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0)

15장.

이별을 알리는 편지 속에서조차 한영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배려를 담아 놓았지만, 재희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한영은 사라졌다. 친구들은 물론 동네 주민들이 걱정할 정도로 그는 얼굴 한쪽 비치지를 않았다. 그는 새벽마다 집에 들어오고는 있었다. 다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물어볼 틈조차 없을 만큼 금세 떠났을 뿐이다.

한영의 부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재희에게는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그 무렵 재희는 신문을 꼼꼼히 뒤지는 습관이 생겼다. 도서관에 있는 신문이란 신문들은 다 보며 짧은 한 줄 기사로 나온 사건 사고 소식에 집중했다. 그리고 의문을 반복했다. 김 부장은 구덩이 속에 묻혀 있는 걸까. 아니면 살아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재희는 그런 의문을 반복할 때마다 자신이 사실 어떤 인간인지 고통스럽게 배워 가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때 한영이를 말렸던 걸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별장에 남아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결국 무의미한 후회였다. 한영 없는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만 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든, 마재희를 둘러싼 세상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그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었던 그 나날들. 대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그저 이한영만 없어진 것뿐인데, 그녀의 일상은 그렇게 놀랍도록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재희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왔는가?”

새 학기가 시작된 후 찾아간 심 교수의 연구실 앞에서 재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눈은 바쁘게 연구실 안을 누비고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연구실에 없었다.

한영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그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신학기가 시작한 이래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재희는 단 한 번도 한영과 마주치지 못했다. 이한영은 이런 면에서도 철저했던 걸까. 재희는 도저히 그와 대화할 틈을 잡아내지 못했다. 같이 듣는 수업부터가 없었다.

“진로 상담 때문에 왔다고?”

“네.”

“와서 앉게.”

소파로 손짓하는 교수는 그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재희는 조용히 교수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일까. 요한 신부의 말이 맞다면, 심 교수는 꾸준히 감시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한영의 말을 꺼낼 엄두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저, 한영이 연구실 안에 잘 있는 모습이라도 보길 원했던 건데.

재희는 문득 정적이 너무 길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심 교수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재희는 결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단 말을 하는 재희를 보던 심 교수의 얼굴에 쓴 미소가 번졌다.

“잠시만 있어 보게나.”

“……네.”

교수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연구실 한편, 상패와 사진들이 진열된 앞에 다가갔다. 수납장 안에서 한 액자를 꺼냈다.

소파로 돌아온 그가 그것을 재희에게 건넸다.

“여기를 보게.”

재희는 주름진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진 속을 보았다.

흑백의 사진 속에 대학생들로 보이는 스무 명의 얼굴들이 있었다. 그것이 교정 잔디밭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무섭게, 재희는 심 교수가 누굴 보라는 것인지 바로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 교수가 가리키는 얼굴은, 그녀가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으므로.

“……이분은…….”

한영이 아버지가 왜 여기에-.

“쏙 빼닮았지?”

“……이곳 출신이신 줄은 몰랐어요.”

심 교수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작년 입학식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지. 얼굴만 봐도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네만, 확인이 필요했다네. 그래서 학기 초에 이 군 기록부터 살펴봤던 걸세. 어떻게 살았나, 염려되기도 했고.”

재희는 사진을 보던 시선을 들어 심 교수의 얼굴을 확인했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교수는 슬퍼하고 있었다.

“생전에 책 읽는 것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 사랑꾼이었지. 어찌나 연인을 사랑하던지.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잉꼬부부라고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다네.”

“…….”

“평범한 학생이었다네.”

“…….”

“정말 아끼는 제자였어.”

재희는 말없이 노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그동안 왜 그렇게까지 심 교수가 한영에게 관심을 보이고 가까이에 두려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현명한 노교수는 인자하게 말해 주었다.

“손주라고 생각하고 있네.”

“…….”

“힘닿는 데까지 보호해 줄 걸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재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깊이 고개를 숙여 은사에게 인사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저 말을 듣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 * *

정치권의 최대 화두였던 이월의 선거가 서서히 잊혀 갈 무렵, 광주에서 있었던 비극이 서서히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오월에 출판된 한 르포집을 정점으로 광주의 일은 더 이상 묻혀만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출판 시장에 혹독한 검열의 바람이 불었다.

재희는 지난 몇 달간의 기다림으로 사실 마음을 놓고 있었다. 멀리서나마 한영을 지켜보는 데 만족했다. 때로는 쓰디쓴 회한에 잠길 때가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한영의 사랑만 바라보며 살 수는 없었다. 한영만 무사하다면. 한영만, 무사하게 잘 지낼 수만 있다면.

그러나 돌풍은 예상치 못한 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재희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유월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상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응?”

“한영이 때문에.”

그동안 친구들은 재희와 한영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눈치가 빨랐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한영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상현이 한영의 이름을 그녀 앞에서 꺼내자 놀랐다.

더 놀랄 것은 그다음에 있었는데도.

“한영이가 프락치야?”

재희는 그 이후의 대화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은 두고두고 깨닫고 후회했다. 마재희는 정말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른다. 그렇게 아둔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오랜 친구가 광주 출신이며 형을 잃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자신의 고향의 일을 알리겠다고 유인물을 인쇄하러 가다 경찰에 붙잡힌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청계천의 헌책방에서 상현과 마주쳤던 그날이, 그가 오랜 감금 끝에 풀려난 날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상현을 몰래 빼낸 것이 한영이라는 사실도.

한영은 그 과정을 보이지 않는 데서 행했겠지만, 재희도 얼마 드러나지 않은 단서들을 토대로 한영의 비밀을 캐냈었다. 상현에게도 그와 똑같은 과정이 일어났으리라.

다만, 상현이 받은 상처는 재희와 차원이 달랐다.

상현은 자신 혼자 멀쩡히 나왔다고 했다. 그보다 더 늦게 풀려난 친구는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는데, 자신만 멀쩡히 나왔다고.

그 후 상현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상현이 저 혼자 살기 위해 친구를 팔았다는 소문이. 상현은 그 소문이 정말 억울하고 괴로웠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소문을 억울해하지도 못하겠다.”

그렇게 말하던 상현의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유인물 인쇄하러 간다고 한영이에게만 말해 줬었거든.”

한영을 믿었던 만큼, 상현은 자신의 의심을 배겨 내지 못했다.

그래서 상현은 친구들을 등졌다. 이한영을 떠올리는 모든 인연에게서 떠나 버렸다.

상현이 떠난 이후 재희가 받은 충격은 컸다. 재희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것들이 하나하나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떨어지는 발판 위에 그녀는 서 있었다. 붕괴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을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던 상현이 사라지니 인혜와 영재가 계속 싸웠다. 재희가 두려워 숨을 죽이고 있을 정도로, 매섭도록 맹렬하게.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정말 혹독한 바람이 불었다.

재희가 가장 맞닥트리고 싶지 않아 하던 바람이.

재희는 불 한 점 켜지 않은 주방을 응시했다. 소름이 돋은 등허리가 떨렸다. 그녀는 장바구니를 쥔 손을 으스러지도록 힘주어 쥐었다. 그녀는 그저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지?”

“……누구세요.”

주방의 전등불이 툭, 켜졌다.

재희는 굳은 눈으로 벽에 기대서 있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흰 얼굴, 서글서글한 인상. 그리고 회색빛 정장을 걸친 단정한 옷매무새.

재희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어, 당신.

“앉아 보겠어, 학생?”

김 부장이 식탁 의자를 가리켰다.

재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뼈아픈 후회만 되씹느라 바빴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숨을 다잡는 것이 전부였다. 혹시 그날 도망간 걸까? 역시 나 때문에, 내가 방해하는 바람에 그 틈에 김 부장이 도망간 걸까?

“……경찰 부를 거예요. 나가세요.”

“앉아. 해치지 않을 거니까.”

“…….”

“찾아온 손님에게 야박하게 대접하는 거 아니야, 학생.”

김 부장은 다시 말했다. 앉아.

그 명령어가 유독 증오스러운 것은 한영의 고백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해서일까.

식탁의 유리를 짚다가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김 부장은 그조차 놓치지 않고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희는 손을 식탁 아래로 숨기며 기도했다. 저 남자가 부디 이 떨림을 수상해하지 않기를. 난데없는 침입자에 놀란 사람의 평범한 반응으로 여겨 주기를.

한영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친 것이 아니기를.

“학생은 커피 마시나?”

김 부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헤매는 것 없이 조리대 선반 하나를 열고는, 커피를 꺼내 들었다. 재희는 그 광경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곤로에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올리는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상에 묻어 있었다.

“설탕은 세 스푼 넣었어. 즐거울 것 없는 날에 단맛이라도 있어야지.”

김 부장이 금세 식탁에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식탁 의자에 앉는 남자를 보다 재희는 앞에 놓인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자꾸 엉켰다. 한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위험한 걸까? 혹시- 지난 일을 이제야 알고 떠보려고 온 거라면.

그때 잔에 담긴 커피 향을 맡던 김 부장이 툭, 물었다.

“둘이 왜 헤어졌어?”

김 부장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나서 아쉬웠단 말이지. 둘이 잘 어울린다 생각했거든.”

“…….”

“내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을 갈라놓은 건가?”

서서히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러나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쪽의 의도를 모르는 상황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굳어 있던 머리가 분노를 동력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희는 집에 다른 기척은 있지 않은지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는,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한영이 걱정되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하러.”

“…….”

“그 전에 사진 한 방 예쁘게 찍혀 주겠어?”

사진?

김 부장이 식탁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기 전까지 식탁 위에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있는지도 몰랐다. 순식간이었다. 김 부장의 사진기에서 찰칵, 소리가 터졌다.

“……이게 무슨.”

“좋아. 고마워, 학생.”

아직 검기만 한 사진을 들여다보는 김 부장은 만족한 듯 웃었다.

“……사진으로 뭘 하려는 거예요.”

“가서 보여 주려고.”

보여 준다니.

누구한테?

재희는 허벅지에 놓인 주먹을 꾹 쥐었다. 정신 차려. 침착해.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제 사진을 누구한테 보여 준다는 거예요.”

“이한영이 말고 누가 있지? 설마 내가 보겠어?”

재희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상황은 좋지 않다. 아주-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했다. 무엇이든, 한영이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저희는 끝났어요. 헤어지자고 한 사람은 한영이에요. 제게 질렸다고 했어요.”

한영은 그런 말은 쓰지 않았지만, 재희는 차분히 거짓말했다.

“한영이 때문에 온 거라면 제집에서 나가세요. 저희는 끝난 사이니까. 불쾌하니까 제 사진은 놓고 가시고요.”

“그러니까 학생 말은, 이한영이가 이 사진을 보고도 끔쩍하지도 않을 거다?”

김 부장은 사진을 흔들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롱조의 웃음이었다.

재희는 서늘히 눈만 내리떴다. 반응을 보이면 안 된다. 초조한 얼굴을 해서도 안 되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자꾸 한영이 일에 저를 엮지 마세요.”

“학생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재희는 차갑게 김 부장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도대체 뭐지? 내가 어디에서 실수한 거지? 더 확실히 잡아떼야 하는 걸까?

“다시 말하지만-.”

그때 김 부장이 현관문이 있는 쪽을 향해 외쳤다. 어이.

문을 열고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처음부터 이야기가 된 것인지 남자는 김 부장이 건넨 사진을 건네받았다. 재희가 말릴 틈이 없었다. 남자는 사진을 갖고 바로 현관문으로 나가 버렸다.

“아…….”

“눈물겨운 시도였지만 말이야, 학생은 이한영이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김 부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커피 잔을 들어 올렸지만, 재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김 부장의 목적을 알아내야 했다. 파악한 후에 방법을 찾자.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제가 무엇을 모른다는 거예요?”

“이한영이와 잤어?”

재희는 침묵했으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말 무례하시네요.”

“잤어?”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얼굴에서 뭔가 눈치챈 게 있는지 김 부장이 폭소를 터트렸다. 모멸감에 분노하던 재희가 흠칫 놀랄 정도로 큰 웃음소리였다.

“학생, 학생…… 이한영이는 고자야.”

뭐?

순간적으로 재희의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스쳤다.

“……대체 무슨 말을.”

“정말이야. 그 애 물건에 문제 있어. 아, 그래, 물건이라기보다는 정신 쪽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지. 물건이 멀쩡하다는 건 학생이 방금 얼굴로 증명해 주었으니까.”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남자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뭘 묻고 싶은지 알아. 그동안 이한영이가 사귄 여자들은 뭐냐고 묻고 싶은 거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거 다 쇼야. 쇼윈도 애인들이란 말이야. 이한영이가 마음에도 없는 호색한 위장을 해 가며 여자들에게 붙어 있으려 하는 게, 다 자기 살자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식탁의 유리를 툭툭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김 부장은 흥미롭다는 듯 슬쩍 웃었다.

“……이렇게 낭만적인 놈이었는지 몰랐단 말이지. 한 여자에게만 서? 이야, 정말이지……. 알았다면 좀 더 일찍부터 학생하고 얼굴 트는 거였는데 말이야.”

그 순간 재희의 속에 강렬한 적의가 뜬 먼지처럼 훅 솟구쳤다.

내가 이런 남자를 살리려고 했던 거구나.

재희는 불길 속에 있는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작 이런 남자를 살리기 위해, 강릉에서 그렇게 달렸던 거였어. 결국 한영이를 상처 입히고 위험에 빠트리는 것을 감수해 가면서- 이 남자를 살리려고.

고작 이런 남자를. 이런 쓰레기를.

재희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당신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우리 서로 조심하지. 실은 나도 학생에게 지금 감정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김 부장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냉소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갖고 놀았으면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 놓을 것이지, 애를 왜 다 버려 놨어? 이한영이가 지금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려 하고 있단 말이야. 일 년 넘게 진행한 판을, 이 새끼가 전부 다 망쳐 버리려고 하고 있다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한영이가 정말 멍청하게 심 교수에게 정체를 들켰다고 생각해? 이한영이가 말 한마디 어디 허투루 흘리는 놈이었던가?”

“…….”

재희는 멍해졌다. 한영이가 일부러 자신이 프락치인 것을 교수님에게 노출시킨 거라고?

김 부장은 조롱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한영이가 왜 국문학과에 지원했다고 생각하지? 문학? 이한영이가 어디 그런 감상적인 종자냔 말이야.”

“……무슨.”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야, 학생. 구렁이 같은 심인철 교수 하나 때문에 말이야, 이한영이가 국문학과에 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거란 말이야.”

김 부장은 어리석은 이를 내려다보듯 웃었다.

“심 교수라면 이한영이를 절대 무시할 수 없거든.”

재희는 그 순간 심 교수가 연구실에서 보여 줬던 사진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영의 아버지 얼굴을 내려다보며 애석해하던 교수의 눈빛을.

“필화 사건도 말이야, 사실은 잡은 척하면서 우리가 놓아준 거란 말이야. 이한영이가 심 교수를 도와줘야 신뢰가 더 쌓이지 않겠어?”

“……그러니까, 다 짜인 판이었다고요. 전부 다.”

“학생, 학생……. 설마 정말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한영이가 사제단에 붙어먹은 걸? 그것도 다 내 계산에 있었던 거야, 학생. 이한영이는 날 엿 먹이고 싶어 안달난 놈이거든. 그런 놈이 얌전히 내게 ‘네, 알겠습니다.’만 하겠어? 그놈 계산속이야 훤하지.”

김 부장이 자랑하듯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재희는 혼미해지는 머리에 가만히 숨만 쉬었다. 어렴풋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재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휩쓸릴 일만 남은 무력한 이의 기분이 재희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고 있었다. 도저히 저 남자를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 해 주는 이유가 뭐예요.”

“학생이 다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겠어. 사제단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김 부장이 싸늘히 실소했다.

“신부들이 구원해 주는 건 영혼이지? 그런 거라면 마침 이한영이에게 필요하겠지만 말이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재희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에요, 그게.”

“상황 파악이 느리군.”

“……한영이 지금 어디 있어요.”

“남산 지하실에.”

재희는 아득해지는 머리를 느꼈다. 더 이상 평정심은 없었다. 재희는 비틀거리며 유리창에 몸을 기댔다.

남산의 지하실.

그곳으로 끌려가 과연 몇이나 멀쩡히 돌아왔지?

“……아…….”

“걱정하지 말지. 이한영이가 충동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똑똑하지? 지금쯤 살아 보겠다고 불이 붙은 것처럼 머리 굴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김 부장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내가 그 속을 좀 읽어 볼까?”

“…….”

“이한영이는 남산까지 끌려간 시점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았을 거야. 그 좋은 머리를 굴려 봤겠지. 자기를 고문실 방에 가만히 앉혀 두고 있는데, 고문은커녕 들어오는 인물이 없다-. 뭔가 이상하다 싶겠지? 금세 가닥을 잡았을 거야. ‘아아, 김 부장이, 그동안 해 왔던 대로 단순하게 나를 처리할 생각이 없구나-’라고 말이야.”

재희는 흐느끼듯 숨을 흘렸다. 김 부장은 냉소 어린 눈길로 그녀를 흘끗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 이한영이께서는, 김 부장이 자길 내버려 두고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해하지 않겠어?”

김 부장은 잠시 말을 끊고는 커피를 마셨다.

“그런 이한영이 앞에 학생의 사진이 갔다면…… 기분이 어떨까? 학생의 집을 배경으로, 시간까지 잘 박혀서 나온 사진을 보고 말이야.”

재희는 자신의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학생을 쥐어박진 않을 거라는 건, 이한영이도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여자와 아이는 건드리지 않거든. 그렇지만 우리 이한영이가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김 부장이 미소 지었다.

“……티 안 나게 여자 하나 망가뜨리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거지. 관심도 없는 여자들과 어울려 가며 어떻게든 숨기려 했던 존재였으니, 지금쯤 똥줄이 탔을 거야. 그렇지 않겠어? 아마 자기 어머니를 떠올리려나? 빨갱이 남편 하나 잘못 만나서 그 고생을 했던 제 어미?”

움찔 떨린 눈꺼풀에, 재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학생은 모르지? 이한영이가 어떻게든 학생한테 숨기고 싶어 했을 테니까. 이한영이 아버지도 빨갱이야. 대학교 다니면서 불온한 서적이나 읽어 대며 학생들을 선동하다, 사형 받았지. 그 연으로 내 동료들이 그 애 어머니를 알게 된 거야. 지긋지긋한 악연이지.”

그러나 지긋지긋하다는 김 부장은, 웃고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이 경우에는 피하고 싶은 운명은 어떻게든 찾아온다는 걸까. 이한영이는 그런 운명은 피하고 싶을 거야. 무엇이든 하고 싶을 정도로.”

재희는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연거푸 쏟아진 진실로 얻어맞은 머리가 얼얼했다. 빨갱이. 사형. 한영이의 아버지.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언젠가 고백했던, 한영의 말. 모든 정보와 기억이 한데 뭉쳐 뭉개지고 희미해졌다. 재희는 가빠진 숨을 느꼈다. 속에서 아득히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한영이가 남산 지하실에 있다잖아. 그곳에서 얼마나 잔혹한 고문이 행해지고 있는지, 모르지 않잖아.

재희는 자꾸 흐려지려는 눈을 똑바로 뜨려 애썼다. 김 부장이 커피 잔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대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사람 하나가 저 문을 열고 다시 들어올 거야. 그리고 아주 짧은 말을 내게 할 거란 말이지. 이한영이가 나를 찾는다는 말일 거야. 그러면 나는 학생의 집을 나와 이한영이를 보러 갈 거야.”

“…….”

“그리고 기똥차게 대가리 굴릴 줄 아는 이한영이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어볼 거야. ‘원하는 게 정확히 어느 선까지입니까. 심 교수입니까, 아니면 그 너머까지?’라고.”

들으란 듯 한영의 담담한 말투를 따라 하고서, 김 부장은 피식 웃었다.

“나는 ‘그 너머까지.’라고 답해 줄 거야, 학생.”

“…….”

“그러면 이한영이는 착실히 수사관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겠지. 자기가 사주를 받고 학교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고.”

“……아…….”

재희는 더 견디지 못하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학생 운동 하는 연놈들을 꼬드겨서, 무력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고 말하겠지. 그 짓을 시킨 배후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심 교수와 친한 재야 정치인들 이름을 줄줄이 읊어 댈 거란 말이야. 사랑하는 여자 하나 위해서라면, 못 하는 말이 없겠지. 이 얼마나 절절한 사랑인지…….”

깜깜해진 시야로, 김 부장의 시니컬한 웃음소리만이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내가 말했지 않니. 너희의 사랑을 이어 주러 온 큐피드라고.”

그때 재희의 등 뒤로 대문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잠시 이어지더니, 낯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한영이 할 말이 있답니다.”

“끌고 가. 이년도 뭔가 아는 눈치야.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해 봐.”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 부장이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으나, 재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센 손길로 그녀를 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재희는 그저 힘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짐승처럼 두 남자에게 양팔이 붙잡혀 끌려가며 재희는 생각했다. 김 부장이 기밀일 것이 분명한 그간의 작전을 술술 말해 줄 때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기는 했었다. 김 부장이 멀쩡히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진 인형처럼 현관문 앞까지 끌려가던 재희는 불쑥 입술을 열었다.

“……아들처럼 키워 주셨다면서요.”

중얼거리듯 나온 재희의 말에, 김 부장이 남자들을 멈춰 세웠다. 쏟아지는 무감각한 시선 속에서, 재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하나 가르쳐 주면서, 키웠다면서요. 한영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 주었다면서요. 그 긴 시간을 보고 지냈는데, 조금의 정도, 연민도, 없어요?”

“……눈물겹군, 정말.”

“그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내가 그 애를 진심으로 아꼈기 때문에.”

김 부장은 싸늘히 입매를 뒤틀며 덧붙였다.

“……내 아들처럼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애가 날 죽이려 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까지 참아 준 거야.”

“……아.”

“누가 내가 있는 곳을 다른 놈에게 흘리겠어? 어?”

김 부장이 냉기가 흐르는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증거 하나 없어도 나는 알지. 이한영이가 짠 판이라는걸. 내가 키운 놈인데 그걸 설마 모르겠어?”

재희는 그 순간 깨달았다. 저 남자는, 한영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면서도 내가 그놈을 당장 밟지 않은 것은 그 녀석이 결국 나를 살려 줬기 때문이야. 내가 살아나면 당연히 제 놈부터 의심할 걸 알았을 거야. 그걸 감수하고도 풀어 준 마음을 높게 샀단 말이야.”

언제 싸늘한 얼굴을 했냐는 듯 곧 김 부장의 얼굴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마치 자애로운 부모처럼.

“학생,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지. 이한영이가 앞으로 감당해야 하는 곤욕은 그 벌이야. 사람 하나 골로 가게 하려 했던 죄의 벌.”

“……그럼 당신의 죄에는 누가 벌을 주는데.”

재희는 목 아래서부터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도 한영이를 고문했잖아. 당신도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한영이를 고문했어. 아들처럼 지켜보았다면서, 한영이에게 그런 짓을 했어.”

재희는 눈시울이 붉어져 남자를 쏘아보았다. 배신감? 그것은 저 남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 아니다.

“……당신은 한영이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 없어. 그래선 안 돼. 당신은 자격이 없으니까.”

“자격은 학생이 정하는 게 아니지?”

“내가 정하지 않아도 한영이는 그렇게 생각할 거야. 당신은 한영이의 보호자가 아니야. 가해자야. 한영이에게 당신은 얼룩이고, 오점이야. 한영이의 인생에서 처음부터 지워져야 했을 오점.”

김 부장이 싸늘히 입매를 비틀었다. 재희는 자신의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음을 느꼈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응어리진 분노로, 재희는 그를 노려보며 한마디, 한마디를 뱉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한영이가 죽었을 거라고? 그렇게까지 상황을 조성한 것은 당신과 당신 동료들이잖아. 때린 것도 당신들이면서, 왜 한영이에게 그 값을 지워? 평범하게 잘 자랐을 한영이를 붙잡고 변태같이 음습하게 지켜봐 온 건 당신이면서 왜 그 값을-.”

그 순간 재희는 멱살을 죄어 잡는 손길에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매섭게 내려다보는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학생, 나 여자 때리고 그러는 사람 아니야.”

김 부장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내 밑에 있는 놈들은 달라. 그런데 계속 이렇게 마음껏 말하려고?”

“남들 시켜서 때리게 한다고, 당신이 한 짓이 아니게 돼?”

“……하, 생각보다 겁이 없네?”

“차라리 때려.”

그 말이 무섭게 재희는 남자의 손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때려. 재희는 그 손이 천천히 떨어지는 순간을 눈에 담으며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고통스럽든, 흔적이 남을 때까지 맞아 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여기에서 있었던 일로 당신을 귀찮게 해 줄 거야.

절대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야. 동네방네 온 지방 곳곳에 이 일을 알리고 다닐 것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저지른 잘못을 알릴 것이다. 한영이 얼마나 억울하게 그에게 당했는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게 굴 것이다. 한영이를 교도소에 빼앗기라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절대로-.

“미쳤군.”

남자는 냉소하며 손을 내렸다. 어디까지나 때리는 척만 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재희는 독하게 쏘아붙였다.

“당신만큼은 아니야.”

변태.

그렇게 덧붙인 말에서 심기가 완전히 비틀어졌던가. 재희는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을 조이는 것을 느꼈다. 숨이 덜컥 멎었다. 재희는 숨통을 틀어쥐고 있는 손을 어떻게든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손톱을 세우며 긁어내도, 그 손은 떨어지지 않았기에- 재희는 천천히 뿌예지는 시선을 느꼈다. 머릿속이 아득하게 잠겨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숨통을 쥐던 손이 갑자기 떨어졌다.

재희는 기침을 뱉어 내느라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김 부장이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붙잡고 있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재희는 숨을 몰아쉬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일으키는 손들이 있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남자 둘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누구……?”

콜록거리며 그녀가 그들을 올려다볼 때였다.

그녀를 보호하듯 앞에 나선 남자들 중 하나가 김 부장을 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이 시간부로 이 집에서 나가 주십쇼.”

김 부장이 싸늘히 물었다.

“어디 소속인데 건방지게 안기부 일에 끼어들어?”

조용하지만 오만함이 실린 음성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안기부란 단어에 긴장했을까. 재희는 그녀를 잡은 남자의 손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재희를 보호한 채 물러나지 않았다.

“저희는 사단장님 명령으로 움직입니다. 이분은 사건과 무관하니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아, 맞아. 학생이 사단장 조카였지? 그런데 너무 시의적절한데? 어떻게 오신 거지?”

김 부장은 놀라울 정도로 재빨리 고압적이던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재희는 잊고 있었던 큰아버지의 존재를 떠올리고 잠시 멍해졌다. 그녀에게는 늘 꼬장꼬장한 집안 어르신이었을 뿐, 육군 사단장이라는 사실을 잊곤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한영은 재희와 달리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

한영은 언제나 명절 때마다 꼭 재희를 큰아버지께 인사드리게 하고는 했었다. 심지어 그는 큰아버지 댁 전화번호마저 알고 있었다. 다른 친척 어른들에게는 그렇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유독 사단장인 재희의 큰아버지에게만.

“……이 여우같은 새끼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김 부장이 중얼거렸다. 재희는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김 부장을 바라보았다. 김 부장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같은 인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재희는 곧 깨달았다. 상황은 김 부장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한영은 김 부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재희의 큰아버지 아래에 있는 군인들이 늦지 않게 그녀를 보호하러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재희는 희망을 느꼈음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금세 흔들렸지만.

“……일이 복잡하게 됐어, 학생.”

재희는 숨을 멈췄다. 김 부장의 눈이 예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금세 다시 목표물을 찾은 적의였다.

“아…….”

“내가 마음이 급해서 무례했군. 미안했어, 학생.”

“……잠깐만요.”

이제 저 눈에 깃든 날카로운 적의가 어디로 향할지는 명백했다. 재희는 그를 붙잡으려 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이대로 보내면 한영이는-.

“잠깐, 잠깐만요-.”

“-물러나시죠.”

보호하기 위해 온 군인들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재희는 그들을 뿌리치려 했다. 이대로 저 남자를 보내면 안 된다. 큰아버지는 재희를 보호해 주겠지만, 한영까지 보호해 주진 않을 것이다. 그의 진급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고, 간첩 혐의에 얽혀 든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큰아버지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다는 것을 재희는 알고 있었다-.

“안 돼, 잠깐만요……!”

“학생, 우리 서로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자고.”

김 부장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인사를 건넸다.

군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재희는 김 부장을 붙잡을 수 없었다.

현관문은 쿵, 하고 닫혔다.

* * *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말했다. 언젠가 한번 터질 일이, 결국 터진 것이라고. 사람들은 그해 이월에 있었던 선거에서 여당과 관제 야당이 패배한 사실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그에 타격을 받은 정권이, 광주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알려지며 나빠지는 여론 앞에서 점차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 없는 학생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정권에 비판 일색인 정국을 어떻게든 뒤집어 보려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문이나 뉴스는 달랐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달랐다. 그들에게 이한영은 그저 어리석은 빨갱이일 뿐이었다.

전국을 단위로 했을 때도 그러했듯이, 심곡동으로 렌즈를 좁혀 들어가도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마을 사람들은 동정과 안타까움으로 이한영의 구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느냐며 한숨을 푹푹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영이가 그랬을 리 없다고 슬퍼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렌즈를 좁혀 들어가면- 처참히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이 있었다.

“여보, 변호사는 뭐래요?”

“…….”

“왜 대답이 없어요. 네?”

현관문 앞에 선 마 사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재희는 우두커니 선 채 마 사장이 소파에 주저앉듯 앉는 것을 보았다. 김 여사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옆에 앉아 대답을 재촉했다.

“……일단 알아보신다니까, 기다려 봐. 능력 좋은 분으로다가 부탁했으니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마 사장이 그렇게 말했지만, 재희는 알고 있었다. 이 일에, 능력은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재희는 아버지만큼이나 절실히 변호사를 찾아다녔다. 그럼에도 선뜻 나서겠다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능력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아니, 어느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한영을 손주같이 생각한다던 심 교수는 한영이 안기부 요원들에게 잡히기 하루 전에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요한 신부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한영의 억울한 사건에 관심을 가진 언론사 기자가 몇 있었지만,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흔들며 미안하다고 했다.

아시안 게임과 더 나아가 서울 올림픽이 목전에 있었고, 원초를 자극하는 즐거움이 도처에 만발하는 계절이 찾아들었지만, 더 이상 재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재희는 부모님이 가게 문도 닫고 한영의 일에만 매달리는 것을 보았다. 평생 아버지의 힘은 빌리지 않을 거라 말하고 다니던 영재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보았다. 늘 어른스럽던 인혜가 아이처럼 펑펑 우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재희는 그즈음 한 줄기 실낱같은 기대를 어떻게든 쥐어 잡고 있었다. 남산으로 끌려가기 한 시간 전, 한영은 그녀의 큰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했다. 당시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단 의미이고, 그 와중에도 혹시 모를 위험에서 재희를 도울 여력이 있었단 거다.

그러니 한영에게 무언가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김 부장과 협상할 카드 정도는 미리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한영이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그것을 직접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에 재희는 한영을 어떻게든 보려 노력했지만, 접견은 불가능했다. 한영의 사건이 검찰로 송치되고 난 후 모두가 끈질기게 한영을 보고자 노력했다. 무사한지 얼굴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는 접견 금지 대상자였다. 첫 공판이 열리는 날이 될 때까지 아무도 한영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재판이 시작되는 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한영을 볼 수 있었다.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걸음은 발랐고 자세 또한 곧았다. 재희를 비롯한 모두가 한영과 단 한 번이라도 시선이 마주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영은 단 한 번도 방청석 쪽을 보지 않았다.

그 이후 재판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지나치게 쉬이 흘러갔다.

재희는 마 사장이 그렇게 노력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변호사 자리가 공석인 것을 보았다. 인형같이 앉아 죄책감을 숨기고 있는 판사들의 굳은 눈들을 보았다. 조금의 막힘 없이 의기양양한 검사의 번지르르한 낯을 보았다. 그리고 그 검사는 재판부에 사형을 구형했다. 이한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만한 중한 죄를 저질렀다고 열변을 토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김 부장은 방청석의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다. 김 부장은 못마땅한 얼굴이 역력했다. 한영은 스스로의 입을 통해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았다. 피고석에는 심 교수도, 김 부장이 말했던 재야 정치인들도 없었다. 오로지 한영뿐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곤 했다. 한영이가 미리 대비를 한 거야. 뭔가를 했을 거야. 한영이에게 계획이 있을 거야.

피고인에게 진술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은 일 년도 넘기지 않았다.

“피고 이한영을 무기 징역에 처한다.”

그 한마디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공허한 판결문과 함께 재판은 끝이 났다.

망연히 앉아 있었음에도 재희는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참고 또 참고 있던 영재가 폭발하며 난동을 부리고, 모두가 울고 화내고 소리를 지르는 아수라장이었다. 그 속에서 재희는 한영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판정에서 모두가 격분하는 중에도, 오로지 혼자만 꼿꼿하게 서 있는 그 뒷모습을.

재희는 한영이 그 순간 돌아봐 주기를 바랐다. 일 년의 재판 동안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한영이었으니까.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얼굴을 보여 주었으면 하고-.

그리고 그 순간, 한영이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재희는 점차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그녀를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디에 앉아 있는지 잘 안다는 듯 그는 바로 그녀를 눈에 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가가 조용히 휘어졌다.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이한영을 보며, 재희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역시 너는 알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처음부터. 모두 다. 모두 다- 계획되어 있었던 거야. 지금 이 순간조차도.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재희야! 부모님이 놀라 외치는 목소리가 아득히 멀었다.

아찔한 추락감과 함께 뚝, 재희의 의식이 끊겼다.

* * *

재희는 방에 누워 있었다. 학교는 가지 않은 지 오래였다. 문이 닫힌 지 오래인 방 앞에서 부모님이 한숨을 쉰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도 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기본적인 시공간적 자각조차 없었다. 그저 그녀는 붙잡힌 것처럼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맸다. 진작 이렇게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이 때때로 의식 위로 올라왔다. 그러다 정신이 깜빡깜빡 끊어지는 사이클을 반복했다.

어렴풋이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 앞에서 인혜가 그녀에게 무어라 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려 했으나 분열된 정신은 모이지 않는다. 그대로 의미 없는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재희는 문득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사위를 느꼈다. 어느새 칠흑같이 깜깜한 주변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일순 났다. 아무리 넋을 놓고 있어도 화장실은 가야 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재희는 굳게 닫혀 있었던 문을 열었다.

어둑어둑한 집 안이 보였다. 재희는 왜인지도 모르고 한동안 이 층 계단을 보았다. 깊은 밤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소리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닌데도 그녀의 발기척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계단을 지나 화장실로 향할 때였다. 재희는 문득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주무시는 줄 알았던 부모님의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묻지 마. 당신도 재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살 집은 내가 알아볼 테니까, 당신도 가게 정리해 줘.”

“재희 학교는요. 재희가 지금 저런데 어디로 이사를 가려고요.”

“여기에 있는 게 애한테 더 안 좋아.”

“그렇지만 여보, 아무리 그래도 한영이 옥바라지는 해야죠. 어떻게 한영이만 저렇게 두고 우리가 서울을 떠날 수-.”

“-당신은 알고 있었어?”

“뭐를요?”

“한영이 부친이 누군지, 알고 있었어?”

재희는 우두커니 선 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알고 있었지? 한영이 할머니하고 대화할 기회 있었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한영이 아빠가 도대체 누군데 그래요?”

“……사형수야.”

“네?”

“사형수라고, 빨갱이 짓 하다가 사형당해 죽은 사람이라고……!”

격앙되려는 숨을 억누르는 숨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만 서 있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오늘 그놈 보고 왔어.”

“……정말요? 면회 금지 대상자라고 했는데 어떻게…… 아니, 그보다, 애는 괜찮아요?”

“내가 접견실 들어가자마자 그놈이 그랬어. 인사부터 건네지도 않고 대뜸, 제 아비가 용공 행위로 잡혀 돌아가셨다고 했어.”

“…….”

“나는 그런 놈을 우리 딸 옆에 붙여 둘 수 없어.”

“……여보, 재희는 돌아가신 이모님하고 달라요. 한영이도 그 애 아빠 일하고는-.”

“-아, 말 들어!”

버럭 소리 지르는 마 사장에 김 여사가 한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혜도 모르는 놈……. 제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마 사장이 들끓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집안이 빨갱이라면 얼마나 치를 떠는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접견실 들어가자마자……. 내가 제 놈 얼굴 보겠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완고한 음성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재희는 그 음성이 잠잠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재희는 한동안 어둠 속에 묻힌 방을 보았다. 흐트러진 옷가지며 방바닥에 쏟아져 있는 책 무더기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재희는 그 책들 중 하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김 부장이 서점 앞에서 그녀에게 건넸던 헌법 책이 거꾸로 펼쳐진 채 구겨져 있었다. 그것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그때였다.

풍경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바람이 흘러들어 온다. 풍경이 다시 한번 울었다.

재희는 새하얗게 퍼덕이는 풍경의 깃털 장식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었다. 창문 너머로 한영의 방 창문이 보였다.

그녀는 그대로 발을 들어 창턱을 넘었다. 난간에 놓여 먼지와 비바람만 맞아 더러워진 슬리퍼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맨발 그대로 난간을 넘고 한영의 방 창문 앞에 섰다. 한영의 방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집 안을 한바탕 뒤집고 떠난 이래 아무도 치우지 않아 한영의 집은 엉망이었다. 먼지가 앉은 한영의 침실을 한동안 주시하다,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간 서재는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책이며 서랍이며 다 빼져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작은 흔적이라도 눈에 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서재는 한영이 이 집에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으니까.

거꾸러진 책상 의자를 일으키고는 앉았다. 책상 위 연필꽂이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한참이나 보다가,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닫히다 만 서랍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서랍 속에 있던 수많은 편지와 문서들은 수사관들이 가져갔는지 없었다.

그때 시야에 문득 잡히는 것이 있었다. 책상에 꽂혀 있다 수색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진 걸까.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운이 좋았다는 듯 얌전히 겉표지를 덮은 채 있었다.

재희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이었다.

조용히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길 필요는 없었다. 책 속에는 편지 봉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다른 책에 섞여서 수사관들이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재희는 그 봉투가 어떻게 그녀의 손에 닿게 되었는지 잠시 궁금해했다. 어디까지나 잠시만.

봉투 속 종이를 꺼냈다. 천천히 펼쳤다.

그 안에 적혀 있는 필기체는 그녀가 언제나 보길 바랐던 글씨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글씨체.

[나 이한영은 사후 모든 재산을 마재희에게 남긴다.]

재희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부족한 숨을 채워 넣으려 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리운 글씨에 붙잡혔다. 유서는 딱딱하고 냉정하게 시작되었으나, 그 끝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네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어머니가 날 이곳에 두고 가 준 것에 늘 감사했어.]

그 전언을, 재희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둔탁한 통증이 서서히 온몸으로 번져 가고 있었지만, 종이 밑단에 적혀 있는 문장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기억 속 한영의 목소리가 그녀와 함께 그 문장을 읽었다. 문장은 그것이 전부였다. 짧은 날짜가 적힌 글씨와 한영의 날인이 밑에 있었을 뿐이다.

작년 가을의 어느 날을 가리키는 숫자를 재희는 내려다보았다. 재희는 그 날짜가 언제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의 데이트를 포기하고 돌아온 날이다. 재희가 한영 앞에서 처음으로 옷을 벗은 그날의 밤.

잠자다 깨어 한영의 서재에 들어갔었다. 가을비가 오는 날이었고, 한영은 심 교수가 맡긴 번역 일을 하고 있었다. 재희는 그 일을 도와주다가 서재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한영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 한마디를, 부드러운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던 얼굴.

그때였구나.

그때부터였어.

그녀가 부푼 가슴으로 행복해하던 그 순간, 똑똑한 이한영은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늘 마재희에게 줬다 빼앗는 변덕을 반복해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지독히도 나쁜 인간이라서- 결국에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리란 것도.

이제 알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재희는 흐려지는 시야로 한영의 글씨를 내려다보며 깨닫는다. 그때부터 잘못되었던 거다. 그때 한영을 붙잡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추궁했어야 했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어야 했다. 그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욕심 때문에 침묵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선을 다해 한영의 진실을 캐내고, 죽을힘을 다해 한영과 도망쳤어야 했다-.

자꾸 흐려지고 뭉개진 시야로 책 속의 흑백 삽화가 들어왔다. 단테가 두 번째 지옥에서 만난 한 쌍의 커플이, 칼날 같은 바람에 온몸이 뜯기며 울고 있었다.

그들은 지옥의 바람 속에서 단테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지옥에 떨어졌는지. 왜 지옥의 형벌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고 함께 있는지. 그들은 금기된 사랑을 범했고, 그래서 살해당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욕망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도,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벌을 받고 있었던 거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재희는 삽화 속 연인에게 안겨 있는 여인의 이름을 그제야 기억해 냈다.

“……프란체스카.”

삽화 속 연인의 얼굴은 이제 아예 뭉개져 있었다. 마른 눈에서 눈물을 짜낸 탓일까. 눈가에 지독한 통증이 있었다. 눈만이 아니었다. 머리고 목이고 가슴이고, 뒤늦게 통증을 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묵묵히 움직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영의 마지막 편지를 고이 접었다. 재희는 그것을 편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은 유서가 아니다. 서재에 쏟아진 책들을 정리했다. 빠져나온 서랍장을 원래 있던 자리로 닫았다.

한영의 집을 깔끔히 치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청소를 끝낸 재희는 말없이 자신의 방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무너진 책들을 책상에 올렸다. 연필을 꺼내 들고 법전을 폈다.

그때 다시 풍경이 울었다.

“…….”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재희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한참이나 창문을 응시했다. 그러나 빈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야속한 바람뿐이었다.

흰 커튼이 흔들린다. 풍경도 다시 울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그녀는 얼굴을 손에 묻었다. 애먼 바람만, 애먼 풍경과 함께 울었다.

재희는 한참 후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을 훔치며,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법전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무기 징역은 끝이 아니다. 흉악범이 아닌 정치범이라면, 어떻게든 구명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눈물이 흘러내려 재차 닦아 내고는 연필을 들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 글귀에 담긴 진실은 자명했다. 마재희는 이한영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처음 그를 사랑했을 때부터 그러했듯. 앞으로도 영원히.

재희는 법문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읽는 내내 때때로 눈물이 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법전 속의 한자가- 너무 어려웠다.

재희는 습관처럼 한자에 동그라미를 치다 말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눈물을 훔친 손을 뻗어 옥편을 꺼냈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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