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경신의 말은 옳았다. 허울뿐인 수사는 개시만 요란하게 알렸을 뿐 진척이 없었다. 대신 강대환을 잘 아는 학생들이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정보들만 언론에 표류했다. 며칠 신문에서 시끄럽게 오르내리던 강대환의 이름은 금세 사라졌다. 생전 강대환과 교류했던 대학생들은 달랐으나, 그조차도 점차 열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이미 분노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강대환의 죽음에만 분노할 수는 없었다.
재희는 그 모든 현상을 지켜보며 서서히 깨달아 갔다. 결국 강대환은 사람들에게서 잊힐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언제 있었냐는 듯, 기억 속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리리라. 언젠가 한 번씩 불쑥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는 기억 속 이방인이 될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한영은 그렇게 조용히 감상을 밝혔다. 경찰이 강대환의 죽음을 뺑소니 차량에 의한 사망 사고로 발표한 날 저녁이었다.
“……어떻게 되는 거야?”
“묻히겠지.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니까.”
“…….”
“처음부터 예정된 결과이긴 했어.”
그렇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알리려 했던 사람들의 진심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날 새벽, 재희의 집 싱크대에서 종이 한 장이 불탔다. 그간 간직하고 있던 유인물에 불을 붙인 것은 그녀의 의지였다. 재희는 서서히 타들어 가는 유인물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강대환의 얼굴은 금세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재희는 그 이후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만 바라보았다. 때때로 알싸한 가슴의 통증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자학적인 통증을 느끼기에는, 한영과의 일상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재희는 점차 통증을 잊어 갔다. 무감각해져 갔다.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노심초사하며 두려워하던 재희가 서서히 긴장을 잊어 갈 정도로.
십이월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거리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한 성탄절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붉은색 리본, 푸릇푸릇한 크리스마스트리, 그리고 번쩍이는 전구들까지. 흰 목도리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재희는 구경꾼처럼 세상을 보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밝았다. 어느새 그녀가 좋아하는 계절이 찾아들어 있었다.
“재희야, 선물 생각해 둔 거 있어?”
“응.”
“뭔데?”
“비밀이야.”
쉽게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한영이 포장지를 벗길 때까지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인혜 옆에서 걷고 있던 상현이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서로 선물 겹치지 않는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을까?”
“넌 뭘 살 건데?”
인혜의 질문에, 상현이 태연히 답했다.
“앞치마.”
“……압구정까지 와서 선물로 산다는 게, 뭐라고?”
“왜? 인혜 너도 앞치마 생각했어?”
“…….”
“아, 혹시 재희가?”
그럴 리 없다.
인혜가 한심함과 감탄이 오묘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상현을 보다 말했다.
“나도 같이 고를래.”
“좋지.”
“꽃무늬로 하자.”
“탁월한 선택.”
그렇게 흐뭇하게 웃는 둘을 보다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내릴 것 같은 날씨다. 하늘이 일주일만 더 아껴 뒀다가 한영의 생일에 뿌려 줬으면 좋겠다.
“직접 보시겠어요?”
쇼윈도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물었다. 묵묵히 상품을 들여다보고 있는 재희의 침묵을 더 견디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대학생이라면 아마 이런 디자인을 좋아할 거예요.”
“……멋있지만 오래 잡으면 손이 아플 것 같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점원이 바로 쇼윈도에서 꺼내 준 만년필은 마음에 들었다. 재희는 한참이나 꼼꼼히 따져 본 후에야 결정을 내렸다.
점원이 포장지를 챙기러 간 사이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주변에 서서 흘끔대던 남자가 신경 쓰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멋쩍은 얼굴을 했다.
“미안한데, 학생. 아들 선물 때문에 보고 있는데, 뭐가 뭔지 알아야 말이지.”
“아…….”
“학생이 고른 것과 똑같은 걸로 사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예요.”
직원이 돌아왔기 때문에 재희는 값을 치렀다. 옆에 있던 남자도 현찰을 내밀었기 때문에 직원만 덩달아 바빠졌다.
재희가 포장된 선물을 막 받아 들 무렵, 남자가 웃으며 고맙다, 묵례를 했다. 말쑥이 차려입은 정장과 어울리게 정중한 인사였다. 재희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들 선물도 직접 챙길 정도로 자상하니, 좋은 아버지일 것이다.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보며 재희는 문득 상상해 보았다.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저 남자의 아들이 지금 몇 살이든, 살면서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저 남자의 도움을 받겠지.
한영에게는 없었던 보호의 울타리가, 당연하다는 듯 둘려 있을 것이다.
과거를 향한 속상함을 되풀이해 봤자,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만 더 슬퍼질 뿐이다.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다. 결국 사람은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하는 법이니까.
재희는 친구들을 기다리는 내내 아침에 본 한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리를 시작했다는 것을 안 순간, 그가 찰나지만 드러냈던 눈빛. 그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가던 감정.
그것은 어떻게 보아도- 안도감은 아니었다.
“…….”
재희는 때마침 눈앞에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제 엄마의 손을 잡고 뒤뚱거리며 걷는 뒷모습이 사랑스럽다.
재희는 그 뒷모습에서 오래도록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가슴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계속 간질거렸다.
“와, 우리 재희, 은근히 철두철미하다니까. 선물 어디다 숨겼어?”
“……가방 속에.”
“쇼핑백이라도 보여 주라.”
“보면 뭐 샀는지 알게 되잖아.”
“나한테는 슬쩍 말해 줘도 돼.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재희는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정말로 앞치마 샀어?”
“당연하지.”
“……인혜는?”
“나는 냄비. 전에 한영이 집 냄비 하나가 구멍 났다며?”
“어라, 그래? 요리조차 능통하신 이한영 씨가, 웬일로 나무에서 떨어지셨나…….”
그렇게 은근히 웃는 상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재희는 이대로 어서 빨리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영과 함께 이 성탄절의 거리를 걸을 수 있기를.
* * *
음력 시월 십사 일이 다가오자 모두가 바빠졌다. 한영의 생일도 생일이지만, 기말고사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한영의 생일 파티는 시험이 끝나는 주 토요일에 잡혔다. 그러나 재희는 목요일에 멀쩡히 있는 한영의 생일을 두고 토요일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목요일 아침, 일찍부터 재희는 몰래 한영의 집 주방에 서 있던 참이었다.
“미역국?”
재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영이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서 있다. 씻고 나와 웃고 있는 얼굴이 말끔했다. 그는 들고 있던 수건을 목에 걸치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험과 미역국 사이에 얽힌 속설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나 한영은 점잖게도 속설을 잊은 척 웃으며 다가와 재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재희는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간이 이상해.”
“그래?”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공을 들인 것이 허무하게 맛이 기괴했다. 한입 간을 본 한영이 난색을 표하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냄비 불 잠시만 꺼도 될까?”
“왜?”
“…….”
“아…….”
재희는 엉덩이를 찌르는 단단한 감촉에 가스 불을 껐다. 한영이 그녀의 치마를 끌어 올렸다. 속옷 없이 드러난 흰 엉덩이를 보며 그는 만족하며 웃었다.
마음이 콩밭으로 가 있었으니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험은 이른 오후에 끝났고, 재희는 내일 있을 시험을 준비하는 척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사 온 케이크와 준비해 둔 선물을 들고 창문을 넘었다. 청소를 하고 음식을 차렸다.
그 시간이 길고도 길었기 때문에, 한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이 그렇게도 기뻤던 것이리라. 재희는 어린아이처럼 달려들었다. 한영도 마치 일 년 만에 상봉한 가족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웃었다.
그래도 그는 이상할 정도로 붕 뜬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던 것일까? 한영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웃음 지으면서도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생일이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은 아닐 텐데…….”
그러나 한영은 뒤늦게 재희가 나신에 앞치마만 걸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보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좋을 일이구나.”
재희는 새삼스레 수줍어져 눈을 내리뜨고 웃었다. 한영도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눈이 부신 사람처럼.
어느 때보다도 더 한영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재희는 한영을 따라 들어간 욕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웃으며 내려다보는 한영의 시선 아래에서 성기를 빨았다. 입안 가득히 부피를 늘려 오는 성기에 혀를 감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금세 딱딱해지고, 목구멍을 느긋이 문지르는 뭉툭한 끝에서 씁쓸한 액체가 새어 나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문득문득 손에 힘을 주고 그녀의 머리를 깊숙이 끌어당기는 힘은 강했다. 재희는 그 힘조차 좋아 한영의 허벅지를 붙잡고 있던 손을 올려 그의 엉덩이를 쓸었다. 부드럽게 볼기를 움켜쥐는 순간, 막 재희의 입에서 물러나고 있던 성기가 격렬히 반응하며 그녀의 목 천장을 때렸다.
이미 그들은 언제 어느 선에서 배려를 하고 또 마음대로 해도 되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움직임의 주도권을 점차 한영이 가져오기 시작했을 때, 재희는 컥컥거리면서도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얌전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한영의 눈동자에 번뜩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목도하며, 능숙히 목구멍을 조였다.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한영이 느긋하게 물었다.
“맛있어?”
“……응.”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흡을 조절하는 중에도 아찔히 눈을 휘는 한영이다.
그는 오래 재희의 입안을 헤집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얼마 가지 않아 폭, 하고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는 거대한 성기에, 재희는 입맛을 다셨다. 끝까지 해 주고 싶은데, 왜 빼는 걸까. 그렇게 아쉬워하며 그녀가 말없이 성기에 혀를 문지를 때였다.
한영이 야릇하게 웃으며 허리를 뒤로 뺐다.
“재희야.”
“……응.”
성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재희에게, 한영이 온화하게 면박을 놓았다.
“혼자 먹으면 안 돼. 같이 먹어야지.”
“……같이?”
재희의 순진한 질문에, 한영이 잔잔히 웃었다. 그녀를 침실로 이끌었다.
침대에 한영과 함께 누운 순간 재희는 그가 취하는 자세를 통해 같이 먹자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꾸 다물리려는 재희의 다리를 벌리며 한영이 손을 내렸다. 그녀의 가슴을 쥐어짰다. ‘같이’란 단어를 명심하라는 손짓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한영에게 샅을 물리고 핥이면서도 성기를 간신히 입에 담아야 했다. 눈을 가득 채운 고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자니 눈과 귀가 뜨거워진다. 허공에 뜬 그녀의 허리는 언제부턴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영이 다시 혀끝을 세워 음핵을 애무했다. 재희는 한영의 성기를 목구멍에 깊숙이 박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음을 삼키는 와중에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한영이 그녀의 수준에 맞춰 많은 것을 봐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깨달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재희는 한영의 성기에 볼을 문지르며 절정에 올랐다.
“……아아…….”
낭창대던 허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갈 무렵, 한영은 자세를 바꾸었다.
재희의 얼굴에 깃든 홍조를 내려다보며 한영은 젖은 입매를 핥았다. 그 미소에 서린 정욕에 재희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다리를 벌렸다. 한영이 감상이라도 하듯 재희의 몸을 훑었다. 나지막이 웃으면서도, 그는 입으로 콘돔을 뜯으려 하고 있었다.
“한영아…….”
재희는 그에게 말했다. 그냥 들어와.
한영은 고요히 눈을 휘었다. 마재희의 생리 주기를 꿰고 있는 한영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 피임 기구 없이 행위를 치러도 되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한영은 그런 날마저 참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의 인내심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한영은 망설이지 않고 쥐고 있던 콘돔을 침대 위로 떨어트렸다. 지난 몇 주를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성기 둘이 금세 맞붙었다. 재희는 자신의 질 벽이 그 순간 요동을 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한영의 성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영은 그녀를 바로 꿰뚫었다.
“아아……!”
“……하.”
나직한 숨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 환희였다.
한영은 마치 그간 해 보지 못했던 행위를 딱 하루만 허락받은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래서 한영이 거울 앞까지 그녀를 데리고 갔을 때, 재희는 다시금 확신했다. 아- 이제껏 이한영은 마재희가 남자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숙맥이었다는 사실을 제 나름으로 배려해 주고 있었던 거구나.
“한마디로 자만했다는 거네.”
재희가 흘린 말을 들은 한영이 말을 받았다. 재희의 순진함이 귀엽다는 듯 웃음이 잔잔하다. 그러나 허리 놀림만큼은 난잡하기 그지없어, 재희는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막느라 인상을 찡그렸다.
헐떡이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재희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한영이 턱을 붙잡았다. 때마침 한영이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꿇린 무릎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전부 공유해 왔잖아.”
한영이 거울로 시선을 맞댄 채 재희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예쁘고 좋은 게 있으면 서로에게 가르쳐 주고, 알려 주었으니까.”
그렇게 부드럽게 일러 주며 한영은 연달아 재희 안쪽을 누긋하게 찔렀다. 성기가 배를 뚫고 나올 것 같다. 재희는 거울 속 자신이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것을 보았다. 집요하게 그것을 지켜보는 한영의 새까만 눈동자도.
한영이 흥분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싱긋 휘며 속삭였다.
“지금도 그래.”
“아…….”
“나만 보기에는 아까워서.”
무릎으로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다행히 한영이 뒤에서 그녀를 안정적으로 끌어당겼다. 재희는 헐떡이며 허리를 감싼 한영의 팔을 보았다. 그녀의 유방을 움켜쥔 커다란 손도 보았다. 촉감으로만 느꼈지, 시각으로 느낀 적 없는 손길이었다.
“……널 보라니까. 나 말고.”
한영이 웃음을 흘리며 재희의 허벅지를 더 벌렸다. 성기가 허벅지 사이로 드러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재희는 홀린 듯 보았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탁탁, 치듯 올려붙일 때마다 덜렁이는 검붉은 고환이 보였다. 오랜 정사로 젖어 있었다. 재희는 불쑥 목이 말라 왔다. 아랫배 안쪽의 지끈거림은 이제 너무나 당연했다.
재희가 도통 한영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한영이 자세를 달리했다. 살을 부딪치면서도 재희의 무릎을 하나하나 세우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한 손으로 뒤를 짚으며 몸을 반쯤 눕혔다. 한영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재희의 몸도 저절로 뒤로 기울었다.
처음 잠시 가졌던 의문은 그대로 거울을 보는 순간 가셨다. 재희는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기분에 시선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한영은 재희가 자신의 입구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종용했다.
“재희야.”
다정한 한마디가 재희로 하여금 홀린 듯이 다시 시선을 돌리게 했다.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그녀의 은밀한 곳이 거울 속에 드러나 있다. 한영이 자세히 볼 수 있게 도와주려는 것처럼, 힘을 늦춰 주었다.
“……아.”
천천히 음순 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다시 빠지는 성기 사이로 벌름거리는 속살이 보인다. 오랜 마찰 때문일까? 다른 곳의 흰 피부와는 달리 사뭇 붉다. 그리고- 그간의 행위로 축축했다. 번들거릴 정도로 젖어 있었다.
재희는 여전히 한영이 그곳을 왜 예쁘다 표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영은 지금도 그녀의 귓가에 예쁘단 말을 속삭이고 있었고,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의식적으로 구멍을 조일 때였다.
한영과 눈이 마주쳤다.
바닥에 손을 짚은 방향으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한영이 잔잔히 눈을 휜다. 땀에 젖어 눈웃음을 치는 얼굴이 유독 야하게 느껴져 재희는 멍하니 그 형용을 눈에 담았다. 오랜 움직임과 그녀의 무게를 버티느라 성이 난 근육도 마찬가지였다. 허리 깊숙한 곳이 찡해져 올 정도로 몸 선 하나하나가 다 야하다. 신화에 나오는 완벽한 피사체처럼 아름다운 몸이 꿈틀거리며 허리를 흔들고 있지 않나.
그 광경 앞에서 그녀는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몸보다는 한영이의 이곳저곳이 더 아름다운데-.
“아……!”
그때 다시 한영이 집요하게 내벽을 문질러 왔기 때문에, 재희는 숨을 흐트러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뒤로 기울어진 자세 때문에 성기는 평소의 삽입과 달리 내벽 위쪽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한 번씩 한영이 치댈 때마다 예민한 곳이 자극받았다.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성감에 성기를 물고 있는 아랫입술이 좋다고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한영이 다시 경고하듯 속을 치댔기 때문에, 재희는 젖어 가는 눈을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를 응시했다. 움찔움찔 조이는 입구가 음란해 보인다.
한영이 더 빠르게 움직일 때는 어떤 모습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얼마 가지 않아 허리를 격정적으로 들썩이기에 이르렀을 때, 재희는 한영의 몸 위로 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재희가 거울을 보지 못할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을까. 한영은 더 이상 자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로 팔 하나로 바닥에 지탱한 채, 재희의 허리를 잡고 난폭하게 엉덩이를 위로 밀어붙였다. 찰싹거리며 살 부딪치는 소리가 맹렬하다.
“……미안.”
그때 한영이 짧은 사과와 함께 자세를 바꾸었다.
순식간에 바닥 위 양탄자를 보고 엎드린 자세에, 재희는 눈만 깜빡였다. 그 순간 한영이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아……!”
퍽. 얻어맞는 것처럼 강한 삽입에 바닥을 짚고 있던 재희의 팔이 꺾였다. 얼굴을 그대로 묻으며 신음을 흘리는 재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영이 퍽퍽 용두질을 시작했다.
재희는 그대로 자지러지며 허리를 휘었다. 한영이 들어와 내벽을 찧을 때마다 꿇린 무릎이 들썩이며 허공에 떴다. 그렇게 거친 움직임인데도, 고통은 없었다.
“아…… 좋아, 한영아…….”
연달아 빠르게 내벽을 때리는 성기에, 솔직한 감탄이 신음과 섞여 흘러나왔다. 재희는 양탄자에 손톱을 세우며 등줄기를 움찔거렸다.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허리를 흔들던 한영이 웃었다.
“……이 뒷모습은 또 어떻게 보여 줘야 하나…….”
거친 숨을 흘리면서도 농을 하는 한영이었지만, 재희는 그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그만큼 한영이 강렬했기에, 재희는 연신 신음을 흘리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한영이 감탄하며 신음을 흘렸다.
“……재희야.”
한영이 난폭히 허리를 흔들면서도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나만 볼게.”
“으응……. 응…….”
재희의 온몸이 수축하기 시작한 것을 느꼈는지, 한영이 귓가에 신음을 흘리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악문 입술 사이사이로 끊기는 숨을 흘리며 그는 속삭였다.
“……나만 봐도 좋다고, 대답해.”
재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영이 말로 대답하라고,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재촉했다. 고양이처럼 허리를 휘며 재희가 헐떡였다. 그렇게 할게. 한영아, 너만 봐, 너만-. 그 순간 한영이 신음을 흘리며 재희의 허리를 추어올려 강하게 퍽, 퍽, 몸을 흔들었다.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 재희는 그대로 절정에 올랐다. 재희는 한쪽 볼이 바닥에 쓸리는 것도 모르고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단 하나의 목적만 가진 것처럼 한영을 쥐어짰다.
결국 한영도 더 버티지 못했다. 허리를 강하게 털며 사정했다. 허리가 허공으로 밀릴 정도로 강한 밀어붙임을, 재희는 뜨거움에 흐느끼면서도 받아들였다. 양탄자에 쓸린 젖꼭지가 어렴풋이 쓰려 오는 것을 느낄 즈음에 재희는 이제는 버릇이 된 생각을 떠올렸다. 이대로 평생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
귓가를 어지럽히는 한영의 거친 숨결을 느끼며 그녀는 눈꺼풀을 들었다. 거울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탄자 위에 널브러져 엉덩이만 든 채 허벅지를 움찔거리는 그녀 자신과, 더 깊은 곳에 사정하려는 것처럼 아득바득 그녀의 안으로 파고드는 한영의 단단한 몸까지. 초식 동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한영은 작은 짐승의 급소를 물어뜯는 포식자였다.
재희는 멍하니 거울 속 한영을 바라보았다. 사정의 기분을 만끽하는 것처럼 찌푸리고 있던 한영의 얼굴에 천천히 미묘한 감정이 흐트러지듯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만족과 불만족. 기갈과 포만감.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감정들이 한영의 얼굴을 어지러이 수놓는 것을 보며, 재희는 한영이 결코 만족하지 못할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영의 욕망은 경계에 닿는 순간 다시 그 너머를 향해 뻗어 나간다. 끝없는 욕심이다.
그래서 재희는 늘어뜨리고 있던 고개와 상체를 애써 힘주어 일으켰다. 오늘은 한영의 생일이니까.
그 과정에 엉덩이를 한영의 치골에 갖다 문댄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힘이 들어간 복부에 조여진 내벽이 자극적이었을까. 그녀의 안에 묻혀 얌전히 쉬고 있던 한영의 성기가 다시 반응을 보인다.
재희는 팔을 세워 바닥에 짚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성기가 빳빳이 섰는데도 조용히 지켜보는 예리한 눈빛이, 이 와중에도 한영답다는 생각이 든다. 재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한영도 조용히 웃었다.
그녀가 먼저 허리를 흔들었다. 나긋나긋하게, 한영은 가만히 있는데도 먼저 엉덩이를 흔들어 성기를 빨아들이고 움켜쥐었다. 한영의 눈가가 호선을 그린다. 그렇게 천사같이 웃으면서도,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이라니.
재희는 볼을 붉히면서도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사정해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지만,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엉덩이를 슬쩍슬쩍 흔들었다. 이미 수차례 반복된 자극에 내벽이 녹진녹진했다.
재희가 주도하는 삽입은 그렇게 부드럽고 유연했지만, 한영에게는 감질만 돋웠을까.
“……자꾸 부추기지 마.”
한영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고운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타박했다.
“재희야, 저녁 안 먹을 거야? 왜 자꾸 건드려.”
“응…… 미안해…….”
“미안하다면서 계속 움직이지.”
그렇게 엄하게 웃으며 내려다보는 한영이지만, 재희는 점차 빠듯이 내벽을 채워 오는 질량을 느끼고 있었다.
“마재희.”
“……으응.”
질책하려 한영은 그렇게 불렀겠지만, 그녀는 이제 한영의 입에서 ‘마재희’ 이름 석 자가 나올 때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이전에는 그 호칭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싫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것이 한영이 다정함으로 애써 가장하지 않은 본모습이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으니까.
“……여유도 부리고.”
한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그녀가 엉덩이를 한영의 샅에 문지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재희는 헐떡이며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옆으로 비튼 옆구리와 등이 아팠지만 한영의 기분이 더 그녀에게 중요했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싫어? 안 할 거야?
한영이 낮게 웃었다. 웃음기 어린 숨소리가 좋았다. 유혹을 거부하지 않고 야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좋았다. 재희는 모든 순간이 행복해 웃었다. 한영도 사납게 웃으며 다시 납작 허리를 붙여 왔다.
그녀는 암고양이처럼 요사하게 허리를 휘면서도 오롯이 순수한 마음뿐이었다. 한영이 오늘만큼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자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순수한 마음.
무지 섞인 순수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재희는 몰랐다. 그래서 순전히 한영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한영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처음에는 잘 버티는 듯했던 한영이 종래에는 눈빛이 변할 정도로 달려들어도, 그녀는 격하게 달려드는 단단한 몸을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재희가 숨기고 있던 선물과 케이크의 존재를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만용의 결과를 온몸으로 느끼던 중이었다.
“누워 있어. 작은 상 차려서 갖고 올게.”
이불보를 갈고 있던 한영이 자상히 말했다. 탈진한 것처럼 누워만 있던 재희가 끙끙거리며 일어나는 것이 안쓰러운 듯했다.
그러나 생일상을 본인에게 차리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재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 시로 하루가 넘어가기 십 분 전이다. 케이크에 불도 붙이지 않고 한영의 생일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재희는 자신이 나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움직였다. 일층에 내려가 냉장고에 숨겨 놓았던 케이크를 꺼냈다.
그렇게 바삐 식탁 위에 올리고 촛불을 붙이느라, 한영이 그런 그녀를 짓궂게 감상하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추운 날씨를 인식한 한영이 아쉽다는 듯 그녀의 나체에 두툼한 겉옷을 걸쳐 주고서야 자각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둘만의 생일 파티였다.
“뭔데?”
케이크까지 조금씩 떼어 먹은 후에야 재희는 식탁 밑에 숨겨 두었던 쇼핑백을 꺼냈다.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는지 한영이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올해 선물은 분에 넘치게 많네.”
조금 짓궂게 놀려도 좋았다. 기대하는 눈으로 재희는 한영이 쇼핑백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뿐이었는데.
곱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본 순간, 한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한영아?”
한영은 재희가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검은 눈동자가 선물 상자를 말없이 응시했다.
한참의 정적 후, 한영이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장지 안에 숨은 선물을 확인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느릿한 손길로 선물 모서리를 감싼 붉은 리본을 푼다. 진 적색의 매끄러운 포장지를, 굳게 닫혀 있던 고급스러운 상자까지, 그의 손끝에 낱낱이 침대 위로 해체되어 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벗겨져, 날카로운 만년필의 나신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영의 눈에서 일순, 격렬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한영아?”
한영의 시선이 그제야 그녀에게 향했다.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잠시 물끄러미 그녀를 담는다. 재희는 그 눈에 서린 감정을 읽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왜 그래?”
그제야 서서히 한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감동해서.”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한영이 뒤늦게 덧붙였다.
“텔레비전 보면서 흘린 말을 기억해 줄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아.”
한영이 다정히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재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에게 안긴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단순한 포옹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숨기려는 행위 같았다.
그러나 천천히 포옹을 푼 한영의 얼굴이 진심으로 감동한 것처럼 웃고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자신이 너무 예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심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사실 광고에서 본 걸로 사고 싶었어. 네가 세련되게 생겼다고 한 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이게 더 멋있어. 고마워. 잘 쓸게.”
그렇게 나지막하게 웃는 한영의 얼굴을 보며, 재희는 완전히 안심해 버렸다.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유난한 감흥을 느꼈던 걸까. 한영이 그녀를 잠시 말없이 보았다. 입매에 머문 미소처럼 고요한 눈이었다. 그는 재희의 손을 끌어다가 입을 맞추었다. 마치 정결한 사제처럼.
재희는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었다. 아니, 다른 식으로 왜곡해 기억했다는 것이 옳으리라. 마냥 밝고 즐거웠던 기억. 그리고 동시에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훅 달아오르는 적나라한 기억으로.
한영은 그 이후로도 내내 기분이 좋았고, 다정했으며, 또 집요했다. 그래서 재희는 한영의 속에서 무언가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징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토요일, 친구들이 각자 옆구리에 선물 하나씩 끼고 찾아온 날 전까지는.
“축하해!”
“축하한다!”
서로의 생일을 챙기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장성했지만, 한영의 집에 모인 친구들은 그런 기색 없이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상다리 휘어지게 음식을 차렸다. 그것은 그들 나름의 전통과도 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한영의 생일만큼은 잊지 않고 축하해 주는 것. 한영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더 유난해진 그 연례행사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넉살을 떨며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상현의 몫이었다.
“압구정까지 가서 큰맘 먹고 산 선물이야. 받아 줘.”
상현이 낄낄 웃으며 선물을 한영에게 건넸다. 한영은 포장지를 열지 않아도 뭐가 나올지 안다는 것처럼 무심한 미소로 그것을 열었다.
검은색의 화려한 레이스 앞치마가 다섯 남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
“…….”
“다시 보니 정말 예뻐.”
“……미쳤냐? 압구정까지 가서 산 게 저거라고?”
“그렇게 똑같이 말한 이인혜 양의 선택이 바로 저것이라네, 친구.”
한마디씩 보태는 친구들 속에서도, 한영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상현아.”
“뭘 또. 친구 좋은 게 뭐겠어. 원하는 걸 딱딱 갖다 바치는 거지, 뭐.”
“그러게. 네가 내 취향을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엉?”
상현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을 힐끗 떴지만 한영은 이미 영재가 건넨 책을 받고 있었다. 모두가 문학 소년 영재의 선택에 ‘감탄’하는 동안, 상현만이 홀로 갑작스레 뭔가 깨달은 것처럼 화르르 얼굴을 붉혔다.
유일하게 그것을 목격한 재희가 묻는 시선으로 상현을 응시했다. 상현은 왜였는지 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겠단 얼굴로 중얼거린다. 저 미친놈이 진짜-.
“좋은 날에 왜 욕을 하고 그러니? 정신 안 차려?”
인혜가 상현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상현이 나 죽는다고 하도 요란히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한영의 무심한 시선이 흘끗 상현의 붉어진 얼굴로 향했다. 그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영이 돌연 냉랭히 미소 지었다.
“……박상현, 방금 무슨 상상 했어.”
“어라,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우리 한영이가 왜 이렇게 눈초리가 사나워졌지?”
그렇게 능글능글 되받아치면서도 상현이 다급히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는 멀거니 상현을 마주 보았다. 상현이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내고 있는데, 재희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상현이 노골적으로 재희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재희야, 지금이야.”
“……응?”
“내 편 들어주기로 했잖아. 세 번.”
“……아.”
“‘아’만 하지 말고 어서 말해. ‘우리 상현이 괴롭히지 마세요, 여보.’라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정말,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정말로 모든 것이 좋았던 것일까?
재희가 그런 의문을 떠올린 것은 음식을 다 먹고 상을 치운 후였다.
상현이 한영의 집 거실에 설치하겠다고 들고 온 크리스마스트리 때문에 영재며 인혜, 재희가 골치를 앓고 있던 중이었다. 조립식 트리인지라 하나가 빠지면 전체적인 모습이 엉성해지게 마련인데, 상현이 하필 밑동에 해당하는 부분을 두고 온 것이다. 그 탓에 비율이 엉망으로 짜리몽땅해진 초록색 트리 앞에서, 인혜가 상현을 구박하고 있던 참이었다.
영재와 함께 그러려니, 하며 엉성한 트리 위에 방울과 장식을 올려놓고 있던 재희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물론 그녀는 그 시선이 한영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 설거지를 끝내고 소파에 앉았을까. 재희는 그 짧은 떨어짐마저 그리웠다는 듯 반가움으로 한영과 눈을 마주쳤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재희는 자신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 놀랄 만한 일은 없었다. 트리를 장식하는 데 정신이 팔린 친구들을 보고 있는 한영은 크리스마스의 정취를 만끽하는 사람처럼 느긋해 보였으니까.
실제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잔잔한 듯,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가.
그러나 저 눈빛.
알 수 없는 사색에 잠겨 있는, 저 스산한 눈빛만큼은-.
한영은 금세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다. 사색에서 빠져나와 재희에게 슬쩍 눈인사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눈매로.
그 화려한, 미소로.
* * *
처음에는 한영에게 무언가 일이 있는 건가 싶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진 걸까. 그래서 그런 눈빛으로, 철저히 유리된 사람처럼 친구들을 보고 있었던 걸까.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실체를 잡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재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한영을 향해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무슨 생각 해?”
“글쎄. 마침 너희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심각해 보였어?”
유심히 살피는 시선을, 한영은 금세 눈치챘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재희야, 너야말로 요즘 무슨 생각 해.”
“……요즘 네가 이상하단 생각.”
“내가? 왜?”
그렇게 반문하는 한영에게서는 아주 조금이라도, 손톱 옆 거스러미만 한 위화감조차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그리고 그즈음, 일 학년 이 학기가 끝났다.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 타당한 이유가 보란 듯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재희는 그래서 더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한영이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렇게, 그들만의 세상이, 그들만의 성 안에서 다시 펼쳐졌으니까. 더 이상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눈빛은 없었으니까. 한영은 그저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너무 쉽게, 그녀는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것을 잊어버렸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겨울 방학이었다. 모두가 바빠졌다. 방학이라는 단어에 가장 신이 난 것처럼 보이는 이는 상현이었다. 신출귀몰하는 상현을 나무라는 인혜는 집안일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영재로 말하자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한영의 집으로 피신 왔던 영재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친척 형의 손에 귀가 잡혀 끌려갔다. 재희는 그렇게 시골 부모님 댁으로 끌려간 영재를 걱정했지만, 한영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피하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나중에 재희는 영재에게서 걸려 온 전화로 알았다. 친척 형에게 영재의 위치를 알려 준 게 한영이라는 사실을. 영재는 물론 삐쳤다.
화목한 신혼의 훼방꾼을 쫓아낸 한영도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심 교수의 협박 아닌 협박 때문이었다.
“재미있지. 방학에 과제를 내주는 교수라니.”
한영은 그렇게 무심히 웃으며 말했지만, 그렇다고 교수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일주일마다 시를 한 편씩 완성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는 전부 다 B인 줄 알라는 노교수의 으름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도.
“교수님이 네 소질을 알아보셨나 봐.”
재희의 가슴을 애무하다 말고 한영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소질? 설마 내게 시인의 소질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에게?”
“응.”
“내가 교수님에게 어떤 혹평을 듣고 있는지 알면 그런 말 못 할걸.”
“그거야 더 좋아지라고 채찍질을…….”
재희는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휘었다.
“재희야.”
“……응.”
한영의 재촉에, 들고 있던 그의 노트를 책상에 내려 두었다. 허리를 띄웠다. 두 명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의자가 삐걱삐걱 울었다.
재희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도왔다. 대체로 그랬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재희가 형법전을 보기 시작한 것을 어떻게 알고는, 그녀를 가게에 오래 붙잡아 두지 않으려 했다. 딸이 사법 고시를 몰래 준비하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부모님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달리 어떤 변명을 댈 수 없었다.
하필 왜 법전이었을까? 재희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 법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모르는 충동과, 약간의 우연, 그리고 어쩌면 다른 곳에 집중할 데가 필요했다는 사실, 그 셋이 맞물려 그녀를 법의 세계로 인도했던 건지도 모른다. 재희는 그 이상으로 원인에 천착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숨겼지만, 한영에게만은 숨길 수 없었다. 마재희와 이한영 사이에 이미 경계는 무의미했다. 법전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그녀의 변화를 한영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재희는 이따금 걱정을 하기는 했으나, 다행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재희는 그 침묵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헤매곤 했다.
어디까지나, 여태까지는 그랬다는 것이다.
재희는 눈을 가물가물 떴다. 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희는 자신이 책상에 팔을 베고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법전을 보다 끝없는 한자의 늪에 빠져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 선잠에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뻑뻑해진 눈을 굴렸다.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은 한영이 보인다.
언제 창문을 넘어왔을까.
반가움과 함께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한영이 그녀의 법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손에 연필을 든 채였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그녀의 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가 책에 무엇을 적고 있을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예전 학창 시절부터 그랬다. 그녀는 유독 한자에 약했다. 아는 단어도 돌아서면 까먹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재희는 교과서나 수험서를 보다가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나중에 다시 보려고 동그라미를 그려 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 선잠에 들 때가 있었는데, 일어나 보면 가끔가다 동그라미 밑에 한자의 음과 뜻이 적혀 있는 일이 있었다. 그 글씨체를 모를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조금도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사랑해.
그냥, 그런 생각이 불쑥 속에서 솟구쳤다.
“…….”
한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 목소리를 들은 듯.
재희는 아직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한 눈으로 한영의 시선을 마주쳤다. 고요한 수면 같던 한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재희도 그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마 위에 닿는 뜨거운 감촉도.
재희는 가까워지는 한영의 얼굴을 보다 눈을 감았다. 입술이 따뜻했다. 언제나처럼.
* * *
한영은 더 이상 몰래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가끔씩 밤에 집으로 걸려 오던 수상한 전화도 없어졌다. 재희는 그래서 프락치도 방학엔 쉬는 거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평화로운 겨울 방학이 그렇게 지속되리라 바라기 시작했다. 한영과 추운 겨울을 따뜻한 집 안에서 보내고,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를 그의 집 거실에 앉아 보고, 또 제야의 종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 가 그 모든 바람을 다 접어야 했다.
“……호텔?”
“그렇게 됐어.”
한영은 아쉬운 기색조차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재희는 식사를 하다 말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머리가 얼얼했다.
“……멀쩡한 집이 있는데 왜 호텔에 들어가서 소설을 써야 돼?”
“알잖아, 심 교수님 고집. 호텔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라는 거지.”
“……단편 소설을? 한 달 동안? 그것도 연말에?”
“그러게. 숙박비가 아깝다고 하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시네.”
“교수님이 호텔비를 다 내주시는 거야? 왜?”
“그렇게라도 해야 내가 글을 쓸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재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심 교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야?”
“부모 없이 혼자 사는 게 불쌍한 거겠지. 앞가림할 수 있게 도와주시려는 거야.”
“……그런 거라면 고마운 분이지만…….”
그래도 연말에 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했다.
“……연말이랑 명절 다 보내고 가면 안 돼?”
한영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재희는 그 얼굴에서 그건 곤란하다는 신호를 포착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느꼈다. 이한영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정말 가야 돼?”
“네게는 미안하지만.”
“…….”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할게.”
재희는 그 순간 의심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보기에, 심 교수의 요구는 얼토당토않았고, 또 그에 어울려 주는 한영 또한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을 눈치챘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영은 갈 것이다. 정말로 심 교수가 시켜서이든,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든.
그 결정을 그녀는 말릴 수 없었다.
“되도록 빨리 오겠지만, 연말 혼자 보내게 할지도 몰라.”
“……괜찮아.”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 보낸 근래의 날들이 크리스마스였고 새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었다.
“돌아오면 강릉으로 여행 갈까?”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사려 깊었다.
“……아.”
“가고 싶다며.”
저번에 지나가듯 얘기한 거였는데. 기억해 줬구나.
재희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응. 갈래.”
“그래. 기다려 줘.”
“응…….”
“전화 자주 할게.”
“응.”
야속하게도 한영은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갖출 시간도 주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