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두 번째 약속은 일주일 뒤로 정해져 있었지만, 한영이 그 전날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왔다. 급하게 일이 생겨 약속을 뒤로 미룰 수는 없냐는 것이었다. 시원시원하게 그러겠노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꼬장꼬장한 사람처럼 그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부터 던졌고, 한영은 급하게 방송이 잡혀 어쩔 수 없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원래 다른 작가가 진행을 맡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작가가 급한 일이 생겨 하차하고 대신 자신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영은 아무래도 방송을 꾸준히 할 생각인 듯했다. 끊어진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재희는 그것에 놀라면서도 신기하게 여겼다. 과거의 한영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단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런 그가 방송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단 감상에, 재희는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도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였다. 똑똑, 사무실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문 유리창 너머, 오토바이 헬멧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덤덤하던 재희의 얼굴에 서서히 서늘한 빛이 번졌다.
“……들어오세요.”
헬멧도 벗지 않은 사내는 곧장 문을 열었다. 사무실을 가로질러, 손에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것만으로 일은 끝났다는 듯 그는 사무실을 나갔다. 끝까지 말 한마디 없이, 신속했다.
재희는 놀라지 않고 잠잠히 서류 봉투를 뜯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러니 조금쯤은 기뻐해야 하는 걸까. 재희는 그런 생각을 묵묵히 하며, 다른 손으로는 가만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잘 받았습니까?
수화기 속에서 들려온 경쾌한 한마디에, 재희는 답했다.
“무리한 부탁이라 생각해서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시네요.”
-제가 ‘그쪽’하고 인맥 있는 거 알고 부탁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능글능글 대꾸하는 상대방이었지만, 재희는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아무리 그라도 특별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전에 신세 진 값이니까요.
재희는 서류 봉투 안에 있던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며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이 안 되었네요?”
-정권 바뀌고 퇴직했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제가 아는 정보원도 그 이상은 모르더군요.
“…….”
-쫓겨나듯 퇴직했다고 하니, 생각보다 평범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안에서 수십 년을 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정말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의외로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정말 그러기를.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범히 살며-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재희는 눈을 감으며 부탁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부탁드립니다.”
-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딱 붙어 지켜보겠습니다.
“거리는 지켜 주셔야 해요. 제가 이미 말씀드렸죠?”
-네에, 네. 그런 쪽으로 눈치가 빠르다고요. 사생활도 필요 이상으로 관심 가지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마십쇼.
시원시원하게 대꾸한 상대방의 말을 끝으로, 재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것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은 이미 예전에 끝냈다. 옳지 않다. 재희는 분명하게 그것을 인식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 뒤를 캐내고 미행을 붙이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을 알기에 영재나 상현을 찾는 일에는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달리 이쪽은, 정당한 방식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상대이기에-.
재희는 말없이 서류 속에 적힌 이름을 응시했다. 속에서 시커먼 감정들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아무리 불러 봐도 날카로운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는 단어가 입에서 새어 나갔다.
“……김 부장.”
십일 년의 시간은 김종석에게도 공평히 찾아갔을까.
재희는 종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의문을 품는다.
똑똑,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현철이 문가에 서 있었다.
“누구야?”
“……집에 두고 온 서류가 있어서요. 사람 시켰어요.”
현철의 눈가가 가느스름하게 잡혔다. 재희의 변명을 믿어 주는 눈치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현철은 더 묻지 않았다. 본래 온 목적만 꺼냈다.
“유가족 협의회 일은 어떻게 됐어?”
재희는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똑같아요.”
“당연하지. 사건 가해자들이 버젓이 일선에 있는데 마 변호사 같으면 증언대에 서겠어?”
“…….”
“중요한 증인이니까 너무 괴롭히지 마. 도망간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기분도 꿀꿀해 보이는데, 이따 저녁에 식사나 같이할까?”
재희는 서류철을 닫다 말고 현철을 바라보았다.
“……왜요?”
“왜라니? 선배가 후배한테 밥 사 주는 게 이상한가?”
“네. 선배님이라면요.”
“후배들한테 내가 좋은 이미지는 아니긴 한가 봐.”
“선배님이 이런 식으로 불러낼 때는 으레 검은 유착 관계 형성이 목적이니까요.”
“후배님,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 진짜 오해해.”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재판정을 벗어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재희는 현철의 의도를 의심만 할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감상이라 할 법한 감흥이 생긴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현철이 불러낸 일식집에 이르렀을 때, 재희는 잠시 난감함을 느꼈다.
“선배님, 어서 드세요.”
옆에 앉은 동완이 권했다.
재희는 말없이 커다란 접시 위에 놓인 회를 보았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분위기에 맞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가는 말소리에 청력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맞은편 자리, 현철이 한영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요즘 바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잘 지내? 새 시집 나온다면서?”
현철은 그새 한영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이번 주에 나옵니다.”
웃고 있는 한영의 얼굴은 그새 좀 더 마른 것 같았다. 원래도 날카로운 턱 선이었는데, 더 날카로워졌다. 자제하려 했지만 시선이 자꾸 한영에게 끌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 본 후로 벌써 이 주가 흐른 참이었다.
“마 변호사가 좋아하겠어. 여기 마 변호사도 이한영 시인 팬인데.”
재희는 새삼 후회했다. 현철과 한영이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바로 이 자리를 벗어났어야 했다고.
“마 변, 나중에 이 친구한테 사인해 달라 그래. 시집 전부 갖고 있잖아.”
“……선배님. 그만하세요.”
현철이 귀엽다는 듯 픽 웃고는 한영을 돌아보았다.
“마 변호사가 겉보기에는 차가워 보여도 사람이 진국이지.”
그 말에 한영이 그러냐, 점잖게 대꾸하고는 재희를 돌아보았다. 낭패감을 무뚝뚝하게 숨기고 있던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다소 느릿하게, 미소를 띠었다.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재희는 무안함을 어떻게든 숨기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과 마주했다. 동완이었다.
동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요?”
“아닙니다, 선배님.”
동완이 이것 좀 드셔 보라며 반찬 하나를 가리켰다. 여상한 태도였으나, 재희는 미심쩍은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성가신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님이-.”
동완이 너스레를 떤 말에 현철이 껄껄 웃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차를 몰고 왔다고 술은 거절한 한영도 그 분위기에 맞춰 주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완의 입에서 나오는 화제는 주로 마재희의 지난날과 관계되어 있었으므로.
“-는데, 그때 정말 냉정하게 그렇게 말씀하시길래 기가 다 죽었습니다.”
“마 변호사가 바른말만 하거든. 그 정도만 혼난 걸 다행으로 여겨.”
동완의 울상에, 현철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얼굴이었다. 재희는 현철의 나쁜 심보가 다시 발동했음을 눈치채고 한숨을 흘렸다.
묵묵히 술잔을 들었다. 술맛은 좋았으나, 안주가 저라면 아무래도 곤란하다. 그것도 한영의 앞에서라면.
“그런데 선배님이 정말 너무하신 게, 제가 기죽어 있으면 가끔씩 무뚝뚝하게 호의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럴 때마다 조련당하는 기분입니다.”
“그래?”
“정말입니다. 그럴 때 보면 선배님이 진짜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다니까요?”
재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옆에 앉은 동완을 돌아보았다. 동완은 무해한 얼굴로 웃고 있다. 그렇게 웃고 있는 동완의 맞은편, 한영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 때문이었나.
한영은 미소 띤 얼굴로 물컵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내리뜬 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흘렀다.
재희는 가만히 그 눈을 응시했다. 귓가로 동완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그에 어느새 무감각해진 후였다.
“정 변호사님은 선배님과 학교 다닌 시기가 겹치지 않습니까. 마 선배님 옛날에 인기 많았죠?”
“나는 모른다? 나는 법대고 마 변은 인문대인 데다, 마 변이 입학했을 때 나는 졸업반이었어. 데모만 하다 늦게 사시 준비하게 돼 정신없었다고.”
“아쉽네요. 지금도 미인이시지만, 대학 신입일 때라면 한창때일 텐데. 그때는 적어도 지금보단 사근사근-.”
그때 동완의 말을 가르고 탕,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모두의 시선이 소리를 좇을 때, 동완이 엇, 하고 펄쩍 상체를 튕겼다. 플라스틱 물통이 넘어지는 바람에 물이 순식간에 식탁을 번져 흘렀다. 가장 거세게 물줄기가 향한 곳은 동완이 있는 쪽이었다. 반찬 국물까지 뒤섞여 넘친 물에, 동완의 바지가 민망할 정도로 얼룩졌다.
얼굴을 싹 일그러트린 동완이 휙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고요히 웃었다.
“저런. 미안합니다.”
평온한 한영의 눈빛과, 감추고 있던 적의를 드러낸 동완의 눈빛이 맞부딪쳤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히 가라앉았다.
식탁에서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만 방 안을 울리는 가운데, 재희가 먼저 움직였다. 옆에 있던 물수건으로 식탁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막았다. 그렇게 조용히 움직이면서도, 그녀는 덤덤히 동완에게 일렀다.
“씻고 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불쾌감을 애써 참는 얼굴로 동완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동완의 뒷모습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재희는 그저 한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영은 직원을 부르겠다는 현철을 말리고는 직접 식탁을 휴지로 닦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저 담담히 웃으며 현철에게 사과하고 있다.
재희는 그 얼굴을 잠시 지켜보았다. 곧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 선배님.”
막 화장실을 나온 동완이 그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화장실까지 쫓아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재희는 잠자코 그 얼굴을 보다 다시 주변을 살폈다.
식당이 있는 상가 건물 내부에 있는 공용 화장실이었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과 휑한 계단만 보였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선배님?”
“옷은 괜찮아요?”
“네. 뭐, 마르면 되는걸요.”
그렇게 웃고 있는 동완을 보다, 재희는 불쑥 입을 열었다.
“둘째 형님이 이동식 변호사죠?”
“……네? 네…… 그렇습니다.”
“이곳이 참 좁아요. 한 다리 건너면 동문이고 후배고 가족이니.”
동완이 짧게나마 경직된 얼굴을 드러냈다.
재희는 담담히 물었다.
“이동식 변호사는 잘 지내세요?”
“저도 잘…… 저희가 사이좋은 형제는 아닙니다.”
화장실 앞에서 가족 안부를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재희는 동완의 거리낌이 장소 때문만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분께 신세 진 게 있어요.”
“…….”
“정말 훌륭한 형님을 두셨어요. 재판정에서 수가 다 읽히는 기분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동완의 얼굴에 긴장한 빛이 차차 서리는 것을, 재희는 무심히 주시했다.
“그때가 아마, 이동완 씨가 제 사무실에서 시보 생활할 무렵이었죠?”
“……저, 선배님.”
“네, 말씀하세요.”
동완은 흘러가는 분위기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알아서 바짝 머리를 숙였다.
“아까는 제가 술김에 실수를 했습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동완은 이미 아까부터 술기운이 상당 수준 오른 상태였다. 치밀하게 뭔가를 숨기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렇게 구구절절 내놓는 변명이라는 것이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여전히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이 잠시 질투해 정신이 어떻게 되었다는, 그런 무의미한 변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더 들어 볼 것도 없어 재희는 그 말을 잘랐다.
“사랑 타령은 하지 말죠. 그게 거짓말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선배님, 저는-.”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전 공과 사가 분명한 편이라 사귀는 사람이더라도 잘못을 눈감아 주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런 게 아닙니다. 선배님이 단단히 오해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십 대가 아니면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네?”
“예전에 지나가다 우연히 들었어요. 이동완 씨가 다른 직원에게 하는 말.”
더 변명할 말이 남지 않은 건지 동완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마 이동완은 사랑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본인은 했다손 주장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눈빛에서부터 티가 난다. 그 눈빛을 거짓으로 위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부터가 사랑에 무지하다는 증거다.
재희는 사랑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상대가 사랑스러워 응시하는 눈빛이 어떤 것인지- 그녀는 안다.
그 눈빛을, 기억한다.
“……저는 변호사가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목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재희는 아른거리는 추억을 뒤로한 채 느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 변호사님도, 정 변호사님도 그것이 기본이라고 하셨고요. 앞으로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그 정도 기본적인 마인드는 지켜야 할 거예요.”
“…….”
“쉬러 온 자리에 잔소리나 했네요.”
“……아닙니다. 변호사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죄책감에 익숙해지지 마세요. 익숙해지는 순간 무뎌지는 거니까.”
양심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게 아니다. 야금야금 잃어 가다,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것을 일찍 깨닫는 게 중요했다. 자신이 점차 사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보면, 나중에는 과거의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짓을 저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먼 옛날- 그랬던 것처럼.
재희는 동완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 스스로는 잔소리라 평했지만, 사실 그녀는 동완이 마음을 고쳐먹기 바라며 한 소리였다. 물론 듣는 사람에 따라 충고가 잔소리 내지 협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거기까지 그녀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일 뿐.
재희는 묵묵히 등을 돌렸다.
가게로 향하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대로 자리로 돌아가려던 그녀의 걸음이 멈칫 멈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나. 재희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알 수 없는 직감에 일순 사로잡혀, 꺾어지는 복도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창문이라도 열어 둔 걸까.
서늘한 바람이 그곳으로부터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
그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가게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이 변호사는?”
방에는 현철 혼자 있었다.
홀로 청주를 기울이고 있던 현철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물었다.
“애 눈물 쏙 빠지게 혼냈어?”
“많이 취한 것 같아 먼저 보냈습니다.”
“하하, 안 봐도 드라마지. 호되게 혼났겠지. 그 건방을 떨더니.”
재희는 더 대꾸하는 것 없이 현철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옆자리가 왜 비어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러나 현철이 먼저 그에 관해 입을 열었다.
“한영이는 담배 피운다고 잠시 나가던데.”
“…….”
“둘이 무슨 사이야?”
“뭐가요?”
“후배님, 내가 눈이 없어, 머리가 없어?”
“선배님은 눈과 머리보단 성격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난 막내가 귀엽게 질투하는 모습이나 기대했지, 그렇게 추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
“대체 그건 무슨 못난 심보지? 라이벌이 원체 잘나서 함부로 못 건드리겠으니, 사랑하는 사람을 깎아내려서라도 라이벌을 몰아내겠다?”
“…….”
“어쨌든, 이제 이한영과 잘되는 건가? 지금은 무슨 사이?”
현철의 오해가 아득히 저 멀리 진실과 떨어져 헤매고 있었지만, 재희는 묵묵히 술잔만 집었다. 현철이 혀를 쯧 차고는 술병을 들었다. 재희는 그 잔을 공손히 받았다.
“마 변호사.”
“네.”
“너무 고지식해서 걱정되는 우리 후배님.”
“…….”
“결혼 상대는 조건 따져 가며 고르는 거야. 마음이 아니라, 미래를 봐야지.”
재희는 말없이 현철의 눈을 직시하다 물었다.
“……선배님도 그렇게 결혼하셨나요?”
“나? 아니. 나는 와이프 사랑해서 결혼했지?”
“…….”
“그거 불신하는 시선이야, 아니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걸 비난하는 시선이야.”
“불신이요.”
“어쭈.”
현철은 픽 웃고는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서 마시라는 신호였다. 재희는 잠자코 술잔을 든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셨다. 술과 함께 입속에 맴도는 쓴 기운마저 삼켰다.
한영은 그즈음 방에 들어왔다.
자리가 파할 무렵, 현철은 사무실까지 좀 걷고 싶다며 먼저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그것이 소란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서란 것을 재희는 금세 눈치챘다. 한영은 번화가에 서 있기에는 너무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나가던 이들이 한영을 흘낏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는 이들도 있었다.
재희는 주변을 살피다 한영을 돌아보았다. 한영은 멀어지는 현철을 보고 있었다. 유심히 생각에 잠긴 눈빛이다.
“한영아.”
생각에 잠겨 있던 한영이 고개를 돌린다.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는 눈빛이 고요하다.
“역까지 태워 줄 수 있어?”
그럴 의도로 식사 중에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를 사무실에 주차해 두고 온 터였다. 다행히 한영은 선선히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역까지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차로 가면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밤이 깊은 상가는 사람들과 차로 붐볐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차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재희는 그 틈을 타 열심히 이것저것 속으로 따져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 외로, 한영이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집 어디야?”
재희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한영을 바라보았다. 한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체되었던 차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잠자코 주소를 불렀다. 가는 길까지 설명해 주려던 참에 한영이 핸들을 꺾었다. 재희는 한영이 생각보다 도로 사정에 훤하다는 것을 깨닫고 가만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침묵하지는 않았다.
“걱정돼?”
“뭐를?”
“아까 복도에 있었잖아.”
“…….”
“내가 화장실 앞에서 이동완 씨와 대화하는 거 들었잖아. 그래서 걱정하는 거잖아, 너.”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희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왜 따라 나왔어?”
“…….”
“지금은 왜 걱정해? 설마 술 취한 후배가 내 집까지 찾아와서 해코지라도 할까 봐?”
저 멀리 신호등이 바뀌었는지, 앞선 차들이 서서히 멈춰 서기 시작했다. 한영의 차도 곧 섰다. 한영은 그제야 재희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묻힌 한영의 눈동자가 뒤차의 헤드라이트에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그 눈동자가 냉혹해 보인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한영의 시선에는 조금의 감정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재희는 한영이 싸늘한 말을 하리라 예상했다. 네 오해다, 그 자리에 있는 게 다른 여자였다 해도 나는 그렇게 했을 거다, 라는 식의- 마재희를 밀어내는 말을 곧 하리라고.
그러나 재희의 얼굴 속에서 모진 마음을 누그러트릴 만한 무언가를 보았던 걸까.
길고 긴 침묵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영은 차분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한영의 얼굴에서는 무감각한 관성만 느껴졌다. 그저 어서 정체된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무료한 운전사처럼.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얼굴로 이한영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 후배, 네 집 주소도 알아?”
그 순간 가슴속에 무언가가 찡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재희는 그것이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 숨을 골랐다.
한영이 다시 고요한 어조로 물었다.
“그 후배가 네 집을 아냐고, 재희야.”
“……그렇다고 하면?”
“…….”
“예전처럼 또 몰래 뒤에서 도와주려고?”
정면의 신호등만 바라보고 있던 한영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글쎄. 오늘 보니까 혼자서도 잘하던데.”
재희는 말없이 한영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부지불식간 깨닫는다. 이한영이 지금 짓고 있는 미소는 소꿉친구 시절 그녀를 때때로 애태우게 했던 ‘그 미소’다. 이한영이 오빠 행세를 할 때나 짓던 미소. 여동생이 자랑스러운 오빠의 미소.
그는 지금 마재희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마재희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
“괜찮겠어?”
“……응?”
“아까 그 후배.”
한영이 검지로 툭툭, 운전대를 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어느 때보다 강렬히 갈등하고 있었으므로. 재희는 사실 허튼 기대를 품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면, 이한영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예전처럼 그녀를 보호하려 할까? 그것에 혹하는 못난 마음이 순식간에 가슴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다시 옆에 있어 준다면.
내가 못나서, 내가 걱정되어서, 그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한다면.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지난날의 어그러진 관계를 반복할 것이다. 재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응. 괜찮아.”
“정말로?”
“응.”
재희는 차분히 단언했다.
“문제가 생겨도 내가 처리할 수 있어.”
“…….”
“걱정하지 마. 더 이상 일곱 살 어린애가 아니니까.”
“……그래, 그렇구나.”
한영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또 그 웃음이었다. 오빠의 미소.
재희는 문득, 그 미소가 싫어졌다.
“……한영아.”
“왜?”
“지금 키스해도 돼?”
한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일이 초의 정적 후 무표정한 눈동자를 느릿하게 돌려 그녀를 보았다. 서늘한 중얼거림이 뒤따랐다.
“……그동안 충분히 내 의사를 밝혔다고 생각했는데.”
“싫어?”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재희는 암사자처럼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몸을 그에게 기울였다. 둘 다 앉아 있었고, 그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운전석에 앉은 한영은 피할 곳이 없었을 것이다.
서로의 입술에, 따스한 감촉이 번졌다.
가벼운 접촉 같은 키스였다. 키스라고 하는 것이 민망할 지경의 입맞춤.
“…….”
“…….”
재희는 조심스레 입술을 떨어트렸다.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인형처럼 무감각해 보이는 한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 고집, 여전하구나.”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이 재희의 입술을 간지럽힐 정도로 그들은 가까웠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술이 너무 간지러워서. 지척에서 느껴지는 그의 열기가, 다시금 그리워져서.
재희는 다시 몸을 기울였다.
물컹거리는 입술이 그렇게 다시 맞닿았을 때, 재희는 새삼스레 어떻게 키스를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졌다. 아주 오랜만의 키스였다. 그리고 그녀가 생애 경험한 키스란, 이한영과의 키스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반추해, 수줍은 듯 맞대고만 있던 입술을 열었다. 부드럽게 한영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차갑게 굳어 버린 사람처럼 미동도 없던 한영에게서 불쑥 열기가 느껴진 것은 착각이었나. 재희는 눈을 감고 있어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같은 차 안에 있게 된 후로 줄곧 맡은 쌉싸래한 향과, 서서히 달아오르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었다.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한 재희의 손이 멋대로 한영의 허벅지에 닿았다. 재희는 정장 바지 아래 돌덩이 같은 허벅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멋대로 그 근육을 쓰다듬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게도 본능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한영은, 제 몸이 그녀의 손길 하나에 곧바로 반응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게 틀림없었다.
“…….”
“…….”
재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를 응시하는 한영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다음으로 그녀가 느낀 것은, 붙잡힌 손목이었다.
예의를 모르는 그녀의 손을, 한영은 천천히 그의 허벅지에서 떼어 냈다.
“……십일 년이야.”
조금의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는데, 왜였을까. 속삭이는 목소리에서도 열기가 느껴지는 것은.
“……수컷들만 우글거리는 데서 십일 년을 썩다 왔다고.”
한영의 입가에 얼핏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상황 알 만하잖아. 아무 여자든 다 좋은 상태라는 거. 부추기지 마.”
“내가 널 부추기긴 했어?”
“재희야, 십일 년이라니까.”
“십일 년하고도 두 달이야.”
물러나지 않는 시선으로 재희는 담담히 되물었다.
“아무 여자든 다 좋은 상태라면, 교도소 나와서 두 달 동안 왜 참고만 있었어?”
“…….”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거잖아. 그런데 왜 참고만 있었어?”
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히 응시해 오는 시선이 홀리듯 아름답다. 못 견딜 정도였다. 안타깝고 연민이 들다가도, 뜨거운 기분이 온몸에 번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아무 여자나 좋은 게 아닌 거잖아.”
재희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너는, 아무나 만나지 않는 사람이니까.”
“…….”
“넌 마음에 둔 한 사람하고만 잘 수 있는 사람이니까.”
고요히 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그녀는 단언했다.
“……한영아, 너 아직도 나한테 마음 있어.”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한영의 얼굴은 가로등과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삭막하게 번져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던 걸까. 한영의 얼굴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단순히 빛의 색이 바뀐 것뿐인데, 한영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 보였다. 좀 더 인간적이고, 다정해 보였다. 그리고 조금쯤은, 지금의 상황을 슬퍼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색의 인상이 빚어낸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한영은 얼마 가지 않아 무심한 미소를 띠었으므로.
“……글쎄. 만약 그렇다 해도 나는 같은 실수 반복하는 취미는 없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솔직해지면 돼.”
재희는 낮게 속삭였다.
“예전처럼 나 속이고, 거짓말하지 말고……. 너는 그냥 솔직해지기만 하면 돼.”
이제 그래도 돼.
더 이상 예전처럼 살 필요 없어.
재희는 그 말들만큼은 덧붙이지 않았다. 이한영의 눈만 올려다보았다. 담담한 척했지만, 재희는 이한영의 반응을 여느 때보다 집중하여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나지막하게 웃을 뿐이었다.
“너와 난 아무래도 같은 과거에서 다른 교훈을 배웠나 보다.”
“한영아, 나는-.”
그때 빵, 빠빵-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한영은 마치 그 소리를 기다린 사람처럼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기어를 조작하고, 핸들을 쥐었다. 뒤쪽에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 대는 소리에 떠밀리듯 차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재희는 그렇게 운전하는 데 집중한 한영의 옆모습만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뜨거울 법했는데도, 한영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안전벨트 매.”
재희는 잠자코 그를 보다 몸을 바로 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안전벨트를 맸다.
이후 차를 운전하는 내내 한영은 침묵만 지켰다. 그런 한영을 어색해할 생각은 재희에게는 없었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까. 그녀의 속에 꼭꼭 숨겨 놓았던 불씨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요동을 부리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간 품어 오던 계획과 배려,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이성까지- 그 불씨가 모조리 태워 삼키려 들고 있었다.
재희가 불온한 충동과 싸우고 있는 동안, 한영은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재희만 내려 주고 휙 가 버릴 것이란 예상과 달리, 한영은 차를 주차한 후 운전석에서 내렸다. 재희와 함께 승강기에 오르고, 기어코 그녀가 사는 집 앞까지 함께했다.
아마 다른 남자가 그렇게까지 에스코트를 하겠다 했으면 재희는 단숨에 거절했으리라. 그 정도로 오피스텔의 보안을 살피는 한영의 태도는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재희는 착각하지 않았다. 이한영은 또다시 오빠 모드가 되어 있었던 것뿐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 긴 세월 야박하게 무시할 때는 언제고, 정작 시야에 들어오니 곁을 살펴 줄 마음은 들었던 걸까.
“한영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배가 그렇게까지 엉망인 애는 아니야.”
비상구 계단 쪽을 눈으로 살피고 있던 한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언뜻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재희는 물끄러미 그 미소를 들여다보았다. 한영은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인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차분한 눈빛으로 오피스텔 복도를 살피며 말했다.
“……글쎄. 나도 ‘그렇게까지 엉망이 아닌 사람들’을 십일 년 동안 봐 왔거든.”
“…….”
“피곤하겠다. 들어가.”
재희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집 안은 안 살펴 줘?”
“재희야, 방금 네 입으로 걱정하지 말라며.”
“네가 방금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겁줬잖아. 무서워졌어.”
“안에 인혜 있잖아.”
“인혜 은호랑 부모님 뵈러 갔어.”
“…….”
“차 마시고 갈래?”
한영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차만?”
“……한영아, 나 못 믿어?”
그 말에 한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 들으니 확실히 감이 오네. 그래, 못 믿어.”
그렇게 한영은 재희가 안전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그녀는 한동안 닫힌 현관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재희는 십일 년이 한영에게 남긴 편집증적인 신중함에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기뻐하고 있었다. 아무리 뜯어고쳤다 해도 이기적인 본성은 어디 안 간다는 것일까.
그 이기심 때문에,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함조차 잊고 재희는 몇 시간을 뜬눈으로 밤 시간을 맞닥뜨렸다. 싱숭생숭,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밤이었다. 차 안에서의 짧은 입맞춤. 그것이 모든 감각의 기억을 되살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아주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만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배 속에서 야릇한 뒤틀림이 느껴졌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재희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자신이 그동안, 정말 화석처럼 살아왔음을.
그리고 그런 화석에 숨을 불어넣어 준 이한영은, 지금쯤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야속하게도.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가듯, 그녀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고이 명치를 덮고 있던 손이 아랫배를 쓸어내리며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재희는 갈등하고 있었다. 배덕감도 느꼈다. 그러나 주저하던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간지럽혔을 때, 재희는 아득한 목소리를 들었다.
‘참지 마, 재희야.’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수 없었다.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였는데, 재희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순식간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손이 절로 움직였다. 손가락이 잊고 있었던 은밀한 곳을 문질렀다. 속옷이며 바지까지 겹겹의 옷감이 있었는데도 그곳은 뜨거웠다. 조금 더 문지르자 이미 그곳이 젖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혼자 가는 거 보여 줘.’
한영이 그녀의 가슴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고 있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재희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재희는 홀린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종래에는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아, 바지 안으로, 속옷 안으로 손을 넣고 직접 스스로를 애무했다. 재희는 그렇게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건드리는 동안 이곳에는 없는 한영의 손길을 느꼈다. 그녀의 이마에 닿는 그의 입술을 느꼈다.
‘재희야.’
“……응.”
순식간에 감각에 지배된 재희의 귓가에, 과거의 한영이 속삭였다.
‘……혼자 있을 때 내 생각이 나면, 앞으로 이렇게 달래 주는 거야. 알았지?’
놀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재희는 폭발하듯 몸을 덮치는 감각에, 허리를 부르르 띄웠다. 신음은 어떻게든 참았지만, 홍수 같은 감각을 못 이긴 다리가 이불을 헛발질했다. 천이 마찰하며 나는 소리만 고요히 방 안을 울렸다.
재희는 열 오른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뭘 했냐는 생각이 뒤늦게 치밀어 수치스럽기도, 공허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속에 단단히 뭉친 무언가는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