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한영이 떠난 후 시간은 재희의 사념 속에 옅은 물결만 남긴 채 흘러갔다. 오로지 한영의 전화가 걸려 올 때만 재희는 시들시들한 꽃에 물이 뿌려지듯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외의 시간은 망부석이나 다름없었다. 묵묵히 법전을 읽고, 또 공부했다. 가끔은 한영이 끼워 준 반지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그리움을 달래려 했지만-.
반지로는 부족했다. 턱없이.
그래도 얼마 안 가 선물처럼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왔다.
“올해도 갈 거야?”
우연히 동네 길목에서 마주친 인혜가 물었다. 재희가 크리스마스이브 아침부터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재희는 잠자코 목도리를 여미며 대답했다. 응.
“매년 안 귀찮아?”
“촛불에 불만 붙이고 오는 거니까.”
더불어 한영의 할머니가 재희에게 맡기고 간 전통이었다.
한강도 얼린 칼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붉게 언 볼을 긁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성당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자로 보이지 않는 이들조차 성당 앞에 설치된 성탄 구유를 구경하러 왔기에, 성당은 봉사자들과 신자들, 또 비신도들이 오가며 활기가 넘쳤다.
재희는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안드레야 주임 신부를 보았다.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바빠 보였다. 재희는 인사드리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몰려 있는 인파에서 벗어나 말없이 성모 동산으로 향했다. 성모 마리아 상이 있는 공간 아래, 수많은 촛불들이 일렁이며 성모상의 발에 붉은 물결을 일렁거렸다. 그 장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니, 아늑해지는 기분이었다. 재희는 그 기분을 금세 떨쳐 내고 싶지 않아 느릿느릿한 태도로 양초를 놓을 공간을 찾고 있었다.
“이쪽에 자리가 있습니다.”
들려온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남자가 눈을 뜨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말한 곳에 양초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남자는 단상 한편에 놓여 있던 성냥갑을 집어 건네주었다. 재희는 감사하단 말을 다시 하며 그것을 받았지만, 곧 멈칫 손을 굳혔다.
그녀와 남자의 시선이 잠시 부딪쳤다.
“…….”
“…….”
재희는 남자를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자연스레 몸을 돌려, 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양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꺼내면서도 그녀는 남자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성냥갑을 받으며 보았던 것이다.
코트 깃 아래, 남자가 걸친 로만 칼라를.
성냥불은 간신히 붙었다. 복잡한 머리를 무표정한 얼굴 속에 숨긴 채, 그녀는 양초에 불을 붙였다. 막 초심에 일렁거리는 불꽃이 피어날 무렵, 그들 가까이에 서서 기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성모 동산에 재희와 사제 단둘만 남았다.
신부는 그제야 다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프란체스카, 그 초는 이냐시오를 위한 것입니까?”
이냐시오.
한영의 세례명이다.
재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촛불만 내려다보았다. 신부 또한 그녀처럼 정면만 바라보았다. 멀리서 본다면 그들은 그저,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 별개의 개인일 뿐이었으리라.
재희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세요?”
“이냐시오를 위해 늘 기도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재희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가 평범한 사제는 아니라는 것을.
“프란체스카, 오랜만에 주임 신부님께 인사드리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재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예배당 입구에 선 주임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재희가 생각했을 때, 주임 신부 안드레야가 성호를 그었다.
이름 모를 신부가 그때 조용히 말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이 전부였다.
신부는 먼저 성모 동산을 떠났다.
재희는 그를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처음 취한 자세 그대로 촛불만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들어가고 있었다.
왜? 신부님들이 왜 내게 이러는 거지?
재희는 휘말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 부장과 호텔에서 맞닥뜨렸던 날로부터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다. 언제 어디서 김 부장이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압구정 백화점에서도 그가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나.
지금 주임 신부님께 가면 안 된다.
괜한 의심을 사는 행동은, 한영을 사지로 내모는 일이다.
그러나 재희는 선뜻 성당을 떠날 수 없었다. 재희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예배당을 바라보았다. 해가 갈수록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역력한 안드레야 주임 신부가 아직도 그 앞에 있었다. 오가는 신도들과 대화하느라 바쁜 듯해 보이지만, 그의 발은 굳건히 뿌리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재희가 그에게 다가오기만을.
재희와 한영이 어릴 때부터 보고 지낸 안드레야 주임 신부다. 할머니를 따라 재희와 한영이 손잡고 성당에 오던 시절도 지켜보았고, 재희가 성탄절 전일 아침마다 촛불 봉헌 하는 것까지도 지켜봐 온 이. 누구보다 한영을 걱정해 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재희는 그를 볼 때마다 한영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도저히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어차피 안드레야 신부님께는 매년 인사를 드렸으니까.
인사만 드리고 나오자.
성모 동산에서 기다렸던 이름 모를 신부가 붙잡으려 한다면 뿌리치고 나오면 된다. 재희는 그렇게 결심하고서야 촛불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희야.”
“신부님.”
안드레야 신부는 오래 기다린 것처럼 재희를 반겼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드레야 신부가 그녀를 반긴다고.
그러나 곧 재희는 신부가 그녀를 반기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눈을 통해서였다. 오래도록 재희와 한영을 웃는 얼굴로 지켜봐 왔던 신부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재희를 보고 있었다. 성탄 대축일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하는 사제의 본분을 망각할 정도로, 무거운 눈빛이었다.
“오랜만인데 차라도 마시고 가려무나.”
그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희가 거절하지 못하고 예배당 깊숙이 발을 들인 것은.
노사제의 근심 어린 눈을 마주한 순간, 재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예감부터 느꼈다.
“프란체스카.”
성모 동산을 먼저 떠난 신부는 사제 집무실에 있었다.
자신을 요한이라 소개한 신부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으나, 확신하기 어려웠다. 재희는 눈앞에 있는 신부를 보며 성직자보다는 교사가 더 어울리는 인상이라고 잠깐 평했다. 그가 쓴 안경알 속 너머 갈색 눈이 부드러워 보였지만, 성직자에게 있을 법한 세속과 유리된 인상은 그에게 없었다.
“……이곳 신부님은 아니신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안드레야 신부님이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주임 신부님이요?”
“제가 이냐시오를 찾는 이유를 가만히 듣고만 계시더니, 오늘 이 시간에 이곳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
“프란체스카, 당신을 만나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제껏 기회가 없어 묻지 못했던 질문을 재희는 그제야 던졌다.
“……왜 저를 프란체스카라고 부르세요?”
대답을 기다렸건만, 오히려 의문이 돌아왔다.
“이냐시오가 그렇게 부르기에 세례명으로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까?”
“……저는 세례를 받지 않았어요. 그 이름도 알지 못하고요.”
“그렇습니까. 이냐시오가 제게 당신의 실명을 알려 주기 꺼렸나 봅니다.”
신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한영 사이의 부족한 신뢰를 입에 올렸다. 재희는 그에 자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한영이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까?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신부의 얼굴을 살피며 재희는 물었다.
“……이냐시오가 제 얘기를 신부님께 했나요?”
“많지는 않습니다.”
신부는 한영이 입이 무겁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꾸준히 대화를 할 정도로 자주 만나신 것 같은데요. 이냐시오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그렇게 묻는 와중, 한편으로 재희는 어디까지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따져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제단의 일로 이냐시오를 알게 되었습니다.”
“…….”
“이냐시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냐시오가 스스로 제게 밝혔지요.”
잠시 침묵하는 재희에게 요한 신부는 말했다.
“프란체스카, 저는 당신을 떠보려고 온 게 아닙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온 겁니다.”
재희는 주임 신부의 무거운 눈빛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니요. 잠잠합니다.”
“그렇다면 왜…….”
“일단 보이는 바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재희는 굳은 눈으로 신부를 보았다. 신부 또한 딱딱한 얼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요?”
“아무도 모릅니다.”
“…….”
“그러나 프란체스카, 정말 모르고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느낀 것을, 당신이 정말 모르고 있는 겁니까?”
신부는 고요히 물었다.
“이냐시오가 지금 심인철 교수님 댁에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까?”
며칠 전 한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한영은 지내던 호텔에서 나오게 된 경위도 설명해 주었다. 김 부장에게 이틀간 갇혀 있었던 일을 심 교수가 알게 되었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자초지종을 확인한 심 교수는 일말의 책임을 느꼈던 듯했다. 대낮에 호텔에서 사람이 감금되었는데도 아무도 몰랐다니, 걱정되기도 했을까.
심 교수는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꺼이 그의 집 별채를 잠시 빌려주겠다, 제안했다.
‘고마운 분이야. 죄송하게도.’
그렇게 수화기 너머로 울리던 한영의 목소리를 재희는 아직도 기억했다. 그때 재희도 안심하며 대꾸했다. 정말 다행이다, 라고.
“…….”
“이냐시오가 심인철 교수님의 집으로 들어간 이유가 정말 집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재희는 짧게 끊어지는 숨을 흘렸다. 난방이 되는 집무실이었음에도 안개처럼 뿌연 입김이 시야를 흐렸다.
“……지금 무슨 의심을 하시는 거예요.”
“필화 사건이 무마되면서 교수님과 재야인사들을 엮어 구속하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만, 공작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쉽게 포기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 노력 중 하나로, 한영이가 교수님 댁에 들어간 거라고요?”
“심인철 교수님은 재야 운동권의 중심 인사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빨리 이냐시오의 정체를 눈치챘다고 보십니까. 그동안 프락치들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희는 아직 납득할 수 없었다. 재희는 한영의 방에 있던 백석의 시집을 떠올리며 반박했다.
“한영이는 교수님을 구해 줬어요.”
“예, 그랬습니다. 금서를 숨겨 주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나 지금의 그는 눈이 어두워져 있지 않습니까.”
“……어두워져 있다고요?”
“프란체스카, 당신은 이냐시오가 무엇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는지 이미 압니다.”
서글프게도 그 순간, 왜 하필 그녀 인생에 가장 행복하던 순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을까.
‘……프락치를 그만둔다는 거야?’
‘응.’
‘……가능해?’
‘가능해.’
‘어떻게?’
‘지금 하고 있는 일만 마무리되면 나올 수 있어.’
그렇게 무심히 대꾸하던 한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낀 반지만 내려다보며 만족하던, 그 느긋하던 시선.
모종의 예감에 사로잡힌 재희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한영은 호텔에서 남자들과 있었던 이유를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가벼운 의견 조정 중이었다며, 마치 가벼운 해프닝인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재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해프닝이 아니다. 김 부장은 고의적으로 재희를 호텔로 끌어들였다. 그는 마재희를 통해 이한영을 압박했다.
그리고 한영이 그에 굴복했다면.
그래서 며칠 뒤, 호텔을 나와 심 교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된 거라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요.”
시기적으로 공교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슴이 아픈 것과 별개로, 재희는 믿고 있었다.
“다른 이유로 교수님 댁에 들어가게 됐더라도, 한영이는 교수님을 보이지 않는 데서 도우려고 할 거예요.”
대환 선배에게 그랬듯, 그리고 심 교수의 백석 시집을 숨겨 주었을 때처럼.
“한영이는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신부는 가만히 재희의 두 눈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었다.
재희는 상황이 곤란해졌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요한 신부는 위험했다. 지금 이렇게 그녀에게 접근한 행동 자체도 그랬지만, 한영을 의심해 막는답시고 움직인다면 그 파급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영의 안전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른다.
어떻게든 저 신부를 안심시켜야 한다. 한영을 보호해야 한다. 재희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만약 한영이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 해도 심 교수님께서 쉽게 속을 리 없어요. 한영이의 정체도 눈치채신 분이니까요.”
“프란체스카.”
신부가 고요히 물었다.
“세바스티아노 성인을 압니까?”
재희는 가만히 신부의 얼굴만 보았다.
“세바스티아노 성인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친위군이셨습니다. 황제의 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감옥에 갇혀 박해받는 크리스천들을 도와주신 분입니다.”
“…….”
“행한 일이나, 성화 속에서 아름다운 미남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나, 이냐시오와 닮았지요.”
“…….”
“그래서 저희 사제단은 이냐시오를 세바스티아노라고 부릅니다.”
한영이를- 세바스티아노라고 부른다고.
“……대환 선배의 일 때문에요?”
“아니요.”
“…….”
“저희가 이냐시오를 세바스티아노라고 부른 지는 더 오래되었습니다.”
“……대환 선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
언젠가 막연히 그런 의심을 한 적 있었다. 새벽마다 몰래 집을 떠나는 한영의 뒤를 몰래 따라가다 그와 성당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일순 의심했었다.
과연 이게 처음일까, 라고.
“……언제부터요?”
“교복을 입은 이냐시오가 어느 날 제게 찾아온 날부터입니다.”
요한 신부는 그 전에도 한영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했다. 그는 부사제의 신분일 때부터 안드레야 신부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고, 몇 번 성당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다 한영의 얼굴을 지나가듯 보았다고.
“처음에는 이냐시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냐시오의 말을 믿게 된 후에는 도우려 노력했지요. 그러나 이냐시오는 저희가 내민 도움의 손길을 거절했습니다.”
“……왜요?”
“김 부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재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평범한 회사의 부장 행세를 하지만, 그는 안기부 요원입니다.”
“…….”
“어떤 악연으로 이냐시오가 김 부장과 얽혔는지 저는 모릅니다. 안드레야 신부님은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냐시오가 프락치가 된 데에는 김 부장의 강요가 있었을 겁니다.”
“…….”
“제 추측으로는, 부모님의 일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김 부장도 했다.
“……한영이의 부모님과 김 부장이 아는 사이였던 걸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정말 친밀하게 느껴 부르는 호칭은 아닐 겁니다.”
재희도 느꼈다. 한영이 ‘삼촌’이라는 단어를 올릴 때는 유독 조롱조의 말투가 묻어 있었다.
“이냐시오는 김 부장을 증오합니다.”
“…….”
“그리고 그 사실을 심인철 교수님이 알고 계십니다. 이냐시오가 프락치라는 사실을 들켰을 때 심인철 교수님에게 고백했다고 하더군요. 저희 사제단과의 관계도 말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한영이를 믿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 심인철 교수님은 이냐시오를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
“이냐시오는 이미 너무 많은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먹는다면, 심인철 교수님은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다.
“……그렇지만 전부 다 상황 이야기만 하고 계시잖아요. 한영이를 의심하는 충분한 이유가 전혀 없어요.”
“프란체스카, 세상은 논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극히 사제다운 말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논리대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논리라도 있어야 억울한 사람이 안 생기죠.”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한영이는 요한 신부가 그를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삼 년이라는 시간을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단을 도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결국, 이런 근거 없는 의심이라니.
더 이상 남들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피로했고, 더 알고 싶지 않았다. 이한영이 알려 주지 않은 진실은 마재희가 알아서는 안 된다. 재희는 자꾸 그 법칙을 깨고 마구잡이로 간섭해 들어오는 낯선 남자들에 화가 났다.
“이냐시오는 지난 삼 년간 안드레야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해 왔습니다.”
전혀 모르는 말을 들은 재희가 몸을 굳혔다.
“이냐시오의 할머니께서 남긴 유언이었답니다.”
“…….”
“정기적으로 새벽마다 성당을 찾아와 이냐시오는 자신의 죄를 고해했습니다. 이냐시오의 성격으로는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냐시오는 지금까지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빠짐없이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요?”
“이냐시오가 더 이상 고해 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재희는 멈칫 신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최근 한 달 이냐시오는 성당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
“한 달 전 이냐시오의 심중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요한 신부는 꿰뚫어 보는 시선으로 말했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재희의 눈이 신부의 깊은 눈과 마주쳤다. 알싸한 침묵이 집무실을 감돌았다. 재희는 굳은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시선조차 끊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였다.
재희는 잠깐이나마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마주쳤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한 달 동안 한영이가 정말 바빴어요. 그래서 고해 성사를 못 했을 거예요.”
눈앞의 신부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신부님.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한영이를 믿어 주세요.”
“……주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이냐시오의 걸음에 주님께서도 함께하실 겁니다.”
신부는 집무실 벽면에 걸린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상심한 눈빛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기 전 성호를 그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이냐시오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합니다.”
“…….”
“성부와 성자, 성령께 기도하겠습니다. 두 형제자매님의 걸음에, 주님이 함께하시기를.”
재희는 말없이 신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부가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녀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해 성사. 재희는 성당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죄를 신부 앞에서 고백하고, 참회를 구하는 행위. 한영은 안드레야 신부님께 그동안 어떤 죄들을 고백해 왔을까.
그 순간 재희는 신부들을 향한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영의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상대가 자신뿐이라고 줄곧 믿어 왔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한영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녀 앞에 등장하고 있었다. 요한 신부를 비롯하여, 안드레야 주임 신부까지. 그리고 얼마 전에는, 김 부장까지-.
재희는 우뚝 멈춰 섰다.
난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질투라니.
“……하.”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옆에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거리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재희는 그 노랫말을 멍하니 듣다 정신 차렸다. 그래, 내일은 크리스마스잖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한영이가 언제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그는 성탄절을 앞두고도 연락이 없을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나 기억은 결코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재희야, 이냐시오가 세례 받을 때를 기억하니?’
성당을 떠나는 순간 안드레야 신부가 그녀에게 건넸던 질문이 떠오른다. 재희는 신부의 질문에 기억한다고 답했다.
‘나는 이냐시오와 안젤로를 세례명으로 제안했단다. 아그네스 성도님은 안젤로가 좋다고 하셨지. 나도 그랬단다. 한영이는 천사 같은 아이였고, 천사가 계속 지켜 주어야 하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본인이 진저리 칠 정도로 싫어하는 바람에 결국 이냐시오가 세례명이 된 거란다.’
한영의 할머니 세례명이 아그네스였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리는 재희에게, 안드레야 신부는 말했다.
‘나는 아직도 안젤로가 한영이의 세례명으로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안드레야 신부는 그녀에게 물었다. 재희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빛으로 변했다. 재희는 걸음을 떼며 신부 앞에서는 답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했다. 세례명이 무엇이든, 이한영은 이한영이라고.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재희는 횡단보도를 걸었다. 도로 너머 가게들 속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쇼윈도 안에는 화려한 트리들이 있었다.
재희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반짝반짝, 꼬마전구에서 빛이 들어왔다. 재희는 홀린 듯이 그 앞에 서서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꿈을 꾸는 듯 오묘한 감각 속에서 재희는 트리에 매달린 황금 구슬을 보았다.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이 어그러져 있었다. 휘어진 그 얼굴을 보며 재희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영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이 모였던 토요일의 기억이다. 성탄절 트리를 장식하며 웃고 있던 친구들. 그런 친구들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한영.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한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스산한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걸까.
마치- 냉혹한 결정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이냐시오가 더 이상 고해 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요한 신부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떠올랐다.
‘최근 한 달부터 이냐시오는 성당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한 달 전 이냐시오의 심중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미하엘 신부의 꿰뚫어 보던 시선을 떠올렸다.
‘그리고 프란체스카,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속에서 고요히 맞장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맞아. 너는 알고 있어.
그때 한영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너만은 알고 있잖아.
이후에 이어진 시간을 재희 스스로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내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튀듯 몸을 돌렸다는 것이다. 재희는 도로를 향했다. 때마침 달려오던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택시는 기다렸다는 듯 멈추고 그녀를 태웠다.
길은 막히다가도 뻥뻥 뚫렸다. 택시 기사는 성격이 급했다. 금방이라도 손님을 목적지에 내려 줘야 할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조금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탄 택시가 정체된 길을 맞닥뜨릴 만하면 방향을 트는 것을 보면서 재희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그러나 재희는 한영에게 지나가듯 들은 심 교수의 자택 앞에 이를 때까지도 답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영이를 봐야 했다. 지금 당장.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심 교수는 놀란 눈으로 재희를 맞았다.
“……교수님.”
“이 군과 엇갈렸는가?”
“……네?”
“한 시간 전에 집으로 보냈다네. 크리스마스지 않나. 이런 날까지 못되게 굴 수는 없지.”
“…….”
“자네 보러 갈 생각에 신났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갔다네.”
재희는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리듯 흘렸다. 헐떡임에 가까운 숨소리에 심 교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인가?”
“……아니, 아니에요. 교수님.”
“일단 들어오게. 자네에게 마침 할 말도 있고.”
그러나 재희는 그럴 수 없었다. 마음이 계속 급했다.
어떻게 둘러대고 교수의 집을 나왔는지 몰랐다. 재희는 다시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교수들이 주로 모여 살기로 유명한 한적한 마을이었다. 택시가 도통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택시가 있을 법한 큰 거리를 향해 달리면서도, 재희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달려야 하는지.
바로 한영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들고 다니는 열쇠고리에는 그녀 집의 열쇠뿐만 아니라 한영의 집 열쇠도 매달려 있었다. 단 한 번도 멋대로 그 열쇠를 써 본 적은 없지만, 오늘의 재희는 달랐다. 초인종조차 누르는 것 없이, 바로 철문을 열고 한영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 한영이 있을 거라, 애써 믿으며.
그러나 그녀를 반기는 것은, 썰렁한 빈집이었다.
“…….”
인기척 없이 차갑게 식은 집을 보는 순간, 재희는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재희는 어떻게든 버텨 냈다.
잠깐 나간 걸 수도 있다. 어디 들렀다 오느라 늦는 거겠지.
떨리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재희가 몇 걸음 막 뗄 때였다.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재희는 천천히 주방으로 다가갔다.
싱크대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재희는 혹시나 해서 이 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한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한영이 집에 들렀다면, 집에 들러야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재희는 매섭게 눈을 빛내며 한영의 침실과 서재를 샅샅이 살피고 다니기 시작했다. 지난 이 주간 이 집을 청소한 것이 마재희다. 남은 흔적이 있다면 재희가 그것을 못 보고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옷장의 문이 실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그녀가 이틀 전 청소할 때 잘 닫아 두었던 문이었다. 재희는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재희는 자신의 기억 속 옷장과 조금이라도 변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방이다.
장롱에 있어야 할 가방 하나가 없었다.
한영의 생일이 지난 며칠 즈음 한영이 구입한 남성용 여행 가방이었다. 포장지조차 뜯지 않고 장롱 안에 넣어 두기에, 그 이유를 잠시 궁금해하다 넘어갔었다. 맞아, 그랬어. 그 가방.
역시 한영이가 왔다 간 거야.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빈 가방만 들고 나갔을 리 없다. 가방 안에 무언가를 담아 들고 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만 안다면, 한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
한번 감을 잡으니 한영의 물건들 중 사라진 것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옷가지 몇이 사라졌다. 잠바 하나가 사라졌다. 한영이 단 한 번도 입은 적 없던, 시장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싸구려 검은 점퍼였다. 그리고 또 사라진 물건은- 검은 가죽 장갑. 그것 또한 한영이 한 번도 손에 끼워 본 적 없는 것으로- 어느 날부턴가 포장지째 서랍장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던 것.
그리고 검은 모자 하나. 또-.
밑창이 다 떨어져, 왜 버리지 않는지 그녀가 궁금해하던 운동화 한 켤레.
재희는 자신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점차 숨이 가빠 왔다.
그때였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
지레 화들짝 놀란 재희는 전화기가 있는 서재 방향을 보았다.
전화벨은 악착같이 울고 있었다. 재희는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이제야 받네.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재희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한영이었다.
-집에 없어서 걱정했어. 어디 갔었어?
“아…….”
재희는 잠시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혼란을 느꼈다.
“……네가 보고 싶어서. 교수님 댁 다녀왔었어.”
-헛걸음하게 했구나. 미리 전화 줄걸 그랬네.
재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야?”
-주유소 가는 길에 네 생각 나서. 공중전화.
“……주유소?”
수화기 너머에서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희야, 크리스마스잖아.
“……?”
-가볍게 짐 싸고 기다려. 금방 갈게.
“짐은 왜……?”
-전부터 강릉 가고 싶다고 했잖아. 차 빌렸어. 가자.
아.
순식간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재희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내 숨통을 조이던 가슴 근육이 그제야 풀어지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헛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걸까.
-재희야?
아무것도 모르는 한영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재희는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 답했다.
“……응. 준비하고 있을게.”
-기름만 넣고 집 앞으로 갈게.
재희는 그제야 웃으며 답할 수 있었다. 응.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한 시, 재희는 강릉에 있는 별장에서 홀로 눈을 떴다.
“…….”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그 꿈이 좋은 꿈인지, 악몽인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서늘히 식어 빈 옆자리를 보고서야 재희는 깨달았다.
그녀가 꾸고 있던 꿈은 행복한 꿈이 아니다. 악몽이었다.
* * *
모든 것이 좋은 하루였다. 긴 이동 시간에 지칠 틈이 없었다. 한영과의 대화는 시종일관 즐거웠다. 겨울 바다도 보고 왔다. 추운 날씨였지만 오랜만에 본 바다는 예뻤다. 강릉 시내에서 먹을거리와 필요한 것들을 사는 동안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새댁이 곱다는 소리를 들었다. 남편도 인물이 훤한 게, 참으로 보기 좋은 한 쌍이라고.
한영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별장을 관리했다는 노부부는 친절했다. 별장은 훈훈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따뜻하게 반짝거리고, 장작불이 다닥다닥 아늑하게 타올랐다. 재희는 그날 와인을 처음 마셨다. 취기와 분위기에 젖어 노곤해진 재희를 한영은 살살 녹여 옷을 벗겨 냈다. 그는 분명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부드러움으로 시작한 행위에 격렬함이 점차 가미되고, 그들은 몇 번인지도 모를 만족 속에서 잠들었다.
즉, 한영이 그녀를 두고 갑자기 떠날 이유가 전무한 하루였다.
재희는 사라진 가방이 있던 자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한영이 가방을 들고 강릉의 별장을 떠났다.
집 안 곳곳을 한영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며 이미 자동차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곳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는 의미다. 담배 피우러 잠깐 나간 것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옷장에 걸려 있는 옷들을 확인했다. 없어진 옷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옷들은 빠짐없이 제자리에 있다. 재희는 비척비척 신발장으로 향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내내 한영이 신고 있었던 구두가 현관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한영은, 무엇을 입고 신은 채 나간 것일까.
재희는 사실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당신은 이냐시오가 무엇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는지 이미 압니다.’
요한 신부의 말이 맞다. 마재희만큼 이한영을 잘 아는 인물은 없다. 그녀는 지금 한영이 무슨 일을 저지르러 나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재희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
싸늘히 식은 빈집을 보며 생각했다. 틀렸어. 이미 늦었어.
이미- 돌이킬 수 없어.
한영은 떠났다. 한 번도 걸치지 않은 옷과 가죽 장갑, 모자, 운동화를 착용한 채, 그녀가 모르는 어딘가로 향했다. 아마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올 것이다. 재희가 깨기 전에 돌아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잠든 척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계속 보낼 것이다. 사흘의 여행 내내, 재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와 웃고 떠들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그들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지. 그게 뭐 어때서.
재희는 무감각하게 생각했다. 침대로 돌아가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다시- 잠이 드는 거야.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현관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대로 그녀는 침실로 향할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왜였을까.
하필, 셋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온 것은.
“…….”
재희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재희는 눈물을 팔뚝으로 훔쳤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렸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마재희만큼 이한영을 잘 아는 이는 없다. 늘 속고 또 속지만, 그래도 그녀는 매번 너무 늦지 않게 한영의 신호를 포착하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반응해 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한영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가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기 전에- 그녀가 잡아 줄 것이다.
그녀는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요한 신부가 말한 것처럼.
달려가 옷을 챙겨 입었다. 다시 내려와 현관 수납장을 뒤졌다. 별장 관리인인 할아버지가 낮에 지나가듯 말했었다. 이 일대 지도가 서랍 안에 있다고.
재희는 지도를 펼쳤다.
“……너무 가깝지는 않지만, 고속 도로를 지나지 않고 갈 수 있는 곳…….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
그리고 아마도- 며칠째 사람이 갇혀 있어도, 아무도 모를 곳.
“……어디지? 어디…… 어디에…….”
지도를 뚫어져라 살피던 그녀의 눈이 문득 기시감에 찌푸려졌다. 이 지도.
분명 낯이 익은데-.
“……아.”
재희는 급하게 지도와 랜턴을 들고 몸을 돌렸다. 쿵, 등 뒤로 현관문이 닫혔다.
별장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있었다. 인근에 있는 건물들에는 불빛이 조금도 없었다. 재희는 처음에 랜턴 불빛을 켜지 않고 자전거를 밟았다. 이윽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별장에서 멀어졌을 때 랜턴을 켰다. 야밤에 한 여자가 랜턴 불빛을 이리저리 흔들며 자전거를 달려도 주의 깊게 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길을 달리는 내내 자전거가 삐걱거렸다. 오래 쓰지 않아 녹슨 것인지, 얼마 달리지 못할 것 같았다. 최대한 달릴 수 있는 데까지는 가야 해. 재희는 다짐과 함께 언젠가 한영이 서재에서 보고 있었던 서류를 떠올렸다. 그 서류에도 지도가 있었다. 그녀가 지금 들고 있는 지도의 한 부분을 확대한 지도였지만, 그녀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한영이 강릉에 소유한 부동산은 별장만이 아니었다. 고랭지 농업을 하는 경작지와 창고가 별장에서 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기에 여름에만 임대를 주는 곳이라고 언젠가 한영이 지나가듯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니 지금은 나대지와 빈 창고만 있을 것이지만-.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직감이 말했다.
한영은 그곳으로 갔다.
산중이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곳 창고로.
가쁜 숨이 연신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체인이 끊어진 자전거는 어딘지도 모를 산길에 내버렸다. 지도와 랜턴만 든 채 재희는 불 한 점 없는 산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달렸다.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겨울 날씨가 무색할 정도였다.
달려오느라 진을 뺐기 때문에 재희는 목적지를 거의 앞에 두고도 한동안 헉헉거려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급했다. 재희는 몇 번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상체를 간신히 일으켰다. 농지 옆에 달린 열 평 남짓한 슬레이트 건물이 보였다. 오십 미터 앞이었다.
그렇게 재희가 결사적으로 한 발을 내디딜 때였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죽은 듯 멈춰 섰다.
“…….”
숨조차 죽이니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창고 쪽이었다.
재희는 식은땀을 흘리며 불 한 점 없는 창고를 응시했다. 짐승 우는 소리일까.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재희는 그럴 수 없었다. 쥐어짜는 소리였다. 무언가 막힌 것처럼, 간신히 쥐어 짜내는 비명 소리.
“……!”
그러나 그 소리는 순식간에 멎었다.
퍽,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를 끝으로.
“…….”
곧, 쥐죽은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굳은 채 서서 재희는 문득 생각해 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가로등조차 없는 농경지를, 랜턴 하나에만 의지해 이곳까지 달려왔다. 그 불빛이- 이곳에서는 너무나 잘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게 왜? 어차피 저곳에 있는 사람은-.
재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창고는 열려 있었다. 재희는 그 안을 살폈다. 농기구들이 이곳저곳에 쌓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창고 건물을 돌아 뒤편으로 향했다. 섬뜩한 정적이 그녀의 걸음걸음에서 힘을 빼앗고 있었다. 점차 느려지는 걸음 끝에, 재희는 공터를 보았다. 그곳에도 아무도 없었다. 그저 잡다한 관목과 덩굴이 포위하듯 둘러싼 공터였다.
그리고 그 공터 한편에, 깊은 구덩이가 있었다-.
“…….”
재희는 점차 가빠지는 숨을 느꼈다.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옆에 쌓인 산더미 같은 흙만 봐도 구덩이가 무척 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방금 뒤집어엎은 땅에서 올라올 법한 비릿한 흙냄새가 났다.
아마 오랜 시간을- 파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재희는 더 생각하지 못했다. 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우두커니 선 채 구덩이 옆에 놓인 것들을 눈에 담았다. 흙더미 위에 대충 꽂힌 삽, 그리고 근처에 좀 더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여행용 가방.
눈에 익은 그 가방을 본 순간 재희는 구덩이 안쪽이 궁금해졌다. 궁금하다? 그것을 궁금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재희는 사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봐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충동처럼 일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검은 어둠이 내린 구덩이 안쪽을 응시했다. 파 내려간 흙 경계부만 보일 뿐, 바닥은 재희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발자국만 더 앞으로 가면 보일 것이다. 몇 발자국만.
그 몇 발자국을 옮기지 못해, 재희가 벌벌 떨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재희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
검은 형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재희가 공터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를 점한 채.
어둠에 익숙해진 재희의 눈이 그 형상을 구분해 냈다. 특색 없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어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싸구려 잠바를 걸치고, 손에는 가죽 장갑을 꼈다. 길게 뻗은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청바지일까. 어둠은 그것만큼은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그가 신은 운동화의 형체는 보였다. 그녀가 그 운동화를 보는 사이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흙의 색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시야였는데도, 재희는 이상하게도 바닥에 찍혔을 발자국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이즈만 알 수 있을 뿐, 무슨 운동화인지 쉽게 특정해 내지 못할 발자국이었다. 밑창이 떨어진 운동화였으니까.
재희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모자 아래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한 발자국 더 내디뎌 다가온 순간, 재희는 모자 아래로 형형히 빛나는 눈 한 쌍을 보았다. 기이한 안광이었다. 번들거리고 있는 것이, 마치 인간의 것 같지 않았다. 수풀 속에서 마주했다면 영락없이 짐승의 눈빛이라 여겼으리라. 푸른빛을 맹렬히 빛내며, 사냥감을 물색하는 짐승의 눈이라고.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재희는 울며 꼼짝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신형이 위압적이었다.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저 슬퍼 울었다. 그녀는 저 남자가 누군지 모른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눈을 한 이한영은- 몰랐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마재희는 이한영을 두려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화를 낼까 두려워한 적은 있어도, 이한영이라는 사람 자체를 무서워한 적은 없었으니까.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 한영이 손을 뻗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었다.
만년필 선물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한영의 눈빛을 떠올린다. 한순간이나마 드러냈던 증오 어린 눈빛.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던 냉혹한 눈빛도 기억해 냈다. 한영은 어쩌면 그때, 자신이 그 순간을 결코 놓칠 마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마재희와의 행복을 욕심냈을 것이고, 그를 둘러싼 친구들과의 즐거운 일상을 언제까지고 이어 나갈 욕심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영은 자연스레 한 사람을 떠올렸을까?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망쳐 버릴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그리고 그 방해물을 어떻게든 치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일까? 그 스산하던 눈빛은- 그런 결론에 다다른 눈빛이었나? 덫을 준비하는 사냥꾼의 눈처럼?
조짐은 분명히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 눈빛이 불길하다는 것을 분명 눈치챘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쉽게 그것을 잊어버렸던가. 재희는 몇 번이고 같은 후회를 반복했다. 왜 몰랐을까. 왜 미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한영의 욕망이 커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부추기기까지 한 게 자신이다. 그에 결국 한영은 자신이 정한 정도를 무너트리지 않았나. 어떻게든 마재희를 자신의 인생에 필요 이상으로 연루시키지 않으려 했던 이한영은, 그동안 그렇게나 노력하며 선을 그어 오며 지키던 규칙을 스스로 허물어트렸다. 학교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결혼을 약속했다. 그렇게나 강박적으로 피임을 고수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마재희의 안에 사정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비대해지고 잔뜩 부풀어 오를 대로 부푼 한영의 욕망이었는데, 그것을 김 부장이 어리석게도 건드린 거다. 자신이 건드린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터져 버릴지-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믿어 봐, 재희야. 그 사람은 너와 내게 손끝 하나 못 대.’
그렇게 웃으며 자신하던 한영에게 물어봐야 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그는 그 무렵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놓았던 것이리라. 아주 무섭고- 한번 수행해 버리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계획을. 그 계획 때문에 그는 고해 성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마저 잊기로 한 이상, 그에게는 더 이상 죽은 사람의 유지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
신부님들은 진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틀리기도 했다. 이한영은 심 교수를 배신할 계획을 품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행했다.
자기 자신을- 저 밑 지옥불 속으로 거꾸러트리는 것으로.
“……너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네.”
창고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지고서야 한영은 입을 열었다.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기는 조금도 없었다.
재희의 팔을 낚아챈 이후 한영은 계속 걷기만 했다. 팔목을 움켜쥔 손아귀 힘이 아팠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끌려가는 내내 재희는 한영의 뒤통수만 보았다.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 삼키는 소리를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다.
한영이 타고 온 자동차는 창고에서 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 주차되어 있었다. 한영은 그 앞에 그녀를 세우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타.”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권했다. 타, 재희야.
재희는 자동차에 오르지 않았다.
“……구덩이 안에, 뭐가 있어?”
희미한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꼈던가. 한영이 그제야 허울 같은 미소를 입가에 덧씌웠다.
“쓰레기.”
“…….”
“오래 버려 두면 악취가 사방에 풍길 거야. 어서 묻어야 해.”
다시 한영은 다정히 입가를 끌어 올렸다. 볼에 튄 핏자국이 미소와 함께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볼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어도 상관없다고 여긴 걸까. 재희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지기 시작했다.
“다 묻고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
“추워. 어서 들어가.”
“……죽였어?”
한영은 그저 무심해 보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재희는 다시 물었다.
“……김 부장을, 죽였어?”
“…….”
“아까 신음 소리를 들었어. 그런데…… 정말 죽인 거야?”
“재희야.”
한영은 잔잔히 웃었다.
“들어가.”
“…….”
재희는 그 순간 느꼈다. 고요한 미소 저 깊은 곳에서, 잔뜩 응어리진 무언가가 터져 나오기 직전이라는 것을.
몸이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은 것은 잠시였다. 재희는 한영이 지금 서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만약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이라면- 한영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충분히 납득시키고 달랜 후 다시 창고로 가도 될 테니까.
“……아직 살아 있지?”
“…….”
“김 부장, 살아 있는 거지?”
“안 들어갈 거야?”
재희는 직감했다. 아직 살아 있다.
아직 돌이킬 수 있다.
“……그러지 마. 들킬 거야.”
“…….”
“가족도 있을 거고……. ‘그쪽’ 일 하는 공무원이잖아. 그런 사람이 실종되었는데 아무도 찾지 않을 리 없어. 수사가 시작되면-.”
“-한 달 가까이 짠 판이야.”
한영이 메마른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쉽게 잡힐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어.”
“……한영아.”
“어쩌자는 거야. 지금이라도 풀어 주라고?”
농담을 들은 것처럼 한영은 웃었다.
“마무리만 지으면 모든 게 완벽해지는데, 그걸 내 손으로 망치라고?”
“……완벽한 건 없어.”
재희는 입술을 깨물고 지적했다.
“김 부장이 사라지면 네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 거야. 그런데도 너는 지금 네 땅에 김 부장을 묻으려고 하고 있잖아……!”
“이유 없이 실종된다면 그렇겠지.”
“…….”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명확하다면 아무도 날 의심하지 않아.”
“……누군가는 의심할 거야.”
“의심하더라도 나는 아니야. 저 남자를 납치하고 때린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
“죄가 많은 사람이야. 저 남자 하나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나 말고도 많거든. 그 사람들 중 가장 화가 많이 난 사람을 골랐어. 힘도 좋고, 원한도 깊고, 도중에 일을 그르치지 않을 사람으로.”
“…….”
“다가가서 귀에 혹할 만한 말을 속삭여 줬지. 그러니까 당장 저 남자를 납치하더라. 사흘을 가둬 놓고 때리고 굶기고……. 더 내버려 뒀다간 정말 죽일 것 같아서 내가 몰래 여기로 빼돌린 거야.”
한영은 웃었다.
“그랬더니 김 부장이 탈출한 줄 알고 외국으로 도망가더라.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이 나라에 미련 없는 사람이니까.”
“……나중에라도 돌아온다면 이 일의 증인이 될 거야.”
“의미 없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떻게 모를 수-.”
“-설마 조종당한 걸 알게끔 말을 흘렸을까.”
“…….”
“그 사람은 내 얼굴도 몰라. 자기 혼자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고.”
“…….”
“설명이 충분히 되었어?”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필사적으로 두뇌를 움직였다. 한영이 다른 사람을 움직여 대신 김 부장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을까? 변수는 많다. 한영이 철저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한영의 뜻대로 모든 상황이 굴러간다는 보장은 없다.
모든 일이 터지고 난 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 지금 어떻게든 한영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등을 돌리려는 한영을 재희는 붙잡았다.
“……김 부장이 네 얼굴을 봤어?”
“아니.”
“그럼 나중에 깨어나더라도 네가 그런 걸 모를 거잖아. 꼭 죽여야 할 이유는-.”
“재희야.”
서슬 퍼런 눈을 휘며 한영이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대화했으면 하는데.”
“……지금 너 이대로 보내면 나중은 없어.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문제 생길 일 없어.”
“아니야. 문제 분명히 생길 거야. 너 지금 전혀 이성적이지 않잖아.”
“…….”
“너답지 않아.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여기까지 왔어. 전문적인 수사관들이 여기까지 못 올 리 없잖아.”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러지 마. 그냥 풀어 줘.”
“…….”
“지금 기절한 상태인 거지?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그냥 다른 데다 풀어 주고 가자. 응?”
잠시 침묵하던 한영이 느릿하게 입가를 끌어 올린다. 이런 순간에조차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재희는 알 수 있었다. 한영의 인내심이 한계에 임박했음을.
그럼에도 재희는 설득을 계속했다.
“너는 원래 누구든 사람 다치는 거 싫어하잖아. 너 지금 이대로 가면, 분명히 후회할 거야. 평생 죄책감으로-.”
“-죄책감?”
웃으며 반문하는 한영의 목소리에는 더 숨기지 못한 냉기가 묻어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죄책감을 느껴. 내가? 저 남자한테?”
재희는 멍하니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이 헛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 남자와 처음 만났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할머니와 같이 살기 전이었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을 때였어. 그리고 그 당시에는…….”
느릿하게 이어진 말은 무미건조했다.
“……남자들이 어머니를 자주 찾아왔는데, 김 부장도 그중 하나였어. 그때는 ‘김 부장’도 아니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
“…….”
“이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 이사 가는 곳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어머니에게 모욕적인 욕을 하고 손가락질했어. 계속해서 집에 들락거리는 그 남자들 때문에.”
한영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있던 재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말속에 모습을 은근히 드러낸 진실이, 소름 끼칠 정도로 아픈 상처를 암시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못 버티셨지. 날 할머니께 맡기고 도망가셨어.”
“…….”
“다른 남자들은 어머니가 사라지자 날 잊었지만, 김 부장은 나를 잊지 않았어. 계속해서 찾아와 책이나 학용품을 선물했지. 나는 그 선물들이 대가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예상대로 중학교 입학할 무렵이 되니 본색을 드러내더라. 내게, 동네 형들과 친해지라는 ‘부탁’을 해 왔어.”
“…….”
“그래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어. 부탁을 거절하자 물 받은 욕조에 내 머리를 집어넣었을 때도, 이해할 수 있었어.”
“아…….”
재희의 눈에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한영이 웃으며 가죽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재희의 눈가를 닦아 주며, 그는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그래, 이해했지.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잘 아니까. 남자들이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 기억하니까. 숨 막히는 것 정도에 엄살을 부리기에는, 어머니께 죄송하니까.”
한영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런데 재희야, 이번엔 혼자 이해하고 넘어갈 선을 지났잖아.”
“……한영아.”
“김 부장이 준 것과 똑같은 선물을 네게서 받은 날, 그 사람에게 찾아가 물어봤어. 선물의 의미가 경고인가, 아니면 장난인가. 김 부장이 겉보기엔 안 그래 보여도 장난을 좋아하거든. 그리고…….”
형형한 눈동자를 빛내며 한영이 웃었다.
“그 남자는 장난이라고 대답했어.”
“…….”
“널 보니 내 어머니가 잠깐 생각나서, 장난 좀 쳐 봤다고.”
“…….”
“그래서야.”
나긋이 눈을 휘며, 그는 속삭였다.
“……그게 그 개자식이 죽어야 하는 이유야.”
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재희의 볼을 타고 흘렀다.
“너나 안드레야 신부님이나 자꾸 본성이나 죄책감 운운하지만, 난 그런 거창한 담론은 필요 없어.”
무의미하거든. 나 같은 종자한테는.
한영은 그렇게 속삭이며, 자상히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물을 거둘 수 없었다. 재희는 감히 한마디 말도 뗄 수 없었다. 한영은 고개를 숙여 차가운 입술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차마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그녀를 둔 채, 이한영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재희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김 부장이 호텔에서 어린 한영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 댈 때 한마디 말도 못 한 자신이 미웠다. 이제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자신을 증오했다. 한영이 숨긴 상처도 모른 채 혼자 꽃밭에서 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주변을 돌아보았다면. 조금 더 일찍 한영이의 속내에 있는 아픔을 느끼고 덜어 주려 했다면.
그랬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한영아.”
속삭이듯 조용한 부름이 열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도 닿았을까. 한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재희는 간절히 부탁했다.
“……가지 마.”
이제는 그 말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매정한 말인지 알았다. 그럼에도 재희는 다시금 간청했다. 그러지 마.
“……그런 사람 때문에 네 인생 망치지 마.”
“망치다니?”
한영이 짐승의 눈으로 웃었다.
“나는 망가진 걸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거야.”
멀어지는 등을 보며 재희는 망연자실했다. 틀렸어. 이제는 진짜로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 한영의 의지는 굳건했다. 더욱이 그 의지를 억지로 꺾고 김 부장을 살려야 할 명분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재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 부장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가 다시는 한영을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이대로 김 부장을 묻어 버리면, 그는 다시는 그들의 인생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자유.
한영은 진정으로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의 삶 전반에 드리워졌던 김 부장의 그림자를 걷어 냄으로써.
“……알았어.”
재희는 차 시트에 걸치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계속해서 달려왔기 때문에 생긴 근육통일까, 아니면 이제부터 하려는 말 때문일까.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럼에도 재희는 느릿느릿 한 걸음씩 떼어 내며 말했다.
“……대신 내가 하게 해 줘.”
한영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
“내가 할게.”
재희는 부들거리는 몸을 어떻게든 꼿꼿이 폈다.
“그냥 파 놓았던 흙만 다시 제자리로 메우면 되는 거잖아.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재희는 구덩이 아래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처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해도 들키지 않을 거잖아.”
“…….”
“한영이 네가 그랬잖아. 완벽한 계획이니까 아무도 모를 거라고.”
“…….”
“그러니까 내가 해도 되잖아. 내가 할래.”
“……얕은 수 쓰지 마.”
한영의 눈동자 속에 훅 화기가 번졌다.
“……정말 기분 더러워지려고 하니까, 하지 마.”
“난 평생 이 일 비밀로 할 자신 없어.”
“…….”
“내가 죽인 게 되면 비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할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재희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한영이 정말로 원하는 거라면, 재희는 추악한 사내 위로 흙을 덮어 버리는 것 정도는 능히 할 수 있었다.
이한영이 죽여서는 안 된다. 저 남자와 전혀 관계없는 그녀가 죽여야 했다. 그래야 이 일이 세상 밖에 알려졌을 때 한영을 보호할 수 있다. 남자를 죽인 범인이 한영이 되어 버리면, 기관에서 나설 것이다. 단순한 원한 관계로 상급자를 죽인 게 아니라고 애먼 의심을 할 수 있다. 일단 의심하게 되면 그 후는 답이 없다. 그렇게 되면 한영의 죄는 더 무거워진다.
재희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흔들리던 발걸음에 점차 힘이 실렸다. 내가 할 거야. 할 수 있어. 그런 다짐과 함께 재희는 한영을 스쳐 지나갔다. 그보다 앞서가려고 했다.
그러나 덥석 팔목을 잡는 손이 있었다. 거칠게 몸이 돌려졌다.
재희는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살기등등한 한영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눈물 맺힌 얼굴로 똑바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왜 말리는 거야?”
한영은 말이 없었다. 그저 싸늘한 얼굴로 재희에게서 몸을 돌렸을 뿐이다. 팔을 잡은 채였기 때문에 재희는 끌려가듯 걸었다. 다시 차 쪽으로 가는 한영에게 버티려 했지만 그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재희는 씨근거렸다.
“……정말 계획이 완벽하다면, 누가 하든 상관없는 거잖아.”
악다구니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 줌 남은 이성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있는 사람이 정말 죽어도 되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잖아, 내가 죽여도 되는 거잖아……!”
금세 자동차 옆까지 끌고 간 한영이 문을 열었다. 뒷좌석으로 밀어 넣으려는 한영에, 재희는 결사적으로 버텼다. 한영은 차 열쇠를 꺼내고 있었다. 재희는 발버둥을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한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았다. 그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희는 방법을 달리했다. 벗어나려던 것을 그만두고 오히려 한영에게 매달렸다. 아무리 체급 차가 있다지만 성인 여성의 무게가 온몸으로 부딪혀 매달리는 것이었다. 흔들릴 법도 하건만.
한영은 되레 잘되었다는 듯 그대로 재희를 차 안으로 밀어붙여 눕혔다.
“아……!”
안 돼.
차 시트에 머리가 닿았다 느낀 순간, 재희는 한영의 목에 팔을 얽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악착같이 두 다리를 한영의 허리와 허벅지에 얽으려 했다. 한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희의 팔을 잡아떼고 얽힌 다리를 풀어냈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를 붙잡고 떼어 내려 씨름할 때마다 자동차가 격렬히 흔들렸다.
점차 마음이 급해졌던 걸까. 처음에는 힘 조절을 하는 것 같던 한영의 손아귀 힘이 점점 세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그가 본격적으로 힘을 쓴다면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의 숨은 이미 벌써 목 끝까지 차올랐다. 수 킬로미터를 달려서 여기까지 왔다. 한계에 부딪힌 몸이 덜덜 떨렸지만, 재희는 죽을 각오를 한 사람처럼 한영의 허벅지에 두른 다리를 힘을 주어 당겼다. 벌려진 다리 사이로 한영의 하반신이 닿았다.
“아…….”
재희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단단한 감각이 느껴졌던 것이다. 한영은 어느샌가 발기하고 있었다. 가벼운 일어섬이 아니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흥분한 사람처럼 커져 있었다.
그러나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한영의 발기를 맞댄 몸으로 느낀 순간, 재희는 자신의 몸 또한 욱신거리며 젖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온 힘을 다해 한영의 허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재희는 자신이 한영의 귓가에 연신 야릇한 신음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자각했다.
한영도 마찬가지였다. 재희의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한영의 목에서 끓는 소리가 일었다. 그의 사나운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급하게 달려 나오느라 미처 몰랐던 얇은 치마가 발라당 뒤집혀 아래 둔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음모가 뒤엉킨 밀지를 본 한영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왜 그렇게 상황이 흘러갔는지 재희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둘 다 미친 것이 틀림없다. 한영은 재희의 상의 셔츠를 뜯어 버렸고, 재희는 허겁지겁 한영의 바지 지퍼를 풀었다. 발기한 성기가 달빛 아래 드러나자마자 그의 허리에 감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한영은 그 순간만큼은 거스르지 않고 몸을 부딪쳤다. 재희와 한영의 입술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졌다.
정신없이 한영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재희도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장단을 맞췄다. 자동차가 격하게 양옆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사나운 행위였다. 폭력적인 힘이었다. 흥분과 고통이 한데 뒤섞여 재희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를 계속 붙잡으려 했다. 한영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다 붙잡지 못하게 결박했다.
재희의 두 팔뚝을 한 손으로 그러쥘 정도로 그의 손은 컸다. 재희는 팔짱 낀 자세 덕분에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음란하게 흔들리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한영이 거세게 밀어붙일 때마다 가슴 두덩이 찰싹거리며 팔뚝에 부딪혔다. 그 광경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한영이 낮게 욕을 중얼거렸다.
그는 시종일관 강하고 빨랐다. 완급 조절을 할 줄 모르는 이처럼 몰아붙이기만 했다. 토정이었다. 함께 맞춰 가는 행위가 아니라, 악랄하게 제 정욕만 쏟아 내는 몸짓. 원수를 뒤에 두고도 허리를 흔들 수 있는 이한영이 제정신이 아닌 걸까, 아니면 그 몸짓에도 흥분하는 마재희가 더 미친 걸까. 재희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아…….”
종래에 한영이 사정했을 때, 재희는 힘겨워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 아쉬운 한숨을 흘리고 있었다. 한바탕 휩쓸고 간 정열이 헉헉대는 숨결에 아직 남았다. 머리가 멍했다. 눈가 또한 엉망으로 축축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손을 움직여, 한영의 옷자락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낮게 숨을 고르고 있던 한영이 돌연 숨을 멈췄다.
“.......”
갑작스러운 정적이 이상해 재희는 몽롱하게 풀린 눈을 움직였다.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한영이 만족감을 드러내며 웃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옷을 찢은 순간 보였던 사나운 얼굴을 아직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 사내니까.
그러나 그녀의 예상은 틀렸다.
그녀를 눈물 짓게 했던 인외의 눈이 아니었다. 그녀가 익히 아는 눈빛이었다. 재희는 한영이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왜-?
“……한영아?”
어스름한 달빛 아래 한영의 시선이 재희의 몸을 천천히 누비고 있었다. 재희는 그의 시선이 닿는 부위마다 통증을 느꼈다. 한영이 한 손으로 그러쥐었던 두 팔뚝이 가장 먼저 시큰거렸다. 그에게 어떻게든 매달려 보려 애를 쓰다 차체에 부딪힌 무릎과 허벅지가 그다음으로 통증을 알렸다. 한영의 성기를 갑자기 받아 내야 했던 곳에서는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그렇게 한영은 물끄러미 재희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한영아.”
재희는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다고 연신 말해 주었다. 한영은 무표정했지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한영아.”
“…….”
“한영아?”
한영은 그 부름조차 듣지 못했다.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재희는 다시 한번 한영을 불렀다. 그제야 한영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재희는 그 눈을 보며 말해 주었다.
“괜찮아.”
“…….”
“나 정말 괜찮아.”
고요한 눈을 한 한영이 한동안 재희의 눈을 응시했다. 깊은 시선이 아득해, 재희는 젖은 눈으로 단호히 말했다. 정말 괜찮다고. 피부가 약해 멍이 잘 들 뿐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고통스러운 관계는 아니었다고.
저 멀리 구덩이 바닥에 있을 한 남자의 육체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재희는 한영의 영혼을 위해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그러나 한영은 말이 없었다. 한없는 침묵이었다.
구덩이 안에 고꾸라져 있을 남자의 일은 어서 마무리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도와주겠다고 다시 말했지만, 한영은 괜찮다고 답했다. 꽁꽁 묶어 놓은 데다 구덩이가 깊어서,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할 거라고. 김 부장에 대한 원한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그저 무의미한 무언가를 대하듯 그는 김 부장에게 무심해져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남자를 그대로 구덩이에 버려둔 채 한영은 재희를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내내 김 부장 때문에 불안해하는 재희를 달래 몸을 씻겼다. 그는 필요한 말이 아니면 침묵을 지켰다. 재희도 지쳐 말할 기운이 없었다.
불빛 아래에서 본 몸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 처참했다. 온몸이 멍 자국이었다. 한영이 잡았던 팔목과 팔뚝은 벌써 검푸른 멍이 잡혀 있었다. 재희는 첫 경험에서도 보지 않았던 피를 보았다. 한영이 왜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았는지, 재희는 그제야 이해했다.
한영은 약을 발라 주는 내내 재희의 상처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래서 재희는 몇 번이고 한영에게 말해 주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정말 괜찮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내내 재희는 새로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영의 눈이 문제였다.
이한영의 눈이- 너무나도 깨끗했다.
마치 모든 것을 털어 낸 사람처럼.
피곤한 밤이었다. 그러나 쉽게 잠들어서는 안 되는 밤이었거늘.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재희는 화들짝 잠에서 깨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
한영이는?
침실을 둘러보았다. 한영은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조차 없이 조용했다.
놀란 재희가 다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였다.
“일어났어?”
“……아.”
한영이 문으로 들어오며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재희는 그의 미소에 안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해했다.
“……거기, 갔다 온 거야?”
“응.”
재희는 묻고 싶었다. 어떻게 했어?
정말 묻어 버렸어?
“……한영아.”
“피곤하잖아. 더 자.”
차분히 한영이 권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평온히 웃고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더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저 한영의 마음만 걱정하기로 했다.
“……괜찮아?”
“괜찮아. 너는 몸 어때.”
“나도……. 나는 아까부터 괜찮았어.”
“그래도 약 더 발라 줄게. 잠깐만.”
“……응.”
서로의 밑바닥까지 본 밤이 지나고서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남은 이틀 동안 한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강릉의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바다의 모래사장 위를 나란히 걸었다. 그녀를 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처럼 평온해 보였고, 또 잘 웃었다.
그러나 재희는 때때로 느꼈다. 한영의 눈동자는 그 이틀 사이 홀로 십 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눈이었다. 한영은 이제까지의 이한영과 전혀 다른 인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눈빛에 모종의 예감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재희는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속으로 간절히 중얼거렸다. 혼자 앞서가지 마. 같이 가. 나와 같은 시간 속에서 발맞추어 가자.
혼자- 너무 멀리 가 버리지 마.
일주일 후, 재희는 홀로 깼다.
한영의 침실에는 쓸쓸한 침묵만 감돌았다.
재희는 한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머리맡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세 번째 손가락에는 야속하게도 붉은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