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12. 메울 수 없는 차이.
"...."
유나는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일단 그녀 본인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있거니와, 여기서 자기 얘기를 내놓으면 뭔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존심 문제다.
"나한테만 말해봐. 이 언니가 상담해줄게."
"피,필요...없어요."
"없긴. 너 그럼 계속 이런식으로 있을 거야? 붕 떠서?"
"...."
"조심해. 걔가 어떤 앤지 대충 감 잡히잖아? 우리가 여자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다른 노예나 시녀들처럼 굴려질 수 있어."
"그건...."
"걔가 뭐 우릴 특별히 사랑하거나 해서 부인대접하고 이러는 게아니라는 건 알잖아. 그냥 우연히 처음 만난 김에 이렇게 됐을 뿐이야."
소라가 또 다른 병을 땄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나나 너 같은여자가 그녀석한테 폴링 러브, 그것도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반하는 것도 웃긴 일 아니니? 아마 스킬 때문일 거야. 이상한 스킬 잔뜩 갖고 있잖아?"
"맞아요."
처음으로 즉시 대답하는 유나.
"스킬이 분명해요."
"훗.. 그럼 일단 그녀석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는 거지?"
"...."
"아하하! 평소 같으면 이런 거 절대 안 걸릴 텐데 묘하게 어수룩하단 말야."
"으으...아,아니라구요."
"아니긴 이년아. 적당히 하고 인정할 건 인정해."
또르르.
술병을 기울이자, 투명한 물 같은 녀석이 잔에 채워졌다.
"너 계속 자존심 뒤에 숨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말을 해 줘야지."
"...."
"매갈, 왜 들어간 거야? 거기부터 시작해보자."
말 없이 소라가 따른 술을 마신 유나가 오랜 침묵을 거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후...엄마 때문이에요."
"응?"
예상 외의 답이 나왔는지, 소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냐씨? 왜?"
"...너무 잘났어요."
"아."
"그러니까... 제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 이해를 못해요. 성격이 꽉 막혀있다는 게 아니라...말 그대로 이해를 못해요."
"잘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야?"
"그런 것도 있고...매사에 기준에 못 미쳐요 제가. 엄마는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마구 시키는데...제 입장에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수준이거든요."
"흐음...근데 내가 봤을 때 너도 무능한 편은 아니던데."
"그 여자가 지나치게 유능한 거죠. 봐요. 지금도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사 하면 꼭 한 두 번은 언급 된다고요. 적어도 '여자 변호사'중에서는 반드시 언급돼요. 그렇다고 대형 로펌에 속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혼자서 다 해먹고 있어요. 그런 인간이니...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기를 펼 수가 없죠...아빠도...비록 바람이라는 최악의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솔직히 이해가 안 가진 않아요."
"그,그정도야?"
껍데기 뿐이지만 그래도 레디컬 페미니즘인 매갈에 소속돼 있던 유나가 그런 말을 하다니. 소라는 적잖이 놀랐다.
"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빛이 너무 강하면 눈을 뜰 수 없어요. 느껴보지 않으면 모르죠. 아빠도 엄청 기눌려 살았거든요. 밖에서는 꼬박꼬박 변호사님이라 칭하고, 집에서도 일 얘기 할 때는 꼭 직책으로 불러야 했고......인간이 너무 유능하고 공사구분이 확실하니까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아마 그래서 바람도 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구나...."
"그거 아세요? 제 성도 어머니 성이에요. 우리집 가장도 그 사람이고."
"아! 그러고보니 그러네."
"능력도 있고, 돈도 많고, 공사구분 확실하고, 예쁘고, 멋지고...솔직히 꺼려질 뿐이지 싫은 건 아니에요. 모녀관계를 떠나 여자대 여자로서 진짜 멋진 사람이에요."
"동경도 같이 했구나?"
"네. 그러던 찰나에 페미니즘이라는 걸 발견했죠. 보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요.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몸으로 수많은 경쟁자를 눌러가면서 최고의 변호사 대열에 올랐고, 자신의 능력으로 여자를 보여준 사람...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소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파악이 된다.
사람이 열등감에 휩싸이게 되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리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유나도 그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접했을 것이고, 그걸 자신의 어머니와 결부, 페미니스트가 되면 엄마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 결과가 레디컬 페미니즘인 매갈에 가입한 것.
아마 하루라도 빨리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자에 의한 여자가 아니라, 나로서의 여자. 그걸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진짜 멋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처음에만 솔깃했지, 시간이 지날수록의구심이 마구 들더라고요.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렇구나. 근데 소냐씨 페미니즘인 엄청 싫어하시지 않아?"
"정확히는 매갈을 싫어하는 거죠. 그 사람은 페미니즘이 뭔지 제대로 모를 걸요. 알 필요도 없을 거고."
"하긴. 걸어다니는 걸크러시 같은 느낌이니까."
유나가 피식 하고 웃었다.
"아마 매갈에 간 저를 못마땅해 하는 것도, 거기에서 나온 걸 거에요."
"?"
"자기가 볼 때그런 운동 같은 건 전혀 필요 없는데, 저 약하고 능력 없는 것들이 지들 능력 기를 생각은 안 하고뻘짓이나 한다고...그래서 싫어하고 있을 걸요?"
"웅...살짝 나도 그런 생각을...헤헤."
"아무튼...그렇게 매갈에 들어갔지만 별 다른 성과는 없었어요. 내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겉으로 드러내지는못하지만, 대화를 나누어 보면 알 수 있죠. '아. 이 사람 지금 현자타임이구나.' 하고...."
거기까지 말하고 술을 후루룩 들이켰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어서일까, 왠지 오늘따라 술이 잘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럼 넌 이제 매갈이랑은 선 긋는 거야?"
"선 긋고 뭐고 하기 전에...이제 망했잖아요.망할 거고...."
유은의 수작질로 인해 매갈은 와해되었다.
일단 매갈 길드인 매운갈비집의 경우, 전원이 죽거나 군감옥에 이송되었고, 매운갈비탕 사이트 회원들은 길드와 군대의 거리낌 없는 학살에잔뜩 겁을 집어먹고 잠적했다.
물론 개중에는 분노하여 싸워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말로만 그럴 뿐, 행동으로 나오는 사람은 적었다.
"그럼 이제 노선 확실히 정해. 은이는 여자 많잖아. 계속 곁에 있고 싶다면너만의 무기를 개발해야 해."
"으...아니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왜 우리가그런 인간한테 반한 거죠???"
"아까도 말했잖아. 아마 스킬일 거라고."
"크윽...."
소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게 뭐 어중간한 거면 '이 씨발새끼'하면서 뛰쳐 나가겠는데, 그 정도가 아냐. 내 감이 말하고 있어. 이건 평생 가는 거라고. 너도 그렇지?"
"...."
말없이 입술을 깨물 뿐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무언의 동의다.
"어쩌겠어. 그냥 이대로 살아야지. 남친이랑 헤어진지 하루 된 여자한테 자기 여자가 되라고 하질 않나, 그러면서 하렘을 만들거라고 하질 않나...매너라곤 완전 꽝에 성격도 그지 같지만...어쩌겠니. 이미 꿰인 걸."
"으으...이럴 땐 정말 한남이라는 말이 너무 공감돼요. 아니 한남충!!"
"으흐흐. 맞아."
소라가 키득키득 웃으며 유나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무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여기선 차선을 취해야지. 스킬이든 뭐든...좋아하는 녀석이딴 여자랑만 띵가띵가하는 걸 보고 있을 순 없잖아?"
"어,어쩌게요?"
"공동전선을 펴는 거야. 너랑 나,그리고 소냐씨까지."
"으에?"
"일단은 우리 둘이 얘기 나누고, 소냐씨랑도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일 하고 계시겠지?"
"그야...."
+++
"당신들이 왜 쓰레기인 줄 알아요?"
"쓰,쓰레기...?!"
폭언.
소라와 유나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소냐는 그야말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구들을 상대했다.
무려 141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한남동 대학살'.
이로 인해 매갈 길드는 와해되었고, 사이트조차 사방으로 흩어졌다.
"쓰레기가 누군데!! 너 때문에...너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
이소냐의 사주(라고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를 받고 일명 '매갈 대전'이라 불리는 시위를 주도한 세 여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포에 떨었다.
사건이 발생한 초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길드원을 피해 시체 밑으로 피신해야 했고,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비명소리를 견뎌야 했다.
그리고 이어서 군대가 왔을 때는, 하나하나 소름끼치는 파공음을 동반하는 총탄 세례를 피하기 위해 바짝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녀들이 겪은 일은 그야말로 지옥. 왜 사람들이 전쟁을 반대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러한 것들을 겪고 격분하여 찾아왔는데, 그런 자신들에게 한다는 소리가 쓰레기라니???
"그래서? 너흰 죽어도 싼 애들이잖아요.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오히려 140여명이나 되는 쓰레기가죽어서 난 너무나 기쁜데."
"뭐...뭐라고?!"
소냐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다리 또한 반대편으로 꼬아 올렸다.
"우리 돼지들이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에요. 너희들은 죽으면 죽을 수록 사회에 대한 공헌도가 올라가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살아 있는 게 도움이 안 된다고."
"이익...!!"
"당신들이 갖고 있는 사상도 그래요. Girls can do anything? 풉!"
매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글귀를 면전에 대고 비웃는 그녀.
세 돼지의 표정이 더욱 썩어갔다.
"니들 따위가 그런 말을 해?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남자들을 공격해서 사회를 변화 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끌어 내려는 주제에 girls can do anything?"
"그,그게 뭐가 나빠!!"
"뭐가 나쁘냐고?"
소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7세의 신체나이로 돌아왔어도 원체 길쭉하고 훤칠한 여인이라 세 돼지보다 키가 더 컸다.
그것은 곧 위압감.
"너희의 능력과 의지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사회를 바꾸면 그 콩고물을 받아 쳐먹겠다는 거잖아? 그렇게 의존적인 워딩과 방법을 취하면서 그따위 말을 하면 안 되지."
슬쩍 다가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세 돼지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소냐는 그 중 리더격인 인물에게 쭈욱 얼굴을 내밀었다.
"Girls can do anything은, 나 정도는 돼야 할 수 있는 말이야. 너희 같은 사회부적응자가 아니라. 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