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재석 선배 자퇴했대.”
강의실에 앉아 수업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재희의 앞자리에 앉은 선배와 동기들이 속닥거렸다.
“이재석 선배요?”
“어.”
“왜요?”
“소문 때문이겠지.”
“그래요…….”
옆자리에서 은근슬쩍 엿듣고 있던 경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삼 학년인데, 조금 더 참거나 휴학을 하시지…….”
“그러게. 선배 부모님이 어떻게 그걸 봐줬는지……. 우리 부모님이라면 한바탕 집안 뒤집어졌을 거야.”
“우리 집도.”
스치듯 닿은 화제는 그렇게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불쑥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도망간 거야. 끝까지 비겁하게.”
모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호명이 처음으로 재석을 둘러싼 논란에 말을 더한 것이었다. 섣불리 무어라 말을 꺼내기 곤란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안 나오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호명 선배. 재석 선배가 그랬다고 확실한 것도 아니고…….”
“이재석이 아니었으면, 하고 가장 바라는 사람이 나야. 걔하고, 대환이하고 일 학년부터 붙어 다녔어. 형사들한테 야밤에 끌려갔을 때도 벽 하나씩 사이에 두고 같이 두들겨 맞은 사이란 말이야.”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명을 바라보았다. 호명의 얼굴은 백짓장 같았다. 언제나 흔들림 없던 선배가 보이는 고통 어린 모습에, 재희는 마음이 아파 왔다.
호명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알아. 그때하고 다르게, 그 새끼 지금 켕기는 거 있어. 난 알아. 알 수밖에 없다고.”
“선배…….”
“애초에 나와 이재석밖에 없었어. 대환이가 믿고 거처를 알려 줄 사람은.”
“…….”
“내가 아니니 이재석이야. 확실해.”
재희는 알싸함이 번지는 가슴을 느꼈다. 그녀는 그동안 양호명이 과민 반응하는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양호명의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의가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조용히 반문했다.
“너희 셋이 얼마나 친했는지 여기 모르는 사람 있어? 자의가 아니었을 수 있어. 형사들이 가둬 두고 고문하면 뭔들 대답 못 해. 없는 답도 대답해야 할 판인데. 그 경우라면 이재석은 프락치가 아니야. 또 다른 피해자야.”
“그랬다면 최소한 우리에게 진실을 밝혔어야지.”
양호명은 싸늘히 말을 잘랐다.
“걔가 지금 누구를 위해 침묵하고 있을까?”
“…….”
“강대환을 위해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양호명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너희들도 겉가죽 너무 믿지 마. 사람 과신하지도 말고.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본모습이 나오는 법이니까.”
그 말 앞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재희는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 문 앞에 선 인영이 보였다. 한영이었다. 한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호명을 보고 있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다시 아파 왔다.
그러나 한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얼굴로, 그리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습관적인 미소를 걸친 채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들고 온 종이를 나눠 주었다. 심 교수님 심부름이었을까. 이번 수업에 볼 유인물이었다.
* * *
성관계라는 것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해체하고 재정립하게 만드는 행위. 그렇게 재희의 눈에 재정립된 이한영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런 점이 이한영이란 인물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지점일지 모른다.
부드럽고 온화하며 자상하지만, 허점은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치밀한 사람. 평화롭게 주위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이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면 금세 반응하고 시선을 주는 예민한 남자. 그러고는 언제 시선에 반응했냐는 듯, 자연스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의뭉한 남자.
설사 전날 밤 뜨겁게 살을 섞었던 여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해도, 그렇게 무심히 시선을 돌리는 이중적인 남자였다. 냉혹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가 그의 팔을 만지게 내버려 두고 또 웃는 모습을 보여 주는 지독한 남자.
재희가 학교에서 멀찍이 거리를 두고 다시 지켜본 이한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생각을 해 봐도, 재희는 대학교란 공간이 좋아지지 않았다. 부적응이라는 구차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이한영 탓이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서로의 옷을 벗기고, 피부를 맞대고, 가장 내밀한 욕구를 지켜보는 사이가 되고서도,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이한영의 의도는 분명했다.
마재희와 이한영의 관계는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물론 재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한영이 예전처럼 학교에서 그녀를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다 해도 놀라지 않았지만, 상처는 다른 이야기였다.
예전에는 비교적 인내하고 넘길 수 있었던 순간들이, 이제는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 팠다.
다른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채 미소 짓고 있는 한영을 보는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한영아, 요즘 심 교수님 연구실에는 왜 계속 있어?”
재희는 너무 노골적으로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한영의 무리와 재희가 앉은 창가는 충분히 가까웠다. 뒤이은 한영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교수님이 이번에 책 내는 게 있는데, 그것 좀 도와드리느라.”
잠잠한 한영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재희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자괴감을 재희는 잊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쑥 잠재워 놨던 의문이 솟구치듯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왜 한영이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지?
한영이는 도대체 뭘 의식해서, 이렇게까지 학교와 집의 생활이 다른 걸까?
진정으로,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아무리 한영의 여자 문제가 복잡하다 하지만, 너무 유난했다. 재희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유난해. 이건 뭔가- 이상할 정도로 유난해.
왜 나는 여태 이걸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지?
그러나 재희는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다. 이것은 정당한 의문이 아니다. 이건 그냥- 질투다. 질투가 이상한 방향으로 튄 거다.
새삼스레 한영의 이중성에 의문을 느낀 것은 전부 욕심 때문이었다. 한영과의 관계가 달달할수록, 감히 달콤함을 바라는 위장이 늘어난 것이다. 게걸스럽게 소화만 해 대며 더한 것을 바라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이한영에게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그녀를 마음에 두고도 다른 이유 때문에 모르는 척을 하는 거라고, 그의 이중성을 새롭게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심 교수님 은근히 사람 귀찮게 잘 하시지 않아?”
재희의 귓가로 한영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잡혔다.
“글쎄. 그래도 나는 만족해. 교수님하고 친해지고 싶었거든.”
“왜?”
“대단한 분이니까. 존경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학점 잘 받고 싶어서는 아니고?”
농담 삼아 던진 동기의 말에, 다른 이가 웃으며 끼어든다.
“한영이 저번 학기에 심 교수님한테서 유일하게 에이 받았잖아.”
한영이 겸손히 말했다.
“요행이었어. 다음 학기도 그러리란 법은 없고.”
“대학원 생각하지는 않아?”
“어…… 그럼 심 교수님은 아닌데. 우리 대학원 갈 때면 그분도 퇴직하고 난 후일 텐데.”
“한영이가 전에 말했었잖아. 조기 졸업하고 싶다고.”
“맞다, 그랬지?”
“그래도 심 교수님 정계로 가실 거란 소문 있던데.”
그때 한영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설마. 심 교수님은 백로야.”
웃음기 어린 음성이 덧붙였다. 까마귀 노는 곳에 안 가는, 이라고.
재희는 그 순간 멈칫해 한영을 바라보았다.
한영을 둘러싼 모두가 활기차게 웃으며 농담 섞인 흉을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백로면 뭐 해, 그 속이 시커메서. 과제는 또 왜 그렇게 많이 내? 시국 선언 하면 다야? 유명하면 다야?
그 말들에는 분명 애정이 섞여 있었다. 심인철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달리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재야 시민운동 단체와 긴밀히 인연을 맺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진정한 교육자로서, 지성인으로서 공공연히 양심적인 발언을 하는 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시대였다. 그런 점이 학생들로 하여금 심 교수를 존경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한영은 달랐다.
재희는 한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느꼈다.
이한영은 심 교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단순한 불호를 떠났다. 그것은 혐(嫌)이었다.
그렇지만 왜-?
“한영아.”
“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하던 중이어서였을까. 반문하는 한영은 무심했다. 평소라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겠거니, 하며 받아들였을 무덤덤한 어조. 그것에 새삼 가슴이 찔려 오는 것은 왜일까. 재희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그녀가 그렇게나 원하던 나날이었고, 한영과의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어제오늘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 낮에 느꼈던 질투심과도 연관이 있을까.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생각해 보면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다. 한영이답지 않다는 생각이 있기는 했지만, 심 교수가 교수의 특권으로 얼마나 한영을 부려 먹었던가. 한영과 심 교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걱정을 하면서도, 재희는 얌전히 둘러댔다.
“……중간고사 어떻게 할지 물어보고 싶어서.”
“아, 시험.”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한영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법대가 중간고사 단체 거부한다지.”
“응. 인문대도 곧 성명 발표할 거래.”
한영은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했다. 학생들이 시험을 단체로 거부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강대환의 죽음 때문이었다.
재희는 바로 옆에 서 있는 한영을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험 볼 거야?”
“글쎄. 생각 중이야.”
한영은 무심히 웃으며 세제 묻은 손을 움직였다.
“장학금 때문에 시험을 보기는 해야 돼. 그런데 또 단체 행동에서 벗어나면 튀니까. 자연스럽게 시험 볼 방법을 찾아야겠지.”
재희는 말없이 수긍했다. 한영은 할머니께 물려받은 재산 덕에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장학금을 무시하며 낭비해도 되는 재력가는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깨끗이 닦고 있는 한영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 양호명이 이재석의 이야기를 할 때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한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던 그 얼굴. 그 얼굴을 보고 저렸던 가슴이, 다시금 아파 왔다.
재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뭐가?”
“강대환 선배.”
“…….”
“사실 대환 선배하고 친했잖아.”
“…….”
“장학금 때문에 시험 어쩔 수 없이 봐야 할 테니까……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서.”
한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주 의외의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누가 그런 말을 해?”
“응?”
“내가 대환 선배하고 친하다고, 누가 그래?”
“아…… 내가 봤어.”
“…….”
“너랑 대환 선배가 가끔씩 눈인사하는 거.”
한영과 강대환은 분명 드러내 놓고 어울리고 다니는 사이는 아니었다. 같이 있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재희는 이한영의 시선, 눈짓, 행동에 다른 사람보다 유독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 학기 중반이 지날 무렵 눈치챌 수 있었다. 강대환이 가끔씩, 지나가는 길에 한영과 눈을 마주치고는 장난스레 씩 웃곤 한다는 것을.
“사실은 많이 친했지?”
“…….”
“대환 선배가 총학생회라서 행동반경이 달랐지만, 사이좋았잖아.”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어도 마재희는 속일 수 없단 생각을 했던 걸까. 한영은 희미하게 쓴웃음을 흘렸다.
“……글쎄. 친하지 않았어. 오히려 좋지 않은 편이었지.”
“……그랬어? 왜?”
“내게는 성가신 선배였거든. 귀찮았어.”
한영은 그냥 가볍게 하는 소리라는 것처럼 무심히 웃었지만, 재희는 어쩐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강대환의 변호를 했다.
“선배가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해. 그런데 나쁜 의미는 없었을 거야.”
“그래?”
“응. 정말 싫어했다면 말도 걸지 않았을 거야. 그런 데선 영재랑 약간 비슷한 성격이라서…….”
재희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 입술을 다물었다.
“……그냥. 솔직하지는 않은데, 좋은 사람이었어.”
한영을 달래려다, 제가 뱉은 말에 속이 찔린 격이었다.
죽고 없는 이를 애써 묻고 살았다. 다른 학생들이 강대환에 대한 사건으로 분노하고 책임을 물을 때도, 그녀는 침묵했다. 잊으려 노력했다. 그것이 이기적이란 자각은 있었다. 죄책감에 안절부절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나 쉽게 잊어버렸다.
그녀에게는, 모든 이유와 변명이 되는 존재가 곁에 있었으니까.
“재희야.”
감정이 짓눌려 무거워진 눈꺼풀을, 재희는 힘겹게 들어 올렸다. 모든 이유와 변명이 되는 존재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너무나 쉽게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는 눈이었다.
한영은 그렇게 고요한 눈으로,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괜찮아.”
가만히 그를 보다, 재희도 그 말을 따라 했다.
“……응.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다. 재희는 속으로 되뇌며 손을 뻗었다. 속의 아픔을 밖으로 전혀 드러내 놓지 않는 그녀의 소꿉친구를 향해.
한영은 위로하듯 그의 팔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재희의 손을 보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한 발자국 그녀에게 붙어 섰다. 재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투 붙는 한영의 몸이 그새 뜨거웠다. 엉덩이에 닿는 딱딱한 것에 재희는 볼을 붉혔다.
머리를 묶어 올려 드러난 뒷덜미에 한영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재희는 간지럼에 몸을 떨었다.
“여기가 민감하더라, 너.”
한영이 놀리듯 중얼거렸다.
“……거기 원래 간지럼 잘 타…….”
“간지럼 타는 게 아니라 성감대인 거야.”
“……아니야.”
“그래?”
한영이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제안했다.
“한번 확인해 볼래? 성감대인지 아닌지?”
“으응……?”
한영은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성감대라고 표현했던 뒷덜미만 물고 핥고 빨았다. 단순히 그뿐이었는데도 얼마 가지 않아 다리 사이가 젖었다. 한영이 손가락을 다리 아래로 밀어 넣었을 때 그것을 깨달은 재희는 부끄러움에 온몸을 붉혔다. 한영이 옳았다.
그날도 한영은 삽입하지 않았다.
한영이 어떻게든 삽입을 피한다는 것이 알게 모르게 두려움에 빠트렸지만, 재희는 그가 멋대로 세운 룰에 말없이 적응해 주었다. 거스르지 않고, 반항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이한영을 정염 속에 빠트려 이성을 흐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관계가 더 길어지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한영아.”
“왜?”
재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망설임은 짧았다. 학교에서 보았던 여자 동기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한영을 둘러싼 채, 호감 섞인 눈빛을 보내고 있던 동기들을.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끄러움을 참고 천천히 한영의 어깨를 밀었다.
한영은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 주었다. 침대 앞에 서 있던 그를 그렇게 눕히고, 재희가 그의 몸 위로 타고 오르는 동안에도 지켜봐 주기만 했다.
한영이 느긋하게 시선을 재희의 눈동자에 두며 물었다.
“뭘 하려고?”
그 얼굴에 서린 포식자의 만족감과 달리, 한영은 아직 사정을 하지 않았다. 느른한 듯 풀린 얼굴과 다르게, 재희의 허벅지를 만지는 손길은 농익었다.
재희는 다리를 벌려 한영의 배에 손을 올린 채 자세를 잡았다. 재희의 나체에 닿는 시선의 열기가 뜨거웠다.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는 한영의 시선 앞에서 재희는 허리를 내렸다. 젖은 음부에 단단한 기둥이 닿았다.
그 순간 재희는 자신이 짚고 있는 한영의 배가 움찔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한영의 성기가 터질 것처럼 단단해지는 것도.
며칠간 숱하게 많이 겪은 반응이었는데도 부끄럽다. 재희는 붉어진 눈매를 내리뜨며 중얼거렸다.
“……나도 너 도와줄래.”
한영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대로 마찰하면 되는 건가 열심히 살피던 재희의 턱을 한영이 부드럽게 잡았다. 고개가 들어 올려진 재희는 묻는 시선으로 한영을 보았다.
한영이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재희야.”
유독 화려한 눈웃음에, 재희가 홀린 듯 대답했다. 응?
한영이 다시 한번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게 도와주는 거라고?”
“으응…….”
“그렇구나.”
한영의 엄지손가락이 재희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재희는 거부감 없이 한영의 손가락을 입에 물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묻는 시선으로 한영을 보았다. 칭찬하듯 한영이 지그시 웃었다.
혀를 슬쩍 문지르고 떠난 엄지를 대신해 검지를 재희의 입에 밀어 넣으며, 한영이 중얼거렸다.
“……그래, 참아 볼 테니까. 계속 도와줘 봐.”
응, 하고 입안에 문 손가락을 우물거리며 대답했지만- 재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 참지 않게 도와주려는 건데 왜 참는다고 하는 걸까?
그러나 그 의문을 내놓기 전에 한영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아찔히 웃어 보이며.
“재희야.”
“……응.”
재희는 홀린 듯이 한영의 깊은 눈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절로 움직였다.
아랫배에 달라붙을 정도로 한영의 중심은 빳빳하게 서 있었고, 재희는 그 기둥 위로 젖은 부위를 마찰시켰다. 한영이 가끔 그런 식으로 사정을 하곤 했다. 재희는 그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허리를 흔들었다.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에 양물과 음부가 비벼지는 데 약간의 쓰림밖에 없었다. 다만 아직 가시지 않은 절정의 저릿함이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때때로 움찔거리며 볼을 붉혔다.
그럴 때마다 한영은 재희의 입에 물린 손가락으로 혀를 느긋이 문질러 주었다. 재희는 그 손을 빨았다. 그러면 한영이 기뻐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투르던 움직임에 서서히 속도가 붙고, 재희의 피부가 열기로 촉촉이 젖어 갔다. 재희의 혀를 만져 주던 한영의 손이 빠져나가 천천히 턱을 쓸고 내려갔다. 이윽고 다다른 가슴을 감싼다. 손이 중앙에 있는 유실을 건드렸을 때 재희는 뜨거운 숨을 흘리며 눈을 내리떴다. 서서히 고양되는 감각이 반가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감각이 괴로웠다. 허전함을 어쩌지 못하고 재희가 저도 모르게 조르는 눈으로 한영을 내려다볼 때였다.
한영이 다 안다는 듯 재희의 골반을 잡았다. 그러고는 허리의 방향을 조금 비틀어, 느릿하게 흔들었다.
“아…….”
얕은 마찰만 반복하던 움직임이 그렇게 길고 깊게 문질러진 순간, 재희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재희는 한영의 성기 끝이 스친 부위가 정확히 어딘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툰 재희와 달리 한영은 어딜 마찰해야 더 기분이 좋은지 아는 것처럼 능란하게 허리를 흔들었고, 재희는 등줄기를 바짝 세웠다 굽혔다 하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한영의 배에 올린 재희의 손이 움찔움찔 곱아들었다.
“네가 좋아하는 곳은 여기야, 재희야.”
“으응…… 여기?”
“아니. 조금 더 옆에. 여기.”
재희가 헐떡이며 목을 꺾었다.
한영이 낮게 웃으며 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여기는 조금 더 안쪽으로.”
“……응.”
“그래, 그렇게.”
“아…….”
참지 못하고 허리를 뒤로 휘자, 한영이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워하는 웃음소리에 섞인 농염을, 재희는 모르지 않았다.
한영이 솟는 피를 진정시키려는 듯 자신의 뒷덜미를 문지르며 나른히 웃었다. 그것이 인내심을 다잡는 몸짓이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다. 재희는 조바심이 났다. 너도 원하면서. 그냥 들어와도 괜찮아. 그렇게까지 배려해 줄 필요 없어. 재희는 벼르고 벼르던 그 말을 그 순간 다시 하려 했다.
그러나 언제나 한영이 그녀가 할 말을 훤히 꿰뚫어 봐 문제였다.
“아……!”
한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바람처럼 빠른 동작으로 자세를 역전시킨 한영은 달려갈 준비를 마친 경주마였다. 재희의 다리 사이로 탄력적인 몸이 자세를 잡는다.
침대 위로 누운 재희는 식지 않은 열기에 끙끙거리며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늘 한영만 태연한 것 같아 억울했다. 절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뭘 그렇게 재고 따져야 하는지, 성행위에 무지한 재희는 알 수 없었다.
“……원망하는 눈이네.”
한영은 재희의 가슴에 입을 맞추고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재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영이 웃으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힘드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젖은 소리가 점차 격렬해졌다. 재희는 한영이 강한 몸짓으로 누르며 몸을 흔들어도, 최후의 선은 어떻게든 지키려 노력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영은 콘돔이 없어서 더 잘 참을 수 있는 거라 말했지만, 그런다고 충동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흔들리던 성기가 때때로 목적한 길을 벗어나 입구를 꾹 누르는 경우가 생겼다. 그때마다 한영의 절제력이 시험받는 것이 재희의 눈에도 보였다.
“아……!”
재희는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신음했다. 성기가 다시 음순 사이를 찌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짓눌리는 감각에 재희는 붉게 달아오른 눈을 들었다. 움직임을 멈춘 한영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들어가고 싶은 충동과, 들어가지 말아야 할 당위성 사이에서 싸우는 한영의 찌푸려진 눈도 보였다.
“한영아…….”
재희는 아무래도 좋았다. 한영이 지금 당장 그녀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도, 그녀는 오히려 반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한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재촉하듯 입을 맞췄지만, 한영은 완고했다. 깊어지려는 삽입을, 재희의 골반을 내리누르며 허리를 뒤로 빼는 것으로 막았다. 그러면 재희는 얕게나마 치고 왔다 빠져나가는 감각에 숨을 헐떡이며 칭얼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 돼, 재희야.”
안 돼.
숨을 흐트러뜨리면서도 그렇게 속삭이는 한영에, 재희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애가 탔다.
거친 움직임에 한영의 성기가 다시 재희의 입구를 때렸을 때, 재희는 자신의 몸이 환희하며 한영의 것을 삼키려는 것을 느꼈다. 발씬거리며 성기의 끝머리를 조이는 감촉에 재희의 허리를 쥔 한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희는 그 힘마저 그저 반가웠다. 한영의 중심이 얼마나 큰지 이미 보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아프리란 것도 예감했지만, 그래도 마재희는 그 고통마저 원했다.
그러나 한영은 끝까지 절제했고, 재희의 인내심은 한영보다 짧았다.
두 번째의 절정이 재희의 몸을 휩쓴 후 얼마 가지 않아 한영이 붙어 있던 하반신을 떨어트렸다. 재희는 색색거리는 숨을 고르며 한영의 손이 빠르게 왕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한영은 보란 듯이 재희의 몸에 백탁액을 뿜어냈다.
“아…….”
재희는 그 순간을 빠짐없이 기억에 담았다. 한영의 아름다운 몸이 바짝 긴장하는 순간, 상냥히 웃을 줄만 알았던 한영이 육욕을 사납게 드러내며 절정에 이르는 얼굴을.
씨물이 한 차례, 두 차례 재희의 몸을 뜨겁게 때릴 때마다 야릇이 얼굴을 찌푸린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날 것 그대로의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래서 재희는 붉게 달아오른 눈꺼풀을 조용히 내리뜨며, 숱하게 배우고도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이었다.
이한영은 사실, 엄청 야한 사람이라고.
“……재희야.”
분출한 정액을 재희의 배에 문지르며, 한영이 슬며시 웃었다.
재희는 탈력감에 꼼짝하고 싶지 않아 눈만 깜빡이며 한영을 보았다. 한영이 재희의 배를 보던 시선을 느릿하게 들어 올린다.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응.”
시선을 맞추며 미소 짓는 얼굴이 평소와 같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야하게 느껴져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고맙다고 말하는 한영의 성기는 여전히 빳빳했다.
* * *
최근 들어 한영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마재희를 어린 오빠처럼 돌봐 준 한영이 가질 법한 취미라고 해야 할까.
재희는 온몸을 붉힌 채 가만히 욕조의 턱에 앉았다. 한영은 즐거워하는 얼굴로 타월에 비누 거품을 내고 있었다. 그녀를 씻겨 주려는 거다. 그나 그녀나 벌거벗은 채였다. 순종적인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재희는 생각해 보았다. 언제쯤이면 자신이 이런 순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언제쯤이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계속 익숙해지지 않으면 어쩌지.
재희는 문득 불안해졌다. 한영은 그녀가 몸을 붉힐 때마다 즐거워했지만, 언제고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시험 거부하는 데 동참하겠구나.”
한영이 그녀의 가슴 위에 타월을 문지르다 말고 문득 중얼거렸다. 온화한 미소를 걸쳤지만, 한편으로는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재희는 그를 보고 문득 의문을 품었다. 한영이는 이번에도- 나를 단체 행동에서 떨어트리려 할까?
“……나 시험 거부해도 돼?”
그 질문이 예상 밖이었나. 한영이 재희를 보았다.
“네가 거부하고 싶다면 거부해야지.”
“……정말?”
“정말.”
한영이 잔잔히 웃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재희는 안심했다.
“……난 네가 학생 운동 같은 거 싫어하는 줄 알았어.”
한영이 재희의 가슴을 문지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유두를 간지럽히는 손길의 의도가 명백해,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싫어한단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왜 그런 오해를 했어?”
“그냥…… 생각해 보니까 한영이 네가 한 번도 데모에 호의적인 소리를 한 적이 없어서…….”
“호의적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판하는 말도 안 했지.”
“저번에 시위 못 가게 한 것도 있고…….”
“그건 네가 위험하니까.”
“거기다 심 교수님을 많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잠깐 생각했었어.”
한영이 잠시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내가 심 교수님 싫어하는 것 같아?”
“응.”
한영은 말없이 상냥히 웃었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보며 확신했다.
정말 많이, 싫어하는 거구나.
“……왜 그렇게 교수님 싫어해?”
한영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글쎄. 새하얀 능구렁이라서 싫어하는 거려나.”
“능구렁이?”
“교수님이 내주는 과제만 봐도 싫어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재희는 걱정스레 그를 보았다. 교수님이 많이 괴롭히는 거구나.
“재희야, 심각해지지 마.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야.”
“……응. 알아.”
“심 교수님과 상담한 적 없지?”
“응.”
“잘됐네. 앞으로도 그렇게 거리 두고 지내.”
한영이 낮게 웃으며 농담했다.
“심 교수님과 엮이면 두고두고 피곤해져. 지금 내가 그러거든.”
재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용히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심 교수님이 얼마나 한영이를 괴롭혔으면, 저 착한 한영이 입에서 저런 말까지 나올까.
한영은 재희 앞에서 더 심 교수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재희는 그런 한영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한영에게 휩쓸려 어영부영 침대에 눕게 되었고, 결국 궁금한 것은 운조차 떼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어스름한 잠기운 속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감상은 방만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곤란한 일은 아닐 거야. 그랬다면 한영이가 심 교수님 옆에 계속 있겠어?
한영의 침대에 자는 것이 익숙해졌는데도, 왜였을까. 가끔씩 재희는 선잠을 자다 깰 때가 있었다. 마치 좋지 않은 꿈에 시달린 사람처럼. 원래 한번 잠들면 도중에 잘 깨지 않는 재희로서는 이상한 일이었다. 한영의 침대라 설레서 그런 것일까. 그런 생각을 가끔 할 정도였다.
그날도 그랬다. 재희는 한영과 함께 잠이 들었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깼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에 온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재에서 또 공부하는 걸까?
재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한영은 늘 그랬다. 시간을 너무나 아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사람처럼, 새벽에도 종종 침대를 비웠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
재희는 가만히 서재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정적만 깃든 공간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간 거지? 담배를 피우러 간 걸까?
재희는 기다렸다. 한영이 금방 돌아오리라 믿고. 그러나 한영은 그녀가 한 시간을 기다리다 못해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 * *
그 시각에 한영이는 어디를 갔던 걸까?
“누구야?”
“심 교수님 딸.”
“어떻게 알아?”
“저거 교수님이 들고 다니시던 보온병이잖아. 들었어. 교수님 막내딸이 우리 학교에서 박사 과정 밟는다고.”
옆에 있던 경신이 다른 동기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재희는 교재만 내려다보았다. 책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등교한 이래 계속 같은 질문만 머릿속에서 반복하고 있었다.
한영이는 대체, 그 밤중에 어딜 갔던 것일까?
피곤에 못 이겨 잠들었다 퍼뜩 깼을 때도 한영은 없었다. 동이 트고 있을 무렵이었다. 다행히 그새 들어오기는 했었는지 창문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갔다. 심 교수님 연구 때문에 먼저 나갈게. 그렇게 메모에 적힌 배려가 불충분하다 느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재희야, 넌 어떻게 생각해?”
느닷없이 들려온 경신의 질문에, 재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응?”
“저 둘 사이.”
재희는 느지막하게 시선을 돌렸다.
강의실 문 앞에서 두 남녀가 보였다. 한영이 가장 먼저 그녀의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그를 마주 보고 선 채 대화하는 여자가 있었다. 들고 있던 보온병을 여자가 한영에게 건넸다. 둘은 웃고 있었다.
“뭐랄까, 있잖아. 그런데 너무 친해 보이지 않니?”
뒤에 앉은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경신에게 물었다.
“심 교수님이 한영이 대하는 것도 그렇고…… 둘이 뭔가 있는 거 아니야?”
“그러게? 한영이가 요즘 고백 다 거절하는 걸 보면-.”
“-김선정, 고년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거래잖아.”
“아니야. 저 둘 사이에 뭔가 있어서 고백 거절하는 거라니까? 한영이가 좀…… 여자 문제로 시끄럽긴 했잖아. 그래서 남들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몰래 사귀는 거야.”
“소설 쓰니?”
재희의 고개가 점차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실 한영이 때때로 밤에 집을 나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담배 피우러 나가는 것이라 납득하고 넘겼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담배를 피우러 간다기에는- 너무 오래, 한영은 자리를 비웠으니까.
“내 감이 맞다니까? 둘이 밖에서 몰래 만나고 있는 거야.”
“심 교수님이 그걸 잘도 두고 보시겠다.”
“왜 못 봐? 교수님이 한영이 아끼잖아?”
“그건 그래. 교수님이 모르실 수도 있고.”
맞장구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듣기 괴로워졌다. 재희는 동기들이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고 있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그랬다면 한영이가 내게 말해 줬을 거야. 이제까지는 사귀는 여자가 있으면 전부 다 말해 줬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재희는 멈칫 굳어 버렸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는 이한영이 마재희의 마음을 알기 전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마재희가 이한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거라면?
만약, 한영이가- 나를 배려해서, 좋아하는 사람을 몰래 만나고 있는 거라면? 나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 거라면.
“…….”
무표정한 얼굴로 활자를 내려다보며 재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 한영이는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인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 나와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내 말이 맞다니까. 두고 봐라? 얼마 안 가서 한영이랑 저 언니 사귄다는 말 나올 거니까.”
“에이, 설마.”
재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만약 동기들이 말하는 저 의심이 사실이라면, 그때도 우리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란 약속에 묶여 있어야 하는 걸까?
* * *
“인혜야.”
“응?”
“있잖아, 내 친구 얘긴데.”
“응.”
그때 까르르 웃으며 인혜의 막냇동생이 달려와 재희에게 안겼다. 열 살인데도 애교를 부리는 것이 대여섯 살 때와 변한 게 없다. 재희는 엉겨드는 인혜의 쌍둥이 동생들을 향해 웃었다.
“요놈들! 재희 언니 괴롭히지 마! 어서 자야 내일 학교 가지?”
“나한텐 누난데.”
열세 살인 다섯째 동생이 볼멘소리로 끼어들었지만, 인혜는 저녁상을 치우느라 바빴다. 재희는 엉망이 된 인혜의 집을 보다 가만히 입술을 다물었다. 갑자기 자신의 고민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재희는 말없이 거실에 있던 빨래를 개켰다.
인혜가 눈썹 끝을 늘어트리며 말렸다.
“미안, 재희야. 그거 그냥 내버려 둬.”
“괜찮아.”
재희는 묵묵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 도와주는 것으로 인혜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인혜의 부모님은 오늘 부부 동반 모임이 있다고 나갔다 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이상 집안일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은 인혜밖에 없었다.
밤이 되어서야 여유가 났다. 잠든 동생들을 확인하고 온 인혜가 마루에 앉으며 물었다.
“이한영은 오늘 어디 갔어?”
“……응.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재희는 가라앉으려는 표정을 억지로 다잡았다. 한영은 요즘 계속 바빴다.
“흐음, 그래?”
인혜는 냉장고에서 가지고 온 주스 캔을 건넸다. 재희는 그것을 얌전히 받았다.
“아까 하려던 말은 뭐야? 네 친구 얘기.”
“……아.”
오늘 하루 내내 집안일로 시달렸을 인혜다. 지금 이 시간만이라도 쉬게 도와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재희를 알았는지, 인혜가 살살 대화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그것에 더 버티지 못했다.
“있잖아.”
“응.”
“친구가 계약 연애를 하는데…….”
“……어머.”
인혜가 쓱 입술을 가렸지만, 재희는 이미 보았다. 인혜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왜 웃어?”
“두근두근하잖아. 계약이라니. 어른의 관계네?”
“……인혜야, 이거 내 얘기 아니야.”
“에이, 그럼 재미없지.”
인혜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치웠다. 그러고는 심드렁하게 주스에 입을 가까이 하며 물었다.
“그래서? 더 말해 봐.”
“……그런데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는 것 같대.”
“흐음.”
“그래서 친구가 고민이 많은가 봐.”
“그게 왜 고민이야?”
“……응?”
“그 친구는 남자 마음 빼앗아서 잘 사귈 생각은 없대? 계약 같은 아슬아슬한 관계 말고, 진짜 연애 말이야.”
다른 여자에게 향한 마음을, 빼앗아 오라고?
재희는 조금도 생각지 못한 말에 눈꺼풀을 깜빡였다.
“……그건 결국 그 남자 마음을 무시하는 거잖아.”
“자고 일어나도 변하는 게 마음이야.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어.”
“그렇지만…….”
재희는 말을 사렸다. 이한영과 마재희는 이미 약속했다.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은 계속해서 소꿉친구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겨도.
재희는 자신이 잘못 조언을 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약 연애라는 단어로 뭉뚱그렸으니 인혜는 정확한 상황을 모른다. 그러니 한영의 마음을 빼앗아 오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친구는 그냥…….”
이미 뱉은 말은 수습을 해야 했기에, 재희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남자가 행복했으면 한대. 그게 가장 중요하대.”
“…….”
“계약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은데도 못 만나는 거라면…… 슬프잖아.”
“자신의 감정부터 먼저 정리해야지. 상대방 걱정이 먼저가 아니라.”
인혜가 갑자기 힘차게 주스를 들이켰다. 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그녀는 꺾었던 목을 바로 했다. 다 마신 캔을 와작 구기며 인혜는 중얼거렸다.
“……애초에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든 남자부터가 이미 나쁜 놈이지만.”
“마음이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잘못은 아니지…….”
“친구는 다른 놈 만날 생각은 없지?”
“아…… 응.”
“……흐음.”
인혜가 생각에 잠겼다. 재희는 아까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괜히 말했다. 마음이 답답해서 풀어놓고 싶었던 것뿐인데.
게다가 어쩐지 인혜가 다 눈치챈 것 같다.
“……인혜야, 친구들한테는 말하지 마…….”
“어머, 뭐를? 네 친구 연애사를 그 시커먼 놈들한테 내가 왜 말해?”
과장된 인혜의 어조 앞에서, 재희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인혜 눈치는 원래 귀신같았다. 그런 인혜 앞에서 ‘친구 얘기’ 운운하며 조언을 구하다니, 어리석었다.
“재희야.”
그때 인혜가 엄숙히 그녀를 불렀다. 재희는 축 처진 고개를 들었다.
“……응?”
“나 알지?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찍은 남자는 넘어가지 않은 적 없는 거.”
“……근데 친구는 그 남자를 넘어트리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
“-그런 내가 친히 조언해 주는 거야. 그 친구한테 똑똑히 잘 전해 줘야 해?”
“……응.”
인혜가 생긋 웃었다.
“일단, 그 남자 뒤부터 밟아.”
“……응?”
“계약을 했으면 성실히 의무를 이행해야지. 어디서 다른 여자를 그 사이에 끼워 넣어.”
그러니 잘 확인해 봐서 틈을 잡으라고, 인혜는 마치 큰 전쟁을 앞둔 장군처럼 말했다. 일단 다른 여자의 존재부터 명확히 확인하고, 그다음에 승부를 보라고.
재희는 인혜의 말대로 한영의 뒤를 추적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인혜의 뜻을 순화해서 받아들일 의향은 있었다. 재희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확실하지도 않은 가정으로 우울해하고 있다는 것을. 한영이 정말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밤중에 몰래 사라지고, 저녁에 누군지도 모를 이들을 만나고 다니는 일이 잦다는 정황만 있었을 뿐.
그 순간 재희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의혹이 있었다. 설마 그래서 끝까지 안 가려고 하는 걸까? 다른 여자가 있어서, 죄책감 때문에 계속 삽입을 피한 거라면-. 재희는 머리가 지끈거려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뭐가 사실인지 상상인지 모르겠다. 한영이가 집에 들어와야 대화라도 할 텐데.
시선을 들었다. 오늘도 주인 없는 빈집에 그녀 홀로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작심을 한 참이었다. 늦게 들어오더라도 한영을 붙잡고 대화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한영이 집에 들어오면 바로 깰 수 있게 재희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을 확인했다. 밤 열한 시.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
거실에서 눈을 감으며,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했을 뿐인데.
그날 새벽, 재희는 아주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일어나, 재희야. 학교 가야지.”
“……아.”
재희는 반짝 눈을 떴다. 아침의 햇살이 쨍하니 눈을 찔렀다.
“배 안 고파?”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물으며, 한영은 고개를 숙였다. 헐렁한 옷 밖으로 드러난 재희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전날 밤 고민하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행복한 현실이었다.
재희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재희의 목과 어깨, 볼에 키스를 연달아 내리 붓는 한영을 보며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행복한 당혹감이었다. 사랑하지 말라며, 온갖 애정 표현으로 사람 흔들리게 하는 이한영이다.
“식사해. 뭇국 끓였어.”
“……으응.”
한영이 엉망이 된 재희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겨 주었다.
“미안한데, 아침은 혼자 먹게 해야겠네.”
“……벌써 나가?”
“교수님 심부름으로 출판사 들러야 하거든.”
“……이렇게 일찍?”
한영은 미안하다고 답했다. 외출할 차림으로 앞에 서 있는 한영을 오래 붙잡을 수는 없었다. 재희는 잠기운이 묻은 얼굴로 한영을 배웅했다.
“오늘 늦을지도 몰라. 오후에 영재 보기로 했거든.”
“아…… 응. 조심해서 다녀와.”
재희는 얌전히 손을 흔들었다. 한영은 잠시 감상하는 눈빛으로 재희를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나갔다. 남은 재희만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였다.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서고야 한영이 왜 웃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재희는 산발한 머리를 보며 뒤늦은 수치심에 시달렸다. 씻고 옷을 입을 때 즈음해서는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재희는 새벽에 들었던 한영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설레던 가슴이 점차 가라앉았다.
아마 전화벨이 먼저 울렸던 것 같다. 그 소리에 옅게나마 잠이 깼는데, 마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었다.
한영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쪽으로 올 생각 말아요. 곤란해지니까.’
아주 낮게, 할 말만 건조하게 속삭이던 음성을 재희는 기억했다.
‘내일 오후 네 시 오십 분에 보죠. 전에 보았던 곳 기억하죠. 독수리 옆 올빼미 새장.’
학교를 가는 길에도, 강의실에 앉는 순간에도 그 음성은 재희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독수리 옆, 올빼미 새장-.]
재희는 노트에 느릿느릿 그 단어를 적었다. ‘전에 보았던 곳’이라는 단어도 옆에 괄호를 두르고 썼다. 네 시 오십 분도 같이 적었다. 그러고 보면 약속 시간으로는 참 이상한 시각이었다. 다섯 시면 다섯 시지, 왜 네 시 오십 분일까?
마치 암호 같다.
얼마나 친한 사이기에, 독수리니 올빼미니, 하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도 서로의 뜻이 통하는 걸까? 그렇게 오래 만난 사이일까?
무엇을 확인하고자 하는지도 모르고 재희는 골몰했다. 독수리 옆 올빼미. 올빼미 새장. 독수리 옆-.
‘오늘 늦을지도 몰라. 오후에 영재 보기로 했거든.’
재희는 문득 스쳐 지나간 기억에 눈을 깜빡였다. 그래. 한영이가 영재를 오후에 본다고 했지? 재희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혹시 새벽에 걸려 온 전화가 영재는 아닐까? 그러나 재희는 금방 노트에 적은 영재란 이름을 지워 버렸다. 영재였다면 한영이 존댓말을 했을 리 없다. 새벽에 전화를 건 상대는 한영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재희는 심 교수의 막내딸을 잠시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집중해야지.
재희는 노트 위쪽에 적힌 시간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오후 네 시 오십 분.
오후- 네 시-.
“……아.”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갔다.
주변에 있던 남학생 하나가 흘끗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재희는 수업 중에 소음을 낸 자신을 나무라듯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러나 실상, 그녀는 낭패감에 입을 감싼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 때문이었다.
재희는 하나 남은 수업을 빼먹었다. 홀로 신촌의 거리를 찾았다. 거리에 날리는 담배 연기가 지독해 코를 막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꼭 담배 냄새가 따라붙었다. 재희는 그래서 사람 많은 곳이 싫었다.
마침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우르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재희는 그 김에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들었다. 단체로 미팅을 한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에게도 귀가 솔깃할 단어 하나를 입에 올렸다.
“독수리 다방이라고 했지?”
대학생들은 젠체하듯 옷을 가다듬으며 멀어졌다. 재희는 그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언젠가 영재에게 지나가듯 들은 적 있다. 영재가 다니는 대학교 근처에 유명한 다방이 있는데, 그곳 이름이 독수리 다방이라고. 신촌을 찾는 학생들치고 그곳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곳, 유명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었다. ‘올빼미 새장.’
재희는 목적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이 툭, 툭, 어깨를 치고 가는 좁은 길목에 비껴선 채, 재희는 삼 미터 떨어진 상가를 보았다. 상가 이층에 있는 격자창이 바로 그녀가 찾는 올빼미 새장이었다. 간판에 적힌 글씨 ‘미네르바’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미네르바. 미네르바의 현신은 올빼미. 간단한 말장난이었다.
일층에 있는 삼겹살 가게 옆으로 난 계단을 밟고 올랐다. 계단은 사람 둘이 겨우 몸을 틀어 스쳐 가야 할 정도로 좁았다.
미네르바 커피숍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자리가 몇 남기는 해, 재희는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앉아 있는 손님들도 말씨가 조용조용했다. 한쪽에서는 재희가 알지 못하는 기구로 커피를 추출하고 있었다. 풍기는 원두 향이 그윽했지만, 재희는 그것을 더 신경 쓰지 못했다.
격자무늬의 창가 앞에 앉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네 시 십 분.
오후에 두 개의 스케줄을 잡았다면, 상식적으로 약속 장소를 가까운 곳에 잡았으리라 생각했다. 오늘 새벽에 잡힌 약속보다는 영재와의 약속이 더 이전에 잡혔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 이후부터는 간단했다. 한영은 영재를 만날 때 주로 영재의 하숙집 근처, 신촌에서 만난다. 그 흐름으로 재희는 신촌의 ‘독수리’와 ‘올빼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답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답을 알아냈다는 만족감보다, 죄책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나.
원두커피로 유명한 커피숍에서 차를 주문해 놓고 재희는 치열하게 갈등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재희는 그래서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나가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어쩌려고. 곧 이곳에 올 한영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재희는 자신의 본심 깊은 곳에서 슬그머니 소리를 높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영이 얼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내 얼굴 보면, 조금이라도 미안해할 테니까.
아마 다정한 한영이는, 내게 미안해서라도 상대를 정리할 거야. 어쨌든, 내가 그 여자보다 더 오래 본 사이니까.
“주문하신 차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재희는 꼼짝도 못 한 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속에서 마주한 본심은 충격적일 정도로 솔직했다. 재희는 처음으로 자신의 교만을 마주 보고 있었다. 자신은 한영과 함께 보낸 지난 십삼 년의 시간을 과신하고 있었다. 한영이 그녀에게 보이는 맹목적인 보호 본능을 맹신했기 때문에,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한영이 아무리 애인을 만들어도, 결국에는 마재희를 우선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재희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염없이 앉아, 스스로 마주한 민낯에 몸서리쳤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테이블에서 남녀가 저들끼리 즐거워 깔깔대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 웃음소리를 들은 순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깨달았다.
가야겠다.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못 견디게 스스로가 창피했다. 재희는 허둥지둥 몸을 출입구 쪽으로 돌렸다. 때마침 출입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오는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지레 찔린 재희의 시선이 화들짝 그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한영은 아니었다.
남자는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두렵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오고 있었다. 흘낏 자리를 돌아보는 얼굴에는 두꺼운 뿔테 안경이 걸려 있다. 손에는 돌돌 만 신문을 들고 있었다.
자리를 찾는 남자의 시선이 자연스레 재희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다시 등을 돌렸다.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희는 당황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었다.
“……재석 선배.”
속삭임은 다행히 크지 않았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재희는 티 나게 굴지 않기로 했다. 출입문을 향해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는 발걸음 소리와 의자에 앉는 기척에 집중할지언정, 섣부르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라도 아주 조금쯤은, 곁눈질로 재석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다행히 상대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이 많은 눈치였다. 재석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신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도 그는 습관적으로 자신이 쓴 검은 뿔테 안경을 몇 번이고 추어올렸다. 재희는 이재석이 안경을 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러니 저 두꺼운 안경은,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일까?
재희는 씁쓸함에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에게 다가가 왜 여기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정말로 대환 선배를 배신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도 참았다. 친구인 양호명에게도 밝히지 않은 진실을 재석이 그녀에게 알려 줄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정말 일어나야 했다. 손목시계의 시간은 한영이 올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이곳을 떠나야 했다.
얼굴만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마재희가 이곳에 있는 것조차 신경 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재희가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창문 밖으로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한영이 거리를 걸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너무 늦었다.
지금 나간다 해도, 한영이 그녀를 못 볼 리 없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커피숍에 도착한 한영이 재희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우연이라는 변명에 한영은 속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쫓아온 거냐고, 만약 한영이가 질린 얼굴을 한다면.
초조해진 재희는 커피숍 내부를 둘러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이곳에 몸을 숨길 곳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
“……!”
재희는 순간적인 깨달음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재석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였다. 다행히 재석은 계속 자신 앞에 놓인 신문을 내려다보느라 그녀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커피숍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가 올라왔던 계단에 아직 한영은 없었다. 재희는 입구 맞은편에 붙은 ‘화장실’이라는 표시를 확인했다. 세 발자국 걷자 바로 화장실로 꺾어지는 복도가 보였다. 재희는 그 복도 벽에 몸을 기댄 채 기다렸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던가.
곧 계단 밑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희는 조심스레 목을 길게 빼 계단을 엿보았다. 한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첫 계단을 밟고 있었다. 들킬세라, 재희는 재빨리 고개를 바로 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계단을 올라온 한영이 당장이라도 그녀가 선 복도로 고개를 내밀 것 같았다. 조바심에 재희가 두 손을 꽉 맞잡고만 있을 때였다. 커피숍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입구 맞은편 유리창에 뿔테 안경을 쓴 얼굴이 비쳤던 것이다. 재석은 그가 그렇게나 내려다보고 있던 신문을 든 채였다.
벌써 가는 걸까? 커피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문을 떠올리던 참에 재희의 생각이 한영에 미쳤다. 아. 한영이랑 계단에서 마주치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유리창에 비친 재석이, 손에 들고 있던 신문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
봉투?
재희는 눈을 깜빡거렸다. 재석이 신문 사이에 끼워 들고 있던 것은 갈색의 서류봉투였다. 우체국에서 흔히 파는 봉투였다. 재희는 더 정확하게 보지는 못 했다. 바로 재석이 계단을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엇비슷하게 맞물렸다. 얼마 가지 않아 나직한 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겁니까?”
“어.”
“필름은요?”
잠시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가 무슨 상황인지 알 길이 없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재석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방금 커피숍에서 마재희 봤어.”
재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시의 침묵 후 한영이 물었다.
“……선배를 알아보던가요?”
“알아봤겠지.”
“…….”
“방금 나갔는데, 오면서 못 봤어?”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재희는 한영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두려워졌다. 당장이라도 그가 화장실이 있는 복도로 얼굴을 내밀 것 같았다.
그때였다.
“건물 밖에서 보기는 했습니다.”
한영이 그렇게 답했다. 무심한 목소리였다.
“지나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미네르바에 있었습니까?”
“어.”
“곤란했겠네요.”
“잠깐은. 모르는 척하더라.”
그리고 대화는 잠시 끊겼다. 한동안은.
“……간다.”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 소리가 먼저 울렸다.
“오늘 밤 서울 떠날 거야. 잘 지내라.”
“…….”
“무슨 일 때문에 엮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거기서 빨리 나와. 오래 있을 곳 아니야.”
대답은 끝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던 걸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도.
재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정적에 집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저벅저벅,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커피숍 앞에서 곧 멈췄다.
재희는 숨을 멈췄다. 한영이 몸을 조금만 틀어 한 발자국 걷는다면, 벽에 붙어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길고 긴- 정적이 있었다.
“…….”
재희가 현기증마저 느낄 무렵이었다. 커피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재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서서히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
재희는 멍하니 선 채 그 인기척을 끝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손목을 들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네 시 오십삼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