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01. 모험가가 되다.
"여긴...."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감자탕집.
상당히 무난한 선택이다.
"한남동 던전 맛집이죠. 여기 던전이 유행했을 때는 항상 꽉 차 있었는데 그것도 옛날 얘기네요."
살짝 아쉬운 듯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유나씨.
단골인 모양이다.
"스승이 남자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된 거야?"
자리에 앉자, 소라라고 밝힌 여자가 운을 뗐다.
확실히 유나씨랑 같이 있다 보면 남혐하는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테고, 그럼 의문이 생기겠지.
"하아...."
유나씨는 한숨을 내뱉는다.
본인이 옆에 있는데 너무 대놓고 하는 거 아닙니까.
"어쩔 수 없다고 애원하잖아요 가이드가.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데 마냥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
"하긴. 예민한 문제긴 해."
소라씨는 시원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옆에 앉아있는 내 옆구리를 툭 친다.
"많이 힘들겠다."
"아...네...뭐."
나의 난처함을 알아주는 건가.
"저...이,일단 음식부터 시켜요."
하나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가리켰다.
아, 이참에 팀원들의 대략적인 인상을 말해줄까.
일단 팀장? 보호자인 이유나씨는 잘나가는 변호사&검사 느낌이다. 차갑고도도하고 섹시하달까. 입고 있는 옷은 캐주얼인데 묘하게 법에 관련된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진다.
헤어스타일도 흑발에 긴 생머리. 남자의 로망이다. 거기에 마음이 꽤 넓으시다.
다음으로 내 옆에 앉은 유소라씨는 친근한 옆집 누나 느낌이다. 얼굴은 평범한데 이거야 뭐 매력 스탯이 높아지면 예뻐지는 거니까 넘어가자.
머리는 살짝 보라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인데, 이게 은근히 잘 어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누님의마음은 아주 넓어 보인다. 음. 폭 안기고 싶어.
하나씨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다. 말투에서도 알 수 있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 같고. 어께에 살짝 못 미치는 단발머리다.
마지막으로 유나씨 뒤에 숨었던 이름도 모르는 매갈 예비군...아주 초롱초롱하면서도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날 쳐다보는데 무슨 희귀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다. 대체 길드에서 어떤 교육을 받은 거니.
"감자탕 괜찮죠? 네 명이니까 대 하나 시키면 되겠네요."
유나씨가 감자탕을 주문하고, 하나씨가 수저를 놓았다. 물은 내가 따라야지.
"내일부터 혹이 하나 붙지만, 평소 하던 대로 하시면 돼요. 저와 채아가 탱킹을 맡고, 하나씨가 근거리 딜러. 소라씨가 힐러. 거기에 추가로 한남씨가 원거리 딜러를 맡으면 돼요."
저 아이 이름이 채아로군. 그나저나 소라씨가 힐러? 의외인데...난 이 누님이 근거리 딜러인 줄 알았어.
"전 유은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변태는 한남으로 충분해요."
"으...."
저 표정 봐라. 중독될 것 같...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만난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한남이라니 너무하잖아!
"하하. 그러고 보니 허벅지를 연속으로 4번 맞췄다며? 활 솜씨 기대해도 되겠는데?"
"아,아닙니다. 우연이라고요."
안돼. 이 이상 불편한 사람을 늘릴 수는 없다고.
"조심해요. 오늘은 허벅지였지만, 내일은 가슴이나 엉덩이일 지도 몰라요."
"힉?!"
"절 대체 어떤 사람으로 보시는 겁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이 여자야! 하나씨가 놀라잖아아앗!!
"변태 한남 색마 해삼 등등."
해삼은 뭡니까? 그보다 즉답했어!
"왠지 꾹 누르면 하얀 액체가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으아악! 그거 성희롱이죠?!"
이 여자 진짜 큰일날 사람이네!
"저...근데 활을 잘 못 다루시면...위험하지 않을까요...?"
하나씨가 조용히 손을 들며 묻는다.
"그래서 힐러가 있는 거죠. 한남이 트롤짓 할 때마다 회복해주는 용도랄까."
몬스터한테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흐음...차라리 근거리 무기를 들게 하는 게 어때? 활은 초심자한텐 좀 어렵잖아. 솔직히 나 같은 초보자는 한 발만 잘못 맞아도 위험하다고."
"근거리 무기는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딱히 용기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괜히 검을 쥐어줬다가 겁먹고 죽어버리면 곤란하잖아요?"
절 너무 과소평가 하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눈먼 화살은 제가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엑...그치만 그러면 탱킹에 누수가ㅡ."
"그건 여러분이 해결하셔야죠. 저는 보호자로서 도와주는 역할일 뿐, 채아가 제대로 탱킹을 하고 하나씨가 딜러로써 역할을 다한다면, 그리고 소라씨가 적법한 때에 힐을 해준다면 크게 문제될 건없어요."
"으으...그동안 편하게 해왔었는데...."
소라씨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모험이 편할 리 없잖아요."
"으으...."
음...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빨리 활을 제대로 익혀야겠네.
.
.
"오오! 맛있겠다!"
감자탕이 나왔다.
이제 조리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울해 있던 소라씨가 다시 되살아났다.
"그런데 다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내가 그렇게 묻자,
"...여자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라는 것도 몰라요?"
유나씨의 차가운 대답과
"음...벌써 스물일곱이네. 하아."
한숨 섞인 소라씨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머지 둘은 얼굴을 붉힐 뿐답이 없다.
"와아. 엄청 누나시네요. 전스무살이에요."
"누나면 그냥 누나지 엄청 누나는 뭐니."
살짝 흘겨보는 소라씨.
방금 좀 이뻤다.
"나도 아직 청춘이란다~"
국자로 음식을 탕을 휘저으며 말하는데,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청춘이 다 지나갔ㅡ.
"어허. 그런 말은 금지야. 금지."
...아직 아무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안 거지.
"그나저나 스무살이면 진짜 꼬맹인데. 이런 애를 모험가로 넣어도 되는 거야?"
"성인이기만 하면 규정상 문제는 없어요. 언론에서는 갑론을박하는 모양이지만."
"솔직히 스무살은 좀 너무하지 않니."
아무래도 납득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에이. 그렇게 따지면 군대도 마찬가지죠. 나름 목숨 걸고 가는건데 거기도."
"그래도 말야. 거긴 제대로 된 훈련과정이라도 있잖아. 모험가는 그냥 적당히 세금 뜯어 먹으면서 '나가 뒤지세요~' 하고 떠미는 꼴인데."
여기도 튜토리얼 있는데....
"솔직히 우리 스승이 공적으로나마 괜찮은 사람이라 다행이지, 보수만 받고 대충대충 하는 사람 천지야. 튜토리얼 끝나고 독립하잖아? 태반은 죽거나 불구된다니까."
"그래요?"
"훗. 제가 좀 괜찮은 사람이죠. 다행으로 여기세요."
"...."
소라씨가 잠깐 말을 멈추더니 내게 속삭였다.
"유나가 책임감은 있는데 성격이 영...."
"다 들리거든요! 저 정도면 아주 괜찮죠!"
음....
"아니아니 성격 좀 바꾸는 게 좋아. 그러다 평생 남자친구 안 생긴다?"
"흥. 한남따위를 제가 왜 사적으로 만나야 하죠?"
"이 세상에 한국만 있는건 아니잖아. 너네말로 갓양남님도 성격 좋은 여자 좋아할 걸."
"전 프린스 따위 필요 없어요."
"딱히 그런 말은 아닌데...."
소라누나는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더니 날 보며 '봤지? 저런다니까.' 라고 속삭였다.
근데 이건 내 감인데 뭐랄까...유나씨는 유사 꼴페미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어설프단말야...진짜배기 꼴페미는 이 정도가 아닐 텐데.
"흥, 그러는 소라씨는 아주 멋진 남자친구라도 있나봐요."
"나? 나야 있지. 약혼도 했는데."
짠 하며 왼손에 낀 반지를 보여준다.
"애초에 모험가가 된 것도 결혼자금 때문인걸."
"엑...결혼이라니...그거 장기매춘계약 아니에요?"
"아니야...다시 생각해봐...."
소라누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풍만한 살덩이가 살짝 말캉 거리며 뭉개졌다.
"난 목숨을 걸고 모험가가 됐어.네 말대로 결혼이 고작 그런 거라면 목숨까지 걸 이유가 있겠니."
"...결혼자금 때문에 모험가가 되다니...."
유나씨는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다.
"그놈의 결혼, 돈 장난 아니게 들어가더라. 덕분에 난 회사까지 그만두고 여기에 왔단 말씀."
"그 남자친구라는 분은요? 소라씨가 이러는 거 알고 있어요?"
"모르지. 알면 당장 와서 데려가려고 할 걸."
근데 아무리 결혼식 비용이 많이 든다지만 굳이 던전까지 올 이유가 있을까.
"결혼식 뿐만이 아니라 이후 생활도 다 돈이란다. 맞벌이 할 상황이 아니라서 나 혼자 벌어야 되는데...솔직히 내 능력으로 다 먹여 살릴 수가 없어. 아이까지 생기면 더 힘들고."
"남자가 벌면 되잖아요."
"움...근데 걔보단내가 더 잘 벌 거 같아."
뭔가 사연이 있나보네. 혹시 남자친구분이 다치기라도 했나?
"아무튼! 스승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니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글쎄요. 한 여자를 던전까지강제로 몰고 온 것만 해도 좋게 생각할 수 없는데요."
"에휴...."
"한숨 쉬지 마요!"
댁도 저한테 엄청 쉬셨는데요.
그래도 둘은 나름 친한 모양이네. 이런 말도 주고받는 걸 보면. 나는 완전 굴러들어온 돌이잖아? 적응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