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재희는 강의실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가을이기는 했는지 플라타너스의 말라비틀어진 잎이 교정을 덮었다. 낙엽을 쓸어 모으는 빗자루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아침에 보았던 한영의 무심한 미소를 떠올렸다.
‘내가 방금 너 추행한 거야.’
섬뜩하고도 아팠던 그 한마디가 계속해서 귓가에 메아리친다. 재희는 먼 과거의 기억으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갔다. 그녀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한영과 상현, 영재는 남중을 다니고 있었고, 재희와 인혜는 여중을 다니던 시절. 그 무렵의 어느 날, 한영은 그녀를 앉혀 놓고 다정한 태도로 신신당부를 했었다.
‘혹시 네게 억지로 손을 대는 사람이 있다면 안 된다고 말해. 네 말을 무시하면 어떻게든 도망쳐서 도움을 청해야 해, 재희야.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만지는 거, 추행이야. 나쁜 거야.’
그리고 한영은 자상한 오빠처럼 말했다.
‘그런 짓을 당했다고 숨기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너는 잘못이 없으니까. 그건 전부, 추행한 쪽이 잘못한 거야. 알았지.’
재희는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라도 너를 추행하는 놈이 있다면 내게 말하라 했던 이한영은 어제, 그녀를 추행했다. 그녀가 그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든, 이한영은 그것을 추행이라 명명했다. 마재희는 싫어하는데, 이한영이 강요한 행위라고.
한영은 그렇게 어떻게든 그녀를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되새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워 가며. 아무리 해도 이한영에게는 안 된다는 것이리라.
마재희는, 도저히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넌 모를 거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어떤 인간인지 확인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강렬했던 감각만큼이나 그 말은 한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자신의 술버릇을 경계하던 한영이었다. 술김에 혹여 소꿉친구의 방에 넘어갈까, 그는 염려하고 있었다. 한영은 자신의 안에 있는 사내의 욕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여, 소꿉친구에게 손이라도 댈까 싶어서. 다른 여자들을 향해 느끼던 욕망을, 소꿉친구에게도 느끼는 것에 결벽적인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과연 기뻐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한영이가 나를 여자로 봐 주기는 한다는 의미이니까?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학생들에게 밟히는 낙엽을 보며 재희는 막연히 느꼈다. 지금 이한영과 마재희의 앞에, 끝을 알 수 없는 몇 갈래의 길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그러나 재희는 그 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갑갑증이 치밀어 고개를 돌렸다. 한영이 앉은 자리를 멀거니 바라본다. 교재를 읽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바른 자세를 보며, 모든 것을 공유했던 어린 이한영을 문득 그리워했다.
“재희야, 소문 들었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신이 속삭여 왔다.
경신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지만, 강의실이 너무 조용했다.
“대환 선배가-.”
재희는 얼어붙은 채 경신의 불안한 음성을 들었다.
무심결에 시선을 들다, 한영을 보았다. 그는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지간히 소문에 둔한 재희가 경신에게 전해 들은 것처럼, 강대환의 소문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모르는 이 없이 캠퍼스에 빠르게 번졌다. 시골에 숨어 있던 강대환이 급하게 거처를 옮겨야 했던 이유가 공공연히 알려졌다. 강대환의 거처를 누군가가 경찰에 밀고했다. 그것이 소문의 골자였다.
운동권 학생들의 동향을 경찰에 전하는 프락치가 학교 내에 상주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배령 때문에 도망 다니던 강대환도, 그 위치를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함부로 말을 흘리고 다니지 않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강대환의 거처가 유출되었다.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이, 교내에 없었다.
“누가 강대환을 경찰에 넘긴 거야?”
“누구야?”
“어떤 배신자 새끼야?”
그런 씨근거림이 공공연하게 학생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나마 수업에 출석한 이들조차 제대로 강의에 집중하지 못한 오전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가혹하지만 공평하게 흐르고, 일상은 이어져야 했다. 재희는 배가 고프다는 사실에마저 깊은 우울을 느꼈다. 경신과 본관에 있는 식당으로 향하는 중, 문득 복도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경신이 고개를 쑥 빼고 기웃거렸다.
“무슨 일이야?”
“몰라. 여기 우리 부실인데…… 문까지 걸어 잠그고 싸우나 봐.”
복도 앞에 있던 이들 중에 경신과 아는 이가 있었는지 머리카락을 꼬며 답했다.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거들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이 형, 문 딸 수 있어요?”
“안에 있는 게 누군데?”
“양호명. 그리고 이재석.”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재희는 물론 경신도 머뭇거렸다. 양호명과 이재석이라면 그들의 학과 선배들이었다. 그들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재희가 막 하던 찰나였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면 되잖아!”
문 너머에서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에, 복도에 있던 이들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재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들었다. 외침 뒤에 타격 소리가 뒤따랐다.
“……야, 문 열어. 너희 설마 치고받고 싸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그렇게 외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이재석이었다. 볼 한쪽이 시뻘건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재석은 괜찮냐고 묻는 학생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복도를 걸었다. 그가 재희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양호명이 씩씩대며 뒤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야! 이재석!”
재희는 시뻘게진 양호명의 눈을 잠시 보다 몸을 돌렸다. 대답도 없이 멀어지는 이재석의 등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목격한 재희는 그저 잠깐의 해프닝으로 넘긴 사건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녀가 본 사건은 악질적으로 변질되어 캠퍼스를 휩쓸었다. 재희가 보기에, 무서울 정도로 질 나쁜 소문이었다.
강대환을 경찰에 넘긴 프락치가 이재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으니까.
“말이 돼? 이 형하고 강 형이 얼마나 친했는데.”
사정을 잘 아는 국문과 학생들은 대부분 그렇게 헛소문으로 치부했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중 몇몇은 의심하는 눈길을 기어코 이재석에게 보냈다. 강대환의 거처를 알고 있을 법한 인물 둘이 싸웠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모양새였으니, 음모론을 좋아하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까.
재희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강의실에 앉은 이재석을 보았다. 모두가 바짝 긴장해 이재석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이재석은 얼굴이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야, 이재석. 말해 보라니까?”
이재석이 앉은 책상에 걸터앉은 한 선배가 껄렁거리며 물었다. 풀어진 자세와 달리 눈빛이 형형했다.
“알리바이라도 대는 성의를 보여야 우리가 널 믿지.”
이 상황을 주동하는 선배는 사납기로 유명한 이였다.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는 이 앞에서, 모두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다른 이들과 달리 숨죽이고 있지만은 않았다.
“……알리바이라니. 그 단어를 강의실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네.”
낮은 목소리가 그렇게 강의실에 울리자, 강의실에 있던 모두가 홀린 듯 한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영의 냉담한 입술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열렸다.
“졸업하고 나랏밥 먹는 건 어때요, 장 형. 이제 보니 영락없이 공안 쪽이신데.”
“이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반발하는 복학생 선배의 어깨를, 다른 선배가 잡아 말렸다.
“야, 적당히 해! 재석이 몰라? 삼 년 전에 같이 제적당해 놓고도, 의심할 놈이 따로 있지. 재석이가 프락치가 웬 말이야. 어?”
재희는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입술만 깨물었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가던 한영이 문가에 멈춰 서는 것을 분명 보았다. 그가 그렇게 강의실 안의 상황을 지켜볼 때, 상황을 깨달은 눈빛이 점차 서늘히 식어 가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한영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재희의 초조함과 달리, 한영은 태연히 웃고 있었다.
“이재석 선배님.”
이재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왜.
한영이 정중하게 미소 지었다.
“심 교수님이 부릅니다.”
“……어.”
그렇게 그들은 강의실에 앉은 시선들 속에서 벗어났다.
재희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곧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영이 걱정되어서가 주된 이유이기도 했지만, 이재석 때문이기도 했다. 이재석이 프락치인지 아닌지 그녀는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실하지도 않은 혐의로 선후배가 모두 보는 앞에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그건 옳지 않다. 재희는 미묘한 죄책감을 느끼며 복도를 나섰다.
재석과 한영은 그새 멀리도 가 있었다.
그들은 계단 층계참에 서 있었다. 이재석이 무기력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고, 잠잠히 서 있던 한영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거리가 있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재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곧 그들은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둘 다 계단을 밟지 않았다. 심 교수의 연구실은 두 층을 더 올라가야 했는데도.
재희는 멀어지는 한영의 등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다정한 이한영.
그래도 자신을 아끼면서 남들에게 다정했으면 좋겠는데.
“재희!”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단을 걸어 올라오던 상현이 마침 손을 붕붕 흔들어 왔다. 재희도 우울을 누르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 * *
이한영은 흡연자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담배 피우는 것은 꺼리는 이였다. 그런 그가 학교 내에서 흡연할 수 있는 공간은 몇 없었고, 상현은 그 장소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 탓에 상현은 종종 한영의 애연 현장을 목격하곤 했지만, 그런 그로서도 지금 같은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만사 단정하고 빈틈없던 이한영이, 벤치에 늘어지듯 기대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광경은.
하늘과 수평을 이룰 듯 목을 꺾고 있는 한영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간간이 한영의 입술 사이로 나른히 흘려보내는 연기가 얼굴 위로 아른거리다 흩어진다.
저러면 목도 안 아프나.
상현은 궁금했지만, 어쨌든 그림은 좋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깊은 눈매에서 턱선, 그리고 남성적인 목울대까지 떨어지는 선이, 상현의 입으로는 낯간지러워 죽어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예술적이었던 것이다. 그 입술에 물린 담배까지도.
그러나 상현은 미의식 자극하는 저 낯짝 아래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안다.
“……발정 났네. 발정 났어.”
예술이긴 예술이되, 퇴폐 예술일지니.
상현은 혀를 쯧쯧 차며 걸음을 옮겼다.
“한영아, 너 지금 건전해야 할 학교 분위기를 다 흐려 놓고 있어. 당장 그만둬.”
다가가며 그렇게 농담을 던지자, 한영의 시선이 흘낏 상현에게 닿았다. 그렇게 담배를 문 채 미소를 흘리는데- 순간 상현은 소름이 돋아 목을 벅벅 긁었다.
세상 사람들, 눈이 다 삐었지. 저게 어딜 봐서 모범생이야?
“무슨 일이야?”
상현이 묻고 싶은 말을, 한영이 자세를 바로 하며 먼저 묻는다. 담배를 끄는 단순한 행동이 기가 막히게 우아해 보인다.
상현은 다시 혀를 차며 한영의 옆에 앉았다.
“내가 뭐 일이 있어야 찾아오나.”
“일이 있어 찾아온 얼굴인데.”
“야박하네. 나 그런 놈 아니다, 한영아.”
한영이 웃는다. 평소와 같은 웃음이었는데도, 상현은 다시 느꼈다. 한영의 기분이 보이는 것만큼 평온한 것은 아님을.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아니.”
상현은 잠시 의문을 품었다. 약속이 없다고? 이상하네. 아까 복도 계단에서 재석 선배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을 때는 분명-.
“왜?”
“……아, 음, 같이 자장면 시켜 먹을까 했지. 재희도 나가고 혼자일 텐데.”
“재희가 어딜 나가?”
엇. 상현은 찔끔해 한영의 눈치를 살폈다. 재희가 말을 안 했구나. 아이고.
“음…… 재희 오늘 데이트하러 갈 거야. 전에 미팅한 상대하고.”
“그랬구나. 몰랐네.”
그렇게 대꾸하는 한영은 그저 그러냐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
상현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목을 벅벅 긁다가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어쨌든 그러니까, 오늘 단둘이서 오붓하게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제안은 고마운데, 혼자 먹을게. 교수님이 맡긴 일이 있어서.”
몇 번이고 권유했지만 한영은 부드럽게 거절했다.
상현은 결국 더 권하지 않고 짐짓 삐친 듯 몸을 일으켰다. 속으로는 자신에게 감탄하면서였다. 좋았어. 아주 자연스러웠어.
그러나 그때, 한영이 말끔한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상현아.”
“어?”
“너, 다른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다른 생각? 뭐를?”
그렇게 태연히 반문하면서도 상현은 내심 낭패감을 느꼈다. 저 무당 같은 자식.
독실한 천주교인 할머니 밑에서 자란 한영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상현은 가끔 의심하곤 한다. 이한영에게는 신기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됐고.”
한영이 무심히 웃으며 새로 꺼낸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상현이 멀어지면 그대로 불을 붙이려는 모양새였다.
상현은 평소처럼 농담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조용히 등을 돌렸다. 한순간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이한영의 기분은 지금, 최악이다.
“……나 참…….”
저렇게 줄담배를 피울 정도로 괴로운 거면, 그냥 붙잡으면 되지 않나.
상현이 보기에, 이한영은 오늘 있을 재희의 데이트 약속을 반기지 않는다. 사실 상현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영이 재희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의심해 왔다.
그것은 남자란 족속에 대한 동질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어 얻을 수 있는 추측이었다. 아니, 세상 어느 남자가 소꿉친구 저녁상 차려 주겠다고 본인 데이트를 마다해? 상현이나 영재, 그리고 심지어 인혜에게조차 그건 얼토당토 않는 상황인데, 재희와 한영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 반복해 왔다.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했다. 그 특별함은 상현이 보기에, 사랑이었지만-. 그것은 어떻게 해도 추측이고 의심일 뿐, 확신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이한영의 탓이 컸다. 일부러 재희가 미팅하기로 한 장소와 가까운 곳의 식당을 예약해 주었을 때도, 술자리에서 ‘이제 남자 친구 생기면 재희도 병아리에서 닭이 되는 거냐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영 질 나쁜 농담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영은 남 일 듣듯 웃고만 있었다. 아마 재희가 다른 남자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을 보았다 해도, 그렇게 웃고만 있었을 거다.
상현은 그런 한영에 놀라면서도, 납득했다. 때때로 한영은 무서울 정도로 재희에게 냉정할 때가 있었으니까. 예전에도 그런 적 있었잖아. 중학교 삼 학년 때였나? 당시에 영재가 아무 생각 없이 한영과 재희에게 둘이 부부 하면 되겠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한영이 뭐라고 했지?
상현은 골머리를 꾹꾹 누르며 기억을 떠올렸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했나?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했나? 어쨌든 평소처럼 부드럽게 대꾸한 한영이었지만, 상현은 그때 분명히 느꼈다.
이한영이 진심으로 몸서리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시 재희도 그것을 눈치챈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희가 옴짝달싹 못 하고 한영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는, 어쩌면- 그때 일이 마음 깊숙한 곳에 상처로 자리 잡았던 걸지도 모른다.
“……요 답답한 것들. 내가 나서 줘야 하지, 꼭.”
이럴 때가 아니지.
상현은 서둘러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집에서 대기하고 있을 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인혜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상현은 쏟아 내듯 말했다. 어, 나야. 한영이 집에 있을 거래. 근데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몰라도 한영이 잠깐 집 비울지도 모르겠는데? 어? 여자 아니야, 한영이가 선배하고 복도에서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거든. 얘가 그동안 선배가 따로 부르는데도 무시했나 봐. 더 무시하면 곤란해질 거라고 선배가 경고하던데? ……에이, 진짜, 여자 아니라니까. 어. 나도 한영이 속을 몰라 걱정이긴 한데……. 인혜야, 그게 왜 내 탓이냐. 술을 그렇게 먹였는데도 그 독한 새끼가 끄떡도 안 하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러니까 인혜야, 어제 너희 집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네가 재희 좀 꼬드겨 봐. 어? 둘이 계속 헛발질하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 * *
거절을 하려 했다. 재희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상현이 알려 준 전화번호를 누를 때까지만 해도 그럴 작정이었다. 여전히 한영의 속을 모르고, 그럼에도 한영이 그녀에게 곁을 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은 누구보다 잘 알았어도- 재희는 미팅 상대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단 한 번 본 그 남자가 얼마나 순진하게 떨림을 보이고 있었는지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팅 상대는 그런 재희를 마치 잘 아는 것처럼 부탁을 해 왔다.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 더 만나 보지 않을래요? 거절은 그 자리에서 듣겠습니다.
재희는 그 부탁마저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저녁 약속이 잡힌 건데, 아무래도 인혜가 오해를 한 듯하다.
“아주 좋아. 고혹적이야.”
재희의 뒤에 서 있던 인혜가 비장히 말했다.
“기죽지 마, 재희야. 아주 좋아.”
재희는 물끄러미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몸매를 고스란히 따라 그리는 흰 원피스가 낯 뜨겁다. 흰 피부에 어울리는 것 같지만,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치마선이 불안하다. 얼굴을 뒤덮은 진한 화장도,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인혜 손에 끌려 얼결에 뚫었던 귀에 걸린 귀걸이도, 모두 낯설고 거북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그건 그런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걸 해 봐?”
인혜가 생글생글 웃었다.
재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래도 인혜가 인형 놀이가 하고 싶었나 보다.
“약속 장소는 어디야?”
“아…… 근처까지 온대.”
“어머, 겉핥기식으로만 예의 차릴 줄 아는 누구와 다르게, 정성이 넘치네?”
“……착한 사람인 것 같기는 했어.”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재희는 말 속의 ‘누구’가 누구인지 몰라 묻는 시선으로 인혜를 보았다. 그러나 인혜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재희야, 상현이는 서로 좋아하면 장땡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난 달라. 자길 가장 좋아해 줄 사람을 만나는 게 최고야.”
“……응.”
“여자만 조신해야 하는 거 아냐. 남자도 조신해야 하거든.”
“……응?”
“얼굴 뺀질뺀질한 놈들치고 얼굴값 안 하는 놈 없으니까, 겉모습에 혹하지 말고, 알맹이를 보는 거야. 알았지.”
“……아, 응.”
재희는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혜는 지금 진지했다. 미팅 상대가 그녀와 맞지 않을까 걱정해 주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재희야.”
“응.”
“마음 가는 곳으로 가는 게 정답이긴 해.”
“…….”
“애초에 따라갈 마음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축복이야. 그런 마음이 생각보다 쉽게 생기지 않거든.”
재희는 그 순간 한영을 떠올렸다.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는데도.
전혀 시도해 보지 않은 옷차림의 파급 효과는 컸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 내내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재희를 불렀다.
“세상에, 재희야. 너무 예쁘다.”
“데이트 가니? 우리 재희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나?”
관심이 이어지는 내내 재희는 어떻게든 웃으려 노력했다. 속은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인혜의 것이었다.
‘네가 지금 만나러 갈 상대가 누구인지 나는 모르지만…… 너무 주변 상황 살피지 말고, 마음을 따라가. 그래도 아무도 널 비난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배웅하던 인혜는 알고 있을까. 재희는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인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그러니 그때 인혜에게 모르는 척 조언을 구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 경우에도- 마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냐고.
“……기적이고, 축복…….”
저 멀리서 버스가 서행하며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재희는 같은 단어들을 몇 번이나 읊조렸다. 기적, 축복. 찾아오기 힘든 순간.
‘……재희야.’
그 속삭임이 기억 속에서 돌연 튀어나온 것도, 어쩌면 기적이었을까?
재희는 우두커니 선 채 눈을 감았다. 나직이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를 떠올린다. 술에 취해 있었던 이한영이다. 술기운에 억눌려 있던 본능적인 욕구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새어 나왔을, 그 순간. 그때 한영은 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재희야.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뜨거운 숨으로, 마재희를 불렀다.
재희는 조용히 눈을 떴다. 버스는 이미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버스 안내원과 눈이 마주쳤다. 안 탈 거냐고 묻는 무관심한 눈빛이었다.
굳어 있던 다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그녀의 등을 밀어 주고 있었다.
버스를 뒤로한 채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 들어갔다.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약속을 취소하는 이유에 그럴싸한 변명을 댔는지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만큼, 돌아오는 길은 짧았다.
“…….”
“…….”
문을 열어 준 한영은 말이 없었다. 문 앞에 버티고 선 재희도 쉽게 말문을 떼지 못했다.
재희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들어가도 돼?”
그의 집에 들어가며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한영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의중을 살피려는 기색도 없었다. 한영은 마치 그녀가 올 것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렇게 일어날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담담해 보이면서도- 재희는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선 이한영은 더 물러날 곳 없는 절벽에 있었다. 그녀가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온다면, 금방이라도 뒤에 있는 낭떠러지로 고꾸라질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한영이의 입가에 천천히 피어오르는 저 미소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영은 그렇게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곰 인형.”
모든 정신력을 한영에게 쏟아붓고 있던 재희는 그 말속에서 희미한 자조를 읽었다. 그러나 그녀는 확신하지 못했다.
한영이 어디까지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웃고 있지 않나. 더없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그러니 자조는 아닐 것이다. 재희는 혼란스러워 눈을 깜빡일 때였다.
한영이 흘끗, 그녀의 뒤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대문 밖 인기척을 잠시 주시하더니, 곧 그녀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가며, 재희는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왜 돌아왔어. 약속 있다며.”
재희는 등에 닿는 문을 느끼며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현관에 그대로 그녀를 세워 둔 채, 한영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웃었느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함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괜찮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다.
“……너한테 부탁할 거 있어서.”
“뭐를?”
“……나 그거 가르쳐 줘.”
한영이 고요히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거’의 의미를 묻는 시선은 아니다. 그저 기다리는 시선이었다.
재희는 초조해졌다. 두려웠다. 이게 옳은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제 네가 해 준 거…… 네가 추행이라고 했던 거.”
“…….”
“……그거 가르쳐 줘. 나한테.”
“…….”
“우리 원래부터 그랬잖아. 내가 모르는 거 있으면, 네가 다 가르쳐 줬어. 내가 ‘처음’이라 헤매는 게 있으면…… 네가 다 하나하나 알려 줬잖아.”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의 상의 밑단을 잡았다. 마스카라로 올린 속눈썹이 문득 무거워 재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말고 너한테 배울래.”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란다. 따라갈 마음이 있다는 건 기적이고 축복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 한영이 조금이나마 응해 줄 여지가 있다는 것 또한, 기적이자 축복이다.
그녀는 짙게 화장한 얼굴을 더듬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머뭇거리며 올려다보는 재희의 풍성한 속눈썹에서, 새빨갛게 칠한 입술 위에서 한영이 얼마나 느리게 시선을 떼어 내는지- 이제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느긋한 시선이 기갈을 의미함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둔한 마재희에게 천운처럼 떨어진 기적임을 알고 있었다. 이한영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녀가 원하는 감정의 결과 다르다고- 그 천운을 놓칠 수는 없었다.
“……네가 아니면, 싫어.”
나는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서서히 스며들어 가는 사랑은 내게 아무 의미도 없다. 네가 아니니까. 널 둘러싼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는 안다. 왜 마재희는 안 되는지. 왜 마재희가 이한영에게는 친구이자 여동생일 수밖에 없는지. 그 답을 몰라도, 나는 이 기적을 놓칠 생각이 없다. 아무리 비틀린 관계라도.
“……넌 예전부터 그랬어.”
그때 한영이 입을 열었다.
“그랬지. 똑똑했어.”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명징한 발음은 희미한 웃음기를 묻히고 있었다. 한영이 한 발자국 걸어 나오며 미소 지었다.
재희는 머뭇거리다 답했다.
“……나 안 똑똑해.”
“아니야, 똑똑해. 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보다도 먼저 알아차렸어. 내가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은 이제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
“…….”
“그래서 묻는 건데, 재희야.”
“……응.”
한영이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재희는 거의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했다. 심장은 어느샌가 요란히도 뛰고 있었다. 등 뒤에 맞닿은 대문의 차가운 온도가 의식에서 멀어졌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한영의 미소와 익숙한 체취, 뜨거운 몸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재희는 한영의 목울대를 보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상한 미소를 띤 채, 한영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가르쳐 준다고, 우리가 변할까?”
놀랍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영이 물었다.
“우리 관계가 앞으로 변하게 될까?”
그녀는 떨리는 눈을 들어 한영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동자가 다정하기만 했다.
재희는 슬퍼졌다. 그러나 괜찮다고, 속으로 되뇌며 답했다.
“……아니.”
“그래도 몸을 섞는 일인데,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안 그래.”
“몸 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어.”
“사랑 안 할게.”
“…….”
“오해 안 해. 착각도 하지 않을 거야.”
변하는 건 없을 거다.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것이라면.
재희는 담담한 척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영의 입가에 느릿하게 번지는 미소가 어지럽다. 웃고 있는데, 또 조금도 웃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그는 속삭였다. 똑똑하기도, 라고.
그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슬쩍 밀린 몸이 문에 부딪혔다. 퉁, 하고 미약한 소음이 울렸으나, 재희는 눈을 감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영의 입술도, 그랬다.
버스 정거장에서 발을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가을을 지난 하늘은 금세 해를 넘어트렸다. 붉은 석양의 빛이 한영의 집 거실을 지나 현관까지 들어오는 동안, 내내 한영과 입술을 부딪쳤다.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밀린 머리가 슬쩍슬쩍 대문에 부딪히자, 언제부턴가 한영은 그녀의 목에 손을 감싸 주었다.
머리를 감싸 줄 여유를 부릴 정도로 한영은 느긋했지만,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조금도 급하지 않은 것처럼 부드럽게 입술을 물고 빨았지만, 그녀가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혀를 움직였다. 혀와 혀가 서로를 옭아매고 파고드는 것을 반복할 즈음, 재희는 헐떡이며 그것을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배움은 더뎠다.
“……천천히 해 줄까.”
입술을 떨어뜨린 한영이 느긋이 물었다.
재희는 가쁜 숨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햇빛이 그의 얼굴 반쪽에 물들어 있었다. 노을에 젖은 그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올라온다. 그 움직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재희야.”
“……괜찮아.”
한영이 미소 짓는다. 재희는 자신의 볼에도 석양의 빛이 앉아 있기만을 바라며 눈을 내리떴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물어 주고는 떨어졌다.
뒤로 물러나는 한영은 아쉬움에 차 보았다. 그가 그녀를 잠잠히 주시하며 손을 뻗었다.
재희는 부드럽게 끌려가는 팔을 보다 걸음을 뗐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에 한영이 슬며시 웃는다. 구두도 신었냐고 신기해하는 걸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한영에게 이끌려 집으로 들어왔다. 스타킹 신은 발에 닿는 방바닥은 찼다. 붉은빛이 거실 가득히 퍼져 따듯해 보이는 광경과 사뭇 달랐다.
한영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재희는 우두커니 멈춰 선 채 한영을 바라본다. 그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표범의 유연함을 닮은 움직임이었다. 도약을 준비하는 짐승의, 날 것 같은 움직임.
포식 동물이 그러듯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두 팔을 엇갈려 걸치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낱장의 옷이 툭 바닥에 던져지는 순간을 재희는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청바지 하나만 걸친 채 한영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의 부드러움과 별개로 드러난 상반신은 부드럽지 않았다. 각진 선이 예리하게 흐르고, 두툼한 근육으로 들어찼다.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듯 역동적인 선이었다. 날 선 긴장감이 흐르는 몸이었다. 멍한 와중에도 재희는 부지불식간 깨닫는다. 이한영의 얼굴과 달리 그 몸은 글과 가깝지 않다. 원시림 속에 있어야 하는 몸이다.
“재희야.”
재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영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길게 뻗은 남성적인 목 줄기가 아름답다는 감상이나 떠올리는 그녀 앞에서, 그는 말했다.
“혼자만 감상하면 안 돼, 재희야.”
“…….”
“같이 봐야지.”
한영이 자상히 웃는다. 그러나 그 눈동자마저 자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뇌리로 곧장 밀고 들어오는 시선이었다. 물리적인 장벽이나, 정서적인 거리감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해체하며 들어오는 눈빛.
떨리는 손을 들었다. 스타킹이 먼저였다. 다음이 걸치고 있는 원피스였다. 겨드랑이에서 골반 선까지 길게 이어지는 지퍼를 천천히 풀어 내렸다. 골반을 스치는 손에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원피스가 조금씩 흘러 내려가 가슴골을 드러냈다. 어깨에 엉성히 걸치고 있던 원피스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한영의 시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한 하얀 피부 위를 한영의 시선이 찬찬히 누볐다. 그 시선 앞에서는 무엇이든 숨길 수 없었다. 떨리는 몸은 물론, 재희가 걸친 흰 브래지어와 얇은 팬티마저.
재희는 가슴골을 팔로 감쌌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가슴이 부끄러웠다. 브래지어로도 숨기지 못하는 가슴을 보고 한영이 무슨 생각을 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숨겼다.
“괜찮아, 재희야.”
한영은 그녀의 불안을 눈치챘던 것일까? 감상하듯 지켜보던 그의 시선이 결을 단숨에 바꿨다. 그녀에게 다가오며 한영은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는 몰라도 재희는 뛰던 가슴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 것을 느낀다. 한영이가 괜찮다면, 정말 괜찮은 거니까. 조심스레 가슴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맹목적인 눈으로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서서 볼을 감쌌다. 달래는 눈빛인데, 그 손길은 걷잡지 못하는 화마 속에 갇힌 것처럼 뜨거웠다.
소파에 먼저 앉은 것은 한영이었다. 재희는 그의 이끌림에 그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그 자세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으나, 더한 것이 바로 이어졌다. 한영이 그녀의 등을 잠시 쓸어내린다 싶더니, 브래지어가 툭, 풀렸다. 재희는 그 소리에 한 번, 아무렇지 않게 속옷을 끌어 내리는 한영의 대담한 손길에 두 번 놀랐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데.”
속옷이 몸에 맞지 않게 작다고, 한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그리고 그녀와 시선을 맞춘다. 이유를 묻는 시선이다.
재희는 한영이 보이는 순수한 걱정 앞에서 잠시 긴장이 풀려 가는 것을 느꼈다. 다리 사이를 가리는 속옷을 제외하고 모든 살갗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은 어느새 인식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작은 게 좋아.”
그러자 한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플 텐데. 왜?”
재희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 쳐다봐.”
한영이 물끄러미 재희를 본다. 재희는 자신이 뭔가 못 할 말을 한 건가 했다. 한영의 눈동자 속에서 미묘한 비틀림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담담한 듯 고요하던 이한영의 눈 속에, 열상과도 같은 일그러짐이 잠시 일었기 때문에.
그러나 한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그런 한영을 빤히 주시했다. 그녀는 한영이 순간적으로 드러낸 감정을 추적하고 있었다. 한영은 일순 분노했다. 그 감정이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감정에 집중하고 있어서.
“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한영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가슴을 조이면 몸에 안 좋아.”
“……아, 잠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따라가지 못한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한영은,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였다.
“……봐. 피부에 자국 남았잖아.”
그의 혀끝이 브래지어의 철골이 짓눌렀던 가슴골 안을 건드린다. 그는 양 가슴을 부드럽게 잡아 벌린 채 그곳을 핥고 있었다. 마치 상처 입은 어린 새끼를 위로하는 어미 짐승처럼.
그러나 핥아지는 입장에서는 달랐다. 재희는 헐떡이며 목을 뒤로 젖혔다. 정중한 듯 연약한 것을 대하듯 가슴을 쥔 손길이지만, 본래의 목적마저 잊은 손은 아니다. 마사지라도 하듯 주무르다가도, 한영은 가슴의 유실을 엄지로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재희의 허리가 튀었다.
잠시 방심했던 몸에 급작스럽게 불이 붙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입지 마.”
자상한 어조로 흘린 말과 어울리지 않게 가슴을 애무하는 손길이 음란하다. 한영의 뜨거운 숨결이 때때로 피부를 간지럽혔다. 간지럼이 소름마저 일으켜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한영의 왼손이 천천히 허리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의 입술은 이제 왼쪽 가슴 아래를 빨고 있었다. 속옷에 눌려 마치 팬 듯 자국이 남은 살결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주고 싶은 것처럼. 그러다가도 그는 이를 세웠다. 그의 코를 짓누를 듯 출렁이는 가슴을 물었다. 거리낌 없이 능선을 핥으며 올라온 입술이 유두를 빨았다. 재희는 자지러졌다.
몸부림처럼 느껴졌는지 한영이 재희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오른쪽 가슴을 쥔 손은 이미 단단히 자리 잡은 채였다. 그녀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영이 입을 조일 때마다, 그의 어깨에 실린 재희의 손끝이 움찔움찔 곱아들었다. 재희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양손을 한영의 어깨에 올렸다. 또 그의 머리를 감쌌다.
헤매는 모습이 안타까웠던가. 그는 선생 노릇을 해 주기로 한 말을 잊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손이 가야 할 방향을 잡아 주었다. 한영에게 잡힌 손이 천천히 한영의 가슴과 배를 쓸고 내려간다. 굴곡과 단단함, 뜨거움이 공존하는 피부를 지나, 종래에는 청바지 위로.
데님의 거친 질감 너머, 단단한 질량을 재희는 느꼈다.
“……아…….”
재희는 숨을 흐트러트리며 한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재희의 가슴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꺼내 봐도 돼.”
“……내가?”
한영은 웃으며 상체를 소파에 기댔다. 가슴을 괴롭히던 두 손이 천천히 허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한 손으로는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흐르듯 더듬었다. 손바닥에 닿는 살의 감촉이 마음에 든 것처럼, 만족하는 눈으로 몇 번이나 부드럽게 쓸었다. 재희는 난처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그것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어떻게 열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만큼 바지는 팽팽했다.
바지 안에 뭘 넣어 뒀기 때문에 이렇게 터질 것 같으냐는 질문만큼은 하지 않았다. 관찰하듯 주시하는 한영의 시선 앞에서 안쓰럽게 몸을 떨면서도 손을 뻗었다. 미약한 흥분이 호기심과 함께했다.
청바지의 단추를 풀고, 지퍼를 조심스레 내렸다. 쉽지 않았다. 검은 속옷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안도의 한숨을 흘릴 정도였다. 그것을 지켜본 한영이 나직이 웃는 소리를 흘렸다.
재희는 확인을 구하듯 한영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온화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심하고 그의 속옷을 끌어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아…….”
툭, 튀어나오는 남성에, 재희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처음으로 마주한 괴이한 형용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일차적인 사고로는 그것은 이상해 보였다. 바지와 속옷에서 해방되자마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한영의 아랫배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손목만 한 굵기와 거대함이었다.
흉흉하다.
단 한 번도 한영을 대상으로 빗대 본 적 없는 형용사가 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렇게 큰 것을, 나는 어떻게 여태까지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거지?
재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원래 다…… 이런 거야?”
“글쎄. 다른 사람 것을 주의 깊게 본 적이 없어서.”
“……영재하고 상현이랑 목욕탕 가 봤잖아.”
“지금 그 말은 걔네들 아래가 궁금하단 소리지?”
한영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본다. 짓궂게 놀리는 눈빛이다.
재희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질색하며 진저리 치는 것처럼 보였는지 한영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린다. 내심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그 소리 앞에서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한영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가 놀라고 두려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거든.”
“…….”
한영은 제 성기에 관한 농담을 던진 것처럼 무심히 웃었다. 그녀의 피부에 감탄하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이미 그 말속에 숨은 미묘한 감정을 느낀 후였다. 따라 웃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낯설어서 그래. 네 거 하나도 안 무서워.”
“그래?”
“응.”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재희는 진지한 눈으로 한영을 보며 속으로 못다 한 말을 건넨다.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줘도, 좋아하고 기뻐할 거야.
“……보여 줘서 기뻐. 보다 보니까 귀엽게 생겼어.”
그러나 한영은 그녀의 진심보다 무심히 던진 칭찬에 반응했다.
“귀엽다고?”
한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희는 그 말이 왜 한영을 웃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거짓말이 티가 나서 그런 걸까? 아무리 봐도 귀여움과는 거리가 먼 한영의 성기를 진지하게 내려다본다. 칭찬할 다른 말을 모색했다. 잘생겼어? 건강해 보여? 이걸 뭐라고 좋게 표현해야 하지?
한영이 웃음기를 죽이지 못한 얼굴로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흐르는 물을 닮은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소파 위에 흐트러트린 채 누워 있었다. 고작해야 눈 한 번 깜빡일 찰나였는데, 한영이 그녀의 위에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 일단 무섭지는 않단 소리니까. 다행이네.”
“……으응.”
한영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소하고도 친밀한 애정 표현에 설렌다. 문득 솟구치는 행복감에 재희는 가만히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다음이 무엇인지 몰라도 자꾸 기다리는 마음이 생긴다.
재희는 손을 뻗어 한영의 허리를 잡았다. 그 손길을 느낀 한영이 눈을 휘며 웃는다. 재희는 더 참지 못하고 볼을 붉혔다.
그녀의 허벅지를 옆으로 벌리면서도, 한영은 정중해 보이는 웃음을 띠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말해 줄래.”
“뭐를……?”
그때 한영이 몸을 붙여 왔다.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누르는 감촉에, 재희는 헐떡이며 신음을 흘렸다. 뻣뻣하게 선 성기가 정확히 속옷 너머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명확한 방향 지시였다. 한영이 그대로 허리를 느긋이 흔들며 웃었다.
“그때도 귀엽게 보이는지.”
“아…….”
속옷과 살덩이가 문질러지며, 질퍽한 소리가 났다. 한영이 미소 지었다.
재희는 그 순간 깨닫는다. 그 미소는, 미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자제하고 있음을 스스로 되짚는 통제의 행위다. 말을 붙이며 시간을 끌고, 농담을 해 어떻게든 긴장을 풀어 주던 이한영의 자제력이자 배려심이다.
불쑥 치솟는 애정을 못 가누고 그녀는 손을 뻗었다. 한영은 매달려 오는 여체 앞에서까지 인내하진 못했다. 으스러트릴 것처럼 그녀를 안았다.
입을 맞추기 전 본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 * *
사위가 어두워졌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깜깜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창밖에서 어렴풋이 들어오고 있기는 했으나 부족했다.
시각이 차단되자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진다. 한영의 숨소리, 그가 가끔 흘리는 희미한 웃음소리, 목 안으로 삼키는 낮은 신음, 살과 살이 맞닿고 부딪치는 소리, 그의 체취. 피부로 바로 접해지는, 한영의 손과 입술, 혀.
한영은 더 이상 그녀를 배려해 주지 않았다. 양보도 없었다. 일관된 느긋함으로 그는 재희의 가슴을 물고 빨았다. 재희는 한영이 그녀의 가슴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그의 여유 넘치는 집요함으로 깨닫는다. 유두는 이미 화끈거린 지 오래였다.
한영이 다른 곳에 관심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입술을 비롯해 목을 지나 가슴에 이르기까지 한영의 관심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유로우면서도 부단한 흐름으로, 한영은 그녀의 팔과 다리, 허벅지를 만졌다. 마치 윤곽과 촉감으로도 기억에 새기려는 것처럼, 빈틈없는 관찰이자, 탐색이었다.
재희는 그 모든 순간에 헐떡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가끔 참기 힘들 때는 한영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한영을 미소 짓게 했다. 그녀도 무엇을 참을 수 없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몸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쌓이듯 고여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욱신거리는 감각과 함께, 재희는 자신의 다리가 저절로 열리는 순간을 몇 번이고 겪었다. 그녀의 몸은 기다리고 있었다. 재희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애타게.
“한영아…….”
한영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지는 팬티를 느끼고, 재희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음모가 드러난 자신의 밀지가 보이는 동시에, 그 위로 드리운 한영의 몸이 보였다.
아…….
재희는 탄성을 흘렸다. 한영은 어느샌가 바지를 벗었다. 속옷조차 걸치지 않고 있었다. 탄탄한 허벅지와 이어지는 아찔한 치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홀린 듯이 그의 거웃과 성기를 본 재희는 가빠지는 숨을 고르고 내쉬었다. 이미 푹 젖어 있던 천 조각에 불과한 속옷을 한영은 부드럽게 그녀의 발끝에서 빼 갔다.
소파 아래로 속옷을 떨어트린 한영은 마치 보란 듯이 그녀의 허벅지를 더 활짝 벌렸다. 공기 중으로 드러난 밀지에 재희는 눈을 꾹 감았다. 한영의 시선이 그녀의 음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만져 주려고 하는 걸 거야.
재희는 부끄러움에 온몸을 붉히고도 그런 예상을 했다. 어제 주방에서 만져 주었던 것처럼, 그 기분 좋은 곳을 다시 애무하려고-.
이미 한번 겪어 본 감각을 기대하는 몸이 잘게 떨렸다. 그때였다. 한영이, 그녀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은.
“아……!”
자지러지며 재희는 허벅지를 떨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재희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한영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한영, 한영아, 안…… 안 돼…….”
눈물마저 났다. 부끄러움에 그녀가 아등바등 다리를 허덕이는데도 한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걸스러운 입심이 그녀의 샅을 다시 한번 담았다. 재희의 신음은 이제 비명을 닮아 있었다. 너무 큰 자극이었다.
“더러, 더러워…… 나, 거기 더러운데…….”
그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한영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안 더러워. 그리고 그 다정한 한마디가 전부였다. 한영은 무례한 혀를 계속해서 놀렸다.
기어코 뻐끔거리는 음순을 가르고 들어간 그의 혀에, 재희는 충격에 휩싸였다.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한영의 손이 먼저였다. 단지 팔 하나만으로, 그는 그녀를 그렇게 쉽게 제지했다.
“한영아, 한영…… 아.”
“괜찮아.”
다리 사이를 핥는 혀가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 왔다 빠져나간다. 적나라한 혀의 놀림이었다. 손가락 대신에, 그는 혀로 그렇게 그녀를 함락시키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재희는 한영의 욕심이 이렇게 은밀한 곳까지 놓치지 않고 닿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간신히 들었다. 다리 사이에 파묻힌 한영의 머리가 보였다. 재희는 흐느끼듯 말했다. 제발. 싫어. 한영아.
“……싫어?”
싫다는 말에 한영이 반응했다. 조용히 고개를 든 한영은 입술을 핥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입술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며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영이 지그시 재희의 젖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살펴보듯 신중하던 눈매가 곧 조용히 휘어진다.
한영은 물었다.
“아프지는 않지.”
재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아……!”
재희는 자지러지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한영의 혀는 자신이 건드리는 부위가 연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것은 평소의 이한영과 닮은 섬세함이었으나, 파들거리며 떠는 다리를 움켜잡는 강한 힘은 이제껏 봐 온 한영과는 달랐다.
힘이 빠진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한영은 손을 뻗어 재희의 배를 문질렀다. 찬 공기에 드러난 배에 온기를 나눠 주듯이. 그러나 그렇게 피부를 쓸고 올라와 가슴을 움켜쥔 손은 어떤 배려도 없이 욕구를 쥐어짜 냈다.
재희는 헐떡이며 소파에 손톱을 세웠다. 남은 손은 한영의 머리를 밀어내다가도 끌어당기기를 반복했다. 재희는 서서히 부끄러움 외에 다른 감각을 배워 가고 있었다. 발이 움찔움찔 안으로 말렸다. 한영의 혀가 자극하는 깊은 곳도 마찬가지였다. 조였다 풀어지는 입구의 움직임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을 한영이 떠올라 재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영의 혀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의 혀는 처음부터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음핵을 계속해서 스치며 자극하는 혀에, 재희는 서서히 허리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극점으로 치고 오르는 아찔함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몰아닥쳤다.
“으응…….”
길게 끄는 목소리와 휘어진 허리를 통해, 한영은 그녀의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재희는 감은 눈으로 번쩍이는 흰 불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한영의 입술이 휘어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거라 여긴 것이 무색하게, 온몸이 달아올랐다. 감각의 홍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떠밀려 갔다 슬금슬금 돌아오는 이성을 느끼며 재희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아. 고양감은 점차 뚜렷한 감각으로 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앞으로 한영과 계속 몸을 섞게 된다면, 그것은 더 명확하게 몸에 각인되리라. 재희가 그것을 예감하며 힘없이 눈을 깜빡거릴 때였다. 눈앞에 한영의 얼굴이 잡혔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시선은 담백했으나, 곧이어 이마에 닿는 입술은 여전히 뜨거웠다. 재희는 몽롱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근육의 형태가 뚜렷이 잡힌 아랫배 아래로 한영의 성기가 보였다.
여전히 흉악스러워 보이고 도저히 한영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그것이 낯설기만 했지만, 재희는 달아오른 숨을 고르며 손을 뻗었다. 막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랫배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기립한 그것이 어딘가 괴로워 보였던 것이다.
무엄한 손의 행방을 한영은 바로 알아챘다. 재희의 볼에 입을 맞추던 한영이 웃음을 흘렸다.
“왜? 해 주려고?”
“……응.”
“뭐를?”
자상한 음색이었지만 한영이 그녀를 놀리고 있음을 안다.
재희는 말간 시선을 들어 한영의 눈을 직시했다. 한영도 그랬다. 그녀의 몸을 악기 다루듯 매만지면서도, 꼭 한 번씩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그녀가 아파하진 않는지, 좋아하는지 확인했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하면 돼. 재희는 뜨겁고 단단한 한영의 성기를 손에 감싸며 다짐했다. 나도 한영이처럼, 살펴 가면서-.
“아…….”
그러나 재희는 허무하게 그녀의 손안에 쥔 것을 놓쳐 버렸다. 재희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던 한영이 몸을 뺐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안 돼.”
그 자상한 음성과 다르게, 한영은 목표물을 두고 원을 그리는 짐승처럼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할 정도의 냉정함과, 또 그와 어울리지 않는 상냥함을 두른 눈으로.
“……왜 안 돼?”
그 질문이 의외라는 듯 한영이 웃는다.
“벌써부터 받아 낼 수 있겠어?”
“……?”
“재희야, 너 지금 당장 이거 받아 냈다가 일주일은 앓아.”
나야 네가 나 때문에 앓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너는 다르잖아.
한영은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상한 웃음과 달리, 한영의 얼굴에는 풀어내지 못한 욕구가 그득그득 엉켜 있었다.
한영이 미소 짓다 말고 목을 풀었다. 몸 안에서 치솟는 열과 긴장을 풀어내려는 듯했다. 나른하게 목과 어깨 근육이 꿈틀거린다.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쏟아지며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조차 야릇하기만 해, 재희는 숨도 못 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영은 그 시선을 뒤늦게야 눈치챘다. 시선을 맞춘 그가 눈을 휘며 웃었다. 재희는 그 순간의 한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뜨거워지는 얼굴을 느끼며 시선을 밑으로 피했다.
시야에 한영의 성기가 다시 비쳤다. 한영은 그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자위.”
“……자위?”
한영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성기를 손에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재희는 숨을 죽여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한영의 커다란 손이 오르내릴 때마다 흉흉하게 핏줄이 선 성기가 줄줄 물을 흘렸다. 꺼떡이며 움직이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다른 생명체였다.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목을 타게 만드는.
“아…….”
그녀도 모르게 입술을 축이는 순간, 한영이 쥐고 있던 재희의 종아리에 입술을 묻었다. 이를 세워 물면서도 혀를 드러내 핥는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이- 지독할 정도로 야했다.
그랬다.
재희는 그제야 적합한 표현을 찾아냈다. 이한영은, 야했다.
그냥 이한영이란 존재가 다 그런 것 같았다. 재희는 멍하니 한영을 보며 생각했다. 작정한 것처럼 옭아 오는 깊은 시선도, 그 야릇한 입가의 미소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성내듯 움직이는 근육도, 모습 하나하나가 그녀를 젖어 들게 만들었다. 재희는 그것을 한영이 다시 만져 주어 알았다.
강렬한 빠르기로 자위하는 손과 달리. 한영은 느긋한 시선으로 재희의 음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재희야.”
말을 하다 말고 한영이 미소 짓는다. 그의 다른 손이 그 순간 재희의 안을 파고들 것처럼 꾹 눌렀다. 재희는 신음을 흘렸다. 입구는 벌름거리며 한영의 손끝을 삼켰다. 재희는 그 탐욕스러움에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영이 슬며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앞으로 열심히 배워.”
“…….”
“되도록 빨리.”
“……아.”
“알았지.”
그렇게 조용히 당부한 한영이 보란 듯이 눈웃음을 친다. 색기 어린 눈웃음 앞에서 재희는 가빠지는 숨을 느꼈다. 마치 한영의 흥분이 그녀에게 옮겨 붙은 것 같았다.
그 순간 한영이 강하게 재희의 음순 윗부분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직 잔존한 흥분에 푸들거리던 아랫입이 바짝 조여들었다. 몰아치듯 어딘가로 떨어지는 감각이 아찔히 눈을 가린다.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재희가 그렇게 풍만한 가슴을 출렁이며 다시 한번 아득해질 때였다. 탁탁거리는 손놀림 소리가 다급해진다. 그녀는 곧 뜨거운 무언가가 제 몸 위로 후드득 흩뿌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
숨을 헐떡이며 재희는 시선을 내렸다. 백탁액을 울컥울컥 뿜어 대는 한영의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몸 위로 이 차, 삼 차로 뿜어지는 것을, 홀린 듯이 눈에 담았다. 그녀의 목과 턱까지 튄 액체를 천천히 손에 닦아 냈다.
점성 있는 액체를 눈에 담으며, 빈약한 성 지식을 총동원한다. 성기를 조이며 흔들던 한영의 손짓과, 그녀의 다리 사이를 집요히 응시하던 한영의 시선을, 그의 성기가 뱉어 낸 액체를, 연결 짓고 조합하여 상황을 이해해 나갔다.
그녀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한영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재희는 헐떡이며 한영의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흉흉히 일어서 있었다.
저게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거구나.
재희는 믿기지 않아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어떻게- 저 큰 게 들어올 수 있지? 가능한가? 내가 지금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한영이 손을 뻗어 재희의 아랫배를 적신 액체를 펴 바르듯 문지르며 물었다. 그렇게 마재희와 하나가 되라는 것처럼. 한영은 몰랐겠지만, 그렇게 그녀에게 답을 알려 준 셈이었다.
“……그냥 신기해서.”
“신기해?”
한영이 웃었다. 벌써부터 신기해하기에는 이르다는 것처럼.
“그거…… 나한테 넣는 거지?”
“응.”
“…….”
“겁먹지 마. 당장 넣을 생각은 없으니까.”
“……왜?”
“여자 몸은 처음부터 느끼지 않는다고 하니까. 네가 익숙해져서 아프지 않겠다 싶을 때 넣을게.”
그렇게 한영은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재희는 얌전히 그 설명에 수긍했다. 역시 이대로 넣으면 아프니까, 그래서 한영이가 배려해 주는 거구나.
“일어나. 씻겨 줄게.”
“……아.”
일어나란 말은 대체 왜 했을까. 재희는 한영에게 번쩍 안겨 화장실로 향하며 그런 의문을 잠시 품는다. 그의 어깨에 안정적으로 팔을 감았다. 그렇게 한영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는 벌써부터 깜깜해지는 속을 느꼈다.
가르침 이후의 미래가 두려워졌다. 오늘의 기억을 가지고도 한영과 다시 친구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 허무함을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 만약 한영이 다른 여자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때 덮쳐 올 질투심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을 실감한다.
재희는 한영의 살결에 볼을 비볐다. 어리광 부리는 것으로 여겼을까? 그가 낮게 목을 울려 웃는다. 적나라한 행위를 나누고도 담담히 웃을 수 있는 한영의 건조함이 부럽다. 그녀는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나 내일 일 교시인데…….”
“수업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한영은 재희의 허리를 끌어다 눕히며 그렇게 말했다. 지친 기색조차 없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한영도 저 나름의 공부가 필요했던 걸까? 한영은 으슥한 밤이 되도록 그녀의 육체 곳곳을 핥고, 입 맞추고, 만졌다. 집요하게 더듬고 문질렀고, 가장 부끄러운 부위까지 가라지 않고 빨았다. 재희는 자신의 몸이 그렇게 다양한 감각을 품고 있었는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러나 스스로의 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마재희와 달리 한영은 영민했고, 몇 시간 들이지도 않고 그녀의 몸을 완벽히 파악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는 훤했다. 창문을 넘기 위할 때를 제외하고는 올라 본 적 없는 한영의 침대 위에서, 재희는 몇 번이고 몸부림치며 절정에 올랐다. 높이 솟구치게 했다 꺼트리는 데는 한영의 손가락과 입술, 그리고 혀, 그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직 벅차 재희는 몇 번을 견디다 못해 혼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깊이 잠들지 못했다. 불현듯 허전함 때문에 깬 그녀는 멍한 눈을 들었다. 창밖에 빗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본다. 누워 있어야 할 한영이 없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 사이가 아릿했다. 계속해서 벌리고 있던 허벅지 근육도 당겼다. 잠시 주저했지만, 그녀는 곧 나신 위에 한영의 티셔츠를 걸쳤다.
“……한영아.”
허한 외침만 주방을 울렸다. 재희는 서늘한 기운만 풍기는 주방에서 고개를 돌렸다. 현관을 살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우산이 신발장 한편에 걸려 있었다.
이 빗속에 왜 나갔다 온 걸까. 연탄불이 꺼졌던 걸까?
재희는 무심한 의문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한영의 방 맞은편에 있는 서재 문에 노크했다. 잠시의 침묵 후, 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도 돼.
“……방해한 거야?”
“아니.”
웃는 얼굴로 한영이 펜을 내려놓았다. 재희는 한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영의 고요한 눈이 흰 티셔츠 너머로 비치는 가슴의 굴곡을 담았다. 시선이 흐르듯 그녀의 몸을 훑고 내려갔다. 엉덩이를 간신히 덮은 티의 밑단이 얼핏얼핏 치부를 드러내자, 한영은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그의 허리춤 윤곽이 순식간에 뚜렷해졌다.
솟아오른 바지의 의미를 이제 잘 알 수밖에 없는 재희였다. 주춤 멈춰 섰다.
한영의 육감적인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이리 와.”
“…….”
“안 할 테니까. 너 아프잖아.”
잠들기 전 한영은 그의 성기를 재희의 다리 사이에 몇 번이고 문질렀다. 젖어 있었다 해도, 그런 마찰은 처음 겪는 곳이었다.
다가간 재희를 한영은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 허리에 감긴 팔이 단단해 그녀는 옴짝달싹 못 하고 그의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목덜미로 떨어지는 입맞춤이 간지럽다. 그녀는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피부 위에 닿은 한영의 입술이 미소를 그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는 한영의 손을 내려다보며, 재희는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과제 비슷하지만, 성적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것.”
그건 도대체 뭘까.
재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나 자고 나서 계속?”
“그러려고 했는데…….”
한영이 재희의 드러난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무심히 말했다.
“소파에 네가 흘린 물이 묻어 있어서.”
재희는 화끈 달아오르는 볼을 느꼈다.
“혼자 청소하지 말-.”
“-그거 보고 자위부터 하는 바람에.”
“…….”
“그래서 펜 잡은 지 얼마 안 됐어.”
한영이 낮게 웃는다.
“이런 대화에 면역이 없겠구나. 너 귀 붉어졌어.”
그렇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한영은 조용히 권했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재희야.”
“……응.”
“싫지는 않지?”
“……그걸 왜 싫어해?”
순진무구한 질문 앞에서 한영이 조용히 웃었다. 그는 굳이 그 이유는 알 필요 없다는 듯 말없이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허벅지를 주무르는 손길이 점점 농밀해지는 것을 느꼈기에, 재희는 그즈음 슬쩍 고민했다. 내가 한영이를 방해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어쨌든 한영은 웃고 있었고,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허리에 두른 팔은 단단했다. 재희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가만히 한영의 품에 있었다. 계속해서 한영이 그녀를 붙들고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과 함께.
그러나 책상에 쌓여 있는 책들이 유독 눈에 밟혔다.
그녀는 물었다. 이 책들은 다 무엇이냐고. 한영은 재희가 걸친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며 대답했다. 교수님이 번역을 맡기셔서. 재희는 그 대답을 들은 직후 가슴을 주무르는 한영의 손을 붙잡았다.
“……이걸 다?”
“음. 이걸 다.”
“……도와줄게.”
“괜찮아.”
“그렇지만 오늘 교수님 뵙고 진행 사항 알려 드려야 한다며…….”
한영이 재희의 유두를 꼬집듯 잡으며 웃는다.
“괜찮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분이라.”
한영은 한참을 미련이 남은 듯 그녀의 피부를 집적댔지만, 결국 더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것처럼 재희를 놓아주었다. 한영은 침실에서 더 자라고 자상히 권했다. 그러나 재희는 책상에 가득 쌓인 책을 보고도 정 없이 방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
재희는 하다 하다 기가 질려 물었다. 이 일을 네게 떠맡긴 교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한영은 원서를 한글로 번역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다정히 그 질문에 답해 주었다. 심인철 교수는 결코 떠맡기려는 게 아니라 제자의 지적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 이 지긋지긋하게 많은 원서들을 넘겨준 것이라고.
재희는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던 인자한 노교수를 떠올리며 배신감을 느꼈다. 강의실에서 질문으로만 괴롭히는 줄 알았더니, 설마 안 보이는 곳에서까지 한영을 괴롭히고 있을 줄이야.
“……작문 교수님보다 심 교수님이 더해.”
한영은 재희의 투덜거림에 잔잔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몇 분을 서재의 소파에 앉아 알파벳과 씨름했을까.
재희의 고개가 어느 순간부턴가 꾸벅꾸벅 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재희도 어렴풋이 자신이 현실과 꿈을 헤매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아득히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가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재희는 분간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자.
재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뜬 눈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한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 순간을 기억에 새겼다. 예리한 이목구비의 선. 그 냉정한 듯, 무심한 눈빛. 한 치의 기울어짐 없이 똑바른 자세, 그 자세를 유지하는 단단하고 아름다운 근육의 선. 그리고 한영이 손에 쥔 만년필이 종이 위로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 그가 집중할 때마다 무심히 흘리곤 하는 혼잣말.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무리 난폭한 사람의 입을 빌린다 할지라도 혀끝에서 부드럽게 굴러간다. 그러니 그녀가 한영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온화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저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었을까?
재희는 문득 감회를 느낀다. 옛 시대의 작가가 남긴 오래된 그 문장은, 결국 옳았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한영이 지금 그녀의 앞에 있었다. 마음 없는 몸뿐인 관계일지라도, 절절히 묵은 그녀의 사랑이 결국 그를 붙들었다.
한영은 쓰고 있던 종이를 가만히 접었다. 흰 봉투에 넣었다. 일기라도 쓰고 있었던 걸까? 그의 손이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연 것을 보면 일기보다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맨 밑에 있는 그 서랍은 한영이 편지나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는 곳이었으니까.
재희는 그가 봉투를 서랍에 넣고 닫는 것까지 지켜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 어디서 나온 거야?”
한영이 고적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재희는 흐릿하게 멀어지는 시야에,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 말…… 단테의 신곡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찾아봤는데, 못 찾았어.”
“번역 때문에 그럴 거야.”
의자에서 일어나는 인기척이 났다. 재희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다가온 한영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지옥 편에서 나오는 말이야. 2환 지옥에서.”
“……애욕의 지옥?”
한영이 고요히 미소 지으며 그렇다, 답했다.
재희는 어렴풋이 책을 읽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잘못된 사랑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 연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졸음기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서도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심 교수님이 그렇게 성격 나빠 보이는 얼굴로 웃었구나…….”
“연애편지에 인용할 만한 배경은 아니니까.”
“그런데 왜 하필 그걸 생각해 냈어? 다른 좋은 글들도 많았을 텐데…….”
“……글쎄.”
낮은 웃음소리가 잠시 울렸다.
“……낭만적이라서 그랬나.”
“낭만……?”
“그렇잖아. 지옥으로 떨어진 이유가 그 사랑 때문이었으니, 서로가 치가 떨릴 법도 할 텐데.”
한영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런데도 지옥에서 함께 꼭 붙어 있다 하잖아. 그만큼 낭만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겠어.”
“그렇구나…….”
그렇지만 그게 정말 낭만적인 걸까?
재희는 알 수 없었지만, 더 묻지 못했다. 이미 잠기운에 거의 함락된 채였다. 재희는 꾸벅 떨어지는 고개를 느꼈다. 볼을 감싼 손이 머리를 지탱해 주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재희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언제 옮겨졌는지, 침대 위였다. 재희는 욱신거리는 몸을 느끼며 멍하니 한영의 방 창가에 기대앉았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았다.
재희는 너무 행복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 번이고.
느닷없는 불청객이 없었다면 그대로 몇 시간이고 한영의 침대 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재희 집 전화기가 한영의 집까지 다 들릴 정도로 요란히도 울어 댔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넘어 집으로 가야 했다.
-집에 없었어?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재희는 전화 너머 들리는 상현의 목소리에, 잠잠히 진실 섞인 거짓말을 했다. 늦잠을 자서 못 들었다고.
-자고 있어도 신호 다섯 번 넘어가기 전에는 받잖아.
“내가?”
-엉.
“……아닌데.”
-맞는데. 한영이가 그렇게 말했는데.
“……예외도 있어.”
-오, 그래?
상현이 낄낄댔다.
-걱정되어서 전화했는데…… 목소리가 통통 튀네.
“응?”
-기분 좋은 일 있나 봐.
“……그게 느껴져?”
-그러게 말이다? 어쨌든 토요일에 보자.
그대로 끊으려는 눈치기에, 재희가 먼저 물었다. 학교야?
-어. 오늘 학교 안 나와서 다행인 줄 알아.
“응?”
-비 맞아 가면서 나갔더니 오늘 강의 다 휴강이더라.
재희는 멈칫 입술을 다물었다.
“……왜?”
-왜긴. 언제 교수들이 휴강하는 이유 알려 주고 휴강한 적 있었어?
그렇게 끊어진 전화에, 재희는 한참을 손에 쥔 수화기만 내려다보았다.
‘수업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밤에 그렇게 말했던 한영은, 학교를 갔을 것이다. 심 교수가 맡긴 일 때문에 가 봐야 한다고 새벽에 말했으니까.
재희는 잠자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심 교수님과 요즘 많이 마주쳤을 테니, 한영은 무언가 미리 들은 게 있었던 걸까.
가만히 방에 돌아와 창문 너머를 보았다. 어둠 속에 갇힌 한영의 방이 보였다.
“…….”
괜스레 불안해져, 재희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빗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한영의 집 식재료가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에 재희는 장을 보러 갈 준비를 했다. 우비를 입고 가는 게 좋을까, 같은 한가한 생각과 함께였다.
* * *
누군가에게는 설렘과 기다림의 빗방울일 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을씨년스러운 예감만 자아내는 안개일 수도 있는 모호한 날씨였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아서는 야합에 가장 적당한 날일지도 모른다고, 속에 한 많은 비밀을 감춘 몇몇은 생각했을까.
그런 하늘 아래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검은 우산이 장막처럼 그의 얼굴을 가렸다. 길을 걷는 이가 혹 있었을지라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걷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는 번화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느긋했다. 그러나 그는 우산을 높이 들어 올리지 않았다. 작은 빗방울도, 사소한 흘낏거림도, 모두 그의 피부에 닿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그는 곧 작은 구멍가게 앞에서 멈췄다. 그러나 우산이 흘끗 들린 방향은 구멍가게 너머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무역 상사.’라는 간판을 단 건물을 한동안 보던 남자는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곧 라이터 불붙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한참을 연기를 피워 올렸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조용히 우산을 부딪쳐, 하늘에 섞여 들었다.
저 멀리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기가스를 토해 내며 은밀히 기어오는 자동차를 향해 검은 우산이 흘낏 들렸다. 자동차는 검은 우산 앞에서 멈추었다. 차창을 내리는 손잡이가 삐걱삐걱 돌아가는 소리가 잠시 울렸다.
“……새파랗게 어린것이 벌써부터 담배라니.”
조소와 농담기가 반반 섞인 목소리에, 우산이 흔들렸다. 웃음으로 생긴 진동이었다.
“……가르쳐 준 사람이 할 말은 아닐 텐데요.”
“꼬박꼬박 말대꾸는 물론이고. 이렇게 싹수가 노래서 어디다 써먹을까.”
“글쎄요. 노란색이라면 그나마 다행 아닙니까?”
자동차에서 핏, 웃음 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장난은 그만하지. 조교한테 왜 장난질 쳤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김만형이 조교 쫓아낸 걸 이미 확인했는데, 네 짓이 아니라고 하려고?”
“김선정과 헤어진 지 언젠데 이제 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참회는 시한이 없는 법 아닌가?”
“헤어진 애인의 부친이 저지른 잘못도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까?”
우산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에는 낮은 웃음소리도 함께였다.
“일단은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일단은?”
“다만 심 교수가 그 일을 무척 반기더군요. 눈엣가시 같은 조교를 대신 치워 준 사람이 누군지 알면 절이라도 할 기세였습니다.”
“눈엣가시라니?”
“눈치가 보통은 아니던데요. 조교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텄군. 그 새끼, 입 놀리고 다닐 때부터 언젠가 이런 일 생길까 싶었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는 게 없어.”
“그러니까 제가 전부터 아무나 끌어들이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너 편하라고 그런 거 아냐, 너 편하라고.”
“…….”
“이재석이는.”
“더 누르면 터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단 말이지…….”
두툼한 손이 툭툭, 핸들을 건드렸다.
“이한영이.”
“네.”
“일단 알겠으니까, 타. 길어질 것 같으니까.”
“…….”
“그러니까 말 길어지게 왜 연락을 안 받니.”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았거든요.”
잔잔한 웃음소리와 함께 담배꽁초가 빗물 가득한 땅바닥에 툭 던져졌다. 검은 그을음 섞인 물이 흰 꽁초에 스며들어 갔다. 우산이 접히며 빗물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탁, 자동차 문이 닫혔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