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던전은 나만의 기회 (77)화 (76/517)



〈 77화 〉09.강세희.

09.강세희.

"할...아버지...갑자기 그게...."

그 일이 있은 후로 며칠.
세희는 뜬금없이 불려가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너도 이제 29이다. 이 정도면 많이 기다려 줬지."
"하,할아버지. 올해만...올해까지만 기다ㅡ."
"시끄럽다! 그래도  생각해서 운현이지 운명인지 하는 망할 농을 지켜봤건만, 별 볼일 없는 둘째치고 애초에 너한테 마음이 없더만. 도대체 뭘 보고 더 기다려 달라는게야! 지금까지만 해도 자그마치 9년이다 9년!"
"...."


세희는 강하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운현이 받아줄 텐데. 그런데 이렇게 다 와서 이런 일이라니?

"...그이 파혼했어요. 그리고  받아준다고도 했고요! 조금만...진짜 조금만  있으면ㅡ."
"이년이 이래도!"

짜악!


회장이 채찍 같은 회초리를 바닥에 내리쳤다.
깜짝 놀란 세희가 움찔했다.

"그래. 그놈이 파혼한  나도 안다. 근데, 근본도 없는 그런 놈이감히 혜성 그룹의 손녀딸을 받아준다고? 받아줘? 어디 건방지게 입을 놀려!"
"그,그런 뜻이 아니라...."
"회사 망신을 시켜도 정도가 있지! 지금 당장 결혼한다 해도 허락 못해!!"
"할아버지...."
"너도 이만하면 정신 차려야지.  나이가 어디 적은 나이냐? 나 때는 스물이면 결혼해서 애  넷씩 낳고 그랬어!"
"...."


세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날카롭던 눈매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어도 소용 없다. 성공했다면 모를까,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실패하기만 한 네 사랑은 이제 끝이다. 더 이상  돼."

결국 그녀는 소리없이 흐느꼈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한다면 이미 결정사항. 거부권 같은 건 없다.


 거역하고 싶다면 그와 연을 끊고 혜성 그룹을 나오는 수밖에.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룹과 등지고 나와서 운현과 결혼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돈이 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고있는 대한민국에서 10대 그룹인 혜성 그룹이 적극적인 방해를 하면 먹고 사는  조차 힘들 수도 있다.
어쩌면 생명 그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

'나는 괜찮아...아무리 그래도 나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운현은....'

혼자라면 차라리 가능할 텐데. 혼자가아니라 수 없다.


'개새끼...그러니까...그러니까. 처음부터  선택했으면 좋았잖아...이 병신새끼야....'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회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른 그치라는 듯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자가 네가 첩으로 들어갈 남자다. 내일부터 보내기로 얘기 됐으니까 처신 잘 하고."

갑자기 눈물이  그쳤다.
첩이라니?


"첩...이라뇨?"


"그럼, 29이나 먹어놓고 본처로 갈  있을  알았느냐."
"...."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첩이라니? 21세기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첩이라니?


"여자를 많이 밝히긴 하지만 능력에 비하면 그런  흠도 아니지. 명심해라.  혜성 그룹 회장인 이 나의 손녀딸이야. 결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켜선 안 된다."
"잠...깐만요! 그런게 어딨어요? 첩이라니! 지금은 21세기라구요!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ㅡ."
"원래 정재계는 시대의 흐름이 늦는 법이다. 잠자코 순종해라."
"그런...첩 같은 건 완전 불법이잖아요! 결혼도 못 한다고요! 이거야말로명예가 실추되ㅡ."
"시끄럽다!! 오냐오냐 키워줬더니 따박따박 말대꾸나 하고. 가라면 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
"결혼 같은  안 해도 좋다. 어차피  보내는이유는 거래 반 보험 반이니까."
"...보험이요?"
"그래. 그는 장차 세계를 쥐락펴락할 남자다. 그에 비하면 우리 그룹 따윈 아직 애송이지."
"대체 누구길래...."


누가 있어 회장으로 하여금 이토록 경외케 만들 수 있는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든 그녀는, 전신의 모든 피가 말라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너무나 익숙한 얼굴.
동시에 죽이고픈 얼굴.

운현을 모욕하고, 자신을 모욕한 그를 그녀가 잊을 리 없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해 주려고 이까지 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첩이 되라고?


-난널 살 수도 있는 사람이야.

오싹.

순간 유은에게 들었던 말이 재생되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보니 그날, 대놓고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추진했었다.

'설마...진짜로 날...샀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야 정략결혼이 어느 정도 매매의 형태를 띄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노골적인 느낌이 든다.


애초에 첩 같은 말도  되는 단어가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이상하다.

"아직은 고작 도시 하나지. 하지만 그의 힘은 진짜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어. 1년만 지나도 전 세계가 주목할 거고, 5년이면 지구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일 거다. 그런 남자의 첩이라면 나쁠 거 없지. 오히려 지금 주가가 낮을 때 투자하는 게 훌륭한 사업가의 일이다."

투자랜다.
누구는 인생 자체가 망하게 생겼는데 그걸 투자로 표현한다.

"...할아버지, 정말 이러실 거에요?"
"그래."
"...."
"내일, 적어둔 주소로 옮겨라. 앞으로 거기가 네 집이다.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

적힌 주소지는 그녀가 며칠 전 방문했던 그곳이다. 하렘궁이라는 길드의 본거지.
즉, 유은의 집이다.

절망.
그 단어가 머리에 새겨졌다.

'씨발....'


계속해서 나오는 욕지거리.
이젠 운현과의 일생은  이상 바랄 수 없다.
은밀하게 밀회하는 정도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와 이어질 수는 없다.

'내일...이라고...'

거기다 시간까지 빠듯하다. 당장 내일 부터 그쪽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


'오늘...만나자. 만나서 내 처녀라도...운현에게주자.'

아주 오랫동안 간직해온 것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쁨을 주기 위해 갖은 유혹도 참아냈다.

 결과물을, 그 건방진 쓰레기놈한테 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혹시라도 마지막이니 뭐니 하면서 그놈을 만날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오늘  아주 바쁘니까."
"...하다못해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줘요."
"안된다."
"할아버지!"
"네년이 무슨 짓을  줄 알고!! 내가 니 마음 하나 못 읽을 줄 아느냐!"
"...."

세희가 벌개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애처럼 구는 건 어제까지로 충분하다."

회장은 말을 마치고 턱짓으로 내보내라는 지시를 보냈다.


"이사님, 가시죠."
"...실망이에요 할아버지."
"흥."

일어나 돌아서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최악의 형태로 이뤄졌다.


회장실을 나오고, 따라 나온 비서가 그녀에게 찰싹 붙었다.


"이사님, 1시간 후에 그쪽 시녀장이라는 사람과 미팅이 있습니다."
"시녀장...이라뇨?"
"하렘궁 길드의 전신이라 할 수 이는 스톤 에이지 길드의 길드장이었던 사람입니다. 임서현이라고,사실상 길드를 총괄하고 있다 보시면 됩니다."
"...전화좀 하고 올게요."
"예. 그러시죠."


그녀는 착잡한 마음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고층빌딩 밑으로 개미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띡띡띡.
뚜르르르.

운현에게 통하는 소리.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받지않다가 소리샘으로 연결되기가 부지기수였지만, 오늘은 다행히도 제때에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

입을 열어 보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붕어처럼 뻐끔대기만 할 뿐.

주륵.

양쪽 눈에서는 쉴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14년을 이은 끝에 결국 실패하고만 사랑.
그 마침표를 찍는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뭐야. 왜 전화해 놓고 말이 없어.
"...야."
-...너 우냐?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그가 걱정스레 묻는다.
그제야 그녀는 말을 텄다.


"내가 너 기다려준다고 했지?"
-...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미안하다고도ㅡ.
"나 결혼해 병신아."
-...뭐?
"그러게 말했지. 진작에 선택하라고.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어? 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너...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늦었어...늦었다고. 당장 내일부터 쓰레기 같은 새끼한테 첩노릇 하면서 아양 떨어야 돼. 알겠어? 너 때문이야. 내가 고백할 때, 그때...받아줬으면 됐잖아. 근데 그걸...."
-....
"이렇게...흑...으흑...."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세희.
평소 이름에서 느껴지는  만큼이나 강하다고 평가받는 여인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울 수밖에 없었다.


운현도 그녀가 우는 동안 침묵했다.
달리 해줄 말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도 꽤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 해야할까,세희라면 언제나 옆에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나 할까.
이번에도 그녀는 기다려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보험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 정말로 그녀는 떠나는 것이다.
그가 그녀를 떠나는  아니라, 그녀가 그를 떠나는 것. 그게 상당한 충격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거 말하려고 전화한 거야."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리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여전히 물기가 서린 말투였지만, 처음보다는 나아졌다.

-...지금 만날 수 있어?
"아니."
-그럼 내일ㅡ.
"말했잖아. 내일 그새끼한테 간다고."
-...이렇게 갑자기...
"뭐라는 거야 병신이...나 29이야.. 원래 몇 년도  전에 결혼했어야  걸, 할아버지가 기다려 준 거야. 너 잡으라고. 어? 너 잡으라고 기다려 줬다고 할아버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이제 끝이야 병신아...다 끝이라고...할아버지가...이제  기다려줘. 내년까지만 이라고 했는데...그래도 안 된대. 끝이야...."
-....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못했다.
소라에 이어 이젠 세희까지. 마음 한 구석이..아니, 마음 자체가 갈기갈기 찢어져 버린 것 같다.




"너 그놈한테 복수한다고 했지? 유은이라는 새끼한테."
-...어.

약간 물기가 어린 목소리. 운현도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도 그걸 느꼈지만, 그리고 조금 기뻤지만, 이미 다 끝났다는 생각에 일부러냉정하게 말했다.


"포기해."
-뭐?
"걔가 내 남편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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