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개강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한가위가 눈 깜짝할 새 다가왔다. 장장 일주일에 가까운 연휴였다. 수년 간 그랬던 것처럼 재희의 명절은 한영과 함께였다. 토요일 아침 일찍 한영의 조부모 산소를 살피고 왔다. 나름의 명절 기분을 내 보겠다고 송편도 조금이지만 빚기는 했다. 매년마다 솜씨가 도저히 늘지 않는 재희의 송편을 보며, 한영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놀렸다.
“송편 빚는 걸 보면 시집 장가 어떻게 갈지 알 수 있다는데. 걱정이네.”
“……그래서 인혜가 송편 잘 빚는 남자 데려오랬어.”
한영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그 말을 웃고 넘겼지만, 재희가 저도 모르게 그의 송편을 넘보고 있었음은 몰랐을 것이다.
명절이라고 유난한 것을 할 계획은 둘에게 없었다.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한영이 조리한 음식을 먹으며, 그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일 저녁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화젯거리가 나온다는 것은 퍽 신기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한영이 덕분일까?
무뚝뚝한 재희는 한영이 옆에서 사과를 깎는 것을 지켜보며 그같이 하등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두근거림이 가실 것 같아서였다. 사실 둘만 지내는 명절이 좋기는 좋은데, 재희에게는 또 그만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가 숨기는 데 능숙하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추우면 이불 가져와서 덮을래?”
한영이 그렇게 무심히 질문을 던졌을 때, 재희는 특선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희는 묻는 시선으로 한영을 보았다. 그러나 한영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반듯하게 사과를 자르는 것에 집중한 듯했기에, 재희는 스스로 그 질문의 의미를 해석해야 했다.
“……응.”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치마 밑으로 드러나는 맨다리가 추워 보였나 보다. 재희는 잠자코 몸을 일으켰다.
거실 뒤로 바로 붙어 있는 안방은 돌아가신 한영의 할머니 방이었다. 한영의 할머니는 그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돌아가셨지만, 한영은 그 방을 치우지 않았다. 아직 할머니가 쓰시던 장롱과 자개장이 남아 있었고, 추억 어린 물건들이 그 방에 남아 있었다.
그중에 재희가 가장 좋아하는 할머니의 물건은, 액자 사진들이었다. 자개장 위에 우르르 몰려 앉아 있는 십여 개의 액자들.
재희는 원래 방에 들어온 목적도 잊고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어린 한영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다가, 주름진 얼굴을 무뚝뚝하게 굳히고 있는 한영의 할머니를 보며 그리워했다. 그리고-.
“…….”
재희는 문제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몸을 세우고 있는 액자들 중, 유일하게 홀로 바닥에 덮여 있는 액자였다. 한영의 할머니가 살아 계실 무렵까지만 해도 그 액자는 다른 것들처럼 바로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내내 바닥에 거꾸러져 덮여 있게 되었던 것이다.
“…….”
재희는 거실에 있을 한영을 조용히 의식한다. 쓰러진 액자를 볼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쓰렸다.
그때 거실에서 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까,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 재희는 크게 외쳤다.
“……아니야. 내가 할게.”
더 시간 끌지 않고 재희는 얇은 이불을 챙겼다.
* * *
명절을 내내 한영과 보낸다는 설렘에 어젯밤 밤잠을 설쳤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하루 종일 한영과 함께하며 긴장한 것이 문제였을까. 한영과 단둘이 함께하는 그 황금과도 같은 저녁 시간, 재희는 잠들어 버렸다. 숙면이었다. 영화가 너무 재미없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못한다. 혼몽한 와중에도 재희는 시선을 느꼈고, 그 시선의 집요한 행방을 피부로 느꼈다. 이불이 가리지 못한 여린 발목과 종아리를 문지르고 올라온 시선이 온몸을 누비는 기분이란 것은, 도저히 꿈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그래서 재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앓는 짐승처럼 까마득한 눈동자로 한영을 보았음에도, 그것이 꿈이라 단정 짓고 웃음 지을 수 있었다. 한영은 저런 시선으로 그녀를 보지 않는다.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렇게 날이 선 눈은 결단코.
마재희.
어렴풋이 들린 한영의 목소리에 재희는 목을 울려 대답했다. 응.
조르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에 한영이 미소 짓는다. 나른히 휘는 눈웃음이 아름다워 재희는 뒤이어 들린 말을 무심코 흘려들었다. 한영이 손을 뻗는다. 재희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자상해, 재희는 또다시 이어진 한영의 질문을 놓쳤다. 그래도 한영이 무언가 물었다는 자각은 있어, 재희는 멍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목을 울렸다. 응?
한영이 다정히 웃었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유독 그 음성 하나만큼은 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재희의 뇌리에 선연히 박혔다. 평소의 한영답지 않은 싸늘한 어조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냉정한 어투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 때문이었을까.
재희는 자신이 그 순간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시 고물고물 잠이 드는 중에도,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손길을 느꼈다.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웃음소리를 들었다. 한영이 웃으니까, 좋은 꿈이다. 재희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재희야.”
순식간에 깨워졌다.
“일어나. 여덟 시야.”
번쩍 눈을 뜬 재희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아침 햇살이 들어온 천장은 꿈과 달리 밝기만 했다. 그것이 한영의 거실 천장이란 사실을 어렵게 머리에 받아들인 순간, 재희는 때늦은 낭패감을 느꼈다. 그것을 눈치챘을까.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침 일찍 큰아버지 댁에 전화드린다며. 일어나.”
“…….”
“여기서 전화할래?”
그렇게 말하는 한영은 방금 씻은 듯 촉촉하고, 산뜻하고, 반짝반짝했다.
“…….”
재희는 헝클어진 머리를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으며 한영을 외면했다.
“더 자고 할래?”
“……아니.”
“그럼 이제 일어나.”
“……응.”
한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희는 그가 정확히 큰아버지 댁 전화번호 숫자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집에 가서…….”
“집 전화로 할래?”
“……응.”
한영이 미소 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재희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렸다. 아무리 뻔뻔한 마재희라도 잠자고 일어난 직후의 얼굴을 한영에게 보여 줄 생각은 없었지만-.
“다 봤으니까 그만 창피해하고.”
기분 탓일까.
오늘의 한영은 짓궂었다. 아니,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재희는 평소보다 허둥거리며 창문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는 잘 지내. 한영이하고 같이 밥 잘 챙겨 먹지?
수화기 너머 속 어머니가 재희의 당황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재희는 차분한 척 대답했다. 네.
-그래. 월요일에 서울 올라가니까, 가게 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집에 갈게.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네. 잘 지내지?
“잘 지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사랑해, 우리 딸. 며칠 뒤에 보자?
재희는 조용하지만 애정 어린 말을 되돌려 주었다. 네, 저도요.
허무하다시피 금방 끊어진 전화였다. 재희는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눌려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전화를 받아 그랬을 것이다.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돕는 대신 대학까지 간 손녀를, 재희의 친할머니는 내내 못마땅해하셨다. 부모님의 칼국수 가게는 유명했고, 그 때문에 재희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가게 근처에 세를 주고 지내야 할 정도로 바빴다. 그런 부모님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대학을 선택한 손녀를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돈 낭비라고 여겼다.
사실 할머니는 재희가 또렷또렷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줄곧 경멸을 보여 오곤 했었다. 부모님은 그 냉대가 가슴 아픈 듯했지만, 재희는 아무렇지 않았다. 할머니가 친척 집을 오갈 때마다 재희의 욕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감흥이 없었다.
마재희는 친족으로부터 따돌림받는 명절에 상처 받지 않는다.
오히려 한영을 홀로 두고 명절을 보내야 했다면, 그것에 더 괴로워했을 것이다.
“…….”
그러니 한영을 보러 가야겠다.
깨끗이 씻고 옷도 갈아입어 더 이상 꾀죄죄하지 않다. 재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중에도 물론 걱정을 하기는 했다. 한영이도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지 않을까?
실제로 한영은 점심시간에 맞춰서 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점심까지는 오지 말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적어도 점심시간까지는 늦지 말고 오라는 의미인지, 애매모호했지만-.
어쨌든 재희는 창문을 넘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았네. 재희 집은 옆집이야.”
“정말?”
한영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재희가 들은 것은 말소리였다. 한영의 목소리는 물론이고, 다른 목소리도 그녀의 귀에 익은 것이었다.
김선정이다.
“똑같은 양옥집이라 헷갈렸나 봐. 재희는 슈퍼 옆 네 번째 집이라고 했는데.”
재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잘못 셌나 보네. 여긴 다섯 번째야.”
“혼자 있는 거야? 이렇게 본 것도 반가운데, 잠시 들어가도 돼?”
재희는 나가라는 말을 정중히 늘어놓는 한영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굳게 닫히는 문소리도. 그러나 정작 그녀의 귀에 들려온 것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그래. 원한다면.”
굳게 닫히는 문소리만이 기대와 같아, 재희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세상에…… 재희하고 이웃사촌이었어? 왜 학교에서는 서로 모르는 척해?”
아무리 곰 같은 재희라도, 눈에 훤히 보이는 수작이 가증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 좋은 한영은 고요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모르는 척한 적 없어. 아는 척할 이유도 없었던 거고.”
“왜?”
“글쎄. 초등학교 때는 어울려 지냈지만,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여학교, 남학교로 갈렸으니까. 많이 서먹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하…….”
재희는 한영의 거짓말에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 층 계단 옆에 붙어 서 있던 그녀는 아까부터 치미는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이대로 내려갈까.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한영과 선정의 사이에 끼어든다면. 그리고 선정이의 거짓말을, 한영이 앞에서 탄로한다면.
“…….”
그러나 한영이 그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돌아가자. 방으로.
“커피?”
“좋아.”
천장 수납장을 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동안, 재희는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질 때까지도 끝내 움직이지 못했다. 계단 통로 너머로 선정의 것으로 보이는 치맛단이 힐끗 보였다 사라진 탓이다.
치마가, 너무 짧았다.
“이거, 이번에 새로 나온 선물용 참치 캔 세트야.”
“재희에게 주려던 거 아니야?”
“차 안에 더 있어. 지금 아는 사람들에게 다 돌리는 중이거든.”
한영이 짧게 고맙다,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희는 속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선물 세트를 돌린다고? 그것도 오늘?
재희는 내심 한영의 반박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영은 속이 어떻든 별다른 말이 없었고, 선정은 여전히 곰살궂게 한영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다.
“우린 다 서울에 살아서 명절은 식사 한 끼만 함께하고 끝내. 너희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혼자 살아.”
“벌써 독립한 거야? 부모님이 무슨 일 하시는데 집 한 채를 벌써 주셨어?”
“부모님보다는 조부모님 덕을 봤지.”
“조부모님은 뭐 하시는데?”
“뭘 하셨든 이제 의미 없어.”
“어?”
한영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두 돌아가셨단 의미야. 부모님이든, 조부모님이든.”
그 순간 재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영의 거짓말이 가슴 아팠다. 한영이는 이제껏 저렇게 말하고 다녔던 걸까?
재희는 눈을 감았다. 한영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안다.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이후에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돌아가셨다고 하면 동정이든 불편한 마음이든 상대방은 입을 다물 테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깊어지는 대화를 차단하려고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한영은 원래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함께해온 재희에게도. 그러니 이 대화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가-.
“한영아, 너 고아였어?”
재희는 자신의 눈가가 싸늘히 굳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화를 내야 할 한영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선정이 순진무구한 어조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니?”
“의외라서.”
“뭐가?”
한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조교 선생님이 그건 안 알려 줬어?”
“……어?”
“이상하네. 단순히 주소만 알려 주고 입 씻을 사람은 아닌데.”
싸늘한 침묵 속에서, 재희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한영의 다정한 웃음소리가 그때 다시 울렸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려 줄 정도면, 내가 고아인 것쯤은 당연히 너한테 알려 줬어야지.”
“…….”
“안 그래? 그분도 이상한 데서 어리숙하시네.”
싸한 정적이 순식간에 공간을 지배했다.
재희도 알고는 있었다. 선정의 방문 의도가 불손하다는 것쯤은. 집주인이 알려 주지 않은 집 주소를 알고 있던 선정이었다. 그런 선정은 왜 하필 명절 연휴에 재희의 집을 찾았나. 거기다 번지수를 잘못 보고 옆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말이 안 되는 변명이자 핑계였다. 재희도 그것이 터무니없어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조교 선생님이라니?
한영이는 그것을 어떻게 안 걸까?
모든 신경이 한영이 만들어 내는 소리에 쏠린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소리, 티스푼을 젓는 소리, 잔이 달칵, 식탁에 놓이는 소리까지. 한영이 흘리는 모든 소리가 그렇게 시종일관 고요했다. 그 목소리까지도.
“내가 혼자 쓸쓸히 명절을 보내고 있을 거라 걱정해 준 거지. 그래서 일부러 와 준 거 알아. 고마워.”
“…….”
“그렇지만, 선정아.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재희하고 나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야. 단순히 내 친구인 줄 알고 재희와 친해진 거라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데. 너 헛수고한 거거든.”
계단 옆 의자에 앉은 한영 덕에 재희는 그의 상반신만은 볼 수 있었다. 잠잠히 미소 짓고 있는 옆얼굴을, 그녀는 애타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선정에게 이용당한 데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그저 한영에게 묻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선정이와 왜 친하게 지내는지 물어본 거야?
그래서- 김선정에게 다가간 거야?
“…….”
재희는 눈을 감았다.
생각이 너무 갔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그녀를 통해 한영에게 접근하려던 여자들은 중고등학교 때도 몇 있었고, 한영은 그들을 상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을 받아 주다간 네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 한영이 언젠가 재희에게 말한 적도 있다. 대학교 정문만 지나면 재희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자신의 여자 문제로 그녀가 피해 보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한영은 그 모든 원칙에서 벗어나, 김선정을 가까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교가 말해 줬어?”
그제야 선정이 입을 열었다. 딱딱한 음성이었다.
“아니.”
“……설마 엿들었니?”
“글쎄.”
“아니라면 지금 조교 선생님 감싸는 거야? 그 인간이 촉새처럼 입이 싸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걸 믿고…… 내가 바보였지.”
“입이 가벼운 것을 알고 이용한 시점에 각오했어야지. 네 비밀도 가볍게 탄로 날 것이란 각오.”
한영은 잔잔한 어조로 커피를 권했다.
“마셔 봐. 선물 받은 건데 향이 좋아.”
부드러운 듯 의미심장하기도 한 미소가 한영의 입가에 걸쳐져 있었다. 재희는 그 미소를 보며 확신했다. 조교 선생님을 통해 한영이 선정의 속내를 알게 된 게 분명하다고. 선정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얼핏 들렸다.
“선정아, 널 비난할 생각 없어. 논란거리 만들고 싶지도 않고.”
한영이 선정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스윽, 찻잔이 식탁 유리창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널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정말?”
“응.”
부드러운 말에 선정은 안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결 풀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영에게 너무나 다가가고 싶은데 도저히 갈 방법이 없었다. 그저 지푸라기 잡듯 조교 선생님에게 주소를 물어만 본 건데, 조교 선생님이 묻지도 않은 사실을 늘어놓았다. 옆집에 사는 사이니까 어쩌면 재희가 한영과 친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등등. 커피를 마시고 있는 한영이 산뜻한 미소만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선정의 목소리는 갈수록 가벼워졌다.
“난 잘못한 거 없어. 좋아하는 사람이 궁금한 건 당연하잖아?”
“그렇지. 그러니 그만 걱정해. 네가 걱정해야 하는 건 따로 있어. 이를테면, 너희 부모님.”
“우리 부모님이 왜?”
“아끼는 딸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온 걸 알면 뒷목 잡지 않으실까?”
그제야 시름을 완전히 놓은 듯, 선정은 낭랑히 웃음을 터뜨렸다.
“골프채를 들면 들었지, 뒤로 넘어갈 양반은 아니야.”
“아버지가 엄하신가 봐.”
선정이 제 아버지의 성함을 말했다.
재희는 눈을 깜빡였다. 신문의 정치면에서나 보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황하는 재희와 달리, 한영은 고요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놀라지 않네?”
“놀라야 해?”
“우리 아빠 몰라?”
“아무리 내가 운동권이 아니라지만, 신문은 읽어, 선정아.”
한영이 잔잔히 웃다 말고 염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 다니는 게 위험한 것처럼 들리는데.”
“괜찮아. 아무도 모르니까.”
“선정아, 비밀은 없어.”
“알게 된다 해도 상관없어. 아무리 운동권 애들이 우리 아빨 싫어한다 해도, 난 못 건드려. 지금이야 기세등등하지만 어차피 사회 나오면 걔들은 내 앞에 서지도 못해. 근본부터가 다르니까.”
찻잔을 들고 있던 한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근본이라.”
“재수 없다고 생각해?”
“아니. 분명 있으니까. 씨부터 남들과 다른 사람.”
한영답지 않은 말.
재희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선정은 달리 생각했는지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할 거야. 아버지한테 경호원 붙여 달라고 하는 건 어때.”
“걱정하지 마. 있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불행이네.”
“불행이라니?”
“앞으로 뻔뻔해질 각오를 해야 하니까.”
왜? 재희는 한영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되물었다. 왜 뻔뻔해져야 하는데?
선정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명령하면 안 따라와. 경호원이라기보다는 그냥 비서 같은 사람이니까.”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던 한영이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응.”
“그분도 불쌍하시네. 왠지 보람 없는 일만 잔뜩 하고 계실 것 같아.”
다시 선정이 맑게 웃음을 터뜨린다. 한영도 그녀를 따라 싱긋 눈을 휘었다.
“오늘도 와 계셔?”
“차에 있어.”
“갈 때 잠깐 인사드려도 될까?”
“어머, 한영아.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그래도 앞으로 자주 뵐 분인데, 인사는 드려야지.”
‘자주 뵐 분’이란 단어에 마재희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이한영은 모를 것이다. 재희의 시선 끝에 있는 한영은 여전히 단정하지만 무감정하게도 느껴지는 몸짓으로 커피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한영의 시선이 거실 쪽으로 흘렀다.
재희는 한영이 무엇에 반응을 보이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의 귀에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방에 걸린 풍경은 언제나 바람에 흔들렸으니까. 연약하게 부서지는 소리를, 자주 희미하게 흘렸으니까.
그래서 그 작은 소리에 한영이 귀 기울이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
이상할 정도로 달콤한 감각이 가슴에 스며든다.
그러나 재희는 착각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한영은 창 너머 마당을 보고 있는 것뿐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들을 보며, 저 풍경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마재희가 창턱을 넘어 건드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인지, 살피고 있는 것뿐이니까-.
“한영아, 먼저 고백해 줘서 너무 기뻤어.”
그러니 두근거려도 될 상황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절대.
재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서히 약해지는 풍경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선정의 음성이 그 소리를 덮어 버렸다.
“네가 날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드르륵 울렸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재희는 계단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희고 긴 다리가 보였다. 보드라워 보이는 선정의 허벅지가 한영의 허벅지 위에 걸쳐져 있었다.
“…….”
재희는 흰 허벅지에 머문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성인 여성을 태우고도 한영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그 얼굴에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무리 둔한 재희라도 미간을 움찔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렬한 통증이었다.
“그래도 네가 날 보고 있는 시선은 느꼈어.”
선정의 은근한 속삭임에, 한영의 미소가 얼핏 짙어졌다.
“그래?”
“아닌 척해서 우위에 서고 싶은 거야?”
“다들 왜 그런 착각들을 할까. 나는 누구 위에 올라탈 생각은 추호도 한 적 없는데.”
건조하다시피 나온 대답에, 선정이 요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뱀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선정은 뒷걸음질 치듯 몸을 물렸다.
재희는 선정이 왜 갑자기 의자 아래로 내려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선정의 손이 한영의 몸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지, 왜 그 손이-. 재희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왜 선정의 손이 한영의 바지를 쓰다듬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것이 분노였는지, 또 다른 감정이었는지, 재희는 분간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눈동자를 묶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재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선정의 손이 한영의 다리 사이를 쓰다듬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이윽고 그 손이 청바지의 지퍼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하는 광경도.
“……손이 빠르네.”
한영이 무료한 듯 중얼거렸다.
“잘하니까.”
“그래?”
그럼 해 봐.
그렇게 속삭인 한영이 냉담히 입매를 비트는 순간, 재희는 난간을 부여잡은 손에 힘만 주었다.
선정의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한영의 허벅지 위로 쏟아졌다. 재희가 있는 방향에서는 그 머리칼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재희는 떨리는 숨을 속으로 삭였다. 도대체 한영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지 마. 하지 마.
선정의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재희는 그것이 무슨 행위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이 전무했다. 들리는 음성조차 없어 추측할 수도 없었다. 짧은 숨소리와 젖은 소리가 침묵 속에 이어졌다. 재희는 그 소리에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지만, 정작 선정은 가끔씩 교태 섞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다가도 괴로운 듯 윽, 윽, 막히는 소리를 흘렸기에, 재희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이 기이하게 일그러진 것 같았다. 어떤 감흥도 없는 듯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한영조차도.
한영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무관심해 보였다. 그의 시선은 거실 바닥의 한 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길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재희에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던 거다. 친절하고 다정하던 소꿉친구가 숨기고 있던 이면을, 그렇게 우연찮게 맞닥뜨리게 되어서. 서늘한 빛만 흐르는 한영의 얼굴을 멍하니 보느라 재희는 쉽사리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영의 시선이 멈칫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어렴풋이 귀에 잡히는 가느다란 소음을 인지했다. 끊겼다 울렸다 이어지는 그 소리, 전화벨 소리였다. 그러니까-.
그녀의 집, 전화벨.
“……!”
뒤늦게 재희는 낭패감을 느꼈다. 전화벨 소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한영은 재희의 행방을 궁금해할 것이다. 물론 한영이 이 희미한 소리를 계속 주의 깊게 듣고 있을 가능성은 드물지만, 모르는 일이다.
허둥지둥 재희는 몸을 돌렸다. 막 여섯 번째 벨소리가 울리던 찰나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는 것처럼 한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 바로 그 순간, 재희는 한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바보.”
나긋이 눈을 휘며 한영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이 무슨 의미였는지,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까지의 무감각한 태도가 다 거짓이었다는 듯 한영이 손을 뻗고 있었으므로.
선정의 뒷덜미를 그러쥔 손길은 갈퀴 같았다. 놀랄 정도로 사나워 보여 재희가 덜컥 겁을 집어먹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선정은 환희에 젖은 사람처럼 잔웃음을 흘렸다. 마치 무언가를 오래도록 기다린 사람처럼. 한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여 선정을 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그는 팔에 힘을 주어 선정의 머리를 눌렀다.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머리에 재희는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무슨-.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흔들리는 머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 머리를 붙잡고 있는 한영의 팔뚝에 어느덧 근육과 핏줄이 팽팽히 일어서 있었다. 그의 흉곽에 천천히 숨이 들어찼다 나가는 움직임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서히 차오르는 열기가 재희가 서 있는 이 층까지도 차츰차츰 전해져 오고 있었다.
재희는 왜인지 숨이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어느 사이엔가 쿵쿵 뛰고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있는 남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였다. 몰입한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익숙한 듯 또 낯설었지만, 저 미소는-. 재희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숨을 뱉었다. 이상했다. 사나운 빛이 흐르는 낯인 것을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한영은 지금 즐거워하고 있었다. 왜?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재희는 서서히 다른 이의 존재를 잊어 갔다. 공간에는 한영과 재희, 오로지 둘밖에 없었다. 한영이 낮게 웃었다. 재희는 처음 보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재희의 복근이 움찔 조여들 정도로 야릇한 웃음. 그의 얼굴이 서서히 뒤로 젖혀졌다. 재희는 그 길게 뻗은 목 줄기를 볼 수 있었다. 목이 타는 듯 울대가 몇 번이고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재희도 목마름을 느꼈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부에 알 수 없는 소름이 자꾸 돋았다. 한영이 흘리는 숨결 하나하나가 전부 그녀의 피부로 뜨겁게 닿는 느낌이었다.
움직이는 팔에 점차 힘이 실리며 빨라졌다. 컥컥거리는 숨소리가 연달아 들렸지만, 재희는 그것을 거의 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홀린 듯이 한영의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미소를, 찌푸려진 눈을 그녀의 눈동자에 담았을 뿐이다. 망막에 새겨진 한영의 형용이 불에 덴 낙인처럼 뇌리에 박혔다. 재희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것도 몰랐다.
한영이 낮게 신음을 흘리며, 목을 뒤로 꺾기 전까지는.
“……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 버린 재희는 뒤늦게 입술을 막았다. 주춤 뒤로 물러났다.
시선 끝에 한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가 아찔하게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귀에 닿지 않는 음성은, 입술의 형태로 재희의 뇌리에 뜻을 전했다.
너, 젖었어.
“……!”
그 순간 재희는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간드러지게 한영을 부르는 선정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창문을 넘었다. 기다시피 난간을 뛰어넘었다. 서두르는 바람에 건드린 풍경이 찰랑, 소리를 흘렸다. 당황한 재희를 달래듯 부드러운 소리였지만, 지금의 재희에게는 벼락같이 뇌를 때려 정신을 일깨운 소리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의 방 한가운데였다.
“…….”
재희는 천천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가까스로 얼굴을 들고 거울을 보았다. 눈가가 발간 것이 마치 이미 한차례 눈물을 쏟아 낸 사람 같다. 재희는 한동안 그 얼굴을 보다 무너지듯 침대에 앉았다.
그러나 곧 그녀는 엉거주춤하며 몸을 세워야 했다.
“……?”
재희는 바지 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번 달엔 생리가 빨리 오려나 봐.
재희는 자는 척하는 것으로 곤란한 점심시간을 피했다.
기다리다 못해 난간을 넘어온 한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불을 꽁꽁 싸맨 재희를 보고도 허탈해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무심한 미소만 슬며시 흘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으리라. 그런 한영을 알면서도 재희는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당황해 집으로 허둥지둥 돌아오던 중 무언가 소음이라도 냈다면. 그것을 한영이 들었다면.
점심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무거웠다. 재희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오후 두 시, 결국 방을 넘었다.
“피곤했나 봐.”
“……응. 미안해.”
평소처럼 부드러운 한영의 얼굴을 보는 심중은 복잡했으나, 재희는 사과했다. 그녀도 놀랄 정도로 평온한 어조였다.
“밥은?”
“……먹었어.”
그러나 한영은 그 짧은 머뭇거림에서 충분히 진실을 캐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한영이 주방으로 향했다. 재희는 당황해 말렸지만, 한영이 그런다고 가만히 있을 인물도 아니었다. 결국 늦은 식사까지 마치고 한영이 곱게 접시에 담은 사과를 내려다보며, 재희는 속으로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
“재희야.”
“……응?”
자책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재희는 한영의 부름에 반응했다. 거의 본능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물을 마시던 한영이 태연히 물었다.
“봤지?”
“.......”
“어디부터 들었어?”
재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뭘 봤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재희는 봐주는 것 없이 찔러 오는 한영에 당황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한영은 틈을 주지 않았다.
“재희야, 네 발소리 다 들었어.”
아.
재희는 아찔해져 눈을 감았다.
“……미안해…….”
“미안하기는. 됐어. 내가 더 잘못한 게 있는데.”
“……네가 뭘 잘못해. 아니야.”
“사실 발소리 들리지도 않았거든.”
“…….”
“거짓말해서 미안해, 재희야.”
한영이 웃는다. 가벼운 농담을 던진 것처럼. 일상의 잔잔한 흐름처럼.
“못 볼 꼴을 보였네. 놀랐지.”
“…….”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아.”
억울한 마음이 일순 치솟는다. 재희는 눈을 깜빡였다.
한영이 다시 차분히 웃으며 물었다.
“재희야, 어디부터 듣고 있었어?”
“……그냥, 네가 이상한 거 할 때…….”
“내가 뭘 했는데?”
“…….”
몰라. 모른다고.
재희는 다시 한번 억울한 마음이 솟구쳐 눈을 내리떴다. 그녀조차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다. 단순히 한영의 거짓말에 넘어간 걸로 울상 짓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이 그냥 다, 억울했다.
천천히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이한영은 마재희만큼의 수치심과 두려움이 늘 없었다.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그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들켰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지금처럼.
마음의 무게가 달라서 그런 것이리라. 한영에게 마재희는 그저, 불편할 수 있는 모습 얼마쯤은 보여도 되는 가족이라서.
그리고 한영이 태연하다면 재희도 담담해야 했다. 그것이 마재희의 위장술에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었다.
“……그건 뭐였어?”
둘이서 뭘 한 거냐 묻는 질문이 순수한 호기심처럼 느껴졌을까. 한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재희는 까마득히 어린 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재희는 금세 그 감정을 이용했다. 나름의 생존 방법이었던 것이다. 어린 동생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가장 아프게 고민하고 있던 질문을 입 밖으로 조심스레 내놓는 것이.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선정이랑 ‘그거’ 한 거야?”
“끝까지 안 했어. 콘돔이 없었거든.”
서슴없는 말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한영이 잔잔히 웃음을 터뜨렸다.
날 놀리고 있는 걸까?
재희가 침울히 눈을 내리뜰 때였다.
“그런데, 재희야.”
“응?”
“상대가 김선정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
“내가 ‘이상한 거’ 할 때 왔다며.”
“…….”
“그때 왔다면 선정이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재희는 애초부터 어디부터 들었냐는 한영의 질문에 큰 신경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영은 달랐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재희는 허둥지둥 입을 열다 말고 불쑥 의문을 느꼈다. 보통이라면 ‘이상한 거’ 쪽을 몰래 엿본 것을 비난하지 않나. 왜 한영이는 선정과의 대화를 엿들은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걸까. 대화 중에 내가 들어선 안 되는 내용이라도-.
아.
한영이는 어쩌면 나를 걱정하는 걸지도 몰라.
원래 다정한 한영이니까, 선정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냥, 그 전의 대화를 조금 들었어. 네가 선정이에게 고백했다는 데서부터…….”
한영이 입가의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를 주시했다. 꿰뚫어 보는 시선이다. 재희는 제 발 저리듯 가슴이 뜨끔했지만, 잠자코 움츠리고 앉았다.
“……그랬구나.”
무심히 수긍하는 한영의 얼굴은 평온했다. 생각에 잠긴 기색이다.
재희는 주저하다 물었다.
“……선정이 좋아해?”
얼마나 힘들게 나온 말인지, 한영은 결코 모를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말끔히 웃고 있는 것이리라.
“좋아하니까 사귀지.”
“……응.”
“선정이 소문 때문에 걱정돼?”
“……아니. 그냥 어디가 좋은가 궁금해서…….”
무심히 답하다 말고 재희는 혀를 씹고 싶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영은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지었다.
“잘하거든.”
“뭐를……?”
“이상한 거.”
“…….”
“그러고 보니 여고도 성교육을 제대로 안 한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해. 다 알려 줘.”
“그래. 다 알려 주겠지. 정자와 난자가 만나고, 아기가 몇 달 후에 나오는지.”
“…….”
“친구들과는 ‘다른’ 얘기, 전혀 안 해?”
“…….”
재희는 슬슬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이 대화는 무엇을 위한 걸까. 놀리고 싶은 거라면, 저렇게 잔잔히 웃으면서도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는 시선을 보내진 않았을 것인데. 한영은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희는 한영이 그녀의 얼굴 속에서 무엇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재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시선을 무겁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도 선정이가 한 거, 배울 수 있어?”
그 말의 의외성에 놀란 것일까? 한영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찰나였지만, 재희는 분명히 보았다.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앉은 한영의 오감이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을. 늘 달고 다니던 미소도 어딘가로 치운 채, 이한영이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마재희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냉정한 듯 예리한 시선이, 맹렬히 돌아가는 이성이, 재희의 심중에 있는 비밀을 캐내려고-.
“……다들 아는데.”
그래서 재희는 서둘러 입술을 뗀 것이었다. 위기였으니까. 이한영이 마재희의 마음을 눈치챌지도 모르는 대위기였으니까.
“……너도 알고, 선정이도 아는데. 나는 모르니까.”
“…….”
“네 말대로라면 다른 친구들도 다 알고 있단 거잖아.”
그런데 나만 모르니까.
비록 한영의 시선을 돌리려 뱉은 말이었지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박탈감만은 진심이었다.
진득하니 재희의 눈을 들여다보던 한영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재희는 온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한영의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회피를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넘어가는 것인지, 도저히.
“……글쎄.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우는 게 제일 좋겠지.”
담담히 웃으며 사과 그릇을 밀어 주는 한영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쯤 하고 대화를 접고 싶다는 의미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는 통에 그는 재희가 그 말에 얼마나 서글픔을 느끼는지 몰랐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우는 거라면, 그럼 난 앞으로도 계속 모르겠네.
자신만의 세상에 틀어박혀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기 때문에, 재희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손등을 덮는 따뜻한 손길에 고개를 들고 난 후에야, 자신의 입술이 의지에 어긋나 움직였음을 깨달았다.
‘그럼 난 앞으로도 계속 모르겠네.’ 비관하는 재희의 그 말은, 한영에게 마재희의 나약한 에고를, 불안정한 자존감을 비추는 거울로 보였을까? 적어도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에게 바보라고 놀림받던 마재희를 떠올리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영은 그녀가 앉은 의자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재희를 올려다보는 것일 터였다. 상심한 어린 동생을 위로하는 자상한 오빠처럼.
“재희야.”
“…….”
재희는 온화한 한영의 눈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는 아침에 한영이 앉아 있던 자리라는 것을. 재희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에 앉아, 한영은 선정과 야릇한 말과 뉘앙스를 나누었다. 마재희로서는 알 수 없는 행위를 했다.
“재희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안다는 듯, 한영이 잡은 손을 쓰다듬었다.
“다른 의미가 있어서 꺼낸 말이 아니었어.”
한영이 달래듯 부드럽게 운을 뗐다.
“성인이라면 다 하는 행위이고, 그걸 좀 우연히 봤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불편해할 필요도 없고. 그걸 알려 주려고 했던 거야. 널 놀리려고 꺼낸 화제가 아니라, 불편함 털어 내라는 의미로.”
한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남들보다 빨리 했다고 해서, 남들보다 늦게 했다고 해서,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행위가 아니니까. 조바심 갖지 마.”
“…….”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자연히 알아 가는 거니까. 알았지?”
속이 시커멓게 타든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재희는 한영을 보았다. 어쩌면 난 결국,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한 것일지도 몰라. 가능하다면 평생을 지금 같은 순간을 반복하며 살고 싶어서, 이렇게 입술을 닫고 마음을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재희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응. 알았어.”
한영의 등 뒤로 거실이 보였다. 소파 아래 그녀가 어젯밤 덮고 잤던 이불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그 흰 이불보를 보다 문득, 뇌리 속으로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마재희는 말할 것도 없고, 이한영도 엉망진창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머릿속 음성은 슬퍼하는 것도, 답답해하는 것도 같았다.
다시 둘만 남은 명절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흘러갔지만, 재희의 속내에는 묘한 들썩임이 멎지 않았다. 좌절한 것처럼 가라앉아 있는 가슴은 별것 아닌 한영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튀어 올라 펄떡였고, 재희는 안 그런 척하려 해도 그럴 때마다 이한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이한영의 얼굴이 아닌, 오전에 보았던 이한영의 얼굴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하던, 그 얼굴을.
결국 재희는 같이 보기로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보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초저녁이었다. 평소의 마재희라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이른 저녁 일곱 시.
“벌써?”
재희가 돌아가겠다는 말을 한 후 한영은 그렇게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재희는 그 어조 속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음을 이미 간파한 후였다.
실제로 재희가 창문을 넘는 것을 지켜보는 한영의 얼굴에 의문은 없었다. 그는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담담한 미소로 재희를 배웅했으니까.
그것은 선인지도 모른다. 이제껏 존재하지 않던 한 줄기 실금이, 그들 사이에 그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을 넘었다.
그날 밤에 꾼 꿈만 아니었더라면, 그 무표정은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새벽에 깬 재희는 숨을 고르며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재희야, 너 젖었어.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꿈에서 깬 이후로도 한참이나 열이 올라 그녀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