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지. 페이의 가슴이 던전만큼이나 위험한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주변을 둘러싼 채 고조되던 마력이 갑자기 안정되더니, 이오나가 이쪽을 향해 척! 손가락을 뻗었다.
“거기까지 거기까지! 페이 양. 이제 텔레포트 준비가 끝났으니까 다시 떨어져! 잘못하면 어디 하나 날아간다?”
“히야아악!”
페/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는지 펄쩍 뛰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페이.
그 모습에 이오나가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알고 있겠지만 저항하려 들면 위험해진다? 자, 그럼 이제 출발할게. 하나…둘….”
카운트 다운을 시작한 이오나. 키메라 이야기에 신이 났던 페이도 저 멀리 떨어지고, 헬레나에게 이런저런 주의를 주던 길버트도 입을 다물었다.
“셋!”
이오나가 그리 외치는 것과 동시에 시야 전체를 채울 만큼 밝게 뻗어나가는 검붉은 마력광. 뒤이어 느껴지는 약간의 부유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변 풍경이 뒤바뀌어 있었다.
휘이잉-
볼을 스치는 건조한 바람. 입안에서 느껴지는 텁텁한 모래.
우리는 어느새인가 사막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얀델 형제님. 여긴 혹시 소니아 사막인가요?”
“네. 말했잖아요? 별로 멀진 않다고.”
대신전이 있는 솔라리스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작은 사막 지역.
본래는 초목으로 가득한 신록의 땅이었으나, 신들의 전쟁 때 변절한 드래곤의 브레스에 전부 불타버렸다고 한다.
자연적으로 회복되질 않아 그대로 300년간 방치당해 완전한 사막이 되버렸고.
하기야. 당장 싸우거나 재건하기 바쁜데, 이젠 아무도 없는 사막에 풀 심자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정의로운 광명의 권능이 닿을 리 없건만, 쓸데없이 쨍쨍한 태양볕이 따갑게 느껴진다.
손으로 빛을 가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이리스가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며 물었다.
“주인이여. 주인이여.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것도 안 보인다만.”
“걱정 마. 제대로 찾아온 거 맞으니까.”
조금 전에 둘러본 건 게임으로 봤던 배경과, 실제로 펼쳐진 풍경을 대조해보려던 것뿐이다.
덕분에 얼추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고.
“저기 있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긴 바위 보이지?”
“거북이 머리…귀ㄷ…읍!”
생각 없이 무언가 중얼거리려는 이리스의 입을 턱 막고는 말을 이었다.
“저 바위의 입 부분의 모래를 파면 나올 거야.”
“지하에 있는 던전인가요? 용케도 알았네요 당신.”
내게서 이리스를 넘겨받은 엘리샤가, 그 자그마한 등을 토닥여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금은 안 보일 뿐이지 예전에는 보였거든. 그거 알아? 사막의 모래 언덕은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거.”
“아하? 예전에는 보였던 게 지금은 사구로 가려진 거군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샤.
아마 과거에 이미 정보를 입수했으나, 그 사이에 환경이 바뀐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반대다.
지금껏 노출된 적 없는 던전이 2년 뒤에 사구가 이동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거니까.
본단으로 향하는 길에 들렀던 던전이 초반에 갈 만한 던전이라면, 여긴 중후반에 헬레나를 성녀로 각성시킨 뒤에 오는 던전이다.
이때만 드러난다는 문제도 있지만…난이도나 내용 면에서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아무튼 위치를 알았으니 이제 땅만 파면 되는 상황. 다행히 여기엔 마법사가 많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에에잇!”
이리스의 감정 실린 마법으로 순식간에 모래가 날아가고, 안쪽의 작은 동굴이 나타났으니까.
그렇게 진입한 내부는 생각보다 밝았다. 동굴이 작기도 했고, 무엇보다 안쪽에 던전 게이트라는 광원이 존재했으니까.
푸르게 빛나는 공간의 일렁임 앞에 서서 일행을 돌아보았다.
“우선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짚고 넘어갈게요. 등장하는 몬스터는 악신에게 귀의한 연금술사들이 만든 키메라 군단이에요. 목표는 그러한 키메라의 전멸이라고 말했었죠?”
“예에. 이렇다 할 약점은 없지만 재생력이 강한 놈들이니 가능하면 일격에 죽이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상처 부위를 으깨버리거나 독이나 불로 지져 재생속도를 늦추라고 하셨지요.”
“맞아요. 다행히도 악신의 권능을 활용해 만들어진 놈들이라 신성력이 독처럼 작용할 겁니다. 잘 기억하고 계셨네요?”
“후후. 형제님이 해주신 말씀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부드럽게 웃는 헬레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시나리오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누구의 의지가 어떤 상황을 만들었는지인데….”
“멀리에서 계곡을 가득 메운 키메라 군단을 발견했을 뿐, 거기까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밝힐 수는 없었을 뿐이죠.”
그래. 알렸다가는 기껏 파견 나간 성기사를 불러들인 교황이 이들을 전부 이끌고 오겠다며 난리를 쳤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 던전의 주인은 300년 전의 성녀 클라라. 그리고 시나리오의 내용은…외로이 죽음을 맞이한 성녀의 구원이거든요.”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몇 없는 아픈 역사다.
성녀는 신의 정신을 강신시키는 그릇이다.
하지만 이미 신이 지상에 강림한 상태라면 성녀의 안에 있던 정신은 어떻게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본체로 되돌아가고 그 빈자리만큼의 신성력이 들어찬다.
여전히 신과 연결되어있는 상태라 원한다면 언제든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고, 추가로 힘을 내려주기도 하니 약간의 딜레이가 생기는 것 말고는 별 차이 없겠지.
허나 그럼에도 일단은 한 몸에 들어가 있던 정신이 분리되긴 한다.
“악신 놈들은 이 부분을 파고든 거야.”
인류 연합의 구조적 문제로 지원이 늦어져 결국 포위당한 채 멸망한 아틀란티스.
이를 계기로 솟구치는 파랑은 굽이진 여유로 타천했으며, 그 결과 방어선에 큼직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최대 전력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신 하나가 적으로 돌아선 것도 모자라 바다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당시의 연합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가장 앞장서서 싸우던 정의로운 광명이 바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그런 자신의 신을 위해 성녀가 조금 더 열심히 싸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당시의 성녀셨던 클라라 님은 정의로운 광명님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성기사들을 이끌고 다른 요충지로 향했고…그대로 포위당했어.”
단순히 몬스터로만 둘러싼 게 아니다. 온갖 제물을 갈아 넣어 신과의 연결을 일시적으로 끊어버리는 결계까지 쳐둬 진정한 의미로 고립시킨 것이다.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당연히 정의로운 광명도 이를 알아채고 클라라가 있는 곳으로 향하려 했으나.
악신 측에서 이를 가만 놔둘 리가 없잖은가.
키메라 군단의 주인이기도 한 혼탁한 합일이 직접 나서서 정의로운 광명을 붙잡고 늘어졌다.
“물론 정의로운 광명님이 얌전히 당하기만 하셨던 건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갈 수는 없었지만 지원군은 몇 번이고 보냈었다. 문제는 성녀를 포위하고 있는 몬스터를 뚫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클라라와 그녀를 따르는 성기사들은 신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더라도, 묵묵히 싸워나갔다.
하지만 세상일이 신앙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법.
무수히 많은 악의의 발톱 앞에서 성기사와 사제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결국에는 성녀 혼자 남아 버티기 시작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먼저 죽어간 이들이 그녀의 삶을 바랐기에.
허나. 클라라의 무한할 것 같던 신성력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본래라면 신과의 연결을 통해 무한히 공급받았어야 할 신성력이 끊겼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그렇기에 클라라는 결단을 내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키메라나 만드는 연금술사의 손에 들어간 시체가 좋은 꼴을 당할 리 없잖은가.
클라라는 남은 신성력을 긁어모아 자기희생 주문을 시전했다.
육신은 물론이요 영혼까지 불태우는 마지막 기적.
뒤늦게 달려온 정의로운 광명이 발견한 것은 거대한 파괴의 흔적. 그리고 클라라가 애용하던 메달리온뿐이었다.
클라라도, 그녀를 따르던 성기사도. 유해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특히 클라라의 경우에는 자기희생 주문을 사용했기에 영혼마저 찾을 수 없었다.
신이 실존하는 에우렐리아 대륙에는 천국도 실존한다. 물론 지구에서 말하는 영원한 낙원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영혼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데, 그렇게 사라지기까지 편하게 즐기다 갈 수 있는 리조트 같은 곳이라는 설정이었던가.
주로 신의 본체가 거하는 성소를 천국으로 사용하고.
아무튼 그런 세상에서 순교한 이들의 영혼은 당연히 성소로 향하게 되는데…클라라의 영혼은 이미 불타버린 상태.
살아서 구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함이라.
다른 누구도 아닌 성녀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련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는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아픈 역사인 것이다.
“…그렇게 된 거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간략히 축약한 설명. 이미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준 헬레나와 길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요 형제님. 맞습니다. 최후의 성녀셨던 클라라 님은 수많은 적을 안고 빛으로 화하셨지요.”
“그 뒤로 카시스 계곡 요새를 되찾긴 했지만, 결국 전력 차를 이기지 못해 전선을 축소하며 다시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적들의 전진 기지가 되어 하늘 저편으로 날려 보냈다고 들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길버트.
설마 던전이 되어서 남아있을 줄은, 그것도 클라라 성녀의 미련이 원인이 됐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는 거겠지.
조금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헬레나가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반짝거리는 금안. 동시에 머리와 엉덩이 쪽에서 빛으로 된 귀와 꼬리가 튀어나왔다.
“어…? 광명님? 이게 무슨….”
당황스러워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이내 경건하게 짧은 기도를 올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으…정의로운 광명님께서 어서 클라라 성녀님의 마지막 흔적을, 못다 한 미련을 풀어 주고 싶다고 하십니다 형제님.”
“아, 굳이 힘을 끌어내지 않으셔도 들리기는 다 들리시나 보네요. 그럼 바로 브리핑 들어갈게요. 이제부터가 중요하니 잘 들어주세요.”
과거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젠 현재의 이야기를 할 때다.
“반복되는 시기는 모든 성기사가 쓰러지고 클라라 성녀님 혼자 남았던 마지막 날입니다. 자기희생 주문을 사용하는 때가 되면 실패로 간주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요.”
“그 사이에 키메라들의 포위망을 돌파해 클라라 님에게 닿으면 클리어인가요 주인님?”
“아니. 그냥 돌파만으로는 안 돼. 그 뒤에 같이 힘을 합쳐서 키메라를 전멸시키는 것까지 해야 클리어야. …아마.”
“음음. 하긴. 시나리오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주인의 마음에 달려있으니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확신하긴 힘드신 거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라. 사실 추측이 아니라 확정이긴 한데…설명하기 애매하니 그냥 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튼 이제 목표를 알았으니 자세한 계획을 세워야지. 우선 이걸 봐봐. 당시의 지형이 이랬을 거란 말이지?”
손가락 끝에 마력을 불어 넣으며 허공에 손가락을 휘저었다.
뛰어난 기억력 특성 덕에 마음만 먹으면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미니맵이 그대로 재현된다.
빠른 속도로 완성되는 약도. 비밀 조직이라는 내 설정을 알고 있는 일행들은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지만, 모르고 있는 헬레나와 길버트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피는 안 이어졌어도 부녀지간 비슷한 거라 그런가. 묘하게 닮았네.
피식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클라라 성녀님과 합류하는 일이죠. 그러니 우선은 돌파해야 한다는 건 사실인데, 이쪽은 몬스터가 많으니까….”
상위 마법사 둘, 중위 마법사 셋, 고위 성기사 하나, 그리고 조금 미숙하지만 성녀도 하나.
이만한 전력이라면 그냥 초반부터 화력을 쏟아붓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문제는 몬스터가 많다는 점이다.
진짜 너무할 정도로 많다. 거기에 하필이면 방어와 재생력에 특화된 놈들이기까지.
작정하고 성녀를 말려 죽일 생각으로 만들어진 놈들이라 보통 끈질긴 게 아니거든.
이리스와 이오나가 상위 마법을 쏟아부으면 돌파는 가능해도 마력을 너무 낭비한 탓에 나머지를 전멸시키는 데 지장이 갈 거다.
그러니 루트 선정이 중요하다. 클라라와 합류하기만 한다면 이런저런 보조를 받아 훨씬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으니까.
처음의 소모를 줄일 수 있는 정석적인 공략법을 찬찬히 알려주었다.
다들 큰 이견은 없는지 빠르게 끝난 설명. 이제 남은 건 실제로 행하는 일뿐이었다.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전원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헬레나.
급할 때는 단체 버프를 걸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개별 버프가 훨씬 효과도 좋고 오래가서 지금처럼 일일이 걸어주는 거라나.
이미 성갑을 활성화 한 건지, 빛나는 갑옷과 털 달린 망토를 입은 것이 상당히 멋있다.
잠시 그 모습을 감상하다가 내 차례가 되어 다가온 헬레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헬레나 님. 제가 드린 메달리온 잘 가지고 계시죠?”
“물론이지요. 제가 메이스를 들었다고 하나 형제님이 주신 신물은 여전히 큰 도움이 된답니다.”
“그거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
“예에?”
“전투 중에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어깨를 으쓱이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헬레나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걱정 마시길. 성서 대신 남는 손에 꼭 쥐고 싸우겠습니다.”
마치 자기가 준 선물을 잃어버릴까 안절부절못하는 남자친구를 보는 것 같은 시선.
뭐야. 정의로운 광명이 아직 안 말해준 건가?
어느새 튀어나와 쫑긋거리는 사자 귀. 묘하게 다급한 움직임을 보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슬쩍 꾸벅였다.
그리고 헬레나의 목에 걸려있는 메달리온에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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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하는 사자 메달리온】
포효하는 사자 형태로 조각된 큼직한 메달리온.
오랜 시간 방치되어 본래의 광휘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다.
닿은 이를 안심시키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옅은 핏자국은 누구의 흔적일까.
기억하라.
가장 절박한 순간. 사람은 무언가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설령 그것이 닿지 않는 기도라 할지라도.
-신성력 충전 가능(현재 잔량 100%)
-체력이 5% 미만으로 떨어졌을 경우, 자동으로 충전된 신성력을 소모하여 착용자 치유
-신성력 효율 10% 상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