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더 아파! 성녀라는 년이! 자기 신이 어디 있는지도 못 알아보고! 꺄아아아아악!!”
이제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클라라. 그 격한 움직임에 옆트임 부근이 조금 흐트러졌다.
…속옷도 하얀색이었다.
다른 일행들이 남은 네임드 키메라들을 전부 쓰러뜨릴 쯤이 되어서야 간신히 클라라를 달랠 수 있었다.
“훌쩍훌쩍.”
“입으로 우는 소리 내지 마세요….”
“그만큼 슬프다는 의미랍니다. 누가 혼란을 틈타 슬쩍 제 속옷을 훔쳐봤거든요.”
“세상에. 누가 그런 짓을! 혹시 자기가 모시는 신이 어디 있는지도 못 알아보는 바보 성녀가 훔쳐본 게 아닐까요?”
“…나가 죽으세요!”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클라라. 다만 정말로 맞출 생각은 없는지 발치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올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낄낄대고 있자니, 클라라의 부들거림이 더욱 커지며 느닷없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차! 간신히 달래놨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이대로 클라라가 사라지더라도 던전은 무사히 클리어되겠지만, 아직 그럴 수는 없지.
여기서 챙겨야 할 것도 남아있고, 무엇보다 아까부터 이쪽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는 헬레나…아니, 정의로운 광명과 만나게 해줘야 하니까.
“농담입니다. 그러니 일단 수틀리면 성불하려 들지는 말아주시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잖아요?”
“그렇긴 하죠….”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전신에서 피워 올리던 빛을 지워내는 클라라.
인제 보니 진짜 사라지려던 게 아니라 그냥 신성력으로 빛을 만들었을 뿐이었네.
클라라가 어색한 미소로 헬레나를 바라보자, 헬레나 또한 어색한 몸짓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으…당신이 이번 대의 성녀인가요?”
“예에. 헬레나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알고 계시겠지만 클라라랍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본인이 아니라 잔류 사념 같은 건데….”
“괘, 괜찮습니다. 방금 정의로운 광명께서 만약 스스로를 자신의 성녀였던 클라라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눈앞의 한 분뿐이라고 하셨거든요.”
“그건…감사한 말씀이네요.”
쭈뼛거리며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 둘. 아니, 셋인가? 보이지는 않으나 정의로운 광명도 여기에 있으니까.
“…….”
“…….”
다만, 그 이후로는 눈치만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클라라랑 헬레나는 그렇다 쳐도 정의로운 광명까지 우왕좌왕할 줄이야.
아마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클라라를 저버린 셈이 됐다며 미안해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면 내가 봤던 그 오두방정을 떠는 개냥이가 조용하다는 게 말이 안 되거든.
헬레나가 정의로운 광명의 말을 무시하고 안 전달할 리도 없고.
그리도 만나고 싶어 했으면서, 정작 만나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다들 밖이라 입이 잘 안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클라라 님. 결계는 얼마나 유지할 수 있나요?”
“에? 아. 원래는 자기희생 주문에 쓰려고 남겨두었던 신성력을 회수했지만, 조금 전에 타라스크와 싸우며 제법 쓰기도 해서…아마 하루?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 길지는 않네요.”
하긴. 신성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이 정도의 결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괜히 성녀가 아니라는 거겠지.
“좀 짧긴 한데…그래도 이야기를 나누기엔 충분하겠죠.”
내가 덧붙인 한 마디에 서로를 바라보던 클라라와 헬레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삭막한 외형만큼이나 내부도 삭막한 카시스 계곡 요새.
하지만 아리따운 미인이 6명이나 되면 이런 살풍경한 방도 꽃밭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내 무릎 위에서 곰실대는 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도중. 문득 위화감이 들어서 번쩍 들어 올렸다.
“으음?”
이제는 이렇게 들어 올려지는 게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리스.
“미인…?”
“흠흠. 물론 내가 좀 예쁘긴 하지만 갑자기 그리 칭찬하면 쑥스럽다네.”
몸을 베베 꼬는 이리스에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소녀로 하자.”
“…왠지 기분 나빠졌네. 내려주게!”
바동대는 이리스를 부드럽게 흔들어 진정시키고는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방해되지 않게 옆으로 잠시 빠져있는 우리와 달리 클라라와 헬레나는 중앙에 앉아 차분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전히 본론은 꺼내지 못하고 조금 겉도는 느낌이었지만…그래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조금 전보다는 훨씬 차분한 분위기네.
창문 너머로 결계를 콩콩 두드리는 키메라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것도 잠시.
에우렐리아 대륙의 요즘 근황 같은 이야기나 하던 클라라가 슬쩍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아직 강신에 미숙하다고 했던가요?”
“맞습니다. 기초인 연결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만, 정작 광명님의 힘과 의식을 본격적으로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네? 아하? 그런 거군요. 제가 죽은 뒤로 300년간 사도는커녕 신탁조차 없다고 했던가요. 그럼 성녀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줄 사람도 없었겠네요.”
“예에. 남겨진 기록과 정의로운 광명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혼자 시도해봤습니다만….”
“으음. 정의로운 광명님은 그거죠. 감각파. 그래서 뭘 설명하시는 데는 좀 서투르시더라고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대체 파앗! 하는 느낌으로 쭈욱! 하고 힘을 써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공통 관심사인 정의로운 광명의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한 둘. 어느새 슬쩍 튀어나온 사자 꼬리가 불만스레 흔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까?
한숨을 푹푹 내쉬는 헬레나의 모습에 클라라가 어딘가 그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알려드릴까요?”
“예? 무엇을 말입니까?”
“강신의 사용법. …그리고 정의로운 광명님의 의지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방법이요.”
이제야 정의로운 광명을 만날 준비가 됐다고 말하는 클라라. 헬레나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요령만 알면 간단해요. 신성력을 추가로 내려받는 건 힘들어도, 정의로운 광명님의 의지는 이미 내면에 깃들어있으니까요.”
이후로 이어진 클라라의 짧은 설명. 약간의 신성력 운용법. 그리고 기도가 아닌 명상을 하라는 충고가 담긴 내용이었다.
찬찬히 이를 곱씹어보던 헬레나는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기도문을 외지도 않았고, 무릎을 꿇거나 양손을 모으지도 않는다.
그저 편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듯이 고른 호흡을 반복하는 헬레나.
신을 찾는 신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러프해 보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헬레나라면 오히려 이게 맞다.
왜냐면 그녀의 신은 천상이 아닌 그녀의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파아앗-!
헬레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광채. 그와 동시에 빛으로 이루어진 귀와 꼬리가 살랑이는 것은 이전까지와 동일했다.
하지만 헬레나가 눈을 뜨는 순간.
“아.”
안 그래도 아름다웠던 금안은 더욱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동공은 한껏 수축해 삼백안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위압감을 흩뿌리는 사나운 눈빛.
여기에 귀와 꼬리까지 합쳐져 무심코 사자를 연상시키는 헬레나의 표정이 돌연 시무룩해졌다.
“미안해. 너무 늦었지?”
“…아뇨. 아닙니다. 나의 주여. 당신께서는 늦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저를 찾아주셨잖아요.”
“하지만 난…클라라 네 마지막 순간에 같이 있어 주지 못했어. 약속했던 천국에도 데려가 주지 못했어.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사도를 홀로 고통 속에 죽게 만들었어.”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불안해하며 우물쭈물대는 헬레나. 아니 정의로운 광명.
그런 정의로운 광명을 꼬옥 안아주는 클라라의 모습은 신과 신도의 관계라기에는 조금 더 애틋한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께서 저를 버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지원군을 보내셨잖아요.”
“하, 하지만 결국 클라라 너는….”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저는 광명님의 사과보다 칭찬이 더 듣고 싶은걸요?”
“칭찬?”
“네. 제가 죽은 뒤로 요새를 빼앗기긴 했겠지만, 그동안은 중앙으로 가는 길을 틀어막을 수 있었잖아요? 만약 남부에 이어 중앙까지 뚫렸다면…어우 상상도 하기 싫네요.”
장난스레 몸을 떠는 클라라. 그녀의 말대로 만약 중앙까지 빼앗겼다면, 신들의 전쟁은 용사 라힘이 태어나기도 전에 끝났으리라.
클라라의 필사적인 저항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클라라의 미련이 무엇인지 들었을 때 이 말을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내 입보다는 정의로운 광명의 입으로 듣고 싶었을 테니까.
잠시 망설이던 광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날…원망하지 않아?”
“전혀요? 잔류 사념에 새겨질 정도로 깊게 경애하고 있는걸요?”
“…….”
무언가 전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사람처럼 입술만 뻐끔거리는 정의로운 광명.
클라라는 그런 그녀의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새하얀 머리를 들이밀었다.
세례를 받는 신도처럼 경건한 자세.
정의로운 광명이 떨리는 움직임으로 클라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잘했어.”
“네.”
“클라라 네 덕분에 연합은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어. 용사 라힘이 나타나는 그 순간까지 말이야.”
“다행이네요.”
“응. 클라라가 있어서 대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거야. 수고했어.”
“뭘요. 저는 당신의 성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리고…고마워. 마지막 순간까지 날 믿어줘서. 원망하지 않아 줘서. 무엇보다 이렇게 기다려줘서.”
“…….”
“정말 고마워 클라라.”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클라라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부모의 칭찬을 들은 아이처럼 방실방실 웃고 있는 입가. 하지만 눈에는 물기가 반짝이고 있다.
결국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눈물이 보드라운 뺨 위를 지나 턱 끝에 고였다 떨어진다.
똑.
바닥에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클라라의 몸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같은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눈속임이 아니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클라라는 진심으로 만족해 모든 미련에서 해방되었다.
더는 그녀를 묶어두는 것이 없으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설령 클라라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는 외롭고 고달팠던 생전의 최후와는 다른, 무척이나 따뜻한 마지막이 되겠지.
…다만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긴 기다림의 끝에 보답받았다고는 하나, 클라라가 행한 일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아직 이 세상을 게임으로만 알고 있을 때도 그리 생각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끼어들었다.
“에잇.”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울면서도 억지로 웃고 있는 클라라와 정의로운 광명.
그 사이로 손을 뻗어 헬레나의 목에 걸려있던 메달리온을 잡아채, 클라라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아얏! 갑자기 뭔가요! 한참 감동적인 부분이었는데.”
“무기 강화요.”
“네? 무슨 강화요? …잠깐 이 메달리온은…어어?”
클라라를 흩어내듯 공중에서 덧없이 녹아내리던 빛무리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메달리온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클라라와 정의로운 광명의 시선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 감동적인 엔딩보다 시끌벅적한 엔딩이 더 좋더라고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크게 뜨며 무언가 말하려던 클라라였으나…그보다 메달리온에 흡수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완전히 사라진 클라라와 어버버 거리는 정의로운 광명.
그 사이에서 은은한 서광을 뿜어내는 메달리온이 홀로 시끄럽게 진동해댔다.
웅. 우웅-
마치 항의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 손끝으로 메달리온을 톡톡 두드리고는 잘 보이도록 높게 들어 올렸다.
“빰빠카빰~ 얀델은 강화에 성공했다!”
좋은 소식을 알렸건만, 어째서인지 돌아오는 것은 미친놈이라도 본 것 같은 시선뿐이었다.
너무해.
“빰빠카 빰~ 얀델은 강화에 성공했다!”
좋은 소식을 알렸건만, 어째서인지 돌아오는 것은 미친놈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뿐이었다.
너무해.
조금 시무룩해지려는 순간. 정의로운 광명이 울먹이며 달려들었다.
“도, 돌려줘! 클라라를 돌려줘!”
내게 반쯤 매달리다시피 달라붙어, 버둥버둥 손을 뻗는 모습이 조금 애처롭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뭐, 재밌으니까 됐나.
높게 치켜들었던 메달리온을 눈높이에서 흔들었다.
“클라라? 아아…이것 말인가?”
“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