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락 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마나 포션을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처맞기만 하던 타라스크가 지금을 기회라 여긴 것인지 용수철처럼 몸을 구부렸다가 단번에 펼쳤다.
“놈! 방심했구나! 더는 방심하지 않겠다! 단번에 찢어 죽여주마!”
기세등등한 소리와 함께 단번에 밑바닥에서부터 뛰어오르는 타라스크. 녀석의 각력은 아직 양호한지 저만한 거구를 단숨에 지상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엄청난 속도로 추락했다.
쿵!
“크아아아악!!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멍청하긴. 여기까지 점프하면 그만큼 날아오른 거잖아. 처음에 왜 처박혔는지 벌써 까먹었어?”
“그, 그렇다면…!”
벽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린 타라스크. 옆으로 땅굴을 파서 완만하게 벗어나려는 거겠지.
다만 애초에 내가 조금 전에 빈틈을 보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마나 보충하려고 그런 거였지.
“썬더 콜링!”
“끄윽.”
많이 맞다 보니 꽤 아픈지 움찔하는 타라스크. 눈치 좋게도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벽면에 결계를 두르는 클라라.
타라스크가 있는 힘껏 발길질을 해보지만…소용없는 짓이다.
300년 전에 클라라가 패배한 건 어디까지나 신성력이 전부 떨어져서지, 누군가 클라라의 결계를 부숴서가 아니다.
타라스크와 휘하의 모든 키메라들이 달려들어도 멀쩡했던 결계다. 혼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아아….”
벽은 완벽히 막혔고, 위로 점프해도 곤두박질칠 뿐이다.
클라라를 요새에 몰아넣었던 타라스크였으나 이번에는 자신이 갇혔다는 걸 깨달은 걸까.
허세 가득한 말만 내뱉던 입에서 절망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반면 이대로 꼼짝도 못하는 타라스크를 죽을 때까지 줘패기만 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클라라는 표정이 확 밝아졌고.
익숙한 메달리온에서 자기희생 주문의 트리거로 쓰기 위해 남겨두었던 신성력을 끌어내며 주먹을 불끈 쥐는 클라라.
“지혜로운 마법사님.”
“낮부끄럽네요. 얀델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얀델 마법사님.”
움켜쥔 주먹 사이로 빛나는 창을 만들어낸 클라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구 때립시다.”
“물론이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만들어줘야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진 타라스크의 시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뒤. 이젠 결계가 사라진 벽면을 계단처럼 바꿔 천천히 구덩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냅다 드러누웠다.
“아고고…죽겠네 진짜….”
역린이 부서져 조금이나마 딜이 들어가는 상태가 되고, 클라라의 신성력이 악신의 축복을 중화시켜 약화된 상태였다고는 하나 타라스크는 단단했다.
아무리 나라도 중급 마법을 세 자리 수로 연사하면 마나가 부족해지기 마련.
중간 중간에 마력량이야 포션으로 어찌어찌 채워넣을 수 있고, 소모되는 정신력도 시스템 보정의 힘으로 최소화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마력이 돌아다니는 마나 회로다.
보통은 마력 컨트롤이 깔끔하다면 아무리 마법을 연달아 써도 회로가 상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린트블룸 코어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더라.
코어는 심장에, 회로는 혈관과 신경계와 연계되도록 만든 특수한 마나 호흡법.
그래서인지 장기간 막대한 양의 마나를 끌어 올리면 사소한 부작용 몇 가지가 나타난다.
구체적으로는 어지럼증, 심장 두근거림, 헛구역질, 소화불량 등등.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좀 나빠지는 건데….
뭐지? 어째 지구에서 커피 과하게 마셨을 때랑 비슷한 증상이네?
하긴. 마력도 각성제긴 하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결계로 뒤덮힌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 문득 시야의 끝자락에 걸친 새하얀 여인을 발견했다.
성녀 클라라. 그녀가 이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큰일이다 싶어서요. 제가 한번 죽어봐서 아는데 엄청 아프지 뭐에요.”
“…네?”
“방금 죽겠네 진짜…하며 힘들어하셨잖아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됐으니까 지금은 잠깐 누워 계시길. 일행분들은 순조롭게 이겨가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요.”
그리 말하며 내 머리맡에 쪼그려 앉은 클라라. 품을 뒤적거리더니, 푸른 꽃 하나가 수 놓인 손수건을 꺼냈다.
자기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음에도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는 클라라.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지는 둘째 치고, 조금 전에 흘려듣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멈칫하며 녹색의 투명한 눈동자를 깜빡이는 클라라.
“왜 그러시나요? 좀 아슬아슬하긴 해도 그 각도에서 속옷은 안 보이실 텐데….”
“…보일 것 같아서 쳐다본 거 아닙니다. 조금 전에 하신 죽어봤다는 말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거죠.”
“아하? 그렇죠. 궁금하실만하겠네요. 언데드가 아닌 이상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하물며 얀델 님은 호기심 강한 마법사이기까지 하고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클라라. 하지만 내게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H&A에서 본 정보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만약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건 내 행동으로 인한 나비효과였고.
그렇기에 다른 곳이면 모를까 던전에서 만큼은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흘러갔던 것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달랐다.
본래라면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에 집중했었을 사람이 밖에 나와 함께 싸웠고, 타라스크와는 달리 자신의 기억마저 유지하고 있다.
사실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시나리오 던전이 강력한 의지와 미련이 핵이 되어 생성되는 것이라 해도, 지금의 클라라는 영혼조차 아닌 잔류 사념에 불과하다.
흔히들 말하는 귀신…조금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고기 구우면서 튄 기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
이 자리에서 고기를 구웠다는 걸 알 수 있고, 고기 냄새도 풍기고, 찍어 먹으면 고기맛이 살짝 나지만.
결코 고기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려나.
당연히 기억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지 않나요?”
“얀델 마법사님의 말이 맞아요. 보통 잔류 사념은 생전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을 수 없죠. 기껏해야 죽기 직전의 몇몇 강렬한 기억 정도려나요.”
클라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삶을 불꽃에 비유하자면 지금의 저는 다 타고 남은 재…아니, 바닥에 눌어붙은 그을음 같은 것이겠죠.”
고기랑 튄 기름보다는 훨씬 있어 보이는 비유네.
내 땀에 젖은 손수건을 조심스레 접어 품에 집어넣는 클라라. 정작 자신의 얼굴은 적당히 소매로 슥슥 비벼 닦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마지막까지 바랐던 소망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구원 아닙니까? 적어도 저는 그럴 생각으로 왔습니다.”
“어머? 고마우셔라. 역시 다 알고 오셨군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가 있길 바란 거지만요.”
최후까지 자신을 지키던 성기사들의 죽음에 의미가 있기를. 평생을 성녀로서 싸워온 인생에 의미가 있기를. 영혼마저 불사르며 안식을 포기한 선택에 의미가 있기를.
그리고 던전이라는 이상 현상의 핵이 되어서라도, 마중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고집에 부디 의미가 있기를.
“누구라도 좋으니까. 단 한 번이라도 그렇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잘했다. 덕분에 살았다. 너는 틀리지 않았다. 고맙다. 그러니 이제 쉬어라. 뒷일은 우리에게 맡겨라…뭐 이런 거 있잖아요.”
“…….”
“그 말이 제게 구원으로 다가오려면 당연히 기억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죠.”
잔류 사념에게도 단편적인 기억은 남는다. 남겨진 미련이 미련으로 남은 이유에 관한 기억이 바로 그러하다.
만약…클라라의 미련이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 그 자체였다면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해는 간다.
목적을 잃은 기다림은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뭐, 그것도 슬슬 한계였지만요.”
“아.”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인 한마디에 왜 H&A의 클라라가 300년간의 기억을 잃었는지도 이해가 됐다.
아무리 클라라가 성녀로서 드높은 격을 지닌 존재였더라도, 그 의지가 최후의 순간에 선명하게 타올랐더라도.
결국 남은 것은 눌어붙은 그을음뿐이다.
물 뿌리면 쓸려나가고, 문지르면 닦여나가는 그런 그을음.
오래된 지박령이 자신이 왜 그곳에 묶여있는지도 잊어버린다는 이야기처럼, 클라라도 시간이 흐르며 잔류 사념 자체가 풍화하기 시작했으리라.
가장 먼저 덜어내야 하는 것은 300년간 무의미하게 반복된 하루.
반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포함한 생전의 기억.
이 던전은 원래 2년 뒤에나 사구가 이동한 흔적에서 발견되는 곳이다. 그 2년 동안 클라라는 많은 것을 버려왔겠지.
던전에서 보낸 기다림의 시간은 물론이요, 어쩌면 자기 감정의 일부마저.
H&A에서는 마지막에 사라질 때를 제외하면 잔뜩 지친 사람처럼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거든.
하지만 지금의 클라라는 다르다. 지쳐 보이는 건 동일하지만, 나 지금 감동한 상태에요 하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오고 있으니까.
내 우물쭈물대는 시선을 눈치챈 클라라가 엉덩이를 팡팡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지가 얼굴에 조금 떨어졌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시길. 결국에는 다 잘 됐잖아요? 바깥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결국 정의로운 광명님은 제가 있는 곳을 찾아주셨잖아요? 그리고 조금 늦긴했어도 저를 구해주러 오셨어요. 그것도 당대의 성자와 함께 말이에요.”
“네?”
“솔직히 좀 놀랐어요. 외부인 출신으로 사도가 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갑자기 신성력이 주어진다고 해도 어디에 써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고, 기존에 쌓은 힘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고요.”
“…네?”
“아마 제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준비되지 않은 얀델 마법사님의 몸에 내려오신 거겠죠. 아, 역시 성자님이라고 불러드리는 편이 좋을까요?”
“그으. 잠시만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에이. 오해라뇨. 이렇게나 짙은 가호를 품고 계시면서. 무엇보다 저, 봤거든요? 정의로운 광명님의 앞발을 구현한 공격이요. 물론 본체는 아니고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유사 신체였지만…그래도 제가 성녀잖아요? 그 정도는 알아보죠.”
엣헴 거리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젠체하는 클라라.
근데 완전 헛짚었다. 냥냥 펀치는 내가 아니라 헬레나가 일으킨 일이니까.
“저한테 신성력이 없는데 어떻게 제가 사도겠어요.”
“그야 여기까지 오면서 전부 썼겠죠. 아직 미숙한 것 같으니 막대한 신성력을 끌어오기도 힘들었을 테고…무엇보다 본래 마법사셨으니 오히려 신성력이 없는 편이 싸우기 편했을 테고요. 그래서 처음엔 그냥 마법사신 줄 알았지 뭐에요.”
“진짜 아닌데…이 가호는 그냥 제가 사교도를 잘 때려잡아서 마음에 들어 하신 정의로운 광명님이 내려주신 겁니다.”
“저, 성녀였다니까요? 정의로운 광명님이 전쟁 중에 힘을 많이 쓰셔서 한동안 새로운 사도를 만들기 어려울 거라는 건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 와중에도 이런 가호를 아무에게나 내릴 리 없잖아요. 제 후배거나, 아니면 유력한 후배 후보거나. 둘 중 하나겠죠.”
“허어.”
“아, 저를 두고 새로운 사도를 만들었다고 삐친다거나 그러지는 않으니 걱정 마시길.”
“…….”
실제로 정의로운 광명이 나를 자신의 사도로 삼으려 했던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네.
그래도 왜 이런 오해를 했는지는 대충 감이 온다.
클라라 입장에서는 명백히 사도나 쓸 수 있는 기술을 목격했고, 고위 성기사가 포함된 파티를 이끌며 타라스크를 쓰러뜨린 사람이 짙은 가호까지 두르고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건 착각할 만하네.
갑자기 땀을 닦아주며 친근하게 굴던 것도, 난데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전부 당대의 사도와, 그 안에 있을 정의로운 광명에게 향한 것이었겠지.
어떻게 이를 반박할까 한참을 고민했으나 결국 나온 대답은 심플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내가 무어라 말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쪽이 훨씬 빠르리라.
본인 말대로 클라라는 성녀였으니 같은 성녀를 보면 바로 알아볼 테니까.
“저길 봐주세요.”
“왜 이리 이번 성자는 부끄러움이 많은지…네에 네에. 이번에는 또 뭔……어?”
진작에 사자 귀와 꼬리가 튀어나온 것은 물론이요, 대체 얼마나 많은 신성력을 쏟아부은 건지 전신이 번쩍번쩍 빛나는 헬레나가 도망치려던 키메라의 양팔을 붙잡았다.
헬레나보다 2배는 거대한 샤벨 타이거를 닮은 키메라가 바이스에 잡힌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다.
신성력을 통한 강화는 신이 대신 힘을 써주는 원리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화해도 부작용이 없는 건데…이를 이용해 신체능력을 미친 듯이 강화한 것이리라.
설마 힘에서 밀릴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키메라. 헬레나는 그런 녀석의 팔을 꽉 붙잡은 채, 명치를 향해 니킥을 날렸다.
우득.
여기까지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
고통과 당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키메라 위에 올라탄 헬레나가 양 무릎으로 녀석의 팔뚝을 짓눌렀다.
그리고 들어 올리는 메이스.
퍽! 퍼억! 퍽!
마운팅 자세에서 이어지는 무자비한 뚝배기 깨기. 빠르고 확실하게 네임드급 키메라를 하나 처리한 헬레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후아….”
피가 잔뜩 튄 얼굴로 굉장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다른 이들이 상대하고 있는 키메라를 둘러보다가.
“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클라라와 눈이 마주쳤다.
같은 성녀끼리 기묘한 이끌림이라도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헬레나.
반면 클라라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져 딱딱하게 굳어갔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와 헬레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클라라. 그녀가 돌연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쪼그려 앉았다.
이번에는 속옷이 살짝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으아아앙!!”
클라라가 우는 소리를 내며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반딧불 처럼 작은 빛 덩어리들을 흩뿌리는 모습이 마치 성불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아니, 왜 갑자기 사라지려고 그러세요!”
“부끄러워! 죽고 싶어졌어! 만족했으니까 이만 사라지게 해줘!”
“이미 죽었잖아요?! 그리고 죽는 거 되게 아프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