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마재희가 보기에 이한영은 자신의 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일상 속에서 그 매력을 대놓고 드러내며 휘두르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제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침대 위에서는 다르다는 것일까. 한영의 앞에서 옷을 벗은 날 이후 사흘이 지나는 동안, 재희는 알게 되었다. 이한영은 옷을 벗고 있을 때면 유독 눈웃음이 잦아진다. 움직임이 격해질수록 미소가 깊어진다. 재희가 그에 홀려 멍하니 올려다볼 때마다 짙은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재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역시 이한영은 자신의 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로써 재희를 휘두를 줄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이한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좀 더 넓혀 가고 있었다. 아무리 재희가 한영 한정으로 한없이 수용적이라 한들, 사실과 진실을 보는 눈조차 닫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영의 성 관념은 평범한 사람들의 것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재희야.”
간혹 그의 가르침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재희가 당혹감을 느낄 때마다 한영은 그렇게 말했다.
“남들이 어떤 잣대로 표현하든, 이건 결국 즐거운 행위거든.”
그리고 한영은 속삭였다. 아무리 엄숙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밑바닥은 다 이런 것에 흥미를 느껴. 그러니 솔직해지는 것에 두려움 갖지 마.
단어와 표현의 선택에서 대체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심중 깊은 곳에 숨은 미묘한 배덕감을 끌어내는 데 능했다. 그런 점을 보면 한영이 그동안 옷 아래로 숨겨 놓고 있던 육체가 그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야생적이고, 본능적이며, 탐닉적인 본질을.
“재희야.”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재희는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헐떡임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허벅지 더 조여야지.”
조언하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끊기는 숨조차 없이 침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난잡하게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성기는 달랐다. 삽입 없이, 입구만 스치듯 건드리고 가는 성기였다. 그럼에도 재희는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처럼 싱크대를 부여잡은 채 온몸을 전율했다.
“아…….”
“재희야.”
“……으응.”
재희는 허벅지에 힘을 주려 했다. 한영의 성기를 그렇게 다리로 조이려 했지만, 무릎 꿇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은 다리는 더 오므려지지 못했다.
한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웃음소리를 흘렸다.
“……안 되겠네.”
그는 그녀의 등에 바짝 가슴을 밀착했다. 그의 손이 상의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브래지어 없는 가슴을 주무르던 손은 곧 허리로 내려가 옥죄듯 뒤로 끌어당겼다. 아찔한 굴곡을 그리며 그녀의 등이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자세를 잡는 한영 덕에 걷어 올렸던 치마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한영이 다시 치맛단을 걷어 올리느라 움직임이 잠시나마 잦아들었다.
재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웅얼거렸다.
“애들, 친구들…… 이제 올, 건데…….”
재희는 말을 하다 말고 신음을 흘렸다. 느긋하게 스친 성기가 정확히 음순을 가르고 입구를 찌르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은 겨냥이었을 것이다. 한영의 숨소리 또한 일순 끊긴 것을 보면, 그동안 몇 번이고 일어났던 사고와 똑같은 우연일 뿐이다.
재희는 그것을 알면서도 제 몸이 전과 다르게 그것을 기뻐하며 기다리는 것을 느꼈다. 선단의 극히 일부분을 삼킨 입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지난 이십 년을 존재조차 몰랐던 곳인데, 단 사나흘 만에 그녀는 질구를 움직일 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은 채 미동도 않던 한영이 조용히 반문한다.
한영은 천천히 허리를 뒤로 물렸다. 마치 강한 인력을 억지로 거부하는 것처럼 느리게. 재희의 허리가 그 움직임을 쫓아 뒤로 빠졌지만 소용없었다.
한영은 그녀의 점막을 건드려 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숙히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답답해.”
재희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까맣게 잊고 중얼거렸다.
“갑갑해…….”
끓는 소리를 흘리며 싱크대 아래 수납장 문에 이마를 비볐다. 끙끙거렸다. 아랫배가 자글자글 끓고 있었다.
“한영아, 나, 답답해……. 어떻게 좀…….”
재희는 주춤주춤 손을 옆으로 뻗었다. 몇 번이고 들썩이느라 잔뜩 성이 난 한영의 허벅지가 손에 닿았다. 뜨겁고 탄탄한 피부였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녀는 그것을 몇 번이나 쓸어 올렸다.
“……그래도 빨리 배우네.”
그녀의 귀를 빨며 한영이 속삭였다.
“……슬슬 보챌 줄도 알고.”
“아, 응, 읏.”
“친구들이 한 시간 뒤에 오잖아. 이런 모습 보일까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
한영이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놓아달라는 거려나.”
“아, 아니야, 아니…….”
“아니라고?”
“아…… 응, 읏.”
한영이 다시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 웃음에 온화한 애정이 서려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울상을 지었다. 정중하고 발라 보이는 이한영은 사실, 행위 중에 무척 짓궂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누구보다 다정하게 웃으며 적나라한 말들을 던진다. 노골적인 그의 발언에 부끄러워하는 재희를 즐긴다. 일부러 빗나가듯 애매한 자극만 줄 때는, 당하는 입장에서 애가 탈 지경이었다.
그래서 재희는 가끔 의심하곤 했다. 한영은 삽입을 미루는 이유를 배려라 답했지만, 실상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그렇게 의심할 정도로 이한영은 마재희를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즐기고 있었다.
“힘들어?”
“……아니…….”
절정에 이른 후 주방 바닥에 뻗어 버린 재희를 한영이 다정히 살폈다.
숨을 고르며 재희는 멍하니 한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그녀가 감기에 걸렸을 때나 짓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흔히 일컫는, ‘자상한 오빠’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런 눈빛으로, 한영은 자신의 성기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한영은 솔직해져도 된다고 했지만, 재희는 아직 부끄러움을 다 던져 버리지 못했다. 그러기에 사흘은 너무 짧았다.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재희야.”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기에 재희는 눈을 조심스레 들었다. 한영이 원하는 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한영의 눈가에 번진 웃음이 진해졌다. 흔들리는 손이 점차 빨라진다 생각할 때쯤, 후두둑, 조리대에 정액이 튀었다.
“……아.”
재희는 깜짝 놀라 눈꺼풀을 떨었다. 누워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영이 의도한 것일까, 가슴과 얼굴에 정액이 튀었다.
재희는 손을 뻗었다. 얼굴에 튄 정액을 더듬더듬 만졌다.
가쁜 숨을 고르며 재희는 아랫입술을 적신 액체를 의식했다. 한영의 체온을 닮아 뜨거웠다. 재희는 혀를 내밀었다. 입술에 묻은 정액을 핥았다.
의도가 있던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맛이 궁금했을 뿐이다. 한영은 그녀의 은밀한 체액을 맛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말해 주곤 했었다. 맛있다고. 그래서 재희도 호기심으로 맛을 본 것뿐이었다. 한영의 것도 맛이 있는가, 하여.
그러나 재희의 기대와는 달리 한영의 정액은 맛있지 않았다.
“……한영아, 정말로 내 게-.”
정말로 내 것이 맛있어? 그렇게 재희가 물어보려 하던 찰나였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한영의 시선과 마주한 순간, 재희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렸다.
한영이 낯선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관찰하는 시선을 닮았지만, 미묘하게 온도가 높은 시선이었다. 재희가 정액과 침 중 어느 쪽을 부끄러워했던 거냐 묻는다면 명백했다. 어린애처럼 타액을 흘린 입술이 창피해 그녀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정액의 맛이 다시 혀끝에 번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입맛을 다시다 말고 재희는 멈칫했다.
눈앞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한영이 미소 짓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재희야.”
“……응.”
“그거 지지야. 먹으면 안 돼.”
어린 시절 재희가 엉뚱한 짓을 벌일 때마다 한영이 했던 말이다. 그거 지지야, 재희야. 만지면 안 돼. 먹으면 안 돼. 그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더 나오는 법 없던 한영의 말버릇이, 하필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온다.
그러나 재희는 한영의 농담에 어울려 주며 웃는 대신, 눈을 깜빡였다. 사정한 후 다소 힘을 잃고 있었던 한영의 성기가 그새 아랫배에 바짝 붙어 있었다. 분기탱천한 모습이다. 흉흉할 정도다.
그래서 한영이 그녀의 목과 턱에 묻은 정액을 손바닥으로 느긋하게 닦아 주는 동안, 재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한영이 특별히 화려하게 웃을 때는, 조심해야겠다고.
그녀의 생각보다 더- 그는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치밀했다.
“이러다 정말 시간 못 맞추겠네. 같이 씻을래?”
“……응.”
그렇지만- 왜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억압해야 하는 걸까.
부드럽게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춰 오는 한영을 보며, 재희는 그의 자제심에 의문을 품었다. 감정과 욕구를 마음껏 내놓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 한영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안타깝게 느껴졌는데-.
“왜?”
“……응. 아니야.”
한영이 노출시키는 간극과 괴리 앞에서 재희는 설렘을 느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새로운 모습을 연거푸 보여 주는 한영의 비뚤어진 아름다움 속에서, 재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재희의 몸에 딱 맞는 속옷을 언제 사 왔는지 모를 한영은, 친구들이 들이닥치기 딱 십 분 전에 그것을 손수 입혀 주었다. 사이즈가 맞는지 확인하겠다는 말과 달리 가슴을 그러모아 주무르는 손길은 전혀 담백하지 않았다. 그 탓에 지금도 어중간한 열기가 몸에 남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재희는 토요일 저녁을 평소처럼 친구들과 함께 보내면서도, 위화감을 때때로 느꼈다. 한영 때문은 아니었다. 언제 그녀를 물고 빨고 핥았느냐는 듯, 한영은 다른 친구들 앞에서 담담히 행동했다. 그래서 문득문득 불안해하느라고 그녀가 친구들이 풍기는 위화감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유독 짓궂었다. 시시때때로 재희를 떠보고 놀렸다. 물론 대부분 상현이 그랬다는 것이고, 인혜는 그런 상현의 옆구리에 날카롭게 훅을 꽂아 넣는 것으로 곤란해하는 재희를 도왔다. 영재는 쟤들이 왜 저러나, 하고 심드렁한 시선을 몇 번 보낼 뿐이었다. 그러니- 큰 문제는 없는 게 분명했다. 재희는 무심히 친구들의 이상 증세를 넘겼다.
사실 그녀는 한영의 웃는 얼굴을 몰래 엿보느라 바빴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웃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정신 무장을 해야 가능한 걸까?
“맞다, 한영아. 너 어제 그 시간에 심 교수님 연구실에는 왜 있었어?”
한영이 무심히 답했다.
“상담 때문에.”
재희는 거실 한편에서 대화를 나누는 상현과 한영을 보았다. 상현이 봐 달라고 부탁한 교재를 한영은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너는 왜 학교 나왔어. 수업도 없는데.”
“교내 진입은 않겠다던 경찰이 말을 바꿨는데 이걸 어떻게 놓쳐. 사진 찍은 거 인화하느라 바빴지.”
“어차피 학보에 내보내지도 못할 것을, 뭐 하러.”
“개인 소장이라고 치지 뭐.”
상현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한영이 한숨을 흘렸다.
“조심해.”
“걱정도 참.”
“건성으로 듣지 말고.”
“열성으로 듣고 있단다, 친구야.”
한영이 말을 말자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교재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상현의 관심이 다시 교재로 쏠렸다.
“……어제 학교에 전경이 들어왔었어?”
두 남자의 대화가 마무리되자마자 재희는 상현에게 물었다. 한영이 주방으로 향한 후였다.
상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난리도 아니었지.”
“……다친 사람은?”
“중태까지 간 사람은 없어.”
“…….”
“학교 안 나왔어? 어떻게 그 난리통을 몰라?”
“……늦잠을 자 버려서…….”
한영은 사흘 내내 그녀를 깨워 주지 않고 등교했다. 아마도 간밤의 행위로 피곤해 보였으리라고, 재희는 멋대로 납득하고 학교를 결석한 참이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던 것이었구나.
“……무슨 일로 경찰이 학교에 들어온 거야?”
“요즘 데모 분위기가 많이 격해졌거든.”
상현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이구, 우리 주방장을 위해 내가 뭐 도울 게 있으려나?”
주방 쪽에서 차분한 한영의 대꾸가 들려왔다.
“넌 주방에 발 들이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꼭 들어가 줘야지.”
“그럼 상추라도 씻든지.”
“상추? 상추면, 역시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
신이 나 주방으로 향하는 상현의 뒷모습을 보며, 재희는 생각했다.
자리를 피하는 거구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상현의 우려가 무색하게, 재희도 사실 알고 있었다. 요즘 학생들의 분노가 왜 그렇게까지 격해져 있는지는.
* * *
대학교의 총학생회 임원이 된다는 것은 언제든 수배 전단지에 얼굴이 올라가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정부든 대학교든, 총학생회를 환영하지 않았다. 호국 청년단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단체만 교내 단체로서 인정해 주었을 뿐, 그 외의 단체는 조금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공인’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다면, 권리도 자유도 순식간에 짓밟아 버리는 시절이었다.
실제로 현재 재희가 알고 있는 총학생회의 임원들은 전부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학교에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는 이가 극히 드문 은둔 생활을 전전했다.
그리고 지금은 죽고 없는 강대환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더랬다.
“무리하게 구속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어.”
“애초에 강대환이 왜 수배를 당해야 했는데?”
“이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해.”
학교에서 모두가 그렇게 공공연히 분개하는 동안, 거의 들리지 않는 한편에서는 의심하는 목소리들이 속닥이고 있었다.
“몸에 상처가 있었다면서?”
“맞은 상처 같았어?”
“몰라. 일단 사인은 교통사고니까.”
“……부검을 해야 했던 거 아니야? 경찰이 잡으러 가고 있었고, 그래서 강대환이 도망가고 있었다며. 그런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의심을 해야지.”
“거기까진 모르겠어. 유가족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재희는 멍하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강의를 듣고 집으로 귀가하면서도 내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방학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죽은 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아마- 웃고 있었던가.
강대환은 늘 단 한 번도 얼굴 찡그리는 법 없는 인물이었으니, 아마도 웃고 있었을 것이다.
“간 좀 봐 줄래.”
재희는 문득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영은 가스레인지 앞에 선 채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막 씻고 나와 바지만 걸친 참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벌거벗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재희의 머릿속을 맴돌던 고뇌가 순식간에 휘발되어 버렸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상했을까. 한영이 완전히 몸을 틀어 그녀를 응시했다.
한 방울의 물이 나른하게 한영의 쇄골을 지났다. 가슴 근육 사이의 깊은 골로 기어가는 물의 궤적을 그녀는 응시했다. 물방울은 귀족적인 얼굴과 딴판인 야생적인 복근을 지나서, 밑으로, 좀 더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른 간은 나중에 보고.”
“아…….”
재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영의 눈을 보았다. 한영은 잔잔히 웃고 있었다.
“지금은 음식 간만 봐 줘. 국 두 번 덥히고 싶지 않거든.”
재희는 볼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응.”
얌전히 그에게 다가갔다. 아래로 향하려는 시선을 계속해서 붙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어때?”
아직 발간 볼을 하고서 재희는 한영이 대 준 숟가락의 국물을 맛보았다. 냄비 안에 담긴 뽀얀 삼계탕은 보는 것만으로도 먹음직스러웠다. 재희는 그 고운 국물 아래 전복이며 인삼까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재료의 훌륭함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한영의 요리는 늘 맛있었다.
무심코 입술을 핥으며 재희는 들으나 마나 한 평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맛있어.”
“그래?”
의미심장한 웃음이 섞인 반문에 재희가 그를 올려보던 찰나였다. 부지불식간 그가 재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그시 문대고 떨어지는 입맞춤은 짧았지만, 재희는 다시금 얼굴이 홧홧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어린애 같은 입맞춤에 볼을 붉히는 재희가 우스웠을까. 한영이 웃으며 중얼거린다.
“부끄러워하는 지점을 종잡기 어렵네.”
“……응?”
한영이 다시 조용히 웃었다.
“미안하지만,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 않은데.”
“……?”
“난 네가 부끄러워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움직일 때가 더 좋거든.”
“…….”
“설명해 주면, 의식하고 부끄러워할 테니까.”
어렴풋하게 그 말이 성적인 의미임은 눈치챌 수 있었다.
얌전히 눈을 깜빡이면서도 볼을 붉히는 재희에, 한영이 웃는다. 이거 봐, 하고 중얼거리며.
“……오늘 무슨 날이야? 삼계탕도 그렇고…… 저기 프라이팬에 있는 건 갈비잖아. 진수성찬이니까…….”
“글쎄, 진수성찬보다는 보양식 아닐까.”
자연스럽게 그가 재희의 허리를 끌어당겨 그녀의 이마와 볼에 가벼운 키스를 쏟아부었다. 질책의 허울을 쓴 농담과 함께였다.
“먹고 힘 좀 내 줄래.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힘들어해. 나중엔 어쩌려고.”
“……응. 알았어.”
한영은 농담이었지만, 재희는 진지했다. 안 그래도 그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각오 어린 태도가 우스꽝스러웠을까. 한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이 놀라울 정도로 행복해 보여 재희는 의문도 부끄럼도 잊었다. 학교에서부터 하루 내내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죄책감과 자괴감도 잊었다.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오직 이 순간만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원래도 강의에 출석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 시기였음에도, 재희는 오랜만에 출석한 월요일의 강의실에서 분위기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어수선했고, 어렵게 말하면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재희야, 오늘 시간 돼?”
경신이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기다리던 중에 속삭이듯 물었다.
재희는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왜?”
“그게…….”
경신이 입을 열던 찰나였다.
“안녕.”
재희는 조용히 들려온 인사에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경신이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도 같은 심정이었다.
“재희는 오랜만이네. 둘이 다음 수업 같이 들어?”
책상에 들고 온 책들을 내려놓으며 묻는 한영은 오늘따라 더 얼굴이 훤했다. 흰 와이셔츠의 깔끔한 차림이라 더 그랬나. 괜스레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이한영에 익숙한 마재희조차 그럴진대, 경신이라고 다를까. 경신이 볼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어, 응. 한영아, 그건 무슨 책이야?”
“조교 선생님 심부름이야.”
“그걸 다?”
“그렇게 됐네.”
열 권도 넘는 하드커버의 책들은 그래도 상당히 무거울 법했다. 재희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경신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도와줄게.”
“괜찮아.”
“아니야. 같이 나눠 들면 편하잖아.”
한영은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지만, 경신은 원래 누군가를 잘 돕는 성격이었다. 재희는 잠시 주저했지만, 곧 경신을 따라 한영의 책을 나눠 들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복도로 나서면서도 그녀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왜 한영이가 말을 건 거지? 인사야 곧잘 나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들 보는 앞에서 하는 예의상의 인사였는데-.
“고마워.”
“뭘. 근데 조교 선생님도 너무하셔. 이걸 다 너한테만 시켰어?”
“마침 내가 그 자리에 있었거든. 운이 안 좋았어.”
웃으며 경신과 대화를 나누는 한영을 의식했다. 학교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재희는 다소 혼란스러워졌다. 이건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성관계를 맺는 대신 사랑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예전처럼 지내야 한다고 한영은 단단히 그녀에게서 확인을 받아 냈다. 그랬는데, 갑자기 왜 학교에서-. 재희는 생각을 더 이어 나가지 못 하고 눈꺼풀을 움찔 떨었다. 어느새 이렇게 다가온 걸까. 한영의 몸이 너무 가까웠다.
일 층 복도라 오가는 학생들이 많은 곳이었다. 자연히 서로의 간격이 더 좁아진다 싶던 그 순간, 재희는 툭, 몸이 밀리는 것을 느꼈다. 재희의 몸이 흔들릴 정도의 힘이었다. 재희는 깜짝 놀라 비틀거리면서도 옆을 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팔을 잡아채는 손을 느낀 것은.
“……아.”
“괜찮아?”
재희는 멍하니 눈꺼풀을 팔랑거렸다. 한영이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희는 말없이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워졌다.
“재희야, 괜찮아?”
“안 다쳤어?”
계단을 마침 걸어 내려오던 선배들이 다가와 물었다. 재희는 그제야 복도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들에게 몰려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와 한영이 떨어트린 책들 때문이었다. 다수의 시선이 몰려들자, 재희의 얼굴이 은은히 달아올랐다.
“……괜찮-.”
“-다리 접질린 것 같던데.”
한영이 재희를 똑바로 세워 주며 걱정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
“뭐? 재희가 다쳤어?”
“재희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데 봐 봐.”
주변의 요란한 반응에 당황도 했지만, 재희는 어색하게나마 괜찮다, 답했다.
한영이 옆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김 형, 죄송하지만 이 책들 심 교수님께 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 우리가 할게. 얼른 의무실로 데려가.”
한영이 감사하다, 인사를 건네고 경신을 불렀다. 경신이 재빨리 재희의 옆에 붙어 부축해 주었다.
“많이 아파? 어때?”
“……괜찮아.”
경신은 아마 모를 것이다.
재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죄책감과 혼란을.
‘다친 척해.’
몸이 부딪힌 순간 귓가에 속삭이던 그 목소리. 그것은 아마 재희만 들었을 것이다.
재희는 절뚝거리며 걷는 중에도 한영을 때때로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친한 동기의 부상을 걱정하는 얼굴만 하고 있었을 뿐, 어떤 답도 알려 주지 않았다.
의무실에서 재희의 발목을 만져 준 것은 한영이었다. 의무실이라 했지만, 원래도 제대로 담당자가 자리를 지키지 않는 빈 공간이었다. 그래서 의사나 간호사도 아닌 이한영이 경신이 보는 앞에서 재희의 다친 다리를 감히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재희만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여기는 어때?’
그렇게 물으며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기억한다. 고요한 그 눈동자. 낮게 가라앉은 채, 어서 대답을 하라고 종용하는 한영의 눈동자.
재희는 그 눈앞에서 홀린 것처럼 아프단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야 한영이 희미하게나마 웃음 지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사건 이후 복도에서 마주하는 동기며 선배들마다 재희에게 다친 다리를 물었다. 재희는 영문조차 모르고 멀쩡한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한영이 바라는 것 같아 그 뜻에 어울려 주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왜 다쳐야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공부하고 있었어?”
귀가한 한영이 현관에 들어서며 물었다. 재희는 얼버무리듯 응, 하고 대답했다. 코를 잡은 채였다. 한영이 현관문에 들어선 순간부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최루탄 냄새…….”
“미안. 얼른 씻을게.”
“……시위하고 왔어?”
“그렇게 됐어.”
바로 욕실로 직행하는 한영을 보다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이한영은 시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동기들이나 선배들이 인원수 맞춰 달라 부탁할 때 말고는 먼저 나서서 참가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피할 수 없어, 시위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컸다.
재희는 대뜸 낮에 경신이 스치듯 던지고 간 말을 떠올렸다.
‘다리가 이래서는 재희 넌 쉬어야겠네……. 인원만 맞춰 달라고 하려 했는데.’
그 기억을 떠올리고서야 재희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사람 많은 복도에서 한영에 의해 비틀거리고, 또 다친 척을 해야 했는지를.
한영의 방에 있을 옷가지를 가지러 올라가며 재희는 왜, 라는 질문에 시달렸다. 경신과 한영까지 시위에 참가할 정도였다면, 어지간히 큰 시위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런 시위에 한영이는 왜 나를 빼놓으려 했던 걸까? 위험해서? 그래서 다들 참여하는 시위에 나를 따돌린 걸까? 다친 척하는, 구차한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그렇게 연거푸 질문을 던졌지만, 사실 재희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한영 특유의 극성스러운 보호책이었을 것이다. 김선정의 일 때 드러난 것처럼, 기이하게 뒤틀린 방식의 보호법.
한영의 서랍을 열다 말고 재희는 가만히 섰다. 그녀는 잠시 과거의 각오를 떠올려 보았다. 한영과의 기이한 공생 관계를 바로잡겠다고 다짐했었다. 똑바로 설 수 있는 성인이 되어서, 한영을 더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들었다. 그 각오는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희는 욕실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 쏟아지는 소리는 이미 한참 계속되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을 것이다. 재희는 이 층 방에서 가져온 옷가지를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
“……한영아, 옷 문 앞에다 뒀어.”
문 너머에서 물소리가 뚝 그쳤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기에, 재희는 한영이 못 들었는가 싶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한영아, 옷 문 앞에다-.”
그때 달칵, 문이 열렸다.
재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던 찰나였다. 젖은 팔 하나가 튀어나와 재희를 욕실로 끌어당겼다.
“……아.”
재희는 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습기 찬 욕실이었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나신을 못 볼 정도로 시야가 뿌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젖은 나체를 드러내 놓고 있는 한영은 평온히 웃고 있었다.
“너는 씻었어?”
“……아, 아까. 집에 왔을 때.”
“그래?”
재희는 한영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는 것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 눈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릴 수 없었다.
그때 한영이 젖은 바닥을 주의하듯 조심스레 재희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벗어 볼래?”
“……으응?”
“오늘 다쳤지?”
“……안 다친 거 알잖아.”
“아니, 발목 말고. 책이 허벅지에 부딪쳤던 것 같았는데.”
“……그건 다친 것도 아닌데…….”
그러나 한영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재희를 욕조 앞에 세운 그가 치맛단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재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으나, 곧 한영이 원하는 대로 치맛단을 양손에 쥐고 들어 올렸다. 마치 속옷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희고 가는 두 다리가 욕실의 수증기 아래 드러났다.
“……멍들었네.”
한영이 미안하다는 듯 재희의 허벅지 한 군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뜨거웠다. 닿은 피부가 저릿저릿해지는 기분에, 재희는 움찔 몸을 떨었다.
“또 어디 다쳤어?”
“……이제 정말 없어.”
“미안해.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던지라, 재희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랬어?”
“위험하니까.”
“……너도 시위에 갔잖아. 그런데 왜 나만 안전한 데 있어야 해?”
“나는 상관없어. 친구들도 괜찮을 거야. 그렇지만 너는 안 돼, 재희야.”
왜?
재희는 불쑥 묻고 싶었다. 욕심을 부릴 생각은 분명 없었는데, 왜냐는 질문이 계속 달큼하게 입안을 감돌았다.
그러나 한영이 먼저 그녀 앞에 몸을 낮추고 있었다.
“한영……?”
재희는 깜작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게 무릎까지 꿇으면서 사과할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재희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앗……!”
“씻은 후에 약도 안 발랐지?”
“아니…… 잠깐만…….”
“상처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아…….”
한영의 혀가 매끄럽게 멍 자국을 핥았다. 그것은 다친 상처를 위로하려는 의도일 리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뜨겁고 예의를 모르는 혀였다.
한영은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두 손은 어느새 각각 종아리와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재희는 치맛단을 붙든 채 꼼짝도 못 하고 몸을 떨었다.
한영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며 물었다.
“브래지어는?”
재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골반에 입을 맞추고 있던 한영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재희는 그 시선 앞에서 온몸을 붉혔다.
거침없는 시선이었다. 그러면서도 야하게 휘는, 그 눈웃음.
“재희야, 브래지어는?”
“……네가 입지 말라고 했잖아.”
한영이 다정히 웃었다. 다정히 웃으며, 한 손을 상의 아래로 집어넣었다. 부드럽게 배와 갈비뼈를 쓸고 올라오던 손은 확인이라도 하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영이 낮게 웃고 있었다.
“잘했어.”
부끄러웠다. 부끄러웠는데, 기대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재희는 홀린 듯 한영의 입술이 치골로 향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한영은 살 두덩이 갈라지는 곳에 입을 맞추고는 물었다.
“앞으로 이쪽도 벗고 있는 걸로 할까?”
“그건…….”
“싫어?”
“……부끄러워.”
한영의 집에 있는 동안 팬티마저 벗고 있어야 한다면, 아마 부끄러움에 옴짝달싹도 못 할 것이다. 재희는 붉어진 눈가로 생각했다. 한영의 눈을 바라보며 그러지는 말아 달라, 애원했다.
한영이 슬며시 눈을 휘었다.
“……아쉽네.”
그러나 한영은 곧 덧붙였다.
“……벗기는 것도 즐겁기는 하다만.”
엉덩이를 쓸던 손이 팬티를 밑으로 천천히 끌어 내렸다. 돌돌 말리며 내려간 속옷을 한영은 다 벗겨 내진 않았다. 무릎 위로 걸쳐 둔 채, 그는 낮게 충고했다. 치마 잘 잡고 있어, 재희야. 놓치면 젖을 테니까.
한영의 턱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재희는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혀에 숨을 삼켰다.
그날 재희의 입술에서 처음으로 솔직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좋아.
탄성처럼 흘러나온 그 말이 한영에게는 신호가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마재희의 몸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고, 더 이상 풋내만 나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그 때문이었을까. 한영은 그날 처음으로 손가락을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고작 한 손가락이었다. 재희는 불편함은 느꼈으나, 아픔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밀고 들어오는 감각도 기분이 좋다는 것만 배웠다.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몸에 대해 배워 가고 있었다. 미지의 영역이었던, 안쪽에 대해서도.
한영이 손가락을 밀어 넣은 안쪽은 끈덕지게 내리누르고, 한참을 건드려야 뭉근하게 열감이 피어오르는 이상한 곳이었다. 그 감각에 헐떡이며 재희는 기대감부터 가졌다. 손가락이 아니라, 한영의 것이 들어온다면. 어서, 그것이 들어온다면.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식탁 위에 펼쳐 놓은 교재가 보였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되짚지만, 그녀가 지금 그 자리에서 떠올리는 것은 결국 한영의 얼굴이었다.
저녁에 동기들과 약속이 잡혔다고 나간 한영은 늦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오늘 밤은 그녀 혼자여야 했지만.
재희는 머리를 털었다. 시험 준비에 전념해야 했다. 기간이 많이 남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두뇌를 신뢰하지 않았다. 한영이 진학할 거라 밝혔던 지금의 대학교에 같이 다니기 위해 입시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누구보다 더 오래 끈질기게 공부를 했다. 그게 스스로에게 표하는 예우였으니까.
‘스스로에게 표하는 예우.’
그 말은 한영이 그녀에게 해 준 말이었다. 부모님조차 그녀의 대학교 진학을 한때 말렸었다.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녀가 실패해서 상처받을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영은 달랐다. 부모님에게 설득당해 마음을 접으려는 재희를 달래며 그가 한 말이, 그것이었다.
‘안 될 것처럼 보여도, 노력하면 되는 것도 있어. 한번 해 봐, 재희야. 그게 스스로에게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야.’
자신의 공부만으로도 바빴을 텐데, 어떻게든 그녀를 곁에 두고 공부를 도와주던 한영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는 그렇게 항상 한영이 있어 왔다.
“……또 한영이 생각.”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희는 한영 없는 삶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래서 재희는 처음의 각오도 잊고 한영의 품 안에서 주저앉는 것을 크게 민망해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한영은 그녀를 다른 사람들보다 위하고 있다는 믿음이.
그러나 재희는 그렇게 한영을 믿다가도, 때때로 까닭 모를 불안을 느꼈다. 그것은 결국, 이 관계가 사랑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일까.
“……공부나 하자.”
재희는 의식적으로 교재에 집중했다.
재희는 자신의 방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교재를 오래도록 보며 한영을 기다리다가, 결국 한영의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든 이후 재희는 자신이 얼마나 잤는지, 또 몇 시간 만에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죽은 듯 자고 있던 재희가 다시 희미하게나마 밖을 인지하게 된 것은 멀리서 들린 문소리 때문이었다. 조용히 닫힌 문소리에 이어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가 서서히 기감에 잡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잠기운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재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층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 쏟아지는 소리도 들었다.
길고 긴 시간 끝에, 그녀가 있는 방문을 여는 기척도 들었다.
재희는 자신의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아주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그러나 비누 냄새 섞인 한영의 체향이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미소를 지었다.
무거운 눈을 떴다.
샤워를 한 건지 아직 젖은 얼굴을 한 한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재희는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눈이 감기고 있었다.
한영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빗소리를 인식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연탄불 살피러.”
“아…….”
“몸은 어때.”
“……괜찮아.”
“괜찮기는 해도 쓰릴 테지.”
“……아니야.”
한영이 조용히 웃으며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무렵에는 잠도 거의 다 깬 상태였다. 한영이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찬물로 씻었는지 몸이 차갑다. 재희는 눈앞에 있는 한영의 숨골을 물끄러미 보다 꾸물꾸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잠투정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한영이 다시 웃었다.
“……한영아.”
“응.”
“……너는 안 힘들어?”
“뭐가?”
그렇게 대꾸하는 목소리에는 언제나처럼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속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을 풀었다. 천천히 손이 내려갔다. 재희의 손이 목적한 곳에 막 닿기 직전, 한영이 중얼거렸다. 아, 그쪽.
“힘들어.”
“…….”
“그러니까 그거 건들지 말아 줄래. 마침 콘돔도 있겠다, 조금 아슬아슬한데.”
“……응.”
재희는 얌전히 손을 물렸지만, 궁금한 것을 참지 않았다.
“……콘돔 샀어?”
“응.”
“그러면 이제 해도 되는 거잖아.”
“아직 아플 텐데.”
“아파도 괜찮은데…….”
그 말에 한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오해하지 마, 재희야. 너 좋으라고 기다려 주는 거 아니야.”
“응……?”
“다신 안 하겠다고 너 도망갈까 봐 이러는 거야.”
재희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별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영이 잔잔히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 이런 놈이라.”
“……그렇게 말하지 마.”
“배려해 주는 척하지만, 결국 가식이라는 거지. 이기적이야. 어떻게든 끝까지 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거니까.”
“……나도 그래.”
“아니. 달라.”
갑자기 한영의 눈이 보고 싶어졌다. 눈을 보고 대화해야 할 것 같았다.
재희는 꿈틀꿈틀 몸을 움직였다. 배를 침대에 댄 채 팔꿈치로 상체를 버텼다. 흐트러진 머리가 어깨와 등으로 흘러내렸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운 한영이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재희는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영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한영은 미소 지었다. 심각해지지 말라는 듯.
“그냥. 걱정이 되어서.”
“무엇이?”
“내가 사실 성적으로 문제가 많거든.”
“……문제?”
“성욕이 조절 안 돼.”
“으응……?”
“스스로 조절을 못 해. 병적일 정도로.”
재희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다 되물었다.
“……네가?”
콘돔까지 사 놓고도 날 방치하는 네가?
“응. 내가.”
“…….”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뭘 요구하든, 다 받아 주지 마. 싫은 게 있으면 나한테 분명히 말해야 해. 힘들어도 말해야 하고.”
재희는 물끄러미 한영을 보았다. 한영은 여전히 평범한 농담을 하듯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조 속에 서린 진지함을 눈치채지 못할 마재희가 아니다.
이한영은 지금, 오빠 역할을 하고 싶은 거다.
그의 당부가 괜한 기우에서 나온 말일 리 없다는 것은 안다. 그것은 한영 스스로가 자신을 잘 파악한 끝에 나온 현실적인 걱정이었을 것이다.
“재희야.”
“……응.”
재희는 한영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재희는 안쓰러운 기분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한영의 턱에 입을 맞췄다. 연약하게 느껴지는 부딪침이 간지러웠을까. 한영이 몸을 틀었다. 두 입술이 닿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한영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감싼 채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온기를 나누는 입맞춤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줄 거니까.”
멀어지는 한영의 입술을 보며, 재희는 속삭였다.
“……그러니까 한영아. 내가 말리기 전까지는, 너도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이한영은 헌신적이다. 어릴 때부터 짐밖에 되지 않던 소꿉친구를 챙기는 데 단 한 번도 귀찮아한 적이 없었다. 그가 표정을 잘 숨기기 때문에 그녀가 모르고 넘어간 걸 수도 있단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재희는 믿고 있었다. 그는 종종 아가페가 없다고 말해 왔지만, 그녀는 아가페가 이 세상에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이부자리 위에서까지 희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서로를 보며 같이 누워 있는 지금 이 순간조차, 한영의 희생임은 분명했지만.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내 말 이해하지 못했네.”
한영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재희는 다시 졸린 것도 같아 뻑뻑한 눈을 비볐다. 한영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누우며 웅얼거렸다.
“……나 원래 말귀도 어둡고, 배우는 것도 느려.”
“재희야,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아니야, 느려. 그러니까 네가 오래 가르쳐 줘야 해.”
한영은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 후 조용히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이마에 닿는 뜨거운 입술을 느끼며 재희는 눈을 감았다. 괜찮았다. 그가 대답을 회피하리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만 자. 내일 일 교시 수업 있잖아.”
“……응.”
그렇게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올 듯, 또 오지 않는 밤이었다.
재희에게는 이한영이라는 불면의 이유가 있었다지만, 다른 이에게는 무슨 이유가 있었던 걸까? 얼핏 잠기운에 빠져들 듯 말 듯 하던 때, 재희는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한영은 마치 전화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재희는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한영이 떠나고 없는 빈방을 보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세 시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사람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장난 전화겠지. 재희는 그렇게 추측하며 눈을 감았다. 잠자코 한영이 다시 침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영은 그녀가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침대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