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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27화 (227/230)

난전 중에 그것도 며칠간 계속된 전투로 지치기까지 한 상태에서 조금 전의 낙하 공격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고위 성기사여도 죽거나 빈사 상태가 되겠지.

다만 내게는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 좁은 계곡 안에서는 무적이랍시고 거들먹거리다 던전에 봉인된 녀석이 말은 잘하네.

심지어 던전의 규칙에 거스르지 못해 기억도 300년 전에 머물러있는 주제에 말이다.

정신력이 강하거나, 존재 자체의 격이 드높은 몬스터는 던전에 갇힌 뒤로도 규칙에 일부 저항할 수 있는데 타라스크는 그런 경우도 아니거든.

길버트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글쎄.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불쾌하군. 최소한의 자격조차 없는 잡것이 내 앞에서 목소리를 낼 줄이야.”

“거 별거 아닌 놈이 허세는 장난 아니네.”

물론 타라스크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한다.

지금이야 중위 마법사가 어디 가서 엣헴 거리지만, 신들의 전쟁 당시에는 좀 미묘한 포지션이었거든.

다만 별거 아니라는 말도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타라스크는 기믹 보스니까.

카시스 계곡 안에서는 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략법만 알면 혼자서도 쓰러뜨릴 수 있는 녀석이다.

“길버트 님. 사전에 말했던 대로 하죠.”

“…정말 혼자서 저런 녀석을 상대해도 괜찮겠습니까?”

직접 타라스크의 공격을 받아본 길버트가 걱정스레 되묻길래, 어깨를 으쓱여주었다.

“당연하죠. 이쪽은 걱정 마시고 카를라랑 엘리샤 쪽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뒤로 물러서는 길버트. 그 모습을 본 타라스크가 눈썹을 씰룩인다.

“네놈…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렇게 죽고 싶다면야 소원대로….”

“됐고.”

타라스크의 말을 끊고는, 왼손에 든 스태프로 녀석을 겨누었다.

그리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목을 까딱였다.

“와 봐. 지금부터 널 쓰러뜨리는데 단 1초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대사를 쳐주자, 아주 좋아 죽으려 드는 타라스크.

“네놈!”

발끈한 타라스크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각력을 이용해 돌진하려는 준비 모션.

빠르고 강력하지만 도중에 방향을 바꿀 수 없기에 카운터 치기 딱 좋은 패턴이다.

다른 일행들도 중간 보스들과 진형을 짜, 대치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던 전투가 다시 시작되려는 순간.

파아아앗-!!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빛의 창.

타라스크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으며 올려다본 하늘. 거기에는 성광창 수십 자루가 공중에 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빛이 사라진 요새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전체적으로 새하얀 여인.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누나가 여기서 왜 나와?

요새를 지키던 빛의 베일이 사라졌다.

그 대신이라는 듯 하늘 위에 떠오른 수십 자루의 성광창.

생김새는 단출하지만, 하나하나가 신성력을 극한까지 정련해 만든 상위 신성술이다.

오로지 악을 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살벌한 기적.

그 밑에는 어느새 빛이 사라진 요새에서 걸어나오는 새하얀 여인이 있었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백발. 혈관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피부. 심지어 옷도 하얀색이다.

색이라고는 눈동자의 녹색과, 입술의 연분홍뿐.

하지만 워낙 생김새가 수려해 괴이함 보다는 아름답다는 감상이 먼저 든다.

반사적으로 쳐다본 얼굴이었으나, 그 익숙한 미모에 나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전대 성녀 클라라. 이 던전의 주인이자, 본래라면 요새 안에서 버티고 있을 구출 대상.

…누나가 여기서 왜 나와?

뭐어, 분위기로 봐서 이쪽에 가세하러 왔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거 맞나?

혹시라도 클라라가 당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잖아.

물론 클라라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애초에 다른 어디도 아닌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성녀다. 그것도 대전쟁에서 실전으로 다져지기까지 했으니 약할 리가 없지.

기사의 정점은 소드마스터, 마법사의 정점은 대마법사라면, 사제의 정점에는 사도가 있다고들 하니까.

다만 지금의 클라라는 만전의 상태가 아니다. 며칠에 걸쳐 쉬지 않고 싸우며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소모가 심한 상태.

제한시간이 하루인 것도 오늘이 가기 전에 남은 신성력이 다하기 때문이다.

타라스크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향해 기울인 몸을 클라라 쪽으로 틀었다.

“제 발로 기어나올 줄이야. 혼자 죽기는 외로웠나 보지?”

“그렇지. 그래서 너희까지 전부 끌어들인 거야.”

“흠? 설마 자폭이라도 하려는 건가?”

“…모른다면 됐어. 어쨌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동감이군.”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살기.

타라스크의 발뒤꿈치가 살짝 올라가며 언제든 달려들 수 있는 자세가 되었고, 클라라의 성광창 또한 일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달려들려는 타라스크와 그런 녀석을 요격하려는 클라라.

클라라의 성광창이 타이밍에 맞출 수 있을 것인지, 타라스크의 두터운 갑각을 뚫을 수 있을 것인지, 혹은 전부 실패하고 허무하게 유효타를 내어줄 것인지.

이 짧은 사이에 일어나는 둘의 수싸움에 괜시리 기분이 나빠져서 타라스크의 뒤통수를 향해 냅다 마법을 갈겼다.

“스톤 스피어.”

투박한 돌의 창을 만들어 사출하는 하급 마법.

클라라의 성광창과는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약한 위력이라서 그런 걸까. 내 쪽으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 타라스크.

단단한 갑각을 믿고 저러는 거겠지. 중위 마법사 수준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의 갑각을 뚫을 수 없다는 자신감.

그게 녀석의 실수다.

후우웅-!

바람을 가르고 나아간 뾰족 바위가 타라스크의 경추 부분…조금 더 정확히는 목과 허리 사이의 거꾸로 난 작은 갑각 하나에 명중한다.

콰직.

“무, 슨…?”

땅을 박차려다 말고 황급히 멈춰서는 녀석.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노려본다.

그래. 겉으로는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지만 본인은 알았겠지. 조금 전의 일격으로 갑각의 연결 자체가 불안정해졌다는 걸.

아무리 마스터피스니 뭐니 해도 결국 키메라는 키메라. 바탕이 되는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소리다.

타라스크의 가죽은 드레이크의 것으로 만들었다. 다만 평범한 비늘 대신 특수 합금을 달아주고, 그 형태도 약간 개조된 탓에 알아보기 힘들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드레이크 종과 같은 약점을 지녔다는 부분이다.

빼곡하게 나 있는 갑옷 같은 비늘. 그중에서도 심장 부분에 거꾸로 난 비늘이 존재하는데.

흔히들 역린이라 부르는 이 부위를 부수면 드레이크의 방어력이 대폭 약화된다.

비늘끼리의 결합이 무너지며 충격 분산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 마력의 순환이 어긋나 마법 저항력도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

이는 타라스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약점이다.

뭐…타라스크를 만든 놈들은 타락하긴 했어도, 실력은 확실하니 어쩌면 방어력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뚜렷한 약점을 숨길 수 있었을 거다.

문제는 그들이 타라스크를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점이지만.

타라스크가 몸에 두른 갑각은 물리적으로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법적으로도 강한 저항력을 가진다.

심지어 혼탁한 합일의 축복을 받아 그 힘이 다하기 전까지는 신성력을 중화하는 것도 가능하고.

본래라면 자신의 피조물들이 거스르지 못하도록 세뇌를 걸었겠지만, 타라스크에게는 마법이 잘 통하지 않으니 그냥 자기들만 아는 약점을 만들어둔 것이다.

키메라는 태생이 불안정해서 그런지 성격이 더러운 경우가 많거든.

참고로 이건 계곡 깊은 곳에 숨겨진 연금술사들의 아지트에 남겨진 메모에서 알 수 있는 정보다.

게임 출시 초반에는 어찌어찌 키메라 무리를 뚫고 요새까지 도착했더니, 무적 치트라도 쓴 것 같은 타라스크에게 번번히 죽거나 시간제한이 지나 처음으로 리셋되기를 반복했었는데.

단순히 때려잡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타라스크를 공략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 거라며 한참을 헤맨 끝에 발견한 정보.

…나중에 가서는 부위 파괴 없이 타라스크 잡기 같은 고인물 전용 컨텐츠의 희생양이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공식 카페를 한번 뒤집을 정도의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공략법이지만, 타라스크 본인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겠지.

이를테면…내가 연금술사들의 사주를 받았거나, 혹은 그들을 벌써 조지고 왔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타라스크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네놈…!”

히죽이며 스태프를 까딱이자 좋아 죽으려는 타라스크. 하지만 아쉽게도 도발에 넘어올 생각은 없는지 되려 차분해진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뭐, 좋다. 결국 다 같이 죽을 놈들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 됐다! 저 주제도 모르는 놈들을 쓸어버려라!”

주변의 키메라들에게 내리는 명령. 이에 지금까지 조용히 물러나 있던 녀석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부대장 급이던 다섯 마리도 이미 다른 일행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다음은 나라는 듯 다리 근육을 크게 부풀리는 타라스크. 이에 클라라가 다급히 장전해둔 성광창을 쏘아대며 외쳤다.

“물러나세요! 당신이 상대할 수준이 아닙니다!”

“다들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타라스크의 등 뒤에 꽂히는 빛의 격류. 조금 말랑해진 갑각으로 완전히 막아내기는 무리였는지 성광창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박혔다.

하지만 그뿐이다. 무엇 하나 두꺼운 갑각을 꿰뚫지 못했고, 타라스크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땅을 박찼다.

쿠우웅!

그저 발을 강하게 내디딘 것만으로도 울려 퍼지는 굉음. 피하는 것은 물론, 눈으로 쫓는 것조차 버거운 속도였지만…이미 준비는 끝났다.

마나가 줄줄 새어나올 정도로 코어의 출력을 높이며 외쳤다.

“디그! 디그! 디그!”

“하!”

깊게 파인 구덩이를 보며 코웃음 치는 타라스크. 하긴, 꽤 깊고 넓게 잘 파였지만 이 정도 거리는 그냥 도약하는 것으로 여유롭게 건너뛸 수 있겠지.

보통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여긴 카시스 계곡. 일정 이상 떠오른 모든 존재는 바닥에 내리꽂히는 기이한 지역이다.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 그 위를 건너는 순간, 타라스크는 내가 파낸 깊이만큼 비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지하로 곤두박질쳤다.

쿠웅!

“커억!”

자신의 몸을 추락시켜 질량 병기로 사용하던 타라스크지만, 그거야 갑각이 멀쩡하고 충격에 대비해 몸을 둥글게 말았을 때의 이야기.

약화된 상태에서 이렇게 갑작스레 떨어져 버리면 어느 정도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다만 지금은 얼마나 데미지를 줬는지 궁금해할 때가 아니다.

본래의 계획은 구덩이에 떨어진 타라스크가 당황한 틈을 타, 뒷덜미의 역린을 파괴하는 것이었으나.

클라라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정신이 팔린 녀석의 뒤통수를 쳐서 이미 부분 파괴는 끝난 상태.

부파도 끝났는데 덫에 걸린 사냥감이 있으면 뭐다?

극딜 타임이지.

“성광창! 빨리 그거 전부 때려 박으세요!”

“에? 아? 에?”

지독한 벽처럼 느껴지던 타라스크가 이리 간단히 무력화된 것이 당황스러웠던 걸까.

잠시 머뭇거리던 클라라였으나, 내가 말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성광창을 겨누고 있었다.

역시 전투 하나는 최고로 손꼽힌다는 정의로운 광명의 성녀. 본능적으로 딜 타이밍을 캐치하는 건가.

파파밧!

차례로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성광창. 빛이 생기니 안쪽이 좀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금이 간 갑각과, 그 위에 성광창을 여럿 꽂혀있어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된 타라스크.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 허우적대며 성광창을 막아보려는 모습을 구경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미 클라라와 합류하고, 보스나 다름없는 타라스크가 이렇게 갇혀있는 이상 마력을 아낄 필요는 없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어댄다. 이를 침묵시키듯 스태프를 들어 올리며 크게 선언했다.

“신뢰, 뇌광, 섬전, 찰나의 순간에 내리쳐라 썬더 콜링!”

스태프 끝에서부터 뻗어 나간 마력이 새까만 먹구름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타라스크를 향해 내리치는 벼락.

콰릉!

“끄으윽….”

마나를 무식하게 때려 박고 공명으로 한 번 더 강화한 덕에 평범한 중급 마법이라고는 볼 수 없는 위력이다.

성광창에 맞으며 혼탁한 합일이 내렸을 가호가 벗겨나가기 시작한 타라스크에게도 어느 정도의 데미지는 들어갈 터.

이를 악물고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썬더 콜링! 썬더 콜링! 썬더 콜링! 썬더 콜링!”

저번에는 스태프가 부서져 손가락을 지져가며 사용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페이가 만들어준 금속제 스태프는 조금 뜨겁게 달아올랐을 뿐, 이 정도 과부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묵묵히 버텨주었다.

연달아 내리치는 번개. 집요하게 맞췄던 곳을 또 노리며 방금 막 성광창을 전부 소모한 클라라에게 말했다.

“다 날리셨으면 결계 좀 쳐주세요. 지금 방해가 들어오면 곤란한지라….”

“…알겠습니다.”

허탈하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 클라라. 그런 그녀를 중심으로 하얀 돔 형태의 신성력이 뻗어나간다.

우리와 우리가 상대하던 우두머리급은 남겨두되, 잡다한 것들은 모조리 밀어내는 결계.

내부에 남은 타라스크도 멀쩡하지는 않은지, 전신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클라라의 신성력에 저항하듯 악신의 가호가 맹렬히 반응하는 것이리라.

달리 말하면 계속 도트뎀이 들어가며 보호막을 깎고 있다는 소리기도 하다.

“후우….”

예상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어쨌든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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