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감수성은 아직도 이해되질 않는단 말이지.
으득.
이오나가 내 목덜미를 깨무는 것과 동시에 느껴지는 이젠 익숙해진 혈액이 빠져나가는 감각.
그리고 등 뒤의 이오나로부터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영창 시간이 부족해서, 좁은 땅굴이라서, 거리가 가까워서 등. 이런저런 이유로 최대 화력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큰 거 한 방 날리며 시작할 수 있으니까.
다른 이들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하. 그럼 간다?”
목덜미에 난 이빨 구멍을 두어번 할짝여 지혈시킨 이오나가 손끝에 피어오르는 핏빛 마법진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블러드 폴.”
언제나 그렇듯 블러드만 가져다 붙인 것 같은 미묘한 이름. 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콰가가가-!!
마법진으로부터 쏟아지는 대량의 핏물. 말 그대로 폭포 같은 수압에 길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가 단숨에 떠내려가며 바깥 풍경이 드러났다.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빼곡하게 자리 잡은 키메라들. 하지만 놈들의 눈에 담긴 감정은 경악뿐이었다.
그야 갑자기 옆에서 핏물이 왕창 쏟아지면 그럴 만도 하지.
일직선으로 쏘아진 이오나의 마법은 출구 쪽의 모든 키메라를 옆으로 밀쳐내거나, 수압으로 찌부러뜨린 뒤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터주는 듯한 느낌.
잽싸게 그 사이로 뛰어들고는 요새가 있는 방향을 향해 준비했던 마법을 쏟아냈다.
“스타라이트 레인!”
태양신의 가호로 대폭 강화된 빛무리가 유성우처럼 키메라들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광탄 한 방에 죽지는 않아도, 두세번 얻어맞으니 갑각이 깨지며 속살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스타라이트 레인은 이러한 광탄을 넓은 범위에 수백개나 내리꽂는 마법.
“캬아아아악!”
“끄에에에엑!”
전방의 키메라들이 녹아내리듯 무너진다. 그 빈틈을 메우듯 전진하는 이오나의 마법.
키메라의 접근을 막아 세우는 피의 벽으로부터 가시가 다량의 가시가 튀어나온다.
구멍이 숭숭 뚫린 키메라들이었으나, 워낙 맷집도 생명력도 좋다 보니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나름 반격하겠답시고 주먹으로 이오나의 마법을 내리치지만…멀쩡할 때도 어찌하기 힘든 마법을 부상당한 채로 부술 수 있겠는가.
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가시에 꿰뚫리는 일뿐이리라.
조금이나마 혈마법을 배운 덕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오나는 이미 시전된 마법에 혈조술을 이용해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준비한 시간에 비해 어쩐지 수수한 마법이다 싶더니…불도저를 준비해왔네.
이거라면 효력이 다하기 전까지 확실하고 빠르게 적의 진형을 밀어낼 수 있으리라.
이오나의 의도를 알아챈 카를라, 엘리샤, 이리스가 차례로 나와 준비했던 마법을 해방했다.
단단한 갑각이 무식한 화력에 녹아내리고, 질긴 생명력은 쉬지 않고 날아오는 마법에 회복할 틈도 없이 무너진다.
이번에는 이오나의 마법이 울타리 역할을 해준 덕에 카를라도 전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렇게 마법사 특유의 미친 화력으로 싹 밀고 나가는 것도 잠시.
다음 마법을 영창하느라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이번에는 그동안 신성력을 모으고 있던 길버트가 나섰다.
대검을 휘감고도 모자라 길게 뻗어나간 백광.
“흐읍!”
단순하게 가로로 대검을 휘두르는 길버트. 하지만 그 위력과 범위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신성력의 칼날이 닿는 거리의 모든 키메라가 두동강 난 것도 모자라 계곡의 한쪽 벽에 깊은 검흔을 남긴다.
상하체가 분리된 녀석들이 바르작대더니 이내 숨이 멎는다.
본래라면 그리 간단히 죽을 놈들이 아니나…오러처럼 짙게 농축된 신성력 앞에서는 얄짤 없나 보네.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어느새 정의로운 광명과의 연결을 완전히 끌어낸 것인지 사자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헬레나였다.
“나의 주여. 사악한 무리 앞에 당신의 권세를 내려주소서. 날카로운 단죄의 발톱을 빌려주소서!”
기도문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메이스를 번쩍 치켜든 헬레나.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뭔가 싶어 당황한 순간. 뒤늦게 구름 사이로 강렬한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정도는 덜하지만 익숙한 압박감. 내면의 가호가 제 주인을 만난 것처럼 기뻐하며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의 틈새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한 사자의 앞발.
너나 할 것 없이 전장의 모두가 경악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오직 헬레나만큼은 흔들림 없이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헬레나의 금안이 단호하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들어 올렸던 메이스를 있는 힘껏 내리찍는다.
“천벌을…!”
그 움직임에 호응하듯 하늘에 떠 있던 사자의 앞발이 지상에 떨어진다.
콰아아앙!!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
빛으로 이루어진 앞발은 금세 사라졌지만, 뇌리에 새겨진 충격은 아직 남아있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신성력을 상당히 소모한 건지 메달리온을 쥔 채, 미리 충전해둔 신성력을 급하게 끌어오는 헬레나.
그녀가 조금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지요 형제님.”
저 멀리에 보이던 요새는 어느새 꽤 가까워져 있었다.
빛의 베일로 둘러싸인 성.
온갖 사악한 무리의 침입을 완고히 거절하는 성채의 중앙. 높게 솟은 탑 위에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반짝이는 백색의 머리카락. 안쪽이 비쳐 보일 것 같은 투명한 피부. 신이 조각한 것 같은 아름다운 이목구비.
허나 그 얼굴이 자아내는 것은 고통과 체념. 그리고 피로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녀는…성녀 클라라는 밀려드는 키메라의 군세를 홀로 막아 세우는 중이었으니까.
무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이다.
그렇다. 클라라는 자신이 잔류 사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자신은 진작에 죽었다는 것도, 그 영혼은 누구의 구원조차 받지 못하고 잿더미가 됐다는 것도, 그리고…결국 자신의 기도는 닿지 않았다는 것도.
클라라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본래 불가능한 것이나, 한때 초월적 존재와 정신이 연결되었던 클라라이기에 가능한 일.
허나, 모든 것을 알면서도, 300년이나 같은 시간을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기도했다.
신성력을 짜내는 고통에는 익숙해졌으나, 심장을 도려내는 절망에는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그리고 절박한 사람은 무언가에 매달리기 마련이기에.
이젠 클라라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오늘도 그녀는 성을 지키다 스러지리라.
그 뒤에는 끝나지 않는 하루를 반복하겠지. 300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기도하느라 감겨있던 클라라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성벽 바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키메라의 군세.
그녀는 안다. 지원군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지원도 여기까지 닿지 못했을 뿐이라는걸.
하기야. 누가 저 많은 괴물을 뚫고, 성채까지 도달할 수 있겠는가.
설령 도달한다 한들 자신을 지키다 먼저 죽은 성기사들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여기까지 풍겨오는 키메라 특유의 악취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자꾸만 올라오려는 헛구역질을 참은 클라라는 다시 눈을 감고 견습 수녀 시절부터 애용하던 메달리온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메달리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럼에도 클라라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 모든 불가능 속에서도 그녀는 아직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여전히 구원을 바라고 있기에.
실시간으로 막대한 신성력이 소모되고 있으나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나지막히 기도문을 읊는 클라라.
“세상이 어둠에 잠길지라도 태양은 다시 떠오를지니. 정의로운 광명이시여,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내면의 빛으로 길을 밝히시…….”
콰아아아앙-!!
“…시이잉?”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한창 기도문을 외던 클라라는 스리슬쩍 실눈을 떴다.
거뭇한 무리를 분쇄하는 화려한 마법의 향연. 누군가 이곳에 왔다. 여기까지 왔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에 클라라의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사자의 앞발을 봤을 때는 아예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조, 존버는 승리한다아아앗!!”
묘하게 어느 신을 닮은 모습이었다.
***
입을 쩍 벌린 키메라의 아가리에 스태프를 꽂아 넣었다.
빠각!
경로에 있던 날카로운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뱀을 닮은 머리를 가진 녀석이 켁켁 거리며 스태프를 뱉어내려 하지만…이건 페이가 만들어준 특제 금속 스태프다.
마력 전도율은 좀 떨어져도 내구성 하나는 끝내주는 장비다. 구강 구조상 그리 치악력이 강하지도 않은 녀석이니 부러뜨리지는 못하겠지.
발악하듯 하나 남은 송곳니에서 독을 뿜는 녀석. 물론 기껏해야 물총 정도의 위력으로 헬레나가 걸어준 보호를 뚫을 수는 없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부랴부랴 발굽 달린 두꺼운 팔을 휘두르는 녀석.
하지만 이미 늦었다.
“썬더 볼트. 썬더 볼트. 썬더 볼트.”
연달아 전격 마법을 갈겨주자 파르르 경련하더니 입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쓰러진다.
처음에는 한발이면 충분했는데, 이젠 서너번은 갈겨야 죽네.
이는 그만큼 클라라가 있는 요새에 가까워졌다는 증거다. 성녀가 세운 신성력의 벽을 뚫기 위해 가장 강한 녀석들을 전방에 배치했기 때문.
그렇기에 성문 바로 앞까지 가면 우두머리급인 중간 보스들도 대량으로 튀어나온다.
물론 이미 공략법을 알려줬으니 각자 알아서 대처하겠지만.
“후우….”
가볍게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젠 큰 기술을 쓸 여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힘에 부치는 것은 아니었다.
헬레나와 길버트는 앞장서서 딜탱의 역할을 수행하며 착실하게 길을 뚫고 있었으며.
이리스와 이오나는 조금 뒤에서 그런 둘에게 화력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카를라와 엘리샤는 다른 이들이 전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옆, 뒤에서 달려드는 녀석들을 처리했고.
나는 중앙과 후방을 돌아다니며 그런 둘을 지원하고 있었다.
맨날 마법사만 잔뜩 있는 극화력형 파티만 짜다가 이렇게 균형 잡힌 파티를 보니 안정성이 장난 아니네.
이오나의 블러드 폴이 효과가 다한 뒤로 속도가 좀 느려지긴 했지만, 몬스터들의 수준이 올라간 걸 생각하면 순조로운 진행이네.
그렇게 진형을 유지한 채,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돌연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헬레나!”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신성력을 뿜어내는 헬레나를 노리는 모습에 길버트가 다급히 대검을 휘두른다.
콰앙!
“크윽.”
떨어지는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그 충격으로 길버트의 몸이 발목까지 지면을 파고든다.
다만 방어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미리 걸어두었던 실드와 갑옷에 부여된 축복이 피해를 거의 흡수했으니까.
내가 미리 경고해둔 덕도 있겠지만.
“호오. 이걸 막아내는가.”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처럼 보이는 키메라가 전투력 측정기 같은 대사와 함께 둥글게 말았던 몸을 펼쳤다.
거북이인지, 아르마딜로인지, 그것도 아니면 드레이크인지 모를 기묘한 생김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신에 빼곡히 두른 울퉁불퉁한 갑각이겠지.
얼핏 보면 둔중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정교한 설계로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그 강도 또한 다른 키메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단단할 테고.
얼기설기 파츠를 이어 붙인 것 같은 지금까지의 키메라와 달리, 기묘하긴 해도 처음부터 이런 생물이었다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묻어나온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양산형이 아니다. 타락한 연금술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마스터피스.
저 녀석이야 바로 이 키메라 부대를 이끄는 우두머리. 타라스크다.
하기야. 뒤쪽에서부터 그 난리를 치며 돌진했으니 당연히 눈치챌 법도 하지.
조금 전의 공격은 저 멀리서 높이 뛰는 것으로 일정 고도에 도달. 그리고는 카시스 계곡의 특수성을 이용해 하늘에서부터 폭격하듯 떨어지는 기술이었을 거다.
…대충 봐도 까다로워 보이는 이런 공격이 가능한 시점에서 눈치챘겠지만, 타라스크는 오직 카시스 계곡 공략을 위해 만들어진 녀석이다.
미스릴을 웃도는 경도의 갑각과, 이상할 정도로 강력하고 섬세한 다리 근육 외에는 그냥저냥인 녀석.
카시스 계곡 밖에서는 조금 급이 떨어지지만 반대로 말하면 계곡 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사기적인 키메라다.
“뭐 하는 녀석들인가 싶었더니 반짝이는 개새끼들인가. 지금까지의 지원군 중에서는 가장 훌륭하다만…조금 늦었구나.”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타라스크. 그런 녀석의 뒤로 주변의 키메라와는 확연히 생김새가 다른 놈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다섯. 각자가 타라스크 만큼은 아니어도, 정성들여 만들어진 특수 개체들이다.
타라스크 바로 밑의 부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중간 보스들.
놈들이 나타나지 미친 듯이 달려들던 키메라들이 뒤로 물러난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혹은 타라스크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양손을 활짝 펼쳐 폼을 잡은 타라스크가 말을 이었다.
“이미 너희 족속은 하나를 남기고 전부 으스러뜨렸다. 남은 한 년도 얼마 안 가 쓰러지겠지. 그 전에 너희가 먼저 내 상대를 해줘야겠지만 말이야.”
뒤쪽의 요새를 가리키며 으쓱이는 녀석. 실제로 클라라를 호위하던 성기사의 대부분을 죽인 건 타라스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