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0)

17장.

석양은 마치 자신이 빚어 놓은 피조물이 이리 아름답지 않으냐 자랑하고 싶은 듯했다.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등진 실루엣은 금을 두른 듯 밝게 빛났다. 쨍한 노을의 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씨름하던 충동 때문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 하나가 재희의 숨통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우리 법률 사무소 유일의 국문학도인데, 당연히 누군지 알겠지? 인사해. 이한영 시인이셔.”

그때까지 무표정하게 재희를 보고 있던 한영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웃고 있는 얼굴이다.

낯선 사내의 정중함으로, 한영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마재희가 알지 못하는 사내를 빚어 놓았다. 재희는 그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정중히 웃고 있는 얼굴 속에, 꿰뚫어 보는 시선 속에, 십일 년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정신이 있다는 것을.

과거의 한영은 시선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가슴을 달달하게 두근거리게 만드는 남자였다. 예의 바르게 자란 이십 대 청년이 가질 법한 산뜻함이 늘 그의 몸가짐 속에 묻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한영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은 으레 그의 외모에 경탄하면서도 거리감을 크게 느끼지는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마주 보는 첫 순간부터, 심박동과 호흡을 덜컥 멈추게 하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폭력적일 정도의 강렬함이었기 때문에-.

“-마 변호사? 인사해. 이한영 씨.”

현철의 말에 재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굳은 걸음을 애써 옮겼다. 그의 앞으로 또각또각 다가가자, 한영이 그린 듯 미소 지었다.

그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한영입니다.”

재희는 느릿하게 그 손을 맞잡았다.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악력의 악수였다.

가까스로 입을 뗐다.

“……마재희입니다.”

“정 변호사님께 들었습니다. 제게 병원을 소개해 주신 분이 변호사님이시라고.”

가볍게 악수한 손이 떨어지고, 한영이 정중한 미소를 띠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 겪은 곤란한 부동산 문제도 전부 변호사님께서 해결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정 변호사님이 처리해 주신 것으로 알고 미처 인사 못 드렸습니다.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재희는 그즈음에야 비교적 차분히 답할 수 있었다.

“……저는 조 변호사님이 지시하신 대로 한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한영이 사교적인 미소를 짓는다.

재희는 그 미소를 더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현철을 향해 물었다.

“……조 변호사님은요?”

그렇게 공범을 찾았지만, 작금의 곤란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 현철은 절망적인 대답만 내놓았다.

“강연 가시는 거 알고 있었잖아? 예정보다 일찍 지방 가셨어.”

짧게 대답한 현철이 한영을 보며 양해를 구했다.

“일찍부터 나가셔서 이한영 씨 오신 걸 조 변호사님이 모르고 계십니다.”

“바쁘신 거 잘 압니다. 괜찮습니다.”

현철과 대화를 나누던 한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린 듯 휘어지는 입가의 미소가 격식적이다.

현철과 한영은 함께 저녁을 한다고 나갔다. 나가기 전 현철이 재희도 함께 갈 것을 권했지만, 재희는 자신이 어떻게 그 제안을 거절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심지어 그녀는 책상에 앉아 서류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종이에 적혀 있는 글씨가 그제야 시야에 잡힌다.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무실 문을 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위로 환상처럼 기억이 덧씌워졌다.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한영의 뒷모습이.

재희는 그제야 모든 계획이 뒤틀렸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소장 변호사인 조 변호사의 뒤에 숨어 한영을 도왔다. 인권 단체를 통해 법률 지원을 하는 형식으로 그를 도왔다. 한영이 그녀의 존재를 원하지 않으니, 그 뜻에 어울려 주며 안 보이는 곳에서 한영의 사정을 살폈다. 마재희에게 모든 사정을 들은 조 변호사도 그런 그녀에 협조했다. 이한영 앞에서 마재희의 이름은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임 변호사인 현철은 그 같은 사정을 몰랐다. 그래서 이한영을 마재희의 사무실에 모셔다 놓는 사고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재희는 한숨을 흘리며 눈을 감쌌다. 차차 시간을 두고 다가가려 했다. 한영이 안정적으로 사회에 자리 잡은 후에, 최대한 부담 가지 않는 방법으로 다가가려고.

그런데 그 계획이 초장부터 어그러졌다.

한영은 어떤 감정부터 느꼈을까.

그간 몰랐던 고마운 사람이 있다고 해 인사차 온 사무실에서- 그렇게나 피하던 이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보게 되었다면.

“…….”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재희는 결국 참지 못했다. 평소의 퇴근 시각보다 이른 밤 여덟 시, 사무실을 나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숱한 고민이 운전하는 내내 머리를 스쳤다. 고민은 한영의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서도 이어졌다. 재희는 내리기 직전 저도 모르게 거울을 확인했다. 거울 속에는 긴장한 눈빛을 한 어색한 얼굴의 여인이 있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보자 정신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차에서 내렸다.

한영은 집에 없었다. 그래서 재희는 한영의 양옥집을 뒤로한 채 철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 어둠이 내린 심곡동을 한참 눈에 담았다.

길을 따라 서행하며 다가오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밝게 빛났다. 그 불빛이 골목과 길을 비추다 결국 그녀의 얼굴까지 비추는 순간에 이르러서도 재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담벼락에 붙어 주차한 차의 시동이 꺼지고,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만큼은, 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재희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운전석에서 나와 문을 닫은 한영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을 은근히 상상하게 하는 양복의 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나. 기억하는 것보다 선이 더 굵어진 몸이었다. 농염하게 익은 사내의 몸. 셔츠 단추 하나를 푼 목덜미와 턱의 선은 이십 대보다 더 날카로워졌다. 뚫어져라 응시해 오는, 저 눈빛만큼이나.

“……오랜만이야, 한영아.”

재희가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가만히 서 있던 한영의 입가에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오랜만이네.”

한영이 천천히 그녀의 지척으로 다가왔다. 긴 다리는 오래 걷지도 않고 멈췄다. 다섯 걸음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이한영은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재희는 묵묵히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면서도, 가슴 한복판이 떨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제 마음을 묵묵히 숨겼다.

“……정 변호사님과 이제 헤어진 거야?”

“정 변호사님은 일찍 들어가셨고, 볼일이 있어서.”

담담히 잠깐 어딘가를 들렀다 말하는 한영은 그녀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그로서도 감회가 새로웠던 걸까.

“……넌 변한 게 없구나.”

한영이 조용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그러나 재희는 속지 않았다. 십일 년의 시간은 한영에게 낙인 같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의 웃음은 지친 사람이 예의상 간신히 걸치는 웃음에 가까웠다. 마치 몸이 너무 커 버렸는데도 더 이상 맞지 않는 어린 시절의 옷을 급하게 걸친 사람 같았다. 늪이었다. 그를 둘러싼 풍경이 녹음이 지고 아름다운데, 한편에서는 발 한번 잘못 디디면 순식간에 잡아 삼켜질 것 같은 으스스한 고요함이 은연중에 풍겼다.

“……넌 많이 변했어.”

재희는 한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한영이 무심히 미소 지었다.

“반응을 보니, 좋은 쪽으로 변한 건 아니네.”

“……좋다 나쁘다 할 변화인지는 아직 모르겠어.”

“빈말 못 하는 건 여전하구나.”

한영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재희의 가슴에 찌르르한 고통이 번졌다.

저 웃음소리만큼은- 여전하구나.

재희는 문득 실감했다. 진짜 내 앞에 있구나. 정말로 내 앞에, 네가 있어.

억누르고 있던 감회가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아마 한영이 그녀를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서서 한영의 얼굴만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재희야.”

“아…… 응.”

한영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

잠시 그녀를 보던 한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넌 내게 사과할 이유가 전혀 없어.”

“네가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로 사무실에 들어와 내 명패를 봤다면…… 네 입장에선 불쾌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한영의 감정을 걱정했다. 조 변호사의 뒤에 숨어 있는 동안 재희는 이한영의 십일 년을 훔쳐보았다. 누군가가 그렇게 제 인생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것도 불행하기만 한 시간을 몰래 엿보고 있었다면, 어느 누구라도 불쾌감을 느끼고 화를 내지 않을까. 수치심을 느낄지도 모른다. 재희는 한영이 그럴까 염려했었다.

그러나 한영은 무심히 웃기만 했다.

“화나지 않았어. 네가 조 변호사님과 연이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조 변호사님이 말씀하셨어?”

“아니. 날 너무 인간적으로 대해 주셨거든.”

단 한마디의 설명이었지만, 재희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타인의 호의에 의심부터 품었을 이한영을 안다.

“개인적으로 부탁하지 않았을까 싶었지, 같은 사무실을 쓰는 사이인지는 몰랐어. 변호사가 된 거야?”

“응.”

“대단하네.”

그는 정말로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를 대하듯 웃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도는 가운데, 재희는 재빨리 정신 차렸다. 그리고 판단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 아닐까? 어차피 한영에게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었다.

“……언제 같이 술 한잔할래?”

재희는 사회인의 미소를 걸치며 제안했다. 한영도 그녀만큼이나 그린 듯한 미소로 대꾸했다. 그럴까?

재희는 공염불이 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날짜를 먼저 입에 올렸다. 의외로 한영은 날을 잡는 데 소극적이지 않았다. 그가 회피할 것을 예상하며 회유할 계획까지 머리로 바쁘게 짜고 있었던 재희가 허탈해질 정도였다.

약속 날짜는 이 주 뒤로 잡혔다. 좀 더 일찍 잡고 싶었으나 추석 연휴가 낀 후 재판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추석은 어떻게 보내?”

“조용히 보낼 거야.”

“……할머니 찾아뵐 거야?”

“그래야지.”

“같이 가.”

“…….”

“나도 오랜만에 뵙고 싶어. 같이 가자.”

한영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척 만날 날짜는 잡아도, 너무 깊숙이는 다가오지 말라는 걸까. 한영은 옅은 미소와 함께 거절했다.

재희는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아쉬움은 남아도 순순히 물러났다. 언제이건 다음 명절을 함께하면 된다.

“……갈게. 들어가.”

“재희야.”

“……?”

“내 사건 기록, 네가 가지고 있어?”

재희는 말없이 한영을 보았다. 한영은 어둠 속에 감겨 웃고 있었다.

“역시 네가 갖고 있었구나.”

“…….”

“약속한 날 올 때 사건 기록도 가져와.”

“……왜?”

“내 기록이니까. 내가 갖고 있어야지.”

재희는 물끄러미 한영을 올려다보며 깨닫는다. 아아. 그래. 이제야 알 것 같다. 네가 왜 순순히 약속을 잡았는지.

“……사건 기록을 네게 주면, 그 이후에도 우리는 볼 수 있을까?”

재희는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영은 잔잔히 웃었다.

“아니.”

“…….”

재희는 좌절하지 않으려 했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으니까.

“……약속한 날 챙겨 갈게.”

“고마워.”

“대신 내 부탁 들어줘.”

한영은 무심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자신의 기록을 돌려받는 것인데 왜 부탁까지 들어줘야 하느냐는 반문을 재희는 기다렸지만, 이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가 할 말을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한영 나름의 배려였을까.

“……네게서 듣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을?”

“과거의 너에 대해서.”

“…….”

“과거의 너와 나에 대해서.”

재희는 눈을 똑바로 들며 부탁했다.

“남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너한테서 듣고 싶어. 전부 다.”

* * *

추석은 조용히 지나갔다. 재희의 부모님은 명절에도 코빼기 한번 안 비치는 불효막심한 딸에 익숙했다. 남들 다 쉬는 명절을 사무실에서 보내는 딸에게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이 있었던 것이리라.

명절 연휴에도 뉴스와 신문은 강릉에 침입한 북한군 수색전으로 시끄러웠다. 그녀가 사무실 휴게 공간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울 때마다 텔레비전은 안 좋은 소식들을 연이어 전했다. 수색과 총격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하나같이 이십 대, 젊은 나이였다.

재희는 그렇게 뉴스에서 괴로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깨닫고는 했다. 세상은 변한 듯하면서도,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님을.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먹고, 일하고, 또 어딘가의 누군가는 괴로워하고-. 그렇게 세상은 야멸치게 돌아간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을 헤매고 있으리라. 그녀가 먼 과거,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재희는 그런 생각에 이를 때마다 한영을 떠올렸다.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이한영. 바뀐 듯하면서도, 바뀌지 않은 세상.

재희는 알 수 없어졌다. 한영의 마음을 알고 싶어 그의 과거를 직접 말해 달라 부탁했다.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철저하게 진실로부터 따돌려졌던 옛 과거, 그 과거를 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맞부딪칠 생각으로 한영에게 과거의 너와 나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다.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한낱 가는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서.

그러나 최근 들어 텔레비전에서 반복되는 뉴스는 재희로 하여금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속삭이고 있었다. 이한영에게는 과연, 현재가 과거보다 좀 더 나아진 세상처럼 보일까?

이한영은 과거, 미래를 낙관하지 않기에 마재희를 밀어냈었다.

그 시절의 선택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면.

때마침 상념을 뚫고 진동 소리가 울렸다. 재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무렇게나 둔 삐삐가 울고 있었다. 화면에 찍힌 8282라는 숫자가 예사롭지 않다.

-재희야, 찾았어!

사무실 전화로 전화를 걸자마자 인혜는 단숨에 말했다. 들뜬 기색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인혜가 찾았다며 기뻐할 수 있는 대상이란, 명확했으니까.

-최영재, 드디어 찾았어!

* * *

재희는 덜덜덜 떨리는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몇 분이나 달렸다고 뒷좌석에 앉은 인혜가 죽는 소리를 흘렸다. 오직 인혜 옆에 앉은 은호만이 덜컹거리는 승차감을 만끽하며 꺅꺅거리고 있었다.

“……젊음이 좋아.”

인혜가 자신의 딸을 보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재희는 연한 미소를 띠었다.

“멀미 심하면 창문 열어도 돼.”

“괜찮, 욱-.”

은호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꺅꺅거리는 동안, 재희의 자동차는 경기도 시골길을 달렸다.

허무할 정도로 그들이 목적지로 삼은 양조장은 서울과 가까웠다. 전통 가양주를 빚는 곳이니 위생상의 이유로 아무나 들이지는 못한다고 막기에, 그들은 양조장 건물에서 외따로 떨어진 전시실 공간에서 영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뭐냐?”

십일 년 만의 재회 앞에서, 그만큼 떨떠름한 반응도 없었으리라.

“진짜 뭐냐?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왔어?”

목에 수건을 걸치고 땀에 젖은 얼굴로 등장한 영재는 십일 년이 지나도 최영재였다.

“야, 최영재!”

“안녕, 영재야.”

그럼에도 재희와 인혜가 반갑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는 순간, 영재는 환하게 웃었다. 새침한 최영재를 웃게 만들 정도로, 이별이 길기는 했다.

“스토커냐?”

인혜의 긴 추적 과정을 요약해 들은 영재의 첫 반응은 그렇게 심드렁했다.

“양조장 위치까지 알아냈으면 전화부터 거는 게 상식 아니냐? 서울에서 여기까지 길도 먼데 안 피곤해?”

“전화를 안 걸었겠니? 전화를 받아야지.”

“주문이 계속 들어오는 바람에 놓쳤나……. 추석 연휴 전 두 달이 원래 제일 바쁠 때야.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영재의 시선이 흘러가 재희와 손을 잡고 있는 은호를 눈에 담았다. 마치 해괴한 현상을 마주한 듯, 영재는 오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마재희, 너 설마…….”

그러나 그의 의혹은 오래가지 못했다. 때마침 은호가 바닥에 기어 다니던 벌레를 축구공 차듯 차 버린 것이다.

그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영재는 인혜를 돌아보았다.

“뭐야, 네 애였냐?”

“어. 은호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내내 그렇게 이어졌다. 은호는 낯을 가리지 않았다. 금세 종알종알 말을 거는 것이 영재에게는 귀엽기만 했나 보다. 영재의 웃음기 어린 시선이 좀처럼 은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보니 닮긴 닮았네.”

“그럼. 내 딸인데.”

“좀 더 일찍 찾아오지 그랬냐. 결혼식 축의금이라도 내게.”

“그러는 너는? 우리도 네 결혼식 축의금 내고 싶었거든?”

인혜가 비난하듯 영재의 팔을 철썩 쳤다. 이미 아들 둘이 있다는 영재는, 세월의 힘일까, 진중해져 있었다. 건드리면 건드리는 족족 일일이 성을 내던 귀여운 최영재는 그렇게 세월 속으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오올, 공장주가 되셨어?”

“저거 내 공장 아니야. 은행 거야.”

“집안일이라면 치를 떨고 싫어하더니. 어떻게 가양주를 팔 생각을 다 했어?”

인혜가 놀렸지만 영재는 피식 웃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인혜는 눈치 빠르게 입술을 다물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주자처럼 재희가 차분히 나섰다.

“영재야, 서울에는 안 오는 거야?”

“일 있는 거 아니면 안 가.”

재희는 그즈음 영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확신했다. 인혜가 그녀를 보고 있기에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영재가 두 여자 사이에 오가는 기류를 읽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재희는 담담히 알렸다.

“한영이 일로 왔어.”

은호와 빙글빙글 돌며 놀아 주던 영재의 걸음이 덜컥 멈추었다. 진지해진 얼굴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가석방 나오는 거냐? 언제?”

“…….”

“야, 왜 속 터지게 말을 끌어.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한영이 나온 거 한 달 됐어.”

“……나오는 거 한 달 걸린다고? 두 달 뒤가 아니고? 성탄절 특사로 나온다는 거 아냐?”

“아니. 한 달 전에 이미 나왔어.”

“…….”

“한영이 광복절 사면 대상자였어.”

“…….”

재희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렇게 귀를 막자마자,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밤이 늦기도 늦었거니와 재희나 인혜나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은호는 진작 곯아떨어졌다. 어린 네 살에게는 오늘의 일정이 여간 빡빡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재희야.”

인혜가 조용히 불러 오기에, 운전대를 잡은 재희 또한 잠잠히 답했다.

“응.”

“어떻게 될 것 같아? 괜찮을까?”

모르겠다.

재희는 그런 무책임한 대답은 속으로만 삼켰다. 한영의 속은 한영만 아는 것이고, 그들이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그 속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법이었다.

인혜가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남은 두더지는 어떻게 찾아야 하나…….”

영재는 종갓집 종손이라는 키워드만으로도 추적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지만, 상현은 다르다. 출신 학교와, 본가가 광주에 있다는 사실만 알 뿐,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연락이 닿았던 대학 동창들은 삼 년 전의 소식만 전해 주었다. 상현이 대형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퇴사한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그 이후는 아무도 아는 바가 없었다.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아마 인혜의 도움으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상현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재희가 그 옛날 느꼈던 것처럼, 인혜도 상현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막막한 한숨이 깊었다. 재희는 그것을 못 들은 척 말없이 운전만 했다. 상현만 떠올리면 아픈 가슴에, 가만히 숨만 들이마셨다.

* * *

시월도 어느덧 중순을 지난 탓인지, 공기가 제법 찼다. 약속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처리하다 달려온 참이었다. 서두른 것이 과했는지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재희는 가만히 한영의 집 대문을 응시했다.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재희는 오래 주저하지 않았다. 문을 넘어, 그대로 마당을 가로지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연기는 이 층에 난 창문에서 피어올랐다. 열린 창가에 기댄 채 담배를 물고 있는 한영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무감정해 보이기도 했고, 무료한 듯도 해 보였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흐릿한 눈동자를 보면, 사색에 잠겨 있는 듯도 싶었다.

그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고사해 버린 소나무의 마른 가지를 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 너머, 없어져 버린 창문을 눈에 그리고 있었는지-.

재희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 해?”

찌르듯 아픈 가슴을 삭이며, 재희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속으로 연신 묻고 있었다. 뭘 보고 있었어? 너도 저 소나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사라져 버린 창문이 아쉽기는 해?

상념이 깊기는 했는지, 한영이 다소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담배를 입에 문 채였다. 희끄무레한 연기 너머로 빤히 내려다보는 두 눈이 보였다.

그러나 한영은 오래 그녀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는 무심히 미소 지었다.

“……글쎄. 그동안 우리 집 나무에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하고는 있었는데.”

“공사하는 동안 뿌리라도 잘못 건드렸나 봐.”

재희는 천천히 그 밑으로 다가가 죽어 버린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오래전 두 남녀가 서로의 방을 오가도록 세간의 눈으로부터 가려 주었던 소나무는 이제 완전히 말라 버렸다. 사시사철 푸르렀던 솔잎이 사라지니 앙상한 가지 사이로 시간의 흐름만 더 도드라졌다.

“빌라가 완공될 즈음부터 시들시들하더니, 결국 이렇게 됐어.”

“안타깝네. 할머니가 아끼던 나무였는데.”

그렇게 무심히 중얼거린 후, 한영은 재떨이를 창문 안쪽으로 치우며 물었다.

“괜찮아?”

“응?”

“담배.”

“…….”

맞아. 너는 그랬지.

내가 담배 냄새를 괴로워한다는 이유로, 네 집에서 담배 한번 안 피우던 사람이었어.

“많이 괴로워?”

“……아니. 직장 동료들 중에 골초가 많아서 익숙해졌어.”

“안됐네.”

“……아직도 담배 피우는 거야?”

“가끔씩 생각날 때만.”

“…….”

“손에 든 건?”

“술 마시기로 했잖아.”

어쩌면 한영은 술이라는 단어에 오랜 기억을 떠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대학생 마재희가 자기 주량도 모르고 술을 퍼마시다 취해 버린 그 옛날의 기억을. 재희는 한영의 입가에 번진 미묘한 미소를 못 본 척했다. 그저 무뚝뚝한 얼굴로 눈치 없는 척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들어와. 문 열려 있어.”

한영의 집 현관 옆에는 산더미같이 쌓인 신문들이 있었다. 재희는 피처폰 광고가 실린 신문의 한쪽 면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았다. 한영은 십일 년의 시간을 사회와 격리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 하루하루 천천히 받아들이는 십일 년의 변화를, 그는 폭력적으로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다. 신문은 그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한영의 노력이었다.

“부모님은 잘 지내시지?”

“건강하셔.”

“가게 건물에서 아예 지내시는 거야?”

“아니. 가게 처분하시고 시골로 귀농하셨어.”

기묘한 시간이었다. 긴 공백이 있었는데도 대화는 막힘없이 오갔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한영도, 마재희도 화제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데 능숙해질 대로 능숙했다.

재희는 식탁 위에 식기를 올려놓으며 덤덤히 덧붙였다.

“저번에 찾아뵈었을 때는 트랙터도 몰고 다니셨어.”

“아저씨가 트랙터를?”

프라이팬에 소고기를 올리고 있던 한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희도 미소 지었다.

“……웃기지.”

“자동차도 운전하기 싫어하던 분이시니까.”

“자동차는 여전히 싫어하셔.”

마 사장은 여전했다. 바쁜 딸한테 약한 소리나 할 것 같다고 전화도 잘 걸지 않던 마 사장은 한 달 전, 재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평범하게 딸의 생활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통화를 이어 나가고 끊었지만, 재희는 그 전화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 둘 때 아름다운 것이라 했던가.

그런 말을 끊기 전에 덧붙인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아버진 여전하셔.”

마 사장은 여전히 뉴스를 잘 챙겨 본다.

아무리 시골에 묻혀 산다 한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를 리 없었다.

“다행이네.”

“응.”

한영은 재희의 부모님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다 구운 고기를 식탁으로 가져오며 덧붙였다. 다 됐으니 먹자.

영재가 선물한 법주는 제법 독했지만, 향과 맛이 좋았다. 한영은 술잔에 거의 입을 대지 않았다. 예의상 마시는 자리인 것처럼 몇 모금 입술에 적시기만 할 뿐이었다.

“……사건 기록은 보관할 거야?”

“그래야지.”

한영은 비단 보따리에 싸인 한 뭉치의 서류를 보곤 언뜻 미소만 흘렸다. 살펴볼 생각은 없었는지 그는 처음부터 그것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신경 쓰였을까. 재희가 가져온 법주의 병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말고 한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설마 내가 저걸 태워 버리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걱정은 안 했어.”

재희는 차분히 거짓말했다. 사실 그런 걱정을 했다. 현재의 이한영은 가끔, 초연하다 못해 모든 것을 저버린 사람 같은 눈빛을 했으니까.

한영은 잠시 그녀를 주시하다가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거짓말을 눈치챈 듯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무심한 기색으로,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달칵, 사기로 제작된 술병의 밑면이 식탁의 유리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영재와 인혜가 며칠 전에 찾아왔었어.”

재희는 잠시 말없이 한영을 보다 순순히 답했다.

“그랬어?”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영재에게 그렇게 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 그녀였으므로.

“다들 여전하더라.”

“……화부터 내지?”

“문을 부술 기세던데. 인혜는 멱살까지 잡더라.”

“혼날 만했어. 나 피하겠다고 친구들까지 피할 필요는 없잖아.”

“피한 것은 맞지만, 너와는 관계없어.”

그러면 왜 그랬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재희는 신중한 태도로 당부만 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마. 난 안 만나더라도, 친구들은 만나. 사실은 보고 싶잖아.”

“……글쎄.”

그렇게 중얼거린 한영은 슬며시 웃고만 있었다.

재희는 문득 그 모습을 보며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사리에 맞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처럼.

재희는 말없이 한영만 바라보았다. 한영은 덤덤해 보였다. 그에게 묶였던 인연들을 모두 풀어낸 고승의 고요함이 그에게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연마된 사람은 보통 이런 것인가. 재희는 잠자코 의문을 품는다.

“……대체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아무것도.”

술잔을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위로 올라왔다. 재희와 눈을 마주하며, 한영이 눈을 휘었다.

“아무 생각 없어.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지나간 대로 놔두려는 것뿐이야.”

“……그래서 상현이에 대해서 묻지 않는 거야?”

“그래.”

재희는 가만히 그를 보다 물었다.

“……지나간 대로 놔두려는 것에 나도 포함돼?”

“어.”

재희는 이번에야말로 절망해야 하는 건지,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러나 가슴은 아직 절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듯 요지부동이었다.

재희는 아주 조용히, 그녀의 앞에 앉은 이한영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한테 중요하지 않아?”

“십일 년이야, 재희야.”

한영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십일 년이면 충분히 감정이 변할 수 있는 시간이야.”

“그래서 너는 변했어?”

“변했어.”

“…….”

“변했어, 재희야.”

마치 수없이 두드려 맞아 다져진 것처럼 굴곡이라고는 전혀 없는 어조였다. 한영은 그런 어조와 목소리로, 재희에게 권했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라도 네 삶을 살아.”

“…….”

“뒤에서 몰래 친구 돕는 것으로 아까운 시간 보내지 말고, 취미도 갖고 연애도 하면서, 즐기면서 살아.”

즐기라고?

재희는 가만히 속으로 반문했다.

너를 이 집에 홀로 두고, 나 혼자서 즐기면서 살라고?

재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다 된 상태였다. 한영이 그녀를 거절할 거란 예상은 충분히 하고 있었으니까.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할게.”

재희는 그저 그 옛날, 이한영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응하던 시절의 마재희처럼 눈꺼풀을 내리떴다. 얌전히 이해한다고 한영에게 말해 주었다.

속지 않겠다는 듯 꿰뚫어 보는 시선이 따라붙고 있음을 재희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평온히 그에게 확답까지 받아 냈다.

“그래도 모두 다 설명해 준다는 약속은 지켜야 해.”

“그럴게.”

한영은 고요히 웃으면서도 그녀를 뚫어져라 직시하는 것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재희는 그의 관찰하는 시선을 차분히 마주했다. 그녀는 질 생각이 없었다. 한영과의 관계에서 이기고 진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한영이 숨기고 있는 것을 그녀는 알아야 했다. 그것만이 그녀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의 뜻을 존중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가 진심으로 마재희를 멀리하고 싶은 거라면, 응당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얼굴조차 보기 싫다면 다시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그러나 만약, 이한영이 과거와 똑같은 위악을 지금에 와서도 반복하는 거라면-.

재희는 그 거짓말에 놀아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거짓말하면 안 돼.”

한영은 지금에 와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는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남자들은 이한영의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부터 존재했다.

한영이 제 인생을 되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기억은 울고 있는 어머니였다. 그녀를 때리고 모욕하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일컬을 때마다 ‘남산’이란 단어를 갖다 붙였다. 어린 한영은 그 말이 중앙정보부를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르고 적의부터 배웠다.

동네 사람들은 남자들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와 한영에게 손가락질했다. 이한영은 남산의 남자들에게서 빨갱이란 단어를 배웠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간첩이란 단어를 배웠다. 화냥년이라는 단어는 또래 아이들로부터 배웠다. 어머니는 그 단어들을 못 견뎌 했다. 통하지 않을 발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사를 갔다. 터를 옮겨 봤자 남자들은 계속해서 따라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들은 한영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발길질과 손찌검, 그리고 안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어머니. 그것이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한영은 그 방문만 바라보며 자랐다. 어린 한영은 그 상황이 죽은 아버지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이해했다. 남자들이 그렇게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씨부터가 글러먹었어, 새끼야.”

그렇게 말하며 심심풀이처럼 남자들이 한영의 뺨을 갈길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척 높은 사람인 것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저들의 종자는 아예 다르다는 것처럼.

그러나 한영은 사실 알고 있었다. 저들은 동네 깡패만도 못한 자들이다.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이 김 부장, 바로 김종석이었다.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김종석은 경멸 어린 어조로 동료들을 평하곤 했다.

당시에는 일개 ‘말단 직원’이었고 다른 가명마저 쓰고 있던 김종석은 다른 남자들과 달랐다. 그는 그 차이를 출신의 차이라고 말했다. 다른 남자들은 남산에 오기 전에 있던 기관에서 천덕꾸러기에 무능력자였지만, 자신은 다르다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당당히 시험 봐서 남산에 들어왔다고 했다. 김종석은 제 동료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종석은 단 한 번도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홀로 방문만 바라보는 한영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고 장난감을 사 주었다.

그는 자신을 삼촌이라 불러 달라 했다.

“내 아들도 살아 있었으면 네 나이 또래였을 거란 말이지.”

한영은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들은 왜 죽었어요?”

“애 엄마가 지워 버렸어. 내가 하는 일이 소름 끼친다고.”

다른 남자들과 비교되는 호의를 김종석은 보여 주었지만, 한영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들 어서 빨리 집을 나가 주기만을 기다렸다. 남자들이 없어야 어머니가 웃는다. 어머니는 울다가도 어린 자식의 얼굴을 보면 웃었다.

어린 한영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당시에는 조금도 몰랐다.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한영은 아주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새끼를 쳤다. 왜 어머니는 매일 우는 거지? 방 안에서 뭘 하는데 계속 괴로워하시는 거지?

결국 어느 날 한영은 김종석이 한눈을 판 사이 닫힌 안방 문을 열어 버렸다. 그리고-.

한영은 그날 처음으로 남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질 걸 뻔히 알고도 달려드는 건 멍청한 짓이지.”

붕대 감은 머리로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김종석은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맞아 죽을 뻔했다는 김종석의 말 앞에서도 한영은 무감각했다. 그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임을.

어머니는 한영이 눈을 뜨고도 몇 시간이 지나서야 병원에 왔다. 한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날만큼은 그에게 웃어 주지 않았다.

한영이 병원에서 퇴원한 날, 어머니는 그를 외할머니 댁에 데리고 갔다. 겨울이었다. 한영의 생일이 지나 신년이 찾아온, 그 추운 일월의 겨울.

생일 선물로 곰 인형 하나 그에게 안겨 준 채, 어머니는 홀로 떠났다.

한영은 조숙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자들로부터 멀리멀리 도망가야 했다. 짐밖에 되지 않는 자신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성장하고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곡해하는 것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당시의 한영은 그랬다. 자신이 짐이라 여겼다. 할머니는 염려했지만, 그 후 한영은 단 한 번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

“우리 강아지, 또 인형 괴롭히니? 엄마가 준 선물이지 않니. 소중히 다뤄야지.”

한영은 한동안 할머니와 보내는 생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를 강아지로 부르는 호칭만 해도 그랬지만, 어린 그가 보기에 그의 할머니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등 구부리지 말기, 삐딱하게 서지 말기, 단추 풀고 다니지 말기, 욕하지 말기, 인형이든 작은 개미든 괴롭히지 말기 등- 갖은 제약이 그를 구속했다.

그래도 그는 잘 적응했다. 할머니에게서 글을 익혔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할머니의 다른 가르침들은 다 지키면서도, 또래와 어울리란 말만큼은 따르지 않았다. 그에게 또래는 처음에는 호감을 갖고 다가오다가 금방 빨갱이 새끼라고 욕하며 괴롭히는 변덕스러운 존재들이었다. 더불어 한영이 보기에, 아이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멍청했다. 그래서 일곱 살 한영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동네 또래들과 어울리는 대신, 집의 이 층 그의 공간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택했다.

그 무렵이었다. 마재희를 만난 것은.

마재희.

처음 한영이 그 이름을 들은 것은 동네 아이들에게서였다. 하도 ‘마재희 이 멍청아’를 입버릇처럼 내뱉기에, 통성명을 하지 않고도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당시 재희는 집 앞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한영은 처음으로 재희를 본 순간 바로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할머니, 옆집 여자애는 왜 그래요?”

“너무 오래 혼자 있어서 그런 거란다. 자꾸 말을 걸어 주렴.”

그때 할머니는 한영이 익히 알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몸에 있는 상처를 볼 때마다 짓던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던 한영은 멍하니 소나무를 구경하고 있던 재희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한영에게도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무어라 말을 더 붙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너는 애들이 괴롭히는데 조금도 화가 안 나?

그러나 때마침 재희의 부모님이 재희를 불렀기 때문에, 그들의 첫 접촉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는 당시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옆집 소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몰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으로 한영은 이후로도 계속 그녀를 지켜보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다. 마재희에게는 최소한의 경계심이 없었다. 자신을 보호해야 할 이유조차 몰랐다. 그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한영은 그의 속에서 이름 붙지 않은 스위치 하나가 눌러졌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던 중에도 동네 사내애들의 괴롭힘이 서서히 장난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한영은 그것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던 유일한 이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재희의 이마와 볼에 멍과 피를 얹어 준 어느 날, 이한영은 결국 참지 못했다. 상처 난 얼굴을 하고도 멍하니 집 앞 골목에 앉아 있는 재희에게 다가갔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말을 붙였다.

“왜 가만히 있어?”

어린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던 그 순간을, 이한영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실제로 그는 교도소에서 몇 번이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마재희가 처음으로 똑바로 이한영을 바라봐 준 순간이었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이한영을 명확히 인식하고 바라본 순간.

그 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무언가 전율을 느꼈는데, 한영이 그 의미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또 지나치게 화가 나 있었다.

“화나지?”

“…….”

“내가 혼내 줄까?”

그리고 바보같이 순한 마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날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한영과 싸운 아이들의 부모님이 차례차례 할머니를 찾았다. 동네 어른들 대부분은 애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수도 있지 무슨 요란이냐며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한영의 할머니는 달랐다. 한영의 할머니는 마치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각오 서린 얼굴로 회초리를 들었다.

한영은 언제고 고통에 익숙했다. 그런 한영이 혼난 날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재희가 그날 저녁 창문을 넘어 이한영에게 왔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혼이 나는 소음이 옆집까지 다 들렸던 건지, 구급상자와 함께.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였지, 일곱 살짜리에게는 퍽 위험한 월담이었다. 내심 기가 차 바라보는 한영의 시선 앞에서, 재희는 꾸물거리며 창문을 넘었다. 그러고는 색색 숨을 쉬며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들었다.

그의 앞으로 내민 그 작은 손을, 한영은 잠자코 보다 거절했다.

“……난 됐어. 괜찮아.”

“안 괜찮아.”

행동은 굼뜬데 퍽 단호한 어조였다.

물러나지 않으리란 것을 예감한 어린 한영은 순순히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렇다고 그는 연고 묻은 손가락을 회초리 자국이 남은 제 종아리로 가져가진 않았다. 재희의 이마에 난 상처로 가져갔다.

한영은 그날 그렇게 마재희가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재희는 어린 시절에도 고왔다. 보기 좋게 젖살이 오른 흰 얼굴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단아한 눈썹과 눈매가 어여뻤다. 순하고 착한 심성을 비추는 고운 눈망울이 거울처럼 맑았다. 그 검은 눈이 물끄러미 올려다볼 때마다, 어린 한영의 가슴은 멋대로 술렁이곤 했다.

그녀가 동네 아이들에게 바보라 놀림이라도 받을라치면 화가 치밀었다. 소꿉장난을 하다가 잠든 재희의 고운 얼굴을 보면, 괜스레 그 볼을 만지고 싶었다. 호오가 뚜렷하지 않은 재희였지만, 한영은 누구보다 예민하게 그녀가 원하는 걸 파악해 내고, 그것을 들어주려 애썼다. 그의 앞에서나 보여 주는 무해한 미소를 계속해서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어린 한영은, 그런 자신을 내심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 재희만 보면 제가 이상해져요.”

언젠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할머니는 예의 그 얼굴을 했다. 양쪽 눈썹의 끝이 밑으로 처지고, 두 눈이 촉촉해지며 깊어졌다.

“어떻게 이상해지니?”

“제가 다른 사람 같아요.”

“그것도 네 모습이란다.”

“…….”

“이제까지 몰랐던 것뿐이지, 그것 또한 네 모습이란다.”

“…….”

“익숙하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게야. 재희 같은 친구가 옆에 있어 주는 게 처음이라서, 지금 네 모습이 낯선 거란다.”

“……친구요?”

“친구지. 재희와 친구가 아니니?”

한영은 어릴 때도 눈치가 예리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알았다. 그래서 속으로만 답했다. 아니요, 친구는 싫어요.

한영은 재희와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른들은 그냥 나이가 엇비슷한 아이들을 뭉뚱그려 속 편히 ‘친구’라고 불렀다. 어린 한영이 보기에, ‘친구’는 기만적인 단어였다. 지금은 그의 인생에서 사라진 남자들도 그의 어머니를 친구라고 부르지 않았나. 모욕적인 호칭들과 함께, 속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라고.

일곱 살 이한영은 마재희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한영은 마재희를 단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처음에는 친구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이후 머리가 여물고 몸이 커졌을 때는 마재희를 다른 의미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 마음이 어찌 변하든, 오래가지 않아 소년 이한영에게 마재희는 가족이 되었다. 지켜 주고 보호해 줘야 하는 가족.

그렇게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마음이 언제 변화했던가. 본격적인 변화는 중학교 다닐 무렵이었지만, 징조는 그 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그중에 한영이 비교적 명확히 기억하는 순간은 열한 살, 어느 봄이었다.

“한영아.”

소파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그를 불렀다. 한영이 재희의 받아쓰기 숙제를 도와주고 막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을 것이다.

“우리 불쌍한 강아지…….”

그를 품에 안아 준 할머니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 있었다. 열한 살짜리가 신문의 빽빽한 한자를 읽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런 그라도 읽을 수 있는 한자는 있었다. 이를 테면, 사형(死刑).

훗날에서야 한영은 신문에 실려 있었던 죽음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한영의 열한 살은 유신 체제의 폭압이 끝을 모르고 치닫던 시절이었다. 법이 여덟 명의 사람들을 목매달아 살해한 그날, 할머니는 그들 가족의 억울함을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고, 자신의 딸이 겪은 기구한 운명을 떠올렸을 것이다. 신문에 실린 사형당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십 년 전 억울하게 죽은 한영의 아버지를 떠올렸으리라.

그러나 당시의 한영은 그것을 꿈에도 몰랐고, 그저 할머니가 조용히 설명해 주는 음성을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온전한 진실을 접한 순간이었다. 남산에서 온 남자들이 부르는 ‘빨갱이’나 ‘간첩’이 아닌, 오롯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그날 밤, 한영은 잠을 못 이루다 창문을 넘었다.

재희는 그때나 스무 살일 때나 도통 창문을 잠그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무리 없이 한 소녀의 방에 발을 들인 소년은, 감히 소녀의 옆자리를 청했다.

“같이 자도 돼?”

잠을 자다 깬 재희는 눈을 비비며 한영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얌전히 주억거렸다. 한영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이불 아래로 파고들었다.

“오늘 저녁에도 멸치 먹었어?”

“응.”

“잘 참았네.”

“응. 멸치 싫어.”

“왜 그렇게 싫어?”

“냄새가 싫고, 맛도 이상하고…….”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누워, 한영은 재희의 느릿느릿한 음성에 귀 기울였다. 졸음기로 느리게 끔뻑거리는 긴 속눈썹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 맺힌 부모의 삶을 오후 내내 떠올리며 속을 끓였는데, 그게 언제였냐는 듯 가슴은 잠잠해져 있었다.

“재희야.”

“응.”

“너는 내 씨가 어떻든, 계속 내 옆에 있어 줄 거지?”

“응.”

“무슨 질문을 하는지는 알고 대답하는 거야?”

“응. 나는 네가 김 씨여도 좋고, 박 씨여도 좋아.”

한영은 웃었다. 그러나 재희는 진지했다.

“마 씨면 더 좋아.”

“마한영? 그건 이상한데.”

“졸려서 그래. 잘 어울려.”

“그런가. 그렇구나.”

한영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재희가, 꼬물꼬물 몸을 붙이고 안아 줄 때까지.

“괜찮아.”

괜찮아. 그 말은 늘 한영이 하던 말이었다. 다친 마재희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그가 늘 하던 말. 한영이 그녀에게서는 들어 본 적 없는 그 말을, 재희는 왜 하필 그 순간에 했던 것일까.

재희가 무엇을 느끼고 그런 말을 했든, 적어도 한영의 속에 단단히 뭉쳐 있던 감정은 그 말 한마디로 물크러졌다.

“……그래. 괜찮아.”

한영은 천천히 재희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생각했다.

얘는 내 옆에 있어야 해. 그러기 위해 나와 만난 거야.

풋내 나는 운명론적 사고는 그 후로도 계속 한영을 지배했다. 한영이 재희에게 민감하고 예민한 것처럼, 재희 또한 한영에게만 반응하고 움직였다. 내 반쪽. 내 일부분. 이한영은 마재희의 까만 눈을 보며 언제고 그렇게 속으로 속삭였다. 마재희는 그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또한 마재희의 일부였다.

그 또래는 남녀 편 갈라서 고무줄 끊고 악악대며 싸울 무렵, 조숙한 이한영은 마재희와의 결혼마저 꿈꿨다. 결혼을 평생 같이 사는 것쯤으로 이해했기에 가능했던 순수 무지의 꿈이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예쁘기만 한 꿈이었으니, 좀 더 오래도록 꾸었다면 좋았으련만. 한영은 몇 년 지나서 그 꿈을 완전히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꿈의 균열은 그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지 다섯 해가 지났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형 건데, 너만 보여 줄게.”

같은 반에 있는 학우가 따로 불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한영은 아무것도 몰랐다. 히히대며 학우가 내민 붉은 잡지를 무관심한 눈빛으로 흘낏 보고는, 예의상 그 안을 펼쳐 보았을 뿐이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본 자신이, 무엇을 떠올릴 줄도 모르고.

“어때?”

“……이게 뭐.”

“어? 어…… 재미있어서, 너도 같이 보자고 하려고…….”

한영은 싸늘히 말했다.

“재미없어.”

한영은 성인용 잡지를 학우의 품에 내팽개치듯 돌려주었다.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내친걸음으로 화장실로 직행해, 변기에 속을 게워 냈다.

구역질에 몸부림치면서도, 한영은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의 속에 큰 흉터가 있음을.

어머니와 남자들이 뿌리 내린 씨앗이 그의 속에 흉한 구멍을 냈다. 한영은 제 속에 있는 거대하고도 깊은 크레바스를 중학생이 되어서야 제대로 직면할 수 있었다.

덜 자란 사내애들만 한 공간에 몰아 둔 중학교는 한영에게 트라우마 같은 혐오감만 안겨 주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 잡지가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음담패설은 좀 더 대놓고 오갔다. 성교육은 장식적이었고 기만적이었다. 그 시절을 한영은 솟구치는 욕지기를 억누르며 버텨 냈다. 그는 여체에 환장하는 사내애들과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열다섯, 이한영의 몸과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야, 심곡 여중 마재희랑 같은 동네 산다며?”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싸움깨나 한다는 동년배 하나가 옥상으로 불러내기에 올라간 참이었다.

“연결 좀 해 주지?”

한영은 옥상을 차지한 상대의 덩치를 잠자코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열다섯 살 이한영은 사실 그 상황을 내심 지겨워하고 있었다. 학우들의 관심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한 방향이었다. 여자, 예쁜 여자, 인근의 예쁜 여학생들, 그리고- 마재희.

“……원한다면.”

한영은 웃으며 수락했다. 상대가 묻기도 전에 먼저 오늘 몇 시에 어디로 재희를 데려가겠다, 말했다.

“대신 혼자 나오는 게 좋을 거야. 걔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

그렇게 말하자 희희낙락하는 얼굴이란. 한영은 희미하게 웃음 짓고 등을 돌렸다.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옆자리의 영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뭔 일이래?”

“재희.”

“……어떻게 할 건데.”

한영은 대답 없이 웃었다. 영재는 노골적으로 걱정하는 얼굴을 보였다.

“야, 내 친구 상현이 알지? 걔네 형이 유도 유단자인데, 한번 부탁해 볼까?”

“남의 집 형을 왜 불러.”

“아까 걔 여태 상대하던 놈들과 달라. 질 나쁘다고.”

“수업 시작해, 영재야. 조용히 해.”

“이 또라이 새끼야. 일 칠 거면 제발 좀 같이 치자고. 자꾸 나 의리 없는 새끼 만들면 기분 좋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영이 재희를 불러내는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희를 뒤로한 채 집을 나선 한영은 홀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들뜬 얼굴로 나온 상대를 한영은 멀찍이서 지켜보았고, 그가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가갔다. 처음부터 한영은 약속 장소를 외진 곳으로 골랐고, 그 덕에 그가 사내애 하나 후려치는 광경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급작스러운 습격에 정신 못 차리는 동년배를 한영은 오래도록 두들겨 팼다. 얼굴은 때리지 않았다. 옷이 가리는 부위만 골라 때렸다. 반격이 있었으나, 덩치는 애초부터 한영이 더 컸다. 속에 품은 독마저 이한영이 더 컸다.

시커멓게 끓고 있는 감정은 주먹과 발을 휘두를수록 더 지독해졌다. 제 밑에서 비명을 지르고 맞고 있는 놈이, 무슨 생각을, 어떤 추잡한 기대를 하며 마재희를 그동안 훔쳐보고 있었을지, 한영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안됐네. 얼굴만 번지르르한 샌님한테 맞았다고 얼마나 자존심 상할까.”

바닥에서 몸을 꿈틀거리는 얼굴을 향해, 한영은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도 네가 개처럼 얻어맞았다 소문내고 다닐 생각은 없어.”

“이 치사한 새끼가-.”

“-앞으로 이거 죽이고 조용히만 지내 준다면.”

한영은 뻗은 사내애의 가랑이 사이를 툭 발로 찼다. 가벼운 발길질에도 상대는 비명을 질렀다.

한영은 웃으며 경고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수컷 냄새 풍기고 다니지 마. 역하니까.”

그렇게 사람을 패고 집으로 돌아올 즈음이면, 중학생 한영의 속내에 저열한 만족감이 차오르곤 했다.

그의 할머니는 그즈음 눈이 많이 어두워졌다. 같은 식탁에 앉고도 한영의 손등에 점차 굳은살이 붙어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손등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재희는 주목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폭력을 몰랐다. 한영의 상처에는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단순히 살갗이 붉어진 것만으로는 한영이 둘러댄 변명만으로 쉬이 납득했다. 같은 반인 영재만이 끌끌 혀를 차며 적당히 하란 말을 한마디씩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방치하는 주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사람만큼은 달랐다.

“손 보여 봐.”

한영은 그에 응하지 않았지만, 김종석은 기어코 한영의 손등을 확인했다.

“주먹 휘두르는 건 시정잡배나 하는 짓이라고 하지 않았어?”

할머니의 집에서 살게 된 후에도 종종 학교 앞으로 찾아오던 김종석은 그즈음, 한영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를 테면, 적의를 ‘세련되게’ 표출하는 방법이라든지.

“요란하게 일을 벌이면 너만 손해라니까?”

“문제 될 일 없어요.”

“어떻게 없다는 말이지?”

“보이는 데는 때리지 않았고, 맞은 상대가 원래부터 싸움박질하고 다닌 문제아라 선생들은 제 말을 더 믿을 테고……. 더 말해야 합니까?”

“그런 놈이라면 어울리며 다니는 나쁜 무리들이 있겠지? 떼로 몰려들어 복수하려 하지 않을까?”

“다른 놈들에게 말 못 할걸요.”

“어째서?”

“자존심 때문에요.”

한영은 건조하게 설명했다.

“공공연하게 얕잡아 보던 상대에게 얻어터졌다고 말하고 다닐 성격은 아니에요.”

김종석이 혀를 쯧 찼다.

“자존심 짓밟힌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몰라.”

“기껏해야 학교에서 다른 트집 잡아 시비 거는 수준이겠죠. 그 정도야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한영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만 오지랖 부리세요, 삼촌.”

김종석은 목을 울리며 웃었다. 퍽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서늘히 지켜보는 와중에도 한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싸운 이유를 김종석이 묻지 않기를 바랐다. 사춘기 남학생의 혈기로 빚어진 유치한 주먹질로 여겨 주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화제를 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금 남산이 올 스톱이라고 하더니, 한가하긴 한가 보네요.”

“조직이 제대로 돌아갈 상황은 아니지. 무려 이쪽 수장이 대통령을 죽였는데. 대규모로 물갈이가 있었어.”

“안됐네요.”

“난 안 잘렸어.”

“축하라도 해 드릴까요?”

“이따가. 좋은 소식부터 전해야 해서.”

그렇게 말하는 김종석은 흥미진진한 눈빛이었다.

“아무튼 그 물갈이 때문에, 네가 신경 쓰는 놈들도 전부 다 목이 날아갔단 말이지.”

한영은 말없이 김종석을 보았다. 한영이 신경 쓰는 김종석의 동료란, 뻔했다. 이한영의 가슴속에, 흉흉한 구멍을 뚫어 놓은 남자들.

“뭐, 다들 몇 년 전부터는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 같았지만 말이야, 이제 일선에서까지 물러나면…… 네 엄마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

“…….”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네? 네 엄마 이제 정말로 자유라니까?”

그 목소리에 조금쯤이라도 위로가 묻어 있었다면, 다소간이라도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한영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김종석을 응시했다. 김종석은 반응이 궁금하다는 듯 한영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영은 그 시선을 맞부딪치며 속으로 반문했다. 자유? 당신이 그걸 용납할 인간이던가?

“안됐네요.”

“안됐다니?”

“어머니 말고요. 당신이요.”

“이 와중에 나를 동정해? 왜?”

“이로써 제가 당신을 참고 만나야 할 이유가 사라졌으니까요.”

김종석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이한영이.”

“네.”

“내가 여자와 아이는 건드리지 않는단 걸 믿고 간 크게 농담하는 것 같은데…… 내가 누누이 가르치지 않았니? 사람 믿지 말라고?”

“…….”

“사람이 눈이 뒤집히면 말이야, 무엇이든 해낸단 말이야. 생계 수단 잃고 스트레스 쌓인 놈들한테 주소 하나 슬쩍 찔러 주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예상했던 반응 앞에서 한영의 얼굴은 고요했다. 한영이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김종석은 굳이 자신이 품은 흉계를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한영은 웃었다.

“……정말,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네요, 삼촌.”

“아직 멀었네, 우리 이한영이는. 급하게 속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슬슬 통행금지 시간이라서요. 쉰내 나는 아저씨 잔소리만 듣다 집까지 뛰어가야 하는 제 형편도 좀 살펴 주시지 그래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용돈은 필요 없어?”

“네.”

“필요한 것도 없고?”

“네.”

“그래. 너무 주먹질하고 다니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대학 가야지?”

한영은 예의 바르게 웃었다. 김종석이 그의 약점을 어떻게든 죄어 쥐려는 이유를 눈치채고도, 웃었다. 그런 시기였다. 슬슬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것이 익숙해지고, 드러내고 적의를 표하는 것보다는 물밑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된 시기.

그러나 끝내 아직 미숙하여, 감정과 호르몬에 휘둘리고 마는 불안정한 시기.

늦은 밤 방금 씻은 머리에서 물이 뚝, 뚝, 떨어질 즈음이면 한영은 창문을 보았다. 살얼음 같은 추위를 예상하면서도, 결국 창문을 열곤 했다.

재희 집 창문은 단 한 번도 그의 예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숱한 겨울밤도 그랬다. 이중 창문 중 유리창만 닫혀 있었다. 춥기는 추우니 창문은 닫아야겠고, 그렇다고 두 겹의 창을 다 닫자니 답답했을까.

한영은 소리 없이 자신의 방 창문을 넘었다. 재희의 집 난간에 발을 들이고, 창문 앞에 섰다.

유리창은 성에조차 끼지 않았다. 깨끗한 유리 너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재희가 보였다. 얼굴과 다리만 드러낸 채 이불을 고치처럼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이, 잠든 와중에도 추위에 떨고 있는 듯했다.

어둠에 익숙한 시야는 재희의 매끄러운 볼을 무리 없이 담아냈다. 다붓이 붙은 눈꺼풀이 열리기를 바라다가도, 가만히 그대로 닫혀 있기를 바랐다. 한영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선이 자꾸 입술로 향하려 한다는 것쯤은. 그리고 기어코 입술을 훑고 지나간 시선이, 이불 사이로 삐져나온 가는 두 다리로 곧장 향해 버렸음을.

“…….”

무표정한 얼굴로 한영은 손을 뻗었다. 유리창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차디찬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 갔을까. 재희가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렸다. 희고 곧게 뻗은 다리가 움츠러들며 허벅지의 부드러운 속살을 내비쳤다. 흰 속옷마저 보였을 때, 한영은 유리창 안쪽의 두꺼운 창문을 닫았다.

이중창은 부드럽게 닫혔다. 조금의 소음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재희는 결국 깨지 않았다.

꼭꼭 닫힌 창문을 보던 한영은 문득 고개를 내렸다.

“…….”

그는 경멸 섞인 눈으로 바지춤을 내려다보았다. 이골이 날 지경이었으나, 그는 고요히 몸을 틀어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날, 한영은 재희의 방 창문에 새하얀 깃털이 흔들리는 풍경을 달아 주었다.

늦은 새벽 절절 끓는 열기를 가라앉히질 못해 방 한가운데서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땀을 흘리는 밤이 길어질 때마다 이한영은 생각해 보곤 했다. 여체에 반응하지 못하면서도, 마재희의 몸에 열광하는 자신. 그 자신이 품은 지리멸렬한 문제에 대해서.

그럴 때마다 본능의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이곤 했다.

무슨 고민이 필요해?

원래부터 네 사람이었어. 네 것이었어. 그냥, 취해.

알잖아.

마재희는 거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냥, 가져 버려.

그 속삭임은 아무리 달리 들으려 해도 선한 목소리는 못 되었다. 그 목소리는 감히 사랑일 수 없었다. 마재희를 성욕의 수단으로만 바라보고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한영은 재희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제 감정을 어그러진 욕정이라 결론지었다. 수컷이라는 본성에서 기원한 야만일 것이라고. 어린 시절의 상처에 억눌려, 방향을 잃은 추잡한 충동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충동은, 지르밟고 죽이는 것이 옳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까지도 한영은 충동에 흔들리기보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시절은 재희가 특히나 그를 염려하고 걱정하던 때였으니, 자연히 자책하는 마음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한영아.”

침대에 앉아 있던 한영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불조차 켜지 않은 어두운 방이었다. 창문을 넘다 어두움에 잠시 발을 헛딛는 것 같던 재희는 곧 침대에 안착했다. 그 진동을 말없이 몸으로 느끼고 있던 한영의 옆에 앉았다.

당시 여고에 진학한 마재희는 개화를 서두르는 꽃이었다. 그의 할머니가 하루아침에 쓰러져 병원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 계시고, 기다렸다는 듯 친척들이 찾아와 한바탕 재산과 후견인 문제로 논쟁하다 떠난 와중이었음에도, 한영은 그랬다. 제 옆에 앉은 마재희가 풍기는 비누 향에 순식간에 집중력을 빼앗겼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촉촉한 목의 피부나, 옷의 선이 감추지 못한 풍만한 선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리고 그렇게 의식할수록, 한영의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한영의 손등에 손을 얹던 재희는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한영이 그 순간 어떤 충동을 내지르고 싶어 했는지를. 그 충동이 어떻게 삭이고 깎여져 나가 발산되었는지도.

“……재희야.”

“응.”

“잠깐만 안아 줄 수 있어?”

고요한 음성으로 뻗어 나간 한영의 부탁을, 재희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 주었다. 온몸으로 안아 주는 재희의 품속에서, 한영은 속으로 속삭였다. 금수만도 못한 놈.

할머니는 그로부터 사흘 뒤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할머니는 잠깐 의식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처럼 유언을 남겼다.

“한영아, 짐승과 오래 놀면 못쓴다. 물이 들어.”

한영은 그 말을 무리 없이 이해했다. 할머니가 말하는 짐승이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영은 눈을 감는 할머니 앞에서 고요히 대답했다. 노력은 해 볼게요, 라고.

찾아오는 이들은 적었으나, 오가는 언성만큼은 다른 빈소에서 들리는 것보다 드높았다. 하도 악다구니들을 내지르며 싸우기에 기껏 찾아오던 객들조차 기가 질린 얼굴로 떠나던 처참한 장례식이었다.

“너희들은 자격 없어. 한영이 후견인이 난데 너희들이 땅을 파네, 마네야?”

“오빠, 양심이 있으면 적어도 어머니 사시던 집은 우리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친척들의 언성은 장례식 첫날의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그들 나름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한영과 할머니가 살던 집은 장례식이 마무리되는 대로 처분하기로 결정되었다.

한영은 그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함께 장례식을 지켜 주고 있던 친구들은 한영의 친척들이 식장을 떠나고서도 한참을 분개하며 억울해했지만, 한영은 달랐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차갑게 정리되어 있었다.

김종석은 장례 둘째 날 새벽에 찾아왔다.

“식사는 했어?”

홀로 영정 앞을 지키고 있던 한영은 졸린 기색 없이 되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는 알고 온 겁니까?”

“질질 짜고 있기를 바랐는데, 멀쩡하네. 할머니가 섭섭해하시겠어.”

장소나 상주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김종석은 피식 비웃었다.

“그런데, 울기는 울었어?”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종석은 다 안다는 듯 픽 웃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가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절을 하는 동안, 한영은 장례식장 한구석에 뭉쳐 잠들어 있는 친구들을 의식했다. 첫날부터 계속 같이 있어 주었으니, 퍽 피곤할 것이다. 친구들은 깨지 않을 것이다. 잠결에 소리를 듣고 깰 정도로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으니.

“후견인은 외삼촌이 맡게 되는 건가?”

“그렇게 되겠죠.”

“재산 문제는?”

“제게 전부 물려주신다고 유언장 남기셨어요.”

김종석은 혀를 찼다.

“야단났겠군.”

“난리도 아니었죠.”

“도와줄까?”

“아니요.”

“가만히 있겠단 말이야? 이야, 이한영이, 사람 됐네?”

“삼촌이 원하는 일, 해 줄게요. 삼 년 동안.”

“…….”

“그 대가로 삼촌은 이번 일 처리해 줘요. 내가 성년 되는 날까지, 친척들이 내 집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김종석은 웃음부터 터트렸다.

“감정 없는 인형이라도 돈은 아쉬운가 보지?”

“재산도 재산이지만, 모처럼 적응한 고등학교인데 옮기고 싶지 않네요.”

“이유가 그것뿐이야?”

“외삼촌 댁에서 눈치 보며 사는 것도 내키지 않고요.”

김종석은 다시 한번 웃었다. 이번에는 좀 더 길었다.

“이야…… 이 새끼, 제 할머니 죽은 와중에도 대가리 굴리는 거 봐라…….”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텐데요? 오히려 제가 손해죠.”

“그렇지, 밑지는 장사는 아닌데, 참 그렇단 말이지, 계산속이 보여서 심술부리고 싶어졌다고 해야 하나?”

“그럼 없던 일로 하죠. 제가 대학 다닐 때나 찾아오든지요.”

“알았어, 알았어. 네 엄마는 이제 우리 사이에서 쏙 빼 버리고, 사내답게 거래로 해결하자고, 그래.”

“…….”

“대신 기간은 좀 늘릴까? 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사 년제 대학교에 갈 건데 말이야.”

거래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실상 칼자루는 저쪽에서 쥔 형편이었다. 한영은 덤덤히 김종석의 제안을 조정하며 생각했다. 늦건 빠르건 김종석에게 이용당할 운명이었다. 기왕 당할 것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이득을 취하는 쪽이-.

“-아, 근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 김종석이 고개를 돌렸다. 친구들이 잠들어 있는 방향이었다.

“저기 누워 있는 놈들 중에 박상현이가 누구지?”

“그건 왜 묻습니까.”

“우선 그 빨갱이 새끼부터 하지.”

“…….”

“몰랐어? 네 친구 박상현이네 형, 광주에서 폭도 짓 하다 죽었는데?”

“…….”

“형이 죽었으니 분명 불만이 있을 거란 말이지. 한번 캐 봐. 네 능력 시험도 해 볼 겸.”

한영은 그 순간 실감했다.

자신이 앞으로도 이렇게, 좆같은 기분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무표정한 한영의 얼굴을 확인한 김종석은 비웃었다.

“그러게, 늘 방심하지 말아야 한단 말이야. 주변 어디에서 어떤 종자들이 나올지 말이야. 알겠니?”

더 이상 구차한 말은 필요 없었다. 김종석은 왔을 때처럼 소리 없이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사라지는 김종석의 뒷모습을 보며, 한영은 많은 생각을 했다. 많은 감정도 느꼈다. 김종석은 오해하는 듯했지만- 그리고 실상 한영도 그런 김종석의 오해를 부추겼지만- 이한영은 정말로 감정 없는 인형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새벽의 장례식장은, 그에게도 복잡한 감정을 안겨 주는 공간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지나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한영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부스럭, 한쪽에서 소음이 났을 때, 한영은 최악을 예상했다. 친구들 중 누군가가 김종석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것이라면.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려 확인했을 때, 그는 무작정 안심부터 할 수 있었다.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로 상체를 세운 이가 재희였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깼어?”

“……응?”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대답이었다. 한영은 조용히 웃었다.

“더 자, 재희야.”

“……응.”

그러나 재희는 바로 눕는 대신 비척비척 기고 걸어 한영에게 향했다. 재희가 옆에 앉을 때까지 한영은 지켜보기만 했다. 재희는 금세 그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일어난 것부터가 잠결이었던 듯했다. 그러니 그녀가 어린 시절처럼 그의 손을 잡아 온 것도, 잠결이었으리라. 계산속은 전혀 없는, 무의식적이고도 순수한 마음.

한영은 그제야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에 들었을까. 한영의 기억으로는 기껏해야 두세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영은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기척은 발끝을 세운 것처럼 살금살금 다가왔다. 한영은 눈을 감은 채 그 기척을 느끼고만 있었다. 그의 어깨에 기댄 마재희의 체향과 무게를 느끼며.

곧 한영의 몸 위로 살포시 무언가가 덮였다. 한영은 그제야 눈을 떴다. 재희와 그의 몸 위에 덮인 코트를 보았고, 고개를 들어 올려 상현의 얼굴을 보았다. 상현은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엇, 미안.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괜찮아.”

한영은 잠든 재희를 의식해 낮게 죽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상현은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더 자.”

“아니야. 깼어.”

상현은 잠시 그 말이 사실인지 눈치를 보듯 눈을 굴리더니 곧 한영의 옆에 앉았다. 벽에 기대앉는 상현의 몸에서 부드득 뼈와 관절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불편한 잠자리였을 것이다. 한영은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영재와 인혜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한영아.”

그렇게 조용한 목소리로 상현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한영은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한영은 그 순간 상현이 할 법한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를 바랐건만.

“너무 슬프면 눈물 안 나올 때 있어.”

“…….”

“친척들이 했던 말들 신경 쓰지 마.”

상현은 그렇게 위로를 건넸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한영을 보며 친척들이 했던 모진 말들을 염려하는 듯했다. 정작 이한영은 그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신경 안 써.”

“신경 안 쓴다고 그게 안 써지나. 가족을 잃으면 당연히 슬픈 건데.”

“……너는 어땠어.”

“엉?”

“너희 형 실종됐을 때.”

한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너도 지금 나처럼 실감이 안 됐어?”

“……뭐, 그렇지.”

“…….”

“엄마는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데, 솔직히 그렇잖아. 실종되기 전에 친구들 괜찮은지 보러 가겠다고 나갔다고 했어. 그렇게 나간 사람이 다시 안 돌아온 거면……. 뭐, 죽은 거지. 가는 길이건 오는 길이건 소란에 휩쓸렸을 거야.”

“…….”

“그런데도 눈에 직접 보지 않아서 그런 건지 뭔지, 난 아직까지 형이 죽은 게 실감이 안 돼.”

무표정하게 정면만 응시하며 한영은 나직이 물었다.

“생사만이라도 확인받고 싶어?”

“솔직히 말하면, 반반.”

“…….”

“형이 어디 찬 데 누워 있을 거 상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그런데…… 엄마 건강 생각하면 이대로 형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게 나을 것도 같아.”

한영은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상현은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이 계면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상현은 말했다. 이런 이야기 다른 친구들까지 알면 불편해지니 계속 비밀을 지켜 달라고. 상현은 빨갱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어느덧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영은 그 마음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빨갱이란 낙인이 두렵지 않은 사람 없지. 이해해.”

“고맙다, 친구야.”

“……밉지?”

목적어가 없는 물음이었는데도, 상현은 피식 웃으며 대답을 내놓았다.

“밉지.”

“…….”

“가끔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 고향 일에 대해 떠들어 대는 사람 볼 때면,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고 그래.”

일상적인 미소 속에 가려진 상현의 분노를 느낀 순간, 이한영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정말-.

“……기분 좆같네.”

“엉? 방금 뭐라고 했어? 우리 한영이가 설마 지금 욕한 거야?”

상현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바람에 재희가 깬 것인지 움찔 몸을 떨며 눈을 비볐다. 그대로 깨려는 모양새에, 한영이 서늘한 눈으로 상현에게 눈치를 주었다.

“재희 깨잖아. 조용히 해.”

“아니야, 재희도 들어야 해. 재희야, 일어나 봐, 지금 방금 한영이가-.”

“-조용히 하라고.”

그렇게 툭탁거리는 중에도 이한영은 알 수 없어졌다. 집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팔았다. 마재희가 창문을 건너 그에게 매일같이 찾아오는 공간이기에 지키려 했다. 현실에 지친 친구들이 찾아와 쉬다 가는 공간이기에, 친척들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집을 지키기 위해, 이한영은 친구를 배신해야 했다. 이 어찌나 어리석은 자가당착인지.

한영은 얼마 가지 않아 김종석의 일 처리가 어떤 식인지 알게 되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한영은 전화를 받았다. 그의 후견인인 외삼촌이었다.

“돈이고 부동산이고 관심 없으니, 평생 남으로 살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앞에서, 한영은 무감각하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 이후로 그가 친척들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 * *

재희는 물었다.

“……상현이 대답, 김 부장에게 전했어?”

“아니.”

“…….”

“못 믿겠어?”

한영이 웃으며 묻기에, 재희는 차분히 답했다. 아니.

“믿어.”

잠잠하지만 확신 어린 대답이었다.

한영이 알 듯 모를 듯 애매모호한 미소만 지었다. 재희로서는 그 속을 파악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그러나 재희는 그에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은 접견 왔었어?”

“김 부장? 처음 몇 번 오긴 왔었지. 정권 바뀌고서는 없었어.”

재희는 말없이 한영을 보았다. 한영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긴 이야기였다. 해가 저물어 더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다. 서른두 살이 된 이한영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희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응.”

대문 앞까지 나와 배웅하는 한영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재희는 한영이 어린 그녀를 표현했던 수식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 깊은 곳을 아릿아릿하게 했던 표현들을.

“……한영아.”

“응.”

“그건 사랑이었어?”

한영은 잠시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

“그건 사랑 아니야.”

“그럼?”

한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한영은 일주일 뒤로 다시 약속을 잡자는 재희의 말에 잠자코 수긍해 주었다. 그러나 한영은 야박하게도 그들의 만남을 세 번으로 한정해 버리는 조건을 붙였다.

“네가 묻는 질문에 진심으로 답해 주기로 했지만, 언제까지고 응해 줄 수 없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두 번 남은 기회 동안 ‘해결’을 보았으면 한다고, 한영은 부탁했다. 어린 시절의 부드러운 미소를, 얼마쯤은 되살린 얼굴로.

해결이라니.

이한영은 웃으며 잔인한 말을 던지는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했다.

“일찍부터 많이 드셨나 봅니다. 초저녁부터 대리 부르는 건 처음이시네요.”

가끔 회식 때문에 몇 번 신세 진 대리 운전기사가 그렇게 말을 붙여 온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의 도시는 이제야 서서히 화려함을 꽃피우려 하고 있었다.

재희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 모두가 즐거워 보였다. 정체된 차 안에 갇힌 채 재희는 그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금요일 저녁, 두 단어를 괜스레 중얼거린다. 누군가는 웃고 떠드는데, 누군가는 그러지 못해 서로의 얼굴을 보며 괴로워하는 시간.

너는 나보고 앞으로 즐기면서 살라 했지.

재희는 그런 말을 했던 한영을 사실 이해했다. 그녀는 오늘, 한영과 마주하며 대화를 한다는 사실에 내심 감격하면서도 동시에 괴로움을 느꼈다. 한영이 무심히 물을 마시다 말고 멈칫, 컵을 입가에서 떨어트리는 것을 보았을 때는- 지독할 정도였다. 가슴의 살점을 누군가가 도려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그녀를, 한영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고요히 응시해 왔었던 거겠지.

이래도 내 곁에 있고 싶으냐는 듯, 가만히 묻는 시선으로.

“……아저씨는 물을 잘 못 마시는 사람 본 적 있으세요?”

“멀쩡한 인간이 물을 왜 못 마십니까? 못 마시면 죽는걸.”

“……억지로 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경험을 겪으면, 그렇게 돼요. 자기도 모르게 혀가 물을 밀어낼 때가 있다나 봐요.”

운전대를 잡은 대리 운전기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많이 취하셨나 본데. 속은 괜찮으세요?”

“……네.”

재희는 천천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괴로워하고 참아야 하는 거라면, 그 관계는 끝이 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독밖에 안 되는 관계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앞차는 움직일 생각이 없고, 가슴은 욱신거렸다.

재희는 오래도록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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