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12. 메울 수 없는 차이.
운현은 사지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가만히 내려다봤다.
출혈은 크지 않다. 상처도 그리 크지 않고.
다만 사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있다.
"씨발...나만 가지고 지랄이야...왜...나만 가지고 지랄이야!!"
"어쩌라고. 내가 본 게 너인데."
별다른 무기도 없는 은소령이 이번에야말로 죽이겠다는 마음을 담아 영창했다.
"<<살처분(殺處分) : 바늘지옥.>>"
그녀의 앞발 앞에서, 땅이 무수하게 솟구쳤다.
족히 수백 개.
하나 하나가 날카로운 바늘.
그 모두가 그의 몸을 꿰뚫기 위해 진군한다.
경찰들이 주목하고, 시민들도 주목했다. 더러는 폰을 들고 찍기도 한다.
"끄윽...유은...유은...유으으으은!!!!!"
눈 앞에 가득 달려오는 바늘을 바라보며, 운현은 포효했다.
푹! 푹푹!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박히는 바늘.
어찌나 길쭉하고 단단한지, 그의 등 뒤로 삐져 나왔다.
주르륵.
바늘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핏줄기.
금새 바닥에 도달해 적신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토크가 좋다!'의 미츠루,"
"마유리~데스!"
순식간에 방송 세트장이 지어지고, 촬영이 시작됐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둥근 원탁에 마련된 의자다.
옆으로 날 통역해주는 사람과, 6명의 여자아이들이 있고, 건너편에 MC 두 명이 자리하고 있는데, 6명은 아이돌이다.
세트장 바깥에는 무수히 많은 스탭들과, 여러 가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길드원들, 그리고 군인들이 있었다.
놀랐어.
설마 나를 출현시키기 위해 세트장을 통째로 가져올 줄이야. 게다가 출연진도 죄다 여기로 왔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걸 위해.
더 웃긴 거 알려줄까?
이거 생방송이야.
사람의 집념이라는 건 엄청나구나.
"오늘은 아주 특별한 게스트를 모셨는데요!"
"시대의 핫아이템! 모험가 중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미스터 유은씨 입니다!"
MC두 명이 뭐라고 뭐라고 오프닝을 하더니 돌연 나를 가리키며 두 손을 내민다.
그리고 옆에 있던 통역이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었다.
"어...안녕하세요. 시청자."
"무려B급 던전의 보스를 상대로도 여유를 부린 것이 인터넷 상으로도 화제가 되고 있죠!"
"맞아요! 그야말로 엄청난 공방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자세한 건 '렛츠 토크타임!'에 다룰 테니, 채널 돌리시면 안 돼요?"
시끌벅적하네.
일본표현으로 텐션이 높다고 하던가. 뭐랄까 방방 뛰는 느낌이다.
뭐...난 나쁠 거 없지만. 후후.
"이!어!서! 유은씨에 못지 않는 초특급 게스트! 오리콘 차트6주 연속 1위에 빛나는 일본 최고의 아이돌, '푸니푸니 걸즈'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둘!"
""안녕하세요!!""
활기찬 여섯 여자들.
상당히 귀엽고 파릇파릇한 아이들이다.
살짝 찾아보니 평균연령 20세에 여타 일본 아이돌과는 다르게 실력파 댄스 아이돌이라고 한다. 영상 몇 개 찾아보니까아주 대박이던데. 특히 색기담당의 단발머리 여자애가 아주 쩔더라.
흐흐.
이쯤 되면 다들 눈치 챘겠지?
내가 왜 얘들이랑 방송을 수락했는지.
후후후후....
"자! 그럼 본격적으로 토크를 시작해 볼까요? 헤헷."
대충 소개가 끝나고, 방송이 시작됐다.
일본이라곤 하지만 처음으로 방송 타는 건데 뭔가 긴장이 안 된다.
한동안은 푸니푸니 걸즈를 위주로 진행 되었다.
어차피 나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일본도 처음이고 해서 적당히 맞장구 쳐줄 뿐.
그러다가 방송 시작 십여분이 지난 뒤에, 본격적으로 내게 질문이 날아왔다.
"유은씨는 일본이 처음이시죠?"
"네."
"듣기로 한국 D급 던전을 최초로 정복하셨다고 하는데, 와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혹시 비결 같은 거라도 있나요?"
"비결이라...잘나면 됩니다."
"에에...대,대단한 대답이시네요. 하핫."
"와우! 엄청난 자신감! 왠지 능력과 맞물려 호감도가 상승하는 느낌인데요?"
처음엔 별 거 없는 질문이 나오다가, 좀 지나고 나니 본격적으로 일본 던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이번에 도쿄에서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났어요."
"맞아요. B급 던전이라니...세계 최초의 일이죠."
사건의 심각성을 감안했는지 살짝 가라앉은 톤으로 얘기한다.
"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예상 진압시간이 24시간을 훌쩍 넘겼는데요, 만약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얼마나 더 큰 피해가 났을지 생각만 해도 두려워요."
"다행히! 여기 계신 유은님이 무려 1시간 이라는 초 단시간 제압에 성공하셨는데요! 덕분에 넷에서는 일본의 영웅이라던가 도쿄신사라던가 여러가지 별명이 나오고 있어요!"
일본의 영웅? 뭔 개소리라니. 던전협회일본지부를 박살낸 게 난데.
그리고 도쿄도 내가가져갈 건데. 큭큭.
"아! 저도 그거 봤어요. 영상!"
유이라고 하는 푸니푸니 걸즈의 멤버 한 명이 호들갑 떨면서 끼어 들었다.
"막 거대한 주먹을 손가락 하나로 막아 선다거나, 손짓 하나로 거대한 보스를 무너뜨린다거나!"
오오. 꽤 유심히 본 모양인데.
"아아! 나도 봤어!"
"나도!"
손뼉까지 쳐 가면서 맞장구 치는 여자들.
귀엽네.
"유은씨도 그 영상 보셨나요?"
"아니요. 그건 뭐...별 거 아니니까요."
"꺄악! 별 거 아니래!"
"그리고그리고 화려한 의자와 함께 드러난 미모의 석상기사!! 와아! 이것도 엄청나게 화제에요!!"
별 게 다 화제되네. 차라리 소라누나라던가 유나씨라던가 소냐씨가 화제되야 하는 거 아닌가. '실물 초미녀'인데.
"거기에 유은씨를 따르는 미녀 길드원까지!"
응. 역시나.
"정말이지 화제의 화제를 몰고온 유은씨! 이 정도로 강하신 분이라면, 추후 도쿄 던전에서 활약할 것으로 예상 되는데요, 어떠신가요?!"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본다.
음...도쿄라....
하긴. 원래 맨하탄에서 활동하기로 했었으니까 도쿄에서 활동하는 것도 좋겠지.
"뭐...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도쿄에서 활동할 계획입니다."
"아앗! 그렇다면 도쿄 던전도 정복하시는 건가요?"
"던전협회 일본 지부의 일원이 되시는 건가요?"
마구 질문이 쏟아진다.
나는 담담하고 싸가지 없게 대답해 주었다.
"저보다 약한 기관의 일원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도쿄 던전은...제가 가지게 되겠죠."
"오오...이케맨(미남)포스! 엄청난 자신감!"
"와아...일개 지부를 상대로 자기보다 약하대...."
유이라고 했던가?
아까부터 날 무슨 우상취급하는데...그렇게 여겨준다면 따먹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암. 밤을 기대하거라.
"방금의 발언은 꽤나 구설수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본 지부보다 내가 더 강하다! 특급 헤드라인으로 나올 것 같네요 후후."
"아, 뭔가 제 말을 잘못 해석하신 모양이네요 ."
"오호? 역시 일본 지부보다 강하다는 건 농ㅡ."
"제 말은,"
일본지부가 나보다 약하다고?
너무 태연한 거 아니냐.
"던전 협회가 저보다 약하다는 겁니다."
"...헤?"
"길드와 관련해서 엄청난 세금을 가져가고 있던데, 저보다 한참이나 약해빠진 기관이 뭘 믿고 그러는 지 모르겠군요."
"아...하하...! 자,자신감이 엄청나시네요!"
"역시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 B급 보스몹을 잡을 수 있겠죠!"
MC들은 잠시 놀랐지만, 다시 웃는 표정을 회복하며 토크를 이어갔다.
역시 프로네.
.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3시간 분량의 특집 생방송이 끝났다.
후...나름 지치는데 이거.
"아...저기...!"
물을 마시고 있자니, 유이녀석이 다가왔다.
푸니푸니 걸즈의 리더이자 색기담당 아이돌.
춤도 잘 춰서 인기도 제일 많다고 하던데, 촬영 내내 날 우상처럼 쳐다보던 아이다.
<츠네다 유이>
호감도 : 87
속마음 : 와아...실물...실물이야...! 멋져!
상태 : 기쁨.
흠...영상속 나를 보고 반한 건가.
나쁘진 않네. 이러면 밤도 즐겁지.
"사인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6주 연속 1위하고 있는 아이돌이나한테 사인을 요구한다.
뭔가 신박한 기분인데.
"이거, 원래라면 제가 사인 받아야 하는데 말이죠."
"헤헤."
근데 나 사인이라고는 통장 만들때 쓰던 거 밖에 없는데. 이런 걸로 되려나.
"저기요."
막 사인을 해주려던 찰나,
MC를 보며 방송을 끌어가던 아나운서가 내게 다가왔다.
단발머리에 정갈한 정장차림.
딱 봐도 미모의 아나운서지만, 방송에서는 쾌활한 모습으로 토크쇼를 주도해 갔었다.
근데 촬영이 끝나니까 바로 정색.
무슨 우디르세요?
"잠깐 얘기할 수 있어요?"
능숙한 한국어로 말한다.
흠...뭐지? 아나운서니까 한국어를 해도 별로 놀랍진 않은데...따로 할 얘기가 있나? 얘도 상납? 그건 못 들었는데.
"유이씨. 이따 얘기해요."
"아...네...."
나는 사인지를 유이에게 돌려주고, 아나운서를 따라갔다.
섹시한 오피스룩의 엉덩이가 씰룩대는 모습이 보인다.
이 여자도 꽤나....
"조건이 뭐죠?"
"흠...뭐가 말입니까?"
"제가 듣기로, 푸니푸니 걸즈와 밤을 함께 하기로 했다던데...맞아요?"
"네."
"...."
딱히 숨길 필요도 없어서 즉답했더니 썩은 얼굴이 된다.
"하...이 인간들 진짜...."
어이없는지 피식 웃는다.
아까의 그 쾌활하고 웃음 넘치는 MC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
"그 아이들 몇 살인줄 알아요?"
"평균나이 20살이라던데요."
"근데 그걸알았다고 했어요?"
"어차피 성인인데 안 됩니까?"
"...나이는 그렇다 치고, 이거 성상납이잖아요. 이런 거 받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왜 저한테 따져요? 당신네 소속사한테 따지시지. 같다면서요?"
"따질거에요. 당연히. 근데 그걸 떠나서, 당신도 사람이면 이런거 받으면 안 되죠. 차라리 출현료를 높게 받던가."
"왜 안 되는데요?"
"그야 당연히ㅡ."
"이상한 사람이네. 안된다고 생각하면 본인은 하지 마세요. 난 할 거니까. 주겠다는 걸 왜 마다해. 그것도 아이돌인데."
"...인간 쓰레기."
"맘대로 생각해."
상대할 필요도 없었구만~ 오늘은 먹을 애들 많으니까 봐준다. 나중에 또 그러면 그땐 확 먹어버릴 거야.
"걔들 19살 20살이야!! 18살짜리도 있다고!!"
내등 뒤로 꽂히는 그녀의 외침.
미안하지만 난 그딴 거 아무짝에도 상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