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이한영 없는 시간이 흐른다. 지난 세월과 같은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시간이었다. 재희는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담담히 그 시간을 흘려보냈지만, 사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더 절망하고 있었다. 풋정을 잃은 소녀처럼 굴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새벽까지 공허감에 이불을 뒤척일 수는 있을지라도.
재희는 때때로 생각했다. 자신이 길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고.
‘재희야, 그런 걸 남들은 착취라고 불러. 사랑이 아니라.’
재희도 알고 있었다. 한영이 그랬던 것처럼 ‘착취’라 표현할 생각은 없지만, 한영과 저의 과거 관계가 기형적이었음을 알고는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분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새삼스레 상처 입을 생각은 물론 없었다. 그저 그녀를 정말로 절망하게 만든 것은, 그 순간에 한영이 보인 진심이었다.
이한영은 진심으로-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우두커니 방 안에 서 있던 재희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방 한편을 채우고 있는 책장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단숨에 작은 책자 세 권을 짚어 내고 있었다. 한영의 시집이었다.
다 외우고 있는 시집을 기어코 집어 들었다. 한영이 처음으로 낸 시집이자, 그의 시집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었다. 첫 시집이 나온다는 것을 조 변호사에게 전해 들은 날을 떠올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시집을 손에 넣었을 때의 감격도 떠올렸다. 교도소 담장을 뛰어넘어 그녀가 그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이후 재희는 흔들릴 때마다 한영의 첫 시집을 보곤 했다. 그의 시집을 처음으로 감상한 순간을 떠올리며, 그녀가 사랑하는 시를 읽었다. 바람 부는 시간.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 시는 한영의 시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한영의 출소 날에 뉴스에서 앵커가 읊었던 시도 바로 그 시였다.
사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재희가 무거운 눈으로 활자를 들여다볼 때였다.
“재희야, 은호 재웠어.”
인혜가 방 문밖에서 부르기에, 재희는 잠잠히 시집을 덮었다.
“그 후배는 요즘 어때? 이동완인가, 임동완인가, 대우 임원 아들이라는 애.”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맥주 캔을 따던 중 인혜가 지나가듯 물었다.
식탁에 앉고서도 한동안 한영의 시집만 떠올리던 재희는 그제야 정신 차리고 답했다.
“잘 마무리됐어. 불편하게 안 하겠대.”
“사과 받아 줬어?”
“응.”
그 이후 동완은 좋은 후배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을 넘는 경우도 없었다. 그래서 재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동완을 대했다.
인혜는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걔 사과해 놓고 뒤에 가서 이상한 짓 하면 어떻게 해?”
인혜의 걱정은 타당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의 계기로 사람이 휙 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아직 어리잖아. 앞으로 잘 가르치면 괜찮을 거야.”
“이십 대인데 애는 아니지. 그리고 그런 애가 어디 쉽게 변하니?”
인혜는 끝까지 동완을 의심하는 듯했지만, 재희는 믿고 있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변호사 일 하면서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 볼 때마다 괴롭다고 할 때는 언제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진짜 반성하는 사람도 있어.”
재희는 인혜의 말에 응수하면서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어쩌면 인혜처럼 사람이 변할 수 없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의 단 한 사람을.
인혜가 중얼거렸다.
“난 사실 네가 그 후배하고 잘되길 바랐는데.”
“그랬어?”
“대기업은 영원하니까. 인성만 제대로 됐다면 남편감으로 밀었을 텐데. 어쨌든 아쉬워.”
재희는 문득 현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결혼 상대는 조건을 봐 가며 고르라고 했던가. 그리고 한영 또한 그 비슷한 말을 그녀 앞에서 했다. 앞으로 평범하게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라고.
모두가 다들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도 바란 적 없던 미래를.
“……그럼 인성도 되고 대기업 아들이면, 결혼해도 되는 거야?”
따져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밋밋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인혜의 얼굴은 진지해졌다. 재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 나이까지 혼자 살면 다들 그런 말 하더라. 사랑이 아니라 조건 보고 결혼하는 거라고. 그렇게 버티다 후회한다고.”
“어머, 누군지는 몰라도 참 다들 못됐네.”
인혜는 싱긋 웃으며 재희가 말하는 ‘그들’에게 칼침을 놓았다.
“나도 그 말에 휘둘려 결혼한 사람이야. 전남편이 정말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결혼했어.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성실하고 착할 수가 없었거든.”
인혜는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재희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수 없었다. 인혜를 다시 만난 곳이 법원이었다. 가정법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혜는 남편 때문에 법원에 왔다고 말했고, 재희는 그 순간 친구의 인생도 그간 순조롭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택하는 순간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던 선택지도, 나중에 가면 꽝인 게 있는 거야.”
인혜는 덧붙였다. 그 반대도 있겠지. 우리가 그걸 미리 다 어떻게 알겠어?
“처음부터 다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오만한 거지.”
신중한 태도로 인혜는 거기까지만 말했다.
재희는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문득 이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회의감이 들었다. 한영은 그녀를 거부하고 있다. 그의 마음이 함께 하지 않는데, 그녀 혼자 함께하는 미래를 논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한영이는 어때 보였어?”
“똑같아. 여전히 재수 없어.”
새침하니 대꾸하는 인혜에, 재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최영재만 아주 신났어. 걔 일만 하며 살았나 봐.”
“영재 안 바쁘대?”
“연말 되면 다시 바빠질 거래. 그래서 더 신났나 봐.”
재희는 이번에도 미소 짓기만 했다. 인혜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재희야, 다음에는 같이 가자.”
“…….”
“이게 뭐야, 친구들끼리 편 가르기 하는 것도 아니고. 이한영이 설마 너도 데려왔다고 문을 안 열겠니? 걔가 성격이 나쁘지, 유치하진 않잖아.”
“……그래서 안 가는 게 아니야. 그냥,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재희는 쓰게 웃었다. 한영이 무슨 생각을 하며 친구들을 상대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앞으로 그는 어쩔 작정일까.
“맞다. 재희야, 저녁에 전화 왔었어.”
“누구?”
“대학교 동창 경신이라고 하던데?”
“경신이?”
* * *
‘계속 암으로 고생하셨나 봐.’
대학 병원의 혼잡한 복도를 통해 병실로 향하는 내내 재희는 생각해 보았다. 한영도 소식을 들었을까? 그도 지금 그녀처럼 슬퍼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오래 떠올리지는 않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옛 스승을 찾는 길이었다. 한영과 얽힌 인연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수단으로 한영을 떠올리는 것은 무정하게만 느껴졌다.
경신의 목소리가 다시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제 교수님 따님 되는 분한테서 연락 왔었어. 교수님이 널 만나고 싶어 하신대. 네 전화번호를 몰라서 물어물어 나한테까지 전화했나 봐.’
재희는 병실 문 앞에 선 순간에 이르러 망설였다. 심 교수와는 십일 년 만이다. 그가 이삼 년 전부터 한국에 들어와 지낸다는 것은 동문들을 통해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다. 어쩌면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한영이 뒤집어써야 했던 죄명과 그 시간이 떠올라서.
그런데 왜 교수님은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걸까.
물론 그 답은 문을 열지 않는 이상 영원히 모를 것이다. 재희는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어, 자네.”
“……교수님.”
“왔구먼. 오랜만일세. 잘 지냈는가?”
재희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지만, 첫 순간 받은 충격을 어떻게든 지워 내려 하고 있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
“이리 오게. 늙은이가 늙어 쪼그라진 게 무어 대수라고 슬퍼하는가?”
“……그런 게 아닙니다, 교수님.”
“그래. 우리 반가워만 하세. 어떻게 살았나? 결혼은 했고?”
심 교수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짓했다.
재희는 베드 옆 의자에 앉았다. 병색이 완연한 교수의 얼굴을 담담한 척 마주하며 안부를 나눴다. 그러나 재희는 병실 문을 여는 순간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노교수의 반가워하는 얼굴 속에서 서늘한 예감을 느낀 것이다.
얼마 버티시지 못할 것이다.
“변호사라니. 제 길 찾아갔군.”
별다른 대꾸가 생각나지 않았다. 재희는 소리 없이 미소만 지었다.
“옛날 생각나. 리포트만 보았을 때는 논리가 치밀해서 놀랐는데, 얼굴 마주하고는 그 맹한 얼굴 때문에 더 놀랐다네.”
“……교수님.”
“말이 그렇다는 거네, 말이. 자네 입학하고 남학생들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심 교수는 회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서 이 군이 입학 초에 그렇게 곤두서 있었던가 싶네.”
재희의 미소가 잠시 흐려졌다. 심 교수의 입에서 나올 ‘이 군’이란, 애초부터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심 교수는 그런 재희를 눈치채지 못하고 목을 끌끌 울리며 웃었다.
“사포만치 까칠까칠했던 기억이 선해. 글에서부터 다 보였지. 아무리 예의 바르게 굴어도, 그 친구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 보였어.”
말을 하다 말고 심 교수가 쓰게 웃었다.
“……그랬지. 그랬어.”
“…….”
“그 친구하고 아직도 연락하는가?”
“……뭐라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힘들 테지.”
“…….”
“자네, 그 친구가 교도소에서 쓴 시는 읽어 봤는가?”
재희는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눈을 내리떴다.
“……읽었습니다.”
“전부 다?”
“네.”
심 교수가 다 안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이 군의 첫 시집과 나머지 두 시집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평론가들은 밀도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
“아마 그 친구는 첫 시집을 낼 때까지는, 굉장히…… 그래, 자신의 미래를 아주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네.”
“…….”
“첫 시집이 그 친구에게는 유고집이지 않았나, 싶어.”
유고집.
재희는 아려 오는 가슴을 느꼈다.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그 마음이 더 잘 보인다네. 첫 시집에서의 시들은…… 흐르듯 나온 시였지. 자연스럽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 시.”
“…….”
“그런데 두 번째 시집부터는 달라졌지. 상황이 변했을 걸세.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말일세. 그래서 두 번째 시집부터 그 친구가 다시 그놈의 망할 형식을 앞세우기 시작한 걸세.”
심 교수는 한숨을 흘렸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그 친구, 지금쯤 첫 시집 낸 걸 부끄러워하고 있을 것 같나?”
“…….”
“나는 그 친구가 부끄럽고 쑥스러워는 해도, 후회하고 있지는 않았으면 하네. 후회는 몸에 안 좋아. 내버려 두고 불려 봤자 암 덩어리밖에 안 된다네.”
재희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눈가는 더욱 그랬다.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심 교수가 눈을 감았다. 재희는 늙은 스승에게서 빠르게 빠져나가는 기력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심 교수는 다시 눈을 떴다. 무슨 호들갑이냐는 듯 혀를 차며 손을 뻗었다.
가만히 재희는 그 손을 잡았다. 거칠거칠한 나뭇결의 촉감이었다.
“조금 피곤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바쁜 사람 오래 붙잡을 수 없으니, 하나만 묻겠네.”
“……네.”
“첫 시집에 실린 ‘바람 부는 시간’ 말일세, 세상 사람들은 시대정신으로 해석하는 그 시.”
“…….”
“자네는 그 시에서 무엇을 읽었는가?”
심 교수와 시선이 부딪친 순간, 재희는 왈칵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결국 젖어 버린 눈시울로, 그녀는 고요히 답했다.
“……사랑이요.”
심 교수의 입가에 천천히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렇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안심하며 웃는 노교수 앞에서 재희도 같이 웃었다. 몇 주 내내 엉켜 있던 머리는 어느새 깨끗했다.
심 교수는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다.
“과거에나 오늘에나, 자네에게는 미안한 일만 하는구먼.”
“……아닙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로부터 이틀 뒤, 신문에 부고가 실렸다.
* * *
장례식은 찾아오는 이들로 붐볐다. 유명한 정치인의 이름이 방명록에 적히고, 기자들도 몇 카메라를 들고 얼굴을 비쳤다. 심 교수의 밑에서 수학한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희는 인파가 빠질 무렵인 늦은 밤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심 교수는 영정 사진조차 심 교수다웠다. 죽음을 앞둔 엄숙함은 없었다. 금방 다시 만날 사람에게 건네는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마주하는 이들의 상실감은 컸다. 이틀 전에 그 얼굴을 생생히 마주했던 재희로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게 스승에게 인사드리고 나올 때만 해도 그녀는 몰랐다. 심 교수가 그녀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리라고는.
“……늦게 왔네.”
“네, 일 때문에요.”
이재석은 어색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육개장의 건더기를 건드리면서도 쉽게 삼키지를 못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불편한 것이 아닌 듯했다. 그럴 만했다. 재희가 그동안 몇 차례 가게를 찾는 동안, 재석은 코 한쪽 내비치지 않았다. 재석의 부인만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맞곤 했다.
재희는 그의 불편을 모르는 척 담담히 물었다.
“교수님은 오랜만에 뵙는 거예요?”
“학교 그만둔 후로는 처음 봬.”
“교수님을 많이 따르셨나 봐요.”
“학교 다닐 때 많이 보살펴 주셨어. 존경하는 분이었어.”
재석은 가게 문까지 닫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했다. 동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늦은 밤에 찾아왔지만, 그만큼 두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찾아올 정도로 심 교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짧은 대화 후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재희는 침묵을 불편해하는 재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교수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뵈었어요.”
재석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널 따로 부르셨어?
“네. 한영이가 걱정되셨나 봐요.”
“…….”
“오래 후회하셨대요. 미국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교수님은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몰랐대요.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일주일 후면 한국에 다시 돌아올 줄 아셨다고요.”
“……그런데 일주일이 칠 년이 된 거네.”
“네.”
씁쓸한 현실에 재석은 쓰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재희는 옆에 놓인 소주병을 잡았다. 재석은 잔을 거절하지 않았다.
“한영이를 생각하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으셨대요. 그렇지만 결국 가족들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으셨던 거죠.”
쪼르륵, 맑은 소리와 함께 술이 잔에 떨어졌다. 재희는 그 잔을 내려다보며 건조하게 덧붙였다.
“……제자를 방패 삼아 혼자 도망갔다는 죄책감이 평생 교수님을 괴롭힌 거예요.”
“…….”
“제자를 먼저 보내는 일을 많이 겪으신 분이니까요. 무력한 자신이 싫으셨을 거예요. 괴로웠겠죠. 행복하다가도 순간순간 먼저 보낸 제자들 얼굴들이 떠올랐다고 하셨으니까요.”
“죄책감은 평생 떨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재석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탁,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날 설득하기에는 장소가 부적절하단 생각 안 들어?”
“저는 선배 설득하려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재석은 소주병을 가져가며 헛웃음을 흘렸다. 불신이 가득한 반응에도 재희는 담담히 말을 했다.
“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
“저는 교수님을 통해 저를 보았거든요.”
말없이 술만 연거푸 들이켜는 재석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재희는 그의 눈에서도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돌려 잔 속에 담긴 소주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도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재희는 소주 안에 담긴 자신의 눈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유가족분들이 정부에 진상 규명을 해 달라고 몇 년을 농성하며 버티고 있단 소식을 들었을 때, 저한테도 기회가 온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제까지 방관하고 침묵한 잘못을 만회할 기회요. 재희는 속삭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사감 섞인 이유도 있었어요.”
“……뭔데 그게.”
“한영이요.”
“…….”
“한영이가 교도소 밖으로 나오는 날 알려 주고 싶었어요.”
“……뭐를.”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왔다고요.”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친구를 배신하고, 은혜를 입은 상대에게 불의로 되갚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고. 너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도 되는 세상이 왔다고.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으니까, 더는 위악 부리지 않아도 된다고요.”
“……순진한 생각이야.”
“그건 그래요.”
재희는 덤덤히 소주를 마셨다.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계속해서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한영이는 장례식에 안 오는 걸까. 부지불식간에 스쳐 간 생각은 그렇게 외곬이었다.
“그래도 저는 계속 순진하게 살래요.”
“……내가 지금 증언해 봤자 변하는 건 없어.”
“십 년 전이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달라요.”
“무책임한 낙관이야.”
“저는 낙관적일 수는 있어도 무책임하지는 않아요.”
“…….”
“저는 지금 책임을 지려는 거예요.”
“…….”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저는 끝까지 갈 거예요. 최선을 다해도 안 된다면 그 결과도 받아들일 거예요. 그렇지만 선배는 어떨 것 같아요?”
재희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선배는 만족할 수 있을까요?”
재석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다 돌아갔다. 재희는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재석을 찾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는 재석의 선택만 남았다.
얄궂은 운명의 힘이었나. 심 교수의 발인 다음 날, 한영의 새 시집이 출간되었다. 재희는 점심시간을 틈타 서점을 찾으며, 이제는 없는 노교수의 장난기 어린 웃음을 떠올렸다. 한영의 시집을 가장 보고 싶어 하셨을 이는 없는데, 거리에는 성탄절 단장이 한창이었다.
사무실에서 가까운 대형 서점에는 사람이 많았다. 재희는 한영의 시집을 집어 든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꿈을 꾸듯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지한 사색에 빠진 눈으로 시집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이한영이란 사람의 시를 호의로써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다행이라 여기고 한영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대로 계산대에 향하려던 순간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나. 재희는 멈칫 멈춰 남자를 주시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미약하게 눈가를 좁히고 있었다. 마치 의심쩍은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처럼.
이번 시는 좀 난해한가 보다.
재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가 문제를 깨달은 것은 다음 날 저녁, 뉴스를 통해서였다.
「이한영 시인의 시집에 실린 시로 논란이 있는데요. 교수님께서도 문제의 시를 보셨습니까?」
아나운서의 질문에, 데스크에 앉은 평론가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네. 이한영 시인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더군요.」
「유명세요?」
「다른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면 조금도 화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시 속에서 이한영 시인이 자신을 프락치라고 고백했는데요.」
「시 속의 화자가 꼭 시인이란 법은 없습니다.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시인 본인만이 알겠지만, 이한영 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고요, 시인이 재학하던 시절 학원의 시대상을 시상에 표현한 것으로…….」
평론가의 말이 길어졌으나, 재희는 그것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굳어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논란과 더불어 며칠 전 라디오 방송에서 이한영 씨가 했던 발언이 다시 언급되었는데요. ‘대학 재학 시절 내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책을 낼 생각이다. 아마 다들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발언했는데요.」
그 순간 재희는 찰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영의 서재에 쏟아져 있던 원고지.
빽빽이 글이 적혀 있었던, 그 원고지들.
「그 말이 이번 논란과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겠느냐…… 그런 추측도 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로서는 이한영 시인이 직접 밝히지 않는 한 알 수…….」
재희는 곧장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구매하고 아직 읽지 못한 시집을 펼쳤다. 문제의 시를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를 읽었다. 감상이 아니었다. 철저히 문제 될 소지를 찾아내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위험해.
이건 너무- 위험해.
허리춤에서 진동이 울렸다. 재희는 뻣뻣하게 굳어 버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삐삐를 꺼내 들고 번호를 확인한 재희는 등줄기가 서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급하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자동차를 달려 향한 곳은 한강의 고수부지였다. 인적 없는 외진 곳까지 향한 재희는 눈에 익은 자동차를 보고 차를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차에서 튀어나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남자는 그녀의 차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남자가 건네는 서류 봉투를 받으며, 재희는 물었다.
“언제 접촉했죠?”
“몇 시간 안 됐습니다. 헤어지는 것 확인하고 바로 사진 인화해서 오는 길입니다.”
재희는 서류 봉투를 급히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눈앞에 나올 사진 속에 전혀 모르는 얼굴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진 속에 있는 얼굴은, 그녀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재희는 말없이 서류 봉투 속에서 나온 사진을 응시했다. 한영의 집 대문 초인종을 누르려 손을 뻗는 인물. 나이 든 얼굴이었다. 귀밑머리에 흰 머리가 눈에 띄게 보였고, 눈가의 주름 또한 뚜렷했다. 기억 속 모습보다 몸집이 쇠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녀가 그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맞네요.”
재희는 스산히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김 부장이에요.”
“결국 변호사님 예상이 맞아떨어졌군요.”
남자에게 한영을 감시하도록 했지만, 그것은 보호를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김 부장의 얼굴을 다시 보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니, 이 구도를 다시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재희는 다음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문을 열고 나온 한영과 김 부장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마치 해후를 반가워하는 사람들처럼.
“……집에 들이던가요?”
“예.”
“……몇 분 정도 있다 나왔나요.”
“사십 분 정도?”
“…….”
“이한영 씨는 무사합니다. 마지막 사진도 이한영 씨가 김 부장 배웅하는 사진이고요. 설마 무슨 일 벌이겠습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김종석 퇴직했습니다.”
“……퇴직했지만, 몇십 년을 공안에서 일한 사람이에요. 인맥이든, 처리하는 방식이든, 예전 그대로겠죠.”
그런 김 부장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도.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과 십 년 전은 사회 분위기부터가 다른걸요.”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지만, 재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저희에게는 그렇죠. 그렇지만 저들도 그럴까요?”
“후배 시켜다 김종석 따라가게 했습니다. 차 번호판까지 확인했으니 지금쯤 어디 살고 있는지, 뭐 하며 사는지 다 파악했을 겁니다.”
“…….”
“계속 지켜보다 위험해진다 싶으면 신고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남자는 덧붙였다.
재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은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머리에서 손을 치우며 최대한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상황 파악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게 현재로선 유일한 방법 같긴 합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변호사님, 오늘 뉴스 보셨습니까?”
재희는 사진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뚝뚝하게 바라보자, 남자는 곤혹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변호사님도 저와 똑같은 생각 하고 계시죠?”
“…….”
“이한영 씨 입장 확인하고 연락 주시죠. 기다리겠습니다. 처음에는 변호사님 부탁 때문이었지만…… 이젠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기사 내는 건 안 돼요.”
“설마하니 은혜를 원수로 갚겠습니까. 걱정 마십쇼.”
남자는 훌쩍 차에서 멀어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다 재희는 다시 사진을 내려다본다.
사진 속, 웃고 있는 한영의 얼굴을 보았다.
문득 참을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재희는 시동을 켰다.
이미 늦은 밤, 한영의 집 철문 앞에 서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인터폰의 불이 들어오고, 들려오는 목소리 없이 철문이 열리는 중에도 재희는 펄펄 끓는 불 위 자갈밭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한영의 집 마당을 걸으며 몇 번이고 그녀는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현관문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재희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냉정해져야 한다고. 감정적으로 대면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그러나 현관문을 연 한영과 얼굴을 마주한 순간, 재희는 참지 못했다.
“……사건 기록이 아니었다면, 너는 아마 영원히 날 만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사그라지듯 죽은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감정이라고는 한 점 없이 깨끗이 잘려 나간 음색. 그러나 재희의 속은 목소리만큼 깨끗하지 못했다.
속이 부대껴 재희는 숨을 골랐다. 한영의 잠잠한 눈동자가 가만히 그녀를 담고만 있었다. 인사도 없이 튀어나온 재희의 말을 향한 의문은 없었다.
그는 그저 고요히 답했다.
“그랬겠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왜 계속 이 집에서 사는 거야?”
“…….”
“이 집에 그 정도로 애착이 깊어?”
“…….”
“정말로 나를 비롯한 모든 인연을 다 끊고 싶었다면, 집부터 이사하는 게 먼저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를 가도 네 이름이 들려.”
재희는 속삭이듯 말했다.
“……뉴스는 물론이고, 토크 쇼에도 나오고, 심지어 라디오에서도 네 목소리가 들려. 너처럼 활발하게 대중에 얼굴 비치는 시인은 없을 거야. 그런 널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유명해지고 싶어 혈안이 되었대. 그래서 온갖 곳에 가리지 않고 나오는 거라고, 그렇게 말들 해.”
“…….”
“만약 내가 널 잊고 살았다면…… 난 지금쯤 다시 널 만나러 왔을지도 몰라. 계속 얼굴이 보이니까. 결국 보고 싶어져서.”
무감정하던 한영의 눈동자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재희가 알려 준 모욕적인 평판에 불쾌해하는 빛은 아니다. 마재희의 구질구질한 미련에 질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이한영은, 마재희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눈치챈 것뿐이다.
“……한영아, 교도소에서 출소한 날, 네가 기자들 앞에서 한 말. ‘편해지기 위해 잊고 살 생각은 없다.’고 했던 그 말……. 누군가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지.”
“…….”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이야?”
쓴 감정이 울컥 넘쳐 말끝이 흔들렸다.
“……한영아, 그동안 도대체 누구를 부르고 있는 거였어?”
무표정한 한영의 얼굴을 보며 재희는 그간의 의혹을 해소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교도소 내에서 편지고, 면회고, 모든 접촉을 끊은 한영이었다. 그런 한영이 친구들을 다시 받아 주는 것은, 그리고 마재희가 훤히 알고 있는 집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아이러니한 점이었다. 매몰차게 접촉을 끊던 교도소에서의 태도와 배치되었으니까.
그래서 내심 위화감을 느꼈지만, 재희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멋대로 납득했다. 이사를 가는 게 힘든 일이니까, 아직 적응에 힘써야 할 때니까, 사실은 친구들이 그리웠을 테니까, 하면서 여러 이유를 갖다 붙였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사실 이한영은 겉으로만 그녀를 밀어내는 것뿐이지, 아직 그의 집에 서린 추억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리라고.
한영의 집은 그들의 성이었다. 그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요새. 그래서 한영도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이라고, 멋대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한영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는 김 부장이,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네가 의도한 대로 김 부장이 찾아와서 만족해?”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겠지.”
“……한영아.”
한영은 몸을 돌리며 낮게 웃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한영아.”
“그 이상은 말해 줄 수 없어. 네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그러나 재희는 그럴 수 없었다. 거실로 향하는 그를 따라 재희는 현관에 발을 들였다.
“나는 김 부장이 네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야 돼.”
“네가 왜?”
한영의 무심한 반문에도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연거푸 물었다.
“김 부장이 뭐라고 했어? 프락치 활동 했던 과거를 발설하지 말라고 협박했어?”
“미안, 재희야. 잠시만.”
전화 수화기를 들며 한영이 양해를 구했다. 이런 대화 중에 급히 전화해야 할 곳이 어디란 말일까. 재희가 초조하고 답답해하며 그를 우두커니 지켜볼 때였다.
한영이 무감각한 얼굴로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말했다.
“그 남자 놓아줘.”
놓아줘?
재희는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누구를?
한영은 시선을 느낀 것처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말했다.
“……그래. 내가 아는 사람이 붙인 거야. 괜찮아.”
그 순간 재희는 단박에 상황을 직감했다. 머리에서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을 느끼며 재희는 입을 열었다.
“……설마, 너-.”
“-누구야?”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영이 말을 가로챘다.
“전문가는 아니고. 뭐 하는 사람이야? 나한테 붙여 놨던 사람.”
재희는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 눈치채고 있었던 거구나. 널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삼십 분 전에 보고 온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재희는 한숨을 삼켰다. 한영이 시선에 예민하니 특히 주의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건만.
“……성광일 기자님.”
재희는 순순히 남자의 정체를 밝히며 사과했다.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뿐, 다른 의도로 감시한 것은 아니었다고.
그러나 한영은 재희가 왜 사람을 시켜 그를 지켜보게 했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그는 기계적으로 상황을 확인할 뿐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성 기자님이 유명 정치인의 비리를 기사로 쓴 일로 소송 걸렸을 때 내가 변호했어. 특종에만 매달리는 여타 기자들과는 다르셔. 믿을 수 있는 분이야.”
“오늘 김종석의 뒤를 따라간 남자는 다른 남자던데. 그 사람은?”
“……후배 기자라고 들었어.”
“아아…… 그래.”
한영이 낮게 웃기 시작했다. 그는 이 상황을 해프닝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아주 우습고 사소한, 해프닝으로.
재희는 믿기지 않아 물었다.
“웃음이 나와?”
“심각해지지 마, 재희야.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 후배 기자라는 분이 하도 어설프게 김종석 뒤를 밟기에 이쪽까지 들킬까 봐 잡아 둔 거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납치고 감금이야.”
“보호였어. 분위기는 물론 좋지 않았겠지만.”
“…….”
“많이 놀란 것 같네. 물 마실래?”
한영이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놀랍도록 태연했다. 재희의 눈에는 불길하게만 보이는 초연함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초조하게 묻는 재희에, 한영은 부엌 천장에서 컵을 꺼내며 무심히 답했다.
“걱정하지 마. 산 채로 땅 속에 묻어 버릴 생각은 없으니까.”
“……한영아.”
“다른 대화는 없었어. 김종석도 이제 와 뭔가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천천히 컵에 물을 따르며, 한영은 나른히 미소 지었다.
“서로 안부만 묻고 헤어졌어. 우리 분위기 좋았어.”
거짓말이다.
“……분위기 좋았다면서 왜 사람 시켜 미행하게 했어?”
“네가 내게 기자를 붙인 것과 비슷한 이유였어.”
“……나는 널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김종석이 어떻게 사는지는 확인해야지. 그래도 ‘삼촌’이었는데.”
“한영아!”
재희는 들썩이는 가슴을 어떻게든 억누르려 노력했다.
“……이러지 마. 그만둬.”
“억울하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김종석의 집을 알아냈잖아. 진짜 이름을 알아낼 거잖아. 그 이후에도 정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적어도 다시 교도소 들어갈 일은 안 해.”
그 말에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는, 한영의 무감정한 눈빛에 있을까.
재희는 주먹을 꾹 쥐었다. 격앙되려는 음성을 애써 가라앉혔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줘.”
“…….”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너 방해할지도 몰라.”
한영은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부드럽게 눈을 휘고 있었다. 날카로웠던 재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리워하던 먼 과거의 눈웃음이, 지금 그 자리, 그녀의 앞에 있었으므로.
그런 눈으로, 한영은 속삭였다.
“……글쎄. 한번쯤은 내가 끝을 내 보고 싶었어.”
“…….”
“이제까지는 시작이든 끝이든,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정했거든.”
“……그 끝에 뭐가 있는데?”
“글쎄. 뭔가는 있겠지. 지금보다는.”
무심한 음성이었으나, 그 속에 깃든 허무함을 느끼지 못할 리 없는 재희였다.
재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반박했다.
“……넌 지금 끝을 내려는 게 아니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어디까지나 유인만 했을 뿐이야. 제 발로 온 건 김종석이지.”
“한영아.”
“정말 끝이었다면, 김종석은 내가 아무리 불렀어도 다가오지 말았어야 했어. 꼭꼭 숨었어야지.”
한영의 입매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늦건 빠르건, 언젠가는 내 앞에 다시 등장할 사람이었어.”
그 순간 그녀는 예감했다. 한영이 무엇을 원하든, 그는 그것을 얻어 내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을 깨닫자 재희의 머리는 순식간에 십일 년 전의 십이월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과 같이, 이한영이 앞만 보고 달려가던 그날의 겨울을.
어쩌면- 똑같은 과거가 이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미치자 재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거야?”
입술에서 끓는 음성이 신음처럼 새어 나갔다.
“……여태까지 후유증 때문에 네가 날 밀어내는 거라고 생각했어.”
“…….”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이거였어?”
“몸 상태나 김종석 때문이 아니야.”
한영은 부드러우면서도 냉정했다.
“내가 널 거절한 건 네게 더 이상 마음이 없어서야.”
“…….”
“그만 돌아가. 너무 늦은 시간이니까.”
한영은 재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재희는 계단을 올라가는 한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속은 차분했다. 아니, 차분했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밟는 발걸음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재희는 멈추지 않았다. 이 층에 올라 한영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마침 침실의 문을 연 한영의 어깨 너머로 휑한 방이 보였다. 차갑게 식은 침대가 과거와 똑같이 창문 아래 놓여 있는 광경을 본 순간, 재희의 눈가는 더 어쩌지 못할 정도로 젖어 달아올랐다. 화가 난 와중이었는데도, 어린애처럼 울고 싶어졌다.
“……침대는 왜 계속 창문 밑에다 두고 있는 거야?”
방 앞까지 쫓아와 할 질문으로 듣기에는 맥락이 없었을 것이다. 한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재희는 문간에 버티고 선 채 억누른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 내가 이 방 창문을 넘다 굴러떨어지는 일은 없어. 그런데 왜 창문 밑에 아직도 침대를 두고 있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다 잊은 일이야.”
한영은 부동의 미소로 말했다. 창문 바로 아래에 놓인 침대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한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재희는 그 말에 수긍했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이제까지 내 억지는 왜 받아 줬어?”
“억지라니?”
“사건 기록을 건네는 대신 네 이야기를 솔직하게 해 달라는 요구 자체가 억지였어.”
“글쎄. 그건 마땅히 응해 줘야 하는 요구였어.”
한영은 흔들림 없이 응수했다. 십일 년의 시간을 기다려 준 사람에게 그 정도 예의는 당연히 차려야 하는 것이라고. 한영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재희의 요구에 응했다, 대답했다. 그러니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놓아주는 일만 남았다고.
그 말에 가슴을 쿡쿡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으나, 재희는 그것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온 신경은 자신이 앞으로 뱉어야 할 말과 논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재희는 어느새 법정에 선 변호사가 되어 냉정히 반문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불쌍해서 응해 줬다는 거지?”
“네게 미안해서 응해 준 거지.”
한영은 부드럽게 그녀의 말을 정정하고는 덧붙였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 재희야.”
그가 착각하지 말란 것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똑똑한 이한영은 마재희가 무슨 의도로 대화를 끌고 가려는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영악하게 대화를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는 외간 여자 취급을 하는 주제에, 그런 마재희의 눈앞에서 태연히 입고 있던 상의를 벗는 것으로.
교도소에서 운동만 한 것인지 과거보다 더 발달된 등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영은 옷이 있는 서랍장을 열며 무심히 물었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그 질문의 의도는 명확했다. 나가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희는 그에 응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재희는 문간에 서서 버티고 있던 발을 한 발자국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조차 없이 방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재희에, 한영이 시선을 준다.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벌거벗은 몸의 근육만큼이나 결이 선명한 시선이다. 차가웠다.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멋대로 자신의 침실에 발을 들이는 마재희에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그러나 이한영이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았어.”
재희는 한영의 앞에 바로 선 채 무뚝뚝하게 지적했다. 그녀가 그에게서 거짓 없이 진실을 들을 수 있는 세 번의 기회 중 마지막 한 번의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한영이 반박할 수 있는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바로 재희는 입을 열었다.
“십일 년 전 성탄절에, 김 부장 왜 살려 줬어?”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혔던 질문이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잠시 찾아들었다. 재희와 한영의 시선이 조용히 맞부딪쳤다. 팽팽한 기류가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한영은 무덤덤했다. 대답을 피하지도 않았다.
“죽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
“네가 나 때문에 다친 걸 본 순간 깨달았거든.”
한영은 무미건조하게 덧붙였다.
“나나 그 남자들이나, 똑같다는 것을.”
재희는 찢어지려는 가슴을 어떻게든 붙잡고 조용히 반박했다.
“……안 똑같아. 그럴 리 없잖아.”
“글쎄. 아마 거기서 더 갔으면 비등비등한 인간이 됐겠지.”
“그게 싫어서 김 부장을 살려 줬던 거야?”
“그래.”
“정말?”
“…….”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이 되든, 사실 관심 없었잖아.”
“…….”
“정말은 그 이유가 아니잖아.”
“그럼?”
한영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내 이유란 게 뭔데.”
“나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
“너 나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도망간 거잖아.”
무정해 보이는 한영의 눈동자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지만, 재희는 속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착취야?”
도망간 것이 비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온화한 마음이다. 사랑에 가깝지, 착취나 학대일 수는 없었다.
한영은 어머니를 괴롭힌 남자들과 똑같아지는 게 싫어서 마재희와의 관계를 그만둔 게 아니다. 그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혐오하는 마음은 있었겠지만, 그것이 마재희를 버린 이유는 되지 못한다. 재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한영아,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야.”
“…….”
“더 이상 일곱 살 어린애가 아니야.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 장미도 아니고.”
재희는 권리를 빼앗긴 사람이 그러듯 분노한 눈으로 말했다.
“더 이상 사랑하는 남자 하나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하지도 않아.”
너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들을 변호하며 지난 세월을 보냈다. 뻔뻔한 인간들도 상대했다. 철면피를 두른 비양심도 보고 겪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한영이 입가의 근육만 움직여 웃었다.
“……재미있네. 책임?”
눈가의 근육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한영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정말로 뭘 책임져야 하는지는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내가 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 중학교 이 학년 때, 기억나?”
한영이 눈을 휘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재희는 동요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해 겨울에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했지. 그때의 국장 행렬, 텔레비전으로 같이 보았던 거 기억하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으니까.”
“……기억나.”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한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스스로 답했다.
“이제 이 지겨운 짓거리도 끝이구나. 그런 기대를 가졌어.”
재희는 그것이 김 부장과의 악연을 일컫는 것임을 알았다. 차츰차츰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느끼며 깨달았다. 그렇게 기대를 가졌지만, 너는 결국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거구나.
“얼마간은 좀 나아지리라 여겼지. 그런데 몇 달 안 가서 바로 쿠데타로 정권이 뒤집혔어.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한영이 싸늘히 눈을 빛내며 웃었다.
“해직되었던 김종석의 동료들이 다시 복직했지.”
“……한영아, 이제는 달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한영이 서재가 있는 방향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저기 서재에 있는 신문에 무엇이 적혀 있다고 생각해? 너도 신문을 읽으니 알 테지. 경찰들이 진급한답시고 억울한 사람 끌고 가 두들기고 때려 누명을 씌우는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어. 문민정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일선에서 일하는 인간들이 평생을 때리고 고문하는 걸로 살아온 인간들인데, 정권 두 번 바뀌었다고 그 습관이 바뀔 것 같아?”
“한영아, 천천히 바뀔 거야.”
“재희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
“세대교체가 일어나면 달라져.”
“글쎄. 길을 걷다 보면 내 귀에 꼭 한 번씩 들려오는 단어가 있는데. ‘빨갱이’ 말이야.”
한영이 서늘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 단어를 쓰는 게 노인들뿐이라고 생각해?”
“…….”
“인간은 학습하지. 학습은 대물림이고.”
“…….”
“네가 아까 감당하겠다고 말한 책임은, 그 대물림이야.”
끝이 없는 대물림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는 한영의 눈동자가 찼다.
그는 냉혹한 시선으로 묻고 있었다.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무게를 네가 알기는 하냐고.
그러나 재희는 한 가지 중요한 진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재희는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너희 어머니처럼 되는 게 싫단 말이지?”
한영의 시선이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았다.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며 싸늘히 자르듯 말했다.
“이만 나가 줘.”
“한영아, 나는 너희 어머니처럼 되지 않을 거야.”
“…….”
“너도 날 그렇게 만들게 하지 않을 거고.”
“그래. 나도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한영이 냉정히 입가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 나가.”
인내심이 짧아진 듯 한영이 먼저 몸을 돌렸다. 재희는 그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한영의 시선이 붙잡힌 팔로 천천히 떨어졌다. 고요한 시선 속에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지만, 재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한영.”
재희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눈물 맺힌 눈으로 물었다.
“너는 지금 네가 날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
“내 미래를 걱정해서, 네 후유증 때문에, 네가 말하는 그 대물림이라는 것 때문에, 그래서 날 밀어낸다고 생각하고 있지?”
“…….”
“그런데 그거 아니야.”
재희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
“너는 지금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인데.”
“아니. 너는 사실 알고 있어. 네가 여섯 살의 기억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걸.”
“…….”
“……너는 그냥, 내가 못 견디고 널 떠나는 게 두려운 거잖아.”
한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냉소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나, 아니면 아픈 곳을 찔린 사람의 허무함이었나. 재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미 눈앞을 가린 눈물 때문에 한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한영의 가슴팍을 때리고 있었다.
“내가 우습지? 거짓말만 하면 계속 속아 주니까, 내가 만만하지? 그런 유서를 남겨 놨는데,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사실은 진심으로 나를 멀리하고자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늘, 애매모호한 행동으로 사람 흔들어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그러기를 반복하는 거잖아……!”
눈물이 뚝뚝 떨어져 한영의 얼굴이 뭉개졌다 개었다 반복했다. 한영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재희는 그 손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다. 미웠다. 이한영이 정말 미웠다. 이렇게까지 계속 이기적으로 굴 줄은 몰랐다. 십일 년이면, 뭔가 변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린애처럼 그를 계속 때리며 재희는 연거푸 물었다. 정말 사랑이 아니었냐고. 그것은 그동안 누적된 상처였다. 책에 꽂힌 편지를 보고 그녀는 혼자 설 수 있었다. 한영의 시집에 담긴 사랑의 시들을 통해 십일 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이 젊어서 실수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을지언정, 마음만은 늘 함께였다고 믿으며 그 세월을 버텼다.
그런데 그 세월을 이한영이 모조리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훤히 보이는 눈빛과 그 독한 입술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계속 속삭였다. 재희는 그것을 알고도 한영의 몸과 상처를 생각해서 참아 주고 있었다. 그랬는데.
“네 생각, 다 보인다고……! 그런데도 언제까지 모르는 척할 거야?”
재희는 울며 물었다. 정말로 날 사랑하지 않아?
힘이 빠진 재희의 몸이 기우뚱 뒤로 기울어졌다. 그런 그녀를 잡아 준 것은 한영이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주저앉혔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그는 재희 앞에 몸을 낮췄다. 재희와 눈을 마주 보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거다. 어린 동생을 달래는 오빠처럼.
그러나 재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영과 눈을 마주한 순간, 달려들었다. 그에게 몸을 얽고 매달렸다. 기갈난 사람처럼 한영의 입술을 훔쳤다.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몸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애무했다. 풍만한 몸을 부딪쳤다. 그 순간 한영의 입에서 끓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훅 튕기는 용수철처럼 재희를 덮쳐눌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둘 다 침대 위였다. 서로가 상대의 몸을 보길 원해 경쟁적으로 옷을 벗겨 내고 있었다. 집요한 애무와 키스가 뒤따랐던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한영이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삽입하고 있었다. 그리운 감각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면서도 재희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너,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런데도?
그리고 삽입을 마친 순간, 한영이 무거운 입술을 열어 조용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재희는 울고 웃었다.
“……바보.”
거봐.
재희는 한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깊은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한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 년 넘게 쌓아 온 격정이었다. 한영도, 재희도, 쉽게 꺼뜨리지 못하는 불길이었다. 새벽이 너무 일찍 찾아왔다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한영의 침대 위에서 온몸이 흔들리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재희는 언제인지도 모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던가.
이한영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흰 얼굴이 잡혔다. 한영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자각조차 없이 그 얼굴을 응시했다.
색색거리는 숨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다붓이 감긴 눈꺼풀의 호를 따라 뻗은 속눈썹은 여전히 길다. 도톰한 입술은 변함없이 붉었다. 야한 색이었다. 그의 한 손에 잡힐 듯 가녀린 목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양팔 사이에 갇힌 풍만한 가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 이한영을 미치게 만들었던 선홍빛 유두가 뾰족하게 일어서 있었다.
그 모든 형용을 눈에 담고도 한영은 현실감이 없었다. 그것이 잠기운 때문인지, 오래도록 그를 괴롭힌 후유증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저 한영은 재희의 잠든 얼굴을 눈앞에 두고 남산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곳에서 보낸 한 달 동안 숱하게 떠올리던 얼굴이 마재희의 것이었기 때문일까.
남산에서 보낸 한 달은 이한영에게도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기껏해야 서너 평이나 될까 싶은 고문실에서 한영은 몇 번이고 생사의 위기를 겪었다. 한 번은 정말로 숨이 멎은 적도 있었다. 죽은 시체를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니 수사관들은 상태를 봐 가며 한영에게 시간을 주곤 했지만, 그 시간조차 그에게는 고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영은 그 시간을 원망과 저주로 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뿌린 씨앗에서 수확한 곡식을 맛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기만과 협잡, 그리고 배신의 토양 위에 자라난 곡식이다. 그 곡식이 달 리 없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이한영은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지가 남아 있을 때마다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았고, 집착과 미련을 풀어냈다. 그 과정에서 마재희의 얼굴이 빈번히도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으리라. 원래 이한영의 인생은 마재희를 빼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결국 이한영은 살아서 재판을 받았고, 또 살아서 교도소에 갇혔다.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그래도 남산 지하실보다는 나았으나, 간첩죄란 오명이 그의 수형 번호와 함께 붙은 이상 가혹한 현실이 뒤따르는 것은 똑같았다. 전부는 아니었으나 몇몇 교도관들은 충분히 폭력적이었고, 남산에서부터 이미 몸이 망가져 있었던 한영에게는 번번이 위기가 찾아왔다.
한영은 그 위기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상황을 타개하고자 헤쳐 나갈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고난이 자신을 때리면 때리는 대로, 무사히 지나가면 지나가는 대로- 그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교도소에서 오 년을 보내니 별명이 붙었다. 보살이었다.
그 별명을 처음 들은 순간 한영은 천주교 신자인 할머니가 보일 법한 반응을 상상하다 말았지만, 다른 이의 반응은 다소 격했다.
“보살이라고?”
접견실 유리 맞은편에 앉은 김종석은 폭소부터 터뜨렸다.
그날은 김종석이 마지막으로 이한영을 접견하러 온 날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한 삼촌이 되어 교도소에서의 생활을 묻는 김종석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간 그들 사이에 묵은 증오가 있음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굴었다.
한영은 그것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김종석이 이한영에게 품은 집착만큼은 다시금 인식할 수 있었다.
“내가 밉지?”
김종석이 아련한 눈으로 묻던 그 순간, 한영은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긍정하는 웃음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예감하고 있었다. 결국 눈앞에 있는 남자와의 악연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언제고 이어지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한영은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재희 양은 부모님과 함께 시골로 이사를 갔더군.”
김종석의 음성을 들으며 한영은 그간 잊고 있던 목적을 떠올렸다.
“학교도 그만두고 사시 준비를 하던데.”
자유.
잊고 있었던 그 단어를 떠올렸다.
“반응이 왜 이렇게 밋밋하지? 재미없게? 마재희 양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나?”
빤히 관찰하는 김종석의 시선 앞에서 한영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하나의 계획을 구체화했다.
그리고 태연히 웃었다.
“……글쎄요. 전혀 궁금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대답과 동시에 이한영은 생각했다.
어차피 보살이라는 별명이 듣기 거북하기는 했다고.
목적이 생기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한영은 교도소를 나와서도 이어 나갈 인맥을 물색했고, 신뢰 관계를 쌓았다. 그의 인생에 시집은 단 하나뿐이라는 이전의 다짐을 뒤집고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냈다.
그 과정 속에서도 한영은 전향서만큼은 쓰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라는 거짓 낙인이 억울해 버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철창 밖 세상 속에 사는 이들이- 이한영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
“다른 거 뭐, 부탁할 건 없습니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든지?”
접견 온 조 변호사가 그렇게 물을 때마다, 한영은 그가 기다리는 시간이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호의적인 교도관이 때때로 묻는 말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접견은 언제까지 거부할 겁니까? 차라리 직접 오지 말라고 말해 주는 게 어떻습니까.”
그 같은 질문들이 계속될 때마다 한영은 의식적으로 그의 머릿속에서 마재희를 지웠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보내는 밤은 길었고, 그의 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점점 갈수록 커져 갔다.
찰랑-.
그에게는 아주 익숙하고도 그리운 소리가.
“…….”
이한영은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쇠창살이 달린 창문을 바라보곤 했다. 남산의 고문실에서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한영은 그것이 환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죽기 전에 경험하는 체험 중 하나일 것이라고.
그러나 풍경 소리는 이후로도 몇 번이고 울렸고, 교도소까지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교도소를 나온 순간에 이르러서까지 그를 쫓아왔다.
“이한영 씨!”
“한 말씀 해 주세요, 이한영 씨!”
교도소 앞은 시끌벅적했으나 한영은 그 요란에 휘둘리지 않았다. 기자들 너머로 보이는 한 인영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환상일까, 진짜 너일까. 자신이 서른두 살의 마재희를 모른다는 것을 되새기지만, 저 멀리 서서 눈을 감고 있는 마재희는 자신이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움직이는 기자들의 머리 사이로 금세 그 모습은 사라져 버렸지만, 한영은 그 순간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평생- 귓속에 풍경을 달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 * *
“……잘 잤어?”
불현듯 들려온 소리에 한영은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눈앞에서 마재희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고 있었다. 아직 잠기운에서 완전히 못 벗어난 얼굴이다. 한영은 그 순간에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한영이 말없이 가만히 재희의 얼굴을 응시만 할 때였다.
재희의 얼굴에 느리게 웃음이 번졌다.
“……생일 축하해.”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 웃고 있는 순백의 얼굴을 본 순간, 한영은 참지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의 적요가 거짓인 것처럼 바람같이 움직였다. 재희는 그가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맞춰도 놀라 움츠리지 않았다. 맹목적일 정도로 그의 몸을 받아 주었다. 한영은 순식간에 몸을 달구는 본능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그를 일깨우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 마재희라고.
그렇게 격렬한 밤이 다시금 시작되는 가운데, 한영은 재희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철없는 어린 시절 떠올리곤 했던 단어들을 서른두 살이 되어 반복하고 있었다. 내 반쪽. 내 일부. 내 몸의 불. 내 삶의 유일한 열정. 그리고- 내게 남은 마지막 양심.
한영의 입술 사이로 툭, 한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지난 일생 동안 이한영이 스스로에게 금기시 삼았던 세 음절의 단어였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는데도, 재희는 그 말을 들었다.
“……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눈을 뜬 얼굴에 곧 미소가 번졌다. 한영은 재희가 울면서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로 인해 행복해하는 그 순간을.
재희가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에게 속삭여 주었다.
“……응. 나도.”
나도 사랑해.
그녀의 고백 앞에서 한영은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은 운이 좋았다. 마침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곳이 마재희의 옆집이었다. 주변에 무관심하던 마재희가 마침 운 좋게도 그를 친구로 받아 주었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었다. 문제 많은 그를 마재희가 사랑해 주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를 믿고 기다려 주었다. 그가 모르던 진심을 끄집어내 그를 붙잡아 주었다.
어지간한 운이 아니고서야, 그런 기적들이 계속되지 못하리라.
그래서 몇 시간이 흐른 후 잠든 재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한영은 궁금해했다. 이번에는 어떨까.
이번에도 내 운은 기적을 가져올 수 있을까.
“……잘 자.”
낮게 속삭인 인사였는데도 들렸을까. 눈 감은 재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한영은 오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코트를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 누운 이를 더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 * *
단잠이었다. 십일 년간 마음 편히 자지 못했던 몸이 한영의 살갗을 마주하고서야 해금을 맞았다. 정신없이 자는 동안 재희의 감각 기관은 때때로 미세한 접촉을 감지해 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커다란 손바닥, 흰 피부에 얼룩진 정액들을 닦아 내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 그의 성기를 받아 내야 했던 아래를 살피는 손길까지.
다양한 자극이 있었음에도 재희가 깨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재희도 불현듯 눈을 뜨는 순간 그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 오래 잤음을.
삐삐의 진동 소리를 들은 것은 그다음이었다.
재희는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났다. 한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신경 쓰면서도 근육통에 앓는 소리를 흘렸다. 엉거주춤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삐삐를 확인했다.
곧 재희의 눈에서 서서히 졸음기가 가셨다.
근육통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해가 있었습니다.
한영의 집 전화기로 연락하자, 성광일 기자는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재희는 그의 후배 기자에게 일어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길어지려는 설명을 잘랐다.
성 기자는 빠른 어조로 정보를 전달했다. 그의 후배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사로잡혀 김 부장을 뒤쫓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붙잡히기 직전 후배 기자는 김 부장이 어느 해장국 가게로 들어가는 것만은 보았다, 했다.
-그 가게 주인 말에 의하면, 김 부장이 그곳 단골이랍니다. 들어 보니 생각보다 좋은 형편이 아니랍니다. 퇴직하고 사업이 줄줄이 망해 자금난도 있고, 사기도 당했답니다. 그 때문에 아내하고 이혼했고, 뭐, 딸이 하나 있긴 한데, 가출한 지 오래고요.
재희는 의외라 생각했다. 김 부장은 어디서든 잘 먹고 잘 살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때로는 그런 김 부장을 상상하며 적개심에 불타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듣기로는 심한 도박 중독자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재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도박에 중독된 사람이, 옛 직장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한영이에게 접근했다?
재희는 김 부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돈은 절실히 필요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이한영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신은 이한영의 의혹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경우라면.
김 부장이 생각해 낼 법한 행동은 하나가 아닐까.
사실을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이한영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것.
“돈이 목적일까요?”
-도박 중독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다른 건 없나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요?”
-한 시간 전에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한영 씨한테서.
성 기자는 곤란하게 됐다는 듯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그동안 자길 감시한 대가를 받아야 하겠다던데요?
한영이 성 기자에게 부탁한 것은 간단했다. 기사를 써 달라는 것. 재희는 무슨 기사를 써 달라고 했는지 물었으나, 성 기자는 자신도 모른다고 답했다. 우편으로 기삿거리를 보내겠다는 말만 했다고.
무슨 기사를 내보내려는 걸까.
그 대답을 재희는 일주일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최근 자신이 프락치였음을 밝히는 시집을 발간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인 이한영 씨가 오늘 2일 거리에서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한영 씨를 찌른 오십 대의 남성은 범행 직후 도주했으나, 이한영 씨와 거리를 지나던 시민들의 도움으로 결국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현재 이한영 씨는 범인 인도 직후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로-.」
라디오 뉴스로 짐작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재희는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이 근처에는 수술실밖에 없을 텐데.
재희는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멍하니 수술실 입구만 바라보았다. 한영의 피습을 정현철 변호사에게 전해 듣고 이곳까지 달려올 때 본 성탄절 트리가 문득 떠오른다. 병원 건물의 중앙 홀에 있던 거대한 트리를 보며 재희는 매년 십이월이 될 때마다 그녀를 괴롭혔던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거리를 수놓은 성탄절 장식과 트리를 볼 때면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그녀의 꿈속에서는 늘 깊고 검은 구덩이가 있었다. 꼬마전구가 반짝거리는 트리들도 있었다.
그녀는 겨울을 좋아해 본 지가 까마득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마침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영재가 물었다. 인혜가 대신 설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수술 중이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일어날 거야.”
재희는 불쑥 입을 열었다.
“뭐?”
“……재희야…….”
“한영이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금방 일어날 거야.”
재희는 현철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찌른 범인이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입 여는 거 금방이야. 이한영 씨 사건 기록도 증거로 제출할 거고, 며칠 전에 찾아왔다며. 그때 협박한 음성 녹음해 둔 거 제출하면 나라 한번 뒤집어질 거다. 시끄러워질 테니까 후배님은 계속 귀 닫고 지내. 다른 걱정 하지 말고, 다친 사람만 신경 써.’
현철은 너무나도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재희는 그제야 한영이 현철과 계속 만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영이 열두 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머무를 때 신문과 뉴스가 한영의 이야기로 난리가 났다. 그 직전에 성광일 기자에게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이한영 씨가 보낸 우편을 확인했는데요, 이거 이대로 기사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재희는 자신이 그 순간 어떻게 이성적인 사고를 발휘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성보다는 분노가 주된 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영이 보낸 정보에 더해 한영을 찌른 남자의 정체를 성 기자에게 알렸다. 기자의 입을 통해 김 부장의 추악한 낯을 폭로했다.
그로써 ‘김 부장’이란 단어가 숱하게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만인이 그를 욕했다. 그리고 형사들이 찾아왔을 때, 재희는 정보를 건넸다. 김 부장은 단순한 난동꾼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재희의 판단은 그랬다. 그는 의도적으로 한영을 노려 살해하려 한 악질적인 범죄자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휘몰아치듯 한영의 진실을 전한 후에야 재희는 뜨거워진 속을 다소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식힐 수는 없었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고 했던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도, 한영이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일 인실로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걱정만큼이나 화도 나 있었다. 십일 년 전의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았다면, 김 부장이 먼저 한영을 찌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희는 한영이 그를 자극했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실제로 그간 한영을 도와 김 부장의 뒤를 밟고 조사하던 남자를 만나 그 사실을 확인받았다. 이한영은 자신의 부상을 초래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가 부상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유도했으리란 을씨년스러운 직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쩌면- 이한영은 죽으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는 얼마 가지 못했다. 앙금처럼 옅게 깔려 있을 수는 있을지라도, 재희는 그저 한영이 눈만 떠 주기를 바랐다. 그것만이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그리고 한영은, 마치 재희의 화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사람처럼 한참을 시간을 끌고서야 눈을 떴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앞둔 날 어느 저녁이었다.
한영의 눈이 어스름하게 열리던 순간, 재희는 그 자리에 인혜와 영재가 같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넌 진짜 나쁜 놈이야.”
아마 친구들이 없었다면, 죽었다 살아난 사람에게 그보다 더 막돼먹은 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희는 몽롱하던 한영의 눈이 휘어지던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허무할 지경으로 쉽게 이한영은 그녀를 무장 해제시켰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한영이 그녀에게 제안했기 때문일까.
영화관 갈래?
재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 대답 안 해 줄 거야.”
맨 정신으로 일어나서 질문해야 대답해 줄 것이다. 대답이 궁금해서라도 금방 일어날 수 있게, 절대 안 알려 줄 것이다. 정신 차렸다고 쉽게 알려 줄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한영이 애가 탈 지경까지 기다리게 하고 뜸을 들이고서야 대답해 줄 것이다.
그러나 한영은 웃었다. 대답을 아는 사람처럼.
그때 컹, 하고 코 들이켜는 소리가 재희의 뒤쪽에서 들렸다. 인혜든, 영재든, 둘 중 하나이리라.
“……독한 새끼.”
“미친놈…….”
한영은 친구들의 욕설 앞에서도 슬며시 눈을 휘었다. 아마 한영에게는 보기 드물게 우스운 광경이었으리라. 그는 영재나 인혜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못 봤을 테니까.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인혜가 눈물을 훔치며 병실 문으로 향했다. 재희도 인혜처럼 간호사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을 때였다.
인혜가 손을 뻗기도 전이었다. 병실 문이 먼저 부드럽게 열렸다.
“……누구세요?”
인혜가 질겁하며 뒷걸음질 칠 정도로 병실 문을 연 남자는 숨소리가 거셌다. 뛰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급하게 온 것은 분명했다. 얼굴이 덥수룩한 수염투성이다.
어디 산골 오지에서 생활하던 산적 같은 얼굴에, 영재가 긴장하며 앞으로 나설 때였다.
수염 속 까만 눈이 재희에게 닿았다.
“…….”
“…….”
그 순간 재희의 눈에서 참지 못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 아는 사람이야? 넌 또 울어?”
“……현이.”
“뭐?”
“……상현이잖아.”
“…….”
긴장한 눈빛이던 수염 속 얼굴이 그제야 웃었다. 눈물은 찔끔 흘릴지라도, 옛 기억 속 모습처럼.
“너는 무슨, 혼자 아저씨가 되어서 왔어…….”
인혜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가 우는 와중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한영은 다음 날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재희는 그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요란 떨지 않았다. 한영은 죽을 뻔한 경험이 그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는지, 더 이상 재희를 거부하지 않았다. 재희도 그래서 그의 곁에 계속 있었다. 그들은 차근차근, 서로의 시간에 맞춰 가고 있었다.
한영이 깨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바라본 사람은 역시 마재희였지만, 그다음은 마음의 크기와는 상관없었다. 박상현의 몰골은 다 죽어 가던 이의 시선도 순식간에 빼앗을 정도로 위대했다.
“산에서 곰도 잡겠네.”
한영은 그저 상현에게 그렇게만 말했다. 세월의 공백이 없는 것처럼.
상현도 옛날처럼 키들거렸다.
“지방에서 촬영하다 보면 원래 다 이런 몰골이 되거든, 친구야.”
“촬영? 너 영화 찍어?”
“너 영화감독이야?”
다들 놀라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 한영은 그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재희는 눈치챘다. 도대체 너는 또 어떻게 상현이 직업을 알고 있었어?
그러나 곧 마주친 시선에, 재희는 웃었다.
한영이 웃고 있었다. 마치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고 동네를 뛰어 놀던 어린 시절처럼. 그러니 그녀가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 *
한영은 오래가지 않아 퇴원했다.
퇴원한 주에 찾아온 토요일을 친구들은 놓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한영의 집에 다섯 명이 다 모였다. 학생이던 시절의 제약이 더는 없는 삼십 대의 모임이었다. 초저녁부터 술이 상 위로 올랐다.
“야, 근데 왜 하필 중국집이냐? 많고 많은 음식 중에?”
영재가 탕수육을 집어 먹다 말고 물었다.
그 대답에 응한 것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VTR을 설치하고 있던 상현이었다.
“옛날 생각나고 좋지 않아?”
“하긴…… 우리 맨날 짜장면 시켜 먹기는 했지.”
재희는 무언가 믿기지 않아 한영의 집 거실에 펼쳐진 풍경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요즘 집집마다 다 있다는 비디오 기계를 설치하겠다고 씨름하고 있는 상현은 덥수룩하던 수염들을 싹 다 민 채였다. 그제야 이십 대 때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에, 재희는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펼친 상 앞에 앉은 영재는 마치 대학생 때처럼 툴툴거렸다. 그 옆에 앉은 인혜는 상현이 사 온 비디오테이프들을 보며 왜 아마데우스는 없냐고 묻고 있었다. 어떻게 네가 꼽은 명작의 목록에 그 영화가 없을 수 있냐고.
한마디로 산만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정신없네.”
옆에 앉은 한영이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재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영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들은 서로가 정확히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이 언제고 그리웠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래도록 그리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보고 싶을 때면 만나서 보면 되니까. 서로를 마주 보며 더 이상 누군가의 빈자리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괴로움은 이제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리라.
“근데 이제 토요 명화는 안 하는 거냐?”
“해. 시간대가 바뀌어서 지금 안 하는 거야.”
“몇 시에 하는데?”
“아마 열한 시인가? 나도 안 본 지 꽤 돼서.”
“오늘 한번 오랜만에 봐 볼까?”
친구들의 목소리가 탁구공처럼 오가는 것을 듣고 있던 한영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있으려고?”
“야, 쟤 봐라. 저거 저, 변함없이 야박한 거 봐.”
“그러게. 한영아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오랜만인데 그렇게 우릴 쫓아내고 싶어?”
“너희 이제 밑에 달린 식구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아?”
무심한 한영의 반문에, 상현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다음부터는 가족 동반으로 할까?”
그것 참 좋다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을 보며, 한영이 일순 난색을 표했다. 상현에게 일 년 터울의 아들이 둘이나 있단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 지금보다 더 시끄러워질 거실을 마찬가지로 상상해 버린 재희는 결국 웃어 버렸다.
모든 상황이 부드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교류는 상현이 낀 순간부터 윤활유를 만난 자전거 바퀴와 같았다. 그렇게 조금의 삐걱거림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그들은 때로 작은 돌멩이와 돌부리에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평탄한 길만 계속되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들이 탄 자전거는 앞을 향해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 * *
몇 달이 지나 한영이 쓴 책이 발간되었다. 침묵하던 한영이 그렇게 입을 열자 세상은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한영을 향한 비난이 있었고, 한영을 향한 동정과 연민도 있었다. 그가 기어코 진실을 밝혔다는 사실에서 오는 존중도 있었다. 한영은 그 모든 반응을 받아들였다. 그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죄를 밝혔고, 세상을 향해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재희가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영원한 소란은 없다. 언젠가는 잠잠해지는 법이다. 이한영의 이름이 더 이상 뉴스와 가십란에 오르지 않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재희는 구치소를 찾았다.
그녀는 구치소 접견실에 먼저 앉아 기다렸다. 삭막한 연푸른빛으로 도배된 접견실 유리 너머의 벽을 응시했다. 한영 몰래 이곳에 온 참이었다. 그리고 한영도 아마 그녀 몰래 이곳에 왔다 갔으리라. 그가 이 기회를 놓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재희는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얼굴을 향해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그러자 의자에 앉고 있던 김 부장의 얼굴에 비소가 번졌다.
“오랜만이야, 학생.”
과거에 느꼈던 도회적인 느낌의 얼굴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추악하게 일그러진 노인 하나가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학생은 아닌가? 변호사님이라고 불러 드릴까?”
그렇게 조롱하듯 되묻는 김 부장의 얼굴을 보며 재희는 무언가 느껴질 감정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자니 케케묵은 증오와 분노가 떠오르기는 했다. 그러나 과거에 느꼈던 증오도 어느샌가 희미해져 있는 것은, 결국 그녀와 한영이 승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재희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소회를 밝혔다.
“진짜 이름도 김 씨일 줄은 몰랐어요.”
“가장 흔한 성 씨니까. 가명으로 삼기엔 좋지.”
김 부장, 진짜 이름은 김문수인 남자가 태연히 웃어 보였다. 그는 수세에 몰려 있음에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니, 그것은 오기에 가까워 보였다. 재희는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관찰하며 느꼈다.
“무슨 일로 왔어? 이한영이처럼 내 꼴을 구경하러 왔나?”
“한영이가 와서 그렇게 말해요?”
“약을 올리더군. 내 사업 실패가 다 제 작품이었다고.”
“…….”
“교도소에서 그런 짓을 꾸미다니, 놀랐단 말이지. 그놈이 난놈이긴 해. 내가 물건을 키우기는 했어.”
그렇게 말하는 김 부장은 웃고 있었다.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자신의 작품이 흡족하다는 듯이.
재희는 무뚝뚝하게 충고했다.
“저라면 그렇게 만족할 시간에 다른 걱정을 하겠어요.”
“무슨 걱정? 고작해야 상해죄에 살인 미수야. 몇 년 살다 나가는데, 내가 왜 걱정을 하겠어?”
그는 태연히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한영이나 학생이나 지금 모든 게 끝난 것 같고 그럴 테지만 말이야,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이한영이가 언제까지 저렇게 입을 놀리고 다닐 수 있겠어? 어? 지금이야 이목이 쏠려서 가만히 있겠지만, 나중에 가 봐. 그때도 기관이 그놈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재희는 미동도 없이 덤덤히 대꾸했다.
“내버려 둘 거예요.”
“순진한 소리를.”
“그리고 그들은 당신도 내버려 둘 거예요.”
“…….”
“진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난 당신이 앞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들은 못 본 척하겠죠.”
“…….”
“듣기로는 당신에게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서요?”
“…….”
“그래요, 상해죄로는 몇 년 고생하지도 않겠죠. 그렇지만 이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공문서의 기록으로 남는 거예요.”
재희는 남자의 눈을 응시하며 강조했다.
“그 기록이, 영원히 당신을 쫓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 주겠죠.”
싸늘해지는 남자의 눈빛을 맞받아치며, 재희는 불편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김 부장이란 인물은 어둠 속에 묻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그럼에도 몸을 숨기려 할 것이다. 그런 면의 지식을 누구보다도 잘 갖추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다 한들, 남은 인생을 쥐 죽은 듯 조심하며 숨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한영이 평생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혹시라도 한영이에게 다시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저는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재희는 고요히 말했다.
“더 이상 당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죽은 듯이 사세요. 제 눈에 보이지 않게.”
당신은 실패했다. 그리고 한영의 복수는 성공했다. 이제 김 부장이 빚어낸 이한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영이는 앞으로 당신을 까맣게 잊고 살 거예요.”
어쩌면 그것이 당신에게는 진정한 실패인지도 모르지.
등을 돌리기 전 확인한 김 부장의 얼굴을 통해 재희는 그렇게 확신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의 뒤에서 고래고래 성을 내는 남자는 더 이상 그 옛날의 무서운 남자가 아니었다. 절대적인 악을 떠올리게 했던 무소불위의 남자가 아니다. 그저 나약하고 추악하게 비틀린, 비루한 한 남자일 뿐이다.
그런 남자 따위 두렵지 않다.
재희는 접견실을 나오며 예감했다.
이제 더 이상, 저 남자로 인해 한영과 그녀가 고통받는 일은 없으리라고.
* * *
김 부장은 한영에 대한 살인 미수가 인정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희는 그 순간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신문에서 김 부장을 독재 정권하의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로 소개하며 비판조로 그의 말로를 전했다.
한영은 그동안 그간 외면했던 감정의 빚들을 착실히 갚으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심 교수의 위패가 모셔진 절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심 교수의 가족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도움을 받은 성당의 신부님들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그 모든 순간에 재희도 함께였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한영의 발걸음이 시골로 귀향한 재희의 부모님에게까지 닿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그래, 한영아.”
아마 그 첫마디 앞에서 김 여사는 과거를 뛰어넘는 시간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재희는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영이 들고 온 한우 세트의 붉은 포장지가 쨍하니 눈을 아리게 했다.
“아저씨는요?”
“너희들이 오후에나 도착할 줄 알고 잠시 나갔어. 트랙터가 고장 나서 고치러.”
신발을 벗으면서도 한영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저씨가 트랙터도 직접 고치세요?”
젖은 눈을 하고 있던 김 여사도 웃었다.
“상상이 안 가지? 기계라면 손 하나 안 대던 양반이었는데.”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밖에 없는 한영의 사정에, 하루의 시간은 아쉬워도 붙잡을 수 없는 물결처럼 흘러갔다. 뙤약볕에 벌겋게 탄 얼굴로 집에 돌아온 마 사장은 한영에게 이렇다 할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했다는 무뚝뚝한 한마디뿐이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 사장의 마음을 알았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십일 년 전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도움도 안 됐는데 돕기는. 됐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내 웃었다. 한영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서글서글하게 김 여사의 음식 장만을 도왔다. 식사 내내 다정히 말을 붙였다. 재희는 그 모든 순간이 꿈같았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했다. 그들은 지난 세월을 이렇게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감회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재희는 찻잔을 두고 부모님을 마주 보며 긴장했다.
“저희 진지하게 교제하고 있습니다.”
한영의 말에 재희의 부모님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예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그것을 허락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난 허락 못 한다.”
마 사장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옆에 앉은 김 여사가 한숨을 흘리고 싶은 얼굴로 마 사장을 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고 가라. 그렇지만 교제는 안 돼.”
한영과 재희가 무어라 할 틈조차 없이 마 사장은 벌떡 일어났다. 안방으로 가 버리는 마 사장을 보며 김 여사는 한숨을 길게 흘렸다.
재희의 부모는 이른 시간에 잠들었다. 농사일 때문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긴 터였다. 재희는 담담히 건넌방으로 건너가 이불을 깔고 누웠다. 대청마루 너머에 있을 부모님의 방은 조용했다. 재희는 옆방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사시 공부를 하던 시절 쓰던 방이었다. 방음이 제대로 안 돼, 희미하지만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영이 그녀의 책들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재희는 물끄러미 벽 너머에 있을 한영을 그려 보다 눈을 감았다. 어차피 그녀는 결혼이란 제도에 필사적이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대로 혼인 신고를 하지 못한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마재희는 이한영의 곁에서 언제까지고 함께할 것이다.
재희는 한참을 옆방에서 들려오는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잠이 도통 오지 않았지만, 한영과 같이 호흡하는 기분을 느끼며 재희는 잠이 들고 싶었다. 한영도 그렇게, 편하게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그러나 그때였다.
쿵,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재희는 번쩍 눈을 떴다.
방금 들은 소음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는다. 책이 책상 위로 떨어지며 부딪친 소리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재희는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다급해졌다. 가방이 어디 있지? 재희는 갖고 온 가방 속에 있을 알약들을 서둘러 찾았다. 장지문을 열고 다급히 걸음을 옆방으로 향했다. 한영이 있는 방 앞에 섰지만, 방 안은 조용했다.
아니, 아니다-.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한영아.”
재희는 조용히 문을 열며 그를 불렀다.
책상 앞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한영이 고개를 느리게 들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 어린 고통을 보며 마음이 아파 왔지만, 재희는 급히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한영은 예전처럼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의 고통과 민낯을 재희 앞에서 숨기지 않았다. 한영은 약을 먹고서도 한참을 진정하지 못했다. 그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녀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재희는 감내했다.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골의 달빛 아래 천천히 지나갔다.
한영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것이 못내 걱정돼 몇 번이고 한영의 머리며 맥박이며 확인한 후였을까. 잠시간 한영의 옆에 누워 그의 상태를 지켜본다는 것이, 재희는 결국 잠들어 버렸다. 그녀는 그것을 아침 동이 트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깨, 퍼뜩 눈을 뜬 후였다.
“……아.”
재희는 당황해 눈을 깜빡거렸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반쯤 열고 있는 마 사장도 당황한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녀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눈만 끔뻑거렸다.
마 사장은 자신의 딸이 외간 남자와 한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 광경을 보고도 침묵했다. 무뚝뚝한 얼굴로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불호령을 예상했던 재희는 떨떠름하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그녀가 그대로 방에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재희의 시선에 문득 한영의 얼굴이 잡혔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한영의 눈 감은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번져 있었다.
“……왜 웃어?”
재희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열은 더 이상 없다. 표정도 편해 보인다. 그렇게 재희가 한영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한영이 눈을 감은 채 답했다.
“아저씨는 여전하시네.”
“……?”
“옛날부터 그러셨어. 내게 미안한 마음이 있을 때면 남들 안 볼 때 몰래 다가오셔서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주고 가셨거든.”
“……그랬어?”
“응. 그리고 아저씨는 그럴 때면 늘 내가 원하는 걸 못 이기는 척 들어주셨어.”
그렇게 말하는 한영은 마음 편히 웃고 있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보며 눈치챘다. 한영이 지금 왜 그렇게 웃고 있는지를.
“……아저씨는 언제나 끝까지 완고하진 못하셨지.”
한영이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다정한 눈빛으로 응시해 오는 시선 앞에서 재희는 그를 따라 웃을 수 있었다. 그랬다. 그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완고하지는 못했다.
“집을 팔까 생각 중이야.”
갑자기 들려온 말에 재희가 반문했다.
“왜?”
“공사 때문에 먼지가 너무 날려. 창문을 못 열겠어.”
“아…… 맞아. 또 맞은편에 빌라 공사 시작했지.”
“지금이 마침 매도하기에 좋은 시점인 듯하고. 애들이 가족들 몰고 놀러 오면 감당할 수 있는 넓은 곳으로 가야지.”
한영의 농조 섞인 말에 재희가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그리고 물었다. 괜찮겠어?
그와 그녀에게 소중한 추억이 있는 집이었다. 한영은 그 집을 지키기 위해 프락치가 되기도 했었다. 그에게는 무거운 의미가 묶여 얽혀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집을 떠나는 마음이 정말 보이는 것만큼 가벼울까.
그러나 한영은 맺힌 것을 다 풀어낸 사람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중요한 건 건물이 아니니까.”
“……맞아.”
그랬다. 정말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었다.
“더 자, 재희야.”
“……응.”
한영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서로의 다리가 엇갈리며 단단히 엮였고, 밀착한 배와 가슴이 따스한 온기를 전했다. 그렇게 서로를 단단히 옭아맨 채 재희는 그의 품에 이마를 묻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살아 있음의 증거를 귀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재희는 문득 과거에 보았던 책 속 삽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그런 것처럼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은 채, 칼바람 속에 휘날리고 있는 한 연인을 묘사한 삽화를.
삽화 속 연인들은 울고 있었지만, 재희는 그것이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아마 한영도 그럴 것이다. 재희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혹독한 겨울바람은 아니었다. 훈훈한 봄바람이었다.
* * *
결혼식장 영상을 촬영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찾아오는 하객들로 미어터지는 곳을 누비며 정신없이 사람들을 찍었다. 출판계와 법조계라는 전혀 상반된 세계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퍽 재미있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에 상현은 버릇처럼 감독으로서 아이템을 찾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감격에 젖어 있었다.
“똑바로 찍어. 그만 울고.”
옆에 있던 인혜가 목소리를 낮춰 충고했다. 상현은 얼른 눈가를 훔쳤다. 머쓱해진 그는 인혜를 향해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결혼식의 하이라이트인데 영상에 분위기 깨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어가면 안 될 일이었다. 인혜는 미안하다는 듯 입술을 닫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상현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말쑥한 턱시도를 입은 한영이 재희의 손을 잡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재희를 보자니 상현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우리 병아리가 벌써 저렇게 시집을 가다니. 실상 서른 넘어 가는 결혼이니 한참 늦은 것이었지만, 상현은 오랜만에 오빠 닭이 되어 비장해졌다. 우리 재희 울리기만 해 봐라, 이한영.
한 쌍의 반지가 서로의 손에 끼워지고 모두가 박수를 친다. 반지를 보며 유독 환하게 웃는 재희를 렌즈를 통해 지켜보며, 상현은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 느꼈다. 지금 이 순간만큼 해피 엔딩다운 해피 엔딩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아직 남은 엔딩이 있었던 것일까.
상현은 결혼식이 진행되던 중 카메라 앵글에 잡힌 한 얼굴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상현은 잠시 그 얼굴을 보다 고민했다.
“……인혜야, 이거 찍고 있어 봐.”
“뭐? 나 찍을 줄 몰라.”
질색하는 인혜에, 상현은 그 옆에 서 있던 영재를 향해 눈을 빛냈다. 심드렁하니 서 있던 영재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상현은 재빨리 캠코더를 넘기고 걸음을 옮겼다.
인파를 비집고 가는 내내 상현은 사실 고민하고 있었다. 이거 내가 괜한 짓을 벌이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는 금세 그 생각을 뒤편으로 밀어 두었다. 에이, 몰라. 일단 저질러 보는 거지 뭐.
상현은 식장 구석에 숨어 눈물을 훔치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다가갔다. 곰살궂은 말투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저, 어머니.”
“……네?”
“어머니, 저 기억 안 나세요?”
긴장하며 올려다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상현은 겁먹지 말라는 듯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한영이 친구 박상현입니다, 어머니.”
“…….”
“예전에 어머니 저희 학교에 오셨었잖아요. 그때 제가 한영이 몇 반에 있는지 말씀드렸는데…….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 안 나시려나.”
여자는 기억해 낸 듯 놀라고 반가워하는 빛을 잠시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 눈을 반짝이지 않았다. 상현은 여자가 주변을 의식하며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한영이 보고 가세요, 어머니.”
그러나 한영의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상현은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하다못해 연락처라도 전해 듣고자 애를 썼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한영의 어머니는 식이 끝나는 것까지 보고 등을 돌렸다. 누가 볼세라 서둘러 떠났다. 죄인의 뒷모습이었다.
“……끙.”
상현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상심했다. 붙잡지 못한 것도 안타깝지만, 이제 한영이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말을 하기는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상현이 한영이 서 있는 곳으로 시선을 줄 때였다.
“……어.”
상현은 깨달았다.
이미 한영이 고요한 눈빛으로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음을.
곧 시선을 느낀 듯 한영이 상현을 바라보았다. 얼떨떨한 눈으로 보고 있는 상현을 확인한 한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고마워.
“……하여간 눈치하고는…….”
정확히 전해진 감사 인사에, 상현은 씁쓸히 웃어 버렸다.
“박상현! 빨리 와! 사진 찍어야지!”
“……아이고, 인혜야, 목소리 좀 낮춰.”
상현은 서둘러 친구들에게 달려가며 낙관했다. 뭐,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슬픈 사연은 한영이 알아서 풀 것이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축하한다, 이것들아.”
“행복해라.”
“재희 울리기만 해.”
사진기 앞에서 자세를 잡으며 친구들이 덕담 내지 협박을 한마디씩 던지는 가운데, 한영이 웃었다. 옆에 선 재희도 웃었다. 상현은 괜히 또 코끝이 찡해 와 코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 * *
새 천 년은 많은 기대감을 사람들에게 안겨 주었고, 정권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과거의 묵은 때를 벗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한데 모여졌다. 그 노력 중 하나가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였다. 군부 독재 시절 있었던 의문의 죽음들이 비로소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이 오랜 시간을 버티고 버틴 끝에 얻은 기회였다.
위원회 출석을 앞두고 초조해할 것이라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이재석은 차분해 보였다. 재희는 물끄러미 그를 살폈다. 재석은 재희를 오 년 동안 보고 지내며 익숙해진 것이 있는지, 그 시선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안 떨려. 안 도망가.”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위원회 출석 요구 거부하면 과태료 문다며.”
“과태료 아니었으면 도망갔을 거예요?”
“얼마냐에 따라서.”
그는 재희에게 짐짓 농담을 건네는 여유도 보였다.
“네 남편은 뭐 하냐, 요즘.”
“알잖아요, 대학에서 강의하는 거. 요즘 새 책 쓴다고 바빠요.”
“저번 소설은 잘 봤다고 전해 줘. 점점 갈수록 돌려 까기의 달인이 돼 가는 것 같던데.”
“까는 게 아니라 알레고리예요.”
재희는 그렇게 이재석의 사담에 어울려 주면서도 그의 손을 보고 있었다. 차분한 얼굴과 달리 그의 손은 속수무책으로 떨리고 있었다.
“답변 중에 긴장되거나 불편하면 절 보세요. 제 얼굴 보면 이제 짜증부터 난다면서요.”
“……그건 위로야, 농담이야?”
“농담이요.”
“……허.”
정말 재미없다고 재석은 평했지만, 재희는 모로 가도 서울이란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농담은 사람을 웃기기 위해 건네는 것이다. 들은 상대가 웃으면 그만이었다.
이재석의 증언 이후로도 진실을 향한 길은 멀기만 했다. 그러나 무슨 길이건, 끝까지 가다 보면 목적지가 나오는 법이란 걸까.
재희가 조 변호사와 함께 법정을 나오는 순간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조 변호사 앞으로 마이크가 쏟아지듯 공간을 채웠다.
“지금 심경 말씀 부탁드립니다.”
“시작부터 쉽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최종 승소할 때까지 믿어 주시고 버텨 주신 유가족 분들게 감사합니다. 지금이라도 강대환 씨 죽음의 책임을 국가가 배상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다시는 공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 변호사가 능숙히 답변을 하는 동안 재희는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 법정에 있었다. 외길로 달려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재희는 지금 이 순간이 다소 믿기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그녀를 붙잡았던 사건이기 때문일까.
“일심 재판부에서는 의문사 위원회의 결정과 국가의 손해 배상 책임은 별개의 문제라고 판단했는데요, 항소심에서 뒤집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한 방이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그것이라면…….”
재희는 조 변호사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 년이나 걸린 긴 재판에 이긴 조 변호사는 물론, 취재하러 온 기자들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재희는 그 얼굴들을 찬찬히 보았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주변의 기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문득 그녀는 시선을 느꼈다.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기자들 너머 저 멀리였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남자는 가족과 함께 온 듯했다. 옆에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열 살이나 되어 봄 직한 사내아이가 심통이 난 얼굴로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처음에 재희는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가 대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버렸고, 대학에 다닐 때도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그녀는 그 남자를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짧지만, 따끔하게 그녀를 스치고 간 인연이었으므로.
“……양호명 선배.”
재희가 그를 알아보고 그 이름을 달싹인 순간,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인사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인사로.
그는 아들의 머리도 꾸벅 눌렀다. 아들이 짜증을 내며 고개를 뻣뻣이 세우자, 호명은 얘가 원래 이래,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으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재희는 웃을 수 있었다. 양호명도 웃었다.
재희는 호명의 가족이 그대로 천천히 멀어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보았다. 조 변호사가 기자들의 홍수를 뚫고 그녀를 급히 불렀다. 재희는 그에 움직이면서도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날이었다.
“…….”
너무 오랜만에 하늘을 본 탓이었을까. 눈이 시렸다.
안구에 느껴지는 작열감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재희는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리며 계속 앞으로 걸었다.
<풍경은 이유 없이 울지 않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