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왜 가만히 있어?’
그것이 일곱 살이던 이한영이 마재희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당시에도 한영은 흰 얼굴에 단정하게 자른 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래 남자애들이 그런 것처럼 코를 흘리지도, 그렇다고 건들거리며 훑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무표정하게, 다섯 걸음 떨어진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알 수 없는 질문을 연이어 던지며.
‘화나지?’
이어진 한영의 질문은 묘했다. 단순한 확인을 넘어, 분노를 부추기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재희는 멍하니 한영만 올려다보느라 바빴다. 당시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남이었지만, 한영이 옆집 할머니의 손자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몇 차례 집 앞이나 창문 너머로 엇갈리듯 시선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니 새삼스레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훌쩍 시기를 놓친 후였지만, 당시 재희는 그것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 겪는 강렬함에 도취된 것처럼, 한영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새끼 오리의 각인 같은 것이었을까?
‘혼내 줄까?’
그래서 한영이 다시 그렇게 물어 왔을 때, 재희는 누가 누구를 혼내 준다는 건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한영이 원하는 대답을 본능적으로 파악했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래. 내가 혼내 줄게.’
어린 한영은 그 대답에 만족한 것처럼 미소 지었다. 맺혀 있던 살얼음이 녹고, 부드러운 땅이 드러나듯, 화사한 미소로.
그리고 그 순간, 어린 마재희는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 나타난 약속의 땅 앞에서, 모종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마재희 또 눈 뜨고 존다.”
“재희야, 정신 차려.”
재희는 회상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거실 바닥에 앉은 채 그녀를 돌아보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영재와 상현이다.
재희는 잠시 그 얼굴들을 빤히 보았다. 한영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오래 본 얼굴들인데 새삼스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장발 파마를 한 상현이 짓궂게 올려다보는 눈빛도, 유행 따지는 것은 귀찮아하는 영재의 짧게 친 머리도.
“……장장 육 년이나 보고 지냈는데, 난 여전히 저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영재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현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우리 재희가 미스터리 하기는 하지.”
“이인혜만큼만 속이 읽혀도 좋을 텐데.”
“그건 재희의 존엄성을 위해서라도 안 될 말이지. 다 읽히는 거잖아.”
재희는 한동안 친구들을 응시하다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한영의 집은 십 년 전 이래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았다. 한영의 할머니가 즐겨 사용하던 전축도, 매 시각마다 뻐꾸기가 튀어나오는 시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린 재희와 한영이 즐겨 보던 골드스타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까.
재희는 묵묵히 텔레비전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 새까만 하늘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지랄한다.”
영재가 그렇게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팔을 뻗어 채널을 돌렸다. 오 초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는 채널에 상현이 불만을 터뜨렸다.
“다섯 개밖에 없는 채널을 뭘 그렇게 돌려.”
“반쪽짜리 올림픽도 무슨 올림픽이라고 저렇게 요란히-.”
“-그래, 그래, 우리 각하께서 국민들 스포츠에 환장하게 만들어서 바보 만드는 거, 알지, 알고말고. 그러니 그냥 사랑방 중계 틀어 놓으렴, 친구야.”
재희는 멀거니 시선을 시계에 던졌다. 아홉 시다. 이제 삼십 분만 더 있으면 토요 명화가 방영될 것이다. 그것이 재희를 비롯한 친구들이 토요일 저녁에 한영의 집에 모여 있는 이유였다.
“한영이는?”
상현이 재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위층.”
“위층에서 뭐 하는데?”
“과제 때문에.”
“설마 기초 과목에 나도 모르는 과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
“전공 과제야.”
“아.”
상현이 실실 웃으며 감탄했다.
“재희는 벌써 다 했나 봐. 대단해.”
재희는 그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현이 악의적으로 놀리려고 과장 섞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친구들은 다들 알게 모르게 재희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재희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무신경함을 친구들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는 않았다.
오직 이한영만이 가끔, 재희의 무감한 얼굴을 빤히 주시했지만.
“…….”
재희는 한영이 있는 이 층을 물끄러미 보았다.
한영이라면 금세 끝낼 과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내려오지 않는 것은, 달리 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이제 개강 얼마 남았냐?”
“일주일.”
“좋은 시절 다 갔네.”
“언제는 좋은 시절이었나, 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희도 그 말에는 수긍했다. 좋은 시절은 아주 오래전에 지나갔다. 아무것도 모르고 동네를 뛰어놀던 그 어린 시절은.
일곱 살 어느 날 마재희를 괴롭히던 동네 아이들을 이한영이 혼내 준 후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친밀한 관계였다. 세상에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으나 자신들은 그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삼의 성을 가진 것처럼, 마재희와 이한영은 어른들의 아리송해하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붙어 다녔다.
재희는 때때로 생각한다.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시절처럼,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텐데.
“왔냐?”
“한영아.”
친구들이 계단으로 시선을 주며 한마디씩 하는 중에도 재희는 물끄러미 텔레비전만 응시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회피였으나, 그것을 어느 누구도 모를 것이다. 마재희는 종종 그랬으니까. 자주 넋을 놓고, 멍하니 있으니까.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는 것처럼.
그러나 재희가 늘 자신의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재희는 계단에서 내려온 기척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앉은 소파의 바로 오른쪽이 쑥 꺼지는 감각도 느꼈다. 그리고 익숙한 체향이 스치듯 코끝에 닿는 것도.
그 나지막한 목소리의 울림 또한.
“오늘 영화는 뭐야?”
부드러운 태도를 항시 유지하는 이한영답게 어조는 잔잔했다.
한영의 질문에 답한 것은 상현이었다.
“오션과 십일 인의 친구들.”
한영이 나직이 웃는다.
“고전다운 제목이네.”
“프랭크 시나트라가 여기 나온다는데.”
“그래?”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연기도 했나 봐.”
재희는 말없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아랑훼즈 협주곡을 들었다. 토요 명화의 오프닝에 흘러나오는 그 곡명을 알려 준 것도 한영이었다. 차곡차곡 쌓인 추억들 중 하나였다.
“어이쿠. 오늘 또 광고만 실컷 보다 잠들겠어.”
“인혜는?”
“올 때 됐을걸.”
때마침 요란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재와 상현의 머리통들이 옆으로 돌아갔으나, 재희는 그 움직임에 동참하지 못했다.
소파를 짚은 손 위로 부드럽고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중지와 약지를 가볍게 덮은 것이 손바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손이 이한영의 것이라는 것을 순차적으로 깨달아 가는 동안, 재희는 가슴을 슬금슬금 괴롭히는 열기를 느꼈다. 한영은 언제나 체온이 높았다. 재희의 서늘한 체온을 늘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가려는 것처럼.
그때 재희의 시야각으로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을 덮을 정도로 큰 손이었다. 재희는 물끄러미 그 손을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손이 튕겼다.
“재희야.”
남성적인 굴곡이 진 그 손가락을, 재희는 누구보다 많이 봐 왔다.
손으로부터 시작해, 근육의 결이 뚜렷이 잡힌 팔뚝 위로 시선이 흘러간다. 까만 눈동자는 곧 하얀 반팔 소매를 담았다. 티 한 장으로 가리지 못하는 탄탄한 가슴 근육도 슬그머니 담았다. 상대가 그것을 알아차릴세라 서둘러 시선을 위로 옮겼지만, 더 엿보고 싶은 충동마저 억누르지는 못했다.
그녀가 한영을 볼 때마다 느끼는 충동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곧게 뻗은 목 줄기와 다듬은 듯 날카로운 턱을 보면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불쑥 인다. 상냥한 미소를 그리며 휘어진 육감적인 입술은- 재희에게 번민이었다. 그 입술을 볼 때마다 배 속 어딘가가 아릿하게 저렸던 것이다.
비단 입술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외압에도 쉽게 눌리지는 않을 것이라 주장하는 콧대가 있었다. 감히 쉽게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을 거라 말하는 깊은 눈매도 있었다.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완벽히 조정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이한영이, 다시 손을 튕기고는 웃고 있었다.
“그만 헤매고 여기로 돌아와. 인혜 왔어.”
“……응.”
재희는 가슴의 떨림을 억누르며 애써 웃었다.
재희야, 하고 부르며 맑게 웃던 소년은 어느새 스무 살의 사내가 되었다. 갈수록 또렷해지고 예리해지는 눈빛을 나긋이 휘는 웃음으로 숨길 줄 알게 된 한영은 어디를 가도 시선을 끌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백팔십을 훌쩍 넘을 정도로 큰 키도 그렇지만, 어느 때든 바른 자세가, 단순한 손짓 하나에조차 서린 귀티가 한영을 남들과 다른 존재로 구분 지었다. 한영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고 있을 때면 꼭 얼굴을 붉히며 흘끔대는 시선들이 빠지지 않고 뒤따랐다.
물론 재희는 한영이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여자를 갈아 치우고, 도대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정도로 성격들이 엉망인 여자만 만나고, 때때로 밤늦게까지 집에도 오지 않고, 심기 거슬리면 그 육감적인 입술로 엄청난 독설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늘어놓지만-.
한영은 그래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검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재희는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안 해도 그만인 말만 괜히 덧붙였다.
“재희야!”
와락 달려드는 복슬복슬한 인혜의 단발머리를 향해 짐짓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왁자지껄한 말소리,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시간 위로 흐르고 있었다. 재희는 순간을 새기듯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영재가 틱틱대는 소리, 인혜가 듣다못해 짜증을 내며 영재의 머리카락을 휘어잡는 소리, 상현의 낄낄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낮은 웃음소리까지.
재희는 웃었다.
그녀만 입을 다물면, 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행복이 그녀 곁에 있었다.
그러니 마땅히 침묵해야 옳았다.
* * *
하와가 건넨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라면, 마재희에게 선악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건넨 하와는 또 누구였을까? 재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가 추측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꿈이었다. 열일곱, 막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어느 날 밤 꾸었던 그 꿈.
마재희는 그 꿈속에서 이한영과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성적인 행위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간지럽히고, 웃으며 침대를 굴러 피하고, 그렇게 빼는 몸을 쫓아가 누르듯 덮치며 간지럽히고- 그런 식의 의미 없는 행동들만 이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재희는 꿈에서 깬 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틀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열이 올라 끙끙 앓았다. 홀로 앓고 있는 재희를 돌본 이는 언제나처럼 한영이었다. 그는 재희의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려놓았고, 죽을 만들어 재희의 입술에 대 주고, 복숭아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것을 묵묵히, 자연스러운 자상함으로 행하는 한영과 달리, 재희는 그 손길 하나하나에 꿈을 대조하고 있었다. 앓는 중에도 그녀는 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기억을 곱씹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그리고 그녀의 열이 잠잠해져 한영이 안도의 한숨을 흘린 날, 첫 월경이 시작되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다소 늦은 나이였다.
그 이후로도 일 년 정도는 자신이 한영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자연스레 자각하게 된 것에는, 이한영의 바람 잘 날 없는 여성 편력이 도움을 주었을까. 이한영이 어느 누구보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마재희에게 만고의 진리였지만, 사실 끊임없이 한영에게 다가가는 여자들의 수만 봐도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웠다.
한영의 주변을 맴도는 여자들을 보며, 재희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 낭떠러지 밑이 지옥불이 들들 끓는 곳임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 이후는 쭉, 올라가는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라 해야 할까.
“……단어나 문장 수준에서 원관념을 보조관념 아래 숨기는 다른 비유법과 달리, 알레고리는 이야기 전체가 보조관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상관성의 관계가 직관적이지…….”
교수의 질문에 물 흐르듯 유려하게 답하는 한영을 물끄러미 보았다. 햇볕이 내려앉는 자리에 앉아 담담히 입술을 여는 한영의 모습은 가끔, 가슴이 벅차게까지 만든다.
재희는 억지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강단에 서 있는 노교수가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은 채 한영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심 교수는 언제나 그렇게 애매모호한 얼굴을 했기 때문에, 재희는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심 교수가 물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유명합니다.”
“시학 수업에서 소설을 예로 드는가? 가장 잘 알려진 알레고리지. 또?”
“지금 당장 떠오르는 작품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머뭇거림 없이 나오는 한영의 대답에, 노교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며 친근히 물었다.
“이한영 군은 어느 쪽이 좋은가? 단테와 조지 오웰 중에 말일세.”
“…….”
재희는 그 순간 한영이 냉담한 시선으로 교수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한영에게 극도로 예민한 마재희만 알 수 있는 찰나의 변화였다.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한영은 대답했다.
“굳이 꼽자면, 단테 쪽입니다.”
“그런가? 조지 오웰과 잘 맞을 성싶었는데.”
심 교수가 때때로 작정한 것처럼 한영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국문과 학생이라면 모두가 알았다. 그것에 한영이 알게 모르게 귀찮아하는 것을 아는 것은 물론 재희뿐이었다.
“단테의 시구 중에 특별히 이 군이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면 말해 주게. 자네에게 연애 편지 보내고 싶은 여학생들이 쓸 만한 것으로.”
강의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는 의도의 농담이었을까. 노교수의 뜻에 어울려 주겠다는 듯, 한영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이자의 욕망이 나를 강렬히 사로잡았고. 과거의 매혹은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으니-.’”
한영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노교수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흡족해한다기보다는 그 말을 꺼낸 한영의 의도에 재미있어 하는 눈치다.
“‘신곡’인가? 자네도 참…….”
재희는 나이 많은 교수가 왜 저렇게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영이 답한 그 시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만큼 그녀가 원하는 게 또 어디 있을까.
그 말은 그녀를 위한 구절이었다.
“한 학기 동안 뭘 배울지 이제 알 테지? 자네들 연애 편지에 자작시 몇 편 끄적거리도록 도와주는 게 이번 학기 내 일이라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노교수의 말이 어렴풋이 들리는 가운데, 재희는 창가를 보았다.
구월은 기록적인 폭우로 시작되었다. 저지대가 물에 잠기고, 백이 넘는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최악의 물난리를 목격하고 시작된 학교는 여전했다.
저 멀리 교정에 서 있는 수많은 학생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 시위하겠다고 최루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결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총학생회 사수’와 ‘학교 당국은 총학생회 탄압을 중지하라’ 같은 글이 적힌 현수막도, 그녀가 입학 초에 본 전경 그대로였다.
“한영아!”
“한영아, 저기-.”
재희는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 문을 막 나서고 있는 한영이 보였다. 세 명의 여학생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까지 지원해 간신히 붙은 노력이 무색하게, 학교에서의 한영은 재희에게 너무나 먼 존재였다.
때마침 한영이 시선을 느낀 것처럼 고개를 돌린다.
재희와 한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그러나 흐르듯 재희에게 닿은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른 이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과정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가, 재희는 언제나 부러웠다.
“안녕, 재희야.”
느닷없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마주 인사했다.
“……안녕.”
김선정.
생경한 얼굴을 마주하며 재희는 그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순순한 대응이 마음에 든 것처럼 김선정은 웃고 있었다.
“다음 작문이지?”
“응.”
“같이 듣자.”
그 제안에 대답하지 않았으나, 김선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명랑한 태도로 팔을 잡아끄는 김선정을 잠시 지켜보던 재희는 곧 그러려니, 하며 흥미를 잃었다.
김선정은 자기주장이 강했다. 감정 표현도 가감 없었다. 그런 김선정에게 마재희는 발장구 치면 그대로 파문이 이는 호수 같았을지도 모른다. 물보라도 파문도 금세 일지만, 깊은 산속에 둘러싸인 호수는 쉽게 모든 것을 잊고 고요해진다.
김선정이 한참을 재희 옆에서 수다를 떨다 마침내 손을 흔들고 떠날 때까지, 재희는 무덤덤한 얼굴만 고수했다. 김선정이 이 학기 들어 왜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지, 재희는 그다지 오래 고민할 생각이 없었다.
“친해진 거야?”
때마침 옆에 있던 동기 경신이 재희에게 물었다. 김선정의 뒷모습을 눈여겨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조심해. 쟤 안 좋은 소문 많아.”
그렇게 덧붙이는 동기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응.”
때마침 저 멀리 교정을 가로지르는 한영의 등장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대답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았다.
“……한영이다.”
경신이 중얼거렸다.
재희는 가만히 한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바람이 그의 머리를 흐트러트린다. 깊은 눈매가 슬쩍 가늘어진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한 단순한 눈짓조차,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설레게 만든다.
경신이 감탄 섞인 한숨을 흘렸다.
“……재희야, 한영이는 이슬에서 태어났을 것 같지 않니.”
“……한영이가 요정 같단 말이야?”
“아니. 요정보다는 그리스 남신.”
“…….”
“난 가끔 쟤가 너무 완벽해서 무서워.”
“…….”
때마침 멀리서 연달아 들리는 굉음 덕분에 곤란한 대답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경신은 움찔거리는 재희를 보며 짐짓 짓궂게 놀렸다.
“방학 동안 시골에 박혀 있었어?”
재희는 그저 웃었다. 최루탄 쏘는 소리도, 대학교란 공간에도, 그녀가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경신은 모를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재희는 처음 입학하던 시절 느꼈던 공포를 떠올렸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 나름으로 대학 생활의 낭만을 꿈꿨던 것 같다.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시위하는 장면을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고 목격했으면서도, 그녀는 그랬다. 대학교를 가면 다양한 분야의 공부도 하고, 선후배 친구들과 통기타 들고 여행하고, 그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대학교란 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 어떤 진실이 그 안에 감돌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낭만이었으리라. 재희는 대학교에 들어와 두려움을 가장 먼저 배웠다. 말조심, 행동 조심하는 법을 그다음으로 배웠다. 곧이어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지내 왔던 안온한 삶이 허상과도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재희는 옛 기억을 떠올리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가게마다 셔터가 내려진 좁은 골목이었다. 가두시위가 시작되자 가게 주인의 손에 의해 내려졌을 셔터를 재희는 말없이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러나 인기척은 없었다.
착각한 걸까?
누가 뒤쫓아 오는 것 같다니. 신경이 괜히 예민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재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재희의 방 창문에 달린 풍경은 한영이 중학교 다닐 무렵 직접 달아 준 것이었다. 흰 깃털로 장식된 풍경은 그 정결한 생김새만큼이나 소리도 맑았다. 재희는 그 풍경을 애지중지했다. 같이해 온 시간만큼 한영이 그녀에게 안겨 준 선물은 많지만, 그 풍경만큼 그녀에게 좋은 기억을 빈번히도 선물해 준 것은 몇 없었다.
풍경은 바람이 찾아드는 순간에 운다. 한영이 창문을 넘어 그녀를 찾아올 때도 운다. 한영은 넋을 자주 놓는 재희가 행여 자신 때문에 놀랄까 배려한 것이겠지만, 그녀에게 풍경 소리는 길고 긴 기다림이자, 평생 놓지 못할 기대이고, 유일한 기쁨이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재희야.”
기다리던 목소리와 함께, 찰랑, 풍경이 울었다.
재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저녁 먹자.”
창턱에 한쪽 무릎을 걸친 채 한영이 웃고 있었다. 그는 뻗고 있던 손 그대로 다시 풍경을 툭, 쳤다. 찰랑, 새하얀 풍경이 인사를 하듯 울렸다.
“다 차려 놨어. 너만 오면 돼.”
“……응.”
그 웃는 얼굴을 더 마주하다가는 볼을 붉힐까 싶어, 재희는 서둘러 책상에서 일어났다.
둘 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늘 같이 식사를 해 왔으니, 새삼 두근댈 상황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마재희가 이 순간에 무뎌질 일은 결코 없었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
“그냥. 좋았어.”
“그래? 작문 교수님 악명이 자자하던데.”
“……소문까지 날 정도였어?”
앞서가던 한영이 그녀의 반문을 듣고 나직이 웃었다.
그 잔잔한 웃음소리를 따라 재희는 창턱에 무릎을 올렸다. 창문 밖으로는 테라스라 부르기도 민망한 좁은 난간이 이어졌다. 그 난간을 짚고 발을 대충 쭉 뻗으면, 언제나 한영의 집 난간의 턱에 발이 닿곤 했다.
집과 집 사이에 자리 잡은 울창한 소나무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월담은 금세 공공연한 눈길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비밀이기는 했으나, 매일 저녁을 함께하고 있단 사실을 아는 이들은 몇 없었다.
“조심해.”
먼저 창문을 넘은 한영이 비틀거리는 재희를 보며 손을 뻗었다. 재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것처럼 그 손을 잡았다. 그대로 한영의 침대로 안착했다.
손으로 짚은 이불보의 촉감이 부드러워 재희는 고개를 내렸다. 한영이 매일 밤 누워서 자는 침대는 원래 창문 밑에 있지 않았다. 창문 맞은편의 벽에 붙어 있었는데, 재희가 언젠가 창턱을 넘다 방바닥에 잘못 넘어져 구른 이후로 창문 밑에 배치된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위치 이동이었다. 난간에 오갈 때 쓰라고 놓인 두 쌍의 슬리퍼처럼.
“……새 이불 샀어?”
아무 생각 없이 질문하며 고개를 들던 재희는 잠시 당황했다.
한영이 계속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그것도 재희를 종종 옴짝달싹 못 하게 했던 차분한 시선으로는, 더더욱.
재희는 민망해졌다. 설마 이불보 쓰다듬는 걸 봤을까. 그 손길이 이상해 보였으면 어쩌지?
그러나 한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히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전에 쓰던 건 너무 닳아서.”
“……벌써?”
“싼 걸 샀더니 그런가 봐. 내려가자. 너 좋아하는 갈비 해 놨어.”
“정말?”
“그런데 양념이 잘됐는지는 자신이 없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을 나가는 한영은 참된 요리사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재희는 그 뒷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한영은 다정하다. 언제나 그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치마를 차분히 내리며 창문 너머를 잠시 본다. 그녀의 방 창문이 훤히 보였다. 흰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아스라이 울리는 풍경 소리마저 고스란히 귀에 닿는다.
재희는 문득 궁금해한다.
너도 한 번쯤은, 내 방을 궁금해하고 들여다본 적이 있을까.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서 곁눈질을 한 적은 정말 조금도 없는 걸까.
재희는 한영의 방에 삭막하게 놓인 침대에서, 그 표면에 묻은 아주 작은 흠집 속에서도 한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시사철 깨끗한 한영의 이불보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향기에서부터 설레는 마음을 느낀다. 풋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난 짝사랑의 세월이 길었고, 그 시간의 무게에 휘청거리면서도 마음을 접지 못하는 이유가 그렇게 도처에 있었다.
그런 점을 보면 결국, 마재희가 이한영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재희야.”
일 층에서 부르는 한영의 목소리에 재희는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며 입술을 단단히 여몄다.
그녀는 지금이 좋았다.
한영의 방으로 마음대로 넘어올 수 있는 권리, 그것을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 어땠어?”
언제나처럼 한영의 집 식탁에 앉아 젓가락질을 하는 와중에, 한영이 흘러가듯 던진 질문이었다. 어떻게 들어도 그 질문은 어린 동생을 염려하는 다정한 오빠의 것이었다.
재희는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잠자코 대답했다.
“괜찮았어.”
그녀는 새침한 동생 역할을 맡고 싶지는 않아 금세 덧붙였다.
“너는 어땠어?”
“늘 똑같지.”
“……그래서 좋았어?”
그 말에 왜였을까, 한영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재희는 그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적어도 지금은 좋아.”
“…….”
이한영은 확대 해석하고 싶어지는 말을 곧잘 한다. 재희는 볼이 행여 붉어질까 반찬으로 시선을 뚝 떨어트렸다.
“요즘 못 보던 애와 같이 다니던데.”
“……아, 선정이.”
재희는 얌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야.”
“앞으로 더 친해질 일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영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으나, 얼핏 떠보는 기색도 있었다.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한영은 담담한 듯 무심한 미소를 언제나처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은 눈에 서린 관찰의 낌새를, 재희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 재희야. 그냥 물어본 거야.”
한영의 손가락이 식탁 위에 놓인 재희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쓰다듬듯 건드린 손가락은 그렇게 힘주어 주먹 쥘 필요 없음을 알려 주었지만, 재희에게는 그 손짓마저 긴장해야 할 요소임을 이한영은 모른다.
잠시 재희의 눈을 들여다보던 한영이 씁쓸한 미소를 얼핏 띠었다. 금세 지워진 미소였지만 재희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고, 또 한영에게 미안해졌다. 마음을 자각한 이후 마재희는 이한영 앞에서 지독히도 서투르고 어리석었다. 어떻게든 숨기려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재희를 경직하게 만들고 움츠러들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저 예리한 이한영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 이유까지 알 수는 없었을지라도.
“……오늘 친구가 재미있는 말을 했는데.”
그래서 재희는 그렇게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한영이 재희의 뻣뻣함을 한영과 멀어지려는 신호로 해석하는 것이 싫었다.
한영은 재희가 바라는 대로 가만히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재희는 최대한 무심한 어투를 가장해 말했다.
“한영이 네가 이슬에서 태어났을 것 같대. 그리스 남신 같다고.”
“누가?”
“……그건 상대의 체면을 생각해서 안 밝힐래.”
“감싸 주는 걸 보니 경신이구나.”
한영에게 속이 빤히 읽히는 게 민망하면서도, 재희는 이상하게 그것이 매번 기뻤다.
못 말리겠다는 듯 웃는 한영을 따라 재희는 미소 지었다. 찰나지만 한영의 시선이 느른하게 재희의 입가에 머물다 떨어진다. 그 의미 없는 시선조차 예민히 감지하는 자신을, 한영은 몰라야 했다.
“재희야, 너는?”
“……응?”
“너도 내가 그렇게 보여? 그리스 남신?”
그저 짓궂게 장난삼아 묻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재희는 이상하게도, 그 질문 속에서 시험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점을 보면 결국 한영을 인외시하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일까. 재희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곧 입을 열었다.
“한영아.”
“왜?”
“친구 다리가 부러졌다고 엉엉 우는 신은 없어.”
국민학교 시절, 언제나처럼 짓궂게 그녀를 괴롭히던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크게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아이들 나름으로는 가볍게 넘어뜨리겠다고 한 것인데 위치가 좋지 않았다.
계단에서 떨어지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재희는 병실에 누워 있던 것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어린 한영도.
재희는 그 앳되던 얼굴을 떠올리면 늘 행복해졌다. 한영이 자신을 위해 울고 있었다. 그 기억은 아무리 둔한 마재희라도 쉽게 잊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니었다.
“……글쎄. 그리스 신이라면 가능할걸.”
부드럽게 말을 받아친 한영이 다정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재희는 그 눈을 얼마 마주 보지 못하고 내리뜨며 웃었다.
저 얼굴에 서린 애정이 가족을 향한 애정과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행여 볼이 붉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자신이 슬프다. 추억을 나누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것은 괴롭다.
불쑥 들이닥친 추억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건드렸을까. 재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 애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널 민 애들?”
“응.”
한영이 잠시 조용히 웃다 중얼거렸다.
“……그 일로 뭔가 배웠다면 이제 철없는 짓은 하진 않겠지.”
재희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화를 낼 기분이 들지 않았다. 계단에서 떨어지고 정신을 막 잃기 전 어렴풋이 겁에 질린 얼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영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와 달랐나 보다.
“……한영아, 혹시 그 애들도 때렸어?”
“글쎄. 나도 기억이 안 나서.”
한영이 숨기려는 노력도 없이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은 아니야. 할머니에게 혼난 기억이 남아 있어서 대충 내가 어떻게 했겠구나, 짐작하고 있는 거지.”
고등학교 진학할 무렵 돌아가신 한영의 할머니는 엄한 분이셨다. 한영의 행동 하나하나에 빈틈이 없는 것에는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 그의 할머니는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회초리를 드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재희를 괴롭히던 동네 아이들을 한영이 때려눕힌 날이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내리치는 소리가 재희의 집까지 들려오곤 했다. 재희는 옛 기억을 떠올리자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 왔다.
“……할머니한테 많이 혼났어?”
한영이 나직하게 웃었다.
“내 인생에서 다시없을 정도로.”
“……아.”
“그때는 어렸으니까.”
한영은 웃으며 덧붙였다.
“적당한 방법을 몰랐던 거지. 그것을 할머니께서는 걱정하셨던 거고.”
숟가락을 들며 한영은 뒤늦게 생각난 것처럼 다시 말했다.
“국 식겠다. 어서 먹어.”
한영은 재희를 언제나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감쌌다. 그것이 지나치리만큼 맹목적인 보호였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재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영보다 이 년 늦게 심곡동으로 이사 온 인혜도 재희가 놀림받고 괴롭힘당할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한영이 데려온 영재와 상현도, 마찬가지였다.
재희 스스로가 보기에, 자신은 인복이 넘쳤다.
“어렸을 때처럼 너 괴롭힌 애들 때리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문득 들려온 한영의 목소리에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한영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 재희야. 알았지.”
“……응.”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재희는 시선을 내렸다. 그 얼굴 위로 한영의 시선이 머무른다. 그 집요한 관찰의 시선 앞에서 재희는 어떻게든 평온한 척하며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시선 앞에서 그녀는 여태 어떻게 마음을 숨길 수 있었을까. 그게 과연 포커페이스란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일까.
아니면 마재희도 여자라는 사실이, 이한영의 머릿속에 조금도 의미 깊게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안도해야 할 일이다. 재희는 웃었다.
그 웃음에 서린 미묘한 감정을 느낀 것처럼 한영의 시선이 잠시 끈질기게 달라붙었으나, 곧 떨어졌다. 너무나도 쉽게 떨어지는 그 시선이 언제나 재희는 부러웠다.
아무리 연습해도, 그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 *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던 한영의 말은, 일종의 예지였던 걸까? 한영으로서는 아무 의미도 없이 건넸을 단순한 상투어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 말이 단 하룻밤 만에 재희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주제가 될 거라고는.
재희는 수업을 듣고 귀가하는 길 위에서 묵묵히 생각해 보았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유독 날카로이 들렸다. 이미 삼십 분이 흘렀다. 일부러 먼 길을 돌고 있음에도, 딱딱 떨어지는 구둣발 소리는 끈질기도록 그녀 뒤를 따라왔다.
모퉁이를 돌며 흘끔 확인해 본 바로는, 남자다. 미약하지만 발 한쪽도 절고 있었다.
발 한쪽을 저는데, 누군가의 뒤를 쫓아다닌다니.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재희는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상현을 찾았다. 학보를 제작할 무렵이라 상현이 바쁘다는 걸 알면서도, 알 수 없는 남자의 미행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오, 재희.”
다행히 상현은 재희의 방문을 반겼다. 사실 신문이니, 활자니에 진력이 난 게 더 큰 이유인 듯했지만, 환대는 환대였다.
“마침 잘 왔어. 너 보고 싶어 하던 시집 얻었는데.”
상현은 잠시 닫힌 문 너머로 들어가더니 작은 책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김지하 시인의 신간은 나오자마자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제본이라지만 대낮에 당당히 들고 다닐 것은 못 되었기 때문에, 재희는 바로 시집을 가방에 넣었다.
“……많이 바빠?”
재희의 질문에 상현은 고민도 없이 벌컥 신문부실 문을 열고 외쳤다.
“저 취재하고 올게요!”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적당히 놀고 들어와!
상현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재희를 이끌었다. 가는 방향을 보자니 도서관 쪽이었다. 재희는 불길하고도 달달한 예감에, 조심스레 물었다.
“……도서관은 왜?”
“한영이도 같이 데리고 나가자. 괜찮은 음악다방 생겼어. 둘 다 아직 시간 여유 있지?”
한영이 있는 앞에서 어떤 남자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말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한영은 또 보고 싶다. 재희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빠르게 고민했다. 답은 금세 나왔다. 바쁜 상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한영이부터 보고, 나중에 상담하자.
그러나 한영이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문학 코너에는 정작 정적만 있었다.
“없네?”
속삭이는 목소리로 상현이 혀를 찼다.
재희는 문득 눈에 들어온 광경에 말없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책장에 단테의 신곡이 꽂혀 있었다.
재희는 그것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상현아.”
“엉?”
한영이 근처에 있나 돌아다니던 상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재희는 가만히 기척을 살폈다. 다방까지 가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있는 데서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재희는 상현을 좀 더 외진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며칠째 누가 네 뒤를 쫓아다녔다고? 며칠째? 하루도 아니고, 며칠이나?”
늘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상현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충격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재희는 조용한 말씨로 그를 달랬다.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아. 그러니까 위험한 적은 없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답답하다는 듯 말을 잇던 상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 봤어?”
“응. 아저씨였어.”
“……이 변태 새끼가…….”
그렇게 말을 하던 상현이 문득 입을 닫았다. 무언가가 떠오른 얼굴이었다.
묻는 시선으로 재희가 보자, 상현은 잠시 머리를 짜증스레 쓸어 넘겼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낯빛이었다.
“혹시 총학생회 임원들 중에 친한 사람 있어?”
“응.”
“……네가 총학 선배들과 친하다고?”
“다는 아니고. 강대환 선배가 우리 과야.”
“아…….”
그제야 알겠다는 얼굴에, 재희는 물끄러미 상현을 보았다.
“아이고 참…… 강 형과 친했어?”
“가끔 챙겨 주셨어. 내가 비 맞은 개, 아니, 강아지 같대.”
“……설마 개새끼라고 한 건 아니지?”
“처음만 그랬어. 그다음부터는 강아지라고 꼬박꼬박 불러 주셨어.”
학생 기자인 이력 못지않게 상현은 마당발이었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쉬쉬하는 사정도 훤히 꿰고 있었다. 재희는 조용히 상현이 하는 말을 들었다. 개강한 후 안 보여 휴학한 줄 알았던 삼 학년 선배의 소식은 곧 그녀를 우울감에 빠트렸다.
“……수배?”
“강 형이 총학생회 부회장이잖아.”
“……지금 무사하긴 한 거야?”
“시골에서 잘 숨어 지내고 있대.”
“…….”
“널 미행하는 사람, 아무래도 강 형 때문에 지켜보는 경찰 같아. 지금 선배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다 붙었거든. 조사받은 사람도 있고. 네가 특별히 친했던 것도 아니고, 운동권도 아니니까…… 아, 혹시 강 형에게서 연락 오거나 하진 않았지?”
“따로 연락할 정도로 친하진 않아.”
“그럼 됐어. 얌전히 공부만 하는 거 확인하면, 떨어질 거야.”
“……난 됐지만, 그럼 선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상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경찰에 안 잡히기만을 바라야지.”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 부탁하자, 상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말리려 했다. 하필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상현은 더 잔소리를 잇지 못했다.
헤어질 때 상현은 제안했다.
“집에 갈 때 데려다줄게.”
그러나 재희는 평소처럼 다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로 상현의 걱정을 물리쳤다.
물론 상현은 쉽게 납득하려 하지 않았지만, 재희의 의지는 굳건했다. 지켜보는 눈이 있는 것을 훤히 아는데 그 앞에 상현을 보란 듯이 데려다 놓고 싶지는 않았다. 상현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그랬다. 인혜도, 영재도, 그리고- 한영도.
“……조심해야겠다.”
걷는 걸음 내내 기억 속 강대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막 입학한 그녀가 대학 생활에 적응 못 하고 어수룩하게 굴 때마다 강대환은 ‘강아지야, 이것도 올해부터 조금 나아진 거야. 나 입학할 때는 말이야, 숨도 못 쉬었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재희는 답답한 가슴에 말없이 눈을 감았다. 올해 입학해 벌써 이 학기다. 그런데 아직도 그녀는 대학교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더더욱.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강의실로 걸어가면서도 미처 몰랐다. 고작 세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후에, 그녀가 다시 적응의 시험대에 오를 상황이 생기리란 것을.
“……지금 나만 보고 있는 거 아니지?”
“……저년이, 감히.”
교내 식당의 식탁에 막 앉고 있던 재희는 들려온 거친 욕설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양옆에 자리 잡은 동기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엉거주춤 식판을 들고 선 채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시선이 한 방향이다. 재희는 무심코 그들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
곧 재희는 시선을 내려 식판을 보았다. 가지볶음의 치명적인 형용이 눈에 들어왔다. 입맛이 떨어져 재희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동기들이 뒤늦게 자리에 앉으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둘이 사귀는 거야?”
“……설마. 한영이가 미쳤다고?”
“그럼 왜 저 손을 내버려 두겠어.”
“나도 만져 보고 싶다…….”
조용히 시선을 든 재희는 익숙히 한영을 찾아냈다. 몇 개의 식탁 너머 앉아 있는 한영의 옆으로 선정이 의기양양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재희는 선정이 한영의 팔에 손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살갑게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런 선정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한영도 보았다.
재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긋나긋하게 휘어지는 저 눈웃음은, 이한영이 작정을 하고 사람을 홀리려 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
재희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국에 밥을 말며 반찬 칸에 있는 가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가지를 먹는 걸까. 이게 그렇게 맛있을까? 애써 생각해 보며 재희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비밀을 숨기고도 저녁 식사는 소소하게 흘러갔다.
“재희야, 편식하지 마.”
“……오늘 교내 식당에도 가지 나왔잖아.”
“안 먹는 거 다 봤어.”
“……아닌데. 너 안 볼 때 분명 먹었을 건데.”
“가지가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변명을 해.”
“징그러워.”
“눈 감고 먹어 봐. 의외로 맛있어.”
한영에게는 이른 육아 체험의 현장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재희에게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랬듯, 괴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혜정이와 헤어졌어.”
불쑥 한영이 던진 말에, 재희는 밥 한 술을 푸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벌써?”
“이번에는 그래도 오래간 것 같은데.”
“얼마나 됐는데?”
그렇게 무심한 척 물어보면서도 재희는 속으로 한 달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영도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한 달 됐나.”
재희는 묻고 싶었다. 그럼 이제 선정이랑 사귀는 거야? 그러나 그것을 자연스럽게 물어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재희는 침묵만 지켰다.
그런 재희가 내심 신경 쓰였을까. 한영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생각 해?”
“……그냥. 연애는 되게 어려운 것 같아서.”
한영이 웃는다.
“쉽게 하니까 이렇게 엉망인 거야, 재희야. 어렵게 하면 역으로 쉽겠지.”
무언가 복잡한 의미가 얽힌 말처럼 들렸다.
재희는 조용히 반박했다.
“……엉망 아니야.”
“그렇게 봐준다면 고맙네.”
한영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가지 하나를 재희의 고봉밥에 올려 주며 물었다.
“재희 넌 어때. 아직도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재희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한영의 눈을 살폈다. 파문 없이 고요한 눈이다.
“……응.”
“나 때문에 연애에 환상이 없으려나.”
“그런 거 아냐.”
“그럼?”
“그냥……. 어떤 사람을 봐도, 감흥이 없어.”
그녀에게 감정적 요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이한영뿐이다. 재희는 무뚝뚝한 얼굴로 젓가락질에만 집중하는 척했다.
한영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처음부터 불꽃 튀는 사랑을 하고 싶은 거라면, 생각을 고쳐 보는 걸 권할게. 그런 경우가 많지 않거든.”
“…….”
“만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정도 쌓이고 사랑도 생기는 거지. 보통은 다 그런 식으로 사랑을 해, 재희야.”
“……너도?”
“나도.”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한영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한영은 겉보기에는 뭐든 좋다는 듯 웃고 있어도, 실은 누구보다 엄격했다. 도덕적인 면에서 엄격하다 못해 결벽적인 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을, 그래서 그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보면 웃고 있어도 내심 불쾌해한다는 것을, 재희는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런 면은 사람이라면 모두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한영이 그런 것처럼, 그 불쾌감을 참고 견딘다.
그러나 앞으로 사랑하게 될지도 모를 상대를 고를 때만큼은, 으레 그 인내를 거두지 않나.
“한번 만나 보기라도 해 봐.”
“……응.”
목이 일순 메어 재희는 물컵을 입가에 가까이 했다.
이한영은 나쁜 여자들만 만난다. 누군가를 해하는 데 어떤 거리낌도 없고 바람피우는 걸 당당히 여기는 여자들만 만난다. 전부 한영이 좋아하지 않는, 그의 결벽적인 기준에는 불쾌감만 자아내는 여자들이었다. 그런 여자들을 만나면서, 한영은 언젠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정말로 믿었을까?
“…….”
“요즘 무슨 일 없지?”
“……아, 응.”
“……물 따라 줄까.”
“응. 고마워.”
오랜 짝사랑으로 마음 앓이 하며 마재희가 지켜본 이한영은 사실 사랑에 관심이 없다. 어느 누구보다 달콤하게 웃으며 사랑을 논하지만, 재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안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어쩌면,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 * *
볕이 따스한 날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하얀 커튼이 흔들리며 책장을 어루만진다. 사부작사부작 천이 마찰하는 소리만이 있었다. 며칠 내내 그치지 않았던 시위마저 멎은 그 시각, 마디마디가 단단히 길게 뻗은 손가락이 창가 아래 있었다.
무심히 책을 넘기는 손길은 무료한 감마저 다분했다. 기계적으로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간다. 그러나 그 손은 얼마 가지 않아 멈칫 움직임을 죽였다.
몇 개의 책장 너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말문을 연 처음 순간, 손은 단순히 그 목소리를 감상하듯 숨을 죽였다. 그러나 점차 목소리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고백하면서, 책을 쥔 손은 얼음처럼 굳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재희야, 그래도 한영이한테만이라도 말하자.”
“안 돼.”
“왜?”
“걱정해.”
“……재희야…… 나는……?”
“걱정하지 마. 어차피 며칠 안 가 괜찮아질 거잖아.”
“그거야 정말 경찰이라면 그렇다는 거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그대로 목소리는 끊겼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는 기척이 뒤따랐다. 둘의 기척이 사라지고, 머무르던 객의 기척 또한 금세 멀어졌다.
그렇게, 도서관에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
멈춰 있던 손은 그제야 움직였다.
탁.
책이 거칠게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