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0)

13장.

한영 없는 시간이 흐른다. 재희가 생각해 보기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영이나 재희나 오랫동안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 하루 이틀 못 보는 날은 있을지라도, 주 단위를 넘어가는 외출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중독된 사람처럼 재희는 처음 며칠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한영은 저녁마다 전화를 주었다. 재희의 일상에 가장 중요한 계획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재희는 그 시간만 바라보며 지냈다. 그녀의 외로움을 안다는 듯 꾸준히 찾아 주는 친구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재희야, 이한영만 목 빠지게 기다릴 거야? 너도 네 생활이 있어야지.”

그렇게 인혜가 걱정스레 말을 건넸을 때, 재희는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 한영이 사라지고서야 그들이 상당한 시간을 계속 붙어 지냈다는 것을 자각했다. 계속해서 강렬한 자극에만 취해 다니느라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어쩌면 심 교수님도 인혜와 똑같은 걱정을 한 것일까?

재희는 심 교수의 의도를 그렇게 추측했지만, 구할 수 없는 답이었다. 재희는 그래서 인혜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한영이 없는 시간을 묵묵히 법전을 읽는 것으로 보냈다. 그리고 가끔은- 창문에 단 풍경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영이 떼어 놓았던 풍경을 다시 걸 생각을 한 것도 결국 그리움 때문이었다.

“재희네. 책 사러 왔어?”

“……안녕하세요.”

상대가 서점이라는 장소를 인식해 숨죽여 인사를 건넨 것처럼, 재희도 조용히 인사했다. 집 두 채 건너 사는 이웃은 손을 흔들고 금세 사라졌다.

재희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읽었다. 법률 용어에 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근래 본 것이 좀 있다고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녀는 그렇게 몇 권을 더 들여다보고는 헌법과 관련한 기본 서적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모처럼 구매한 책은, 막 서점을 나서자마자 못 쓰게 되었다.

“……아.”

재희는 부딪힌 어깨를 문지르며 떨어트린 책을 보았다. 책이 하필 진창에 떨어졌다. 검고 더러운 물이 묻었다.

“이런, 미안합니다.”

부딪힌 상대가 서둘러 책을 집어 들었지만, 이미 회생 불가다.

재희는 쓸모없어진 책을 묵묵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눈을 크게 떴다.

“엇, 어디서 본 얼굴인데…… 아, 만년필! 압구정에서 도와준 그 학생이구나?”

이런 우연이 있냐는 듯, 말쑥한 중년 사내가 웃었다.

“압구정 백화점에서 만났는데, 학생은 기억이 안 나려나?”

“……기억나요.”

재희는 가까스로 대꾸했다. 책을 향해 뻗으려던 손이 굳어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안하네, 이 책 못 쓰게 된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러나 남자는 선물 골라 준 값을 이렇게라도 갚겠다며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재희는 서늘히 식는 등허리를 느끼며 유리창 너머를 응시했다. 남자가 서점 직원에게 책을 보여 주며 무어라 말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압구정에 있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얼마나 많은 서점이 있는지 재희는 떠올려 보았다. 백화점 직원의 손도 떠올렸다. 재희가 고른 만년필과 똑같은 것으로, 남자의 선물도 포장해 주고 있었던 직원의 고운 손. 그리고-.

아들의 선물을 사 주고 싶다고, 재희가 고른 것과 똑같은 만년필로 골라도 괜찮겠느냐 물었던 저 남자의 목소리.

그녀의 의식은 흐르듯 흘러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자극적이고 행복한 시간 속에 묻어 두었던 위화감 어린 순간이었다. 그녀가 건넨 생일 선물 앞에서, 한영이 한동안 보였던 정적을 떠올린다. 그 무표정하던 얼굴을 회상했다.

숨이 막힐 것 같던 그 순간, 한영이 찰나지만 격하게 드러냈던- 맹렬한 눈빛도.

“다행히 똑같은 책이 있다네. 여기 받아, 학생.”

금세 서점을 나와 남자는 새 책을 건넸다. 재희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툼한 손이다.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는 얼굴과 달리, 우락부락한 손.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학생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뚝뚝하군. 애인이 애 좀 타겠어.”

돌연 날아온 한마디 앞에서, 재희는 자신이 해야 할 대답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애인 없어요.”

“이런, 내가 실례했어. 난 당연히 만년필이 애인 선물인 줄 알았지.”

넉살 좋게 웃는 얼굴을 보자니, 불쑥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았다. 재희는 그것을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아드님은, 선물 받고 좋아하셨어요?”

“그럼. 웬일로 제대로 된 선물이냐며 코웃음을 쳤지?”

“…….”

“아들놈이 원래 싹수가 노래, 학생. 사내자식들이 다 그러지. 표현이 서툴러.”

남자는 애정이 얼핏 스민 얼굴로 웃었다.

“선물 받을 때는 시큰둥하더니, 며칠이나 지나서야 불쑥 찾아와 감사 치레를 하더라니까. 선물 잘 받았다고. 그거 받고 앞으로 말 좀 잘 들었으면 좋겠어.”

“…….”

“그런데 학생이 법학과였던가?”

남자는 재희가 옆구리에 꼭 붙들고 있는 헌법 책에 흘끔 시선을 주었다.

“……아니요. 그냥 흥미가 생겨서.”

“쓸데없는 것에 관심 가질 수 있을 때가 그때뿐이지.”

“…….”

“공부 열심히 해, 학생. 다른 대학생들처럼 데모하고 다니지 말고.”

남자는 까딱 목을 숙였다. 백화점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중한 인사였다. 재희도 고개를 숙였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등을 돌렸다. 그대로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서점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은 순간, 재희는 자신의 걸음이 거의 뛰다시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희는 침착하려 했다. 어떻게든 꼿꼿이 버티려 노력했지만-.

횡단보도 앞에서 결국 멈춰 버렸다.

뜨거워진 눈가를 숨기며 이를 갈았다.

“……악마.”

한영이 만년필을 본 순간 드러냈던 증오.

그것이 누구에게 향했던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제야.

“……당신이구나.”

당신이었어.

이한영을, 그 진창 같은 세계로 끌어들인 ‘삼촌’이.

툭툭,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묻혀 한참을 감정을 삭였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거리 이곳저곳에 울리는 탄성 소리가 있었다.

볼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참담함은 짙은데, 눈치도 없이 시야에 하얀 솜덩이가 살랑거린다.

첫눈이었다.

성탄절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포장지도 같고, 내용물도 똑같은 선물을 두 개나 받았을 한영을 떠올린다. 한영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남자의 말에 비추어 보면, 그의 선물을 생일 며칠 전에 먼저 받았을 테니 웃었을까? 남자가 말한 대로, 웬일로 제대로 된 선물이냐며?

남자의 선물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을 한영은, 그럼에도 예의 바른 한영은, 그 선물 앞에서 고맙다는 말을 했을까.

재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재희의 선물을 본 한영이 한순간 드러냈던, 그 격렬한 분노를. 그는 그 순간에야 깨달았던 것이리라. 재희의 것과 똑같은 선물을 앞서서 건넨 남자의 의도를.

그것은 경고였다.

한영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언제든 접근할 수 있단 경고.

동시에, 축복받고 행복해야 하는 날조차 쉽게 망가트려 버리는 비열함이었다.

재희는 떨리는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렸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머리는 주장하고 있었다. 정황뿐이다. 추측일 뿐이다. 남자가 ‘삼촌’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어쩌면 아주 우연하게 상황이 맞아떨어진 것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남자야.”

그 남자가 ‘삼촌’이야. 재희는 확신했다.

그 남자가 왜 갑자기 내게 접근한 걸까. 설마-. 한영이가 한 일을 남자가 눈치챈 걸까? 그래서 협박이라도 하는 걸까?

입술을 깨문 채 재희는 맹렬히 두뇌를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같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에는 이른 것 같았다. 만약 남자가 한영이 사제단에게 사진을 건넨 일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경고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관을 배신한 죄를 물어, 한영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끔직한 가능성에, 재희는 몸을 떨었다.

홀로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재희는 그래서 한영의 전화를 기다렸다. 몇 번이고 전화기 근처를 서성거렸는지 한영은 모를 것이다. 아니, 그는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날 저녁, 한영의 전화는 걸려 오지 않았다.

한영의 전화를 기다리던 재희는 마음이 급해 먼저 호텔에 연락했다. 그러나 호텔의 직원에게선 잠시 방을 비운 것 같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재희의 속이 바짝바짝 타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재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가뜩이나 ‘삼촌’으로 의심되는 남자의 등장으로 심란한 와중이었다. 그런 마당에 한영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매일 저녁 연락을 주던 한영이, 갑자기.

재희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잡혀간 걸까?

역시- 사제단 일을 들킨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재희는 가장 먼저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친구들이 한영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걱정만 하실 뿐, 이렇다 할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할 것이다. 한영을 잡아간 쪽이 국가 기관인데 누가 어떻게 구제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무도 한영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재희는 그간 어떻게든 외면하려던 진실을 맞닥트리고 절망했다.

재희는 사위가 점차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 너머 한영의 집이 보였다.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집을 보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풍경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겨울이라 계속 창문을 닫아 놓아, 그 소리가 울린 적이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풍경을.

그렇게 얼마나 풍경을 보았을까.

서서히 단단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고작 하루였다.

한영이 전화를 깜빡할 수도 있었다.

재희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절망만 할 수는 없었다. 한영이 무사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규정상 불가능합니다.”

한영이 묵은 호텔의 프런트 직원은 부드럽지만 완고했다. 투숙객의 방을 함부로 열 수 없다 했다.

“외출한 것은 확실한가요?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더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방 안에 쓰러져 있을지도 몰라요. 걱정되어서 그래요. 장기 투숙한 손님에게 문제가 생기면 호텔도 곤란해지잖아요.”

“죄송합니다.”

프런트 직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재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쪽지는 전해 줄 수 있죠.”

“물론입니다.”

재희는 직원이 건넨 메모지에 몇 글자 적었다. 전화 달라는 짧은 문장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얌전히 재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와주지 못해 죄송하단 말을 하는 직원에게 쓰게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멀어지는 척, 직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계를 늦춘 직원은 그녀가 지켜보는 것도 모른 채 메모지를 들고 뒤로 돌았다. 호텔의 열쇠들이 놓여 있는 원목 수납장 중 한 곳에 직원은 메모지를 꽂아 놓았다.

재희는 메모지가 놓인 곳이 몇 호실인지 확인했다. 305호.

바로 그녀는 몸을 돌렸다. 호텔 승강기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섞였다.

일단 움직이고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재희는 한영이 호텔 방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투숙객이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던 호텔 직원이었다. 그런 사고는 없을 거란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그렇게 담담했던 것이리라. 아마 직원은 한영이 호텔을 나가는 것을 직접 확인했거나, 아니면 한영의 방이 비어 있는 것을 이미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한영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재희는 305호 명패가 붙은 문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문은 잠겨 있을 것이다. 한영이 열쇠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녀가 한영의 방을 살펴볼 기회는 없을 것이다. 한영이 자의로 나간 것인지, 혹은 끌려간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지금으로선 없었다.

무작정 움직인 터라 이후의 일을 생각해 놓은 게 없었다. 재희는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느릿느릿 문을 노크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재희는 잠시 기다리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 한편으로는 계속 고민하면서였다. 다른 생각에 신경이 쏠려 있을 정도로, 재희는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쇼?”

재희는 멍하니 문을 연 남자를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자기 얼굴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문을 좁게 열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찡그린 채였다.

문간에 기댄 팔의 근육이 우락부락했다.

“누구시냐고?”

성가셔하는 질문이 다시 들린 순간, 재희의 입에서 툭, 거짓말이 튀어나갔다.

“……아, 여기 김경신 씨가 묵는 방 아닌가요?”

“아닌데.”

“……죄송합니다.”

재희는 떨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연거푸 죄송하다 고개를 꾸벅거리는 재희의 시야로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잠시 떨렸으나,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문은 쾅, 하고 재희의 코앞에서 닫혔다.

재희는 오래 머무르지 않고 움직였다. 복도를 걸었다. 승강기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위층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승강기는 도통 내려올 생각을 안 했기에-.

재희는 급하게 몸을 틀었다. 승강기 옆에 있는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었다.

그대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음이 급해 몇 번이고 굴러 떨어질 뻔했다. 호텔 직원이 당연하다는 듯 방문을 여는 것을 거절했을 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봤어야 했다. 호텔 직원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방 안에 투숙객이 있다는 것을.

재희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305호 문을 열어 주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 안을 보면 안 된다는 듯, 극도로 문틈을 좁히고 있던 모습. 경계하던 눈빛. 그 위압적이던 팔의 근육.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 보았던 신발.

현관에 놓여 있었던, 한영의 신발.

“……아직 거기 있어.”

한영은 그 방에 있다. 지금, 그 남자와 함께.

재희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한시가 급했다. 어제부터 한영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어제부터 한영에게 전화를 걸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는 의미다. 어쩌면- 많이 다쳤을지도 모른다.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해.

재희는 보는 눈을 생각해 잰 걸음으로 호텔 로비를 가로지르면서도 신속히 판단했다. 호텔 직원들을 믿을 수는 없다. 어쩌면 다 한패일 수 있다. 혹 직원들이 무고하다 해도 개입을 꺼릴 것이다.

외부 사람을 불러오자.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불러올 수는 없으니까- 친구들을 부르자. 갑자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가면 누구든 당황하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온 친구들인 척, 한영이를 빼내자.

그렇게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재희가 호텔 정문 앞에 설 때였다.

재희는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극도로 예민해진 그녀가 화들짝 몸을 틀 때였다.

“또 보네, 학생.”

재희는 흔들리는 눈을 들었다.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였다. 어제 본 그 남자.

한영의 ‘삼촌.’

“……당신.”

“인연은 인연이군. 여기서 다 보다니. 날씨가 춥지?”

가까워진 크리스마스 덕분에 호텔 로비에는 성탄곡이 흐르고 있었다. 입구로 사람들이 들어오며 매서운 바람이 흘러들어 왔다. 살얼음 같은 날씨였다. 숨결 한 김 한 김에 서리가 맺히는 듯했다. 모두가 몸을 움츠리고 칼바람을 피하려 애쓰는데, 남자는 달랐다. 여느 회사원들처럼 정장 위로 검은 코트를 걸친 그는 조금도 움츠리지 않았다.

재희는 그 당당한 자세가 소름 끼쳤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학생과 똑같아. 이한영이를 보러 왔지.”

“…….”

“날씨도 추운데, 커피나 함께하며 얘기할까?”

재희는 떨리는 손을 꾹 주먹 쥐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해.

“……무슨 소리예요? 저는-.”

“-일 크게 만들지 마, 학생. 그건 정말 이한영이를 매장시키겠단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남자는 위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듯 호텔의 커피숍이 있는 곳을 펼친 손으로 가리켰을 뿐이다.

재희는 그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남자의 걸음을 따라, 비틀비틀 걸었다.

호텔 커피숍은 따스했지만, 재희는 소름이 돋아 가라앉지 못하는 피부를 내내 의식했다.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확인하고,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는 출입구까지 확인했다. 그렇게 바짝 곤두선 채 창가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녀는 숱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방법을 모색했다.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일지 모른다.

“소개가 늦었지?”

남자는 웃으며 정장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명함을 올려 두었다.

[** 무역 상사 부장 김종석.]

재희는 가만히 명함에 적힌 이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가짜야. 이 명함은 가짜일 거야.

“김 부장이라고 불러도 돼.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까.”

재희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을 말없이 보았다. 인상이 흐릿했다. 거리에서 지나가다 보면 놓치기 십상인, 흔한 인상. 평범한 아저씨.

그즈음 커피가 나왔다.

재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남자, 김 부장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즈음에는 재희도 그 시선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녀는 언뜻 자신의 당돌함이 켜켜이 묵은 울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만 없었다면.

당신만 아니었다면.

재희는 조용히 눈꺼풀을 내리떴다. 혹여 드러날지 모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제가 왜 아저씨를 자주 봐야 해요?”

“전부터 말하던 아들놈이 누구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이한영이는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 애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자주 봐야지.”

“……한영이에게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

“그 애는 지금쯤 방에서 글이나 끄적거리고 있겠지.”

재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김 부장을 주시했다. 머릿속은 바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은 남자가 입을 계속 열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 걸까. 저 남자의 뭐를 믿고? 저 남자가 떠들어 대는 사이, 한영이 정말 위험해진다면?

“……아저씨 말을 믿을 수 없어요.”

재희는 조용히 말했다.

“한영이가 무사한지 확인해 줘요. 그러면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을게요.”

“……흠, 그렇다면.”

김 부장은 옆 좌석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었다. 재희는 그가 가방 속에서 커다란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무선 전화기였다. 벽돌만 한 전화기의 등장에, 재희는 낙담했다. 그녀는 김 부장이 한영의 얼굴을 직접 보여 주기를 바랐다.

“나야. 애는 뭐 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재희의 귀에 희미하게 잡혔다. 305호실 문을 열던 남자의 목소리였다.

-잘 있습니다. 이놈 대학 물 먹은 놈치고 말이 통하는 새낀데요?

그 말에 김 부장이 얼핏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말 섞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심심한 걸 어쩝니까?

“……잠깐 바꿔.”

재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곧 다른 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귀에 익은 차분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재희의 숨결이 흐트러졌다. 한영이 목소리다.

흔들리는 재희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김 부장이 수화기 너머로 물었다.

“같이 있는 놈이 잘 대해 줘?”

-네. 재미있는 분이네요.

“필요한 건.”

-없습니다.

“그래.”

그대로 김 부장이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영이 물었다.

-어디입니까?

“호텔 커피숍.”

-거긴 왜요?

“커피숍에 커피를 마시러 왔겠지?”

수화기 너머로 잠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아, 그래요? 중년 아저씨 혼자 청승맞네요.

“까불지.”

-잘됐네요. 그럼 오실 때 차가운 캔 음료 좀 사다 주실래요. 필요할 것 같은데.

김 부장이 전화를 끊으며 재희에게 물었다.

“학생, 감금당한 인간이 이렇게 상관처럼 구는 거 봤어?”

급격하게 밀려들어 오는 안도감에 재희는 얼굴을 문질렀다. 그제야 한쪽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오다 삐끗했던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러나 재희는 언제든 상황이 최악으로 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았다.

“……한영이를 가둔 것은 맞잖아요. 뭘 원하세요.”

“학생을 만나 보고 싶었어.”

재희는 말없이 김 부장을 올려다보았다. 뒤늦게야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학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어.”

“…….”

“나한테는 학생이 얼마나 아는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거든.”

김 부장은 이제 마재희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고작 하루 연락이 끊겼다고 호텔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한영의 방에 있는 낯선 남자를 보고 바로 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러 달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어제오늘 보인 행동들은 전부 김 부장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다.

재희는 등허리가 긴장으로 굳는 것을 느꼈다. 무마해야 했다. 어떻게든.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말 몰라, 학생?”

“제가 어떻게 알아요.”

“모른다면 스스로 생각해 봐, 학생. 학생은 지금 이 상황이 다 어떻게 보여?”

재희는 너무 급하게 대답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돈을 노리는 것 아닌가요?”

“…….”

“원하시는 게 뭐든 다 들어드릴 수 있게 제가 한영이 설득할게요. 그러니 한영이 그만 풀어 주세요. 한영이 친척들이 보낸 거 맞죠?”

“바로 이한영이 친척들을 짚는군?”

“…….”

“언제 또 친척들이 이한영이 건드렸었나?”

“……가끔 전화를 해서, 협박을 하는 걸 들었어요.”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그 양반들은.”

재희는 가만히 김 부장을 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한영의 친척들을 불쾌해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이에요?”

혼란스러워져 그녀는 중얼거렸다. 김 부장은 이한영의 위기를 공략해 제 프락치로 포섭한 야비한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저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반칙이었다.

“삼촌이라고 했잖아. 여섯 살 때부터 보고 지낸 인연이야.”

여섯 살이라면, 재희가 한영을 만나기 전이다. 한영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시절.

“증명이 필요해?”

“…….”

“이한영이 뒤통수에 상처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머리숱 때문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상처. 학생은 알고 있어?”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놀다 떨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설명하기 곤란했나 보군.”

“…….”

“놀이터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가 아니야.”

“…….”

“두들겨 맞다 쓰러져 가구에 머리를 박은 거야.”

뭐?

“상처가 생겼을 당시에는 정말 위험했지. 머리에서 피가 철철 나서, 의식도 없던 애를 내가 업고 병원까지 달렸단 말이야.”

“…….”

“그 애는 내가 아니었으면 그때 죽었어.”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애 옆구리에 화상 자국이 있는 건 알아, 학생?”

“…….”

“이한영이가 그건 뭐라고 설명했지?”

김 부장이 입매를 뒤틀며 물었다.

“그게 담뱃불 때문에 생긴 상처라고, 솔직하게 말해 줬을 것 같진 않은데?”

아.

“가끔 그런 아이들이 있단 말이지. 부모 잘못 만나 실컷 고생만 하는 아이들.”

“……친부모님이, 그랬다는 거예요?”

“그 애 부모가 애를 학대했다는 소리는 아니야.”

“그럼 당신이 그랬어요……?!”

“이봐, 학생. 나는 어린애 때리고 다닐 정도로 허접한 사람 아니야.”

김 부장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재희는 김 부장을 쏘아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 누군데. 누가 다치게 한 건데. 도대체, 누가.

“어릴 때부터 폭력을 겪고 자란 아이들은 말이야, 커서 그것을 반복해.”

김 부장은 뜸을 들이듯 커피를 마셨다.

“이한영이도 징조가 있었어. 한 열한 살이었나? 크게 사고를 친 적 있었지. 같은 반 아이의 팔을 부러뜨린 거야. 놀다 실수로 그런 게 아니라, 작정을 하고 부러뜨려 놓았어.”

“…….”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럴 놈은 아니었지. 그때도 어른 말은 잘 듣던 놈이었으니까. 그래서 알아보았지. 이한영이가 도대체 왜- 멀쩡한 사내애 팔을 부러뜨렸을까.”

“…….”

“알아보니, 그 전날 여자아이 하나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더군?”

재희는 서서히 차오르려는 숨을 억눌렀다.

“기억하지, 학생?”

“…….”

“떨어진 여자아이, 학생이잖아.”

기억은 천방지축이었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떠올려 보려 노력해도 불가능했던 기억이, 아주 작은 자극 하나로 불현듯 떠오른다.

줄곧 잊혀 있던 기억이, 하필 지금에서야.

재희와 한영이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재희를 괴롭히던 또래 남학생들이 그녀를 계단에서 밀어 버리는 사고가 있었다. 정신을 잃었다 병실에서 깨어난 재희는 울고 있는 한영을 보았고, 이제까지 그녀는 그 기억을 아름다운 것으로 추억하고 있었다. 늘 단정하기만 했던 조숙한 이한영이, 그녀 때문에 울고 있었으니까. 그 마음이 달콤하게 여겨졌으니까.

그러나 잊혀 있다 되돌아온 기억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결코 달콤한 것이 아님을.

병실에 그녀를 민 남학생들이 찾아왔다.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우물쭈물 병실 문을 열던 어린 얼굴들이 이제야 떠오른다. 사과하러 왔으리라. 재희는 남학생들이 등장하는 순간 바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대로 그 남학생들이 사과를 하고 재희가 받아 줬다면, 분위기는 평화롭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한 아이의 머리를, 한영이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한영은 어렸다. 재희는 뒤늦게 떠오른 기억을 마주하면서 그를 변호했다. 그러나 기억력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 냈다. 만화를 통해 싸움을 배운 평범한 아이들은 겉멋 든 주먹을 휘두른다. 결코 당시의 한영처럼, 파리 보듯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렇게 모멸적인 방식으로- 손바닥을 휘두르지 않는다.

당시 병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다른 아이들은 꼼짝도 못 하고 자신의 친구가 한영에게 맞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굳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음에도 그들과 한영 사이에 거대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이리라. 경험의 차이. 보고 겪은 것의 막대한 간극을.

그리고 그 후, 뒤늦게 반항을 시도한 아이의 팔을 잡고, 한영은-.

“……!”

더 기억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찢어지는 가슴으로 이제야 이해한다. 자신이 왜 그 기억을 이제껏 잊고 있었는지.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한영과 전혀 다른 모습을 기억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한 아이의 팔을 비틀어 놓고도, 무표정하기만 했던 이한영의 얼굴을.

어린 나이에 그런 식의 폭력에 익숙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나 보군.”

“…….”

“당시에 나도 그랬어. 놀랐지.”

진실의 잔혹함이 무색하게 김 부장은 무심해 보였다.

“그 일 수습하면서 알게 되었어. 이대로 이 아이가 자라면, 나중에 정말 큰일 한번 내겠구나.”

“…….”

“그 애 할머니가 참 잘 가르치긴 했지만 말이야, 그 애 성향에 맞는 훈육은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종종 찾아가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지. 내 씨는 아니지만, 하나하나 붙잡고 손수 아비 역할을 해 주었단 말이야.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

“그래서 어디까지나 겉은 멀쩡해. 겉은.”

“…….”

“속이 문제지. 실패한 거야. 그 애는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으니까.”

김 부장은 짐짓 혀를 찼다.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질문을 던졌다.

“폭력이 뼛골까지 스며들어 있는 그 애가 과연……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재희는 김 부장의 얼굴에 서린 온화한 미소를 응시했다. 주먹 쥔 손에는 더 이상 감각이 없었다.

“……아들처럼 키우셨다고 주장하시려면 이런 이야기를 쉽게 꺼내서는 안 되죠.”

“이한영이가 알면 서운해하려나?”

“…….”

“그런데 학생은 안 궁금해?”

“……”

“이한영이가 왜 그 모양 그 꼴로 커 버렸는지, 왜 죽을 뻔했는지, 누가 그 뒤통수에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놨는지……. 지금쯤 궁금해 죽을 텐데?”

“…….”

“내가 지금 말해 주지 않으면, 학생은 그 답을 평생 듣지 못할 거란 말이지.”

“…….”

“내가 그거 하나는 장담해, 학생.”

김 부장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쥐를 갖고 노는 고양이도 저렇게 즐거운 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재희는 냉기 어린 눈으로 김 부장을 응시했다.

“……차라리 돈 봉투 던져 주며 헤어지라고 하지 그러세요.”

김 부장이 눈을 잠시 크게 뜨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커피숍에 앉은 사람들이 전부 돌아볼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시종일관 예의를 갖춘 척하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웃기는 재주가 다 있어?”

재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고 느꼈는데, 이상할 정도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학생, 내가 어떻게 학생하고 이한영이 사이를 알게 되었는지 알아?”

김 부장이 웃음기를 채 지워 내지 못한 얼굴로 자문자답했다.

“이한영이가 조교와 김선정이란 학생을 학교에서 쫓아냈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이한영이답지 않다고 생각했어. 학생도 알지? 이한영이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 것처럼 굴어도, 사실 기본적인 선은 지키거든. 그 애 할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친구들 때문인지, 나는 관심 없지만 말이야.”

“…….”

“그런데 그 이한영이가, 이상할 정도로 예민해져서 여학생 하나를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단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김 부장은 재차 묻고는 혀를 찼다.

“이한영이가 똑똑해서, 이유를 만들어 놓기는 했어. 조교를 쫓아낸 것은 심 교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변명을 만들어 놓았지. 뒤에서 일을 꾸민 것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발각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이중 삼중으로 변명거리를 만들어 놨단 말이야. 참 똑똑하지?”

“…….”

“그런데 김선정의 일은 말이야,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했단 말이지.”

“…….”

“부족했어. 멀리서 보면 그럴싸하긴 한데…… 아주 미묘-하게, 부족했어. 게다가 너무 뜨거웠지. 사실 이한영이 일 처리가 뜨거움과는 거리가 멀거든.”

재희의 주먹 쥔 손이 떨렸다.

김 부장은 재희의 반응을 살피기라도 하듯 눈을 맞추며 웃었다.

“난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거든.”

“…….”

“그래서 김선정이를 찾아갔지.”

“……!”

“귀한 집 처녀라 얼굴 뵙기가 참 힘들었지만 말이야, 결국 만났지. 대신 얼굴 보는 데 한 달이나 잡아먹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내는 데 또 한 달이 걸렸고 말이야.”

김 부장은 웃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개고생 해 가며 알아낸 진상이란 게 고작, 질투심에 의한 치정 문제였다니, 참. 김선정이란 여자애에게도 실망이었지만 말이야…… 솔직히 믿기지 않았어. 그래서 잠깐, 선물 가지고 장난을 쳐 본 거야. 이 녀석이 얼마나 진지한가.”

섬뜩해질 정도의 집착이다. 제정신이 아니야. 재희는 김 부장의 눈을 응시하며 오싹해지는 한편 슬퍼졌다. 저런 남자를 한영이는 여섯 살 때부터 겪어야 했다는 거구나. 저런 남자를.

“……왜 그렇게까지 한영이의 일에 신경 쓰시는 거예요?”

“내가 만든 놈이니까.”

‘만들었다’고.

모든 것이 이해되는 한마디였다. 재희는 욕지기를 느꼈다.

그때 김 부장의 시선이 흘낏 그녀의 등 뒤로 향했다. 그는 섬뜩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이 자꾸, 시키지 않은 짓을 한단 말이지?”

김 부장이 중얼거렸다. 이러니 내가 걱정이 안 들겠어, 학생?

그러나 재희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등 뒤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에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불쑥 테이블 옆에 누군가가 섰다. 고개를 든 재희는 눈을 크게 떴다. 쇠 냄새 섞인 익숙한 체향을 인식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

한영이었다. 검은 코트를 걸친 한영이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코끝이 찡해져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재희는 일순 몸을 떨었다. 김 부장을 내려다보는 한영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눈.

알 수 없었다. 한영은 그저 미소 띤 얼굴로 김 부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왜 그 눈을 본 순간, 소름이 끼쳤을까.

“……안 그래도 소개하려고 했는데. 성격도 급하시네요.”

한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는 미리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재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을 잠시 짚은 그의 손등이 피 범벅이었다.

“……한영아.”

재희는 놀란 눈으로 한영을 살폈다. 손등만이 아니었다. 코트 속 흰 셔츠에도 점점이 붉은 핏물이 튀어 있다. 그에게서 풍기는 쇠 냄새의 정체를 그제야 깨달았다. 피 냄새다.

다쳤어? 재희가 급하게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수습할 수 있는 선에서 쳤지?”

김 부장이 먼저 무심히 물었다.

한영은 여상히 웃었다.

“잘 모르겠네요. 워낙 세 분 다 덩치들이 크셔서, 힘 조절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한영이 고개를 돌렸다. 다정하게 응시해 오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재희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한영은 알까. 긴장이 턱 하니 풀려 버린 재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한영의 눈가가 얼핏 쓰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금세 잔잔히 웃어 보였다.

“재희야, 늦었지만 인사해. 나와 친한 ‘삼촌’이야.”

그는 김 부장에게도 친절히 말을 건넸다.

“재희예요. 아시죠?”

“알지. 소꿉친구.”

김 부장이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한영의 얼굴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영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눈빛이었다.

그때 한영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

“단순한 소꿉친구는 더 이상 아니네요.”

“…….”

“제가 재희 많이 좋아합니다.”

재희는 눈을 크게 뜨고 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김 부장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결같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였다.

“재희만 괜찮다고 한다면, 진지하게 사귀고 싶네요.”

“…….”

“삼촌도 축하해 주시겠죠. 늘 제가 사람 구실하며 살기를 바라셨잖습니까.”

한영은 ‘삼촌’이란 단어에 미묘한 강세를 실어 발음했다.

김 부장의 눈이 얼핏 가늘어졌다. 한영의 수를 헤아리려는 중일까. 계산속이 복잡한 낯빛을 김 부장은 그렇게 드러내고 있었다.

김 부장이 그러든 말든 한영은 고요히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재희 앞에 놓인 찻잔을 눈에 담았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몸짓은 여유가 넘쳤다. 차의 향을 잠시 맡는 것 같던 한영은 금세 찻잔을 내려놓았다. 재희는 문득 그가 왜 차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 것 같아 김 부장을 보았다. 김 부장은 여전히 가늘게 뜬 눈매로 한영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영은 재희의 찻잔을 김 부장 쪽으로 밀어 놓았다. 마치 위해한 것을 재희에게서 떨어트리려는 것처럼.

그 모든 행동으로 의심과 불신을 드러내 놓고도 한영의 음성은 다감했다.

“저 지금 삼촌한테 바짝 엎드려 기는 겁니다. 목줄 적당히 조이시라고요.”

“……엎드려서 긴다는 놈이 이리도 당당해서야.”

“목줄도 숨통은 틔어 놓고 조여야 개가 주인 말을 잘 듣죠.”

“…….”

“삼촌이 지금 어느 정도로 조여야 하는지 헷갈리시는 것 같아 걱정이네요.”

김 부장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금세 자비로운 어른처럼 웃었다.

“내가 너무 갔나 보군?”

한영은 말없이 슬며시 미소만 지었다. 김 부장도 미소로 응했다.

“안 되지, 목줄을 너무 세게 당기면.”

“…….”

“학생, 놀랐다면 미안해. 학생이 궁금해서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 다른 의도는 없었단 말이지.”

김 부장은 능청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한영에게 말했다.

“학생 집에 데려다줄 거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

“네.”

“몇 시에 들어올 거니?”

“내일 아침에 들어가겠습니다.”

“……아주 배 째라 식이군?”

김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재희를 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만족감이 묻은 미소였다.

“남은 이야기는 기약 없는 다음으로 미루자고, 학생.”

재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삼촌.”

막 등을 돌리던 김 부장이 다시 돌아보았다. 한영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아까 전화로 부탁드렸잖습니까. 차가운 캔이요.”

“내일 들어온다며?”

“제가 필요하다고 한 적 없습니다. 고생한 분들 냉찜질은 하고 보내 드려야지요.”

“……허. 건방지긴.”

그러나 김 부장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멀어지는 김 부장의 뒷모습을 보는 기분이란 허탈했다. 재희는 완전히 지친 기분이 되어 옆에 앉은 한영을 돌아보았다. 그가 다쳤는지 확인해야 했다. 재희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자, 재희야.”

피가 튄 셔츠를 입은 채 웃고 있는 한영을 보는 순간, 재희는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부터 떠올렸다.

* * *

호텔을 나와 몇 발자국 걷지 않아 한영은 재희의 발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업혀.”

앞에서 무릎을 굽힌 채 등을 보이는 한영을 보며, 재희는 문득 깨닫는다. 한영은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이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라는 사실에 더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사람들의 시선을 꺼려야 할 이유가 없어졌을 테니까.

“재희야, 업혀.”

“……너도 다쳤잖아.”

“이거 내 피 아니야.”

“…….”

“업혀. 괜찮아.”

그렇다. 괜찮을 것이다.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흘러가 버렸다. 재희는 쓰라린 가슴을 품고 그에게 업혔다.

그들이 나온 호텔은 외진 곳에 있었다. 한영은 택시를 타고 가자며 큰 거리로 향했다. 천천히 걷는 걸음이 안정적이었다. 재희는 달랑거리며 흔들리는 자신의 발을 잠시 내려다보다 한영의 뒤통수를 보았다. 흔들림 없이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 어딘가 마음 한구석을 알싸하게 했다.

“……이제 어떻게 해?”

한영은 조용히 웃었다.

“어떻게 하긴. 변하는 건 없어.”

“……김 부장에게 나를 숨기고 싶어 했잖아.”

“네가 약점인 걸 내가 직접 인정한 이상, 김 부장은 오히려 아무 짓도 못 해.”

“……당장은 그렇겠지만, 나중에는?”

“나중까지 갈 일을 안 만들면 돼.”

“…….”

“걱정하지 마. 김 부장이 더 이상 널 찾아올 일은 없어.”

속이 갑갑해졌다. 재희는 한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난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럼?”

“……네가 위험하잖아.”

“내가?”

한영이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호텔 방에서 뭐 하고 있었어?”

“가벼운 의견 조정 중이었어.”

“……덩치 큰 남자들이 너를 호텔 방에 가둬 둔 채?”

“그러게. 호텔 방이었지. 방음도 잘 안 되는, 아늑한 호텔 방.”

“…….”

“김 부장이 날 정말 어떻게 할 요량이었다면 장소부터 옮겼을 거야, 재희야.”

그 말은 맞았다.

그러나 재희는 위화감을 지워 낼 수 없었다.

“김 부장 스타일은 폭력과 거리가 멀어, 재희야. 아무 일도 없었어.”

“……나도 이제 알아. 그 사람 스타일이 어떤지.”

정신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 그 사람의 스타일이다. 남의 약점을 죄어 쥐고 흔드는 것이 그자의 취향이다. 저질의 인간이다. 최악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너는 아주 오랫동안 겪으며 시달렸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는 편하게 있었어, 재희야.”

“…….”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아니.”

거짓말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진실만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한영은 갇혀 있는 동안 어떤 불편과 압박이 있었다 한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마재희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사제단 일, 들킨 거 아니지?”

“대환 선배 일이라면 아직 안 들켰어.”

“…….”

“만약 알게 된다 하더라도 김 부장은 나를 감싸려 할 테고.”

“어째서?”

“삼촌과 조카 사이니까.”

“……한영아.”

“믿어 봐, 재희야. 그 사람은 너와 내게 손끝 하나 못 대.”

한영은 다정히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렇게 확신 어린 음성으로, 너는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응. 알았어. 믿을게.”

재희는 한영의 목에 두른 팔을 고쳐 잡았다. 그의 어깨에 계속 얼굴을 묻은 채 생각했다. 너는 끝까지 내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는 거구나.

한영과 함께 집에 돌아오는 내내 재희는 그래도 생각의 방향을 바꿔 보려 노력했다. 어떻게든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김 부장이 사제단 일을 눈치채고 한영에게 위협을 가하는 거라 걱정했었다. 한영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직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까.

재희는 눈을 감았다. 너무 깊은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은 한영이에게 집중하는 게 먼저니까.

“……상처 보여 줘.”

욕실에서 씻고 나온 한영을 향해 그녀는 말했다. 약상자를 무릎에 올려 둔 채였다.

“괜찮아.”

한영은 무심히 웃으며 수건을 목에 걸쳤지만, 재희는 완강했다.

한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몸에 묻은 피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재희는 깨끗해진 한영의 손등을 보며 저려 오는 가슴을 느꼈다. 피는 더 이상 묻지 않았으나, 그의 손등은 붉게 부어 있었다. 타인을 상처 입히기 위해 그가 감수해야 했던 멍울이었다.

“……오래가겠다.”

“그래?”

한영은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재희만 보고 있었다. 재희는 일부러 그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주칠 수 없었다.

그녀가 호텔 커피숍에서 김 부장의 말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동안, 호텔 방에서 한영은 홀로 악전고투를 치렀다. 호텔 방까지 찾아온 내 목소리를 들었던 걸까? 그래서 남자들에게 말을 붙여 무슨 상황인지 떠본 것일까? 그래서 김 부장이 전화를 건 순간, 자연스럽게 어디냐고 물어볼 수 있었던 걸까.

그 모든 질문은 결국 아무 의미도 없었다. 무리해서까지 성인 남자 셋을 제치고 커피숍에 온 한영의 행동만이 재희에게 중요할 뿐이었다.

재희에게는 그 마음만 보였다.

“재희야.”

재희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불현듯 시야로 침대에 걸터앉은 한영의 하반신이 잡힌 탓이었다.

그녀는 희미한 화상 자국을 보고 있었다.

“…….”

“재희야, 왜 자꾸 시선을 피해.”

한영이 재희의 턱을 부드럽게 위로 들어 올렸다. 한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재희는 울 듯 일그러지는 얼굴을 느꼈다. 통제 불가였다.

“이상하네. 오늘 일을 미안해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그러나 한영은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도 한 치의 죄책감 없이 웃고 있었다.

“재희야, 그러지 마. 왜 네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그냥. 아파 보여서.”

재희는 자꾸 뜨거워지려는 눈으로 간신히 답했다.

한영은 고요히 눈을 휘었다.

“시선 피하지 마. 우리 일주일 만에 보는 거잖아.”

“……아.”

“잊은 눈치네.”

“아니야…….”

“그렇구나. 안 잊었구나.”

한영이 놀리듯 말을 받으며 가볍게 키스해 왔다. 쪽, 쪽, 얕은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재희의 몸이 천천히 뒤로 기울어졌다. 물 흐르듯 재희를 침대에 눕힌 한영이 그 위로 올라왔다. 오래 굶었기에, 더 천천히 집어삼키려는 포식 동물처럼.

“보고 싶었어, 재희야.”

“아…….”

점차 깊어지는 키스 사이로 한영이 조용히 물어 왔다. 너는?

재희는 한영에게 열렬히 매달리는 것으로 몇 번이고 대답했다.

전날 한영을 걱정하며 밤을 새운 것이 무리가 갔던가. 재희는 한영과의 행위를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해가 저물 무렵에 지쳐 잠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조차 얼마 못 가 다시 깼다. 불조차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실금처럼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불빛이 번쩍거리며 천천히 창가를 지나갔다. 일 년 전이었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순찰차의 불빛이었는데, 재희는 겁에 질렸다. 침대 이불보를 쥐어뜯으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순찰차는 금세 사라졌다. 한영의 방은 금세 어둠 속에 묻혔다.

잠에서 깬 머리가 뒤늦은 의문을 떠올렸다. 한영이는?

“……아.”

재희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오래 찾지 않아도 되었다. 한영은 서재에 있었다.

“조금 더 쉬지.”

“……잠이 안 와.”

“잠깐만 기다려 줄래. 금방 끝나.”

“응…….”

한영은 미안하다는 듯 웃고는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재희가 흘끔 본 바로는 땅에 대한 정보 같았다. 지도가 보였고, ‘농지’니 임대니 하는 글자들이 보였다. 한영이 소유한 땅에 대해 그녀는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한영이 전부터 그녀도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그의 부동산에 대해 수시로 알려 주곤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토지 정보를 살펴보는 거지? 그런 의문을 잠시 띄웠으나, 재희는 금세 호기심을 잃었다.

재희는 잠잠히 한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서류에 집중한 것인지 한영은 반응이 없었다. 재희도 바쁜 한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 혼자 위로받을 작정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한영의 바지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은근히 그의 중심부를 문질렀다. 천 아래 물건이 순식간에 단단해지는 감각이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바지 지퍼를 천천히 내렸다. 그의 샅에 얼굴을 묻었다.

달그락, 만년필이 책상 위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피곤해 보여서 참으려고 했더니.”

재희는 한영의 것을 물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계속해, 재희야.

책장에 손을 짚은 채 서서 한영의 몸을 받아 냈다. 몇 번이고 오르가슴으로 숨을 들썩일 때마다 재희는 한영의 머리에 있는 상처를 떠올렸다.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치골을 보며 어린 한영이 겪어야 했을 고통을 느꼈다. 애처로운 마음이 솟구쳐 한영의 몸에 매달리다가도 재희는 문득문득 서글퍼했다.

너는 왜 아무것도 안 묻는 걸까.

김 부장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왜 조금도 안 물어보는 걸까.

그렇게-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과거였을까.

서재 양탄자 위에 한영과 함께 누워 쉴 때 재희는 다짐했다. 김 부장이 무슨 말을 하든, 마재희가 흔들릴 일은 없다고. 이한영이 원한다면, 마재희는 한영의 상처를 모르는 것이다. 영원히.

재희는 그 다짐조차 잊기로 했다. 언젠가 한영이 자기 자신에게 빗댔던 곰 인형의 너덜너덜함도 잊기로 했다. 그저 가만히 등 뒤에 붙은 한영의 체온을 느끼고, 머리와 이마에 간간이 떨어지는 가벼운 키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던 재희의 시야에 문득 무언가가 잡힌 것은, 운명의 힘이었을까.

책장에 꽂힌 책 중 하나를 보며 재희는 중얼거렸다.

“……단테의 신곡.”

한영은 반응이 없었다. 그녀 뒤에 바로 붙어 있었으니,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혼잣말이라 여겼을까.

재희는 단테의 신곡을 보며 잊고 있었던 문구를 떠올렸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 문구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가며 한영의 사랑을 갈구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인데도 수 년 전의 일 같았다. 재희는 그것이 이상하게 서글퍼졌다.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영에게 닿게 했던 문장을 다시 읽고 싶었다.

“재희야.”

“……응?”

그러나 한영이 그 순간 그녀를 조용히 불렀기에, 재희의 손은 거두어졌다.

“거기 손바닥만 한 책 보여?”

“……노란 표지?”

“아니. 그 옆에, 흰 표지.”

한영이 가리키는 책을 가만히 보았다.

“……못 보던 책인데. 샀어?”

“심 교수님한테 무단으로 잠시 빌렸어.”

“저게 뭔데?”

“시집 필사본이야.”

“시집? 누구의?”

“백석.”

재희는 모르는 시인이었다.

“유명한 사람이야?”

“유명했었지.”

“왜 나는 몰랐지…….”

“월북한 걸로 알려져 지워진 이름이니까.”

“아…….”

“평안도 출신에, 집도 가족도 다 그곳에 있는 사람한테 ‘월북’이라니. 재미있지.”

재희는 그제야 이해했다. 왜 한영이 심 교수의 책을 무단으로 빌렸는지를.

“……교수님 보호하려고 했구나.”

“저 시집이 경찰 손에 들어가면 단순한 필화 사건으로 끝나지는 않으니까.”

“……갖고 있으면 너도 위험하잖아.”

“곧 교수님께 돌려드릴 거야.”

등 뒤에서 한영은 웃으며 권했다.

“그러니 오늘 밤 읽어 봐. 오늘 아니면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한영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욕실로 가자. 씻겨 줄게.

둘 다 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아쉬워했다. 일분일초가 아까워 계속 서로의 옆에 붙어 있었다. 재희는 한영과 한 침대에 누워 백석의 시집을 읽었다. 한영은 재희의 발목에 다시 약을 발라 주었다. 누운 그녀의 몸을 주물러 주었다. 성적인 의도보다는 순수한 마사지를 위한 손길이었다. 다정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발가벗은 채 같이 이불에 누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시는 재희에게 어려웠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어휘 문제 때문이었다. 한영이 조곤조곤하게 시에 쓰인 평안도 사투리를 해석해 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리라. 그럼에도 재희는 자신이 보고 있는 시가 어떤 것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북의 시인은, 잊히면 안 될 시를 썼다.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한영이 웃으며 속삭였다. 그는 아까부터 재희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 무심해 보였는데, 그새 또 그녀의 표정을 살핀 듯했다.

재희는 대꾸조차 못 한 채 가만히 시를 내려다봤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녀의 폐부를 깊숙이 찌른 그 시를, 보고 또 보았다. 오늘 밤이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조급증이 불쑥 일었다.

그렇게 재희가 옆에 누운 한영의 존재조차 잊고 시구를 외우는 데 집중할 무렵이었다.

어렴풋이 한영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기는 했다. 그는 바로 옆에 누워 있었고, 그가 손 하나 옆으로 뻗는 것만으로도 침대는 흔들렸으므로. 재희는 한영이 탁자에 놓인 콘돔을 정리하는 것이리라 여겼다. 그조차도 무심결에 그랬다는 것이지, 달칵, 하는 소리가 언뜻 들릴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한영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차가운 감촉이 문득 세 번째 손가락을 감싸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았을 때, 그렇게 멍하니 굳어 버렸던 것이리라.

백금으로 보이는 링이, 그녀의 손가락에 걸려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열심히 외우고 있던 시어는 순식간에 휘발된 후였다.

한영은 요란하게 굴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담담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다정하고 자상하던 한영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이 순간에는 그렇게 무뚝뚝할 수가 없었다. 한영은 그녀가 어떻게 올려다보든 상관없다는 듯 무심히 재희의 세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반지는 헐렁거리지도 않고 손에 꼭 맞았다.

백색의 표면에 옅은 음각으로 장식된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거리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흔한 반지가 아니다. 한영이 풀로 엮은 반지를 던져 줬다 해도 좋아했을 테지만-. 재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분명, 예식용 반지였다.

눈가가 순식간에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상 지금은 하나로만 했지만, 다음에는 두 개로 맞추자.”

“…….”

“그때는 네가 직접 고르게 해 줄게.”

반지에서 떼지 못하던 시선을 재희는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영은 감상하는 눈으로 그녀의 반지 낀 손을 보고 있었다.

재희는 간신히 물었다.

“……언제?”

“조만간.”

“……프락치를 그만둔다는 거야?”

“응.”

“……가능해?”

“가능해.”

“어떻게?”

“지금 하고 있는 일만 마무리되면 나올 수 있어.”

한영은 느긋하게 재희의 손가락과 반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니 그동안 생각해 볼래? 첫 데이트는 어디로 갈지.”

재희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한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침묵이 그제야 신경 쓰였나. 한영이 반지를 보다 말고 재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잠시 재희를 차분히 살피던 눈동자가 부드럽게 풀렸다.

“나 지금 진지해, 재희야.”

“……왜?”

그녀가 던진 왜, 라는 질문에는 많은 질문이 함축되어 있었다.

왜 하필 지금 반지를 주는 거야?

정말로 내게 주는 거야?

나를, 사랑해?

“이제까지는 너와 내가 안 되는 이유에만 집중했었어.”

“…….”

“네가 좋은 사람 만나서, 좋은 가정 꾸리고, 나는 그걸 친구로서 지켜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널 위한 최선이라고. 그런데, 재희야.”

한영이 반지 낀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이제 널 위한 최선 같은 거에 관심 없어.”

“아…….”

한영은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 채 응시해 오는 시선은 강렬했다. 그러나 곧 한영은 슬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뗐다간 도망갈 사람을 보듯, 재희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당장 결혼해 달라고는 안 할게.”

재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지만 졸업하면 나와-.”

한영이 말을 끝까지 들어야 했으나, 재희는 순간 참을 수 없었다. 와락 한영의 품에 안겨 들었다. 한영이 반사적으로 재희의 몸을 재빨리 받아 냈으나, 엉킨 두 육체가 반동으로 뒤로 넘어갔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한영이 재희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웃음소리를 흘렸다. 재희의 행동으로 이미 충분한 대답을 얻었던 걸까,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달달했다.

억누르지 못한 눈물이 재희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거, 약혼반지야?”

재희가 울먹이며 묻자, 한영이 웃으며 답했다.

“응.”

“……내 동의도 안 구하고 먼저 반지 끼워 줬잖아.”

“거절하고 싶어?”

“……아니.”

“그럴 것 같아서.”

놀랄 정도의 뻔뻔함이다.

재희는 눈물이 얼룩진 볼을 그의 볼에 맞대며 그만 웃어 버렸다.

“……첫 데이트로 영화관 가도 돼?”

“고전적이네.”

“너랑 한 번도 안 가 봤단 말이야…….”

“알아. 그래, 영화관부터 가자.”

속살거리며 웃는 그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큼 부드러운 게 아님을 안다. 그것은 결의였다. 단호한 결정이었고, 또 어떻게든 소원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래서 재희는 모든 것을 잊고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언제가 되었든, 무슨 일이 있었든.

“부모님은 이번 정초에도 일하신대?”

“모르겠어……. 왜?”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아저씨가 날 가만두려 하지 않겠지?”

진지하게 살 방법을 모색하는 한영의 얼굴에, 재희는 그만 웃어 버렸다. 한영도 웃었다. 호선을 그린 입술 위로 한영의 입술이 부드러운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 * *

다시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 아침, 한영은 새벽 일찍부터 재희를 깨웠다.

누가 보면 곧 십 년을 떨어져 있어야 할 사람들로 보였으리라.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만큼 아쉬운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미래를 약속하자마자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다.

재희나 한영이나, 어디까지나 처음에는 서로의 몸을 확인하듯 어루만지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것이, 손길의 농도가 점차 짙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순서였을까. 그즈음 점차 오가는 말이 줄어들었다. 대신 서로의 입술이 맞부딪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가야 해.”

열이 오른 입술을 간신히 떨어트리며 한영이 속삭였다.

재희는 애달픈 신음을 흘렸다. 오래 있을 수 없다 말하는 한영의 성기가 정확히 그녀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둘 다 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맞댄 천이 무색하게 뜨거웠다.

한영은 그대로 허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천이 사각거리는 소리 너머, 젖은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울 것이 더 없는 사이가 되었음에도,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너무 빨리 젖었다는 자각에서였다. 한영이 천천히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가야 한다며…….”

“그러게.”

한영이 웃으며 그녀 위로 올라왔다. 밀착한 몸은 여전히 한 곳을 향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다. 한영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는 듯 화려히 웃고 있었다. 유혹적인 눈웃음에 재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허리를 띄웠다. 한영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재희야, 사실 걱정했어.”

“……왜?”

한영이 재희의 손을 잡았다. 반지 낀 손이었다. 그는 그대로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는 웃었다. 그대로 그 손을 밑으로 이끄는 의도를 알지 못해 재희는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그녀의 몸 위에서 비켜 옆자리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상반신은 팔꿈치 하나로 버틴 채, 그는 마치 관망하기 좋은 곳을 선점한 이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건 다 가르쳐 줬는데, 단 하나 안 가르쳐 준 게 있거든.”

“……뭔데?”

그러자 한영이 이끈 손이 정확히 그녀의 여린 입구를 눌렀다. 그녀 손으로는 단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곳이었다.

“……?”

“스스로 만져 봐, 재희야.”

“……내가?”

“응.”

“하지만…….”

“괜찮아.”

한영이 그녀의 상의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혼자 가는 거 보여 줘.”

드러난 가슴에 입 맞추며, 그는 속삭였다.

재희는 홀린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짓은 서툴렀다. 익숙지 않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한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맞춰 준 덕분일지도 모른다.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가슴을 애무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다정한 손가락 때문이기도 하리라.

“재희야.”

“……으응.”

서서히 몰입해 가는 재희의 귓가에 한영이 속삭였다.

“……혼자 있을 때 내 생각이 나면, 앞으로 이렇게 달래 주는 거야. 알았지?”

그 나지막한 속삭임에 서린 음탕함이 옮겨 붙었을까. 한영의 시선 아래 허리가 본능을 따라 들썩이고, 이불을 밀어내며 부르르 떨던 그녀의 허벅지가 한영의 몸에 닿았다. 재희는 은근한 열락에 헐떡이는 중에도 한영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옷 안에 갇힌 성기가 터질 듯 부풀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떨면서도 재희는 손을 뻗었으나, 한영이 붙잡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뜨겁다. 가쁜 숨을 토해 내느라 바쁜 그녀의 입술과, 떨리며 부풀어 올랐다 꺼지길 반복하는 둥근 젖가슴을, 흥건히 젖어 버린 손가락과 다리 사이를, 천천히 그의 시선이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한영아…….”

재희는 한영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방법을 달리했다. 거의 헐벗은 몸이 한영의 위로 올라탔다. 한영은 그녀를 막지 않았다. 밀어내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가 한영의 허리춤에 손을 댔을 때, 그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금 제지했을 뿐이었다.

“재희야.”

그 부름은 정말, 그녀를 막기 위한 것이 맞았을까. 재희는 한영의 음성에서 되레 유혹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바지 단추를 푸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고 있지 않나.

그럼에도 일말의 불안이 있어, 재희는 한영의 허리에 단단히 팔을 감았다. 나머지 한 손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애무하면서였다. 그녀는 없어진 손을 대신해 지퍼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대로 그것을 물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듯 한영의 등줄기가 불끈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나워진 근육이 그렇게 욕망을 드러냈는데도, 한영은 조용히 낮은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터질 듯이 부피감이 찬 바지 때문에 지퍼는 더디게 내려갔다.

“……재희야, 안 그래도 지금 충분히 가기 싫어. 더 시험 들게 하지 마.”

“응…….”

공허한 대답만 흘리던 그때, 한영의 성기가 바지에서 튀어나왔다. 속옷마저 뚫고 일어나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더한 수고 없이 그것을 입에 물 수 있었다. 낮은 신음이 한영의 입술에서 터졌다.

“……곤란하네.”

재희는 그 중얼거림이 밀어냄의 예고라는 것을 무리 없이 해석해 냈다. 한영의 허리춤을 부여잡은 팔에 힘을 꾹 주고 버티려던 찰나였다.

한영이 손을 뻗었다. 옆으로 웅크리고 있는 재희의 벌거벗은 다리를 향해서였다. 재희는 한영의 성기를 핥다 말고 끌려가는 몸을 느꼈다.

떼어 내려는 거라 착각한 그녀가 버티기 위해 다시 팔에 힘을 주던 찰나, 한영의 손이 그녀의 한쪽 허벅지를 쥐었다. 다리 한쪽이 허공 위로 벌어졌다. 한영이 몸을 눕혔다. 재희는 알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한영의 영악함을 다시금 실감했다.

“……아!”

자지러지며 그녀가 몸을 휘었지만 한영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벌어진 그녀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발씬거리는 입구를 빨았다. 처음부터 한영은 게걸스러웠다. 그래서 재희는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한영이 작정하고 그녀를 가 버리게 하려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목적을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종류의 행위가 아니었다. 재희는 한영의 성기를 더 물지 못하고 울었다. 한영의 혀 아래 너무나 쉽게 타올랐다. 얼마 버티지도 못했다. 절정에 달해 몸을 부르르 떨며 한영의 성기가 맥박 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기만 해야 했다.

“한영이 너…… 너 진짜…….”

재희는 달아오른 눈으로 원망스레 중얼거리지만, 개폐를 반복하는 입술을 빨고 있는 한영은 말이 없다. 그는 빠르게 성감을 이끌어 낸 것과 다른 부드러움으로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후희만큼은 자상한 혀에, 재희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어서 가 봐야 한다고 했던 한영은 재희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계속 아래를 애무해 주었다. 재희의 숨이 안정되고서야 그는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산뜻하게 웃음 지으면서, 또 동시에 젖은 입술을 핥으며.

“미안. 이제 정말 가야 해서.”

그렇게 속삭이는 한영의 부드러운 눈웃음 속에 욕망이 자글자글 끓고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붉어진 눈꺼풀만 안타까이 팔랑거렸다. 만족하지 못하는 성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영은 마치 그것을 잘 안다는 듯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아 주었다. 달래 주려는 건지, 더 자극하려는 건지, 재희의 목덜미와 귓가에 연거푸 입을 맞추면서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그 목소리에서도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 나왔기 때문에, 재희는 허겁지겁 키스를 되돌렸다. 서로의 목과 입술을 물고 핥는다. 뜨거운 입술이 어울리지 않게 한영은 내내 침착한 말들을 쏟아 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돌아오면, 그때는 네가 원하는 거 다 해 줄게.

재희는 그 속삭임을 몇 번이고 들으며 위안을 받았다.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몇 번이고 재희에게 입을 맞추는 한영이 기다려 달라 말하고 있었다. 재희의 욕망은 잔뜩 달래 놓고도, 정작 저 자신의 욕망은 내버려 둔 채.

한영은 그녀에게서 간신히 몸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전화 못 할 수도 있어. 기다리지 마.”

“……응.”

재희는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그렇게 거짓말했다.

한영은 언제 미련을 보였냐는 듯 깔끔한 태도로 집을 떠났다. 그 칼로 자른 듯한 태도가 이한영을 잘 설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욕망하고 또 갈망하면서도, 해야 할 일에 바로 돌아설 수 있는 단호함.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재희는 그저 기도할 뿐이었다. 한영이 하루빨리, 그녀와 그만의 공간으로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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