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3권) (11/20)

11장.

세상이 변했다.

아니, 사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마재희가 변했다.

마재희의 시선이 낯선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주목하지 않던 순간에 집중했다. 재희는 이제 이한영의 봄날 같은 미소에서 큰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대신 그가 남들이 못 알아차리는 사이 짓는 무표정에서 의미를 찾아냈다. 남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재희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한영은 그런 재희를 의식하고 있었다.

재희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학교에서 종종 눈이 부딪치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스쳐 보냈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재희는 자신의 별것 아닌 시선이 그를 궁지로 몰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명심했다. 그는 숨겨야 하는 것이 많은 이다. 게다가 한영은 고백했다.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재희는 더 이상 학교에서 한영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매일 확인했다.

“재희야, 게시판에서 뭘 찾아?”

“……수사가 시작됐대.”

“수사?”

경신이 옆으로 다가왔지만, 재희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게시판에 붙은 소식지만 보며 중얼거렸다.

“……대환 선배 사건, 수사 들어갔대.”

“정말? 웬일이야?”

경신이 떨떠름하다는 듯 말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곧 경신은 불신을 드러냈다.

“진상 규명 하는 척만 하다가 덮으려는 거구나? 하도 시끄러우니까?”

정말 그럴까.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났다는 듯 염세적인 경신의 반응을 보며, 재희는 의문을 품었다. 그간 그녀를 알게 모르게 두려움에 떨게 하던 의문이었다.

“……진상 규명이라고 하면서, 사진을 정의 구현 사제단에 빼돌린 사람을 찾으려는 건 아닐까?”

“그쪽이라면 이미 한참 전부터 찾고 있지 않을까?”

경신의 지적은 옳았다. 이미 형사들은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그들이 숨긴 진실을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에 알렸는지를.

재희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주먹에 꾹 힘을 실었다. 어떻게든 무표정한 낯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 * *

재희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온 청계천 헌책방에는 무료한 얼굴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가게 주인밖에 없었다.

물끄러미 시선에 들어오는 한자를 읽었다. 형법전.

재희는 한동안 그 글자를 올려다보다 손을 뻗었다. 기대감은 없었다. 출판물을 검열하는 시대인 이상, 책 안에 그녀가 원하는 정보가 있을 리 없다. 이제껏 그랬다. 세상에 있는 그 많은 책들 중에, 그녀에게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는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그러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도는 알려 줄 것이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려는 수사관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또 어떤 절차와 판단으로 행동하는지 정도는.

“재희야, 무슨 책 찾아?”

“……그냥. 아무거나 보고 있었어.”

인혜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수사관들이 혹여 수사망을 좁혀 한영을 특정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단 사실을 어떻게 선뜻 전할 수 있을까.

재희는 변명이 불충분한 것 같아 옆에 붙어 선 인혜에게 다시 말했다.

“……졸업하면 뭐 해야 될지 고민이 많아져서.”

“벌써?”

“만약 시험 봐야 하는 거라면,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니까.”

인혜가 잠시 책장 코너를 확인하고는 놀라 물었다.

“사법 고시 볼 생각이야?”

“아니…… 거기까진 아니지만.”

재희는 더 말을 삼가면 인혜가 더 물어보리라 예감하고는, 침착히 둘러댔다.

“그냥, 취직할 거면 어느 분야를 가야 하나 찾아보고 있었어.”

인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지함에 되레 재희는 미안해졌다.

“대단하다. 벌써부터 그런 생각도 하고.”

“……그런 게 아냐.”

“나는 취업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한 게 없어.”

“경제학과니까…… 취직하는 거 아니야?”

“잘 모르겠어. 부모님이 내가 일하는 걸 허락해 줄지도 모르겠어. 대학교는 조르고 졸라서 어떻게 오긴 왔는데……. 알잖아, 우리 부모님.”

재희는 가슴이 아파 와 말없이 인혜를 보았다. 인혜는 가벼운 말을 한 사람처럼 생긋 웃었다. 그러나 인혜 속도 그렇게 웃고 있을까. 인혜의 부모님은 대학교 졸업장을 더 좋은 사윗감을 얻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절로 답답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재희는 애써 미소 지었다.

“……우리 아직 일 학년이잖아.”

“맞아. 천천히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인혜가 빙그레 웃으며 재희의 서툰 위로를 받아 주었다.

“재희야, 그런데 요즘 이한영한테 무슨 일 있어?”

“……일?”

“요즘 이상해 보여서.”

인혜는 뭔가 께름칙해하는 낯빛으로 재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 앞에서 재희는 초조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실상 인혜는 그저 염려한 것뿐인데도 재희는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요즘 한영이가 많이 바빠서.”

그럼에도 그녀는 제법 담담히 둘러댔다.

“그래서 그럴 거야. 많이 피곤해서. 교수님 연구하고 출판 일까지 돕고 있거든.”

“아, 그 심 교수님? 아직도 걔 노예 생활 해?”

재희도 그 점이 의아했었다. 한영은 심 교수가 그의 정체를 눈치챘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왜 심 교수는 아무 내색 없이 한영을 계속 곁에 두는 걸까, 재희는 때때로 의아해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쩍 교수님이랑 친해져서. 사적으로도 계속 만나는 것 같아.”

재희는 조용히 둘러댔다.

“……나도 잘은 몰라. 무슨 일이 있는지.”

“바빠서 그런 거구나.”

인혜가 중얼거렸다.

“나는 뭔가 일이 있었나 했지.”

“왜?”

“박상현이 요즘 함흥차사잖아. 최영재도 걱정하는 마당에, 진작 나섰을 이한영이 가만히 있길래. 설마 둘이 싸웠나 했지.”

“아…… 한영이한테서 연락 왔었대. 학보사 일 때문에 계속 암실에 있을 거라고.”

헛걱정을 한 셈이었을까, 인혜가 투덜거렸다.

“걔는 왜 그렇게 매번 제멋대로야? 연락할 거면 진작 공평하게 한 사람씩 다 전화 주든가. 이건 걱정한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무슨 내 욕을 책방까지 와서 해?”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재희와 인혜는 깜짝 놀랐다. 비좁은 헌책방 입구에 얼굴만 들이밀고 있던 상현이 피식 웃는다.

“우리 마나님들, 사이좋게 책 사러 나왔어?”

“야!”

인혜가 성이 나 울컥 외치다가도 헌책방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재희는 들고 있던 형법 책을 책 무더기 위에 내려놓았다. 인혜가 상현을 밀며 책방 바깥으로 나갔다. 재희도 그 뒤를 잠잠히 따랐다.

“대체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 뭐…… 종로에 오면 당연히 헌책방을 들러야 참된 고학생으로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뭐 그래서 구경하던 차에 따악- 너희를 본 거지.”

“둘러대지 말고 똑바로 말- 근데 안 본 새 왜 이렇게 말랐어?”

인혜가 짜증 섞인 걱정으로 상현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상현이 이러지 말라며 장난스레 외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희 또한 가만히 상현을 보며 걱정하고 있었다. 인혜의 반응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현은 못 본 사이 수척해져 있었다.

“암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든 일이란다, 친구들.”

상현은 수염이 삐죽 돋은 턱을 긁으며 웃었다.

“예술은 원래 고독한 거야.”

그 말 한마디에 인혜의 걱정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이후에 다른 계획은 없었던 건지 상현은 어슬렁어슬렁 인혜와 재희를 따라왔다. 두 마나님들 에스코트해 주겠단 능청 섞인 말과 함께였다.

재희는 인혜처럼 전공 서적을 샀다. 친구들의 시선을 피해 형법 기초 서적도 몰래 샀다. 그것만으로도 재희는 돌아오는 길에 내내 심란해야 했다. 친구들에게 자꾸 비밀이 생기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당분간 한영이네서 신세 좀 져야지.”

“최영재야 이해하겠는데, 너는 그 많던 눈치 어디다 뒀니?”

“부쩍 외로워져서.”

“애인도 있는 애가 무슨…….”

재희는 그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못했다. 속에 이는 충동과 싸우느라 바빴던 것이다.

영재와 인혜는 성격이 불같아 입을 다물었지만, 상현은 다르다. 상현이라면 상황을 바로 알아봐 줄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는 눈이 한영만큼이나 날카로운 상현이니까.

그러나 상현과 영재가 이틀간 한영의 집에 머무르다 각자의 하숙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녀는 끝내 자신의 근심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

재희는 말 한마디로 벌어질 수 있는 미래를 조금도 가늠할 수 없었다.

* * *

한영의 할머니는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였다. 어린 재희가 한영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성당에 익숙해진 것도 한영의 할머니 덕분이었다. 재희는 물론이고, 한영도 성당을 즐겨 다니지는 않았다. 숨 막힐 듯 조용한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는 것보다는 소꿉장난을 하며 노는 것을 더 좋아하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그래도 재희는 한영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일 년 중 성탄절만큼은 꼭 성당을 찾았다. 물론 그뿐이었을 뿐 신앙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영은 재희보다 더 심해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성당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만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재희는 이제껏 그렇게, 성당을 희미한 존재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랬는데.

“…….”

재희는 눈을 감았다.

한영의 서재에 난 창으로 십자가가 유독 잘 보이는 것은, 무슨 우연일까.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십여 년 전 천주교 사제들 중심으로 결성된 그 사제단을, 대학생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군부 정권의 인권유린적 시국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나서서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을 내놓은 단체였으니까.

최근에 사제단은 강대환의 죽음에 불의한 공권력이 연루되어 있음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강대환이 죽기 전날 경찰들에게 잡혀 끌려간 것을 증명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어디에서 입수한 사진인지는 유인물로는 알 수 없었지만, 소문으로 답이 들려왔다. 시골 여행 중이던 사진작가가 우연히 강대환이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하고 찍었다고 했다. 그것을 형사들이 그 자리에서 바로 압수해 갔는데, 그 이후 어디에서였는지 모르게 필름이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희는 필름을 유출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재석이다.

재석이 한영에게 건넨 갈색 서류 봉투에, 그 사진이 들어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것을 한영이 사제단에 넘겼다.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에 강대환의 억울한 죽음을 알린 사람이- 바로 이한영이다.

왜.

이유에 대한 의문이 숱하게 재희의 머리에 떠올랐다. 왜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한 걸까. 이미 강대환에게 피신하라고 전화를 건 것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왜.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 왜.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희는 이제 새로운 의문으로 번민하고 있었다. 새벽에 몰래 성당으로 향하던 한영을 떠올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다.

그동안 한영이 새벽에 몰래 집을 나갔던 것이-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동안 한영은 새벽에 몰래 몇 번이고 사라졌었다. 재희는 막연히 그 외출이 프락치 활동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한영이 말했던 ‘삼촌’을 만나러 가는 것이리라고.

그러나 만약 그런 게 아니었다면?

한영이 만약, 사제단과 계속해서 만나고 있었던 거라면-?

“재희야.”

재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책상에 앉아 몸을 반쯤 돌린 한영이 보였다. 재희는 그의 손에 들린 자신의 노트를 잠시 보았다. 심 교수의 시학 과제 때문에 쓴 시는 어설펐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영은 진지하게 보아 주는 눈치였기에, 재희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몇 군데만 손보면 제출해도 될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은 게 아니라 좋은데. 교수님이 좋아하실 스타일이네.”

“고마워. 너는 다 썼어?”

“아직 다 못 끝냈어.”

“네가?”

한영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제출했다가 퇴짜 맞았거든.”

“왜?”

“억지로 긁어모은 정서가 보기 괴롭다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그냥 단순히 구박을 주고 싶은 것도 같고.”

재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며, 그는 무심히 미소 지었다.

“엄살 좀 떨어 보자면 교수님께 보여 드린 시만 이미 열다섯 편이 넘어.”

“그렇게 많이 냈는데도 다시 써 오래?”

“그러게. 골치 아프게 됐지.”

그러나 한영은 정말로 곤란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찌르는 성기만 봐도, 결코 아니었다.

재희는 몸을 돌려 한영을 마주 보았다. 담담히 웃고만 있는 얼굴로 오전의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얼굴인데, 그녀는 그 순간 울고 싶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표정을 감추고 감정을 속였다. 부드럽게 응해 오는 키스가 달기만 하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한영아.”

“응.”

사제단에 관해 물어본다면, 한영이는 대답해 줄까?

재희는 한영의 눈을 들여다보며 흔들렸다. 물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미 한영이 프락치라는 민감한 진실마저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더 묻는다고, 한영이가 불쾌해할까? 어차피 한영이는 내가 섣불리 행동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인데.

그러니 질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너 괜찮아?”

“뭐가?”

“네가 대환 선배에게 전화해서 도망가라고 알려 줬잖아. 그거 ‘그 사람’이 알면…… 위험해질 수 있잖아.”

“괜찮아. 그럴 일은 없어.”

“……그럼 네가 사진을 사제단에 넘긴 거는?”

한영의 시선이 잠시 재희의 눈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오래 그녀를 보지 않았다. 금방 무심히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한영아.”

“만약 네 말이 맞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를 찍어 내지는 못해.”

“어째서?”

“아쉬운 건 내가 아니니까.”

“…….”

“내가 쓸모가 많은 조카거든.”

재희는 서글픈 눈으로 한영의 눈을 직시했다. 한영이 잔잔히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이한영은 터무니없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 권하고 있었다. 재희는 슬픈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한영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영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약속, 한영과 나눈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늘 위험을 옆에 두고 있는 한영을 가만히 바라만 보는 것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일이었다.

“……이번 한 번뿐이지?”

재희는 애타게 물었다.

“위험한 행동 한 거, 이번에만 그런 거지?”

“당연하지.”

한영은 다정히 속삭였다. 어린 딸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자상한 부모의 낯으로.

“내 성격 알잖아. 내가 언제 남들 좋은 일 하는 거 봤어?”

재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많이 봤어. 너는 늘 말만 그렇게 하지, 안 보이는 데서 남들 챙기고 다녔어.

“두려워할 것 없어. 이쪽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한영은 미소 지었다. 야하게 휘어지는 눈웃음이었다.

“그만 잊어, 재희야. 너는 이쪽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이제 모르는 척하겠다며?”

“……걱정하는 것도 안 돼?”

“섭섭하네.”

한영이 잔잔히 웃으며 재희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속옷을 걸치지 않아 봉긋 옷 위로 윤곽을 드러낸 유두에 그가 입을 맞췄다.

“너는 아직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있구나.”

“아……!”

따끔, 깨물린 유두에 재희는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한영이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많이 부족했나 봐. 분발할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을 틈은 없었다.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 * *

몸 따라 마음 가는 건지 재희의 의식이 애먼 시간대로 튀었다. 처음으로 콘돔을 끼지 않고 정사를 나눈 날 밤이었다.

그날의 밤을 기점으로 한영은 완전히 변했다. 최후의 방어선이 허물어진 듯 한영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학교에서 어떻게 참는지 이상할 정도로 그는 계속해서 발정했다. 성기를 세웠고, 재희의 살갗 하나라도 보이는 순간 바로 달려들었다. 짐승이었다. 간신히 철창의 우리에 가둬 두었던 것이, 그렇게 우리를 벗어나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한영의 집에서 점차 끈적끈적한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까. 재희의 몸에서도 그랬다. 한영의 정액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말소리도, 웃음소리도 오래가지 못했다. 질척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찰싹거리며 서로의 밀지가 부딪치는 소리가 금세 이어졌다. 신음과 음란한 숨소리, 좋으냐고 묻는 한영의 나지막한 목소리, 재희의 신음, 간혹 가다 흘리는 한영의 끓는 신음 소리까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니, 한영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재희는 이제는 그것이 한영이 의도하는 바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다. 마재희가 이한영이 프락치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어렴풋이나마 눈치챘을 때, 한영은 그때도 지금처럼 의도적으로 그녀를 교란시켰다. 그 자신이 지닌 성적 매력으로 마재희의 감각을 송두리째 휘어잡았다. 더는 다른 생각 하지 못하게. 그에 대한 걱정으로 그녀가 시름시름 앓는 것을 보기 싫은 것처럼.

재희는 멍하니 한영의 머리를 감싼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조차 켜지 않은 거실 천장을 텔레비전의 불빛이 수놓는다. 그들이 누운 소파 지척에 있는 난로의 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겨울은 순식간에 찾아와 있었고, 한영은 재희가 감기에 걸리는 것을 언제나 원치 않았다. 두꺼운 이불마저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재희는 한영의 무게감을 느끼며 이불 속에서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한영이 아직 빡빡한 안을 비집고 삽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한들, 한영의 성기가 보통의 크기는 아니었다. 버거워 신음을 흘리는 재희를 보며 한영은 웃었다. 그는 재희가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추워?”

“……아니.”

재희는 붉은 얼굴을 미약하게 옆으로 흔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영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무섭도록 집중한 얼굴이었다.

재희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올려다보았다. 서두를 생각 없다는 듯 한영은 부드럽게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유연한 움직임을 따라 그의 몸 근육이 긴장했다 풀리기를 반복한다. 그 광경이 난로의 붉은 불빛에 비쳐 더 음란해 보였다. 그 시각적 자극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훅 치미는 성감에 재희의 내벽이 본능을 좇아 조여들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한영이 진하게 미소 지었다.

한영은 느긋하게 즐길 작정인 사람처럼 시종일관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빛이 온화했다.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마재희의 성욕에 맞춰 주려는 눈빛.

재희는 그의 시선에 이제 익숙했다. 그럼에도 재희는 그 순간, 불쑥 묻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왜?”

“……아니…….”

사실 새삼스럽게 입 밖으로 내놓을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한영은 언제나 성행위 중에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떨 때는 웃으면서, 또 어떨 때는 잔잔한 미소로, 짓궂은 미소로, 늘 그녀를 보며 움직였고 반응을 살폈다. 그러니 지금 그녀의 위에 있는 한영이 그녀를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랬는데-.

그녀는 문득, 그 시선 속에서 진실을 눈치채 버렸다.

“……아…….”

재희는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눈가를 느꼈다. 찬찬히 재희를 담고 있던 한영의 시선이 그녀의 눈가를 담았다.

저것은 관찰의 시선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에 새기는 눈빛이다.

“……한영아…….”

재희는 와락 한영을 부둥켜안았다.

분명 처음이 아니다. 가끔씩 저렇게 한영이 고요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재희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을 그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까?

저 눈빛은 분명,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가까이에 둔 사람의 눈인데.

“……한영아, 한영아…….”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재희는 그것을 한영이 모르길 바랐다. 눈가가 축축이 젖었더라도 그것이 성감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한영이 여겨 주길 바랐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내벽을 조였다. 악착같이, 성기를 움켜쥐고 빨아들였다.

느닷없이 공격당한 한영이 아찔한 듯 야릇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그는 곧 입가를 끌어 올렸다. 제대로 자극받은 듯 본능적인 미소가 그 얼굴에 번지는 순간, 재희는 마음 놓고 눈물을 흘려 보낼 수 있었다. 한영이 순식간에 거세졌다.

재희의 온 신경이 감각에 몰려들었다. 경련하듯 빨아들이는 내벽의 움직임에 몰두했다. 근 사흘간 한영은 콘돔을 끼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품은 살덩이가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서로의 샅이 어느샌가 질척하게 젖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재희의 것이든, 그의 것이든, 안은 이미 질퍽질퍽했다.

그러나 재희는 그보다 더한 것을 원했다.

“……안에다, 싸 줘…….”

푹, 푹 안을 찌르며 한영이 낮게 웃었다.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쳐 줬어?”

끊긴 숨이 뜨겁게 입가로 부딪치는 동안, 재희는 신음을 질렀다. 누구나 다 아는 질문을 던졌으면서, 한영은 어서 답하라는 듯 그녀의 성감대를 강하게 후볐다.

재희는 진저리를 치듯 허리를 떨며 간신히 답했다.

“네가…… 한영이, 네가…….”

“아아, 내가…….”

한영이 나직이 웃었다.

“……내가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가르쳐 줬구나.”

“아, 아…… 응, 으응…….”

“나빴네. 그렇지?”

“으응……. 응, 아니…… 아니야…….”

한영이 다시 웃음소리를 흘렸다. 놀리듯 그는 잘게 허리를 떨었다. 옅지만 빠르게 안쪽을 두드리는 성기에, 재희는 미칠 것 같았다. 더 강하게 들어와 줬으면 했다. 발버둥 치는 다리가 이불에 감겨 답답했다. 재희는 끙끙거리며 앓았다. 한영이 마치 그것을 알아들은 것처럼 재희의 허벅지를 끌어 올렸다.

엉덩이가 붕 뜨면서 양다리가 한영의 팔에 걸렸다. 위압적으로 드리운 한영의 흉흉한 몸을 올려다보며, 재희는 눈가를 붉혔다. 이불에 갇혀 있던 밀지가 눈에 다 보였다. 천천히 보란 듯이 한영이 성기를 들이밀었다 빼냈다. 성기가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흰 거품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머리가 뜨거워져 재희는 그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한영이 낮게 속삭였다. 정말로 안에 싸 줘?

재희는 헐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 한영이 급하게 허리를 밀어붙였다.

이미 한계에 내몰려 있었던 재희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미 있는 힘껏 수축하고 있는 그녀의 몸을, 한영이 필사적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소파가 들썩일 정도로 쿵, 쿵, 안쪽을 때렸다. 눈앞에 불빛이 번쩍일 정도였다. 재희는 무아지경에 빠져 날카로이 신음을 내질렀다. 재희의 골반을 붙잡은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간 순간, 재희는 안쪽 깊숙한 곳으로 쏘아지는 뜨거운 것을 느꼈다.

“아아……!”

자지러지는 음성 사이로 한영의 신음이 섞였다.

한가득 사정한 한영이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몸을 흔들었다. 질 벽은 이미 젖을 대로 젖었고, 녹진하게 풀려 있었다. 한영은 그 감촉을 못 견디게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질 벽을 채우고 있던 살덩이가 순식간에 다시 부풀었다. 적나라한 부피 변화에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한영은 재희가 끙끙거리는 동안에도 무럭무럭 제 것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질퍽한 안을 음미라도 하듯 잘게 자극하면서였다.

재희는 놀랍게도 그 장난 같은 자극에 다시 오르가슴을 느꼈다. 요동을 치며 내벽이 다시 그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그 힘이 아찔했을까. 한영의 성난 복근에 일순 움찔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곧 한영은 뜨거운 숨을 흘리며 웃었다.

“……좋네, 환장하게.”

그 말끝에 사나운 욕심이 실렸음을 재희는 놓치지 않았다. 헐떡이며 한영에게 매달렸다. 언제 멈췄냐는 듯 다시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한 줄기 눈물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막은 더 이상 없었다. 재희는 사정을 몇 번이고 졸랐고, 한영은 그 부탁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울컥울컥 몸 속 깊숙한 곳에 품은 정액은 정량을 초과한 것처럼 이불을 적시고 소파를 얼룩지게 했다. 그럼에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상의 끝이 임박한 것처럼 행위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그 같은 애욕의 순간이 계속되는 동안, 재희는 요즘 들어 보기 시작한 법학 서적에서 본 개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미필적 고의’라는 개념을.

이대로 몇 번이고 피임 없이 사정한다면 임신할지 모른다. 비록 가임기가 아니라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악착같이 그녀의 안에 사정을 하는 한영의 속내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영이라면 임신이라는 결과의 발생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을 것인데, 그녀가 임신해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한영의 고의는, 무엇이라고 단정해야 할까. 무책임?

아니면-.

‘마지막’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의 위태함? 절박함?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때마다 재희는 부러 한영과의 행위에 더 노골적으로 달려들곤 했다. 도피이자 회피였지만, 상관없었다. 한영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한영이 없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피할 곳이 전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재희는 웅크려 앉은 채 머리를 감싸 안았다. 행위 중에 보았던 한영의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고적하던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재희는 을씨년스러운 예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한영이 만약, 경찰에 붙잡힌다면.

형사들이 가지고 있던 필름과 사진을 빼돌린 것이다. 수사 기관이 기밀로 부친 사안을 외부 단체인 사제단에 누설했다. 법적으로 문제 건다면 충분히 걸 수 있을뿐더러,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일을 크게 키울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재희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다른 학생이 그랬다면, 경찰은 형식적이나마 구속하고 법적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에 붙잡힌 이가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 그들 편에 서 있었던 프락치라면? 그렇게나 그들이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 숨겨 왔던 존재라면? 드러나선 안 될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라면?

그들은 절대 배신자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물밑으로 영영 가라앉혀 버리리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배신자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 * *

“자네들, 학기 끝나기 전까지 시 다섯 편 써 오라는 것 잊지 않았지?”

네에, 하고 길게 빼며 대답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에서는 잊지는 않았으나 잊고 싶다는 뜻이 잘 전해졌다. 심 교수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걸세. 난 시를 써 오라고 했지, 졸속으로 써 갈긴 문장 몇 줄 볼 생각은 없네. 성에 안 차면 다 퇴짜야.”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까다로운 말을 하는 노교수 앞에서 학생들이 신음을 흘렸다. 심 교수가 인자한 낯으로 돌아보다 한영을 흘끗 보았다. 한영은 주변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정적인 얼굴이었으나, 심 교수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재희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심 교수가 시선을 느낀 듯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재희는 금세 고개를 숙여 버렸다. 교재를 보는 척했다. 아니, 보려고 노력했다. 재희는 이제 한영이 왜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이한영은 절벽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었다. 마재희를 품에 안은 채. 그러니 자신은 죽은 듯 몸을 굳히고 있어야 했다. 한영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것이다. 꼼짝도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 무엇도 듣지 않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심인철 교수님.”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심 교수를 불렀다.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강의실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억세 보이는 인상과 강퍅해 보이는 눈매였다.

“잠시 좀.”

그렇게 짧게 시간을 내달라 요구한 남자 뒤에는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둘 다 편한 면바지와 잠바를 걸친 차림이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수고들 했네.”

심 교수는 마치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웃음기를 천천히 거둔 얼굴로 교수는 담담히 수업을 파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심 교수는 남자들과 함께 강의실에서 멀어졌다.

그 남자들이 형사들이었다는 것을 재희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국문학과 교수인 심 교수는 필연적으로 출판 업계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연구한 결과물을 오륙백 페이지의 책으로 발간한 것만도 이제껏 열 권이 넘는다. 신간의 추천사나 비평을 부탁받은 일까지 도합 한다면 더 많은 수의 출간물이 그의 이름을 걸고 나온 것은 명확했다.

그 수많은 저작물 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글들을 추리는 것은 여간 집요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필화(筆禍) 사건이었다.

“심인철 교수님이 일주일 전에 출간한 비평집, 그거. 긴 글도 아니란다. 현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작가의 작품은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두 줄 기껏 되나 싶은 문장이었다고. 근데 그게 반체제적이래. 그래서 조사 중이란다. 우스운 일 아니냐?”

영재가 입매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미쳤지. 단단히 미쳤어.”

“언젠 안 미쳤니?”

“박상현 말로는 형사들이 아주 연구실을 통째로 털어 갔다던데. 그간 쓴 서류며, 편지며, 다 조사해 간다고.”

“……이한영은 괜찮겠지?”

“걔는 왜?”

영재가 심드렁히 되묻자, 인혜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골을 부여잡았다.

“이한영이 요즘 수발들고 있던 교수님이 심인철 교수야, 바보야.”

“……에이씨, 하필…….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괜찮대. 아까 여기로 전화했어. 오늘 늦는대.”

“걔도 조사받는대?”

“물어봤더니 형사들하고 잠깐 얘기만 했대. 그게 끝이었다던데…….”

말을 흐리는 인혜와 같은 생각을 했던가, 영재가 미간을 팍 좁혔다.

“……이 새끼, 우리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또 거짓말하는 거 아냐?”

“나도 몰라.”

인혜와 영재가 한마음이 되어 한숨을 흘렸다.

그러나 재희는 달랐다. 그녀는 얕은 숨 한번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심 교수가 구속됐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그랬다. 목 언저리가 콱 막혀 있었다. 가끔씩 거울로 확인한 얼굴은 백짓장처럼 희게 질려 있었다.

재희도 알았다.

자신이 제 발 저리는 범인 같은 얼굴을 줄곧 하고 있다는 것을.

“재희야? 괜찮아?”

“……아. 응.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래서 놀라서…….”

재희는 말을 하다 말고 혀를 깨물고 싶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고? 정말?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있었던 필화 사건은 아무도 안 다치고 기소 유예 정도로 마무리됐어. 한영이야 괜찮을 거고.”

한영을 걱정할 재희를 잘 안다는 듯 영재가 무뚝뚝하게 그녀를 달랬다.

재희는 영재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심 교수님은?”

“유명한 분이라 경찰도 막 대하진 못해. 지금 벌써 대학로 난리 난 거 봐. 강대환 선배까지 그렇게 된 마당에 그 교수님까지 다쳐 봐, 애들이 가만있겠냐? 안 그래도 내년에 선거 있다고 여론 신경 써야 할 판인데 섣부르게 일 키우진 않겠지.”

그러나 그 말을 한 당사자인 영재조차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심드렁한 척 말했지만, 그 낯빛에서 어두운 기색을 다 지워 내지는 못했다.

분위기가 죽은 듯 가라앉으려는 찰나 인혜가 박수를 짝 쳤다.

“우리, 이한영 없는 김에 걔 생일 얘기나 할까?”

과장되게 화색 어린 음성으로 인혜는 화제를 틀었다.

“야, 최영재, 이제 십일월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스케줄 맞춰.”

“박상현 오면 해.”

“걔가 뭐 스케줄이 있겠니? 맨날 사진 인화한다고 학교에 처박혀 있겠지.”

“야, 올해 이한영 생일 기말고사 기간이야.”

“웬일이야, 시험 보려고?”

“나 말고. 이한영이 시험을 보잖아, 멍청아.”

“누구 보고 멍청이래? 눈치 없는 새끼가.”

“뭐? 새끼?”

“뭐. 넌 새끼란 말 안 쓰니, 새끼야?”

“……아, 진짜, 박상현 언제 와? 걔가 있어야 좀 덜 싸우기라도 하지, 진짜…….”

상현은 양반이 못 되었다.

“얘들아, 또 싸워?”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상현이 혀를 끌끌 찼다. 인혜가 손을 흔들었다.

“넌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쁘니?”

“어이구, 내가 보고 싶었어? 어쩔 수 없었어. 학보사 일 때문에.”

인혜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상현을 주시했지만, 상현은 희희낙락하며 들고 온 봉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봐라. 이 몸이 오늘 모시고 온 손님을.”

“……저 미친놈이. 치워. 마실 기분 아니야.”

“어라? 왜?”

“이한영이 심인철 교수 일에 휘말릴지도 모르는데, 지금 편하게 술 까먹을 때냐?”

상현이 킬킬 웃었다.

“그거 잘 끝났어.”

“뭐?”

“교수님 오늘 집에 돌아오셨대. 무사히. 그래서 내가 축하할 겸 이렇게 술을 들고 온 거 아니야.”

영재와 인혜가 잠시 서로를 보고는 한숨을 푹 흘렸다. 재희도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괜찮으셔?”

“괜찮댔어. 다행히 연세 드신 분이라고 험하게 나오지는 않았나 봐.”

상현이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 말했다.

재희는 무표정하게 술병을 보며 생각했다. 다행인 일이라고.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일까.

속을 슬금슬금 태우기 시작하는, 이 거무스름한 감정들의 정체는.

“그러니까 오늘은 축하주로, 쭉?”

“대낮부터 나발 부는 꼴은 못 봐.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지금 초저녁이야. 게다가 너무 괴롭다네, 친구. 술로써 시름을 잊게 해 줘.”

“방금 전까지 축하주라며?”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영재와 상현이 봉지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재희는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마시고 싶어.”

모두가 굳었다.

눈이 동그래져 바라보는 세 쌍의 눈동자 앞에서, 재희는 무뚝뚝하게 다시 말했다.

“지금 마시고 싶어.”

“……어, 그래. 그래라.”

영재가 얼떨떨한 얼굴로 재희에게 봉지를 건넸다.

말없이 술상을 준비하는 재희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무언가 느꼈던가. 친구들이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일이냐, 뭐 들은 거 없느냐, 서로에게 묻는 시선이었다.

술상은 뚝딱 차려졌다. 그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상현이었다. 재희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소주병 하나를 땄다.

“우리 재희, 주량은 어느 정도 되시나?”

“안 마셔 봤어.”

“아, 생판 처음이야?”

“응.”

“그렇다면 바람직한 주도를 이미 체득한 내가, 한 가르침 해 줘야겠네?”

돌아가는 상황이 자못 불안해졌던가, 영재가 인상을 쓴 채 인혜에게 한마디 했다.

“……야,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주란다고 술병을 내주니?”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상현은 신속했고, 재희는 과감했다. 상현이 따라 준 잔을 단숨에 들이켜는 재희를 보며, 영재와 인혜는 한숨을 흘렸다.

친구들이 그러든 말든, 재희는 처음으로 맛본 소주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별달리 없었다.

“……이런 걸 왜 마셔?”

그 말에 상현이 뒤집어지며 웃었지만, 재희는 무시했다. 직접 술병을 잡았다.

뒤늦게 그것을 본 상현이 어어, 하는 사이, 재희는 술을 따랐다. 마시던 술잔이 아닌, 옆에 놓인 물컵에, 한가득.

그리고 단숨에 그 컵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미친, 야!”

영재가 뒤늦게 외쳤지만, 재희는 이미 그것을 홀라당 마신 후였다.

* * *

“주인도 없는 집에서 너희 뭐 한 거야?”

기다리던 목소리가 불현듯 들려와,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외출하던 차림 그대로 현관 앞에 서 있는 한영이 보였다.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는 현관 앞에 대자로 누워 있는 상현을 담고 있었다.

상현이 가물가물 중얼거렸다.

“……한영아…… 긴장해라. 신흥 강자의 등장이시다…….”

그대로 정신을 놓는 친구를 두고, 한영은 고개를 들었다. 차분한 눈동자가 멀지 않은 곳에 웅크리고 누운 영재의 등을 잠시 담았다. 그 등에 기대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인혜까지 확인하더니, 곧장 재희에게로 향했다.

재희가 두 손으로 곱게 감싸고 홀짝이는 글라스까지 눈에 담고 나서야 한영은 물었다.

“얼마나 마셨어?”

재희는 조용히 되물었다.

“이 잔으로?”

“어느 잔이든, 다.”

“열두 잔.”

“…….”

“그리고 소주잔으로는 일곱 잔.”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으며 한영은 소주병을 눈으로 헤아렸다.

“그 외에는 없고?”

“응.”

“그렇구나. 잘했어.”

재희는 무엇을 잘했다는 건지 몰라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그는 답을 알려 주었다.

“계산하면서 마신 거, 잘했다고.”

“아.”

“몸은 괜찮아?”

“응.”

“취기는?”

“취기?”

줄곧 담담하던 한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으나, 재희는 다시 떠오르진 않을까 싶어 가만히 한영의 얼굴만 응시했다.

참 이상하지.

술 마시는 내내, 그렇게 머릿속이 시끄러웠는데.

한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속이 잠잠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행복해졌다.

“다른 애들이야 이해는 가는데, 인혜는 어쩌다 저렇게 됐어?”

“……오해가 있었어.”

“무슨 오해?”

“내가 마시는 게 술이 아니라 물 아니냐고…… 내 잔 뺏어 마시다가.”

“그 한 잔으로 저렇게 됐어?”

“응.”

한영이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얼마 가지 않아 자연스레 사라졌으나, 재희는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계속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 늘 편안했으면 좋겠다. 소주를 물처럼 무미건조하게 마시고 있는 한영의 얼굴을 보며, 재희는 대신 쓰디쓴 감정을 느꼈다.

“……생전 안 마시던 술을 왜 갑자기 마셨으려나…….”

한영이 제 잔에 술을 따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았지만, 재희는 대답해 주었다.

“너 때문에.”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영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묻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희는 다시 말해 주었다.

“너 때문에 마셨어.”

“…….”

“네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의외의 말을 들었던 것일까. 한영은 그녀를 고요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금세 잔잔히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섭섭하네.”

“……응?”

“나는 요즘만큼 행복했던 적도 없거든.”

재희는 일순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모든 상황을 알고서도 한영의 입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듣자니 목이 메었다.

“……그랬어?”

“응.”

“…….”

“그런데 너는 확실히 행복해 보이지는 않네, 요즘.”

“……아니야.”

“그렇구나. 아니구나.”

한영이 무심히 웃으며 술을 마셨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광경을 재희는 홀린 듯이 눈에 담았다.

그녀는 문득 볼이 너무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비가 온 듯 입술의 감각이 멀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잠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한영이 빈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마치 재희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잘 아는 것처럼.

재희는 문득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아는 이한영. 그리고 늘 아무것도 모르는 마재희. 그것은 억울했다.

그녀도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많이 괴로워?”

조용히 들려온 질문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다시 차분히 물었다.

“못 버틸 것 같아?”

그는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취기 때문에 더디게 굴러가는 머리였음에도, 재희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이번 필화 사건으로 한영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함께 느껴야 했다. 심 교수의 위기에 한영 또한 일조했을 거란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것을 알고도 묵인하는 것이 공범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까마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지 모른다. 그때마다 그녀는 한영의 안위와 양심에 대해 생각하며 홀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홀로 감당해야 할 무게가 문득- 숨이 막혔다.

“재희야.”

한영은 만약 재희가 그렇다, 대답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그 흔한 배려는 없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찾는 계략가의 눈빛이었다.

재희는 그 눈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한영의 변화를.

이한영은 그녀가 아무리 괴로워한다 한들,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

“재희야, 술만 마시지 마. 속 버려.”

과자가 담긴 그릇을 밀어 주고 있는 한영은 모를 것이다. 둔탁하고 어릿어릿한 만족감이 재희의 머리를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고뇌는 순식간에 잊히고 있었다. 온갖 허식을 집어던진 본성이 한영의 변화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의 달뜬 시선이 한영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문득, 불쑥 치고 올라오는 욕구가 있었다.

“……다리 저려.”

그러자 한영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상냥히 답했다. 다리 펴고 편하게 앉으라고.

그래서 재희는 그 말대로 했다. 편하게 자리를 고쳤고, 곱게 모으고 있던 다리를 상 아래로 폈다. 발끝에 한영의 무릎이 닿았다 싶은 순간, 그녀는 더 길게 다리를 뻗었다.

묵직한 감촉이 발끝에 닿았다.

정갈한 태도로 술잔을 입에 대고 있던 한영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두 쌍의 눈동자가 맞부딪쳤다.

“…….”

“…….”

한영은 놀란 기색은 보여 주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재희의 두 눈을 주시했을 뿐이다. 마치 재희가 어디까지 멋대로 행동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그래서 재희는 나른한 취기에 몸을 맡긴 채 발끝을 천천히 움직였다.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에 면 스타킹을 신었지만, 감촉은 똑똑히 전해졌다. 딱딱한 청바지의 재질, 그 안에 갇힌 살덩이의 단단한 무게감. 그녀의 발가락이 닿은 순간부터 반응을 보였던 살덩이는 몇 번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부풀어 올랐다.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부드럽게 누르며 한영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영이 고요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술버릇이 나쁘네.”

“응…….”

더웠다. 재희는 목이 타는 것 같아 글라스에 담긴 술로 목을 축였다. 한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한영이 그녀의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물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한영이 너한테서.”

“그럴 리가. 난 이런 걸 가르쳐 준 적 없는데.”

나른히 웃으며 한영이 손을 움직였다. 종아리를 쓸고 내려온 손이 곧 복사뼈를 건드렸다. 발등을 잡는 한영의 손에 간지럼이 일었다. 둔탁한 머리와 달리 몸의 감각은 예민했다. 재희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혼자 깨친 거라면, 천재네.”

한영이 웃으며 발바닥 안쪽을 할퀴듯 긁어내렸다.

“아…….”

짜릿함에 재희는 몸을 떨었다. 긁힌 것은 발인데,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한영이 상을 돌아 가까이 다가왔다. 재희는 점점 가빠지는 숨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원했다. 온몸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그가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안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가온 한영은 무심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킬 뿐이었다.

“계단 올라갈 수 있겠어?”

재희는 실망했다.

“아니…….”

비틀거리는 그녀를 한영이 바로 안아 들었다. 한영의 피부에 맞닿자 더 애가 탔다. 어리광 부리는 아이처럼 한영의 목에 볼을 문지르며 칭얼거렸다. 자기도 이렇게 뜨거우면서. 재희는 뜨거운 한영의 목에 입을 맞추며 그를 원망했다. 왜 안 만져 주는 거야. 너도 이렇게 원하면서.

한영이 그녀를 안고 이 층으로 향하는 내내 재희는 발정 난 고양이처럼 몸을 비비적거렸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그의 목을 빨아 울혈을 만들었을 때 잠시 뜨거운 숨을 흘린 것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졸리면 먼저 자.”

한영은 그녀를 그의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권했다.

그것이 상냥한 말씨였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다. 그럼에도 재희는 서러워졌다. 심지어 한영은 붙잡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곧장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일 층으로 내려가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멍하니 한영의 방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가만히 그러고 있자니 답답했다. 덥기도 했다. 재희는 꾸물꾸물 움직여 옷을 벗기 시작했다. 춥다고 옷을 껴입어서 벗어야 할 것이 많았다. 스웨터, 그 안에 입은 면 티, 길고 팔랑거리는 스커트와 스타킹까지- 대장정이었다. 옷을 벗다 말고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색색 숨을 흘리며 속옷까지 벗었다. 한영이 그의 집에서는 벗으라고 했던 브래지어부터, 그녀가 부끄럼에 벗기를 거부했던 팬티까지, 전부 다.

그러고 침대의 부드러운 이불에 누워 있자니 해방감이 들었다.

재희는 자유를 만끽했다. 벌거벗은 몸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이틀이 멀다 하고 계속 이불을 세탁하는 바람에 새 이불을 산 참이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피부에 감기는 감촉을 음미하듯 재희가 느릿느릿 몸을 꿈틀거리고 있을 때였다.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멍하니 시선을 주었다.

이불 위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너머, 닫힌 방문이 시야에 잡혔다. 그 앞에 선 한영도 보였다.

몽롱한 시야 때문에 한영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희는 눈을 비비며 한영을 보았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을 천천히 떼어 내는 한영은 무표정했다. 가만히 주시해 오는 시선이 쏘는 것처럼 뜨겁다.

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의 몸을 누비고 다니고 있었다. 마재희의 풀린 눈매에서, 홍조가 어린 볼, 어깨 위로 팔을 뻗고 있는 바람에 과시라도 하듯 봉긋 솟아오른 젖가슴, 서늘한 공기에 뾰족이 일어난 유두, 새하얀 아랫배의 피부, 아슬아슬하게 다물려 치부를 가리고 있는 두 다리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있던 한영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에 든 것 같던데, 안됐네.”

“……응?”

“술 말이야.”

한영이 팔을 교차해 티를 벗고는 눈을 휘었다.

“……미안하지만, 너 이제 어디 가서 술 못 마셔, 마재희.”

침대로 다가오며 한영은 바지 버클을 풀었다. 재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한영의 행동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녀는 한영이 속옷까지 벗어 던지는 광경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아.”

그의 아랫배에 딱 달라붙은 성기를 보자 입에 침이 고였다.

한영도 마찬가지였을까. 침대에 오르며 한영이 입술을 핥는 것이 보였다. 재희는 기대감으로 떨리는 숨을 흘렸다. 먼저 다리를 벌렸다. 콘돔을 성기에 씌우고 있던 한영이 눈웃음을 흘렸다. 그는 곧 그녀의 두 발목을 잡았다. 활개 치듯 활짝 벌린 다리 사이에 한영의 샅이 닿은 순간,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이거였다. 이것을 원했다-.

그 순간 그가 바로 삽입했다. 재희는 교성을 흘리며 허리를 휘었다.

“……야하네.”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며 한영이 낮게 씨근거렸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흥건하게 젖어서.”

“아…….”

순식간에 밀고 들어오는 몸에 재희는 전율했다. 한영이 쾅, 찧듯 올려쳤다. 자지러지는 신음이 재희의 입가에서 터졌다.

“……삼키는 것도 힘들어했잖아.”

“아…… 응…….”

“그런데 언제 이렇게 게걸스러워졌어?”

“아아…….”

조금의 고통도 없이 그녀는 흥분하며 몸을 떨었다.

완벽하게 그의 몸에 적응한 육체를 내려다보며, 한영은 만족하며 웃었다. 평소의 다정과는 거리가 먼 웃음이었다.

“오늘은 네가 움직여 봐. 원하는 대로. 솔직하게.”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잠깐씩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한영과 몸을 붙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금방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한영의 몸 위에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무아지경이 되어 몸을 흔들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에서 네 발 짐승처럼 엎드려 한영의 성기를 물고 있었다. 한영은 절대자처럼 침대 옆에 선 채 그런 재희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있었다.

그가 서재에서 여분의 콘돔을 가지고 온 참이었다는 것을 재희는 어렴풋이나마 기억해 냈다. 자신이 그 짧은 기다림조차 인내하지 못하고, 그가 오자마자 짐승처럼 성기를 물었다는 것도.

한영은 계속해서 성기를 빠는 재희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몽롱하게 올려다보며 ‘귀속’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마재희는 이한영의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눈빛으로 웃으며 내려다보는 한영의 앞에서, 재희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해 줄까.

어렴풋이 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자세로 해 줄까. 원하는 걸 보여 줘.

어린 짐승 달래듯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재희는 생각했다. 생각보다는 본능적인 반응이라 표현하는 게 더 적합했을까. 재희는 목구멍에 담고 있던 성기를 천천히 빼냈다.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나자 한영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 미소를 더 오래 보고 싶었으나, 재희는 그럴 수 없었다.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반복된 성행위 때문이 아니다. 흥분을 못 가누고 질이 멋대로 수축하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그가 들어오기만을 바랐다.

재희는 이불보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로 몸을 지탱한 채 무릎을 세웠다. 아찔하게 등줄기가 휘어지며 엉덩이만 솟아올랐다. 그렇게 한영의 눈앞에서 젖은 입구를 내보인 순간, 뒤에서 낮은 욕설이 터졌다. 침대가 강하게 흔들린다 싶은 순간 한영이 삽입해 왔다. 그간 보인 여유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한영은 처음부터 빠르고 강렬했다. 재희가 그 자세 그대로 몇 번이고 절정에 오를 정도로.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재희는 잠결에 희미하게 들리는 소음과 코끝에 맡아지는 냄새로 주변을 파악했다. 일 층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나누는 소리와 함께 북엇국 냄새가 났다. 한영의 목소리도 가끔 들렸다. 인혜가 외박했다고 놀라 집으로 뛰어가는 소리도 들었다. 금세 일 층은 조용해졌다. 재희는 그녀의 수면을 깨우던 소음이 사라지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일요일 내내 재희는 그렇게 한영의 침실을 차지한 채 일어나지 못했다. 행위가 격렬했다는 것은 기억했다. 그러나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앓아누운 것은 첫 행위 이래 처음이었다.

힘이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재희를 한영은 하루 종일 상냥한 얼굴로 도왔다. 씻기고 옷을 입혔으며, 밥을 먹였다. 재희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한영이 모든 것을 다 손수 해 주었으므로. 그는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즐겼다.

그리고 한영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녀를 제 품에 싸고 있으려는 욕망을 내비칠 때마다- 재희는 그에게서 일어난 뚜렷한 변화를 감지했다.

한영의 빗장이 완전히 열려 있었다.

그녀가 똑똑히 그 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활짝.

“아직도 힘들어?”

“……괜찮아.”

한영은 다정한 눈으로 재희를 보았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상태를 점검하려는 눈이었다. 재희는 뽀송뽀송한 피부와 이불을 느끼며 뒤늦은 수치심을 숨겼다. 술에 취해 자신이 행했던 행동들이 갑자기 생각난 탓이었다. 일 층에서 잠들어 있었던 친구들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니.

볼이 발개졌기 때문일까. 한영이 금세 그런 그녀를 눈치채고 웃었다.

“술주정이 대단하던데.”

이때다 싶었는지 한영이 놀렸다.

재희는 이불 아래로 얼굴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너도 술버릇 안 좋잖아…… 술에 취해서 나한테 무슨 말 했는지도 기억 못 하면서.”

“나는 어제 얼마 마시지도 못했어, 재희야.”

“아니…… 어제 말고……저번에. 그, 네가 술에 취해서 내 방에 건너왔을 때.”

그것이 언제인지 떠올렸는지 한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재희는 여전히 얼굴을 숨긴 채 그에게 물었다.

“……언제인지 넌 기억도 안 나지?”

그러자 한영은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그럴 리 없잖아, 라고.

“그날 밤 내가 너와 대화도 했어?”

“응. 곰 인형 이야기 해 줬어.”

한영이 지나치게 조용하단 생각이 들었다. 재희는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한영의 얼굴은 잠잠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곰 인형 기억 안 나?”

“기억 안 날 리가.”

한영이 웃으며 재희의 얼굴을 반쯤 가린 이불을 치웠다.

“내 인생에 곰 인형이라면 하나밖에 없었어. 어머니가 두고 가신 거.”

재희는 놀란 눈으로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미처 몰랐다. 할머니가 주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중요한 걸, 나한테 줬던 거야?”

“네가 갖고 싶어 했으니까.”

“…….”

“재희야, 나는 그 인형에 애착이 없었어. 인형 상태를 떠올려 봐. 그게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물건일 리 없잖아.”

“……아니야. 굉장히 예쁜 인형이었어.”

“네 기억에는 그랬구나. 내 기억에는 보기 괴로울 정도로 더러웠는데.”

한영은 웃으며 재희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해지고 뜯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지. 옆구리가 터져서 솜까지 삐져나와 있었는데, 넌 기어코 그게 좋다고 안고 다녔어.”

“…….”

“어린 마음에도 취향 참 특이하다 싶었지. 이해할 수 없었어. 누가 봐도 영 아닌 물건이었거든.”

재희는 멍하니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언뜻 기시감이 들었다.

줄곧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의 미팅에 가려던 걸음을 되돌려, 한영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그날. 그들에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을, 그날의 기억이.

미팅을 가다 말고 되돌아온 재희를 내려다보던 한영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는 마치 그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곰 인형.’

-이라고.

끝내 이한영을 선택한 마재희의 앞에서, 한영은 분명 그렇게 자조했다.

“그래서? 내가 그 인형에 대해 뭐라고 했어?”

“……그냥. 그거 기억나냐고 나한테 물어봤었어.”

“희한하네. 왜 갑자기 그런 걸 너한테 물어봤을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영이 잔잔히 웃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한영은 답을 알고 있다. 이한영은 아마 마재희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어린 시절의 곰 인형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재희의 취향에 대해 계속 생각했을 것이고, 계속 이해할 수 없다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이한영을 사랑하는 마재희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이한영이 마재희의 눈에 얼마나 귀하게 보이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재희는 서서히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인형, 왜 다시 가져갔었어?”

술에 취한 한영이 드러냈던 진심을 다시 듣고 싶었다. 취하지 않은 입술로 듣고 싶었다.

“……나한테 한번 준 걸, 나중에 다시 돌려달라고 했잖아.”

“기억 못 하는구나. 네가 그거 꿰매 주겠다고 바느질했거든.”

“……내가?”

“바늘로 무수히 손가락 찔려 가면서 며칠을 씨름했지. 내가 놀아 달라고 하는 것도 다 무시하고.”

그 순간 재희는 한영의 입가에 번지는 묘한 미소를 보았다.

“……그래서 다시 돌려달라고 한 거야.”

“…….”

“더 내버려 두었다간 네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렇게 농담하며 웃고 있는 한영이었는데.

재희의 눈에서 뚝, 뚝,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한영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짐짓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녀를 놀렸다.

“아직도 취했어?”

“……아니야, 바보야.”

재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서둘러 눈물을 닦아 냈다. 웃고 있는 한영의 얼굴을 보자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재희가 보기에 한영은 그녀가 왜 우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그러진 자아상을 드러내고도 무감각했다. 그것에 슬퍼하는 재희를 보고도 태연히 웃고 있었다.

이제껏 마재희의 눈물에 예민하게 반응해 왔던 사내는 더 이상 없는 걸지도 모른다. 마재희를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애지중지하던 이한영은 이제 없다. 한영은 그녀가 울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한영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져야 하는 무게라는 것처럼.

그래서 재희는 안심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불안해졌다. 한영이 말한 곰 인형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으므로.

“……줬다 빼앗지 마.”

“안 그래, 재희야. 걱정하지 마.”

“……줬다 빼앗는 거 나쁜 사람이야. 다시 가져가지 마.”

“그래. 그럴게.”

한영은 다정히 웃으며 재희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재희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애정이 담긴 입맞춤을 한 번이라도 더 건네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영의 비틀림이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찾고 있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부재가 그의 가슴속에 이렇게까지 큰 비틀림을 가져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컸다 쳐도, 한영의 할머니는 그에게 헌신적이었다. 한영에게는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마재희 또한 계속 곁에 있었다.

분명 우리는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왔는데.

그런데도 왜 너는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프락치 행위로 생긴 죄책감 때문일까?

생각하다 보니 자꾸 슬퍼졌다. 재희는 계속해서 한영의 품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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