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11. 도쿄 패닉.
+++
한국에서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을 무렵,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발빠른 행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을 위한 부대를 지정하고 이동하는 한 편, 맨하탄의 상위 길드 및 상위 모험가를 한 자리에 모았다.
"얼마나 도착했지?"
"길드장 및 부길드장이 총 32명,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강자가 376명입니다."
"...적어. 출현하는 건 B급 던전이라고. 이래서는 도저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
얼핏 저 수가 많다 여겨질 수 있다.
일단 길드를 대표하는 이들만 32명이라는 건, 32개의 길드가 이 작전에 참여했다는 것이니, 10명씩만 잡아도 벌써 320명이다.
거기에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강자, 즉 낭인은 무려 376명.
공방 13,000이상으로 커트(공방 수치 중 낮은 수치에적용)했음에도 이 정도의 인원이 왔다는 건, 그 만큼 맨하탄 던전이 유명하고 강력한집단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맨하탄 던전(C급)은 지구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수도 뉴욕을 4분의 1이나 날려버린 던전이다. 그 위험도는 여타 던전과 궤를 달리했고, 던전 자체도 굉장히 깊고 거대해서 필수적으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하는 구조다.
어지간한 초강자가 아닌 이상에야 혼자 사냥하며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저 수는 별 의미가 없다. 최소 4에서 8로 나누어야 하고, 중위값 6명으로 나누면 60여팀 정도가 나온다.
거기에 이제부터 공략해야 할 던전은 맨하탄 보다도 급이 높은 B급 던전. 적어도 두세 팀이 합쳐야 유의미한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손발이 쉽게 맞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출현하는 던전에 대해 아무런 정보와 공략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정말 택도 없는 수다.
미국이 이정도인데 다른 나라? 하하하....
그래서 일본과 가까이 있으면서 일본과는 넘사벽 급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거기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의 육군은 화력에 모든 것을 몰빵한 듯한 괴물 화력을 지니고 있으니, 던전과 그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데에는 제격일 것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중국이랑 러시아는? 걔네들 화력도 장난 아닌데 왜 걔네는 빼시나? 거리도 별 차이 없을 텐데.'
당연한 의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의 영역권이다.
던전이 출현하기 직전만 해도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은 패권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자신의 영역에 상대방 군대가들어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컨데 일본 지부장이 한국군에 대해 극렬한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던전이 출현한 이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다. 여전히 미중러는 패권전쟁을 하고 있고, 던전협회의 등장과 전 세계 던전의 달러시장으로 인해 미국이 한 발 앞섰을 뿐,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물론...B급 던전의 힘이 예상보다 너무 강력하여 한국군 주한미군+주일미군으로도 감당이 안 된다면 그땐 어쩔 수 없다. 일본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 보다는 아득히 나으니까.
"들어가시죠."
그렇게,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던 총 본부장이 안으로 들어가자, 시끌시끌하던 곳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아무리 멋대로 날뛰는 모험가라 할지라도 전 세계의 모험가와 던전시티를 쥐락펴락하는 본부장 앞에서는 한 수 접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눈에띄어서 좋을 것도 없다.
"왔네. 햐~ 언제 봐도 저 양반 카리스마는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 걸지 마라."
"야.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라. 상처받잖냐."
"시끄럽다."
"와. 너무하네."
렉스는 입을 쭉 내밀며 푸념했다.
도대체 이 인간은 얼굴 이쁘고 몸매 좋고 능력 좋은 거 빼면 정말 하나도 정이 안 간다.
'응? 거의 다 가진 거잖아? 제기랄. 이왕 다 가진 거 성격도 좋지 그랬냐.'
환상적인 외모를 보고 이렇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지만, 역시 차가운 성격과 언행은 껄끄럽다.
'그래도 뭐...이것도 꽤 발전한 거지. 예전에는 날 죽이려 했으니까. 흐흐. 겉으로는이래도 꽤 정을 주고 있을 거야.'
인간은 희망으로 살아간다고 누가 그랬던가.
지금의 그가 딱 그랬다.
언젠가 반드시 이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리라는 그 희망과 열망을 연료로 웃음을 피어 올렸다.
'역겨운 놈.'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루크레시아는 조금의 호의도 그에게 담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야 쓸모가 있으니까 살려두고 접근하게 놔두는 것 뿐, 필요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쳐내버릴 생각이다.
'도쿄에 가서 떨어뜨려 버릴까? 별로 강한 놈도 아니니까 몬스터 앞에 던져두기만 해도 알아서 죽을 거야.'
공방 14,000에 이르는 렉스를 마치 초보 취급하는 그녀.
하지만 그녀에겐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다.
"모두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리핑이 시작됐다.
협회장이자 총 본부장인 중년의 남자가 엄숙한 얼굴로 PPT를 보여주며 발표했다.
"이미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이라면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며칠 내에 일본 도쿄에서 B급 던전이 출현할 예정입니다."
웅성웅성.
회장의 소란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다들 듣긴 했지만 회장에게 직접 들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정확한 장소는 일본의 엠페러가 있는 '고쿄'입니다. 이로 인해 예상되는 최소 피해는...도쿄의붕괴. 최대 피해는 일본의 멸망입니다."
웅성웅성.
소란이 더 커졌다.
보다못한 회장이 마이크를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아시다시피 던전이 처음 출몰하면, 던전이 완벽하게 형상을 잡는 동안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마기의 비호가 없으니, 군대의 막강한 화력으로 퍼부어 버리면 소멸 시킬 수 있습니다. B급이라 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죠. 하지만...."
잠시말을 멈췄던 그가 다시 이어갔다.
회장은 매우 조용했다.
"언제까지나 그게 통하리란 법이 없습니다. 이론상 던전은 SSS급까지 존재하며, B급부터 따져도 앞으로 4단계나 남았습니다. 그들의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며, 어쩌면...세계 자체를 파멸시킬 힘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군대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느리고,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험가는 개개인에 가까우며,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심지어 던전 안에서도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군대가 아닌 우리 모험가가 막아야 합니다."
그는 그렇게 서론을 열더니, 본격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도쿄는 초 비상 사태이며, 도쿄를 비롯한 도쿄권 전역에 비상 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수천만에 달하는 인구를 며칠만에 피난 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 해서, 우리 협회 수뇌부는 일본 정부와의 긴밀한 회의 끝에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모든 전력을 국민 대피에 쏟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군용 헬기, 군용차량, 심지어 탱크까지 동원하여 최대한 많은 국민을 대피시킬 것입니다.
따라서, 출현하는 던전을 공격하는 건 인근 국가인 한국군이 될 것입니다."
웅성웅성.
이번에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일본인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난 것이다.
"아직 한국군과의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만...오늘 내로 이루어질 것이며, 최대 6개 사단을 생각중에 있습니다."
"ふざけるな!(웃기지마!)"
한 일본인이 그렇게 외쳤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주타이트한 일정입니다. 한국은 6개사단을 일시에 수송할 여력이 없으며, 가능하다 해도 북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모로 복잡한 정치적인 제약이 걸려 있죠.
하지만 어떻게든 해낼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과 제가 알고 있는 세계가 유지됩니다.
군대의 지원은 이렇게만 알고 계시고...이제 우리 모험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기나긴 시간.
B급 던전의 출현이라는 초유의 사태이기에 해야 할 말이 너무나 많았다.
"마지막으로...이 자리에는 중국인, 한국인, 여타 일본과 좋지 않은 과거를 가진 국적의 분들이 계실 겁니다. 인류의 안녕을 위해 감정은 조금만 접어 두시고, 부디 최선을 다해 싸워 주십시오."
+++
"...안됩니다."
"각하!"
유은을 만나기 전, 급한 일이라는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해온 대통령과 만나게 된 한국 지부장은, 그의 말에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건 단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 일본이 붕괴하면...우리나라 역시 절대 안심할 수 없단 말입니다!"
"아. 알지요. 당연히. 저라고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지금 우리가 외국으로 대규모 파병을 할 여력이 없어요. 1개사단을 파병하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육군만 갑니까? 탱크만 가요? 군함을 움직이는 비용은, 또 공군을 움직이는 비용은? 하나 같이 비싼 기름을 뿌려대면서 움직이는 것들입니다. 그걸 타국을 위해 파병하고 심지어 사단 단위로 움직이다니요. 게다가 작전상 사상자가 필히 발생할 텐데, 우리나란 모병제 국가가 아니에요.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던전이 출현한 것도 아닌데, 징병으로 온 장병들이 대량으로 희생되기라도 하면...어우. 그거 감당 못합니다."
"...."
어이가 없다.
물론 이릴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인류의 대위기 속에서 너무나 태평하다.
애초에 군을 움직이는 비용이라니...그런 건 당연히 일본이 부담한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는 건 경제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인 대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군대가 빠져나간 만큼, 북한을 견제할 수단이 필요하죠. 미국과 일본이 이에 대해 양보해 준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야 물론 대가야 받을 것이다.
"보아하니 주한미군도 일부 일본으로 가는 모양이던데...이런 상황에 북한이중국과 짜고 내려오기라도 하면 너무나 큰일이죠."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중국이 미쳤다고ㅡ."
"우리야 그걸 알죠. 하지만 국민도 그걸 알고 있습니까?"
"...."
"우린 국민을 설득할 의무가 있고, 그럴 만한 카드가 필요합니다."
"뭘...원하시는 겁니까?"
결코 예사롭지 않은 걸 요구할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통령의 말은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핵. 그거 허락해 준다면 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