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프락치.
그 단어는 여러 의미로 쓰이지만, 대학생들에게는 대체로 하나의 의미로 쓰인다.
학교에 숨은 잠입 요원.
그 소속이 경찰이든 안기부이든, 그 실체가 나랏돈을 받고 일하는 공무원이든, 평범한 학생이었다가 ‘변절’한 것이든, 그 시작은 따지지 않았다. 대학생들은 그들을 독재 정권의 밑을 닦아 주는 끄나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단어로 뭉뚱그려 정의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
“많겠지. 공안 담당하는 기관만 몇 개냐?”
“……기관이 다르면 자기들끼리 프락치인지 어떻게 알아?”
“서로 알겠냐? 첩보 영화 생각해 봐. 007 같은 거. 프락치는 스파이야. 기관끼리도 경쟁하고 있을걸? 충성 경쟁.”
프락치에 대해 알려 달란 말에 순순히 응해 준 영재는 이 화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소파에 누워 심드렁히 덧붙였다.
“그렇다고 잘생긴 로저 무어 떠올리진 마라. 하는 일이 다르니까. 007은 하는 일이 정의롭기라도 하지, 프락치는 그냥 쥐새끼야, 쥐새끼.”
“……왜?”
“학교에 숨어서 운동권 애들 정보 빼돌리니까.”
“…….”
“이름, 소재지, 주거지, 가족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교우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사상은 어떤지, 독서회나 공개 석상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전부 다 파악해서 위로 보고하는 놈들이야. 그게 쥐새끼 아니면 뭐냐? 테러리스트나 간첩도 아니고, 고작 스무 살짜리 애들 감시하는 건데.”
“……선배들이 올해 들어와서는 많이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고 했는데. 그래도 프락치가 있는 거야?”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거는 그냥, 사복 경찰이 교내에 안 돌아다닌다는 거고. 프락치는 다른 얘기지. 그쪽은 어쨌든 눈에 안 보이잖아.”
재희는 너무 머뭇거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애써 태연히 물었다.
“영화에서처럼 막, 싫어하는 사람한테도 일부러 친하게 구는 거야?”
“호감이 무슨 문제야. 위에서 시키면 그냥 옆에 붙는 거지.”
재희는 자신이 왜 심 교수의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숨이 막혔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 있는 한영의 얼굴을 본 순간, 자신은 내심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것이리라. 한영이 심 교수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프락치가 교수들도 감시해?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재희는 참았다.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었으니까.
심 교수는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다 학교에서 해직되었다. 그러다 정부가 온건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복직된 것이 작년 겨울의 일이다. 듣기로는 재야인사들과 친분이 두텁다 했다.
그리고 그런 인사라면, 감시의 눈길이 붙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심 교수가 누굴 만나고,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또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막, 편지나 중요한 서류 같은 거 훔치고 그러는 거야?”
“뭔들 못 하겠냐.”
“거기에 묻은 지문이나…… 필적 같은 것도 검사해?”
“그러겠지. 뭐 편지지 구경하겠다고 가져가겠어?”
“……설마…… 그런 일이 정말 있겠어.”
그렇게 불신하듯 중얼거렸지만, 재희의 머릿속은 불길 속에 있었다.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다.
“근데 이런 건 갑자기 왜 묻냐? 생전 관심도 없더니?”
“……이재석 선배라고, 프락치로 소문난 선배가 있거든. 그 선배 때문에 궁금해져서.”
“아, 그랬냐.”
무뚝뚝한 얼굴로 영재가 턱을 긁었다.
“친했냐?”
“……아니.”
“친하지도 않았다면서 왜 요즘 얼굴이 다 죽었냐?”
“……내가 그래?”
“어. 이한영이 말 안 해 주냐? 너 요즘 말랐다고?”
영재가 피식 웃었다.
“물론 말 안 해 주겠지. 어미 닭인데, 뭘 해도 병아리가 예뻐 보이시겠지.”
정말 그런 걸까.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해 주는 걸까.
회의적인 낯을 숨기기 위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영의 집 거실 한편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영재의 짐을 보았다.
“……영재야, 너 왜 집에 안 들어가?”
“우리 집 영감님 때문에.”
“아버지?”
“어. 친히 하숙집까지 납셨어.”
영재는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서울에 사는 친척 집에서 자랐다. 시골의 종갓집을 지키는 그의 부모님과는 전화로 싸우길 반복했는데, 이번에는 스케일이 남달랐다.
“왜?”
“그동안 벼르던 걸 이번에 해 보겠다, 이거지. 내 다리몽둥이 부러뜨리러.”
“…….”
“자꾸 데모하고 허구한 날 경찰서 끌려다닐 거면 군대나 가라더라. 내가 미쳤냐. 지금 군대를 가게? 그래서 ‘나 지금 군대 가면 죽어서 돌아와요.’라고 말했더니, 그럼 아예 군대도 못 가게 한다고 진짜로 다리 부러뜨리려 하잖아. 그래서 도망 나왔어.”
시큰둥하게 툴툴거리는 척하면서도 영재는 가라앉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영재가 다시 들고 있던 시집으로 시선을 주어 다행이었다. 재희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영재는 운동권이다. ‘시위 주동자’와 ‘단순 가담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조금 더 행보가 온화한 인혜도 대동소이했다. 학보사에 속해 있는 상현도 정권에 비판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문득 재희는 이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한영이는 친구들을 보며,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해 왔을까.
“박상현 불러다 앉혀 줘?”
“……응?”
“너 고민 있으면 걔한테 얘기하잖아.”
“…….”
“그러고 보니 걔는 요즘 뭘 하고 다니는데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그렇지만 상현에게 무슨 상담을 할 수 있을까. 한영이 심 교수의 편지를 몰래 빼어다가 다른 곳에 넘기는 것 같다고? 그렇게 사찰을 돕고 있는 것 같다고?
너희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증오하는, 프락치인 것 같다고?
“걔네 집에 전화해 볼까?”
“……아니야. 나 고민 진짜 없어.”
말 못 한다.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될 단어가 바로 그 프락치라는 단어다. 몇 년에 걸쳐 쌓아 온 관계를,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단어.
그렇게 파괴적인 단어였다. 프락치, 라는 단어는.
과거의 한순간이 아니다. 이제 재희는 이한영의 현재이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강대환의 사건이 끝이 아니다. 한영이 지닌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한영이 강대환 사건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영은 강대환에게 도움을 주려 했다. 그녀는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한영은 이재석과의 관계에 대해 명확히 설명해 준 것이 없었다. 그로서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화제였을 테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이제야 재희는 이한영의 모든 미스터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김선정이 일 학기 때도 여자 동기들을 괴롭혔다는 것을 한영은 ‘알고 있었다’고 했다. 모두가 쉬쉬한 사건을, 그는 어떻게 알고 있었던가. 게다가 그는 너무나 쉽게 김선정의 악의를 파악했다. 조교가 김선정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영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훤히 꿰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언제부터지?
역시 대학교에 들어온 후 프락치가 된 걸까? 정확히 언제? 어떻게? 왜?
재희는 견딜 수 없어 얼굴을 감쌌다. 왜 몰랐을까. 한영이가 그런 일에 내몰릴 때까지, 왜 나는 몰랐을까.
고문을 당했나? 괴롭힘을 당했을까? 야밤에 몰래 끌려갔던 걸까? 그래서 형사들이 겁을 주며 한영이를 협박했던 걸까? 도대체 언제?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거지? 한영이 몸에 분명 상처는 없었다. 없었지만- 재희는 소문으로 들은 것이 있어 안심할 수 없었다.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도 사람 하나 망가트리는 방법 정도는 많다. 만약 한영에게도 그런 일이 생겼던 거라면.
재희는 괴로워졌다. 학교와 집에서의 일상이 철저히 분리된 한영을 왜 나는 진작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다리를 다친 척 데모에 빠지게 한영이가 유도했을 때도, 왜 제대로 그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한영은 그때 자신은 괜찮지만 너는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더 생각해 보았어야 하는데.
심 교수에게 거리를 두라고 한영이 조언했을 때,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이재석이 ‘거기서 나오라’고 했던 말을, 나는 그간 왜 그렇게도 잊으려 노력했을까.
재희는 창문 너머를 멀거니 응시했다. 한영의 방 창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초겨울의 바람이 스산하게 그녀의 방 창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풍경이 외로이 울었다.
“.......”
만약 한영과 성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아마 나는 영영 한영이의 비밀을 몰랐겠지.
같은 침대에 눕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새벽에 몰래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밤중에 걸려 온 수상한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이재석과 한영이 미네르바에서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모든 의심이, 그들이 공유한 이부자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재희는 흔들리는 풍경을 올려다보며, 슬픈 직감을 받아들였다. 이한영이 마재희를 욕망하면서도 거리를 두었던 것은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예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 * *
마재희가 세상의 일면을 깨닫고 소꿉친구의 이면을 보았다 할지라도, 시간은 냉정히도 흘러갔다.
재희는 시선을 돌렸다. 한영은 열변하는 교수의 얼굴만 착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평온해 보였다. 재희가 부모님과 한영 앞에서 찻잔을 깬 이후로 이미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학교에서 엿본 이한영은 지극히 일상적이었고,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시선을 느끼고는 있을 것이었다. 마재희가 계속해서 묻고 싶어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어젯밤 한영의 방 창문은 잠겨 있었다. 재희는 한영을 기다렸지만, 그는 새벽 늦게야 들어와 씻고 옷만 갈아입고 나간 듯했다.
창문에 붙여 놓은 쪽지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바쁜 걸까.
재희는 그가 왜 그렇게 바쁜지, 그 새벽에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여기까지. 과제는 다음 주까지.”
강의실을 나가는 교수의 목소리를 끝으로 주변이 소란해졌다. 책을 챙겨 들고 일어나는 한영을, 재희는 시선으로 좇았다.
불쑥 충동을 느낀다.
지금 한영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싶다고. 잠시 대화 좀 하자고.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입을 떼기도 전에, 한영은 차갑게 경고하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것이다.
이것은 룰 위반이라고.
그간 온갖 이유와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마재희와 이한영이 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려 애써 왔는데, 그것을 단 한 방에 무너뜨릴 셈이냐고.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수업 내내 신경 쓰이던 또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호명은 여전히 한영을 보고 있었다.
재희는 그 노골적인 시선 앞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호명은 여전히 한영을 의심하고 있었다. 한영의 종적을 캐고 있다. 지금은 정황상의 의심일 뿐이지만, 캐내면 캐낼수록 의심스러운 상황이 보일지도 모른다. 한영이 정말로 프락치인 이상.
호명의 의심이 더 자라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재희야, 다음 수업 가야지.”
“응.”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경신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나 잠깐 사물함 들렀다 갈게.”
“응? 같이 가.”
“아니야. 괜찮아. 먼저 가.”
재희는 아슬아슬하게 발끝을 세운 채 물에 동동 떠 있었다. 물을 빼든가, 헤엄쳐 그 자리를 벗어나든가, 구명하려면 그 두 가지 수밖에 없었다.
경신과 헤어져 복도를 걸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 때 교정이 잘 보이는 창문 밖을 확인했다. 인문대 건물에서 막 벗어난 한영이 교정을 걷고 있었다. 재희는 그의 시간표를 다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한영에게 한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딘지도, 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한영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호명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더 의심만 키워 가고 있겠지.
“…….”
재희는 말없이 교정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서둘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굳혔다.
한영은 캠퍼스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후원에 앉아 있었다. 외진 정자 아래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다. 늘 시선에 시달리는 한영이 가끔가다 혼자 있고 싶을 때 찾는 장소다. 그것을 재희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태껏 이곳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것이 한영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이리라 여겼으니까.
재희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느꼈을까. 생각에 잠긴 얼굴로 담뱃불을 막 붙이려던 한영이 흘끗 시선을 주었다.
가만히 응시해 오는 시선은 노골적인 놀라움을 표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잠시 재희를 보고는, 물고 있던 담배를 담담히 입술에서 떨어트렸다.
“안녕.”
차분하지만 거리를 둔 인사말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알 수 있었다. 알고 있는 거구나. 호명 선배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쓰디쓴 안타까움이 속에서 조용히 올라왔다. 그러나 재희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그의 앞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한영이 피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재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머리 흐트러졌어.”
친밀한 동작이었을 것이다. 엿보고 있는 호명도, 그리고 눈앞의 한영도 그것을 느꼈으리라.
한영의 얼굴은 서늘할 정도로 무표정해졌다.
“……고마워.”
곧 한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으나, 재희는 모르지 않았다. 한영이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그러나 재희가 생각하기에, 이 방법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손을 뻗었다.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고개를 천천히 숙일수록 한영의 눈빛이 서늘히 가라앉았기에, 눈을 감았다. 입술에 차가운 감촉이 번졌다. 집에서와 달리 학교에서 맞댄 한영의 입술은 서늘하고 건조했다.
그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그랬듯이 적극적으로 키스를 받아 주지도 않았다. 재희는 한영의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올라앉으면서도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산하고 있을까? 아니면- 멋대로 구는 내게 분노하고 있을까?
그 분노를 상상하자 두려움이 일었지만, 억눌렀다. 보란 듯이 한영의 입술과 턱에 점점이 입을 맞췄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주 익숙하다는 듯 나긋나긋하게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단단한 아랫배를 애무하듯 쓰다듬을 때였다.
한영의 손이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재희야.”
놀라 시선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재희의 손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아.”
재희는 움찔 눈꺼풀을 떨었다. 손바닥에 가득히, 단단하고 무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한영은 발기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충분히 터질 것 같으니까.”
한영이 상냥한 미소를 입에 걸쳤다.
“그만해.”
온화한 웃음이었다.
연인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나 보이는, 낯간지러운 온도의 미소.
그러나 소꿉친구인 마재희의 눈에는- 그것이 위장이라는 것이 보이는 미소.
“다음 수업 있잖아.”
“……응.”
“어서 가. 난 가라앉히고 갈게.”
“응.”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듯 웃으며 한영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재희는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이 자연스러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희는 잠잠히 몸을 일으켰다. 한영에게 다가가기 전에 이미 호명이 가까운 건물 뒤편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부러 그쪽으로 향했다. 사람이라면 으레 남을 엿본 것을 들키고 싶지 않게 마련이고, 그녀가 다가간다면 호명은 당황해 자리를 피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한영에게서 호명을 떨어트려 놓겠다는 계산속이었는데, 호명은 이미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재희는 조심스레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다행히 앞서서 걸어가고 있는 등이 금세 보였다. 다른 길로 빠지는 호명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보며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밀회하는 연인 행세를 한 게 통해야 하는데. 이한영과 마재희가 몰래 사귀는 사이다, 그래서 남들 안 보는 곳에서 몰래 만나는 거다, 그렇게 양호명이 믿어야 하는데. 제발.
그렇게 몇 번이고 기도를 하며 걸음을 옮겼을까. 저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수업을 떠올렸으나 재희는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이상하게 속도가 붙지 않았다. 재희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었다.
터덜터덜 패잔병처럼 걸으며 입술을 만져 보았다. 차갑게 식은 입술이 슬펐다. 이대로 영영 식게 되는 거라면. 그녀가 그렇게 우울감에 젖어 있던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그 소리에 움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그 발자국 소리가 다가올 때까지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혼날 짓을 저질러 부모님 앞에서 기가 죽은 어린아이처럼.
순식간에 기척은 가까워졌다.
“마재희.”
재희는 처량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전에,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는 힘이 먼저였다. 마치 덫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재희는 건물의 입구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연구실 건물은 원래부터 인적이 드물었다. 휑한 복도를 지나, 어둑어둑한 층계참의 뒤편으로 한영은 그녀를 이끌었다.
그대로 한영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재희는 이대로 괜찮은지 염려하는 시선을 이쪽저쪽으로 돌렸다. 이 장면을 누군가가 본다면, 한영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학교에서 한영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그동안 그렇게나 마재희와의 관계를 숨기려 했던 한영이니까. 호명은 괜찮다. 입이 무거운 선배라는 것을 아니까.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걱정을 하느라 재희는 몰랐다. 쓰지 않는 사물함들이 어느새 흉물처럼 주변에 늘어서 있었다. 그렇게 으슥하고도 깊은 곳까지 향한 한영은 그녀를 벽 모퉁이로 몰아세웠다. 한영이 그녀의 앞을 점했다. 맹렬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재희는 주눅이 들었다. 그녀도 지은 죄를 알았으니까.
그러나 한영의 입술이 부지불식간 내려왔을 때는, 재희는 버릇처럼 기뻐하며 그의 등을 감쌌다.
“아…….”
툭, 몸이 밀리며 그녀의 어깨가 사물함에 부딪혔다. 이윽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으며 내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한영은 시작부터 뜨거웠다. 급했고, 또 순식간에 그녀의 몸에 열기를 옮겨 붙였다. 정사할 때의 열렬함으로 몸을 붙여 오는 한영에,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한영의 하반신이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닿는 순간부터 잔뜩 단단한 상태였던 성기다. 대낮의 학교였는데도 그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으응.”
색사할 때의 신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재희는 한영의 목을 감싸며 그를 더 부추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온몸이 맥박치고 있었다. 그것은 한영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더. 더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재희의 머리를 장악해 나갈 때였다. 한영이 젖은 입술을 떨어트렸다.
“……다시는.”
낮은 음성에 재희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전등불조차 안 들어오는 어두침침한 건물 천장을 배경으로, 한영의 으슥한 눈이 보였다.
그런 눈으로 한영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싸늘히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
재희는 굳은 듯 가만히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겁먹었다 여겼을까. 달래 주려는 것처럼 뒤늦게 한영이 고요히 미소 지었다.
“그러지 마, 재희야.”
“…….”
“알았지?”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재희는 속지 않았다. 알고는 있었다. 호명이 보는 앞에서 입술을 맞부딪힌 순간부터, 한영이 서릿발처럼 화를 내고 있었음은.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 재희야.”
“……내가 너 곤란하게 만든 거야?”
“아니.”
“그럼-.”
“-양호명이 온 캠퍼스에 ‘이한영이 프락치 새끼다’라고 외치고 다녀도, 나는 곤란할 일 없어.”
“…….”
“조금 전의 일도 마찬가지야. 곤란해지는 건 너야. 내가 아니라.”
그것은, 그동안 서로가 어떻게든 회피하고 있던 핵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판이야. 그리고 그 판에 네가 올라올 자리는 없어. 없어야 하고.”
“…….”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재희야.”
한영은 재희의 입술에 조용히 다시 키스했다. 그 따뜻함에 재희는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영의 손이 몇 번이고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마치, 마재희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대답해, 재희야.”
“…….”
“재희야.”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란 게, 이런 걸까.
재희는 스러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알았어.”
“…….”
“앞으로 네 일에 개입하지 않을게. 가만히 있을게.”
잠시 가만히 재희를 응시하던 한영은 천천히 그녀에게서 몸을 물렸다. 그는 곧 평소처럼 다정히 웃었다.
“방금 전 일이 소문난다면 너만 곤란해져. 남자보다 여자한테 더 가혹한 것이 이런 유의 소문인 거 알잖아.”
“……호명 선배는 입 무거워. 괜찮아.”
“나는 호명 선배 입을 걱정한 게 아닌데.”
“…….”
“아까 그곳에 호명 선배만 있었다고, 어떻게 장담해?”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득 한영이 그동안 감수해야 했을 시선의 무게를 체감했으므로.
한영은 그녀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 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게다가 끝까지 비밀을 지켜 주는 사람이란 없어, 재희야.”
“…….”
“그렇게 믿고 있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해. 사람 함부로 믿지 마.”
무심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단정히 하는 데만 집중한 얼굴이었다. 습관적인 미소를 두른 얼굴이 아름답기만 했다. 입가에 묻은 젖은 타액을 닦아 주는 손길은 변함없이 자상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그녀를 단정히 챙겨 주느라 자신의 머리가 삐죽 삐친 곳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재희가 그의 목에 매달리며 헝클어트린 흔적이었다.
재희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을 느낀 한영이 그녀와 눈을 마주쳐 온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재희는 손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나 강릉 가고 싶어.”
“할아버지 별장?”
“……응.”
“그래. 시간 내서 가자.”
“……언제?”
맥락을 벗어난 바람이었을 테지만, 한영은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다.
“글쎄. 방학에 잠깐 다녀올까.”
“…….”
“가자. 나 때문에 수업 많이 늦었겠네.”
“……응.”
그렇게 한영과 헤어진 후 재희는 자신의 사물함 속에 교재를 넣으며 생각해 본다. 잘못을 해도 책임지지 않는 사람과, 잘못을 하지 않아도 책임지는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져 있는 구도를. 그런 무대에 마재희가 올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한영을.
그것이 한영이 지닌 모든 비밀을 관통하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재희는 그렇게 한영을 이해해 나가면서도, 동시에 서글퍼했다. 한영은 자신이 곤란해질 일은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결국, 그녀와 어떻게든 두려 하는 거리감으로 역설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자리에 서 있는지를.
“마 후배.”
문득 들린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등 뒤에 호명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재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얌전한 후배처럼 잠자코 호명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호명도 그런 그녀를 무뚝뚝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지만, 재희는 호명이 지금 고민하고 있음을 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아마 한영에 대해 물어볼 것이다.
호명은 이제 그녀와 한영이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남들이 알지 못할 정보를 캐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어떻게든, 호명 선배가 한영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있게-.
“마 후배가 겁이 많다고 들었어.”
“……네?”
“살아 있을 때 대환이가 그랬다고. 마 후배가 겁이 많고 여리다고.”
아.
재희는 멍해졌다.
“그래서 대환이가 어떻게 죽었든,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든, 네가 관심 없다는 듯 거들떠보지 않아도 이해하려 노력했었어.”
재희는 망연히 호명의 눈을 응시했다. 호명은 그저 이 순간에 무감정해 보였다. 그래서 연이어 나온 말들이 더 냉혹하게 재희의 가슴을 찔렀던 건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개새끼들보다, 너 같은 인간들이 더 짜증 나.”
“…….”
“갑자기 욕을 들어서 너도 황당하겠지만, 이해해라. 내가 요즘 상태가 안 좋거든. 괜히 아무나 의심하고, 아무에게나 욕하고 다녀. 애들이 나보고 돌아 버렸다고 하잖아. 마 후배도 내 소문 들었지?”
“…….”
“미안하다. 험한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
“간다. 잘 지내라.”
호명은 그것이 용건의 전부라는 듯 등을 돌렸다.
재희는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감정들이 아우성들을 쳤다. 억울함이, 또 모멸감이 언뜻 느껴졌는데, 아마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다른 감정 때문일 것이다. 재희는 달아오르는 눈가를 꾹 눌렀다. 고개를 돌려 사물함의 좁은 공간을 응시했다. 꽉 막힌 공간을 보며 감정을 억눌렀다.
괜찮아.
이제 한영이는 무사하잖아.
재희는 따끔거리는 눈을 돌려 복도를 보았다. 오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누군가는 바쁘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걷고, 누군가는 친구들과 웃으며 걸었다.
면면의 얼굴을 보다 문득, 호명의 삭막한 얼굴을 떠올린다. 일 학기에 호명을 처음 보았을 때의 얼굴이었다. 대환이 그녀에게 비 맞은 강아지 같다며 놀릴 때, 호명도 옆에 있었다. 혀를 차며 이재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여자애한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시니컬하게 대환을 구박했던 이가 호명이었다.
그 웃는 얼굴이, 이제야 떠올랐다.
재희는 사물함의 끝을 응시했다. 원래는 문이 뜯겨 나가 아무도 안 쓰는 사물함이 있었다. 그 공간을 학생들은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어 놓았다.
사물함 속 하얀 국화를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국화는 오늘 놓은 듯 생생했다.
* * *
호명은 더 이상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듣기로는 시위 현장을 전전하고 있다 했다. 호명은 한영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접었다. 아니, 기실 그는 처음부터 한영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재석이 강대환을 배신한 게 아니라, 한영이 배신한 것이라고. 이재석은 무고하다고.
그렇게 마음이 약해져 있는 양호명에게 환멸감을 안겨 준 것은 마재희였다. 양호명은 비단 마재희에게 환멸을 느낀 것은 아니리라. 어쩌면 모든 게 다 미웠을지도 모른다. 친구를 배신한 친구든, 학교든, 아무 일 없이 웃고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이든.
재희는 더 이상 호명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결과에만 주목하고 싶었다. 결국 한영은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났다. 그 사실에 다행이라 안도해야 했다.
마음이 편해져야 했다. 재희는 그러고 싶었다.
“칼 쥐고 있을 때는 정신 차려라.”
“……아.”
마 사장의 충고를 듣고 재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엉터리로 깎인 사과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이 꼭 자신 같아 재희는 한참을 사과를 내려다보았다. 더 마주 보고 싶지 않은 몰골이었다.
“……가게 수도관 보고 오셨어요?”
“아주 안 좋아.”
마 사장은 사과를 먹다 말고 한숨을 흘렸다.
“업체를 잘못 골랐어. 공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큰아버지 고등학교 동창이라면서요.”
“평생 군대에 박혀 있었던 양반이 뭘 알겠어.”
마 사장이 무뚝뚝하게 충고했다.
“큰아버지 귀에 안 들어가게 해라. 꼬장꼬장한 그 인간, 문제 생긴 거 알면 나 보는 낯 때문에라도 더 노발대발한다.”
“……원래 연락 안 해요.”
“추석에도 연락했다며.”
“그건 한영이가…….”
대충 아버지의 질문에 응하면서도 재희는 시선을 옆으로 흘끗 돌렸다. 한영은 김 여사를 도와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재희는 그 모습을 살피느라 마 사장의 훈화를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 명심해라.”
“네.”
“언제, 어디서든, 입조심, 행동 조심해야 된다. 넌 네 이모할머니를 닮아서 저돌적인 데가 있어.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면 욕부터 보는 거야. 알겠니?”
“네.”
한영은 이미 마 사장이 ‘중간’ 운운할 때부터 고개를 들고 있었다. 마 사장을 물끄러미 보는 시선의 의미를 재희는 안다. 한영은 원래부터 마 사장의 레퍼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 사장이 재희에게 자중할 것을 강조할 때마다 은근슬쩍 말을 돌려 주거나 흐려 주던 한영이었다. 재희는 그래서 이번에도 그가 그럴 것이라 여겼다.
때마침 시선을 느낀 듯 한영이 그녀를 보았다.
무표정하던 한영의 얼굴에 천천히,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딘가 쓰게 느껴지는 미소다.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도 재희는 그 미소에 사르르 녹는 이기적인 가슴을 느꼈다.
엉덩이를 들었다. 무릎걸음으로 조심스레 한영의 곁에 다가갔다.
“……나도.”
도와주겠다, 말하는 재희에게 한영은 옆자리를 내주었다.
김 여사가 은근슬쩍 재희를 곁눈질하며 웃고는 입을 열었다.
“한영아, 요즘 재희는 학교에서 어떠니?”
“재희야 똑같아요.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요.”
“어휴, 얘는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게 없어서……. 우리 재희 좋다는 남학생은 없니? 얘도 연애 좀 해야 되는데.”
한영이 조용히 웃음소리를 흘렸다.
“좋다는 남학생들이야 많은데, 재희가 무관심해서요.”
“그중에 하나 괜찮은 애 없을까?”
“어머니, 저 눈 높아요. 재희에게 적당한 사람 붙여 줄 생각도 없고요.”
오가는 대화는 훈훈한데, 재희의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가라앉아 버렸다. 거짓말쟁이.
“어머, 얘, 사람 상대로 너무 묻고 따지면 안 돼. 착한 남학생이면 다 오케이야.”
“그 조건이 제일 어려워요, 어머니.”
재희는 콩나물의 밑을 뚝뚝 끊어 냈다.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국화가 놓인 사물함을 본 이래 몇 번이고 느꼈던 소양감이었다.
한영아. 네가 그 ‘착한’ 남학생이면 안 되는 거야?
“재희야.”
재희는 물끄러미 손등을 감싼 온기에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손에 목이 뜯기고 있던 콩나물을, 한영이 살살 빼내고 있었다.
“머리는 남겨 둬야지.”
“…….”
“재희야?”
“……응.”
재희는 가만히 내려다보는 한영의 시선을 느꼈다. 미소 짓고 있으나 냉정히 표정을 읽어 내는 눈빛이었다.
재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매를 내리떴다. 그녀는 이미 몇 년을 저 예리한 시선 앞에서 마음을 숨긴 전적이 있다. 그러니 지금의 한영도 그녀의 가책을, 참담함을- 파헤치진 못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묻어 두기만 하는 것이 더 마음의 독이 되는 법일까.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밤이 찾아왔다.
불면의 시간은 길었고, 얼핏 잠이 드는가 싶으면 꿈을 꿨다. 강대환과 한영이 함께 걷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두운 굴다리 밑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였다. 어둠만 있었다. 재희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영의 뒷모습을 보고 덜컥 겁에 질렸다. 저대로 멀어지도록 두면 안 된다 생각했다. 뛰었다. 한영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도저히 잡히지가 않았다-.
지칠 때까지 달리던 중에 깼다. 눈물로 얼굴은 흥건했다.
재희는 눈물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의 잔상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영을 봐야 했다.
아래층에서 자고 있을 부모를 떠올리며 창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렇게나 그녀가 보고 싶어 하던 한영을 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창문 너머로가 아니라, 대문을 벗어나는 뒷모습으로.
“……아.”
골목을 걸어 멀어지는 한영을 눈에 담은 순간,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꿈에서 뒷모습만 보이며 절대 돌아보지 않던 그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재희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충동이 들었다. 급하게 잠옷 위에 잠바를 걸쳤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한영을 붙잡는다고 뭔가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영은 이미 충고하지 않았나. 더 이상 그가 있는 판에 올라오지 말라고. 그때도 그렇게 화를 냈던 한영이다. 그 약속을 다시 어긴다면, 한영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잠에 덜 깨서였을까. 재희는 이상한 만용이 생겼다. 분노 비슷한 억울함도 있었다. 그녀는 마치 심보 나쁜 사람처럼 눈앞에서 화를 내는 한영이 보고 싶었다. 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영이 화를 내 줬으면 했다.
그리고 그런 그 앞에서 재희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지 마. 네가 하는 행위, 나쁜 거야. 제발 그러지 마. 차라리 그냥- 학교에서 나오자.
멀리, 저 멀리- 시골로 가 버리자. 서울을 떠나자.
숨이 차올라 재희는 허리를 굽혔다. 헉헉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한영의 뒷모습을 언뜻 봤던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놓친 걸까.
재희는 힘겹게 눈을 들었다. 저 멀리, 십자가가 보였다. 별빛 가득한 밤에 외따로이 서 있는 조형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밤중에,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를 폈다. 한참을 숨을 고르고서야 머리가 갰다.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버렸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돌아가자.
집으로 향하는 길을 그 새벽에 밟는 기분이란, 공허했다. 재희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해 봤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한영이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못 본 척, 조용히 학교를 다녀야 할까?
헐레벌떡 한영을 붙잡으려 한 게 무색할 정도로 재희의 대답은 빨랐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거잖아. 한영이든, 친구들을 위해서든- 진실은 숨겨져야 옳았다.
그렇지만-.
재희는 눈을 감았다.
웃고 있던 세 선배들의 얼굴이 계속 검은 시야 앞에 맴돌았다.
방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은 무거웠다. 마룻바닥이 발바닥 아래 눌리며 죽은 소음을 흘렸다. 재희는 아래층에 주무시고 계실 부모님을 의식했다. 숨죽여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렇게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풍경이 찰랑- 울었다.
살갗에 싸늘한 바람이 닿은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재희는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열린 창문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창턱에 기대고 서 있는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그녀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정표로 삼고 향했던 모자와 검은 잠바도 보였다.
한영이 천천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잠시 응시하던 한영이 팔짱을 풀었다. 상냥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놀랐구나. 미안.”
단 한 번도 한영의 미소를 보며 간담이 서늘해져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저렇게 자상한 미소 앞에서는.
재희는 굳은 채 숨을 색색 흘렸다.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
“…….”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한영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감각한 시선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잔잔히 웃었다.
“내가 무서워?”
“……아니야.”
“그럼 경멸하는 건가?”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다.
내가 네게 그럴 리 없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 전에, 그간 아슬아슬하게 차 있던 두려움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화내려는 거야.
더 이상 못 참아 주겠다고, 그만두겠다고 하려는 거야.
상황이 파악되자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어 왔다.
“……한영아, 나는-.”
“-내가 말했잖아. 너 미행 정말 못한다고.”
한영이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재희야, 밤에 친구를 봤으면 뒤를 밟는 대신 인사를 해야지.”
“…….”
“순간적으로 터무니없는 의심을 해 버렸잖아.”
한영은 조금도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어조는 부드러웠고, 표정 또한 평소처럼 자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랬기에, 재희는 더 그 안에 숨은 감정이 두려워졌다.
“……오해하지 마. 나쁜 의도로 쫓아간 게 아니었어.”
“알아. 잠깐 그랬다는 거야. 널 믿어.”
“……그럼 화내지 마.”
“화낼 생각 없어, 재희야.”
한영은 다정히 덧붙였다.
“협박은 하겠지만.”
믿기지 않아 재희가 멍하니 한영을 보는 동안, 다시 바람이 불었다. 유독 거센 바람에, 풍경이 핑그르르 돌며 요란을 떨었다.
부모님이 깰지도 모른다. 재희는 부지불식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방 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는 재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한영은 어렴풋하게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문도 닫지 않았다. 연신 풍경이 울도록, 일부러 내버려 두는 것처럼.
“……그동안 네가 무슨 고민을 했는지 알아.”
풍경 소리를 배경 삼아, 한영은 조용히 눈을 휘었다.
“지금까지 내 문제로 얼마나 끙끙 앓고 있었는지도 알고.”
“…….”
“그런데도 일부러 무시했어. 모르는 척했지. 네가 괴로워해도 지켜보기만 했어.”
입가의 미소가 무색하게, 고적한 눈동자였다.
“말라 가는 널 보면서도 밤만 기다렸지. 오늘 밤에는 또 어떻게 널 침대로 끌어들여야 하나, 어젯밤에는 네가 어떤 얼굴로 울고 있었나, 그런 생각밖에 없었어.”
“…….”
“이십사 시간을 발정하고 있었어.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중에도, 남의 편지나 쥐새끼처럼 엿보고 도둑질하면서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 너랑 뒹굴 생각밖에 안 했다고, 재희야.”
잔잔히 눈매가 휘어졌다. 화려한 미소가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방금 전까지도, 그래, 비어 있는 이 방에서 기다리는 내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네 침대만 보고 있었어.”
“……한영아.”
“흐트러진 이불이나 보면서, 네가 보는 사람 환장하게 하는 그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는 것을 상상했어. 흰 다리를 아무렇게나 내놓고, 언제라도 금방 들출 수 있는, 그 얇고 짧은 잠옷 말이야.”
한영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이기적이라고 했잖아. 성적으로 조절 못한다고도 했고.”
“…….”
“충분히 이쪽이 제정신 아니라고 경고를 해 줬던 것 같은데…….”
한영이 나긋이 눈을 휘며 물었다.
“……재희야, 나 선 넘기 좋으라고 이렇게 구실 만들어 주는 거야?”
그 순간, 재희는 굳어 있던 발을 움직였다.
한영은 달려드는 재희에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허리를 껴안아도 뿌리치지 않았다. 무섭게 화를 내던 것이 무색하게,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안아 주었다. 감싸 주었다.
한영의 입술이 그녀의 정수리에 닿았다. 분명 몇 초 전까지는 서늘한 말을 뱉었던 입인데,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속에서 쓰게 치미는 감정이 지독했을까. 재희는 뜨거워지는 눈을 느끼며 한영의 몸을 더듬거렸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그의 몸을 문질렀다. 허리에, 등에, 온기를 나누어 주고 싶었다.
미처 몰랐는데, 날이 추웠다. 혹독할 정도로.
“……이런 분위기여선 안 되는데.”
한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재희야, 협박에도 기승전결이 있어. 너 때문에 지금 맥이 끊겼잖아.”
“협박 아니잖아.”
“…….”
“협박 아니야. 다 알아. 자꾸 거짓말하지 마.”
재희는 뜨거워지는 눈으로 짐짓 한영을 쏘아보았다.
“네가 겁줘 봤자 하나도 안 무서워.”
웃음기가 남아 있던 한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빠져나갔다. 무표정해진 한영의 얼굴 속에 더 이상 날 선 눈빛은 없었다. 그저 세월 속에 무딜 대로 무뎌진 것처럼, 둔중하게 가라앉는 눈빛만 있었을 뿐.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재희는 이한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한영의 이중성, 그의 속에 희끗희끗 비치는 상처, 그리고 그가 어떻게든 마재희에게 숨기고자 했던 정체까지- 가혹한 진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리라. 재희는 아마, 한영의 더 많은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영으로서는, 그 미래를 염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재희는 매번 이한영의 거짓말에 속지만, 그렇다고 늘 속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도 그랬다. 재희는 한영의 기만적인 으름장에 속지 않았다. 한영이 한 말들은, 협박이 아니다.
그가 길고 긴 시간, 애끊는 심정으로 삭여 왔던 마음이다.
그 고백이었다.
“……한영아, 괴롭혀서 미안해. 그렇게 괴롭게 참으면서 옆에 있어 주려 했는데, 내가 자꾸 위험한 행동해서…… 정말 미안해.”
“…….”
“……이제는 정말,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재희는 한영의 숨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위험한 행동 안 할게. 너 믿고 기다릴 테니까…….”
재희는 한영의 허리에 두른 손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무감각해 보이는 한영의 눈빛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더 열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고민, 그거…… 하지 마.”
재희는 젖어 가는 눈으로 졸랐다.
“……그만두겠다는 고민 같은 거 하지 마. 나 아직 너한테 못 배운 거 많아. 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그만두는 거, 한영이 너도 싫잖아…….”
발돋움을 했다. 여린 입술로 먼저 한영의 아랫입술에 부딪쳤다. 간지럼과도 같은 입맞춤이 연거푸 닿자, 한영의 입가가 미약하게 올라갔다. 웃음 같기도, 일그러짐 같기도 한 꿈틀거림으로.
“……맞아. 싫어.”
그는 눈을 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 마재희.”
무게감을 지워 내지 못한 눈웃음이 서러워 재희는 결국 눈물방울을 떨궜다. 입을 맞추는 와중에도 한영의 손이 눈물 젖은 궤적을 다정히 문질러 왔다.
입맞춤이 짙어지고 깊어지는 가운데 돌풍이 다시 불었다. 풍경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영이 재희에게 열렬히 입을 맞추는 중에도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던 풍경을 거칠게 떼어 냈다. 쇳소리와 함께 풍경은 뚝 울음을 그쳤다.
한영은 더 이상 제 구실을 못 하게 된 풍경을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으면서도 재희에게 계속해 몸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재희는 한영의 성기가 발기한 것을 느꼈다. 한영이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며 그의 잠바를 벗기고, 한영과 함께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을 맞췄다.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격렬한 키스였다. 갈급한 사람처럼 한영의 손이 재희의 가슴을 쥐어짰다. 다른 손은 익숙하게 다리 사이를 눌렀다. 그녀가 헐떡이며 신음을 삼키자, 한영이 웃었다. 어쩌면 순식간에 젖은 그녀의 입구를 반겨 웃는지도 몰랐다.
“……부모님 밑에 계시지?”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다 말고 한영이 물었다.
“……응.”
“그럼 조용히 해야겠네.”
그는 재희의 팬티를 끌어 내리며 웃었다.
“재희야, 소리 내지 마.”
“……아.”
그 순간 재희는 한영의 당부를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한영의 성기가 그녀의 입구를 꾹 누르고 있었다.
콘돔을, 씌우지 않은 채로.
재희는 색색거리며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 또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는 걸까.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다. 이한영은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선전 포고나 다름없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재희는 그가 그렇게 끝까지 그녀를 배려하려는 것이, 속상하기만 했다.
“……한영아.”
재희는 숨죽여 그를 부르곤 키스했다. 조르듯 다리를 허리에 감으며.
순간 더 단단해질 수도 있는 것이었는지 성기가 반응을 보이며 음순 사이를 찔렀다. 그리고 찰나였다.
“아……!”
성기가 파고들었다. 고무막을 두르고 있을 때와는 다른 감각이다. 재희에게는 미묘한 차이였을 그 감각은, 한영에게 유독 큰 차이로 와 닿았을까.
끝까지 삽입하는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부모님에게 들키면 곤란해지니까, 조용히 하자고. 그러나 착하게 그 말을 지키려는 재희가 무색하게, 한영은 짐승처럼 움직였다. 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그렇게 재희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게 하고 싶은 것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그와 그녀 사이를 늘 가로막고 있던 막이 없었다. 그 사실에서 올라오는 적나라한 감각에 재희는 머리끝까지 흥분해 몸을 조였다. 어떻게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정말 신음을 지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부모님도, 체면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휘몰아치듯 격한 행위에 재희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녀가 먼저 오르가슴을 느끼며 허리를 부르르 떠는 동시에, 한영도 사정했다. 재희는 그 뜨거움에 놀랐다. 절정의 여운에 헐떡이면서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한영은 웃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이성이 얼핏 남아 있었던 걸까, 찌푸린 눈가였음에도.
그는 그 눈동자에서 사나운 만족감을 숨기지 못했다.
“……더 해 줘.”
재희는 한영의 몸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정액을 그녀의 안에 쏟아붓고 있는 중에도 한영은 낮게 웃었다. 몸을 흔들었다. 후희가 아니었다. 다음을 몇 번이고 예고하는, 집요한 갈망이었다.
* * *
새벽 일찍 일 층에서 기척이 들렸다. 얕은 잠에 빠져 있던 재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가만히 침대에 누운 채 부모님이 일어나 씻고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 부모님이 이 층까지 올라올 가능성을 떠올렸다. 방문을 열고 당신들의 딸이 발가벗은 사내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는 부모님을 상상했다. 그 사내가 그동안 아들처럼 보살펴 주던 한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모님이 느낄 배신감과 분노에 공감해 보려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조금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을 하러 나가는 부모의 고생을 향한 익숙한 죄책감만 느껴졌다. 그러나 후회하는 마음만큼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재희는 오히려 무감각한 예언만 하고 있었다. 자신은 앞으로 효녀 소리는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집은 금세 조용해졌다.
재희의 정신은 자연스레 자신과 맞대고 있는 몸에 쏠렸다. 따듯한 체온, 시야를 채운 그의 피부, 그렇게 조용히 오르내리는 한영의 가슴, 그리고 그 고요한 숨소리.
방금 전 어떤 위기가 그들을 무사히 지나갔는지, 잠들어 있는 한영은 모를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재희의 입가에 희미하게 쓴 미소가 번질 때였다.
“아…….”
옆으로 누워 있던 재희의 몸이 천천히 뒤로 밀렸다.
천장을 올려다보게 된 재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한영의 몸이 그녀 위를 점하고 있었다.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재희는 한영의 무게감을 느끼며 그가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가늠해 보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한영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몸을 밀어 넣는 게 먼저였다.
“응…….”
재희는 그가 파고들어 온 순간 넘칠 듯 울컥거리는 입구에 몸을 떨었다. 오싹거리는 성감이 순식간에 몸을 달궜다. 삽입은 부드러웠다. 두세 시간 전까지 그가 정액을 쏟아부은 곳이었다.
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몸을 밀착한 채 조용히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박은 채 허리만 움직이는 통에 재희가 볼 수 있는 것은 천장밖에 없었지만, 재희는 그가 아직 덜 깬 상태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일 층에서 들리는 기척에 깨긴 깼는데, 완전히 수마를 몰아내지는 못했던 걸까.
느긋한 허리 돌림이었는데도, 그는 본능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도, 문제없이 그녀의 성감을 비집고 자극했다. 마치 그의 본능은 늘 마재희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처럼.
재희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재희는 능숙히 내벽을 조이며 손을 침대 위로 뻗었다. 한영의 등이 찬 공기에 드러나 있었다. 그 등에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허리를 흔들며 한영이 점차 잠에서 깨는 것을 느낀다. 점차 허리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그즈음 재희의 입술 사이로 눈치 볼 것 없는 신음이 여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신음이 울릴 때마다, 재희는 맞대고 있는 몸의 근육이 흥분으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한영의 움직임이 점차 성기만큼 단단해지고 예리해졌다.
두 육체가 들썩일 때마다 덮은 이불 아래로 열기가 고였다. 그것이 덥다고 느꼈을까, 아니면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신호였던가. 한영이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이불이 흘러내리고, 한영의 조각 같은 나신이 드러났다.
재희는 멀어지는 한영의 얼굴을 보며 허리를 휘었다. 젖 두덩이 위아래로 흔들리자, 고요한 눈으로 재희를 내려다보던 한영이 그것을 움켜쥐었다. 재희는 붉어진 눈가를 내리뜨며 신음을 흘렸다.
다시금 불이 붙은 육체 둘이었다. 그리고 그 불은 쉽게 꺼지지 못했다.
임신으로부터 안전한 날이 있다는 것을 재희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날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한영은 종종 말했었다. 아무리 안전한 날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그렇게 신중함을 드러냈던 이한영은 그 말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종일 움직였다. 한영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를 가지도 않았다. 그저 발가벗은 채 재희의 안에다 계속해서 몸을 묻었다. 씨물을 그녀 안에 분출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허락받지 못할 자유를 누리듯,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안에 몇 번이고 사정했다.
어쩌면 임신할지도 몰라.
한영의 움직임에 흔들리며, 재희는 한순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뜬 눈으로 헐떡이며, 한영의 성기를 조였다. 재희의 흰 침대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젖어 들었다. 한영은 재희의 침대에 자신의 냄새가 배기를 바라는 것처럼 집요히 움직였다. 동물의 영역 표시와도 같았다.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침과 점심을 내내 굶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한영이 그제야 몸을 떨어트렸고, 침대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재희였다. 식사하기 위해 일 층으로 내려가기로 둘 다 합의했다. 그래서 재희는 발가벗은 몸 그대로 방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수습하면서도, 무슨 음식을 먹을까, 같은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움직이던 그녀의 몸 안에서, 왈칵, 정액이 새어 나오기 전까지는.
뒤에서 부스럭거리던 이불 소리가 그 순간 멎었다.
재희는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피부로 느꼈다. 그녀의 엉덩이 골을 타고, 서서히 흰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내려간다. 시선은 정확히 그 궤적을 따르고 있었다.
온몸이 화끈거렸지만, 재희는 천천히 다시 움직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웠다. 더 흘러내리지 않도록 엉덩이에 힘을 주었음에도, 소용없었다.
울컥, 울컥, 한영이 뿌려 놓은 정액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부모님이 서로를 처음 만났던 게, 마침 우리 나이였을 거야.”
재희는 옷을 들다 말고 몸을 돌렸다.
침대에 앉은 한영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한 발을 바닥에 짚은 것이 무색하게, 한영의 하체는 아직 이불에 감싸여 있었다.
고요히 한영이 웃었다.
“……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두 분이서 사고 치셨다지. 단 하룻밤이었는데, 애가 들어선 거야.”
“…….”
“그 애가 나였고.”
재희는 한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영은 침대에 앉은 채 웃고 있었다. 목 근육이 뭉쳤는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뒷목을 주무르며 한영이 무심히 말했다.
“……그 일로 외할아버지가 뒷목 잡고 넘어가셨다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며 그가 눈을 휘었다. 그러나 곧 그 시선은, 그녀의 둔덕과 허벅지로 떨어졌다.
한영이 느릿한 시선으로 그녀의 젖은 아래를 훑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허리를 가리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재희는 움찔 눈꺼풀을 떨었다.
“……아.”
한영의 나체가 온연히 바닥에 두 발을 내리뻗었다. 시커먼 성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익숙한 형용이었다. 그럼에도 기묘한 위압감에, 재희는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담았다.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그대로 서서 그녀를 보았다. 얼굴에 서린 웃음이 단순히 일상적인 미소가 아니었음을, 재희는 그제야 깨닫는다.
한영이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아직 대학생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분이서 살림을 차렸다고 했어. 조부모님과는 의절하고.”
재희는 한영이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말을 통해 한영을 이해해 나가면서도, 그녀는 떨리는 몸을 감추지 못했다.
이성을 찾기 위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한영이 그런 그녀를 보고 걸음을 멈춘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이 잠시 재희를 담았다. 그러나 곧 다시 아찔하게 휘어졌다.
“……그랬는데 출산하기 몇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야.”
한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서 어머니는 혼자서 날 낳고 키워야 했고.”
또 한 걸음.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남편도 없이 혼자 애 키우기 쉽지 않았지.”
몸이 닿을 듯 가까이 선 채, 한영이 웃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날 할머니에게 맡기고 갔을 때는 안심했어. 더 이상 엄마 우는 건 안 봐도 되겠구나, 하고.”
한영이 손을 뻗었다. 옷가지를 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어간다. 들고 있던 옷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재희는 그가 그대로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아래는 어느새 흥건했다. 개폐를 반복하는 몸이 느껴졌다. 말의 의미가 슬픔을 가리키는데, 몸의 언어는 달랐다. 야비하게도 몸은 기다림을 어쩌지 못하고 재촉하고 있었다.
재희는 뜨거워진 눈매를 내리떴다. 그것이 안타까움을 참기 위함이었는지,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시선 끝에는- 발기한 성기가 있었다. 그 끝이 어느새 번들거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 단 하나의 목적만을 앞둔 것처럼.
한영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보통 부모님을 떠올리면 수그러지는데.”
“아…….”
그것이 신호이자 시작이었다.
한영이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밀어붙이듯 부딪쳐 오는 사내의 몸 앞에서, 재희는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벌렸다. 등이 벽에 부딪치는 것도 몰랐다. 순식간에 한영의 성기가 그녀의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자지러지는 교성이 재희의 방을 울렸다.
“아, 아…….”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 재희는 두 다리를 허공으로 버둥댔다. 흠뻑 젖어 삽입은 미끄러웠고, 성감은 아찔했다.
재희는 헐떡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채 삽입을 끝마치지 못한 한영의 성기를 타고 그녀의 몸에서 나온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시각 정보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한영이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아……!”
“……재희야.”
“응, 읏, 으, 응…….”
“재희야.”
한영이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며 재희의 귀를 가볍게 물었다. 웃으며 속삭였다.
“이번에는 흘리지 마.”
“아…….”
참아 보려 했다 덧붙이는 이치고는 서슴없이 가슴을 만지고 애무했다. 미안하다며 웃는 이치고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허리 놀림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한영의 말에 실린 미세한 뉘앙스를, 내려다보는 눈의 아득함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참을, 굵은 빗발 소리와 신음이 섞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충동에 몸을 맡기다가도,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은 다가오게 마련이다. 욕실에서의 시간이 그랬다. 재희는 한영이 그녀의 아래를 씻기며 만질 때마다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를 살폈다. 후회하지 않는다 생각했던 자신조차도 욕조로 뚝뚝 떨어지는 정액을 보며 심란해졌다. 그녀도 그럴진대, 콘돔과 피임에 강박을 가졌던 한영은 어떨까.
재희는 내심 두려웠다. 혹 한영이 후회하는 기미라도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한영은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요하지만 단단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씻겼다. 음식을 먹고, 설거지를 했으며, 엉망인 이불보를 갈았고, 재희를 보고 웃었다. 다정히 입을 맞췄다.
재희는 그즈음 직감했다. 이한영은 더 이상 멈추지 않을 것이다. 머뭇거리지도 않을 것이고, 더 이상 방어 같은 거리감을 그들 사이에 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재희도 불현듯 질문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왜 그랬어?”
한영이 새 이불을 갈다 말고 시선을 주었다. 의문은 없는 시선이었다.
그는 담담히 그녀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이불로 돌렸다.
“할머니 유산 때문에.”
차분한 어조였다.
그러나 재희는 그처럼 차분할 수 없었다.
“……유산이 왜?”
“재희야, 너도 궁금해했잖아. 그렇게 기를 쓰고 한 푼이라도 더 빼앗아 가려던 친척들이 갑자기 유산을 포기한 게 이상하다고.”
“…….”
“너희 아버지는 마음 고쳐먹은 거라고 안도하셨지만…… 그럴 위인들은 아니었어. 할아버지 부동산은 골고루 나눠 줄 테니 할머니 집만큼은 건드리지 말라 부탁했었어. 천애고아가 된 조카가 그렇게 부탁하는데도, 들은 척도 안 하던 인간들이었지.”
한영은 무심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유의 인간들을 다루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
“그 사람과 거래를 했어. 나는 유산을 지키고, 그 사람은 그걸 도와준 값으로 원하는 걸 받기로.”
“……그 사람이 원한 게 ‘그 일’이었던 거야?”
“그래. 프락치 짓.”
“…….”
“할머니 돌아가신 후부터 활동했어. 그 무렵 대학교 다니던 동네 형 누나들부터 시작해서, 올해 입학해서는 동기들과 선배들까지. 그 사람이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전부 다 알아봐 주었지.”
재희는 참담함에 눈을 감아 버렸다.
한영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와 그녀가 고등학교 일 학년일 때였다. 그 무렵부터였다는 거다. 이한영에게, 그녀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
왜 하필 그 시기였나.
누군가는 사랑을 깨달은 시기였다. 소꿉친구에 대한 풋정을 자각했다.
그러나 그 비슷한 시기에, 다른 누군가는 참혹한 선택에 내몰려 원하지 않는 일을 시작했다.
“……그 사람이 ‘삼촌’이야?”
재희는 심 교수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 군 삼촌은? 만나 본 적 있는가?’ 심 교수는 어린 시절의 한영에 대해 물어보면서 그런 질문을 분명 던졌다.
한영은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
“……어떻게 심 교수님이 그 사람을 알고 있어?”
“눈치가 남다르시거든. 가볍게 흘린 한마디 말로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추리하실 정도로.”
“…….”
“널 통해 확인하고 싶으셨을 거야. 아끼는 제자에게 프락치냔 질문을 선뜻 물어보는 건 힘든 일이셨겠지.”
재희의 얼굴이 쓴 감정으로 얼룩졌다. 한영이 그 볼을 엄지로 부드럽게 문질러 왔다.
“……그 삼촌이라는 사람은, 누구야?”
“아무도 몰라야 하는 사람.”
“…….”
“특히 너는 더욱 몰라야 하는 사람.”
재희는 물끄러미 한영을 보았다. 한영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여기서 듣고 잊어버려. 기억해 봤자 좋을 일 없으니까.”
“……어떻게 그래? 그 사람이 네 상황을 이용해서 협박한 거잖아.”
“왜 내가 당연히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해.”
한영은 담담히 고백했다.
“시작이 강요였든, 자의였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결국 그 일을 시작했고, 심 교수님을 감시하고 있어. 그 사실이 중요할 뿐이야. 대환 선배 일도 마찬가지지.”
“……대환 선배는, 네가 한 게 아니잖아.”
“내가 한 게 아니더라도 책임은 있어.”
“……어째서?”
“망설였거든.”
“…….”
“전화하기 전에 망설였어.”
한영은 재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위험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어. 내가 전화를 걸어 대환 선배가 도망간다면 일이 커질 테니까. 경찰이든 위에서든, 기필코 전화가 어디서 왔는지 추적하려 들 테지.”
재희는 슬퍼졌다. 한영은 무심한 낯을 하고 있었지만, 그 고백은 분명 죄책감의 발로였다.
“……그래도 결국 너는 전화했잖아. 위험을 감수하고 선배를 구하려고 했어.”
“글쎄. 사실 나는 그 선배가 영원히 입을 다물어 주기를 바랐어.”
“……왜?”
“전에 말했잖아. 대환 선배한테 약점 잡혔다고. 선배는 시비를 거는 것도 모자라, 나를 계속 지켜보았어. 구린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고요히 미소 지으며 한영은 말했다.
“그 시선 때문만이라도, 나한테는 대환 선배를 치워 버려야 하는 이유가 있었어.”
“……그렇게 말하지 마. 자꾸 네가 나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마.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내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오히려 네가 그렇게 괜찮은 척 할수록, 더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재희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울컥 말을 토해 냈다.
“……자꾸 대환 선배에게 프락치라는 걸 들킨 것처럼 말하지 마. 네 약점은 그게 아니잖아.”
한영의 얼굴에 작위적으로 걸쳐져 있던 미소가 서서히 희미해졌다. 더 이상의 위악은 의미가 없단 것을 깨달은 얼굴이다. 그 깨달음에, 그간의 피로를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얼굴이었다. 재희는 한영이 지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 잘 안다. 끝없는 거짓말.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속이고 짓누르며, 언제고 아름답게 웃어야만 하는 자신을 향한 환멸. 그것 때문이다.
재희는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끼며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거짓말하는 거야? 한영아, 이제 그만 솔직하게 말해 줘. 다른 걸 들킨 거잖아. 너한테 굉장히 예민하고, 중요한 거.”
“…….”
“그게 뭐야? 네 약점.”
대답 없는 한영에, 속이 탔다.
“……영원히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야?”
간절한 마음이 질문 끝에 아스라이 묻어 나왔다.
재희는 매달리듯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그 눈만 바라보았다. 무감각해 보이는 눈동자를 보며, 그 안에 품은 비밀이 모습을 드러나기를 기도했다.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길고 길어, 가슴까지 아릿아릿해 올 정도로.
그리고 한영은 간구하는 시선 앞에서 끝내 틈을 내주었다. 천천히 가라앉아 가는 눈빛이, 진실을 드러냈다. 한영은 그것을 어떻게든 다시 숨기려는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그 어렴풋한 미소는 곧 사라져 버렸지만-.
그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다.
“……학기 초라 제때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어.”
한영은 조용히 얼굴을 내려 짧게 키스하고는 말을 보탰다.
“적응 못 하고 헤매는 게 너무 잘 보였거든.”
“아…….”
그의 말에는 주어가 없었으나, 재희는 학기 초에 적응 못 하고 헤매던 이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재희는 더 참지 못하고 한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안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안아 주기 위해서였다.
한영이 그녀의 몸을 받아 주며 낮게 속삭였다.
“다행히 경신이와 친해지면서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보였지. 여전히 적응 못 하고 학교를 무서워하는 게.”
서로의 이마를 마주 댄 채, 한영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고요한 애정이 서린 눈동자였다.
“내 불찰이었어. 선배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널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응.”
재희는 그를 부둥켜안은 채 속으로 대답했다. 역시 그랬구나. 네가 대환 선배에게 들켰다는 너의 약점, 바로 나였어.
“선배에게 들켰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 머리가 다 아팠지. 만약 선배가 입을 놀리고 다닌다면 네가 추문에 시달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영은 느릿하게 덧붙였다.
“……‘그 사람’이 너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겠지.”
“…….”
“‘데면데면해진 소꿉친구’ 행세가 더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어.”
재희는 결국 눈물을 다시 떨구고 말았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삼촌’이라는 사람에게서 나를 숨기고자, 너는 그간 얼마나 스스로를 갈고닦고 으스러트려야 했을까.
한영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다행히 대환 선배는 입을 다물어 줬지. 나로서는 빚을 진 셈이었어.”
“……그래서 너는 그 빚을 갚으려고 했던 거야?”
“그래.”
“…….”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고 싶지는 않았어.”
특히 너의 일로 입은 은혜라면. 그렇게 덧붙이는 한영의 속삭임이 아득했다. 재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빚은 졌지만, 대환 선배를 좋아하지 않은 건 사실이야. 말했잖아. 그 선배 성가셨다고.”
한영이 나직이 헛웃음을 흘렸다.
“수줍어 사랑 고백도 제대로 못 하는 꼬마 대하듯 나를 놀렸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너와 내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했어. 고집도 세서 그걸 말리는 것도 일이었지.”
“응…… 선배가 원래 오지랖이 넓었어…….”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빨리 가 버려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계속 났지만, 재희는 한영의 눈만 바라보았다. 서로의 몸이 하나처럼 엮였다. 불과 몇 분 전에 그가 손수 입혔던 재희의 옷가지를, 한영은 하나하나 다시 벗기고 있었다. 재희는 그가 원하는 대로 허리를 띄우고 상의에서 팔을 빼냈다. 새하얀 나신이 드러나자 한영의 눈에 불빛이 스쳤다.
강한 열망이었다.
죽이려고 해도, 도저히 죽이지를 못하는.
“재희야.”
“응…….”
“언제든 신사적으로 놓아주려던 마음은 어제부로 접었으니까…….”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며, 한영은 고요히 눈을 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거기에 네가 얼마나 회의감을 느끼든, 이제 늦었어.”
“…….”
“그러니 재희야, 앞으로 무엇을 보고 듣게 되든, 죽은 듯이 조용히 숨어 있는 거야. 할 수 있지?”
재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영이 쓱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재희는 기다렸다는 듯 그 입맞춤에 응했다.
이한영은 결코 모를 것이다. 지금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사랑하는 이의 비극 앞에서도 제 사랑의 결실만 기뻐하는 그 이기심을, 한영이 영영 몰랐으면 했다.
* * *
비 오는 거리를 장바구니를 쥐고 걸었다. 추적추적 달라붙는 습기를 느끼며, 길을 걸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바구니를 치고 가는 바람에 대파 줄기가 꺾였다. 우산 든 손으로 대파를 어떻게든 안에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도 기억 속 한영의 목소리는 재희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보고 듣게 되든, 죽은 듯이 조용히 숨어 있는 거야. 할 수 있지?’
그래서 재희는 속으로 대답했다. 응, 할 수 있어.
무엇이든, 이한영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었다.
장바구니가 흔들리며 종아리를 스쳤다. 우산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조용했다. 거의 닿는 것도 모를 정도로 스며드는 비였다. 시간은 이른 저녁이었고, 사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렇게 걷던 중에 재희는 문득 깨달았다. 낮밤이 바뀌어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그녀의 눈앞에 익숙한 골목이 있었다.
그녀가 이틀 전 새벽, 자다 일어나 한영의 뒤를 쫓던 골목이었다.
불쑥 궁금해졌다.
그 새벽에 한영이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
그러나 잠시 스친 의문이었을 뿐이다. 재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시 깃든 호기심을 애써 그렇게 눌러 죽였다. 주변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앞만 보고 걸었다. 한영이 어디를 가고 있었는지는 더 이상 그녀가 궁금해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결론 내리며 재희가 막 발을 앞으로 디딜 때였다.
뎅, 뎅-.
타종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
재희는 우뚝 멈춰 섰다.
갑자기 멈춰 선 그녀 때문에 몇몇 이들이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지나갔다. 그에 대한 사과조차 하지 못했다. 하필 그 순간, 재희의 야속한 기억력이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영이 양호명과 대화를 나눌 때 흘러가듯 건넸던, 이상한 한마디를.
‘죄를 지은 사람이 가장 먼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압니까?’
걷는 내내 다짐한 각오는 어느새 잊혔다. 재희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 붉은 건물이 노을빛을 받고 있었다. 재희는 우두커니 서서 그 건물 벽에 붙은 종탑을 응시했다. 종이 그 안에서 아직 흔들리고 있다. 그 옆으로 삐죽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십자가도 보았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성당의 모든 곳이 보였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에서부터, 본당으로 들어가는 계단과 문까지.
성당을 보고 있던 재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굳은 듯 멈췄던 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비틀비틀, 흔들리듯 뗀 걸음이었다. 그러나 점차 걸음은 빨라졌다. 종래에는 달리다 못해 달음박질이 되어 집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쿵쾅쿵쾅 계단 위를 오르는 소음도 듣지 못했다. 그저 재희는 단 하나의 목적만 떠올리고 있었다. 곧장 방으로 향한 재희는 책상을 뒤졌다.
어디다 뒀지?
가방에 넣어 둔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방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 사이사이를 펼쳐서 훑어보았다. 몇 권을 그렇게 펄럭여 흔들어 보고 바닥에 떨어트리기를 반복했을까.
“……찾았다.”
교재 사이에 단단히 끼워져 있었던 유인물을 빼 들었다.
강대환 사망의 진상 규명을 촉구한다, 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유인물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강대환의 죽음에 연관된 의혹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문장 중에, 그녀가 찾는 정보가 있었다. 강대환은 사망 추정시간으로부터 두 시간 전에 형사들에게 붙잡혔는데, 이를 입증하는 명명백백한 증거 사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을 입수하고 제시한 단체가-.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떨리는 손가락에서 종이가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그녀는 이제 유인물에 실린 사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형사들일 것으로 짐작되는 이들에게 끌려가는 누군가의 옆모습. 처음 유인물을 보았을 때는 조악한 종이 질 때문에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그 사람이 강대환이라는 것을.
산들산들 흩날리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재희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조악한 종이는 얼핏 보면 서류 봉투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은 마재희의 눈이 빚어낸 착각이리라. 유인물은 조금도 봉투를 닮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어느 날 본 봉투를 떠올린 것뿐이었다.
언젠가- 한영의 집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던, 갈색의 서류 봉투를.
<3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