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0)

4장.

김선정은 부모님의 걱정에 떠밀려 휴학한 것에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이 기회에 그냥 놀지 뭐. 그런 가벼운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라도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뭘 봐?”

주방에 있던 한영이 다가오며 물었다. 선정은 창문 너머를 가리켜 보였다.

“옆집. 재희는 주변에 요란한 친구들만 꼬이나 봐.”

막 옆집 대문을 넘어선 어떤 여자가 꺅꺅거리며 마재희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떻게 말도 없이 미팅을 했느냐, 온갖 난리다. 아주 첫 걸음마 뗀 애 보는 엄마였다.

주제에 저런 친구도 있단 말이지? 선정은 입매를 비틀며 중얼거렸다.

“……미팅 한번 한 게 저렇게 요란 떨 일일까?”

“글쎄.”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한영이 선정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여기까지 와서 계속 옆집에 관심 가질 거야?”

손바닥을 간질거리는 한영의 숨이 뜨거워, 선정은 볼을 붉혔다.

발을 들인 것은 이로써 세 번이지만, 선정에게 한영의 집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곳이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 거기다 전축 하나하나에서 생활감이 묻어나오는데도, 그것을 한데 모아 둔 집은 정작 휑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남자 사는 집이려니 싶다가도, 선정은 불쑥불쑥 그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의심을 하곤 했다.

선정으로 하여금 가장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안방이었다. 다른 문이 다 열려 있는 것과 달리 안방은 늘 잠겨 있다는 점이 선정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푸른 수염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거야?’

그렇게 언젠가 물었을 때, 한영은 웃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어떤 설명도 덧붙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입맛만 다시던 공간이었다. 못 본 척 내버려 두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선정은 은근슬쩍 한영을 살폈다. 아침 먹고 난 후 나온 그릇들을 설거지하느라 바빠 보인다. 다시 안방에 눈길을 주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한영의 집을 연락도 없이 찾았다. 한영으로서는 미처 열쇠로 안방을 잠글 틈이 없었을 것이다.

김선정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안방 문고리를 잡았다.

“……뭐야.”

별거 없네.

실망은 잠시였다. 선정은 안방에 놓인 액자들을 보고 반색했다. 그중 가장 흥미를 끈 액자를 하나 들고 나오며, 선정은 한영의 등을 향해 물었다.

“넌 아버지 닮았구나?”

남은 흑백 사진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흐름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한영이라 알았을 거다.

설거지를 마치고 고무장갑을 벗고 있던 한영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가만히 응시하는 무표정한 얼굴이 어딘가 서늘했으나, 선정은 그것을 대수로이 넘겼다.

“아버지 인기 많으셨겠다……. 어머니도 미인이시네?”

한영은 언제 선정을 주시했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심히 고무장갑을 벗으며 대꾸했다.

“너무 미인이셨지.”

“정말 예쁘셔. 넌 좋은 유전자만 받았구나......”

“......”

“안방 보니까 어릴 때 사진 속에 재희도 있던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재희 많이 아꼈거든. 앨범에는 내 사진보다 재희 사진이 더 많아.”

한영은 무심히 고무장갑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선정은 흐응, 하고 목을 울리며 냉소를 띠었다. 그렇게 친했는데 이제는 서먹한 사이라고? 나라면 절대 그렇게 멀어지도록 안 두었을 거야. 멍청한 마재희.

“사진 보니까 지금이랑 똑같던데. 걔 어렸을 때도 그랬나 봐?”

“그랬다니?”

“재희 좀 이상하잖아. 애가 멍하고, 무슨 생각 하는지 표정도 없고. 난 처음에 걔 머리에 이상 있는 줄 알았어. 그런데 우리 대학교 들어온 걸 보면 바보는 아니란 소리잖아?”

“…….”

“내가 보기엔 그냥 백치 같을 때가 많은데, 한영이 네가 보면 어때? 네가 봐도 걔가 예쁜 편이야?”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선정은 고개를 들었다. 한영은 조용히 미소 짓고만 있었다.

답하기 곤란한 걸까?

그간 보아 온 한영이라면 소원해진 옛 친구라도 쉽게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고상한 기질을 알면서도, 선정은 눌러두었던 감정이 슬금슬금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김선정은 처음 본 순간부터 마재희가 싫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조용한 눈동자가, 고요한 분위기가, 입고 다니는 희고 긴 치마부터 고운 머리카락까지. 또 그것을 선망하는 눈으로 흘끔거리며 바라보던 남자들까지도- 전부 다 꼴 보기 싫었다.

선정은 흘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신경 쓰이는 계집애. 왜 하필 이한영 옆집이야. 두고두고 짜증나게.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렇게 선정이 교활한 눈빛을 빛낼 때였다.

마침 그녀의 생각을 끊어 내듯 한영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그러고 보니 강 씨 아저씨 요즘 안 보이시던데. 어디 가셨어?”

“그게 말이지…….”

선정은 대답하기 위해 한영을 돌아보다 볼을 붉혔다. 그녀를 주시하며 천천히 의자에 앉는 한영의 눈빛이, 어딘가 육식 동물의 강렬함을 닮았기에.

선정은 입맛을 다셨다. 얼굴만 잘생긴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은근히 섹시하다니까. 잠깐 만져 봤을 때는 몸도 좋은 것 같던데. 저 점잖은 이한영을, 어떻게 벗겨야지?

“선정아?”

“……아, 경호원 바꿨어.”

“왜?”

“일이 있었어.”

선정은 꺼림칙한 화제가 불편해 가식적으로 웃었다.

선정도 자신이 강 씨에게 과한 부탁을 했음을 알았다. 프라이드만 드높던 강 씨다. 그런 그에게 어린 여대생을 해코지하라는 부탁이 말 같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사람들이 많아서’라거나 ‘상대가 워낙 잘 달려서’란 변명을 일삼으며 강 씨가 차일피일 마재희의 뒤만 밟고 있어도, 선정은 이해했다.

그렇지만 그걸 아빠한테 일러 버리고 내뺄 줄이야.

덕분에 유배 생활을 할 뻔했다.

노발대발하던 부친을 떠올리자니 모골이 송연했다. 선정은 한영의 집으로 가까스로 도망 나온 자신의 신세를 떠올리며 이를 갈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한영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

“별거 아니야.”

“정말?”

걱정하듯 주시하는 시선에, 선정은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따뜻해지다 못해, 그녀는 연이어 이어진 한영의 걱정 어린 말에 녹아 버렸다.

“사실 강 씨 아저씨가…….”

그래서 선정은 자신의 잘못을 이제는 떠나고 없는 경호원에게 넘겼다.

선정은 자신했다. 경호원 계약상 업무 중 얻은 정보를 누설해선 안 된다. 그 깐깐한 강 씨가 한영에게 설마 입을 놀렸겠어. 한영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랐어. 그렇게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는지는. 그게 나중에 들켜서 난리가 나 쫓겨난 거야. 아저씨가 그만둔 게 아니라.”

“……그랬구나.”

전혀 몰랐다는 듯 한영이 혀를 찼다. 그러나 선정은 찰나지만 보았다. 보는 사람이 다 시릴 정도로, 한영의 눈빛이 차가워지는 것을.

매일 부드럽게 웃기만 하던 사내가 드러낸 날 선 빛에, 선정은 찡하게 올라오는 흥분을 느꼈다. 한영의 허벅지에 올라앉자니 몸이 달 지경이었다. 역시 가끔씩 이한영은 뭔가 돋우는 맛이 있어. 섹시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선정은 눈을 유혹적으로 내리떴다.

“그런 쓰레기가 옆에 있었다니…… 정말 무서워.”

“……그러게. 무섭지, 사람이란.”

한영이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선정은 턱을 들고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리 아랫도리 휘두르고 다니는 쓰레기라도 날 건드리진 못했을 거야. 겁탈한다 해 봤자 뒤탈 없는 멍청한 애들이나 건드리겠지.”

“…….”

“그나저나 대답 안 할 거야?”

“…….”

“정말 마재희가 예쁘냐니까?”

“……재미없는 질문을.”

“어?”

“네가 제일 예쁘단 대답을 듣고 싶은 거라면, 아빠 앞에나 가서 물어보지 그래.”

“……뭐?”

당황한 선정이 한영을 살폈다.

한영은 보는 사람이 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선정은 그 얼굴에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설마 저 얼굴로 그런 말을 했겠냐고-.

“가장 예쁘단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았지. 원하는 대로 대답해 줄 때마다 귀찮아서,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여자를 만나려고 했는데…….”

한영이 미소를 입가에 띠곤 말했다.

“너도 다른 건 없네.”

“……뭐?”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몸을 떠는 선정을 보며, 한영은 나지막이 웃었다.

“뻔한 여자는 아무래도 지겨워서.”

“…….”

“나가, 지금 당장.”

* * *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재희의 머릿속을 숱하게 떠돌고 다니는 질문은 대개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 한영이는 도대체 언제부터 선정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추석 이전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재희가 알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한영이 재희를 보호하기 위해 선정에게 가까워졌으리라는, 쓰디쓴 진실만 직감적으로 꿰고 있었을 뿐.

미행을 당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선정의 경호원은 그녀의 동네까지 몇 번이고 쫓아온 적이 있었다. 한영이 그걸 우연히 본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정에게 경호원을 소개시켜 달라고 한 걸까? 심증만 갖고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으니, 선정에게 접근해 진실을 알아보고자 했던 걸까? 그래서 전말이 다 확인되자, 선정의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흘린 걸까? 그렇게 선정을 학교에서 밀어내 버린 걸까? 기계적으로, 냉혹하게, 장애물을 치워 버리듯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단순히 모두에게 알리고, 신고를 하는 방법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굳이 그렇게 돌아가는 방법을 취했을까. 선정의 아버지가 권세 높은 정치인이라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될 거라 여겼던 걸까?

재희는 복잡한 눈으로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풍경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고민 있어?”

“아…….”

그녀는 상념 속에서 재빨리 헤엄쳐 나왔다.

인혜는 책상 위로 화장 도구들을 늘어놓다 말고 재희를 보고 있었다. 고민 있는 거 다 알아, 라고 말하는 눈이다.

“……인혜야.”

“응?”

“……동생들은?”

“괜찮아. 애들 다 일찍부터 놀러 가서 밥상 안 차려 줘도 돼.”

인혜는 웃으며 재희를 재촉했다.

“내 동생들 생각하느라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지? 뭔데? 무슨 일 있어?”

“……전에 남자 친구가 너 몰래 도와준 적 있다고 했잖아.”

“응.”

“기분이 어땠어?”

“……좋았지? 고마웠고?”

재희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잠시 난항을 겪었다. 눈을 내리떴다. 명절에 보았던 광경이 다시 떠오른다.

선정을 내려다보며 싸늘히 입매를 비틀며 웃던 한영.

그리고 알 수 없는 행동을 이어 나갔던 둘.

만약 마음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한영이가 나 때문에 감당해야 했던 거라면.

“……도움받은 걸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인데…….”

재희는 먹먹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안하고 슬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도와준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면 돼. 왜 내가 네 도움을 기쁘게 받을 수 없을까, 하고.”

인혜의 말은 심중 깊은 곳을 날카롭게 후볐다.

“직접 대화해 봐.”

“……대화를 피하면?”

“멱살 잡고 흔들어. 대답할 때까지.”

“…….”

“이한영은 그래도 싸. 그 카사노바가 또 무슨 사고를 쳤어? 내가 혼내 줄까?”

재희는 한영의 안위를 위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한영이 얘기 아닌데.”

“네가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상대가 한영이 말고 또 있어?”

재희는 얌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인혜가 아쉽다는 듯 그녀를 본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의문을 드러내는 얼굴이었다.

“재희야,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게 있는데…… 너는 왜-.”

그때였다. 열린 창문 밖에 시끄러운 소음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던 재희는 소음의 정체를 뒤늦게 깨달았다. 철문이 세게 부딪힐 때 나는 소리다. 쿵쿵 두드리는 소리도 이윽고 들려왔다. 누군가 한영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곧이어 괴성이 들끓었다. 누군가가 고래고래 악을 지르고 있었다.

먼저 창가로 다가간 것은 인혜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밖을 내다보더니 중얼거렸다.

“……뭐야, 저 미친년은?”

재희는 인혜 옆으로 다가갔다.

한영의 집 마당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양복 입은 남자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중 몇몇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 선정을 보호하고 다니던 경호원들이다.

재희는 믿기지 않아 경호원들에게 양팔을 붙잡혀 끌려가는 여자를 보았다. 흡사 연행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봉두난발을 하고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다고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저거 누구야?”

“……선정이.”

“그게 누군데? 아, 이번 여자 친구?”

인혜가 물었지만 재희는 다시 대답하지 못했다.

“이 미친 새끼들이…… 안 놔? 야, 놔!”

선정은 자신을 붙잡은 경호원들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다.

한영은 나와 보지도 않았다. 선정이 차에 가두어지듯 실려 사라지고서도, 재희는 움직이지 못했다.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이 그녀를 조롱했다.

이제야 알겠어? 김선정이 얼마나 이한영에게 가벼운 존재였는지?

“…….”

“역시 이한영. 노는 물이 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혜가 박수를 쳤다. 책상으로 돌아가는 인혜의 걸음에는 무관심이 묻어 있었지만, 재희는 그럴 수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재희야, 얼른 와. 옆집에서 찍는 아침 드라마 볼 시간 없어. 너 배울 거 많아. 립스틱 색깔은…….”

그러나 마재희가 이한영에 관심 갖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재희는 결국 인혜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영의 방 창문을 넘었다.

“……한영아.”

들려와야 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재희는 대신 일 층 화장실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내려와 거실과 주방을 잠시 둘러보았다. 식탁 위에 액자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한영의 부모님 사진이었다.

“…….”

안방에 있어야 할 사진이 왜 여기 있을까. 그것도 하필 이 사진을.

의문이 잠시 스쳤지만 그녀는 말없이 액자를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원래 있던 자리에, 사진이 보이지 않게 액자를 덮어 놓았다.

“왔어?”

재희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방 문간에 선 한영이 얼굴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었다. 일상적인 미소를 걸친 그 얼굴을 보며, 안도감을 품은 것은 잠시였다.

재희는 한영의 볼에 난 빨간 자국을 보고 멈칫했다.

“……선정이야?”

“맞을 짓을 했어.”

“……뭘 했는데?”

“지겹다고 했거든.”

한영은 무심히 웃고 있었다.

“……헤어졌어?”

“그렇게 됐네.”

재희는 그 순간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으로 향하는 한영을 보며, 재희는 속으로 묻는다. 식을 마음이 있기는 했어?

“재희야, 그만 궁금해하고 점심 먹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게 사실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재희는 그 전에 묵묵히 주방으로 향했다. 냉동실 문을 열었다. 한영이 거긴 왜 여냐는 듯 흘끗 본다. 재희는 그 안에서 얼음을 꺼냈다.

재희는 비닐봉지와 수건으로 감싼 얼음을 내밀었다. 한영은 잠자코 받았다. 호의를 무시할 생각이 없다는 듯 볼에 가져다 대는 것을 지켜보며, 재희는 한영의 몸을 살폈다. 날뛰던 선정의 모습을 떠올리면 뺨 한 대로 끝날 성격은 아니다.

예상한 대로였다. 한영의 목덜미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재희는 잠자코 몸을 돌려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됐어.”

“피 나.”

“그냥 긁힌 거야. 괜찮아.”

“안 괜찮아.”

무뚝뚝한 재희의 대답에서 굽히지 않을 마음을 짐작했으리라. 한영은 재희가 약 묻은 손을 뻗는 것을 더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에 한영의 상처가 닿았다. 이미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재희는 분이 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선정이 정말 나쁜 애구나.”

어찌된 영문이었을까. 한영이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그 말을 듣네.”

그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재희는 상처를 살피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싱크대에 기댄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한영의 고요한 시선과 마주쳤다.

가깝다.

재희는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눈꺼풀을 움찔 떨었다.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담벼락에 붙어, 서로를 마주하던 순간. 그녀의 마음을, 한영이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그 순간을.

“이제 괜찮아. 고마워.”

“……응. 다른 데는 없어?”

“없어.”

그동안 이한영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벽돌담 아래에서의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영아, 나는 그냥 인혜랑 먹을게.”

냉장고 앞에 서 있던 한영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인혜도 오라고 해.”

“……아냐. 너 먹고 다 치웠잖아. 우린 이따 알아서 먹을게.”

“둘이 아침부터 뭐 하는데?”

“화장 배우고 있었어.”

재희는 한영이 갑자기 무슨 화장을 배우느냐고 반문해 올 줄 알았다.

그러나 한영은 꺼내고 있던 반찬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며 그러냐고 대꾸했다. 담담한 얼굴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던 재희는 문득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묻고 싶었다. 계속해서 아무것도 못 본 척, 모르는 척할 정도로 그렇게 그녀의 감정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그렇게 그녀의 사랑이 부적절하게 느껴졌던 것인지. 어떻게 해도- 그녀를 여자로 볼 수는 없는 것인지.

그러나 한영의 무감정한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히 휘어지는 순간, 재희는 자신이 어떤 의문도 꺼내지 못하리란 것을 직감했다.

“뭐든 배우는 건 좋으니까. 열심히 배워.”

“……응.”

“어제 항공사 다니는 선배한테 과자 받았는데. 줄까.”

“괜찮아.”

그러나 인혜는 생각이 다를 거라며, 한영은 끝내 재희 손에 과자를 쥐여 주었다.

“오후에 보자.”

재희는 언제나처럼 바보같이 ‘응.’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한영에게 마재희는 언제나 여동생에 불과했다. 언제까지고 돌봐 줘야 할, 미성숙한 돌봄의 대상. 그런 의미로 마재희는 이한영의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한영이 잘못된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지켜 내야 할 대상으로서.

재희는 그동안 어떻게든 외면하려 했던 사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그래, 이 관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한영과 마재희의 관계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재희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는 자신 탓이 컸다. 자신이 너무 모자라서.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지 못해서. 그래서 한영이 그녀의 몫까지 더 신경을 기울이고 관심을 줘야 했던 것이다.

창문을 넘어 방으로 돌아오며 그녀는 몇 번이고 각오를 다졌다. 인혜에게 열심히 화장을 배우자. 그리고 상현이 소개해 준 남자를 계속 만나자. 그렇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다 보면, 가슴에 다른 사랑이 피겠지.

그리고 더 이상 한영이 걱정하지 않게, 이번 일처럼 그가 몰래 뒤에서 도와주는 일이 또 없도록,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겠다.

그러면 언젠가 기이하게 비틀린 관계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먼 옛날 어린 시절의 막역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건 뭐야?”

“……한영이가 줬어.”

“어멋, 이 아리따운 꼬부랑 글씨…… 물 건너온 거구나?”

한영이 건네준 과자를 보며 인혜가 활짝 웃는다. 재희도 그 얼굴을 따라 어떻게든 웃었다.

인혜의 가르침은 혹독했고, 그 경지는 아득히 멀기만 했다. 진작 알려 줄걸, 하며 인혜가 혀를 차는 것을 보면 그저 재희의 화장술이 형편없이 미숙했던 건지도 모른다. 몇 번이고 세수를 반복한 후에야 그럴싸한 완성본이 재희의 손끝에서 ‘그려졌다.’ 친구들이 한영의 집으로 모이기로 약속했던 시간을 슬쩍 넘기고서였다.

“……세상에.”

재희가 한영의 집 현관문을 연 순간, 상현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현상을 마주한 얼굴이었다.

인혜가 톡 쏘아붙였다.

“예쁘단 말부터 해 줘야지.”

“재희야, 진짜 예쁘다.”

“나한테도 감탄해. 빨리.”

“인혜야, 정말 대단한 가르침이구나.”

“뭘. 재희가 워낙 금방 배우고 예뻐서 그런 거지,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오, 그렇구나.”

못 참겠다는 듯 상현이 낄낄거리며 거실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왁자지껄한 친구들 틈에 끼어 거실로 향하며, 재희의 본능은 너무나 익숙하게 한 사람을 찾았다. 주방 쪽에서 희미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또 뭔가 요리하고 있는 걸까?

“마재희, 너 요즘 수상하다? 왜 자꾸 예뻐지려고 해?”

감흥 없는 말투였으나 영재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급의 온화함이었다. 물론 영재의 온화함에 적응한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상현과 인혜가 몸서리를 쳤다.

“왜 저래.”

“미쳤나 봐.”

“뭐. 어쩌라고.”

티격태격하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것은- 당사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일지도 모르나- 퍽 재미가 있었다. 재희는 웃었다. 상현도 흘낏 재희에게 눈짓을 하며 웃었다. 그때 상현의 시선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재희의 등 너머로 향했다.

“한영아, 또 사과야? 포도는 없어?”

괜찮아. 재희는 계속해서 긴장하려는 스스로를 속으로 달랬다. 아무 일도 없었어. 우리 사이에 이상할 일도 없고. 재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돌렸다.

주방 앞에 선 한영이 보였다. 잘 깎인 사과가 담긴 접시를 든 한영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한영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 지었다. 그린 듯 깔끔한 미소였다.

“봐 봐. 재희 화장했어.”

“봤어.”

한영이 다가오며 부드럽게 말했다.

“예쁘다, 재희야.”

그 순간, 재희는 느꼈다. 담담히 웃는 한영의 얼굴과 달리, 그 어조는 잘 다듬어지다 못해 치열히 통제된 것이었음을.

“……고마워.”

재희는 눈을 내리뜨며 속에 깃든 비참함을 숨기려 노력했다. 내가 혹시 헛된 기대라도 품을까, 걱정하는 거구나. 오해 사지 않으려고 저렇게 조심하는 거야.

상현이 너스레를 떨었다.

“놀라지 않는 거야? 난 깜짝 놀랐어. 우리 재희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는데.”

테이블 위로 접시를 내려놓고 있던 한영이 무심히 미소 지었다.

“네가 보는 눈이 없어 그래.”

“너희들…… 이렇게 나오기야?”

상현이 몸서리를 치며 한영과 영재를 번갈아 보았지만, 영재는 어느새 인혜에게 머리채가 잡힌 채라 대꾸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상현이 한숨을 흘리며 인혜의 팔을 붙잡았다.

“……너흰 진짜 뭐가 문제니, 정말…….”

한 덩이로 뭉친 친구들을 뒤로한 채, 재희는 한영의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계속해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억눌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접시에 있는 사과를 집어 먹었다.

이 정도의 민망함은 익숙해져야 한다.

재희는 멍하니 사과를 우물거리며 속으로 다짐했다. 한영도 나름대로 어색함을 참고 있을 건데, 그녀가 못 참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 시끄러울지도 몰라.”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에, 재희는 사과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흘끔 들어 올렸다. 한영의 시선이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 위로 닿아 있었다. 애처럼 입에 다 묻히고 먹었나 싶었던 재희가 움찔 입술을 모을 때였다. 한영의 시선이 멀어졌다.

“애들이 술을 사 왔어. 아마 밤새 마실 것 같네.”

한영은 한숨을 흘리고 싶어 하는 얼굴로 냉장고를 보았다. 때마침 상현이 냉장고를 열고 있었다. 상현의 다리 틈 사이로 냉장고에 진열된 크라운 맥주와 소주병이 보인다. 텅 비어 있던 음료 칸이 술로 꽉 찼다.

“……저렇게 많이 마시면 죽어.”

재희의 진지한 충고에, 한영이 낮게 웃었다.

“죽진 않아. 술병은 좀 나겠지. 내버려 둬. 그래야 한 달은 술 찾지 않고 잠잠할 테니까.”

부드러운 어조였으나, 이골이 난 감정마저 재희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재희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한영을 올려다보다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인데?”

“영재.”

“아…….”

학생 운동에 몰두한 영재는 부모님과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더불어 안 좋은 일이 있을수록 세 남자들의 술자리는 길어진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재희는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노력은 해 볼게.”

“……상현이가 자꾸 술 강요하면 우리 집으로 도망 와.”

드물게 엄중한 어조가 우스웠을까. 한영은 나직이 웃었다.

“괜찮아. 바람 많이 쌀쌀해졌으니까, 창문 잘 잠그고 자.”

“……응.”

“내일 점심엔 자장면 시켜 먹자.”

“응.”

재희는 웃었다. 한영도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재희는 그 미소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그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함께할 거다.

“야, 토요 명화 시작한다.”

아랑훼즈 협주곡과 영재의 목소리가 함께 울리는 가운데, 재희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괜찮을 것이다. 모든 게 다, 괜찮았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니 정말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번 주 토요 명화는 로맨스 영화였다. 정통 로맨스였는지 시종일관 분위기가 잔잔했다. 영재가 가장 먼저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소파에 앉아 시집을 손에 쥐었다. 박노해 시인의 시집이었다. 그다음은 상현과 인혜였다. 상현이 마시는 맥주에 인혜가 관심을 가지면서, 관람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해이해졌다.

재희는 분위기의 변화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재희는 거의 화면 속으로 코를 박을 것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영화에 집중했다. 그 순간만큼은 한영이 눈 나빠진다, 충고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맞다, 한영아.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한영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잠시 영화가 늘어지는 타이밍이라 그랬나. 재희의 관심이 급격히 등 뒤로 쏠렸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화면에 시선을 붙박은 채, 상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재희를 가장 잘 알잖아.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려고.”

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영재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 그거 재희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야?”

“어이구, 영재야…… 재희 지금 집중했어. 재희 지금 아무것도 안 들려.”

그때 인혜도 한마디 했다.

“그러면 더 이렇게 얘기하면 안 돼, 미친놈아.”

“너희들은 맨날 싸우다가도 꼭 이럴 때만 합심해서-.”

“뭔데.”

모두의 목소리가 잠시 끊긴 가운데, 한영의 고요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묻고 싶은 게 뭔데.”

“아, 뭐…… 재희 미팅 때문에. 이번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희 반응이 밍밍하더라고. 한영이 너라면 재희 이상형에 대해 아는 게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했지.”

재희는 그 순간 털이 올올이 설 정도로 긴장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재희가 미팅을 했다고? 쟤가? 미팅을?”

“어머, 최영재야, 너 참 소식 빠르구나.”

“뭐냐. 또 너희들끼리만 알고 있었냐?”

친구들이 가볍게 떠드는 중에도 한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재희는 그 의미가 알고 싶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그렇게 한영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친구들을 보며 조용히 웃고 있을까?

그렇게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무관심을 은은히 드러내고 있을까?

“너도 몰라?”

상현의 질문에 뒤이어, 한영의 무심한 음성이 들렸다.

“재희는 다정한 사람 좋아해.”

“어라, 너처럼?”

잠시지만 정적이 찾아왔다.

재희의 숨통이 절로 바짝 조여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들린 한영의 목소리는 온화하기만 했다.

“또 뭘 꾸미는데 이래, 너.”

“에이, 내가 뭘.”

“…….”

“그런데 한영아, 제일 관건은 생김새야. 재희가 주야장천 네 얼굴만 보고 자랐잖아.”

한영이 잠시 잔잔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글쎄. 그런 쪽의 이상형이라면…… 저기 있네.”

“어?”

“화면에. 지금.”

“……엉?”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화면 속 남자 배우가 웃는다. 유혹하듯 눈매가 휘어져 있다.

재희는 일순 그 눈웃음이 한영을 닮았단 사실을 깨닫는다. 한 번의 자각은 연달아 다른 사실도 알려 주었다.

남자 배우가 가진 깊은 눈매도, 진한 이목구비도, 모두 한영을 닮아 있었다-.

무의식중에도 한영을 좇고 있었던 자신을 깨닫는 기분이란 복잡하다. 그것을 한영이 눈치챈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재희는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텔레비전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해야 한다. 그녀는 절실했다.

그때 마침, 어깨에 닿는 감촉이 있었다. 그것이 낱장의 이불이란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재희는 그대로 이불에 감싸였다. 몸이 쑥 뒤로 끌려갔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내렸다. 근육과 핏줄이 도드라진 남자의 팔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 팔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안다. 그녀가 어느 누구의 것보다 가장 주의 깊게 보던 팔이니까.

“눈 나빠진다고 했잖아.”

아무리 여자라 해도 한 사람의 무게다. 그것을 감당해 놓고도 한영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재희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불을 두른 채 화면을 응시하면서도, 재희는 귓가가 뜨거워지지는 않았는지, 볼은 달아오르지 않았는지, 스스로 점검하느라 바빴다.

그러면서도 재희는 답답함에 말을 하고 싶었다. 너 정말 나빠.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사람 마음 건드리는 거, 나쁜 거야.

그러나 재희는 한영이 그녀를 놀리려는 것이 아님을 안다. 한영은 그녀의 몸을 직접 건드리지 않으려, 이불을 감싼 채 그녀를 옮겼다. 그것은 선을 넘는 듯하면서도 기어코 선을 그어 놓는 행위였기 때문에- 재희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영화나 보자. 더 깊은 생각은 말고.

“……하여튼 저 새끼도 제정신은 아니야.”

불쑥 뒤에서 들려온 영재의 중얼거림이 허무하다.

재희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토요 명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차가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도 재희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였다. 한영이가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나 제아무리 이한영이라도 상현과 영재가 작정하고 먹이려 들면 버티지 못한다. 재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영은 뭐든 받아 줄 것처럼 온화해도, 무르지는 않았다. 그런 한영을 상현은 도대체 어떻게 구슬려 술을 마시게 하는 걸-. 재희는 생각을 이어 나가다 말고 한숨을 흘렸다.

“……또.”

또 한영이 생각.

재희는 피곤에 젖은 눈을 감았다. 한영에게서 독립해야 한다, 다짐을 해 놓은 것이 낮의 일이다. 몇 시간이나 갔다고 그 다짐이 무색해지는 걸까.

가물거리는 눈을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보았다.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머리가 불가능한 바람을 속삭인다.

나도 그냥, 남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마음고생 할 필요도 없을 거고, 몇 번이고 술자리도 함께했을 거다. 마음껏 한영이 손도 만져 보고, 어깨동무도 하고-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선잠에 빠져서도 못 버린 미련을 곱씹는 머리가 뿌연 꿈을 몇 번이고 꾸게 했다.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꿈인지도 모르고 그 속을 헤맸다. 한영이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가 웃었다-.

그리고 재희는 꿈결에 어렴풋이, 그리운 소리를 들었다. 풍경 소리였다.

재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다 뜨지도 못한 눈이 창가에 선 인영을 담았다.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운 인영은 등을 보인 채 창문을 닫고 있었다.

“……창문 잠그는 습관을 들이라니까.”

그렇게 낮게 타박하는 한영을, 재희는 바라보았다. 막 씻고 온 건지 한영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좋은 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에 스쳤다.

재희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많이 마셨어?”

“아니.”

창문의 커튼을 치며 한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재희는 속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갈 출구인 창문을 완전히 막는 것은 명징한 한영이 할 행동이 결코 아니다. 한영은 언제부턴가 재희 집 대문을 드나드는 것을 꺼렸다. 대문뿐일까, 재희 방 창턱에 몸 한 구석 걸치는 것도 조심해했다.

한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재희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에 설레는 그녀를 전혀 모르는 듯, 한영은 재희가 덮고 있는 이불을 목 밑까지 잘 여며 주었다. 부모님에게도 받아 본 지 오래인 이부자리 인사를 한영은 무심하고도 자연스럽게 행했다.

“잘 자.”

그는 그것이 전부라는 듯 문으로 향했다. 조금의 틈도 없이 깔끔했다.

“……한영아, 문으로 나가게?”

방의 문손잡이를 잡는 한영을 보며 재희가 물었다. 한영이 그렇다, 대답했다.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발음조차 정확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순간 다시 느꼈다. 이한영은, 취했다.

한영이 신발도 없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순수한 마음에서 그녀는 한영을 붙잡았다.

“한영아, 술 깨고 가.”

한영은 그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재희는 한영이 거절할 말을 찾는 거라 생각했다.

“……그럼 그럴까.”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침대 옆으로 다가오는 한영을 보며, 재희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시, 이한영은 취했다. 그것도 만취 수준으로.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그러게. 골이 다 울리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한영이 이불에 이마를 묻었다. 재희는 똑바로 누워 있던 자세를 옆으로 틀었다. 한영의 젖은 머리카락이 그제야 잘 보였다.

재희는 왼손가락에 닿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아무렇게나 이불 위에 놓여 있는 한영의 손이 보였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는지 손가락이 까딱이며 그녀의 손가락을 간질이고 있었다.

가만히 그 손을 지켜보다 손을 좀 더 앞으로 뻗었다. 한영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재희의 손을 조용히 잡아 왔다.

왠지 귀여운 마음이 들어 그녀는 웃었다. 또 한편으로는 괜히 코끝이 찡해 왔다. 문득 어린 시절의 한영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턴가 칼같이 단정하고 날이 선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기 시작한 이한영이 아니라- 그저 한 소녀에게 순수한 웃음만 지을 줄 알던 어린 소년이.

“……한영아.”

이불에 고개를 박은 한영은 조용했다.

잠들었나 봐. 재희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웃음 지었다. 슬픈데, 한영의 새로운 모습을 봐서 행복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렇게 무릎 꿇고 자다간 나중에 다리가 아플 것이다. 재희가 그래서 한영을 깨우려던 찰나였다.

“……추한 꼴 보이네. 술 냄새 많이 나지.”

조용히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도 안 나.”

“그럴 리 없을 텐데. 상현이가 작정을 하고 먹여서 죽다 살아났거든.”

“왜?”

“…….”

“무슨 일 있었어?”

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자?”

“아니.”

술에 취한 사람이 으레 보이는 혀 꼬인 소리가 전혀 없어서 재희는 잠시 긴가민가하다가도, 한영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취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다. 애초에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한영은 이 시간에 그녀의 방으로 건너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도 알았다.

지금 일고 있는 충동이, 야비한 것임은.

그것을 알고서도 재희는 급작스레 이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한영아.”

“왜?”

“선정이한테 왜 그랬어?”

이불에 이마를 대고 있는 한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조차 들지 않아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재희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보았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만지고 싶다. 그런 생각을 얼핏 흘려보낼 때였다.

“……내가 무엇을 했는데?”

한영이 고요한 어조로 물었다. 여전히 얼굴을 들지 않은 채였다.

재희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선뜻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많은 것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선정이, 학교에서 쫓아낸 거 너잖아.”

“내가 왜?”

너무나 태연히 되묻기에, 재희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미행당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

“…….”

“선정이가 경호원 시켜서 그런 일 한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래서…… 그런 거잖아.”

“다정하네.”

“……응?”

“그런 일을 겪고도 ‘선정이’라고 부르고 싶어?”

재희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숱 많은 정수리만 보았다. 한영의 눈이 보고 싶었다. 무슨 얼굴로 그렇게 서늘한 음성을 냈는지, 보고 싶었다.

“너는 늘 그랬지.”

잠잠히 중얼거리는 한영의 목소리는 느릿했다.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아.”

“…….”

“늘 나만 화를 내.”

“……나도 화내.”

“내가 뺨을 맞아야 화를 내지.”

“…….”

“뺨을 맞은 게 너였다면 화내지 않았겠지. 그냥 잊어버렸을 거야. 몇 주째 수상한 남자가 뒤를 밟고 다녀도 못 본 척한 것처럼.”

설마 한영이는 줄곧 화가 나 있었던 걸까?

“……한영아, 네가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던 거야.”

“알아. 도서관에서 상현이와 대화할 때 듣고 있었거든.”

“……아.”

그때 듣고 있었던 거구나.

재희가 멍하니 놀라는 동안, 한영이 건조한 음성으로 설명했다.

“사복 경찰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아. 네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데려가 앉혀 놓고 으르든 달래든 직접 물어봤겠지. 유인책으로 쓸 작정이었다면 무작정 미행하기 전에 미끼부터 던졌을 테고.”

“……그런 거야?”

“그래.”

재희는 그저 그런가, 싶어 얌전히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럼 선정, 아니, 김선정이 범인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일 학기 때도 이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그때부터 대강 김선정 짓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어.”

“……이런 일이 또 있었어?”

“나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 동기 몇이 비슷한 일을 겪었어.”

“전혀 몰랐어…….”

“다들 쉬쉬하고 덮고 갔으니까.”

“……혹시 친구들 많이 다쳤어?”

“다행히 다들 남자 친구들이 있어서 제때 보호받았어.”

새삼스레 김선정의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달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도, 재희는 문득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전에 내게 물어봤던 걸까? 남자 친구 사귈 생각은 없냐고? 거기까지 추측이 미치자 재희는 우울해졌다.

“……김선정은 대체 왜 그랬던 거야?”

“질투와 시기 때문에.”

“……단순히 질투한다고 사람을 시켜 때리려고 해?”

“…….”

“……한영아?”

“…….”

“자?”

“……그러게. 겨우 그런 이유로 때리려고 하다니. 나빴네.”

느릿느릿한 음성 속에서 서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한영이 뭔가 그녀에게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재희는 가만히 한영의 머리를 응시하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얼굴을 보고 싶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한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욱 알 수 없었다.

“김선정이 다시 네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야. 걔 부모님이 결혼 서두르고 있거든.”

“……김선정 결혼해?”

“근본 없는 놈과 연애한답시고 사고 치는 걸 더 못 보겠다는 거겠지.”

“…….”

“강 씨 아저씨도 일 그만뒀으니까 걱정하지 마.”

“……강 씨 아저씨가 누구야? 그 경호원?”

“응.”

재희는 발을 절룩거리던 남자를 떠올렸다.

“……혹시, 한영아. 너…… 그 아저씨가 나 미행할 때마다 지켜보고 있었어?”

그래서 저번에 내가 쫓길 때도, 그렇게 즉각 나를 구해 줄 수 있었던 거야?

“응.”

한영은 담담히 답했다. 그게 대수로운 일이냐는 것처럼.

그러나 재희로서는 그 노력을 헤아려 볼 수밖에 없어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확실히 재력과 권력을 가진 아버지를 둔 김선정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마재희나 이한영이 상대하기에 버거운 상대였다. 미행하기만 할 뿐 해를 끼치지도 않았으니 경찰에 신고를 한다 해도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영으로서는 마땅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김선정에게 접근해야 했을 테고-.

속이 쓰려 왔다. 재희는 한영과 마주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들었다. 두상조차 완벽한 한영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리카락은 예상대로 촉감이 부드러웠다.

“……고마워. 구해 줘서.”

미안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왜였을까. 사과를 해선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네게 상의할게. 너랑 같이 해결할게.”

그렇게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재희는 한영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어쩌면 분노와 적의의 대상이었을 여자와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는 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한영이 사랑이란 감정에 회의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로 재희는 어렴풋이나마 눈치챘다. 이것은 단순한 회의감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그렇다면 뭘까.

한영의 속에, 대체 뭐가 있는 걸까.

“……한영아, 자지 마. 그렇게 자면 무릎 아파.”

“…….”

“한영아?”

“…….”

“자?”

한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그가 여전히 취중이란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한영이 팔에 턱을 걸친 채 똑바로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해 오는 순간, 재희는 괜스레 덜컥 숨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아.”

“재희야.”

“……응.”

술에 취한 한영은 발음조차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딱 하나 다른 점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리감. 남녀로서의 거리를 칼같이 고수해 오던 한영이, 이 순간 훌쩍 그것을 뛰어넘었다.

재희는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리는 커다란 손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볼이 붉어질까 두려워 눈을 감았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조교 선생님 일은 또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 하는데- 입속에 맴돌던 질문들이 모조리 한영의 손길 한 번에 휘발되어 버렸다.

한영이 한숨을 흘리듯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렸을 때 기억나?”

“……어렸을 때?”

화제 변화가 갑작스럽다. 왜 갑자기 어린 시절로 화제가 튄 걸까. 역시 많이 취한 걸까.

재희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심박동이 서서히 날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한영은 그녀의 머리카락 한 줌을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굴리고 있었다. 만족감이 서린 얼굴이다. 재희는 어떻게든 무표정하려 애를 썼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를지라도.

그러나 한영의 손끝이 얼핏 볼에 닿는 순간, 재희는 더 견디지 못했다.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떴다. 무방비한 이한영은 잔인했다.

“어렸을 때 내가 너 많이 괴롭혔는데.”

재희는 다시 시선을 들었다. 계속 부끄러움을 타기에는 한영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

“……언제?”

“기억 못 하는구나.”

한영이 잔잔히 웃었다. 그녀의 갸름한 볼을 한 손가락으로 덧그리듯 쓰다듬었다.

재희는 그 손길에 반응조차 못 하고 한영에게 말했다.

“안 그랬어. 넌 계속 나 구해 줬잖아.”

넌 늘 나를 도와주고 구해 주느라 바빴다. 재희는 단단한 신뢰가 담긴 눈으로 한영을 바라보았다. 김선정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지만, 다시 그 이름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재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움직임이 한영의 시선에 잡혔을까?

한영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녀의 입술을 담는다. 관찰하는 것도, 궁금해하는 것도 같은 시선이었다.

“……우리 어렸을 때. 너는 다른 건 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도, 꼭 한 번씩 이상한 것에 집착했잖아. 곰 인형, 기억 안 나? 그리고 뽑기에서 나온 조잡한 자동차 모형도.”

자동차는 기억이 안 나지만, 곰 인형은 기억한다. 한영의 방 한구석에 언제나 외따로 놓여 있었던 닳고 해진 곰 인형. 자신이 그 인형을 무척 애지중지했다는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했다. 관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한영이 직접 내어 준 인형이었으니까.

그랬다. 그러나 그 과거가 왜 이 흐름에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재희는 덧붙여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손가락은 왜, 천천히 내려가고 있는 걸까.

이대로라면 입술을 건드릴 건데.

“한번 소중하다 생각하면 넌 그게 뭐든, 얼마나 엉망이든, 손에서 놓지 않았잖아.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재희의 속도 모르고 한영은 무심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 욕심도 부리지 않는 애 손에 있는 것을, 기어코 빼앗아 간 놈이 나였지, 아마.”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잖아. 빼앗은 거 아냐.”

“내가 달라고 하면 네가 줄 거란 걸 알고 있었거든.”

“…….”

“그걸 알고도 달라고 한 거야, 재희야. 그건 빼앗은 거야.”

“……한영아, 나는 그때-.”

재희는 더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흰 살갗을 훑던 손끝이, 어느새 입가에 닿아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입의 꼬리라 불릴 새초롬한 선을 한영의 손가락이 간지럽힌다. 도톰한 그녀의 입술이 건드리면 기분 좋을 것처럼 보였던 걸까? 재희는 알 수 없는 화끈거림에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벌어진 붉은 입술을, 한영의 단단한 손끝이 지그시 눌렀다. 눌린 아랫입술에서 젖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한영이 미소 지었다. 지극히 자상한, 그런 얼굴로.

“……재희야, 그래서 묻는 건데.”

“……응.”

“너도 ‘처음’이 소중해?”

“……처음?”

“첫 키스 같은 거.”

“…….”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만큼, 너도 소중하게 생각해?”

재희는 떨리는 눈을 들었다. 한영의 눈동자를 몇 번이고 확인한다.

농담이 아니다. 그는 진지했다.

입술에 닿아 있던 한영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눈을 마주친 순간, 재희는 전율을 느꼈다. 결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리라고, 이한영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얼굴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재희 앞에서 지어진 적 없는 얼굴이었다. 대놓고 아찔하게 유혹하는, 그 눈웃음은. 다른 여자들에게만 보여 줘서 재희를 속 쓰리게 했던, 그런 눈웃음인데-.

“……소중하다면 나한테 줘.”

그런 눈웃음으로, 한영이 조르듯 속삭이고 있었다. 여동생처럼 돌보아 오던 마재희에게.

“재희야, 다른 놈한테 주지 말고, 나한테 줘.”

재희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 못 했다. 그저 그래, 라는 짧은 단어였는지, 다른 사람한테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라는 긴 본심이었는지. 그러나 그 뜻만큼은 잘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웃고 있는 한영의 얼굴이 쓱 다가왔으니까.

입술에 물컹한 것이 닿은 순간, 재희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시선을 들었다. 한영이 눈을 휘며 웃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술을 마주한 채 올려다본 한영의 눈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깊기만 했기에- 재희는 눈을 감았다. 맞대고 있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듯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잠시 동안은.

초반의 침입은 가벼웠다. 탐색이었다. 점점이 가벼운 입맞춤이 떨어지는 가운데 한영의 입술은 주인을 닮아 처음에는 점잔을 빼고 정중한 선을 지키려는 듯 굴었다.

그러나 한번 열린 포문이 다시 닫히기 어려운 것처럼, 한영은 곧 본능을 드러냈다. 수줍음에 점차 고개가 말려 들어가려는 것을, 한영은 기어코 목덜미를 위로 감싸 올렸다. 손은 단단했다.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머릿속이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그 순간이 몇 분이나 이어졌는지, 재희는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입술이 맞붙었다, 다시 떨어지고, 그렇게 할딱이는 숨을 잇게 도와주겠다는 듯 한영의 혀가 재희의 입술과 턱, 목선을 느긋이 핥아 주고, 그러다 다시 그 혀를 따라 재희의 입술이 열리고-. 그 모든 행위가 점차 그녀가 알 수 없는 한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재희는 그 흐름 앞에서 벋대지 않았다. 그저 한영이 도망갈세라,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쪽, 쪽, 젖은 소리가 내내 울리는 가운데, 한영이 천천히 침대 위에 올라오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의 위에 덮여 있던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단단한 몸도 느꼈다. 모든 움직임이 부드러웠고,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 몸짓조차도.

“아…….”

자연스레 벌어진 허벅지 때문에 잠옷 치마가 말려 올라갔다. 아랫배는 물론, 속옷이 드러나 있다. 뒤늦게 그것을 발견한 재희가 당황하며 치맛단을 내리려던 찰나였다.

한영이 몸을 붙여 왔다. 노출된 흰 속옷 위로 지그시 한영의 사타구니가 닿았다.

앗. 재희는 끊기는 호흡으로 신음을 흘렸다. 묵직했다. 속옷 너머, 그리고 한영이 걸친 부드러운 바지 너머로 전해지는 감각은 뜨거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한영, 한영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재희는 몰랐다. 그것이 조르는 목소리에 가까웠다는 자각은 뒤늦게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귓불을 물고 있던 한영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다정한 듯 들리는 웃음소리와 달리 숨소리는 거칠었다.

한영아.

재희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애가 탔다. 계속해서 다리 사이로 모든 감각이 쏠렸다. 목이 말라 입술을 적시며 그녀는 젖은 눈으로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어떻게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때마침 그 순간, 한영의 한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아.”

재희의 볼이 붉게 타올랐다. 다리 사이에 맞닿는 단단함보다 가슴을 감싼 손이 더 부끄러운 그녀였다.

한영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봉긋 오른 가슴을 만졌다. 잠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안은 속옷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뭉실뭉실한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을 것이다. 그 부드러움조차도.

재희는 그녀의 목선을 간질이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듯 올라가는 감촉을 느꼈다. 한영의 손은 만족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느긋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엄지손가락이 장난치는 것처럼 둔덕 위의 유실을 건드릴 때마다 재희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유두는 금세 솟아올라 단단해졌다. 한영이 조용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그녀의 목가에서 떨어지는 얼굴이 보여, 재희는 할딱이면서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소 짓고 있는 한영의 입술이 젖어 있다. 그것은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목마른 사람처럼 가만히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더 해 줬으면 좋겠다. 이상한데, 기분이 좋았다. 재희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순진하게 기다리는 시선이 문득 감회를 느끼게 했던 걸까. 한영이 쓴웃음을 걸쳤다. 재희는 그 미소의 의미를 묻지 못했다. 한영이 곧장 고개를 숙인 탓이었다.

“아……!”

재희는 숨을 들이켰다. 한영이 그녀의 가슴을 물고 있었다. 잠옷 위로 가볍게 문 것이었지만, 재희는 찌르르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한영이 장난을 치는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에 도리질을 치며 고개를 들어 한영의 얼굴을 보았지만, 한영의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집중한 눈빛만 있었을 뿐.

“아아, 잠깐…….”

재희는 앓는 소리를 내다 말고 목을 뒤로 꺾었다. 비칠 듯이 얇은 잠옷이기는 했다. 한영의 혀 놀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영은 간간이 이를 세웠다. 그러다가도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가슴을 물고 빨아들였다.

그가 그렇게 입심을 줄 때마다 재희는 아랫배 깊은 곳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버거워 미약한 몸부림을 쳤다. 한영의 어깨를 잡고, 또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지만, 차마 밀어내지는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한영이 주는 감각에 몰두하느라, 단단히 결속되었던 손이 풀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유로워진 그의 양손이 마음껏 그녀의 몸을 누비고 다녔다. 한 손은 다른 가슴을 그러쥐고, 또 다른 손은 서서히 그녀의 배를 타고 내려갔다.

재희는 뜨거운 손이 어디까지 내려갈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가슴을 희롱하는 입과 혀에 몰두해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그랬는데-.

“앗……!”

한영의 손이 질척하게 젖은 속옷에 닿은 순간, 재희는 마치 무언가에 꿰뚫린 사람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 잠깐만, 한영아.”

재희는 이번에야말로 진정 당황했다. 속옷이 왜 이렇게 젖은 거지?

부끄러움에 허벅지를 다물려 했으나, 한영의 손이 단단히 그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놀랄 것 없다는 듯이 재희의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얼마나 젖었나,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손가락 네 개로 계속해서 밑을 쓸어내리듯 만졌다. 젖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민망했다. 단단한 손가락에 쓸리는 굴곡이 부끄러웠다. 그녀조차 만져 본 적 없는 예민한 곳이었다.

“거긴…….”

더럽다고 하려고 했다. 여전히 그녀의 가슴에 파묻혀 있는 한영의 머리를 감싸며 그렇게 말하려 하기는 했다. 그러나 한영이 손가락을 세워 어딘가를 지그시 누르는 순간, 재희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

방금, 뭐였지? 재희는 눈을 깜박였다.

그때 다시 한영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건드렸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그 감각에 집중했다. 한영의 손가락, 아마도 가운뎃손가락일 단단한 손끝이 파고들듯 한 점을 누르고 있었다. 다리 사이 깊은 곳, 세로로 갈라진 이상한 곳이었다.

미묘한 압박감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재희는 가만히 기다렸다. 내 몸에 이런 곳이 있었나? 그런 질문이 언뜻 뇌리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한영이 마치 맛이라도 보듯 손가락을 그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

속옷 때문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아 잘 다물린 살 두덩만 마찰하는 정도의 압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자신의 몸이 울컥, 하며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한영은 그녀가 충분히 젖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서히 그 주변 구를 문질렀다. 어쩌면 그녀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재희는 점차 손가락이 특정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진다는 것을 배워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영이 그것을 영민하게 파악해 나가고 있다는 것도.

점차 한영은 한 지점만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의 위쪽이었다. 그곳에 돌출한 부위가 있다는 것조차 처음으로 알게 된 재희는 앓는 신음만 흘렸다. 서서히- 이상한 기운이 무르익으며 몸을 달구고 있었다. 재희는 그것이 무서우면서도, 점점 더 기다려졌다.

“으응…….”

재희는 몸을 떨고 허리를 휘면서도, 아찔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리면서도, 자신의 몸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긴장하는지 몰랐다. 뭔가가 아찔했던 것 같은데, 강렬했느냐 묻는다면 답하기는 곤란한 애매모호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한영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재희는 그조차 좋아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도, 궁금해했다. 방금 그 감각은 뭐였을까? 그러나 그 질문은 한영의 키스 앞에서 너무나 쉽게 잊혔다. 다시 몸을 붙여 오는 한영 때문에 순식간에 잊혔다.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짓누르듯 그녀의 하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재희는 키스에 헐떡이면서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한영의 바지춤이 불뚝 솟아 있는 게 언뜻 보였다.

재희가 더 자세히 보려던 찰나 한영의 손이 이불 아래로 사라졌다. 그들을 감싼 이불 때문에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영의 하반신이 바투 붙어 오기 전까지는.

“……!”

재희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이미 젖어 있는 속옷은 없는 것만도 못 했다. 뜨겁고 딱딱한 살덩이가 맥박 치며 그녀의 다리 사이를 누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재희는 그것이 무엇인지 한영의 자세와 하반신의 위치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볼이 더 뜨거워질 수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뭐를…….”

뭘 하려는 거야?

그렇게 물으려 했다. 그 순간 다리 사이의 한 점을, 단단한 것이 비벼 올리지 않았다면.

“……아!”

일순 재희의 온몸이 반응했다. 그녀의 당혹이 무색하게, 한 번이 아니었다. 한영은 서서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옷에 계속해서 딱딱한 것을 위아래로 마찰시켰다. 미끈거려 마찰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재희는 앓는 신음을 흘리며 움찔거렸다.

점점 갈수록 재희는 알 수 없어졌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뜨거운 손바닥을 잡아야 하는지, 앞뒤로 흔들리는 한영의 허리를 잡아야 하는지. 그렇게 재희가 헤매는 사이 한영은 덮어 누르듯 상체를 바싹 붙여 왔다. 풍만한 가슴이 눌리는 감각에 신음을 흘리는 입술을, 그가 부드럽게 빤다. 그 입맞춤이 정중한 것과 다르게 한영의 허리는 이제 적나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희는 그 움직임이 언젠가 동네에서 보았던 개의 것과 닮았다는 것을 부지불식간 기억해 낸다. 암컷의 위에 앞발만 올라탄 수컷이, 꼭 지금의 한영이 그러는 것처럼 허리를 움직였었는데-.

“아아…….”

그때 연약한 살을 긁어내듯 딱딱한 것이 거세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다시 세차게 하반신을 부딪쳐 왔다. 이제 재희는 그가 그렇게 부딪칠 때마다 탁, 탁, 엉덩이를 때리는 살덩이를 느꼈다. 재희는 그게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저 예민한 샅을 계속 얻어맞을 때마다 짜릿함이 번져 목을 뒤로 젖혔다. 뜨거워. 헐떡이며 그녀는 생각했다. 젖혀진 새하얀 목에 닿는 한영의 입술은 그녀가 비음을 흘릴 때마다 그녀를 핥고, 빨았다. 그리고 가끔씩은, 깨물기도 했다.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사타구니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 즈음 재희는 다시 온몸이 후끈거려 정신을 못 차렸다. 그가 멈추지 않았으면 했다. 한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았다. 계속하고 싶었다. 그랬는데-.

“……재희야.”

귓가에 울린, 그 조용한 중얼거림 앞에서- 재희는 아찔함을 참지 못했다.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그녀의 입에서 적나라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한영이 기다렸다는 듯 뜬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비비고 마찰하는 것만 반복하던 단단한 것이 정확히 그녀의 중점을 찔러 왔다. 강하게, 날카로이, 속옷의 얇은 천이 막고 있는 작은 돌기를 몇 번이고 때렸다.

아파.

재희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두 다리는 말과 달리 바싹 한영의 허리를 죄어 당기고 있었다. 어서 더 빨리, 더 가까이- 그녀에게 오라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도 한영도 멈춘 채, 얼마나 서로를 옭아매고 있었을까. 마치 부푼 풍선에서 서서히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과 같았다. 재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 몸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녀가 떠올린 것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그러나 깊은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눈꺼풀이 무거웠다.

한영의 몸은 아직 뜨거웠다. 재희보다 늦게 끓어오른 걸까, 아니면 한번 끓기 시작하면 쉽사리 꺼지지 않는 것이었을까. 그는 이제 시작인 것처럼 몸의 근육이 잔뜩 성나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재희도 그것을 맞댄 몸으로 느끼기는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면서도 눈이 감긴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재희는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나 졸려.”

쪽쪽거리며 재희의 입술에 입을 맞추던 한영이 낮게 웃었다.

“……너무하네.”

“응……?”

“아니야. 졸리면 자야지.”

한영이 그녀의 옆에 누웠다. 침대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저 멀리 나뒹굴고 있던 이불을 끌어와 재희의 몸에 덮어 주었다.

재희는 잠시 그의 눈치를 보다가 그 품에 파고들었다. 역시 한영은 웃기만 할 뿐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녀는 이 기회에 욕심을 마음껏 부릴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영도,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키스며 뽀뽀며 다 해 놓고도, 재희는 그 가벼운 포옹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영의 몸이 뜨거워 좋았다. 그의 가슴이 꼭 그녀의 것처럼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잠들기에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재희는 그래도 좋았다.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하며 눈을 감을 정도로.

“잘 자, 재희야.”

“……응. 너도 잘 자.”

재희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한영이 그녀에게 조용히 입을 맞추는 감각이 점차 멀어져 갔다.

* * *

재희는 눈을 반짝 떴다.

멍하니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잘 닫혀 잠겨 있었다. 주춤거리며 일어난 침대에는 그녀 혼자였다.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옷에 이불까지 잘 덮여 있다.

내가 설마 꿈을 꾼 걸까?

재희는 천천히 이불 밑으로 손을 내렸다. 잠옷을 끌어 올려 다리 사이를 만져 보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꿈이…….”

아니다.

재희는 몇 번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있었던 일이야.

‘소중하다면 나한테 줘, 재희야.’

믿기지 않던 그 한마디를 떠올린다. 재희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마재희의 소중한 것들을 매번 달라고 했던 어린 이한영의 속내를 새삼스레 궁금해한다. 한영에게 곰 인형은 어떤 의미도 없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곰 인형뿐만이 아니다. 어제의 키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리고 이어진 행위 또한. 그것들은 마재희에게 소중하기에, 이한영에게 의미가 생긴 행위다.

그리고 그 의미를 짐작하려다 보면 왜, 라는 단어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왜.

왜 한영이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가지고 싶어 했던 걸까?

“…….”

어쩌면 난 그동안 한영이에 대해 오해를 크게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달달한 기대감에 젖어 재희는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단지 창문이 닫혀 있어서일 뿐인데, 흰 깃털을 매단 풍경은 바짝 굳은 것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어서 빨리 한영이 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재희는 곤란해졌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한영이를 봐야 하지?

재희는 벌써부터 부끄러워져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불에서 한영의 비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한영의 냄새만 맡고 있었을까. 재희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침 먹으러 가야지. 재희는 급히 욕실로 달려가 씻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렘이 꼭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재희는 욕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난감해했다. 입술이 잔뜩 부어 있었다. 얼음으로 몇 분을 식히니 입술은 다행히 평소와 비슷하게 가라앉았지만, 목덜미에 앉은 흔적들은 달랐다. 재희는 고민하며 목을 가릴 수 있는 옷을 골랐다. 머리는 풀었다. 거추장스러워 여간해서는 묶고 다녔던 긴 머리카락이 불편했지만, 참았다.

그 소란을 마치고 아침 햇살 아래 마주한 한영은- 언제나처럼 담담했다.

“어서 와.”

주방 조리대에 선 한영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전날에 만취했던 이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이었다.

정작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은 재희가 주춤주춤 안부를 물었다.

“……잘 잤어?”

“아니.”

“…….”

“농담이야. 잘 잤어. 왜 그렇게 굳어 있어.”

한영이 조용히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재희는 그 즈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은 괜찮아?”

“괜찮아.”

“……머리 아픈 건…….”

“머리?”

그때 거실에 기절해 있던 상현이 우당탕 화장실로 달려갔다.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이어졌다. 간간이 상현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욕설 사이사이로 한영의 이름이 들렸다.

그 소리를 잠시 듣는 것 같던 한영이 곧 재희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상현이는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아침은 북엇국으로 끓였는데. 괜찮아?”

“……괜찮아.”

평소처럼 조용히 웃고는, 한영이 고개를 돌렸다.

무심히 냄비 안을 휘젓는 옆모습이 보인다. 재희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재희야, 뭘 물어보려고 그렇게 눈치를 살펴.”

“……아니야, 아무것도.”

한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재희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는 그대로 한동안 그녀를 주시했다. 담담히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얼마쯤은, 의아함도 섞여 있는 시선. 재희는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한영은 기억 못 하는 거다. 시치미를 떼거나,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는 거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와줄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희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정뱅이.

“아니. 괜찮아.”

“…….”

“괜찮아. 정 그러면, 거실에 뻗어 있는 두 마리 좀 깨워 줘.”

언제 그녀를 주시했냐는 듯 그릇에 국을 담으며 부탁하는 한영은 무심했지만, 거실로 걸음을 옮기는 재희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거실 한편에 나열된 술병들을 멍하니 보았다. 노려본다고 노려본 것인데, 눈빛에 원망이 실리지 않는다.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나는 뭘 기대했던 걸까.

어쩌면 한영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인 일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술기운에 빚어진 사고 같은 거였다. 재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선정의 경호원에게 쫓기던 그날의 골목, 이한영은 마재희의 마음을 눈치챈 후 가라앉은 얼굴을 하지 않았나.

한영은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척할 것이다.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변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미친, 안 먹어. 지금 뭐 들어가면 토할 것 같아.”

“영재야…… 단어 좀 가려 줄래……?”

“아련한 척하지 마. 이게 다 네 새끼 때문이잖아.”

“얘들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점점 말이 거칠어지는 건 영재 때문인 것 같아. 재희야, 어떻게 생각해?”

다 죽어 나가는 목소리로 상현이 물었는데도, 재희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나란히 북엇국을 먹는 기분이란 그렇게 엉망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차츰 다행이란 생각을 세뇌하듯 해 나가고 있었다. 한영과 어색해지는 것은 싫다. 그러니 한영이 기억 못 하는 건, 잘된 일이다.

마재희의 ‘처음’을 가져가고 싶어 하던 어제의 모습은 그저- 이성 간에 조금쯤은 생길 수 있는 가벼운 흥미였을 테니까. 그 흥미가 취중에 아주 나쁜 방식으로- 나온 것일 테니까-.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상처받으면서도 재희는 결론 내렸다. 괜찮다고.

“야, 이한영. 어제 너 또 술버릇 나왔어.”

재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침울한 생각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에 잡힌 한영은 무표정하게 영재를 보고 있었다.

“……그래? 언제 들어왔어?”

“아마 두 시였나? 나랑 대화도 했는데. 기억 안 나?”

“…….”

“어제 네가 그렇게 취했는지 몰랐어. 먼저 뻗어 버려서.”

이건 무슨 말일까.

재희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상현을 보았다. 상현은 키들거리며 한영을 보고 있다가 곧 재희의 시선을 느낀 듯 입을 열었다.

“아, 한영이가 사실 필름 끊기면-.”

“-상현아.”

한영이 그린 듯 미소 지으며 상현의 말을 가로챘다.

“어제 네가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하여튼 별걸 갖고 부끄럼을 탄다니까.”

눈치 빠른 상현이 그렇게 입술을 닫는 시늉을 했으나, 문제는 영재였다.

“취하면 산책하는 술버릇이 뭐 어떻다고?”

눈치 없는 영재의 폭로에, 한영이 고요히 미소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상현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재희는 말없이 친구들의 얼굴을 보다 한영을 살폈다. 친구들은 아직 모르는 듯했으나, 재희는 알 것 같았다. 한영의 기분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그는 툭 건드리면 베일 것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고 있었다. 고요한 미소 아래, 그는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었다.

“쟤가 우리보다 술이 세서 문제야. 집 나가는 걸 보기라도 해야 붙잡지.”

“그러게. 맨날 들어오는 것만 잡아서. 한영아, 쑥스러워하지 마. 뭐 어때. 술 취하면 산책 좀 하고 올 수 있는 거지, 뭐. 인간적인데.”

상현이 킬킬 웃으며 한영의 어깨를 툭 쳤다. 한영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재희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느꼈을 법한데도, 한영은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평소의 그 예민함이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시선을 피하는 거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재희는 묻고 싶었다. 한영에게 직접.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던 거냐고.

그래서 그렇게, 술 마시는 날만 되면 창문 꼭 잠그고 자라고 당부했던 거냐고.

재희는 멍하니 한영만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정보들로 인해 그녀는 판단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걸까? 그래서 또 애먼 기대를 품고 있는 걸까?

그녀의 속이 얼마나 복잡하든, 모처럼 한영의 약점을 잡은 친구들은 낄낄거리느라 바빴다. 참다못한 것인지 한영이 한마디 했다.

“그만들 놀려.”

“박상현이나 놀렸지, 난 놀릴 생각 없다? 돌아다니다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냐.”

“그건 그래. 앞으로 술 마실 때마다 묶어 놓을까?”

상현의 장난 섞인 제안에, 한영이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전부터 그래 달라고 하지 않았나?”

“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어?”

애먼 곳으로 향하려는 대화를 영재가 바로잡았다.

“근데 정말 기억 안 나냐? 조금도? 밖에서 뭐 하고 돌아다니는지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 않냐?”

한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기억이 났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지도 않았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구나, 한영아.”

“없어, 그런 거.”

재희만 한영의 미소 속 냉랭함을 보았나. 영재가 픽 웃고, 상현은 키들거렸다.

“아, 맞다, 재희야…… 재희 씨? 여보세요?”

재희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상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전에 너 미팅했던 상대가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

“……아.”

“어땠어? 별로였어?”

어젯밤의 기억을 안고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는, 양심이 따끔거린다. 재희는 한영이 앉은 방향은 감히 쳐다볼 생각도 못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오, 괜찮았어? 괜찮았으면 전화번호 정도는 알려 주지 그랬어.”

“그냥…… 까먹었어.”

“까먹을 걸 까먹어라. 마음 없는 거면 그냥 확실히 밝혀. 감정 없는데도 질질 끄는 거 실례야.”

영재는 꼬아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밝히는 데 조금의 저어함도 없었다.

그리고 영재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응…….”

“그럼 어떡할까? 거절할까?”

상현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재희가 거절할 거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직접 연락할게.”

“어, 그럴래? 전화번호 알려 줄까?”

“응.”

그리고 대화가 잠시 끊겼다.

재희는 국그릇 속 북어채를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굴렸다. 한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금세 떨어질 시선이었다. 재희의 예상대로 언제 그랬냐는 한영의 시선은 떨어졌다. 묵묵히 그 순간을 감내하면서도 재희는 생각했다. 정말 엉망진창이라고.

식사를 끝마친 후, 상현과 영재는 술병에 나 죽겠다, 끙끙 앓으면서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영재는 하숙집에 돌아가면 아버지 전화나 줄기차게 받는다며 어떻게든 한영의 집에 남으려 했지만, 상현이 그를 끌고 나갔다. 급한 일이 있는 듯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두 친구가 사라지자, 한영의 집은 언제나처럼 차분한 소음만 이어졌다.

“술병은 내가 버릴게. 놔둬.”

“봉지에 담아 놓기만 할게.”

“괜찮아. 대신 그릇 물기 닦는 거 도와줄래.”

아무래도 한영은 술자리를 재희가 치우는 게 싫은 듯했다. 보통 나서서 도움을 부탁하지 않는 한영을 알고 있는 재희는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채곤 주방으로 향했다.

재희는 사실 이 순간이 매번 그렇게도 좋았다. 한영이 설거지를 하고, 그의 옆에서 그가 건네는 그릇을 행주로 닦아 내는 것이. 그런 식으로 나란히 붙어 서 있는 게 자연스러운 순간도 몇 번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어색하고, 또 불안했다. 한영과의 침묵을 단 한 번도 불편하게 여긴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내일 수업 아홉 시부터지?”

그녀는 애써 말을 붙였다.

한영은 짧게 그렇다, 대답했다. 그는 설거지를 하는 내내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그러나 곧 그는 몇 없는 설거지를 끝내고 손까지 깨끗이 닦아 냈다.

한영이 수도의 물을 잠그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내일 심 교수님 때문에 일찍 나가 봐야 해.”

“심 교수님? 왜?”

“뭐 좀 도와달라고 해서.”

“……요즘 과제 많지 않아?”

“그러게.”

한영은 무심히 웃었다. 그리고 흘러가듯 말했다.

“일이 결국 그렇게 됐네.”

재희는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뭔가-.

그러나 재희가 문득 느낀 위화감과 달리, 한영은 별다른 의미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가벼운 농담을 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온히 웃으며 입술을 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돌연,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을 직시하던 시선이 어느 사이엔가 아래를 향해 있었다.

“한영아, 왜 그래?”

한영이 무엇을 보는지, 재희는 처음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잠시 무심결에 내려갔던 시선이리라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물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왜 내 목을 그렇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이냐고.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닌데 아침에 급하게 목까지 올라오는 겨울옷을 꺼내 입었다. 긴 머리는 불편한데도, 묶지 않았다. 그렇게 전날의 수습으로 아침에 바빴던 것을, 그녀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젯밤, 한영이 얼마나 그녀의 목에 이를 세웠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재희.”

한영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녀를 향해 몸을 비트는 몸짓조차 정적이었다.

한영은 싱크대 옆에 걸어 둔 수건에 손을 뻗었다. 손의 물기를 닦아 내면서도 그는 그녀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는 것처럼.

한영이 건조하게 지적했다.

“목에 이상한 자국이 있는데.”

“……아.”

재희는 자신이 어떻게 변명을 떠올렸는지도 몰랐다.

“……간지러워서 긁다가…….”

그러나 그 대답만으로는 피부에 남은 잇자국을 설명할 수 없다. 굳어 있던 머리가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단히도 이 순간을 도피할 방법을 찾았다. 입술을 깨물고 싶었으나, 재희는 참았다.

한영은 무심해 보였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두고 보자는 듯 지켜보는 시선이었다.

“창문 열어 놓고 잤어?”

한영이 물었다.

재희는 무심한 척 답했다. 으응.

“그랬구나. 모기가 아직 남아 있었나 보네.”

“……응.”

한영이 고요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잠깐 볼 수 있을까?”

“뭘……? 아, 아니-.”

거절하려 했다. 네가 굳이 보지 않아도 괜찮다,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한영이 더 빨랐다.

한영이 부지불식간 손을 뻗었다. 단번에 그녀의 목을 가리고 있는 옷을 끌어 내렸다. 한영답지 않게 섬세함 없는 손길이었다. 속도에만 집중한, 그리고 재희의 의사는 관심도 없는, 재빠른 손길.

단숨에 쇄골까지 내려가 버린 옷에, 재희는 몸을 움찔 굳혔다. 당황해 목 티를 잡아 내린 손을 붙잡았지만 꿈쩍도 안 했다.

“…….”

한영의 시선이 냉정히 피부를 쓸고 다녔다. 흰 살결에 남은 붉은 잇자국을, 그녀가 신음할 때마다 빨아올려져 살에 남은 멍 자국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폈다.

그 눈빛이 서서히, 싸늘히 식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어. 사춘기 어린애도 아닌데 꿈을 꿨거든.”

한영이 그녀의 목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숨길 수 없는 격발을 암시하고 있었다. 재희는 한영이 지금 한 꺼풀 너머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그녀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속살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한영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남자들은 그래, 재희야. 억누른 욕구가 가끔 꿈에 나오거든. 그 꿈을 통해 욕구를 배설하는 거야. 한밤중에, 무방비하게. 조절조차 못하고.”

“…….”

“넌 모를 거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어떤 인간인지 확인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한영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쇄골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목선을 쓸었다. 간지럼이 스쳐 재희는 몸을 떨었다. 호선을 그리는 한영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영의 눈에 빛나는 비정상적인 열기가, 매서울 정도로 형형해져만 갔기 때문에-.

“어젯밤에 꾼 꿈이 뭔지 알려 줄까?”

“……한영아, 잠깐만.”

“내가 누군가를 범했어. 억지로 다리를 벌렸지. 싫다고 울부짖는데, 그것조차 예뻤어. 그래서 그 목을 물어뜯었어. 그 안에다 몇 번이고 사정했지. 피임도 안 하고, 몇 번이나.”

재희는 바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늦은 이해가 뒤따르자, 그녀는 급히 부인했다.

“……그게 아니야, 한영아. 억지가 아니었어. 절대, 그런 게…….”

한영은 오해하고 있었다. 꿈과 취기 사이에서 과거를 왜곡하고 있었다. 어젯밤의 관계는 폭력이 아니었다. 그런 게 폭력일 리 없다. 이상하고 알 수 없는 행위였을지라도, 재희는 분명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한영은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재희에게서 다른 진실을 읽어 냈다.

본질에 충실한 진실을.

“……하긴 했다, 이거네.”

그 중얼거림이 전조였다는 것을, 재희는 몰랐다.

늘 고요하고 점잖았던 소꿉친구가 그렇게 동물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한영은 그녀가 물러날 새도 없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부딪히듯 맞닿은 몸이 단단했다.

재희는 그 몸을 밀어내려 했다. 당황스러웠다. 아직 어젯밤의 열기를 잊지 못했다. 한영의 체취도, 피부의 뜨거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몸이 기뻐했다. 혼란스러워 그를 밀어내려 하면서도, 그녀는 매달리고 싶었다.

그때 한영의 손이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치마였다. 주름이 예쁘게 잡힌 데다 폭이 넓어 편할 거라고 인혜가 사 준 것이었다. 편하단 말은 맞았다. 한영은 어떤 방해도 없이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넣었다. 얇은 속바지와 그 안의 속옷마저, 너무나 쉽게 끌어 내렸다-.

“내가 이곳에 들어갔어?”

“아, 잠깐……!”

재희는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뜨며 바르작거렸다. 다리 사이, 예민한 곳을 지그시 누르는 감촉이 있었다. 그것이 한영의 손가락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영이 다정한 목소리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재희야, 내가 네게 사정했어?”

“……아아…….”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온몸이 달아올랐다. 재희는 울상을 지으며 한영의 가슴팍을 밀었다. 그러나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에, 재희는 애꿎은 그의 옷만 움켜쥐었다.

한영의 손가락이 계속해서 그녀의 다리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어젯밤 그의 하체가 몇 번이고 문질렀던 곳이다. 그런 예민한 곳을, 한영은 마치 과학자 같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만졌다. 관찰이자, 촉진이었다.

그리고 한영은 진단을 내리는 의사처럼 짧게 속삭였다.

“……젖어 있네.”

아니야.

재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젖어 있을 리 없다. 샤워를 했다. 젖어 있던 허벅지며, 안쪽이며, 분명 아침에 다 닦아 냈는데.

“……묻잖아, 재희야. 내가 이 안에 쌌냐니까.”

다정함의 허울이 벗어질 듯 말 듯, 서늘한 감이 말끝에 어렸다.

재희는 헐떡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안 그랬어…….”

“그래?”

한영이 차분히 반문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어?”

“아…… 어딜…… 뭘…….”

재희는 질문하다 말고 한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을 흘렸다. 손가락이 얕게 몸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어제가 되어서야 희미하게 존재를 깨달은 곳을, 그의 손가락이 탐험하고 있었다. 강압적으로 그녀의 몸을 옭아매고 있으면서도, 손가락만큼은 섬세하게. 조심스럽게.

재희는 도리질을 쳤다. 또 시작되고 있었다. 어젯밤 느꼈던 그 이상한 기분이, 또다시-.

“한영아…….”

앓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어깨와 목에 자꾸 볼을 문질렀다. 봐주었으면 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기분이 이상하게 고양되고 있어서- 괴로웠다.

그러나 한영은 멈추지 않았다. 자상히 괜찮다, 말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안쪽을 더듬었다. 속살 사이로 밀려들어 오는 손가락이 한 마디쯤 밀고 들어오기까지 오랜 시간도 아니었는데, 속살은 순식간에 녹진하게 풀어졌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질퍽한 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알 수는 없었어도, 재희는 그 소리가 부끄러웠다.

“다치지 않은 걸 보면, 들어가진 않은 것 같은데.”

“……으응…… 그만, 그만해…….”

“……알아.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가슴의 진폭과 함께 낮은 음성이 속삭인다. 괜찮아, 재희야.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한영의 체온 때문인지, 볼이 뜨겁다. 이 심장 소리는- 자신의 것일 거다. 적나라하게 자신의 감정을 알리고 다니는 심박 소리에 재희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때였다.

한영의 손가락이, 안쪽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아……!”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것뿐이다. 허벅지가 떨려 와 주저앉으려는 것을 한영이 허리를 붙잡아 세웠다. 그의 손길도 극도로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지금 그가 만지고 있는 부위가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파?”

“아니…….”

재희는 더듬더듬 설명했다. 네가 뭘 의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내게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그렇게 똑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그 대답 속에서 교묘히 진실을 이끌어 내는 것은 한영의 몫이었다. 한영은 그녀에게 차근차근 물었다. 내가 옷을 벗었어? 네 옷을 벗겼어? 속옷은? 점차 부드러워지는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한영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속살을 비집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속살이 맞물려 갈라진 입구의 윗부분을 만져 주었다. 작고 둥근 돌출구가 잡히는 곳을 만져 주면, 재희가 무서워하지 않으리란 것을 아는 것처럼.

“으응…… 아…….”

그리고 한영은 어제나 오늘이나, 옳았다.

재희는 흐느꼈다. 어제보다 더 진해진 감각이 그녀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한영은 어느 순간부턴가 말을 하지 않았다. 간간이 낮은 숨소리가 끓듯 새어 나오는 것을 들은 것 같다. 그러나 재희가 그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느릿하게 문지르던 손가락이 점차 속도를 올려 갔다.

다리가 꼬이고 말려들며 한영의 손을 조였지만, 한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단단한 암석 같았다. 그녀가 아무리 몸을 바르작거리고 매달려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희는 얼마 가지 않아 어제 느꼈던 고양감을 다시 내몰리듯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간드러지는 신음과 숨결이 한영의 가슴 위로 쏟아졌다. 손가락이 더 빨라질 수 없을 정도로 강렬히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질끈 감은 눈앞에 불빛이 번쩍였다.

재희는 자신이 창살에 꿰인 어린 짐승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도 몰랐다. 또다. 그렇게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다. 어젯밤에 느낀, 그 감각이 또- 찾아왔다고.

그렇게 얼마나 한영의 허리춤을 붙잡고 몸을 떨었을까.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가운데 단단한 한영의 몸이 느껴졌다. 재희는 숨을 내쉬며 그녀가 기대고 있는 한영의 몸을 느꼈다. 긴장해 있는 배 근육. 얇은 천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그녀만큼이나 열이 오른 그 몸이, 재희가 숨을 고를 때까지 진득하니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재희는 눈물이 핑 돌았다.

도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다.

한영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의 속내를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살며시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있었다. 재희는 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한영의 입술이다. 그가 그녀에게,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황망한 재희가 눈치채지 못하라고, 미약하고 부드럽게-.

“……한영아.”

그 때문이었을 거다. 화나고, 슬프고, 그럼에도 기쁘고, 기대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생기고-. 그녀는 복잡한 감정에 얼기설기 묶여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우리, 뭐 한 거야?”

눈을 들어 본 한영은 담담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재희의 흥분은 조금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재희야, 알잖아.”

“……몰라.”

“추행이었어.”

재희는 멍하니 그를 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다정함으로, 한영은 다시 속삭였다.

“재희야, 내가 방금 너 추행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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