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04.여기 우리구역인데? 응. 아냐~
[홍염의 마녀]라는 다소 유치한 별명을 갖고 있는 그녀는, 화염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아크메이지다. 히든직업 답게 우수한 스탯 상승률과 공/방 효율을 보여주며, 마침내는 강남 던전 최상위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풀장비를 갖춘 그녀의 공격력은 무려 8천!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쉽게 볼 수 없었다.
"뭐, 살다 보면 이곳 저곳에서 이레귤러가 터지는 법이지."
이어서 입을 연 이는 무테안경을 낀 냉정한 표정의 남자.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지만, 막대한 재산과 아이템을 통하여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다.
태연하게 뱉어진 말에, 홍염의 마녀 - 송현아는 잔뜩 불만의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봐, 지금 이게 그냥 이레귤러로 보여? 혼자 스톤에이지 정예를 해치웠대잖아. 심지어 본거지에 쳐들어가기도 했고. 그럼 최소한 공격력 1만은 넘는다고 해야 하지 않아? 이게 그냥 이레귤러라고?"
"흥. 너처럼공격력에 집착하는 천박한 여자에겐 그럴 수도 있겠지."
"뭐야?!"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뭐든지 흐름이라는 게 있는 법. 역사를 알면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뭔 개소리야."
어이없다는 웃음에, 그가 안경을 중지로 올리면서 대답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우민의 특권이다. 누리도록."
"이 미친 새끼가."
현아가 불의 기운을 풀풀 날리며 박차고 일어서자, 그녀의 근처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어? 릴렉스! 릴렉스!!"
"야 이 미친년아!!"
당연하게도 주변에서 원성이 마구 날아왔다.
"후후.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천박하다는 증거다."
"이새끼...!"
"일단 진정하자고요."
자칫하면 회의가 파토날 뻔한 상황. 그걸 가까스로 잠재운 남자가 다시 회의를 이어갔다.
"역사도 중요하지만, 이전과의 이레귤러와 동일시 하기에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들었지?"
"흥. 가치 없는 말이다."
"...조용히 해주세요...이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정예로는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고, 우리와 같은 길드 마스터급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그 말은 즉, 우리가 힘을 합해서 그 애송이 토벌에 나서자는 건가?"
온 몸이 근육질로 가득 차있고 탄탄한 중갑을 입고 있는 남자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급이 있지, 세 마리 애송이 때문에 마스터급이 연합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안 돼도 해야 합니다. 이미 모험가들 사이에서 이 일이 퍼지고 있고, 자칫하면 이레귤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패턴은 다들 아실 텐데요?"
"킥킥. 이 중에도 몇 명 그렇게 올라온 녀석들이 있지."
"우리만 해도 이 던전은 포화입니다. 더 이상 새로운 세력이 나눠먹을 구역 같은 건 없습니다."
그의 말 대로, 이미 강남 던전은 포화상태다.
십수개의 길드가 던전을 세세하게 나누었고, 각 정예팀이 던전을 순찰하며 일반 모험가에게 통행료를 걷거나 거부할 시 척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정부의 눈치도 있고, 일반 모험가들의 눈도 결코 무시할 순 없었기에 주인이 없는 구역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유은은 일주일 간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해왔기에 그들의 터치를 받지 않았던 것.
하지만 이젠 얘기가 다르다.
그는 스톤에이지의 영역을 침범했고, 그 과정에서 정예 맴버를 죽여 버렸다. 이는 스톤에이지 뿐만 아니라 이 구역에서 담합하고 있는 연합에 대한 도전장. 결코 봐줄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처럼 연합하고 있는 이유는, 싸우지 않고 화합하며 서로의 구역에서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새로운 세력이 만들어지면...다시 우리끼리 싸워야 할 지도 모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톤에이지 마스터가 참석을 안 했던데...그 분에게는 현아씨가 연락을 취해 주십시오."
"...왜 내가..."
"제일 친하지 않습니까."
"...흥."
+++
지루하고 기분 나쁜 회의가 끝나고, 송현아는 곧장 스톤에이지 본거지로 향했다.
화염마탑의 탑주인 그녀와 스톤에이지 길드마스터인 서현은 옛날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무려 중학교 동창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던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무슨 일 있나?"
무단 불참.
친구로서 걱정도 되었지만, 자신에게조차 아무 말이 없는 그녀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품었다.
"나한텐 말해줘도 되잖아? 짜증나는 계집애 같으니."
그렇게 투덜대며 걸어가자, 주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걸 즐기듯 긴 적발을 손으로 스윽 넘겨주고는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고레벨 모험가인데다 화염계열 아크메이지 직업 자체가 매력 스탯을 꽤 많이 올려 주었기 때문에 그녀의 미모는 뭇 남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게다가 화려하면서도 반쯤 벗겨진 듯한 그녀의 복장은 풍만한 몸매도 훤히 보여주기 때문에 이 근방에서는 꽤 유명했다.
"오오. 현아님이다!"
"한 번만 만져봤으면...스읍."
"너 그러다 통구이된다."
그녀를 보며 연신 수근대는 남자들.
현아는 그런 끈적한 시선들이 기분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시선 자체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이 맘에 들었다. 모두가 선망하고모두가 우러러보는 듯한 이 상황.
'훗. 어딜 넘봐? 능력도 없으면서.'
파격적인 복장과는 달리, 그녀는 성적으로 꽤 보수적이었다. 특히 성관계에 관해서는 결혼을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인정한 남자가 아니면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신념까지 갖고 있었다.
그녀가 인정할만한 남자라면 적어도 그녀보단 강해야 할 것이고, 길드 마스터급의 카리스마도 갖추어야 한다.거기에 돈도 많다면 금상첨화.
물론 아까 그 안경잡이 같은 재수 없는 새끼는 제외다.
"어? 혀,현아님? 안녕하세요."
"안녕. 서현 만나러 왔는데, 얘기 좀 전해줄래?"
"아, 네!"
안내 데스크의 여인이 허겁지겁 연락을 넣는다.
"흠...."
그 사이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여기저기 박살이 나있다.
"좀 짜져 있어주면 안 되나~ 짜증나네."
"네?"
"아, 너한테 한 말 아냐."
"아...네. 저, 들어오시랍니다."
"응. 땡큐."
그녀는 로비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긴 복도를 걸어나갔다.
중간중간 꽤 많은 길드원들과 마주쳤지만, 이전에 방문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수가 줄어 있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가 없어?'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여자였다.
물론 여성 모험가도 굉장히 많고, 스톤에이지에 속한 여성 길드원도 꽤 된다지만, 이렇게까지 남자가 눈에 안 띄는 건 말이 안 된다.
똑똑.
그렇게 의문을 품고 설현의 방 앞에 도착한 그녀.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에...입이 떡 벌어지는 복장을 하고 있는 서현이 있었다.
"어머. 어서와."
"뭐,뭐야 그 복장은...."
"아, 이거?"
서현이 싱긋 웃으며 일어나더니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붕 뜨면서 둥근 궤적을 만들었다.
"내 깨달음의 증거라고 할 수 있지."
"깨달음?"
복장도 이상하지만 분위기도 이상하다.
"너, 지금 공격력이 몇이지?"
"...알면서 왜 물어?"
"8천 좀 넘었던가? 아아. 불쌍해라."
"뭐라고?"
이게 왜 갑자기 도발이지? 게다가 자신보다 약하면서.
현아는 분노가 팍 치고 올라오면서도 의문을 느꼈다.
"하긴 뭐. 나 역시 어제까지만 해도 그 정도였으니 할 말은 없지."
"너 갑자기 왜이래? 미쳤냐?"
"미쳤냐고? 후후."
요사스럽게 웃으니,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이고, 한복에 감싸인 가슴이 출렁거렸다.
"아니, 난 진정한 강함을 만났을 뿐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스탯 인쇄기에 손바닥을 올렸다.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는 아이템이지만, 특성상 길드들은 모두 갖고 있었다.
삐- 삐-
샤각 샤각
"보여줄게. 하루가 지난 내 스탯."
"...?"
현아가 여러 차례 의문을 표하는 사이, 서현의 스탯이 모두 인쇄되었다.
"자."
그걸 당당하게 내미는 서현.
엄청난 기밀정보를 서슴없이 내민다는 것에 살짝 기쁨을 느낀 그녀는 용지에 적힌 숫자들을 보고 온 몸의 피가 말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뭐야...?"
"뭐긴. 스탯이지."
"...?"
<상태창>
이름 : 임서현
직업 : 황궁 호위(히든)
레벨 53
주스탯 : 색기
[스탯]
최대체력 24,375
최대마나 29,020
힘 657
민첩 609
지력 151
행운 142
매력 1,089
색기 2,213
색기 상승률 22%
크리티컬 확률 38%
크리티컬 데미지 333%
공격속도 29%
공격력 20,482
방어력 20,867
그녀의 기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진짜로 온 몸의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었고, 그 만큼이나 놀라운 수치다.
세상에 공격력이 2만이라니. 분명 세계 랭킹 1위도 2만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난 이미 너보다 몇 배는 더 강해. 그리고 다른 마스터 놈들과도 비교를 불허하지."
"어,어떻게 이런...."
그동안 힘을 숨겨왔던 걸까? 대체 언제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말했지? 어제까지만 해도 너랑 비슷했다고. 아니, 더 약했어. 하지만...."
그녀가 다가와 현아의 턱을 손으로 쥐었다.
"나의 진정한 주인님을 만나고, 그분을 섬기는 것 만으로 이렇게나강해졌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