 내 다리를 잘랐다.
왜 내 다리를 자른 걸까.
내게 원한이있는 걸까.
그년은 유은의 노예였다.
그럼 이 모든 건
다 유은의 탓인 걸까.
그렇다. 유은 때문이다.
아니, 잠깐.
애초에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이럴 일도 없었다.
그러니...전부 본인 탓이다.
"으아...."
적응될 수 없는 분노가 튀어 올랐다.
무슨 미친 짓을 한 거야.
왜 던전에 들어갔냐고.
무슨 자신감으로?
대체 뭘믿고?
이 지경이 될 줄 몰랐던 걸까.
미친짓에는 대가가다른다는 걸 몰랐던걸까.
"이 병신아아아아!!!!"
과거의 자신에게 소리지른다.
온통 새까맣던 공간이 마치 영화처럼 장면을 띄운다.
사랑에게 한 바탕 퍼부어주고,
실연당하고,
끝내 뛰쳐나가 던전에 들어가는...
그 어리석음의 현장.
소리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과를아니까.
그 끝을 아니까.
목이 터져라 질렀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으...으윽...."
주저앉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다는 걸, 이제 인식했다.
그에겐 서 있을 다리가 없으니까.
지독하고 참혹한 현실에 꺼이꺼이 울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한사랑과의 관계고 뭐고 인생부터가 망가졌다.
사지가 없는 이 꼴로 대체 무엇을 하리오.
항간에는 장애인을 위한 직업이나 설비가 마련되어 있다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본래부터 재벌이 아닌 이상에야 바닥의 바닥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 인생따위, 그에겐 지옥 그 이상이다.
그러니 울 수밖에.
그렇게울다가, 문득 번뜩하는 것이 있었다.
분명 좀비들에게 뜯어 먹히기 전, 그는 무언가를 얻었다.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고, 흑수저에서 금수저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인 '스탯'.
그래.
분명 스탯이 열렸다.
그리고 히든클래스를 손에 넣었다.
"히든...클래스...!"
말하자면 선택받은 거다.
돈이 아무리많아도,
던전을 수백 수천번을 돌아도,
못 얻는 사람은 얻지 못한다.
여타의평범한 직업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함.
그것이 바로 히든 클래스.
어쩌면,
사지를 잃어버린 지금이라도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던전이라는 것이 본래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곳 아닌가.
그렇다면 잘린 사지쯤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히든 클래스를 통해 강해지고 강해져서 언젠가 유은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사랑...!"
그럼 그 여자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동경과 선망따위 추악한 욕망으로변질된 지 오래다.
이젠 그 몸뚱아리를 품을 수 있다면 뭐가 어찌되든 상관 없다.
그러니...
최후의 절망 전에, 마지막으로 희망을 품어보자.
이검은 공간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현실을 마주해보자.
화아아아.
시야가 일변하고,
그는 '정말로' 눈을 떴다.
"...."
하얀 천장.
눈을 부실 듯이 빛을 내는 형광등.
그는 혹시 하는 마음에 사지를 움직여 보았다.
역시나곳곳에서 허전함이 밀려온다.
"씨발...."
잔뜩 잠긴 목소리로 욕이 나온다.
"스..아니...직..업...."
어디선가 들은 대로, 정보창을 불러봤다.
그의 마지막 희망, 히든 클래스.
<<히든 : 가슴&키스 동정 대마법사>>
남자는 25년간 동정으로 지낼 시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해요. 나이가 찰 수록 그 경지는 강해지고 마침내 동정으로 50을 넘기면 인세의 전설, 대마법사가 될 수 있죠.
그러나 50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게 너무나 깁니다. 보통은 그 전에 동정을 떼고 그 가능성을 스스로 버리게 되죠.
이런 관점에서, 일부 인간들은 마나의 축복을 받습니다. 앞으로 평생을 동정으로 살 것을 약속하는 대신, 미리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된것이죠.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대마법사가 되었어요.
등급 : 레전더리.
*흥분도에 따라 공격력/방어력이 상승합니다.
*흥분도는 총 5단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사정시초기화됩니다.
*여성의 가슴을 만질 때마다 흥분도 상승.
*여성과 키스할 때마다 흥분도 상승.
*흥분도 1단계 상승할 때마다 공격력/방어력 각각 100% 상승.
*주기적으로 가슴을 만지거나 키스할 수 있는 파트너 한 명당 전체 스탯 1% 상승.
.
.
*구강성교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섹스'를 하게 될 시, 모든 스탯, 스킬, 직업효과가 초기화되며 다시는 스탯을 가질 수 없음.
"아...."
참혹한 눈물이 흘렀다.
어찌...
어찌 이리도 세상은 차갑단 말인가.
어떻게...어떻게 여인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에게, 이따위 직업을 줄수 있단 말인가.
그래!
그년과의 키스를 꿈꿨다.
그년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아!!
가슴과 키스라니.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가슴을 마구 만지고 키스를 왕창 해야 하지만섹스는 하면 안 된다? 이런 거지같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심지어 구강성교...펠라조차 할 수 없다. 그냥 여자와 하는 모든 종류의 섹스가금지다. 심지어 대딸도 안 되는 모양이다.
오직 허락된 건 가슴을 만지는 것과 키스하는 것.
대체 이게....
"으아아아아아아아!!!!!!"
그는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군병원의 모두가 깜짝 놀라 달려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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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그렇군요. 그거 참 안 됐네요."
나는 짐짓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근처 공원의 벤치.
사랑씨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그곳에서 우린 연인처럼 앉아 있었다.
거기서 그녀가 들려준 임대위의 소식은 그야말로 안습.
던전에서 실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그의 머리카락이 모두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듣기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데...참 인간이란 신기한 존재다.
"이제 평범한 생활은 힘들겠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씨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끝이꽤나 안 좋았던 걸로 아는데, 그놈 상태가 워낙 심각하다보니 그런 걸 모두 뛰어넘은 모양이다.
"지금 군병원에 있는 거죠?"
"네. 정확히는 부대내에 있는 병원입니다만, 뭐 그게그거겠죠."
"부대에 병원도 있습니까?"
"독립연대니까요. 있을 만한 건 다 있습니다."
"오오. 이제보니 엄청 높으신 분이네요. 나중에 사단장도 되고 막 그러는 거 아닙니까?"
"...곧 치안부대가 사단단위로 편제된다는 계획은 있습니다만, 제가 장을 맡기에는 아무래도 짬이 딸립니다."
"짬은 섹스로채우면 됩니다."
"네?"
"아,아니. 개소리였어요."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도 덩달아 기립.
"병문안 갈 수 있을까요?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인데."
"부대 안입니다만...."
"에이. 여기 연대장님이 계신데요. 뭘."
"치안부대는 원칙적으로ㅡ."
"쉿."
"...?"
검지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놔두면 계속 안된다고 할 거 같아서.
"거기서 꼭 해야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사랑씨에게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게...뭐죠?"
뭐긴. 염장섹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