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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25화 (225/230)

헬레나의 감상에 고개를 끄덕이자 꼬물꼬물 내 등에서 기어 내려온 이리스가 말했다.

“키메라라는 것이 다 그런 법 아니겠나. 언데드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니 불쾌감이 드는 것이 당연하네.”

“불가능에 손을 뻗는 마법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과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르다네. 그 부분을 착각하면 역으로 마법에 잡아 먹히기에 참 할 말이 많다만…그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저쪽은 느긋하게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내게 매달린 채 격하게 흔들렸던 탓에 몸이 찌뿌둥했던 걸까. 짧은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가볍게 몸을 푸는 이리스.

그런 이리스를 향해 키메라 몇 마리가 침을 뚝뚝 흘리며 다가온다.

이런데 갇혀있었으니 많이 배고팠겠지. 마침 한입에 꿀꺽하기 딱 좋은 이리스의 모습에 눈이 돌아갈 만도 하고.

물론 썩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흥.”

콧김을 내쉬며 스태프를 들어 올리는 이리스. 그 모습이 묘하게 엘리샤와 닮았다.

키메라들끼리 합의가 된 건지 몇 마리씩 짝을 지어 각각 다른 사람을 보며 입맛을 다셨는데.

당연히 나를 노리는 녀석도 있었다.

오크로 보이는 그린스킨의 머리에. 여러 가죽을 누덕누덕 기워 붙여 억지로 곰의 형태를 흉내 낸 몸통.

각자 재료가 된 몬스터는 조금씩 달랐으나, 급소를 가리는 갑각과 금속 재질의 날붙이 같은 꼬리는 다른 키메라들과 동일하다.

몸 구석구석에서는 검보랏빛 진액이 얼룩처럼 묻어나오는데, 저게 바로 악취의 원인일 테고.

전쟁 중에 흔히 발생하는 사상자들. 그중에서도 어찌어찌 숨만 붙은 몬스터와 이미 죽은 몬스터를 적절히 합성해 만든 것인데.

대부분은 재활용한다는 느낌으로 대충 만들었지만, 정말 공들여 만든 걸작도 일부 존재한다.

“키에에에에에엑!!”

눈앞에서 입을 쩍 벌린 저 징그러운 놈은 아닌 것 같지만.

지능이 높은 그린스킨의 머리를 달았으나, 키메라가 되며 어딘가 문제가 생긴 건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

다만 녀석의 괴성이 트리거가 된 건지, 공동 안의 키메라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재생과 방어에 특화된 체질을 믿고 커다란 덩치를 앞세워 달려드는 놈들.

거대한 벽이 가까워지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지지만…그렇다고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썬더 볼트!”

멍청하게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느라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의 아가리에 번개를 꽂아 넣었다.

파직.

창백한 섬뢰가 녀석의 입 안쪽을 짜릿하게 구워낸다.

“그르르륽….”

입에서 거품을 물며 그대로 쓰러지는 키메라.

몸이 두동강 난 채로도 꽤 오랜 시간 싸울 수 있는 놈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뇌를 구워버리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연금술사 놈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터라 투구를 씌우듯, 여러 겹의 갑각으로 유일한 약점인 머리를 보호했으나…안쪽에서 전기로 관통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쓰러진 채 경련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또 다른 키메라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사교도가 아니라 추가타 확정은 없지만 그래도 빛나는 사자 단검은 그 자체로 좋은 무기다.

적어도 갑각 사이의 속살을 베어내기에는 충분하겠지.

“캬아아아악!”

고통이 느껴지자 더욱 격분하는 키메라. 어느 몬스터의 것인지 모를 거대한 주먹을 치켜들었으나.

“게일 토네이도.”

단검을 타고 투사된 마력이 상처 안쪽에서 강풍을 자아낸다.

후우웅!

가죽은 멀쩡하지만 내장이 곤죽이 된 녀석이 눈코입에서 검보라빛 진액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쿵.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려오던 키메라 중 둘을 죽었다.

중위 마법사가 되었다지만, 정작 중급 마법을 시전하려면 꽤 시간이 걸리기에 하급 마법을 써봤다만…약점을 노리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네.

늘어난 신체스펙과 버프 덕에 근접전에서도 한방 앞서 움직일 수 있고.

일단 내 쪽으로 달려든 키메라는 전부 처리했으니 스윽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카를라는 정석적인 방식으로 키메라를 상대하고 있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뒤로 빠져 거리를 벌린 뒤, 대지 마법으로 발을 묶고 화염 마법으로 한 번에 한 마리씩 확실하게 정리한다.

어째 평소보다 힘을 못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이는 카를라의 전투 방식이 이런 짧은 거리에서의 전투에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

반면 엘리샤는 아주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처럼 아예 위력보다 속도를 중요시하기로 마음 먹은 건지 하급 마법을 마구 난사하는 엘리샤.

아니, 이건 딜레이가 없는 걸 넘어 거의 다중 캐스팅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몸이 단단하고 회복력이 좋더라도, 계속 처맞다 보면 죽는 법.

쏟아지는 마법 세례 자체가 저지력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이 부스러지고 불타올라 그대로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둘 다 독 아니면 불을 쓰라는 내 조언에 따라 잘 싸우고 있네.

이리스는 불과 대지의 원소를 조합한 마법으로 구속과 공격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돌 감옥에 갇혀 그대로 타죽거나, 폭발하는 파편에 산산조각이 나 죽는 키메라들.

이 정도는 여유롭다는 듯 제자리에서 발 하나 까딱하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반대로 이오나는 혈조술로 만든 무기를 들고 직접 키메라를 하나하나 썰어버리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두꺼운 근육이나 갑각도 부드럽게 베어내더라.

거기에 이건 또 무슨 마법인지, 베인 단면에 얇은 피의 막이 달라붙어 재생을 방해하는 덕에 죽기도 금방 죽었고.

길버트 또한 이오나처럼 앞장서서 싸우고 있었다.

뭐…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고위 성기사의 전투력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검을 붕붕 휘두르며 단칼에 키메라를 썰어버리는 길버트.

악신인 혼탁한 합일의 권능을 베이스로 대량 생산된 키메라다 보니, 길버트의 대검에 깃든 신성력이 독처럼 작용한다.

한 번 대검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키메라 시체가 하나씩 늘어나는 광경은 좀 장관이네.

마지막으로 헬레나. 성녀로 각성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길버트에게 호신용이 아닌 적을 쓰러뜨리기 위한 전투법을 배우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확 성장한 실력은 믿음직스럽지만 경험이 부족해 조금 걱정됐는데….

“차가운 실험실에서 태어난 어미 없는 괴물이여! 어서 뒤지시길!”

차분한 말투로 은근 험한 욕을 하며 키메라의 골통을 메이스로 내려찍는 헬레나.

퍽! 퍽! 퍽!

워낙 갑각이 단단해 처음에는 버티나 싶었으나 여러 번 때리자 누적된 충격과, 듬뿍 담긴 신성력으로 말랑해진 갑각이 버티질 못하고 부서졌다.

당연히 키메라의 머리도 부서졌고.

그렇게 한놈을 땅으로 돌려보낸 뒤에는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실드를 뚫지 못해 바르작거리는 다른 키메라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감히! 어딜 손을 대려는 겁니까!”

키메라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써보지만, 신성력으로 무식할 정도로 강화된 헬레나의 근력을 어쩌지는 못했다.

“키에에….”

무력감에 약한 소리를 내는 녀석이었으나…헬레나는 봐주지 않고 다짜고짜 메이스부터 내리찍었다.

쾅!

“이 불경한 자가!”

조금 전에 뚝배기를 깨며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지, 이번엔 한 번에 부서지는 머리.

아무리 신성력 때문에 추가뎀이 들어가는 상황이라도 이게 말이 되나? 저것들 나름 탱커형 키메라인데….

수상할 정도로 메이스를 잘 다루는 헬레나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녀석을 마지막으로 공동의 키메라는 전부 죽었다.

목표를 잃은 헬레나가 조금 아쉬운 듯이 한숨을 내쉬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키메라의 피가 잔뜩 묻은 얼굴로 조금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짓는다.

“흠흠. 정의로운 광명님의 말씀대로 메이스가 손맛이 좋긴 합니다.”

“네…그래 보이네요.”

헬레나가 강해진 건 좋다. 하지만.

그으…이게 맞나?

얀델은 몰루…!!

신성술을 보조로 돌리고 본격적으로 메이스를 휘두르기 시작한 헬레나의 모습이 좀 놀랍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금 격해졌을 뿐, 평소랑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강해지면 된 거지. 응.

공동 하나를 정리한 뒤에는 다시 기억에 의존해 좁은 땅굴을 헤쳐 나갔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공동에 다다라 전투가 일어났지만…한번 상대해본 덕인지 보다 수월하게 싸울 수 있었다.

그렇게 몇 개의 공동을 지나, 구불구불한 길과 갈림길을 넘어선 끝에 도착한 막다른 길.

비교적 체력이 부족한 카를라가 활력 포션을 한 모금 마시려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으음…혹시 길을 잘못 찾아오신 게….”

“아냐. 여기 맞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벽이랑은 조금 재질이 다르잖아? 누가 돌을 끌어다 입구를 막아둬서 그래.”

참고로 게임에서는 조사 좀 해달라는 듯 이 부분만 벽의 색깔이 확연히 다르게 나왔었다. 지금은 집중해서 봐야 차이가 느껴지지만.

게임 화면과 눈앞의 풍경을 비교하는 것도 잠시. 카를라가 포션 한 병을 마저 비우고는 루비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누가 막은 거려나요? 역시 이 땅굴을 만든 존재려나요?”

“그럴 수도 있지만…내 생각엔 키메라들의 주인인 연금술사의 지시 같아. 오면서 봤잖아? 여기에 길 잃고 들어오는 키메라가 많은 거.”

“설마 자꾸 이쪽으로 빠져서 병력 누수가 일어나니 아예 입구를 막아둔 건가요? 그럼 저희가 들어온 입구 쪽은….”

“거긴 나름 숨겨져 있었잖아.”

누가 봐도 여긴 다른 방향으로 가는 샛길인데, 심지어 그 샛길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길을 가보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게이머나, 미리 길을 알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부 보였을 텐데….”

“아, 왜 날아서 가는 게 아닌지 내가 설명을 안 했던가?”

“네? 날아서 가면 표적이 되기 쉬워서 집중포화 당할까 봐 그런 거 아니에요?”

“여기 있는 키메라는 대부분이 원거리 공격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저 이 근방에서 비행이 불가능해서 그런 거야.”

“…불가능하다구요?”

의아해하는 카를라의 반응에 이오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부분은 이 이오나 교수님이 설명해줄게!”

“어…그럼 부탁드릴게요 교수님.”

안 물어봐 주면 서운해할 정도로 의욕 넘치는 이오나의 모습에 조금 압도된 듯한 카를라.

물론 이오나는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사실 별거 아냐. 그냥 처음부터 그랬어! 이상! 설명 끝!”

“……?”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를라.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헬레나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금안을 끔뻑였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이리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교수라는 자가 그리 막무가내로 설명하면 되겠나.”

“그치만 그치만. 진짜 그게 끝이잖아?”

“그래도 조금 더 설명을 곁들여야지. 우리야 카시스 계곡이 존재하던 시절을 살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계곡 자체가 통째로 봉인된 뒤에 태어나지 않았나.”

“헉…늙은이!”

“자네도 만만찮게 늙지 않았나!”

“아닌데 아닌데? 난 이리스보다 200살이나 어린데? 뱀파이어 중에서는 한창때인데?”

“그으읏…!”

볼을 부풀리며 스태프를 휘두르는 이리스. 물론 이오나는 전부 피했다.

제일 연장자처럼 생긴 길버트가 슬쩍 뒤로 물러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라도 300년 전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꺼내며 200살 나이 차로 늙었다며 놀리는 뱀파이어(역사서에 등장함)같은 광경을 보면 어이가 없긴 할 거다.

결국 이오나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이리스가 포기했는지, 헥헥 거리며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아무튼. 후우…카시스 계곡은 예전부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정 고도 이상의 물체를 추락시키는 장소로 유명했네. 이젠 300년도 더 된 옛날 일이지만.”

“네? 이유를 몰랐다고요?”

“그렇네. 누가 뚫었는지 모를 땅굴이 여럿 있는 것을 보아, 지하에 원인이 되는 무언가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으니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지.”

이리스의 말대로다.

카시스 계곡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정 고도 이상 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강력한 중력이 작용해 그대로 추락해 버리니까.

주변을 잘 조사해보면 새들이 날아가다 추락해 낙사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정도.

누가 뚫었는지 모를 미로 같은 땅굴. 그리고 정체불명의 비행 불가 현상.

굉장히 수상하지 않은가. 실제로 이 던전에 비행과 관련된 히든피스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게임을 뜯어본 사람들이 데이터상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들 삭제된 컨텐츠, 내지는 DLC 아니냐는 말을 했었는데…이렇게 직접 에우렐리아 대륙에 와있는 나로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아마 H&A를 만든 누군가는 그 히든피스가 이 세상의 해피 엔딩을 보는데,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한 거겠지.

그래도 한번쯤은 무슨 아이템일지 확인해보고 싶긴 하네….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숨을 고른 이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계곡을 지나려면 반드시 직접 걸어서 지나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곳이 대륙 남부에서 중앙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네.”

“그래서 그렇게 기를 쓰고 카시스 계곡 요새를 지켜내려 했던 거군요?”

“뭐…전쟁 후반에는 결국 내어주고 말았지만 말이네.”

어깨를 으쓱이는 이리스.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이거 원래는 도서실에서 먼지 풀풀 쌓인 고서를 뒤적거려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와 엘리샤를 보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자자. 이제 충분히 쉬었지? 그럼 마저 가보자고.”

여길 나가는 순간, 난데없이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 날 것이다. 그리고 이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쉴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슬슬 효과가 다해가는 버프도 갱신하고, 이오나에게 목을 내밀었다.

“어차피 나가는 순간 햇볕을 쬐면서 재생력 활성화될 테니 좀 많이 빨아도 괜찮아요.”

“안 돼! 안 돼! 전투 중에 야한 말은 금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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