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08. 빼앗긴 자.
수화기 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적잖게 놀랐겠지. 운명도 이런 운명이 있을까.
-너...그...게 무슨...소리야?
"다 들었으면서 왜 못 들은 척이야..나 그놈한테 시집간다고. 아니, 시집도 아니지. 거의 종으로 팔려가는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몰라 병신아!! 왜 나한테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니가 진작에...진작에 날 받았으면 됐잖아. 대체 몇 년을 기다리길 바란 거야? 너 보고나서 14년이야. 성인 되고나서도 9년 지났고. 니가 자초한 일이야. 그 병신 같은 년한테 한눈만 안 팔았어도...."
다시 감정이 북받친 세희는재차 울음을 터뜨릴 뻔 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여기서 또 울어버리면 모든 게 다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기만 했어도...이럴 일 없었잖아...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자상한 분인데...내가 얼마나 복받은 환경이었는데...우리 할 수 있었잖아? 왜 그걸 모르고 차버렸니? 진짜 속상해...."
세희는 한동안 그렇게 감정을 풀어냈다.
말한은 그녀도, 듣는 그도참담한 감정을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느꼈다.
이것이 생이별이란 녀석인가. 이것이 인생인가.
-내가...내가 직접 말씀 드릴게. 이제 널ㅡ.
"뭐래 병신이. 할아버지가 너 같은 걸 왜 만나줘? 니가 뭐라고? 착각하지 마. 나랑 너, 하늘과 땅 차이야. 그나마 할아버지 아니었으면 너 벌써 우리 아빠한테 죽었어. 알아?"
-....
"근데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뻐팅기고 딴년 만나고 그래? 난 너때문에 지금껏 연애 한 번 못해봤는데, 넌 뭐가...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래놓고 이젠 기다려 달라? 며칠 전엔 혹했지. 솔직히 지금도...근데 끝났어. 늦었다고."
말하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천만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
하지만 할 수 없다.
그녀와 그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고, 할아버지의 묵인이 없으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기회를 수년간 외면해 왔으니, 어쩌면 이런 결과도 당연한 것. 조금은 쌤통이란 마음도들었다.
"아무튼...그렇게 됐으니까...이제 포기하고 새인생 살아. 그놈은 둘째치고...우리 할아버지가 가만 안 있을 테니까...안녕."
-잠ㅡ.
"사랑했다 바보야. 앞으론 있을 때 잘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는 곧바로 걸려오는 번호를 바라보다 떨리는 엄지로 수신을 거부했다.
"...끝났다고 병신아."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화장을 고쳤다.
"가요. 그 시녀장이란 사람한테."
"예. 이사님."
+++
-삑.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ㅡ.
걸자마자 끊기는 전화. 아예 수신거부가 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해 휴대폰을 던진다. 날아간 휴대폰이 벽에 부딪히며 액정이 나가버렸다.
"씨바아아아아아알!!!"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끌어내 무너뜨리고, 집어던지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렇게 온 집안이쓰레기장이 되었을 때. 그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고 감정을 추스렸다.
"후우...후우...."
그러고보니 수상한 점.
세희는 분명 유은에게 시집간다고 했다.
근데 유은 그놈은 소라와 바람난 놈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된...거지?"
세희가 말한 대로, 그녀와 그는 신분 자체가 틀리다.
뭐, 민주주의 시대이니 신분같은 건 없다고 빼액거릴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인간과 사회가 존재하는 이상, 신분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을뿐.
세희는 대한민국 10대 재벌 총수의 손녀고, 그는 자그마한 중소기업의 아들. 당연히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를 위해 시간을 내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생기는 의문 한 가지.
유은이라는 놈은 대체 어떻게 세희를 얻었단 말인가? 그녀의 말로 미루어 볼 때 할아버지가 그와의 혼인을 결정한 것 같은데, 그럼 그만한 힘이나 세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그것도 '첩'으로 보낼 정도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겠지.
"설마...소라도...!"
그렇다면 소라역시 그 힘에 의해 빼앗긴 게 아닐까. 소라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모종의 협박 같은 걸로 인해 거역할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최악의 경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걸 수도 있다.
"씨발...."
그렇게 생각하니,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몇 배는 더 엉켰다.
벅벅.
양 손으로 머리를 마구 긁었다.
짜증과 분노로 미칠 것 같다.
"후...아냐. 그년은...내가 직접 봤어. 강제로 당하거나 협박당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어."
그는마구잡이로떠오르는 생각을 천천히 정리했다.
일단은 상황을 파악해야 했으니까.
소라가 유은과 바람났고,
그 유은에게 세희가 시집간다.
이런 병신 같은 상황이 아쉽게도 영화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났다.
"...결국 해야할 건 하나네."
결론을 내리고 나니, 복잡했던 머리가 오히려 단순해졌다.
사실 간단하지 않은가? 소라와 바람난 것도 유은이고, 세희를 데려간 것도 유은이다.
그럼 그 유은을 조지면된다.
처음부터,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그저 세희만 곁에 없을 뿐.
"그두 년놈을 죽이고, 세희를 구하겠어."
그는 병신 같은 결의를 다지며 눈을 부릅떴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정식 고문 변호사로 선임된 이소냐라고 해요. 잘부탁드려요."
새하얀 미녀.
뭔가 분위기가 그냥 새하얀 여인이 모두가 모인 곳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와아...존나 이쁘다...."
한 길드원의 감탄. 같은 여자임에도 어쩔 수 없이 감탄하고 만다.
"근데 변호사라고? 엄청 어려보이는데...미성년자 아냐?"
"동안이겠지...한 스물일곱쯤? 그 정도 되지 않을까."
"에이. 너무 갔다. 고딩 정도로 보이는데 많이 가도 스물다섯정도겠지."
흐흐. 귀여운 녀석들.
27? 25?
하하핫.
좀 더 쓰지 그러니.
"어,엄마?!!!"
앉아있던 유나씨가 크게 놀라며 일어섰다.
"안녕."
그에 살짝 손을 흔들어 주는 소냐씨.
나랑 단 둘이 있을 때는 온갖 표정을 보여주는 그녀지만, 지금 이 자리, 심지어 딸에게도 냉정한 표정만을 보여주었다. 마치 최신형 미녀 안드로이드 로봇 같다.
"어,어떻게 된...아니 그보다 뭐에요 그 모습은!!"
처억 하며 손가락으로 소냐씨를 가리킨다.
"뭐가?"
"아니...엄청 어려졌잖아요!!!"
"난 원래 동안이었잖니."
"그런 게 아니라...!"
놀라는 모습 귀여워라~.
"엥? 유나씨 엄마라고?"
"뭐야 그게? 잘못 들었나?"
"아니...이게 무슨 소리야?"
길드원들이 웅성거린다.
심지어 한켠에 있던 여경들도 어이없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걸쳤다.
"유나씨 올해로 스물넷 아니었어?"
"어. 나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학교 졸업하자마자 낳았어도 최소 마흔넷이라는 거잖아?"
"고딩때 미혼모 됐어도 최소 마흔이야."
"...."
엄청난 시선들이 소냐씨에게 꽂혔다.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는 받아낸다.
하긴. 엄청나긴 하지. 좀 섹시한 기운을 풍기는 걸 빼면 빼박 여고생인걸.
게다가 몸도...흐흐. 처녀 여고생 버전 소냐씨는 진짜 최고였지. 음음. 다시 먹고 싶어.
짝짝.
나는 박수를 치며 시선을 내게 집중시켰다.
"자. 놀라는 건 나중에 한꺼번에 하시고, 사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본 길길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각 실무진, 간부진 등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겁니다. 그동안 좀 어수선해서 하지 못했던 점 양해 부탁드리고요. 일단 소냐씨는 저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네. 유은씨."
시종일관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상큼하게 웃었다.
아아. 요 이쁜 것! 앙큼한 것! 꼭 저렇게 내 좆을 세워놓고 들어간단 말이지. 흐흐. 오늘밤 각오해요.
"자, 다음 호명하는 분들 나오세요."
나는 나의 충실한 노예 임서현과, 첫여자인 소라누나를 불렀다.
"이두 분이 앞으로 이 길드를 이끌어갈 부길드장이십니다."
실질적인 건 서현이 담당하게 될 거다. 누나는 뭐랄까...명예직? 솔직히 길드 관련해서는 할 줄 아는 거 별로 없잖아. 나중에 힐러들 늘어나면 그때 새로 개편하지 뭐.
유나씨는 안 불렀다. 왜냐면 아직 매운갈비집 소속이니까...진짜 조만간 박살을 내야겠어 거기. 소냐씨가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늦으면 그냥 내가 가야지. 튜토리얼 던전도 점령해 버리면 되잖아.
"자, 다음으로, 이은주씨."
"네."
내 좆물받이1호.
당연히 얘는 다른 좆물받이를 관리하는 역할을 할 거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런 말을 쓸 수는 없고,
"비서실장입니다. 제 직속이죠."
나름 그럴듯한 직함을 주었다.
"일단 경찰에서 오신 분들은 임시적으로 은주씨의 말에 따라주세요."
"...알겠습니다."
은경감이 대표로 대답한다.
이후에도 며칠 전에 시녀로 만들었던 길드원 10명을 간부진으로 소개하며 서현과 소라누나에게 붙여 주었다.
"나머지 세부적인 조직도는 며칠 내로 정해질 겁니다. 각자 맡은바 자리에서 힘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