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강렬함은 반복되었다. 재희는 매일 밤 일 층에 계시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창문을 넘었다. 한영의 방에서 몸을 섞었다. 낮에는 사이좋은 친구인 것처럼 부모님 앞에서 웃었다.
이상한 시간이었다. 마치 홀린 기분이었다. 꿈속에 잠겨 있는 듯도 했는데, 그런 재희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재희의 깊숙한 욕구를 밤마다 맞닥뜨리는 한영만이 때때로, 깊고 가라앉은 시선으로 재희를 지켜보았을 뿐.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때때로 한영의 양심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때때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그 목소리가 이대로는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라고 읊고 있는 것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섞은 후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한영은 꼭 그녀를 안아 주었다. 마치 미안해하면서도, 그 음성에 더 관심 주지 말라는 것처럼. 그렇게 이마와 볼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재희는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주어진 자극에만 반응했다. 착실히 학교를 가고, 집에 와서는 부모님의 말을 잘 듣고, 밤에는 한영의 침대 위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속에서 일던 목소리도 점차 약해졌다. 가게 수도관 공사가 거의 다 끝나 간다는 말을 부모님께 들었을 때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나마는.
“대자보 봤어?”
“게시판 봤지?”
학교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가 교내 분위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대자보에 적힌 글은 이제까지 학생들이 쉬쉬하며 의심만 품던 이야기를 사실로 만들었다.
“강대환이 붙잡혔었다고?”
“이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야?”
“그게 문제야? 강대환이 도망치다 형사들한테 붙잡혔다고 하잖아.”
“형사한테 잡힌 사람이 자동차에는 왜 치여?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대자보를 제대로 읽기 위해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틈에서 재희는 빠져나왔다. 그녀는 이미 대자보를 다 읽은 후였다. 모골이 송연해 재희는 몸을 떨었다. 대자보에 적힌 논지는 명백했다.
“사고사로 조작됐다고……?”
때마침 울린 근처의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대변했다.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양호명이 형형히 눈을 빛내며 대자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누가 쓴 거야?”
양호명의 질문에 옆에 있던 이가 짧게 대답했다.
“고전 문헌 연구부에서.”
“대환이가 움직이던 시간하고 경찰이 가고 있었던 시간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던데, 그건 누가 확인한 거래?”
“믿을 수 있는 곳에서 들었대. 거기서 이 일로 성명 발표한다고도 하고.”
“거기가 어딘데?”
“그게-.”
재희는 더 듣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경신이 그녀를 크게 부르며 달려왔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도망가고 있었다.
수업에 집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강대환의 이름이 오르내릴 때마다 이재석의 이름도 같이 거론되었다. 이재석이 프락치라는 사실은 이제 거의 기정사실이 된 듯했다. 재희만이 혼자 속으로 그것에 반발하고 있었다. 이재석은 프락치가 아니다. 프락치일 리 없다. 정황만으로 프락치라 단정 짓는 것은 안 될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재석이 프락치가 되어 버리면- 그러면- 이재석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 또한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안 된다. 재희는 강박적으로 몇 번이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재석은 프락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그러나 그녀의 속이 어떠하든, 그녀처럼 강의실에 앉은 소수의 학생들은 이재석이 프락치가 된 이유에 대해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예전에 경찰서에 끌려간 적 있다 하잖아. 그때 포섭당했을 거야.”
“그럴 수도.”
“아냐. 이재석 선배 올해 복학했잖아. 군대 있을 때 녹화 사업 대상자였던 거 아니야?”
“녹화 사업?”
“몰라? 운동권 선배들 신검받다가 군대로 강제로 끌려갔던 거? 그렇게 입대당해서 사상 교육한단 이유로 군대에 있는 동안 죽어라 팬대. 그래서 이름이 녹화 사업이잖아. 빨갱이 푸르게 해 준다고.”
“그게 프락치랑 무슨 상관이야?”
“전역하기 전에 녹화사업 대상자한테 시킨다잖아. 학교로 돌아가면 친구들 동향 자기들한테 넘기라고. 그게 프락치로 회유하는 거지, 뭐야.”
재희는 귀를 막고 싶었다. 어서 빨리 수업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강대환의 일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분개하는 학생들은 이미 시위를 하러 나가고 없었다. 지금 이곳에 남은 이들은 결국 팔짱 끼고 앉아 있는 사람들밖에 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이 재희는 못 견디게 괴로워졌다.
그러나 그녀를 괴롭게 하는 이유에 죄책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리라.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불쌍하다……. 얼마나 괴로운 경험이었기에 자기 친구를 팔았을까?”
“공안 형사들이 어떻게 고문하는지 들었잖아. 그걸 누가 버텨.”
“슬프다…….”
그 대화를 듣던 재희는 눈을 감아 버렸다.
정말 그렇다. 슬픈 일이다.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면, 자신의 양심을 저버릴까.
* * *
한영의 집은 애당초 세속과 동떨어진 장소였다. 마치 동화 속과 같았다. 재희는 그런 한영의 집에서 어릴 때부터 시간을 보냈다. 찾아오는 친구들 또한 밝고 즐거운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희는 대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세상 이야기는 뉴스에서 접한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높은 성이었다. 성곽 바깥으로 해자가 깊게 파여 있고, 누군가가 들어오고자 할 때는 무거운 성문을 끌어 올리는 수고를 해야 하는, 삼엄한 성. 재희는 최근 들어 가끔 생각해 보곤 했다. 성의 주인은 왜 그렇게까지 두꺼운 성벽을 두르고 있었어야 했을까.
‘영재야, 내 집에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
가끔 가다 영재의 입을 그렇게 막던 한영을 떠올린다.
그렇다고 한영이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한영과 저녁 식사를 꼬박꼬박 해 온 재희기에 잘 알았다. 이한영은 뉴스를 보며 가끔 분노한다. 한영의 성격상 드러내 놓고 분노를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예민한 마재희는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재희는 한영이 어느 지점에서 분노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한영보다 늘 느려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며칠이 지나면 재희도 한영이 왜 분노했는지 알게 되었다. 앵커가 기계적으로 읊는 한 줄의 문장 속에 함축된 진실. 그리고 때로는 그 한 줄로조차 다뤄지지 않는 진실. 그 진실이 한영으로 하여금 눈매를 서늘히 굳힌 채 텔레비전을 보게 하는 원인이었으니까.
그런 이한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못 보고 넘어가는 사소한 사실에서도 숨은 ‘잘못’을 읽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양심적이지 않으면, 누가 양심적일까.
“왜?”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라는 대답을 재희는 싱겁게 덧붙였다.
그녀의 몸 위에 있던 한영이 잔잔히 웃었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한영은 그렇게 말했다. 거리낌이 없는 어조였다.
그래서 재희는 다시금 한영의 나신을 보았다. 아름다운 몸이다. 수년의 시간 동안 단련해 왔을 몸. 육체의 주인이 가진 지성과 어울리지 않게 동물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몸.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재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한영이 지닌 날 선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재희는 한영의 피부 곳곳을 눈으로 살피다 손을 뻗었다.
“……이 상처.”
정사 후의 나른함으로 재희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있던 한영이 무심히 되물었다. 상처?
재희는 한영의 옆구리에 있는 희미한 흔적을 만졌다. 작고 동그란 상처 자국이었다.
“이건 언제 생긴 거야?”
“어렸을 때.”
“……이런 상처가 있는지 몰랐어.”
“옷을 벗지 않는 이상 모르지.”
재희는 말없이 그 상처를 보았다. 한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아주 오래된 상처였다.
“……어쩌다 다쳤어?”
“어른들이 연탄 갈고 있을 때 옆에 있다 뎄던 것 같은데.”
“……아팠겠다.”
“글쎄.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일이라서.”
한영은 나직이 웃었다. 재희는 침대에 누운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모르는 상처는 이제 더 없는 거지?”
한영이 잠시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는 곧 미소 지었다.
“응. 없어.”
재희는 잠시 긴가민가했으나, 곧 안심했다. 그녀의 눈에도 한영의 몸에 이렇다 할 상처는 없었으니까.
문득 그녀는 느껴지는 게 있어 고개를 내렸다.
“……아.”
재희는 금세 허벅지를 누르는 단단한 감촉을 느끼고 몸을 틀었다. 한영이 그 위를 올랐다. 순식간에 딱딱해진 하체가 재희의 아래를 느긋이 문지르고 있었다. 재희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다리를 벌렸다. 이미 한차례의 정사로 젖은 입구에 성기가 부딪혔다. 이제는 자동 반사 같은 열기가 부딪힌 곳으로부터 들불처럼 하반신으로 번졌다.
탁상에 있는 콘돔에 손을 뻗는 한영이 보였다. 재희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어떤 느낌이야?”
사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콘돔 안 끼면…… 어떤 느낌이야?”
한영이 조용히 웃는다.
“글쎄.”
“……너도 몰라?”
“응.”
“왜?”
“안 끼고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재희는 그제야 그 질문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냥. 하고 싶지 않으니까.”
콘돔을 씌운 성기가 모든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바로 찔러 들어올 것처럼 준비된 몸에 재희는 손을 올렸다. 가슴을 밀어내는 재희에, 한영이 즉시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이유를 묻는 시선이었다.
“……궁금해.”
알 수 없는 조바심이 그녀를 다시 조급하게 하고 있었다. 한영과의 행위가 거듭될수록 재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때때로 느꼈다. 더한 것을 원했다.
뭔가가 더- 필요했다.
“그거 빼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
볼을 간지럽히던 한영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한 것은, 그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영의 담담한 저 표정의 의미를, 어떻게 해도 알아낼 수 없었다. 곧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는, 저 얼굴의 의미도.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는 건 가르쳐 줄 수 없어.”
“……왜?”
“재희야, 내 아이 갖고 싶어?”
그 순간 재희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정면에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던 이한영만이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한영은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까지 왔잖아.”
대신 그는 냉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히 물었다.
“그거 다 헛수고로 만들고 싶어?”
최근의 이한영답지 않은 말이다. 줄곧 재희를 뜬구름 위에 앉혀 둔 것처럼 달달하게 녹였던 이한영과는 다른, 냉혹한 말. 찬물 한 바가지를 머리 위에 쏟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
그러나 재희는 그 순간, 어느 순간보다도 다정한 이한영을 보고 있었다.
“……한영아, 나는-.”
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마치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혹은,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그 대화가 기점이었다. 재희는 그 후로 한영과 성행위를 할 때마다 콘돔을 대하는 한영의 태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영은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때때로 그녀의 눈을 마주해 왔지만, 직접적으로 그 화제를 건드리는 것은 피했다.
그래서 더 재희가 집중하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한영은 콘돔이 있고 없고에 따라 통제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콘돔이 없을 때는 성욕을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잘 억눌렀다. 재희는 얼마 가지 않아 이한영이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피임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재희는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그것을 이한영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런 면을 능숙히 이용하기까지 했지만, 그 집중력이 그의 성기로 향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
늦은 새벽 서재에 앉아 있는 한영의 성기를 허락도 없이 불쑥 손에 쥐었을 때, 재희는 한영이 관찰하는 시선으로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바로 발기를 해 놓고도 그렇게 냉정히 그녀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라도 다음에 이어진 행위 앞에서는 일순 흔들렸다. 마재희가 그의 다리 사이에 꿇어앉고, 그의 성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던 순간에는.
“……이런 식으로 튈 줄은 몰랐네.”
야릇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리던 그 말을 통해 추론하면, 한영은 그녀의 이상 행동이 무슨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똑똑한 이한영은-.
“이 세우지 말아야지, 재희야.”
그것을 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줄 알았다.
“이렇게라도 받고 싶은 거잖아. 그럼 전부 다 삼킬 줄 알아야지.”
그리고 그는 자상히 웃으며 그녀의 입안 깊숙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 크기에 힘겨워 밀어내려는 재희의 혀를 지그시 짓무르며.
“삼켜, 재희야.”
그런 사람이었다.
마재희가 최근 알게 된, 이한영이란 사람은.
“삼켜.”
뒤틀리고 비틀린 욕망을, 끝까지는 감추지 못하는 사내였다.
* * *
새벽, 재희는 부스스한 머리를 들었다. 멍한 눈을 들며 방을 살폈지만, 한영은 없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깨 머리가 멍했다. 온몸을 타고 오르는 근육통에 그녀는 잠시 신음했다.
침대와 사선으로 빗긴 벽에 걸린 거울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몸을 섞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자제하려 하는 것 같던 한영은, 이제 거리낌 없이 그녀의 흰 피부에 붉은 자국을 수놓는다. 은밀한 곳일수록 더 집요해지는 자국을 보다가 재희는 시선을 올렸다. 입술이 부어 있다.
한창 행위 중에 한영이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한다.
‘……빨게 하고 싶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슬슬 한영의 성기를 입에 무는 것을 배워 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남다를 것 없는 표현이었는데도, 재희는 그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영이 웃고 있었는데도.
그러나 어쨌든 이한영은 이한영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좋았다. 그가 그렇게 한 번씩 그녀를 두렵게 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배 속 깊은 곳이 지끈거릴 정도로 몸이 달았다.
그런 점을 보면 결국, 자신은 한영과 완벽한 한 쌍일지도 모른다.
“……욕심.”
재희는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완벽한 한 쌍이라니.
욕심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성애의 흔적이 남아 그런 것일까. 자신이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무엇이 변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희는 나체 위로 한영의 옷을 걸쳤다. 한영이 보고 싶었다. 시계를 흘끗 살폈다. 새벽 한 시가 막 넘었다. 이 시간까지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걸까? 교수님이 떠맡긴 작업이 있는 걸까.
그러나 침실 맞은편에 있는 서재는 비어 있었다. 화장실도, 계단을 타고 내려간 거실과 주방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정적만 가득한 한영의 집에, 그녀는 우두커니 섰다.
서서히 몸에 가득 차 있던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
재희는 굳은 듯 움직이지 않던 발을 애써 움직여 소파에 앉았다. 드러난 허벅지로 서늘한 냉기가 달라붙었다.
막막한 어둠이 내린 거실 안에서 재희는 양심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양심. 그 단어 앞에서 과거의 기억을 되는 대로 끄집어냈다. 한영이 얼마나 양심적인지. 한영이 얼마나 선한지를.
그렇게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한영의 알 수 없는 외출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그는 잠시- 산책을 나간 것이다.
한영은 새벽 세 시가 되어 갈 때 돌아왔다. 재희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한영이 흘리는 소음을 들었다. 최소한으로 통제된 소음만 흘리며 한영은 씻고 그녀 옆에 몸을 뉘었다. 흔들리는 침대에 뒤척이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몇 번이나. 계속해서.
재희는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자는 척해.”
낮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영이 물었다.
재희는 혹여 맺힌 눈물을 한영이 눈치챌세라, 꿈지럭꿈지럭 몸을 붙였다.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기운에 그러는 것이리라 여겼는지 한영이 조용히 웃었다.
“……어디 갔다 왔어?”
“연탄불이 꺼져서.”
그러나 연탄불을 두 시간 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재희는 한영의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깨워서 미안해. 계속 자.”
한영이 고즈넉하게 건네는 말을 들으며 재희는 눈을 감았다.
“……잘 자.”
“그래. 너도 잘 자.”
재희는 어떻게든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했다. 한영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시간이 흐를수록 재희는 때때로 느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도, 한영과 저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음을. 그녀는 한영을 주시하고 있었고, 한영도 그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서로가 무언가를 기민하게 감지하고도, 입에 올리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나, 마치 재고 따지고, 또는 미루고 있는 것처럼.
재희는 방황했다. 때로는 한영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을 찾으려 했고, 정작 자리가 생겼을 때는 입술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속에 품은 갈등을 숨겼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영이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매순간을 살피고 있었다. 의문과 함께였다.
아무리 살을 섞어도 사랑해선 안 된다고 한영과 약속했다.
그 약속이, 냉혹한 진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진실을 내가 건드리려 하는 순간, 한영이는 이 관계를 중단하려 하지 않을까?
결국은 욕심 문제였다.
재희는 이른 아침, 한영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문득 그것을 깨닫는다. 마재희는 이한영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척 외면하려 했던 것이고, 지금에 이르러서까지도 입을 꾹 다문 채 진실을 확인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희는 일순 도는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건 욕심이자, 이기심이다. 스스로가 섬뜩하게 느껴질 지경에 다다른.
재희는 조용히 눈을 떴다.
잠자코 한영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기억에 새기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나신인 한영의 아름다운 몸을 타고 내려가 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불이 덮여 어두운 시야로, 잠잠한 그의 성기를 봤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되돌아올 위로를 바라는 어린 짐승처럼 성기를 핥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반응은 느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그의 것을 입에 물고 빨았다.
그것이 어느 순간 불뚝, 일어서는 순간까지.
“……시간 맞춰 깨워 준 건 고마운데…….”
성기의 드라마틱한 변화로 이미 한영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재희는 그래서 들춰진 이불에서 서늘한 바람이 흘러 들어와도 놀라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것을 여전히 문 채였다.
한쪽 팔꿈치로 상체를 버티고 있던 한영이 눈을 마주치고는 미소 짓는다.
“나 일 교시부터 수업이야, 재희야.”
“응…….”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한영의 음모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머리를 오르내렸다. 위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들고 있던 이불자락을 완전히 재희 머리 위로 걷어 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재희의 머리를 그의 긴 손가락이 부여잡았다.
“너는 오늘 수업 없다, 이거지.”
그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질책을 하면서도, 그녀의 머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재희는 잠시 목구멍을 찌른 성기 때문에 움찔 몸을 굳히면서도, 착실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응.”
“나빴네.”
나지막한 목소리 말미에 섞인 웃음소리가 좋다. 재희는 마지막으로 길게 그의 성기를 빨아올렸다.
한영이 탁자 서랍에 있던 콘돔을 꺼내 건넸다. 재희는 그것을 한영의 발기한 성기 위에 씌웠다. 이제껏 봐 온 것이 있어 헤매지는 않았다. 한영은 그 과정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재희는 어깨에 이불을 두른 채, 발기한 성기 위로 천천히 앉았다. 그녀의 몸은 충분히 젖지 않았음에도, 그동안의 경험이 모두 헛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의 것을 부드럽게 삼켜 내려갔다.
천천히 위아래로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성감보다는 한영의 성감을 위해 움직였다. 그동안 허투루 배운 것은 아니었다. 질구를 조이며, 내벽을 보란 듯이 조이며, 느릿하게 일어나고, 또 느긋하게 한영의 치골 위에 앉았다.
젖은 내벽은 힘이 좋았다. 흡착하듯 성기를 빨아들였다. 재희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감상하는 눈빛을 짐짓 보내던 한영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걷혀 갈 정도로.
차차 여유가 사라지는 사내의 두 눈을 재희는 달아오른 눈매로 주시했다. 일부러 그와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르내렸다. 최근 들어 절제력이 느슨해진 한영은 그녀에게 몇 번이고 말해 주었다. 예쁘다고. 너 정말 예쁘다고.
그러니, 재희는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허벅지를 감싼 한영의 손을 잡아다 끌어, 그녀의 가슴을 쥐게 했다. 손을 겹쳐 같이 가슴을 주무르며,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었다. 그대로 그를 응시했다. 가장 깊숙이 성기를 받아들인 순간에, 강렬하게 그를 조이면서, 시선으로 유혹했다.
너는 이미 이 몸이 가진 부드러움을 잘 알지 않느냐고. 그 감각을 알고도, 앞으로 몰랐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너도, 내가 없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아!”
그리고 이한영은 바로 그녀를 향해 달려드는 것으로 그 질문에 답했다.
재희의 신음은 금세 먹혔다. 뭉개진 이불이 허리와 등에 배겼지만, 그것을 더 느끼지 못했다. 한영이 퍽, 하고 그녀의 내벽을 때렸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강한 힘으로.
그리고 재희는 그 단 한 번의 삽입으로 놀랍게도 단숨에 절정에 올랐다. 비음 섞인 간드러지는 신음이 공간을 울렸다. 그것은 그러나 시작이었다. 이한영은 결코 봐주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렇게 자제하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렸다. 몇 번이고.
그리고 이한영은 그날, 처음으로 마재희의 앞에서 상스러운 말을 했다. 절정을 느끼며 자지러지는 와중에도, 재희는 분명 들었다. 낮게 욕을 중얼거리는 한영의 목소리를.
평소라면 한영이 욕도 하는가 싶어 놀랐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욕을 배웠나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희는 움찔움찔 입구를 조이며 그조차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련된 아나운서처럼 지적인 모습만 보이던 한영이, 처음으로 허물어뜨리고 드러낸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모습은, 자신만 봐야 했다-.
재희는 놀랄 정도로 불붙는 소유욕에 한영을 끌어안았다. 한영 또한 같은 것을 느낀 것처럼 그녀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한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더. 더 해 줘.”
끝 갈 데를 모르고 날뛰는 욕심에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요부처럼 입구를 조였다. 울컥울컥 그녀 안에 파정하고 있는 성기를 빨아들였다.
한영이 거칠어진 숨결을 숨기지 않으며 웃었다. 안에서 다시 부풀어 오르는 물건이 느껴져,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그날 이한영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재희는 몇 번이고 그의 몸에 꿰뚫려 흔들리면서, 또 비명을 지르며, 생각했다.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건, 그녀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너무나 기꺼웠다.
한영은 언젠가 자신의 욕심을 저지해 달라 부탁했지만, 재희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 * *
“마재희?”
재희는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름만 아는 타 과 선배가 그녀를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너도 읽어 봐.”
“……감사합니다.”
재희는 손에 든 유인물을 내려다보았다. 갱지의 저렴한 종이 질 때문인지 유인물에 실린 사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글에 실린 강대환의 이름만큼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재희는 물끄러미 유인물을 내려다보았다. 집중해서 읽지는 못했다. 재희와 마찬가지로 유인물을 받은 다른 학생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때마침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일까.
“죽은 사람을…… 도로변에다 버려두고 시치미를 뗀 거라고?”
“……부검을 했어야 했어. 급하게 장례 치르게 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고.”
“유가족들은 이 얘기 알고 있대?”
“이제 알고 계시겠지. 어머니만 계시고 동생들도 다 아직 어리다고 했는데…….”
잠시 어지럼증이 치밀었다. 재희는 사물함의 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재희는 묵묵히 다음 수업에 필요한 교재를 꺼냈다.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곤란해지는 유인물은 잠자코 다른 교재에 끼어 두었다.
사물함을 닫고 돌아서는 내내 뱃속이 뒤틀렸지만, 묵묵히 복도를 걷기만 했다.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멋대로 부풀어 오르는 공기 바람이었다. 재희는 그것이 두려웠다. 계속해서 이렇게 부풀어 오르다가 언젠가 터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바람구멍을 내고 싶은데, 도저히 어디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또 막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알 길 없이 막막할 때는, 보통 단 한 사람을 보면 해결되곤 했었는데.
“한영이다.”
“어디?”
다른 학생들이 속닥이는 소리는 아스라이 멀어졌다. 재희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영이 교정에 서 있었다.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와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미소 짓는 얼굴이 정오의 햇빛 아래 눈부셨다.
재희는 잠자코 그가 교정을 걸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안전하단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일상적인 모습에 안도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녀의 시야에 불길한 징조가 들어온 걸까.
재희는 호명이 그 자리에 있는지 미처 몰랐다. 호명은 창가에 기댄 채 창밖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풀어진 자세였다. 그러나 그 늘어진 자세와 달리-.
서슬 퍼런 시선이었다.
“양호명! 뭐 해? 급해!”
“……어. 가.”
재촉하는 친구의 부름에 결국 호명이 등을 돌렸다.
목에 두른 손수건을 여미며 그대로 걸음을 재촉하는 양호명을 보는 재희의 기분이란, 찬물을 끼얹은 듯 차디찼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한영을 보고 있었던 거지?
때마침 근처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쏟아지듯 몰려나왔다. 순식간에 콩나물시루처럼 복도를 꽉꽉 메운 인파 속에서, 호명은 잠시간 멈춰 섰다. 그는 사물함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호명은 손수건을 코까지 끌어 올려 단단히 묶고는,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시위에 전념하느라 학교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던 양호명이 꼬박꼬박 등교하기 시작했다. 오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데모가 없는 시간이면 강의실이든, 국문학과 학생들이 자주 모이는 서클 부실이든 끈덕지게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양호명을 보며 웬일이냐는 시선만 보내다 말았지만, 재희는 그럴 수 없었다. 양호명은 누군가를 관찰하고 있었다. 신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재희는 목 밑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조만간 무언가가 터질 것임을 예감하고, 양호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양호명이, 이한영을 따로 불러내는 장면을.
재희는 그 순간 겁에 질렸던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양호명이 한영을 학교 중 가장 외진 곳인 연구실 단지 건물로 불러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재희는 그들의 뒤를 멀찍이서 몰래 따라가며 초조감을 참았다. 그녀의 뇌리에 계속해서 지난날 들은 사건들이 떠올랐다. 과격한 학생 몇이, 어떤 사람을 프락치로 여겨-. 재희는 입술을 깨물고는 생각을 정정했다. 과격한 학생들이 수상한 사람을- 때리고 고문했던 사건이 몇 달 전에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한영이에게 벌어지는 거라면.
사람을 불러야 하는 건지 고민하며 재희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엿보았다. 빈 강의실이었고, 다른 인적은 없었다. 그즈음에야 재희는 잠깐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인가 보네요.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한영이 먼저 운을 뗐다. 양호명을 배려하는 듯 다정하게 들리는 음성 같다가도, 서늘할 정도로 무감정한 어조였다.
양호명이 담담히 말을 받았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생겼어.”
“말씀하세요.”
“강대환이 거처를 옮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게 전화했었어.”
“…….”
“경찰이 오고 있단 소식을 들어서, 지금 다른 곳으로 갈 거라고. 연락 안 돼도 걱정하지 말라고.”
강의실 뒷문에 붙어 서 있던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코끝이 찡해 왔다.
양호명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어. 그걸 갑자기 어떻게 알았냐고. 그랬더니 대환이가 그러더라.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알려 준 거라고.”
“…….”
“그 후는 알지? 그 전화 이후로 대환이는 실종됐어. 그리고…… 상황은 지금 이 모양이고.”
강의실 안에 잠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시 들린 한영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 후배가 누군지 궁금하단 말씀입니까?”
“아니, 난 그 후배가 누군지 알아.”
“누군가요?”
“너.”
듣고 있던 재희는 움찔 몸을 떨었다. 한영이라고?
의외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재희와 달리, 곧이어 들린 한영의 음성은 높낮이가 없이 평온했다.
“저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유품 정리하다 생각났거든. 일 학기 때 대환이가 너와 몰래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어. 그때 내가 걔한테 물었거든. 이한영과 어떻게 친해졌냐고.”
“…….”
“그랬더니 걔가 그랬거든. ‘믿을 수 있는 후배’라서, 친해졌다고.”
“억측이네요.”
한영이 느긋하게 반박했다.
“누구나 쓰는 상투적 표현으로 저를 의심하는 건, 무리한 의도로 보이는데요.”
“무리한 의도? 방금 그렇게 말했냐?”
“대환 선배의 은신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이재석 선배가 프락치로 몰렸죠. 그런 상황에서 제삼자인 제가, 대환 선배의 은신처를 알고 있었을 거라고 선배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의심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까?”
“…….”
“요즘 며칠째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게 이것 때문이었네요.”
“……그래서 네가 아니야? 대환이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한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재희는 급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답해. 아니라고 대답해. 사실이든 아니든, 그냥 그렇게 대답해. 선배가 의심하고 있잖아.
“맞습니다.”
그러나 한영은 그렇게 답했다. 재희는 천천히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제가 강대환 선배에게 전화했습니다. 위치 발각됐으니 빨리 옮기라고요.”
재희처럼 말문이 막힌 듯, 양호명이 잠시 숨을 억눌렀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이재석 선배에게서 들었습니다.”
“뭐……?”
“이재석 선배가 고백했습니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대환 선배가 있는 곳을 말해 버렸다고요. 지금쯤 경찰이 가고 있을 거라고.”
“…….”
“그래서 제가 전화했습니다. 빨리 자리 옮기라고요.”
재희는 입을 막은 채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가슴이 아팠다.
호명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새끼가 왜 너한테 그런 말을 하지?”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하. 우연?”
“재석 선배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선배는 알고 계시겠죠. 제일 친한 친구였으니까.”
“…….”
“죄를 지은 사람이 가장 먼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압니까?”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알아듣게 말해.”
“재석 선배는 나중에라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냈습니다.”
“…….”
“선배도 사실 예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재희는 한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열린 뒷문 틈으로 재희는 그들을 보았다. 양호명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달리 한영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렇게 슬픈 얼굴로, 일그러져 있는 걸까.
“……너 뭐 하는 새끼야.”
“…….”
“……네 말 안 믿어. 그 정도로 순진하지 않아.”
“선배.”
“네가 프락치야.”
“…….”
“이재석이 아니라, 네가 강대환을 팔아넘긴 거야, 새끼야.”
양호명은 무서운 말을 남기고 한영에게서 등을 돌렸다.
재희는 굳은 발을 애써 움직였다. 서둘러 복도가 꺾어지는 코너에 몸을 숨긴 순간, 양호명이 강의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대로 멀어져 갔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가슴이 저려 왔다. 재희는 한동안 가만히 그 자리에 선 채 홀로 서 있을 한영을 떠올렸다. 코끝이 찡해 왔다.
그러나 곧 한영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양호명과 달리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재희는 당황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하필 그녀가 들어온 복도가 외진 곳이었다. 안 쓰는 책상과 의자들이 흉물처럼 쌓여 있었다.
다급해진 재희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과학실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책상이 보였다. 그 안에 들어가면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재희는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그 순간에는 창피한 줄도 몰랐다.
복도를 울리는 그의 걸음 소리가 차갑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녀의 마음의 문제일까. 재희는 숨을 삼켰다. 한영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한영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빨랐다.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래서 재희는 점차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말 그대로 숨을 참기 위해 들이켠 들숨이 아직 채 빠지기도 전이었다.
한영의 다리가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그녀가 숨은 책상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요즘 술래잡기를 자주 하네.”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한영이 눈을 마주쳐 왔다.
“누가 술래야?”
“…….”
“나야?”
수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이 순간에 부끄러워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재희가 느끼는 감정은 실상 두려움에 더 가까웠다. 한영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아니다. 한영이 보일 반응과 감정이 두려웠다.
재희는 고개를 밑으로 떨구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덕분에 옛날 생각나네.”
재희는 조심스레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 손은 책상 위를 붙잡고 있는 한영이 보였다. 화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 미소에 속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
재희는 다시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떴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다른 이였다면 질렸다는 얼굴로 내려다봤을 것이다. 화부터 냈을 것이다. 한영은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충분히 불쾌해할 만한 일이었다.
“재희야,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너 미행 정말 못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런 상황 세 번이나 겪고 싶지는 않거든.”
자상한 어조지만 그 말속에 숨은 경고를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재희는 기가 푹 죽어 버렸다.
“……여기에 숨은 건 어떻게 알았어?”
한영이 말없이 눈짓으로 아래를 까딱 가리켰다. 재희는 한숨을 삼켰다. 치맛자락이 보란 듯이 책상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한심함에 재희는 얼굴을 손에 묻었다. 한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렸을 때도 치맛자락 간수를 못 해 들켰던 것 같은데…….”
“……네가 너무 잘 찾았던 거야.”
그랬다. 술래잡기를 하면 웃는 사람은 언제나 이한영이었다. 재희만 숨은 한영을 찾지 못해 사방을 헤매다 울상을 짓곤 했다. 어린 한영은 그녀가 그렇게 주저앉고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녀가 그를 찾아낸 적이 없었다.
재희는 문득 느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걸지도 모른다.
“괜찮아.”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고요히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숨어 있어도 돼, 재희야.”
“……아.”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 잡히지만 마.”
“…….”
“내가 널 찾기 전까지, 잘 숨어 있어. 난 그거면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왜였을까. 재희는 눈물이 찔끔 솟았다. 그의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이제까지 잘 숨어 있었던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묻는 재희에, 한영이 다정히 답했다.
“그래. 이제까지 해 온 것처럼.”
“…….”
“다리 안 아파?”
한영은 이제 나오라는 듯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재희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줄곧 참고 있던 질문이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
“나 다 들었는데…….”
“…….”
“……미네르바에서도 들었어.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숨어 있었어.”
한영이 말없이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기어코 묻어 둔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것을 원치 않았던 걸까. 그러나 그렇다, 감히 단언하기에는 한영의 눈빛이 잠잠했다. 한 끗 찌푸려짐 없이 고요한 눈동자 속에서 재희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알 수 없어졌다. 솔직한 진심을 듣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은지를.
그때 한영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듣는 동안 무슨 생각 했어?”
“……응?”
“내가 호명 선배한테 한 말 듣고, 무슨 생각 했어?”
재희는 말없이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그저 기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재희는 조금 슬퍼졌다. 서서히 가라앉는 목소리로 솔직히 답했다.
“……네가 힘들었겠다는 생각.”
“…….”
“대환 선배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으니까. 네가 많이 괴로워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가타부타 말 없는 한영은 어느새 무표정했다. 그러나 마재희는 이한영의 무표정이 무감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이였다.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데도 몰라서…… 미안해.”
그동안 나쁜 의심만 하고 있어서 미안해. 재희는 뒷말은 속으로 건넸다.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강대환과 친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한영은 분명 그의 죽음 앞에서 복잡한 얼굴을 보였었다. 그것을 눈치채고도 왜 위로 한마디 할 줄 몰랐을까. 재희의 눈시울이 다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그때 갑자기 한영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재희는 묻는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한영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즐거워서 웃는 미소 같지는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한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거야.”
“아…….”
“네가 믿어 줄 걸 아니까.”
놀라게 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한영이 입을 맞췄다. 그는 가볍게 부딪치고 고개를 조금 떨어트렸다. 고요한 시선이 빤히 그녀에게 눈을 맞춰 오고 있었다. 책상과 벽이 둘러싼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재희는 그 눈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까맣게 잊었다. 마재희는 그저, 눈앞에 있는 순간만 원했다.
“더…….”
조르려는 말을 하려 했으나, 한영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입술이 삼켜졌다. 급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고 끌어당기는 한영에, 재희도 덩달아 훅 달아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한영의 목에 팔을 감았다. 책상 다리에 팔이 부딪혔지만 아픔도 못 느꼈다. 쪽, 쪽, 젖은 소리가 책상 아래를 맴돌았다.
“미네르바에는 왜 갔어?”
“아……!”
옷 아래로 손을 넣고 가슴을 주무르는 한영에, 재희는 신음만 흘렸다. 한영이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그 숨결 또한 거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영이 연거푸 키스하며 물었다. 재희야, 왜 갔어?
“아…… 너 다른 여자 만나면, 방해, 하려고…….”
저도 모르게 솔직한 대답이 나가 버렸다. 끓는 신음과 함께였다. 그녀와 함께 책상 아래로 들어온 한영이 하반신을 부딪쳐 오고 있었다. 단단한 감촉이 계속 치마를 들추며 위아래로 문질러 오고 있었다.
“……아쉽네.”
한영이 허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네가 질투하는 모습, 모처럼 볼 수 있는 기회였을 텐데.”
“……아아.”
재희는 한영에게 매달린 채 몸을 떨었다. 뒤늦게야 여기가 어딘지를 떠올렸다. 재희는 한영의 가슴팍을 밀다가도 붙잡았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재희는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중얼거렸다. 학교, 여기 학교인데.
“……그렇지. 학교지.”
한영도 그제야 떠오른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미련이 남은 손길이 재희의 젖가슴을 다시 한번 짜듯 애무했다. 찌릿한 흥분에 재희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한영의 한숨이 귓가에 울렸다.
“오늘도 늦어.”
“아…….”
“창문 잘 닫고 자. 날씨 많이 추워졌어.”
“응…….”
아쉬움이 남은 재희의 음성을 눈치챘나. 한영이 흐트러진 치마를 단정히 정리해 주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잠그지는 말고.”
“……아.”
멀어지는 한영의 얼굴을 홀린 듯이 올려다보았다. 한영의 시선 또한 그녀에게 붙잡힌 채였다. 담담한 척 눈을 휘고 있지만-.
재희는 그 시선 속에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한영아…….”
그래서 재희는 다시 그에게 매달려 입을 맞췄다. 한영도 기다렸다는 듯 재희를 안았다. 열렬히 응했다. 재희는 언제까지고 계속 그렇게 그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장소 따위는 상관없이. 누가 보든 하등 무신경하도록.
문득, 한영의 사랑을 원해 홀로 괴로워하던 과거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과거는 어차피 지나갔다. 재희는 그날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한영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과거는 어차피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낮에 마주한 한영의 눈을 통해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 과거에 매몰되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한영을 놓치고 있었음을. 그녀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옳았다. 그렇게 원하던 순간이 지금 있는데, 왜 괴로워하고 있었지?
재희는 창문에 걸린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강대환을 도와주려 했다. 진심은 그랬지만, 상황은 비극으로 흘러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영이는 최선을 다했어.
“……맞아. 그래.”
재희는 중얼거렸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한영의 키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온몸으로 부딪쳐 오며 널 원한다고 말해 주던 그의 몸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한영이 마재희가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 양심적이란 사실을 확인받아서였을까.
재희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풍경만 보았다. 풍경이 흔들리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재희야.”
“……응.”
언제 들어도 그리운 풍경 소리와 함께 한영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재희는 모든 시름을 잊었다. 언젠가 이재석이 을씨년스럽게 중얼거리던 마지막 말도.
다음 날, 재희는 몸의 이상을 눈치챘다. 새벽에 얇은 잠옷 차림으로 몇 번이고 창문을 닫았다 열었다 한 게 문제였나. 수업 듣다가 문득 느꼈다. 몸이 으슬으슬하게 추운데, 감기 기운이 오는 걸까?
그렇게 의문에 그치다 만 추측을, 저녁이 되어서야 귀가한 한영은 바로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열 있네.”
한영은 들어오자마자 재희의 이마를 짚어 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녀의 이마에 잠시 손을 짚어 보던 한영은 말했다. 많이 뜨거운데. 몰랐어?
“재희 열나니?”
“감기 걸렸나?”
부모님이 걱정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에 재희가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던 찰나였다.
한영은 재희의 이마에서 손을 치우곤, 겉옷 주머니에서 봉지를 꺼냈다. 한영은 약국 봉지를 그녀에게 건넨 것만으로 이곳에 온 이유가 끝났다는 듯 현관문으로 향했다. 무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섬세하게 느껴지는 말을 남기고.
“약은 식사하고 나서 먹어.”
“한영아, 벌써 가니? 밥 먹고 가.”
“아니에요. 저 금방 나가 봐야 해요. 약속이 있어서.”
“어머, 데이트?”
김 여사의 너스레에 한영이 웃었다.
“아니요. 선배들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그는 바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는 재희의 집을 나갔다.
“내가 저런 남자와 결혼했어야 하는데…….”
“크흠.”
“마 사장님, 헛기침은 그만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학교 끝나고 바로 선배들 만나러 가면 될걸, 재희 약 주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어쩜 저렇게 상냥한지.”
못 들은 척하는 마 사장을 뒤로한 채 김 여사가 재희에게 다가왔다. 이마에 손을 짚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며 재희는 약국 봉지만 만지작거렸다. 봉지 안에 해열제와 감기약이 보였다.
“우리 딸은 조금만 덜 무뚝뚝해도 괜찮을 텐데.”
“……죄송해요.”
“죄송하긴. 이게 다 네 아빠 닮아서 그래. 네 아빠가 안 물려줘도 되는 걸 물려줬어.”
“……이봐, 김 여사.”
재희는 괜스레 약봉지를 만지작거렸다. 학교에서부터 머리가 아팠다. 몸도 으슬으슬 추웠다. 그래서 두어 번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기는 했었다. 그러나 한영이 그것을 보고 있으리라곤 생각 못 했는데.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학교에서 데면데면한 동기생 연기를 하면서도, 한영은 재희를 살피는 것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보다도 더 빨리 재희의 이변을 눈치챘다.
한영은 늘 그랬다.
재희는 약국 봉지를 내려다보며 행복해졌다. 성관계를 알려 주는 대신 변하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지 말라고. 이제까지 그래 왔듯 소꿉친구여야 한다고. 그 변하지 말라는 말이 서러움으로 와닿았던 적이 분명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그 약속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재희야, 밥 먹고 약 먹자.”
“……네.”
방금 나간 한영이 보고 싶어졌다. 재희는 현관문으로 향하려는 고개를 애써 주방으로 향했다.
증상이 약해 금방 떨어질 줄 알았던 감기는 다음 날에도 재희를 괴롭혔다. 학교 복도 위에서 한참을 콜록거리던 재희는 그즈음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흘은 갈 감기다.
당장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과제를 내야 했다. 웬만해서는 직접 과제를 받는 법 없던 심 교수가 웬일로 학생들에게 본인의 교수 연구실로 제출하라 했다. 재희는 그것이 내심 부담스러워 미적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교수들은 불편했다.
재희는 담담히 교수 연구실 앞에서 스스로의 목 상태를 점검했다. 문에 노크를 했다. 들어오라는 심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 연구실 문을 열던 재희는 잠시 멈칫했다.
“무슨 일인가?”
“……안녕하세요, 교수님. 과제 때문에 왔습니다.”
일순 숨이 턱 막힌 기분이 든 것은, 왜였을까.
“들어오게.”
“……네.”
재희는 꾸벅 교수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영은 연구실 소파에 앉은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에 정신이 팔려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터무니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자네는 동기와 인사도 않고 지내는 건가?”
심 교수가 오지랖을 부렸다. 한영은 그제야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안녕.”
인사 정도만 간신히 나누는 동기에게 그러듯, 한영이 열없이 인사를 건넨다. 재희도 담담히 인사했다. 안녕. 그제야 만족한 것처럼 심 교수가 허허 웃으며 재희가 내민 과제를 받았다.
“안 그래도 자네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붙잡는 말에, 재희는 노교수의 얼굴을 살폈다. 어린 손녀를 보듯 자상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연륜의 힘을 느끼게 하는 시선이었다.
“다음 수업이 있는가?”
“……없습니다, 교수님.”
“잘됐군. 그럼 잠시 차 한잔하세.”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을까. 소파에 앉아 있던 한영이 탁자 위에 올려 둔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종이 뭉치를 테이블 한편에 놓고 일어나는 한영을, 심 교수가 은근한 어조로 붙잡았다.
“자네 어디 가려고?”
“자리 피해 드리겠습니다.”
“되었네. 힘들게 도와주는 사람 내쫓는 취미는 없어. 계속 보던 일 보게.”
그러나 한영은 몸을 일으켰다. 교수의 호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는 듯 연구실 한편으로 향했다. 석유풍로에 주전자를 올리는 것이, 차를 준비하는 듯했다.
재희는 소파에 앉는 심 교수를 따라 하석에 앉았다. 심 교수님은 사람 좋게 웃으며 재희에게 이것저것 물어 왔다. 학교생활에 대한 가벼운 안부 인사였다. 재희는 담담히 대답하면서도 의아해했다. 그녀는 이제껏 심 교수의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강의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때 한영이 다가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재희는 앞에 놓인 찻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대추차였다.
“자네, 지금 심술부리는 건가?”
문득 들려온 뚱한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심 교수가 혀를 쯧쯧 차며 그의 앞에 놓인 대추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희가 앉은 긴 소파의 끝자리에 앉고 있던 한영이 무심히 미소 지었다.
“재희 때문입니다, 교수님.”
“음?”
“수업 들을 때 보니, 기침을 하더군요. 대추차가 감기에 좋다고 들었습니다.”
“저런…… 자네 감기 걸렸나?”
심 교수는 재희를 염려하는 시선으로 보다가도, 한영에게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다.
“내게는 안 줘도 되지 않는가. 대추라면 질색하는 거 알면서 기어이 내주는 심보라니.”
“교수님도 감기 기운 있습니다. 몸 생각 하셔야지요.”
“몸 생각이 아니라 나이 생각하라는 것 아닌가. 늙은이답게 대추나 먹고 떨어지라고.”
“교수님.”
“알았네, 알았어. 내가 또 교수로서의 품위를 잃었다는 거지?”
재희는 오가는 대화를 주시하며 문득 느낀다. 생각보다 그들은 사이가 좋아 보였다. 노교수의 심술에 덤덤히 받아치는 한영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편해 보였다. 그는 버릇처럼 두르던 정중함을 느슨히 늦추고 있었다. 꼭 그녀와 친구들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어서 들게.”
“……감사합니다.”
재희는 찻잔을 들며 한영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싫다가도 좋아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품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자네도 그래, 몸이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기침만 좀 할 뿐인걸요.”
“그거 쭉 들이켜게. 그리고 빨리 나아야 하니까, 내 것까지 마시고.”
앞에 놓인 잔을 재희에게 밀어 주며 심 교수가 허허 웃었다.
“자네 갈 때 저쪽에 있는 대추차란 대추차도 다 갖고 가게. 먹고 얼른 나아야지.”
재희는 교수의 너스레에 웃어 버렸다. 다른 교수들과 달리 심 교수에게서는 경직된 권위 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독 학생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재희가 그렇게 느슨히 생각하며 찻잔에 입을 대던 순간이었다.
“자네가 한영 군과 이웃이었지?”
재희는 잠시 한영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김선정 때 겪은 난리 때문일까. 교수의 질문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궁금해서 알아보았지.”
“……제가 어디 사는지 궁금하셨다고요?”
“오해하지 말게. 자네 말고 이 군 쪽이 궁금해져서 말일세. 입학 초에 개인적으로 알아보았다네.”
교수가 학생을 개인적으로 궁금해했다고?
재희는 그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한영을 돌아보았다.
한영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서류에 집중한 얼굴을 보다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심 교수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같은 동네 친구인데도 친하지 않은 데는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때 한영이 무심히 끼어들었다.
“저희 친합니다, 교수님.”
“죽마고우인가?”
“어릴 때부터 한동네 친구이니,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왜 학교에서는 안 붙어 지내나. 친구를 모르는 척하면 쓰나.”
“어울리는 무리가 달라서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한영은 심 교수 앞에서 교묘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친하다 말하면서, 사실은 어울릴 정도로 친하지는 않은 관계라는 것을 은근히 피력하고 있었다.
재희는 서서히 손끝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찻잔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겉모습이 충분히 평온해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심 교수가 그녀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저것은 관찰이다. 간파하려는 눈빛이다.
재희는 일순 숨이 막혀 왔다. 문을 연 순간, 심 교수의 연구실에 앉아 있는 한영을 보고 그랬던 것처럼.
“자네도 그런가?”
“……네?”
“자네도 이 군 생각과 같은지 물었네.”
재희는 애써 태연히 대답했다.
“네, 교수님.”
“그렇다면 자네는 이 친구 어렸을 때를 기억하긴 하겠구먼.”
그때 한영이 다시 고요히 목소리를 냈다.
“교수님, 또 저를 놀리시려는 거라면-.”
“-자네, 내 말상대 해 줄 정도로 한가한가?”
“교수님.”
“우리가 자리를 비켜 줄까? 그거 오늘까지 출판사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한영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겉으로는 예의 발라 보이나, 눈빛이 서늘했다.
재희는 눈치껏 빠지려 했다.
“교수님, 제가 감기 때문에-.”
“-저런, 그러니 내 대추차도 마시라 내주지 않았는가.”
“……저는 오늘 병원을 가야 합니다.”
“그럼, 그럼. 여기서 나가면 꼭 가게나. 흔한 감기가 폐병 가는 법일세.”
재희는 입술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았다. 노교수는 그녀를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심 교수가 갑자기 껄껄 웃기 시작했다.
“역시 소꿉친구라 그런가, 자네들 죽이 잘 맞는군?”
재희는 말없이 노교수의 눈만 바라보았다. 악의는 보이지 않는 눈이었으나, 현명해 보이는 그 눈동자만큼 그녀와 한영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인연이란 쉽게 잘라 내지 못하는 법이지. 가식 없이 가장 순수하게 친구를 대하던 시절이 아닌가. 누군들 그 시절을 안 그리워하겠는가. 어릴 때 인연이란, 그렇다네. 사람으로 하여금 물러지게 하지.”
더 교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재희는 시선을 내렸다. 찻잔의 붉은 물만 시야에 담았다.
“이 친구 어렸을 때는 어땠는가?”
“……그냥. 지금과 같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점잔을 부렸구먼.”
“……예의 발라서 어른들이 좋아하셨어요.”
“친구들과는 사이가 어땠는가?”
“좋았어요.”
“성격이 갑자기 변한 적은 없나?”
“……아니요.”
“이 군 삼촌은? 만나 본 적 있는가?”
삼촌?
“……삼촌, 이요?”
재희가 노교수로부터 고개를 돌려, 한영의 얼굴을 확인하려 할 때였다. 때마침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한영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재희가 그의 얼굴을 확인할 틈이 없었다.
문은 다시 금세 닫혔다.
“뭔가?”
“우편입니다.”
문에서 등을 돌리며 한영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누군가?”
“지금 알려 드리면 곤란하실 겁니다, 교수님.”
“아니, 어째서?”
한영이 편지의 발신인을 무미건조하게 읽었다.
“‘너의 옛 사랑, 김영철’이라 적혀 있습니다만.”
“영철이? 하여간 그 친구 장난도…….”
심 교수가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 영철이란 친구가 실없는 장난을 많이 해. 그래서 내가 이 친구 편지를 보관하지 않는다네. 그냥 버려. 쓸데없는 말만 써 놓거든.”
심 교수가 편지를 읽는 동안, 재희는 앞에 놓인 대추차를 서두르지 않는 척 들이켰다. 차는 알맞게 따뜻한 듯하면서도, 한 번에 목 넘김 해도 충분할 정도의 온도였다.
테이블에 놓일 때부터, 그리 뜨겁지 않았던 것이리라.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한영은 그새 그녀와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아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재희는 마음을 굳히고 차를 쭉 들이켰다.
“……실례합니다, 교수님, 저는 병원 진료 시간 때문에…….”
“내 정신 좀 봐. 어서 가 보게.”
심 교수가 미안하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그러나 재희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기라도 한 걸까? 재희를 따라 일어나던 교수의 발이 텅, 하고 테이블을 헛발질했다. 크게 테이블이 들썩인 것은 찰나였다.
“……!”
막 일어서던 재희가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찻물이 테이블 위로 번져 흥건했다.
“아…….”
당황한 재희가 외마디 탄식을 흘릴 때였다.
슬금슬금 번지던 찻물이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적시고 있는 게 보였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녀는 급히 손을 뻗었다. 누런 물이 들어 가는, 심 교수의 편지를 향해서였다.
거의 그와 동시라고 할 찰나였다. 옆에서 순식간에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아.”
재희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표정한 한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영은 그녀의 손을 편지로부터 천천히 떨어트렸다. 습관적인 미소를 어느새 띠고 있지만, 냉랭히 굳어진 눈동자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재희가 움찔 눈꺼풀을 떨 때였다.
한영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단단히 결박된 재희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던 노교수가 그 순간 어떤 얼굴을 했던가.
한영이 부드럽게 테이블에서 밀어내는 동안, 재희는 멀거니 심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심 교수는 왜였을까, 순식간에 수십 년의 세월을 겪은 것처럼 노쇠해 보였다. 지쳐 보였다.
그리고- 한영이는-.
재희는 한영의 얼굴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언젠가 보았던 화려한 미소였다.
감정을 자제하고 억제하느라, 유달리 깊어지는 미소.
* * *
재희는 가만히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한영에게 잡혔던 손목은 새하얗게 질려 가늘게 뻗어 있었다. 그녀가 봐도 금방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한영은 한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런 힘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여유 없는 손길은.
심 교수는 일부러 찻잔을 엎질렀다. 찻물이 번지는 동안에도 잠자코 주시하던 심 교수의 눈빛을 기억해 냈다. 그 시선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던가? 아니다. 심 교수는 분명, 한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심 교수는 한영을 떠보고 있었던 것이다.
찻잔을 엎지르고, 찻물이 편지에 젖어 들어가는 순간, 이한영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나-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
“그동안 너무 쉬어서 걱정이야.”
“어머, 저는 좋았는데요. 애들하고 모처럼 지낸 게 얼마 만이에요?”
마 사장과 김 여사가 식탁에 앉아 말했다. 내일이면 부모님은 가게로 돌아간다. 예정보다 애를 먹이던 수도 공사가 오늘에서야 마무리되었다. 그들은 마치 아이를 방임하는 부모가 된 것처럼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재희의 부모님을 달래는 것은 한영의 몫이었다.
“용돈 안 주셔도 돼요.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어머니.”
“장학금 때문에? 그건 아껴 둬. 재희하고 같이 식사하면서 식비도 들고 쓸 데 많을 텐데…….”
“제가 식비 쓸 틈이 없어요. 재희가 매번 먼저 장을 봐 와서요.”
사근사근하면서도 신뢰감 어린 한영의 음성을 들으며, 재희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았다. 머릿속에 계속해서 심 교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편지를 적시던 붉은 찻물이 잔상처럼 시야에 남았다.
재희는 그녀가 쥐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난로의 불빛이 투명한 컵 위로 산란하고 있었다. 속이 비치는 유리컵은 표면이 깨끗했다. 재희가 집어 생긴, 거의 보이지 않는 손자국을 제외한다면.
희미하게 찍힌 지문은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재희는 소용돌이의 중심을 보며 무심결에 속으로 되뇌었다.
지문.
내가 남긴 흔적.
내가 이 컵을 보고 만졌음을 알리는- 흔적.
재희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컵에서 벗어났다. 부모님과 한영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서서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그녀는 이제 컵을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보고 있었다. 심 교수의 편지를 잡기 위해 뻗었던 손이자, 한영이 덥석 붙잡았던 손목. 그 손목으로부터 올라간 시선이 조금씩, 손가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그 안에도, 소용돌이치고 있는 지문을.
“……아.”
일순 손에서 힘이 빠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깜짝 놀라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재희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 바닥으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당황해 허리를 숙였다. 그대로 파편을 집으려는 손을, 누군가가 덥석 붙잡았다.
재희는 말없이 그 손을 보았다.
“위험해. 내가 할게.”
언제나처럼 차분한 목소리였는데도, 왜였을까. 그 음성은 유독 그 순간, 송곳처럼 재희의 귀를 찔렀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영을 보았다. 그는 발밑을 주시하느라 그 시선을 못 느낀 듯했다. 한영은 그녀의 무릎을 잡아 올렸다. 담담한 태도와 달리 내심 놀란 듯했다. 부모님의 시선도 거리끼지 않고 그녀의 발을 만지고 살폈으니까.
“……다쳤네.”
한영이 중얼거리자, 김 여사가 바빠졌다. 구급함을 찾으러 가는 김 여사 뒤로 마 사장도 쓰레받기를 찾으러 가고 있었다.
모두가 부산한 공간에서, 오로지 재희만이 침전하고 있었다.
한영아.
그녀의 발을 살피는 한영을 내려다보며, 재희는 속으로 물었다.
그 편지, 지금 어디에 있어?
“얘는……. 가만있다 사람 다 놀래키더니, 갑자기 웬 편지?”
구급함을 가져오던 어머니의 그 음성으로, 재희는 자신이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낭패감을 느끼진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
한영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러게. 재희야, 무슨 편지를 말하는 거야?”
그녀가 본 그 어떤 미소보다도, 화려하게.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치울 때까지.”
마 사장이 가져온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받으며 한영은 예의 그 미소를 다시 한번 지어 보였다. 심 교수의 연구실에서 한 번 보았고, 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재희가 한영의 정액을 핥아 먹을 때 보였던, 바로 그 미소. 화려하고 또 화사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고를 앗아 가 버리는 그런 미소. 그리고-.
이한영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 방패처럼 두르는 미소.
“어쩌면 좋아, 피가 너무……. 재희야 안 아파?”
“병원 가야겠어? 차 시동 걸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저씨. 어머니도 진정하세요.”
마재희는 이한영을 아주 오랫동안 봐 왔다. 그에게서 매번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가장 이한영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희는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한영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다.
자신의 양심조차 속일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