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걸리지는 않겠네요.”
“그러길 바라야지요.”
“그러실 겁니다.”
강신은 주력기인 만큼 비교적 초반에 익히는 기술이다. 그리고 헬레나는 재능만 보면 모든 성녀 후보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헬레나가 조금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던전은 언제 가시는지요?”
“아.”
그러고 보니 헬레나 데리고 던전에 가기로 약속했었지.
마침 다른 여인들과도 친목을 다질 필요가 있었으니 딱 좋네.
저번에 같이 슬라임 무리를 조지고 던전을 클리어했던 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걸까.
벌써부터 설레하는 헬레나에게 피식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동안 일 없다고 하셨으니…내일 가볼까요?”
“내일…말씀이신지요?”
“네. 이런 건 빨리 다녀올수록 좋잖아요. 아, 내일 저번에 말했던 던전에 다녀올까 하는데 다들 괜찮아? 페이 선배는 빼고요.”
“나는 왜?!”
“그야 페이 선배 비전투원이잖아요….”
“지금까지는 잘만 데리고 다녔으면서?”
“이번 던전은 지금까지와는 좀 다르니까요.”
“…맞다. 저번에 후배님이 시나리오 던전이라고 했었지?”
시나리오 던전은 던전의 특징 중 하나인 시공간의 왜곡이 가장 크게 발현된 던전이다.
단순히 몬스터의 무한 리젠을 넘어, 아예 특정 시점을 무한 반복하는 던전.
이는 던전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강렬한 의지로 왜곡이 심화되며 일어난 일이다.
해당 일대에 남아있는 의지가 차원의 저편 어딘가로 날아가려던 던전을 붙들어 맨 형태라고 해야 하나.
그렇기에 클리어 방법도 기존의 던전과 조금 다르다.
던전 안에서 보게 될 몬스터는 전부 진짜지만, 몬스터를 제외한 모든 것이 300년 전의 재현이다.
하지만 300년 전과는 다른 결과를 내야 한다.
조금 더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난입해 그 결말을 뒤바꿔야 한다는 소리.
제령이라도 하듯, 의지의 주인이 품은 미련을 풀어주어야 클리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뒤집어야 하는 꼴 아닌가.
그렇다 보니 이번만큼은 비전투원인 페이를 데려갈 여유가 없는 것이다.
뭐, 그렇게 열심히 클리어 해봤자 정말로 과거가 변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시나리오 던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환상일 뿐이니까.
다만 보상은 다른 던전보다 훨씬 좋다.
시나리오 던전은 본래라면 무사히 외차원으로 튕겨 나갔을 던전이다. 그걸 누군가의 미련이 억지로 붙잡은 거고.
그렇다 보니 던전 안에서 선신과 악신의 힘이 길항하며 서로를 깎아 먹는 일이 없어, 클리어 시 회수하는 힘의 양이 훨씬 많다.
우리에게 떨어지는 보상도 많아지는 건 덤이고.
나와 페이의 대화를 들은 헬레나가 해맑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시나리오 던전 말씀이신지요? 그럼 교황 성하를 설득하기보단 그냥 몰래 다녀오는 게 좋겠군요!”
“…잠깐만요. 헬레나 님. 몰래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실은 교황 성하께서 이제 성녀가 됐으니 한동안 위험한 곳에 갈 때 호위를 대동하라고 하셨습니다.”
“…….”
“하지만 형제님이라면 저희끼리도 클리어할 자신이 있으니 가자고 하신 거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설득은 제가 할 테니 몰래 가는 건 그만두죠.”
“얀델 형제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어째서인지 조금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
왜 아쉬워하는 건데.
***
“안 됩니다.”
알바오르는 내가 헬레나를 데리고 던전에 들어갈 거라는 말을 하자마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형제님과 일행분들이 강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녀님의 안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미 던전 내부에 대한 조사는 마쳤습니다. 시나리오 던전이라 변수가 일어났을 확률도 없고요.”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저도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성녀님께서 성녀로서의 힘을 전투에 발휘하실 수 있게 되시면, 그리고 길버트 추기경과 함께 간다는 조건 하에 찬성한다는 뜻입니다.”
“으음.”
알바오르의 입장이 이해는 간다.
도중에 받을지도 모르는 습격 위험이야 이오나의 텔레포트로 다녀올 테니 상관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던전보다 대체로 어렵다는 시나리오 유형의 던전에 가는 것이다.
이제 막 성녀로서 각성한 헬레나를 보내는 건 걱정되겠지.
적어도 성녀의 힘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혹시 모르니 호위까지 붙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합리적이네요. 헬레나 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한참이나 고민하던 헬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네요. 성하의 말씀대로 조금 더 익숙해진 뒤에 길버트 아저씨와 함께 가도록 하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성녀님. 그럼 오늘부터 제가 직접 성녀님의 수업을 맡겠습니다. 이래 보여도 소싯적에는 전투 사제로서 제법 이름을 날렸으니 걱정 마시지요.”
이젠 선출직이 되어버린 교황 자리를 40년이나 유지하고 있는 건 그동안 자기보다 강한 추기경이 나오지 않아서였다며 껄껄 웃는 알바오르.
아니, 무슨 교황 자리를 무력 순으로 뽑아?
사교도와 몬스터를 때려잡는 걸 지상과제로 알고 있는 광명 교단답다면 광명 교단다운 이유긴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에 멍해진 정신을 뒤늦게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으음? 무슨 일이신가요 얀델 형제님?”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지던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아직 본인도 잘 모르고 있나 보네.
“교황 성하의 실력이야 분명 대단하겠죠. 하지만 헬레나 님.”
“예에?”
“헬레나 님에게는 신성술보다 메이스가 더 잘 어울려요.”
“……?”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재차 갸웃거리는 헬레나. 그래서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헬레나 님은 전투 사제보다 성기사 쪽에 더 재능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길버트 님의 수업을 받는 게 더 좋을 거예요.”
“하지만….”
성녀라고 무조건 뒤에서 후방에서 지원을 맡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성녀의 상징이 왜 하필 방어구인 성갑이겠는가.
정의로운 광명 교단에는 실제로 앞장서서 싸우던 성녀가 특히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레나로서는 이를 알고 있어도 영 떨떠름하겠지.
평생을 흥분하면 돌진하는 버릇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니까.
“단순히 억누르기만 해서는 안 돼요. 헬레나 님의 충동을 적절히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겁니다.”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헬레나.
그런 헬레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뭣하면 정의로운 광명님께 물어보던가요. 이젠 그럴 수 있잖아요?”
“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듯 손을 맞잡는 헬레나.
빛나는 사자 귀와 꼬리가 튀어나오더니, 헬레나가 입술을 무어라 달싹이기 시작했다.
쫑긋쫑긋.
살랑살랑.
기도에 대답하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귀와 꼬리.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 헬레나가 고개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의로운 광명께서 메이스가 손맛이 더 좋으니 한번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어, 음.”
손맛이라니.
잘 해결된 거 맞지…?”
H&A에는 여러 동료 캐릭터가 있고, 이들에겐 서로 다른 개별 스토리가 있다.
내용이야 제각각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3개의 분기점이 있는데.
영입, 성장, 각성.
이 셋이 바로 그러하다.
당연히 헬레나의 이야기에도 이러한 분기점이 존재했고.
영입이야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사교도나 몬스터 사냥하면서 친해져서 같이 때려잡으러 다니는 내용이었으니까.
다만 각성 부분은 게임과 확 달라졌다.
이유야 뻔하지. 본래라면 빨라도 3학년에 성녀로 각성할 헬레나를 이래저래 물고 빨아서 1학년 중에 성녀로 만들었으니까.
즉, 지금의 헬레나는 각성은 했지만 제대로 된 성장은 거치지 못한 상황.
이참에 성장 방향까지 잡아두는 게 좋겠지. 그런 의미에서 메이스를 잡아보라고 한 것이었다.
헬레나의 스토리 중 성장 파트는 지금껏 억눌렀던 본능을 해방하여, 되려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법을 깨우치는 내용이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성녀 후보로 지정될 만큼 신성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헬레나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물론 헬레나 본인마저 전형적인 후위 사제직에 집착하지만…사실 진짜 재능은 전위에서 싸우는 성기사 쪽에 있더라고.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헬레나가 길버트에게 본격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
헬레나는 순수 전투 기술로만 어지간한 성기사 수준을 따라잡았으며, 성갑의 사용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겨우 일주일 만에 말이다.
“이제 던전에 데려다주시는 겁니까?”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쪽을 돌아보는 헬레나. 온몸을 뒤덮고 있는 성갑이 반짝거려서 참 멋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싸우다가, 헬레나가 성갑을 전개하는 순간 단번에 밀려버린 대련 상대.
하지만 졌음에도 헬레나를 향해 동경 어린 눈빛과 함께 기도를 올리는 성기사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했으니까요. 저희야 진작에 준비가 끝났으니 헬레나 님과 길버트 님만 괜찮다면 언제든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길버트 아저씨에게 일정을 물어보고 오지요!”
산책 나가자는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한껏 들떠서 뛰쳐나가는 헬레나.
이러다 꼬리라도 흔들 기세다. …아니, 진짜로 꼬리를 만들어서 흔들고 있네.
사자는 고양잇과였지. 개는 기분 좋으면 꼬리를 흔든다고 했는데 고양이는 어떨 때 흔들더라….
“아.”
사냥 직전. 흥분했을 때 흔든다고 했었지.
***
다음 날 아침.
우리 일행에 더불어 길버트까지 모아놓은 이오나가 입을 열었다.
“다들 다들. 아공간 주머니는 제대로 챙겼지? 화장실도 다녀왔고?”
“교수님. 여긴 아카데미가 아닌데요.”
“나도 알아! 그냥 한번 해봤어!”
히히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이오나. 허공에 검붉은 마력광이 넘실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페이가 손을 흔들었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와! 그리고 뭐 신기한 거 있으면 챙겨오고!”
“이번 던전에는 희귀 몬스터가 많으니까 부산물 몇 개 챙겨올게요.”
“희귀 몬스터?! 어떤 타입이야? 돌연변이가 많이 나온다는 그린스킨의 아종? 아니면 개체수 자체가 적은 드레이크종? 설마…자기 자신이 유일한 존재인 특수종은 아니겠지?!”
“어쩌면 전부 가져올 수도 있겠네요.”
“뭐어? 어떻게?”
“키메라가 나오거든요.”
“…후배님. 하나 정도 부산물 채취 없이 온전한 시체로 가져와 줄 수 있어?”
“일반 개체는 얼마든지 가능하죠. 특수 개체는 상황 보고요.”
어깨를 으쓱이자, 그대로 우다다 달려오더니 내 손을 잡고 방방 뛰는 페이.
“고마워! 사랑해 후배님!”
덩달아 흔들리는 페이의 연금술 주머니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려 보았다.
나와 페이가 던전 클리어 이후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길버트와 헬레나는 던전 그 자체에 집중하는 건지 딱딱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녀님. 모든 던전은 등장 몬스터와 유형에 따라 그 난이도가 천차만별이지만…시나리오 던전은 언제나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길버트 아저씨. 하지만 저도 강해졌고, 다른 분들은 더 대단하잖습니까. 괜찮을 테니 염려 마시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강해졌을 때, 주변을 믿고 풀어졌을 때야말로 실수가 자주 일어나는 법입니다. 부디 방심하지 마시길.”
음. 어째 진지한 분위기구만.
출발 직전까지 페이의 가슴이나 보던 내가 조금 머쓱해질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