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충격과 불안, 그럼에도 느낄 수밖에 없었던 행복으로 점철된 명절이 지나고, 일상은 언제나처럼 돌아왔다. 대학교로 다시 몰려든 학생들은 긴 명절이 남긴 후유증을 앓았다. 수업에 충실하든 충실하지 않든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서로의 입과 혀, 귀를 통해 다시 일상에 복귀하게 되었다. 새로운 소문 몇이 그들의 뒤통수를 때린 탓이었다.
“김선정이랑 사귄다고?”
“걔가 그렇게 예뻐?”
“아니. 한영이 전 애인에 비하면-.”
이한영과 김선정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공공연하게 다른 이름으로 들썩였다.
“강대환이 실종이라고?”
“어떻게 된 거야?”
“몰라.”
“남영동이나 남산에 끌려간 거야?”
“모른다니까. 누가 알겠어.”
소문이 먼저였고, 비극은 그다음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재희는 선배, 동기들과 함께 그녀를 강아지라 부르던 선배를 찾아갔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격분하는 동안,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순간을 버텼다. 유가족은 사고였다고 말했다. 급히 거처를 옮기는 중에, 도로를 달리는 차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다고.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재희는 몇 번이고 눈을 감은 채 현기증을 견뎠다. 간혹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습관적으로 좁은 지름길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큰길로 돌렸다.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가 그제야 서서히 멀어졌다.
구둣발, 미약하게 발을 저는 습관. 똑같은 남자였다.
“…….”
이 모든 것은, 언제쯤이면 끝날까.
재희는 인파에 섞여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았다. 출구가 없는 길 위였다.
* * *
“요즘은 어때?”
텔레비전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던 재희는 정신을 차리고 상현을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상현은 조용했다.
“……더 따라다니지는 않는 것 같아.”
강대환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을 마지막으로, 미행은 더 없었다.
“……역시 경찰이었던 거네.”
상현이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어. 학교 분위기도 안 좋은데,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상현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충고했다. 한영의 집 거실 바닥에 누운 상현의 자세는 늘어진 듯 편했지만, 그 속마저 그렇게 편하진 않다는 걸 재희도 알고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내가 뭘 했다고. 됐어.”
“해 준 거 많아. 바쁜데 계속 하굣길 같이해 줬잖아.”
상현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한영이한테 혼날 일 생길 때 내 편 좀 들어줘.”
“응.”
“음, 세 번은 내 편 들어줘야 해.”
“응.”
재희가 보기에, 상현은 재희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영이 상현에게 화를 내기로 마음먹는다면, 재희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한영이 재희를 아낀다 한들, 그뿐이리라고 재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한영이 선정과 사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래, 쭉 그랬다. 한영에 대한 생각을 최대한 접으려 노력해 왔다. 재희는 텔레비전 속 야구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상현아.”
“응?”
“재미있어?”
그제야 상현이 웃으며 소파에 앉은 재희를 돌아보았다.
“왜? 재미없어?”
“응.”
텔레비전에서도 희미하지만 성난 관람객들이 외치는 야유가 들렸다.
때마침 중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정을 하고 져 주려 하네요. 예, 노골적이에요. 후기 리그 우승은 물 건너간 이상 전기 리그 우승팀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이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재희는 야구의 열성적인 팬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현은 달랐다. 프로 야구가 출범한 이 년 전보다 훨씬 더 전부터 상현은 야구를 좋아했고 곧잘 고교 야구전도 보러 다니곤 했었다. 재희는 상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폈다.
“화났어?”
“왜 화를 내?”
“……자이언츠 팬으로서 자존심 상할 것 같아서.”
“어? 나 자이언츠 팬 아니야.”
손바닥을 팔랑거리며 상현이 웃었다. 재희는 내심 의아했다. 영재의 서슬 퍼런 눈을 피해 한영의 집에서 몰래 프로 야구 중계를 볼 때마다 상현이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현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 호랑이들 팬이야.”
“해태?”
“엄마가 열성 팬이라서.”
재희는 말수 없던 상현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열성 팬’이란 단어가 붙을 정도로 열정적인 분은 아니셨던 것 같은데. 말수가 극히 적었던 상현의 어머니를 떠올리던 재희는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동생을 귀여워하듯 미소 짓고 있던 상현이 곧 실실댔다.
“어이구, 우리 병아리…… 궁금해도 묻지 않고 이해해 주고…… 벌써 다 컸네?”
“……병아리라고 부르지 마.”
“그러고 보니, 우리 병아리, 어미 닭은 어디 내버려 두고 왔어? 병아리 혼자 종종거리며 돌아다니게 둘 어미 닭이 아닌데-.”
그 순간 무심한 음성이 재희의 귓가에 찾아들었다.
“그 어미 닭이 설마 나는 아니지?”
이한영을 더 생각하지 않으려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재희는 반가움부터 느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이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한영이 싱긋 웃었다.
상현이 킬킬거리며 한영을 놀렸다.
“친구야, 소식이 늦구나. 우리 사이에서 너 어미 닭이라 불린 지 꽤 됐어.”
“그랬어?”
“어. 얼른 와. 지금 정말 재미있다? 프로 야구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경기거든.”
한영이 웃으며 다가와 재희 옆에 앉았다.
재희는 예민해지는 신경을 애써 가라앉히며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이내 느껴진 감각에 시선을 내렸다. 소파를 짚고 있는 재희의 손 위를 한영의 손이 덮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맞닿음이었는지 한영의 손은 바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재희는 한영의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을 보았다. 셋째 손가락 옆에 자리 잡은 굳은살이 계속 짓눌려 있었던 것처럼 벌겠다. 팔이 저린 듯 주먹을 계속해서 폈다 쥐었다 하며 드러나는 한영의 손바닥을, 재희는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제 보니 한영이는 생명선이 짧구나.
미신을 믿지 않지만, 괜스레 신경 쓰여 한영의 손금을 뚫어져라 보았다. 한영의 손이라면 많이 보기도 하고 잡아도 봤지만, 손바닥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한영이 야구 중계를 보는 동안 재희는 찬찬히 그 손을 관찰할 작정이었다.
다른 손이 불쑥, 재희의 손을 부드럽게 잡기 전까지는.
손에서 올라오는 촉감이 먼저였다. 그리고 그 후에야 재희는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는 다른 감각들을 인지했다.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중계진의 목소리, 함성 소리, 그리고 그 앞에 붙어 앉은 상현의 인기척,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 붙잡힌 손에서 올라오는 열기까지도.
그 모든 인식 후에 뒤따른 것은 자각이었다.
왜 진작 몰랐을까? 눈으로만 관찰한다 여겼던 재희는,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을 뻗어 이한영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끝으로 이한영의 단단한 손마디와 손바닥에 새겨진 실금들까지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이 성가셨던 한영은, 참다못해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리라.
스스로도 제 행동에 놀라 재희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이다. 살피는 시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삐딱하게 기운 고개가 한영의 심중에 있는 못마땅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아…….”
재희가 그 얼굴에 덜컥 겁을 먹기 무섭게, 한영은 눈을 나긋이 휘었다. 일상적인 미소라 보기에는 다소 미묘한 빛이 섞인 미소였다. 그 의미를 파악하려 재희가 한영의 눈을 빤히 들여다볼 때였다.
“잠깐 나갔다 올게.”
한영이 천천히 잡은 손을 재희의 허벅지 위에 놓아 주었다. 언제나처럼 평온한 얼굴로, 한영의 시선은 자연스레 상현에게 흘러가 있었다.
상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약속 때문에.”
“데이트?”
“비슷해.”
“나야, 그 여자야.”
“너.”
상현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조금만 더 옆에 있어 주지? 어떻게 소파에 엉덩이 한번 걸쳤다 바로 일어나?”
“……글쎄.”
몸을 일으키며 한영은 덧붙였다.
“이길 마음도 없이 마운드에 올라 있는 선수를 보는 건 허무하지 않나.”
“뭘 또 허무씩이나 느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이기는 거 보면 되는 건데.”
상현이 가볍게 대꾸하는 말에 한영은 말없이 웃었다.
“보고 가.”
한영이 그렇게 상현에게 인사를 건네고 재희를 보았다. 평소처럼 물끄러미 한영을 올려다보는 재희였지만, 그녀는 내심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 맞춰 올게.”
그러나 속이 복잡한 재희와 달리, 다정히 웃는 한영의 얼굴은 평상시와 같았다.
재희는 머뭇거리다 조용히 대답했다. 응.
그 대답에 만족한 것처럼 한영은 한번 웃고는 등을 돌렸다.
한영이 사라진 계단을 재희는 한동안 응시했다. 한영에게 잡혀 있었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시선을 내리떴다. 뒤늦게 볼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멍청이. 재희가 얼마나 속으로 격렬하게 자책하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 한영이, 요즘 또 나쁜 연애 시작했다며?”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상현의 얼굴은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희는 괜히 부끄러워져 상현의 뒤통수로부터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연애에 나쁜 게 어디 있어.”
무엇이 그리 웃겼을까. 상현이 웃었다.
“왜 없어. 지금 한영이가 하고 있는 게 나쁜 연애야.”
“……무슨 뜻이야?”
“혈기를 주체 못 하는 거지. 우리 병아리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귀족처럼 보이는 한영이라도 그 옷 아래에는-.”
“박상현, 나 아직 안 갔어.”
겉옷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한영이 한마디 했다.
상현이 마치 철없는 아이처럼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런 상현을 보며 한영도 담담히 미소 짓는다. 그러고는 재희에게 눈인사를 슬쩍 건네고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오, 최동원이다.”
상현의 관심이 다시 야구 중계에 쏠렸다.
재희는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 속 관중들의 함성이 엉켜 있는 머릿속을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재희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한영이는 내게 계속 경고를 주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언제까지고 병아리일 수 없는 법이고, 마재희와 달리 자신은 이미 닭이라고. 그러니까 병아리 시기의 행동을 그대로 고수했다가는, 닭인 자신이 곤란하다고.
선정과 은밀히 나누던 사적인 행위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무방비하게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재희의 손을 저지함으로써-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무분별하게 서로를 대하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안경을 낀 투수가 신중히 눈을 빛내는 화면을 보며, 재희는 불쑥 가슴이 조이듯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한영이가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이러는 걸까? 이렇게 선을 긋는 행위를 몇 번이고 하는 것은?
“……상현아.”
“왜?”
어차피 한계점에 임박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재희는 명절 이래 줄곧 고민하고 있던 부탁을 상현에게 했다. 그리고 그 부탁 앞에서, 상현은 어리둥절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당혹스러운 얼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곤란한 얼굴이기도 했다.
때마침 텔레비전 속 중계진이 혀를 찼다.
「볼이네요.」
「네. 볼입니다.」
텔레비전을 돌아본 상현이 잠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음.”
그러나 그는 곧 씩 웃으며 재희를 보았다.
“우리 병아리, 걱정 마. 이 오빠 닭이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 * *
“커피 생각 없으세요?”
식사 중에도 종종 시선을 피하던 남자가 간신히 용기를 끌어모았으나, 재희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업이 있었다. 학교 정문까지 데려다주겠다는 호의도 재희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 행동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홀로 학교로 돌아오며 재희는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한영은 말했다. 함께하는 시간으로 키워 나가는 사랑을, 보통의 사람들이 더 많이 한다고. 사랑에 회의적이던 자신의 견해를 돌려서 표현하던 한영의 차분한 미소를 잠시 떠올린다.
사실 재희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영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놓든가,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상현이 소개해 준 남자를 만나 대학가의 유명한 경양식집에서 점심까지 같이했지만, 재희는 확신하지 못했다.
이게 정말 옳은 걸까?
괜히 다른 사람의 시간과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애초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죽을 수 있는 것이 마음이라면- 왜 나는 여태 그것을 죽이지 못했을까.
“……지? 한영아, 너는 어땠어?”
어렴풋이 들려온 그 목소리에 재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전봇대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은 잠시, 재희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전봇대 너머, 그녀가 잊을 수 없는 뒷모습이 서 있었다.
재희는 상황도 잊고 반가워 언뜻 미소 지었다. 그러나 곧 한영 옆에 선 다른 인영을 확인한 후, 그 미소는 빠르게 사그라졌다.
“이 레스토랑 다른 사람이 예약해 줬다며. 누구야?”
“발이 넓은 친구가 있거든.”
“많이 친해? 나도 소개시켜 줘.”
“시간 되면 소개해 줄게.”
“약속한 거다?”
새침하게 말하는 선정에, 한영이 대답 없이 잔잔히 웃었다.
재희는 길게 빼고 있던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돌렸다. 왜 자꾸 이렇게 엿듣게 되는 걸까. 멍하니 재희는 침울해졌다.
“엊그제 뭐 했어? 저녁이나 하려 했더니.”
“집에 있었어.”
집?
재희는 한영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엊그제라면 상현이와 야구를 보던 날인데. 그때 한영은 분명 외출했다. 선정이와 데이트를 하러 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맨날 집이래. 집에 뭐 숨겨 놓은 거 있어?”
재미있다는 듯 웃는 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다면?”
“……구경하러 가야지.”
“그래, 그럼. 볼 건 없지만, 내일 놀러 와.”
“정말?”
재희는 전봇대에 묻은 검은 얼룩을 보며 십 분 전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던 남자를 어떻게든 떠올리려 한다. 상현이 친구의 동생의 지인이라고 했지. 이름이 뭐였지?
그때 선정이 짜증스레 외쳤다.
“아저씨!”
재희는 지척에서 짤랑, 하고 종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서 있는 전봇대 앞에 있던 가게 문이었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탁탁, 계단을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딱딱 울리는 구둣발 소리였다.
재희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그것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자연스러운 수렴이자, 깨달음이었다. 그 발걸음은, 한쪽이 무거운 것처럼 직직 끌리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재희는 저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었다-.
“명색이 경호원인데, 너무 자유로우신 거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아, 몰라요. 차 키나 주세요.”
선정의 성마른 어조를 들으며, 재희는 잠잠히 의문을 품는다.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기관원이나 경찰이 아니라- 선정의 경호원이 그동안 날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태워 준다는 선정의 제안을 부드럽게 연거푸 거절하는 한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희는 쪼그려 앉았다. 선정이 탄 차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도 이해는 불가했다. 경호원이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은 적었다. 선정이 경호원을 시켜 재희를 감시하게 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대체 왜 그랬을까?
“식사는 제대로 하셨어요.”
문득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한영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는 한영보다 머리 하나 작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직.”
무심히 대꾸한 남자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이 어린 선정에게 함부로 대해진 것에 환멸을 느끼는 듯했다.
재희는 고요한 시선으로 남자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밝은 하늘 아래 본 남자는 군인인 그녀의 큰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구릿빛이면서도 기골에 각이 잡혀 있다. 한영이 건넨 담배를 받아 입에 무는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라이터를 건네는 한영도 익숙해 보였다.
그새 친해진 걸까.
재희는 이도 저도 못 하게 됐다는 생각부터 떠올렸다. 그렇게 멀어지는 두 남자의 등을 한동안 응시했다.
한영은 오늘 저녁 식사는 함께하지 못한다고 어젯밤 미리 말해 주었다. 한영도 없는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재희는 오랜만에 해가 질 무렵까지 도서관에서 과제를 했다. 물론 과제 수행에 있어 효율은 좋지 않았다. 낮에 보았던 선정의 경호원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재희는 몇 번이고 선정의 의도를 궁금해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에서였건, 미행은 더 없었다. 선정이 뭔가 오해한 게 있었던 것이리라. 추석에 선정과 한영이 나눈 대화를 통해 추측해 보면, 이한영과 마재희 사이에 무언가 있으려니 싶어 의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절묘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명절 직후, 장례식을 다녀오는 길 이후로는 미행이 더 없었다.
즉,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 것이었다.
“……다 끝난 일.”
재희는 괜스레 그 단어를 읊조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한영을 향한 마음도 그렇게 끝이 나야 하는 것이라고.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다정하지만, 상대를 구속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줄곧 재희가 지켜본 한영의 연애 방식이다. 그러나 한영은 이전의 애인들과는 다르게 선정을 대했다. 한영은 선정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조차 떼지 않았다. 그 자상한 눈빛을 학교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가. 학생들 모두가 그래서 더 쑥덕거렸다. 여자가 끊이지 않던 이한영이 이번에야말로 진짜 정착한 것이라고.
그렇게 좋은 관계에 자신이 재를 뿌린다면, 한영은 정말로 곤혹스러워할 것이다.
재희는 이 일을 비밀로 묻어 둬야 한다는 쪽으로 차차 판단을 기울여 갔다. 한영은 선정이 재희를 이용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줬다. 그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이제 더 이상 그에게는 자신이 일 순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게 되어 슬플 뿐이었다. 그 정도로 사랑해 줄 정도로 선정이가 좋은 건가 싶은 서글픔과 질투뿐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 끝난 일이니까.
재희는 가만히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선정이도 이제 한영이의 진심을 알았으니 더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을-. 재희는 더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인기척을 감지한 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주차된 봉고차의 백미러로 거무스름한 형상이 비쳤다. 그녀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절뚝절뚝, 불안하게 흔들리며.
혼란스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날 선 청신경이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잡아냈다.
잠깐 따라오다 말 거야.
재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정한 보폭으로 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늘 그러지 않았나. 조금 쫓아오는 흉내만 내다가 남자는 사라질 것이다.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재희는 서서히 자신의 걸음에 속도가 붙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뭔가 다르다. 이제까지와는.
재희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어느새 남자는 열 발자국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빠르다. 재희는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인적 없는 주택가였다.
아무도 도와주지 못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위기의식에 내몰린 정신이 재빨리 한 방향으로 향했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해.
스스로 도망가야 해.
점차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재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비추지 않은 곳에서 뛰어오는 검은 형상이 비친다. 기우뚱, 기우뚱, 기울어지면서도 달려오는 형상에 일순 소름이 끼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재희는 곧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저 사람, 다리가 불편하잖아.
다시 한번 골목을 꺾어 들어가며 재희는 빠르게 계산해 보았다. 어쩌면 이것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선정이나 저기 저 남자나, 재희가 그들의 관계를 모를 거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저 남자에게 미행의 이유를 묻는다면.
그렇다면, 방심하고 있을 저 남자에게서 뭔가 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판단이 그렇게 선 순간, 재희는 급히 방향을 꺾어 달렸다. 전속력을 다한 터라 거리는 다시 벌어졌다. 어릴 때부터 뛰어 놀던 골목길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구조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녀는 잘 알았다. 조금만 더 가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 도로가 나온다는 사실도.
그 가까이까지 가자.
재희는 뒤쫓아 오는 소리의 크기를 따라 달리는 속도를 조절해 가며 생각했다. 큰 도로 가까이에서 멈춰서, 저 남자에게 물어보는 거야. 언제라도 도로 밖으로 도망갈 수 있게 거리를 두고서.
그렇게 재차 상황을 살피며 남은 한 모퉁이를 두고 또 다른 골목을 지날 때였다.
옆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
순식간에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 깜짝할 새였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든 상대는 바로 그가 숨어 있던 골목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다.
붕 뜬 다리를 내려다보며 들려 가는 중에도 재희는 반사적으로 뒤에 있는 상대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그러나 틈 없이 옭아 온 몸은 어떤 타격도 없었다. 신음 소리조차 없었다. 몸이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그녀의 배를 감싼 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라는 짐을 매달고 있음에도, 성큼성큼 옮기는 보폭은 균형이 잡혀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누구지? 그렇게 그녀가 의문을 품던 찰나였다.
뒤늦게 익숙한 체취가 코끝으로 밀려들어 왔다.
“…….”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재희는 슬그머니 고개를 비틀어 들어 올렸다. 검은 야구 모자의 챙이 보였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쏘아보는 눈도. 재희는 한영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의문을 품기 전에, 그 날 선 눈빛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한영은, 화가 나 있었다.
아무리 불쾌한 일에도 입가의 미소만큼은 습관적으로 달고 있는 한영이다. 그런 한영이 표정을 굳힐 정도면, 어지간한 감정이 아니라는 소리기에-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미안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계속 사람 하나 안고 가는 것은 힘이 들 거다. 재희는 배를 감싸고 있는 한영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한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한영은 재빨리 옆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물 흐르듯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대문이 열려 있는 남의 집에 성큼 들어섰다. 대문을 조용히 닫았다. 재희를 담벼락에 바짝 붙여 세운 후였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등에서 느껴지는 순간 재희는 저도 모르게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한영은 담벼락의 높이를 확인하듯 위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 얼굴은 무감정해 보였지만, 재희는 분명히 보았다. 그들이 서 있던 골목에서 들린 발소리에, 그의 눈이 싸늘히 빛나는 것을.
발걸음 소리가 다가온다.
재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대문을 확인했다. 철문 아래로 그림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한영이 소리 없이 몸을 붙였다. 재희의 앞으로 바짝. 그녀의 다리와 한영의 다리가 얽히도록. 그렇게 서로의 골반이 부딪치고, 어떤 사심도 없는 한영의 손이 재희의 허리를 감쌀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깝게.
“…….”
그녀도 알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두근거리는 심장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재희는 떨리는 눈으로 코앞에 있는 한영의 숨골을 보았다. 살갗에서 풍기는 체취에 비누 향이 섞여 있다. 그와 그녀의 심장 박동이 서서히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아, 재희는 눈을 내리떴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떨어져 있었으면. 아니, 아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렇게 가까이 할 수 있겠어.
왜인지 목이 타, 재희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설렘과 홍조를 관찰하는 예리한 시선을.
“…….”
“…….”
자신이 뭘 본 건지 의심이라도 하듯 낱낱이 파헤치는 시선 앞에서, 재희는 아찔해진다. 등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저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던 거지? 다 본 걸까? 어쩔 줄 몰라 하며 설레는 것을?
한영을 올려다보는 재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한영의 날카로운 눈매에, 번쩍 깨달음의 빛이 스쳐 갔다-.
관찰의 기색만 있던 한영의 얼굴에 묘한 빛이 차차 서리기 시작했을 때, 재희는 울고 싶어졌다. 눈매가 점차 뜨겁게 달아오른다. 한영의 시선이 잠시 재희의 눈가를 헤맸다.
담담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희는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후.”
대문 밖 너머에서 선정의 경호원이 낮은 한숨을 흘렸다. 그것을 재희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시선은 어느새 발밑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죄인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한영은 남자가 사라지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재희의 앞에서 비켜 주었다. 그 시간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던 것은 한영의 침묵 탓이었을까? 재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디 가는 중이었어?”
애써 재희는 시선을 들며 물었다. 둘 사이에 오갔던 눈빛을 어떻게든 별것 아닌 것으로 포장하려 했다. 두려움을 기를 쓰고 지워 냈다.
“……집에 이제 가는 거야?”
“…….”
“오늘 저녁에 늦는다며.”
그녀의 얼굴 위로 한영의 고요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녀의 간절함을 구경하듯, 혹은 낯선 타인을 보듯.
재희는 초조해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눈치 빠른 한영이라면 같이 모르는 척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동시에 재희는 뒤늦은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한영이는 정말,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돌아서 가는 길이라고 한영은 이 골목을 잘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 길로 귀가할 생각을 했다는 걸까?
우연히?
“다치지는 않았지.”
무거운 입술을 열어 한영이 물었다. 평온한 어조다. 한영은 언제 가라앉은 눈을 했냐는 듯 찬찬히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재희야, 괜찮아?”
“……아, 응.”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큰일 날 뻔했어.”
“…….”
“신고는 내가 할 테니까. 일단 집에 가자.”
“……응.”
재희는 한영의 옆에 붙어 길을 걸으면서도 혼란스러워했다. 한영은 분명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대문 밖을 서성이는 선정의 경호원을 분명, 문 사이로 난 틈으로 보고 있었는데.
왜 모르는 척하는 거지?
공허한 질문만 애써 되풀이한다고, 이미 깨달은 진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을까.
재희는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 속의 목소리를 듣는다. 명절 아침부터 찾아온 선정이 한영과 나누었던 대화 중, 지극히 짧게 스치듯 지나간 한 단편이었다.
‘명령하면 안 따라와. 경호원이라기보다는 그냥 비서 같은 사람이니까.’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응.’
‘그분도 불쌍하시네. 왠지 보람 없는 일만 잔뜩 하고 계실 것 같아.’
그렇게 대꾸하던 한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린다. 관심 없는 대상을 가벼이 건드리듯 무심한 얼굴. 흘러가듯 여상한 어조와 말투.
그럼에도- 냉랭히 식어 있었던 그 눈.
“……한영아.”
“왜?”
너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였어. 선정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한영의 얼굴로 떨어지는 붉은 가로등 불빛을 재희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색감이었다.
한영이 숨기고 있는 서늘한 거짓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색.
* * *
다음 날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하루 사이에 선정의 주위에 시커먼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붙어 다니기 시작하더니,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교내 어디에서도 선정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며칠 가지 않아 선정은 휴학계를 냈다. 국문학과의 조교가 학교에서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선정의 아버지가 누군지 경솔하게 발설한 인물이 그 조교라고 다들 말했다. 그는 그 일로 학교의 눈 밖에 나 쫓겨난 셈이었다.
모두가 수군거리는 중에도 재희는 오로지 한영만 보고 있었다. 한영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여자 친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소란이 곤혹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재희는 안다.
이한영은 진심으로 난처해하는 게 아니다.
“조교만 불쌍하게 되지 않았냐?”
“높으신 분들에게 밉보이면 별수 있어? 입학시켜 달라고 학교에 그렇게 돈을 먹일 정도면, 조교 하나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뭐? 김선정이 돈으로 들어온 거라고?”
강의실 한편에서 선배들이 분개하는 동안, 재희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요히 강의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한영의 얼굴을.
그 입가에 옅게 스치는, 만족감 어린 미소를.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재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재희는 이한영을 모른다.
함께한 그 긴 세월이 무색하게, 그녀는 소꿉친구의 이면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조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