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21화 (221/230)

“글쎄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요?”

내가 나보다 500살은 연상인 이리스를 귀여워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를라의 등에 대고 있던 손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삐쭉 입술을 내밀고 툴퉅대던 카를라의 얼굴이 빠르게 풀어진다.

부드러운 피부와 매끄러운 크림의 감촉. 따스한 체온과 호흡할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몸통이 카를라의 존재감을 주장한다.

가녀린 목. 봉긋한 날개뼈. 우묵한 등골을 지나, 허리 쪽에 손이 닿을 쯤이 돼서야 입을 열었다.

“카를라.”

“왜 그러시나요 귀여운 주인님?”

상당히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 다만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꽤 진지한 내용이다.

“너희 아버지. 그러니까 테오도어 린델하이트 말이야.”

“…네.”

어느날 갑자기 변절한 대마법사. 신의 영역에 손을 뻗기 위해 악신의 지식을 탐한 자. 마도명가의 마지막 가주.

그리고 카를라가 노예가 된 원인.

테오도어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 밝았던 카를라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

지금껏 피해왔던 주제. 하지만 이젠 말해야 한다.

“정말 악신의 추종자가 된 거라고 생각해?”

“…….”

입을 꾹 다문 카를라.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답이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주, 주인님 저는….”

“괜찮아. 나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문 카를라. 루비색 눈동자가 크게 뜨인 것이 꽤 예상외였나 보다.

벌떡 일어나려는 카를라의 등을 지그시 눌러 다시 눕히고는 말을 이었다.

“말만 들어보면 그럴싸하긴 해. 힘을 추구하는 이들이 힘에 집착한 나머지 타락하는 일은 종종 있잖아.”

무슨 일이든 샛길은 있다. 얼핏 보면 지름길 같아 보이고, 단단한 벽을 우회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한 사도가 주류가 되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마력이건 오러건 결국 의지로 다루는 것이다. 벽을 뚫기 위한 꼼수는 더 큰 벽으로 다가오고, 결국에는 역으로 잡아먹히고 만다.

지금까지는 만날 일이 없었지만, 국가에서 관리하는 대형 던전의 경우 사교도나 약탈자 외에도 드물게 광인이라는 인간형 적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미쳐버린 마법사나 기사의 말로로 추적을 피해 던전에 숨어들었거나, 던전에서 싸우다 미쳐버린 놈들이다.

뭐, 이를 이용해 억지로 경지를 끌어올린 뒤. 광인의 특성을 이용해 자동전투로 놀고먹는 메타가 있긴 한데….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 그런 미친놈이 되는 건 사양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잊을만하면 이런 광인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높은 경지일수록 광인이 나타나는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이다.

높은 경지에 오를 정도의 마법사나 기사라면 그만큼의 향상심을 가지고 있을 터.

그로인해 벽에 막혔을 때 쉬이 포기하지 못하고 삐뚤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테오도어도 그 중 하나로 취급받은 것이다.

미친 대마법사라는 게 아주아주 드물긴 하지만 실제로 튀어나오는 존재긴 하니까.

당장 신들의 전쟁의 시발점이 된 차원의 균열도 반쯤 광기에 사로잡힌 대마법사의 실험에서 비롯된 사고였고.

“테오도어 린델하이트는 사교도다…라는 고발에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못했었지.”

“맞아요. 저도 그때는 아카데미에서 분명 뭐가 잘못된 걸 거라며 많이 위로받았을 정도예요.”

“하지만 증거가 발표되며 여론은 확 뒤집혔어.”

대중은 물론이요 검증을 위해 나선 선신교단 연합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제출된 증거는 많았고, 하나하나가 결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근데 그거 전부 조작된 증거야.”

“…네?”

놀란 표정의 카를라에게 재차 말해주었다.

“전부 들끓는 고요 교단에서 진행한 사기극이라고.”

“…….”

린델하이트 가문이 마도명가로 불렸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모든 세대마다 적어도 한 명씩은 대마법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500년을 산 이리스조차 아직 상위 마법사의 끝자락에 서 있을 뿐인데 모든 세대마다 한 명씩은 나온다니.

애초에 대마법사라는 경지는 시간, 재능, 운.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 오를 수 있는 높이다.

허나 린델하이트 가문은 다르다. 시조의 각성 이후로 피를 타고 흐르는 용의 인자는 기존의 상식을 무시하는 재능을 선사했다.

모든 드래곤은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대마법사가 되었으니, 용의 심장을 타고난 이들 또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사교도들에겐 거슬리는 가문이었을 것이다.

음지에 숨어 힘을 기르고 이제는 악신의 해방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상대를 분열시키는 데 집중하던 놈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잖은가.

“꽤 공들인 작업이었을 거야.”

우선 린델하이트 가문 내부에 스파이를 심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용인으로 살며, 노년에는 집사장까지 올라간 최초의 고발자.

말없는 세르비스는 들끓는 고요의 신도다.

“세르비스 집사장이요?! 그럴 리가요! 7살도 안 되는 나이 때부터 거두셨다고 아버님께 들었는데….”

“그것도 위장이야. 실제 나이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최소 20살은 더 많을걸?”

들끓는 고요 교단이 왜 지금까지 숨어있을 수 있었으며, 내 고발 이후에도 전부 색출해내지 못한 것인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놈들의 권능이 그만큼 정체를 숨기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신성력도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는 놈들인데 나이라고 속이지 못하겠는가.

다른 놈은 몰라도 세르비스는 후반부에 싸우게 되는 중간 보스다 보니 확실한 사교도다.

“물론 혼자 잠입한 건 아니겠지. 다만 세르비스가 린델하이트 가문에 숨어든 세작들의 책임자인 건 확실해.”

그 외에도 선신 교단에 숨어든 녀석, 레반틴 제국 관료들 사이에 숨어든 녀석, 마지막으로 황실에 숨어든 예비 사도까지.

들끓는 고요는 정말 전력을 다해 린델하이트 가문을 몰락시키려 들었고…기어이 성공했다.

“하, 하지만 왜 아버님은 얌전히 사형당하신 거죠? 전부 누명이었다면 어떻게든 항변해야….”

“카를라 네가 인질이었거든.”

“…아.”

대마법사는 무력의 정점에 선 자다. 정치적인 압박도, 물리적인 압박도 큰 소용이 없는 초월적인 존재.

하지만 테오도어 린델하이트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것도 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카데미에도 스파이가 있었어. 지금은 졸업해서 잘 모르겠지만…아마 카를라 너랑 가까운 누군가가 들끓는 고요의 신도였겠지.”

“…만약 아버님이 난동을 부리면 즉시 절 죽이려 했다는 건가요?”

“바로 그거야.”

들끓는 고요 교단은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테오도어로서는 정체도, 규모도,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적을 상대로 도박을 걸기보다는 딸을 확실하게 살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얌전히 혐의를 인정하고 사형을 받아들인다면 딸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대충 그런 거래를 제시한 게 아닐까.

대마법사까지 억까하는 데 성공한 놈들이 카를라에게 아무런 누명도 씌우지 못할 리 없잖은가.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그리고 약속대로 재판장에서 카를라의 무사와, 사형이 아닌 노예형을 선고받는 걸 보고서야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미 마력 억제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상태에서, 여차할 때를 대비해 레반틴 제국이 파견한 소드마스터와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테오도어는 딸의 눈앞에서 죽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카를라는 그대로 노예시장으로 보내져 지금에 다다른다.

진작에 태닝 크림은 다 발랐음에도 떼지 못하고 있던 손을 찬찬히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다시 수영복의 매듭을 묶어주자 그제야 몸을 일으키는 카를라.

“주인님은 알고 계셨나요?”

“응.”

“그런데도 가만히 계셨던 건가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시의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보물 고블린에 지나지 않았다.

나보다 정치적, 무력적으로 훨씬 강한 이들도 테오도어를 변호하려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숙청당하는 판국에 어떻게 나설 수 있겠는가.

“…죄송해요 주인님. 그랬죠. 그랬었죠. 저나 아버님을 도와주려는 분들이 없던 건 아니었어요. 전부 어느 날부터인가 연락이 끊겼지만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들어 올린 카를라. 하지만 그녀의 루비색 눈동자는 여전히 음울함으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이걸…이런 걸 왜 지금 알려주신 건가요. 차라리 몰랐으면….”

“그야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에?”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의 무력도 갖추었으며, 여러 사교도를 족치며 명성과 실적을 얻었다.

거기에 이제는 300년 만에 처음 등장한 성녀 헬레나를 등에 업고, 정의로운 광명 교단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상황.

“최소한의 발언권은 챙겼다고 할 수 있겠지.”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들끓는 고요 교단에서 증거를 인멸하거나 조작할 테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누명을 벗겨 낼 수 있을 거야. 모든 악신을 죽이면 악신 교단도 같이 날아갈 테니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명예를 되돌리는 건 가능하다.

그리고…복수를 달성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내 말에 한참이나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카를라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렸다.

“저기 주인님….”

“응.”

“그럼 주인님은 제가 누명을 써서 노예가 된 걸 알면서도 첫날부터 그렇게나 거칠게 따먹으셨다는 거네요?”

“지금 중요한 게 그거야?!”

“저한테는 중요하죠!”

그렇긴 한데…!

어버버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카를라의 입꼬리가 장난스레 휘었다.

“농담이에요. 어차피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 잘 알아요. 차라리 주인님에게 팔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구요. 다만 책임은 져주세요.”

“책임이라면….”

“언젠가 모든 일이 잘 풀려 제가 더는 노예가 아니게 되더라도, 약속대로 쭈욱 저를 귀여워해주세요 주인님.”

“그야 당연하지.”

“그리고 다시 노예로 삼아주세요.”

“???”

어이가 없어 눈을 크게 떠봐도, 보이는 건 생글생글 웃는 카를라뿐이었다.

맞다. 얘 노예 교육받으면서 머리가 좀 이상해졌지.

여러모로 심란해지네.

이후로도 엘리샤, 이리스, 페이, 이오나에게 순서대로 크림을 발라주고 다 같이 일광욕을 즐기고서야 돌아간 대신전.

“정의로운 광명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얀델 형제님.”

그리 말하는 헬레나의 머리에서 빛으로 된 사자 귀가 튀어나왔다.

다 같이 까무잡잡해진 채 돌아온 대신전. 주변에서 묘한 선망의 시선이 느껴지는 걸 보아 일전에 헬레나가 해준 말이 진짜였나 보네.

빛의 신을 믿다 보니 태양 빛에 태운 피부까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니….

아카데미에서의 내 이미지는 여러모로 좋지 않았던 터라, 이 정도로 호의 넘치는 시선을 받는 게 조금 어색하다.

다만 이오나는 살짝 들떴는지 난데없는 모델 워킹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부끄럽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 하루 잘 놀고 이제 좀 쉬려던 차.

귀빈실 앞에서 서성이는 헬레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크게 뜨인 헬레나의 금안에 반가운 기색이 어리더니 호다닥 이쪽으로 뛰어온다.

“얀델 형제님!”

“엇, 네. 무슨 일이세요 헬레나 님?”

“우선 제가 참가해야 하는 회의는 전부 끝났어요. 나중에 신도들 앞에 나서서 성녀의 존재를 알려야 하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나중이지요.”

“오…그럼 이제 좀 시간이 남겠네요? 헬레나 님 빼고 저희끼리 노는 게 좀 그랬는데.”

“예에. 그리고 더 중요한 소식이 하나 더 있답니다.”

그리 말하고는 가슴팍의 메달리온을 쥐며 눈을 감았다. 마치 가볍게 기도를 올리는 듯한 모양새.

“정의로운 광명께서 깨어나셨답니다 얀델 형제님.”

돌연 헬레나의 머리에서 빛으로 된 사자 귀가 튀어나왔다.

“어어?”

인간형으로 변했던 정의로운 광명과 똑 닮은 생김새. 헬레나의 기세도 조금 변했다.

보다 묵직한, 무심코 우러러보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

흔히들 경건하다거나 거룩하다고 하는 분위기를 몸에 두른 헬레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는 금안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헬레나지만…그 안에는 다른 무언가가 들어있다는걸.

뭐, 정의로운 광명이겠지.

헬레나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정의로운 광명님?”

“흠흠. 그으…형제님을 다시 봐서 반갑다고 하시네요.”

“아, 헬레나 님이 말씀을 전달해주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요. 제가 성녀로서 조금 더 성장하면 그때는 직접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도 가능할 거랍니다.”

슬쩍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러워하는 헬레나. 나중에는 가능한 거구나.

“아, 혹시 강신…?”

“맞습니다. 강신에 성공하면 그때는 정의로운 광명께서 제 몸을 온전히 차지하시며 직접 말을 전하실 수 있게 되겠지요. 아마 누군가 번역해줄 필요도 없을 겁니다.”

강신.

사도의 주력기다. 몸에 담은 신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함께 싸울 수 있게 하는 기술이었지.

게임에서는 설명만 그렇게 적혀있고, 단순히 일정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와 신성술 숙련도 대폭 상승이라는 효과로 구현되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