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19화 (219/230)

“엥.”

헬레나를 통해 빌린 고위 성기사 전용 훈련실.

어째서인지 훈련실에 아무도 없어서 우리끼리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다른 어디도 아닌 본단에 고위 성기사가 한둘도 아니고, 그들이 전부 훈련을 빼먹을 정도로 풀어진 것도 아닐 테니 무언가 일이 있는 거겠지.

아마 헬레나와 함께 회의 중인 게 아닐까?

고위 성기사는 단순히 강한 존재가 아니라 유사시에 다른 성기사들을 지휘하는 존재기도 하니까.

파견 나간 성기사와 전투 사제들을 불러들이고, 여차하면 본단을 성채 삼아 농성을 벌이는 훈련 등.

할 일이 많을 테니 계획 단계에서부터 바쁜 거겠지.

뭐, 어찌 됐든 나야 훈련실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으니 좋지만.

그렇게 이오나에게 실전 형식으로 블러드 포스의 수업을 받던 도중.

콰아아아아앙!!!

등 뒤에서 들려온 폭음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거대한 불의 뱀이 기어간 것처럼 움푹 패고 까맣게 타들어 간 지면.

그 앞에는 엘리샤가 멍하니 서 있었으며, 이리스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마구 손뼉을 치고 있었다.

“…진짜 무슨 일이람?”

“흐음 흐음. 얀델 학생. 대련은 잠깐 중지하고 엘리샤에게 가보자.”

“엇, 네.”

무언가 눈치챈 것 같으나 말해주는 대신 장난스런 미소만 지으며 등을 떠미는 이오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샤의 옆에 다다랐다.

가까이서 보니 더 엄청나네.

내 허리까지는 될 법한 깊이로 파인 구덩이. 잔열로 일렁이는 시야. 숨 막히는 마나의 흔적.

“엘리샤? 이거 네가 한 거야? 사고…는 아닌 것 같은데.”

“야, 얀델….”

삐걱이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리는 엘리샤. 맑은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에는 격렬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척 봐도 엄청 동요한 것 같은 모양새의 엘리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중위 마법사가 된 것 같은데요?”

“엥.”

***

엘리샤가 중위 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

…정말 뜬금없긴 하지만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엘리샤는 잘만 키우면 대마법사에 이르는 재능을 타고난 데다가, 내 노예가 된 이후로 던전을 돌며 빠르게 성장했다.

하위 마법사의 끝자락에 서 있었으니 무언가의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벽을 넘을 수 있었을 터.

그저 이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뿅! 하고 중급 마법을 시전할 줄은 몰랐을 뿐.

“축하해 엘리샤!”

“고마워요 얀델. 이걸로 저도….”

희미한 미소를 짓는 엘리샤에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그나저나 목숨의 위협은? 격정적인 감정은? 마력 폭주는? 어떻게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각성한 거야?”

“…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샤. 나 또한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갸웃거리고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쩍 벌리는 엘리샤.

“당신 설마….”

“응? 왜 그래.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이제 보니 엘리샤뿐만이 아니라 다들 뭔가 눈치챘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왜 또 나만 몰라…?

이번에는 나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옆에 있던 카를라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으…주인님?”

“어.”

“보통은 각성이 아니라 착실한 수련으로 벽을 넘는 거예요.”

“…어?”

순간 머리가 정지했다.

2차 전직하는데 아무런 퀘스트도 필요 없다고? 물론 이 세상이 정말 게임은 아니지만 적어도 H&A에서는….

“잠깐.”

생각해보니 H&A에서도 각성퀘는 대마법사나 소드 마스터에 오를 때나 필요한 이벤트였지.

중위 마법사, 상위 마법사까지는 착실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의 가짓수를 늘리고 특성 랭크를 올리다 보면 다다르는 경지다.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한 경험치가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별다른 이벤트가 필요하진 않았으니까.

던전 클리어나 사교도 토벌 이후에 급격하게 성장하기에 종종 싸우다 벽을 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전투가 끝난 이후 시스템에게 받은 정산으로 다음 경지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나처럼 전투 도중에 각성한 뒤, 정산은 정산대로 따로 받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리스가 까치발을 딛고 서서는 우두커니 서 있던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무 충격받지 말게 주인이여. 생사의 기로에서 얻은 불안정한 깨달음으로 무리해서 끌어올린 경지건, 기본부터 착실히 쌓아 올린 본인만의 해답이건 어쨌든 도달점은 같지 않나.”

“…이리스 너어는 진짜!”

울컥한 마음에 이리스의 토실토실한 볼을 마구 잡아당겼다.

쭈욱 쭈욱.

“위로하는 척 돌려 까는 게 어딨어! 네가 제일 나빠!”

“히야악! 주인도 내 가슴이랑 야른샤드 영애의 가슴을 비교하며 종종 그러지 않았나!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

“에잇.”

“아파팟! 아프네! 이건 진짜 아프네! 한번 했으니 만족하고 앞으로 안 하겠네! 그러니까 볼 대신 귀를 잡아당기는 건 그만해주게!”

아직 잡기만 하고 당기지도 않았음에도 마구 엄살을 부리는 이리스. 귀가 민감하긴 한가 보네.

손을 놨음에도 어미에게 목덜미를 물린 새끼 고양이처럼 축 늘어진 이리스의 손목을 뒤에서부터 잡았다.

그리고는 인형을 조종하듯 이리스의 팔을 붕붕 흔들며 말을 이었다.

“뭐…별다른 위험 없이 벽을 넘은 거면 좋은 일이지.”

생각해 보면 엘리샤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평생에 걸쳐 꾸준히 마법을 배워오지 않았는가.

이리스의 말대로 지금껏 쌓아온 수련이 빛을 발한 것뿐이리라.

그나저나 중급 마법부터는 술자의 개성이나 코어의 특징이 뚜렷해지는데 엘리샤는 어떤 느낌이려나.

일단 나랑 카를라는 화력 특화형이다. 린트블룸 코어의 특성인 공명도 있고, 추구하는 바도 얼추 겹쳤거든.

나는 모든 위기를 타파할 강력한 한방을 원했고, 카를라는 어려서부터 포대형 정통 마법사로 자랐다는 식으로 말이다.

엘리샤도 성장 버전을 H&A에서 본 적 있으니 연사 특화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느껴본 적은 없으니 좀 궁금하네.

“저기, 엘리샤. 혹시 괜찮으면 중급 마법 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어머? 안 될 거 없죠. 다만 한 가지 정정하고 싶은 게 있답니다.”

키득이며 원드를 들어 올린 엘리샤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얀델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나름 몰려있던 상태긴 했으니까요.”

이제 막 열기가 가시는 흔적 쪽을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엘리샤. 이에 호응하듯 머리맡에 떠오르는 원소의 그림자.

본래라면 바람과 물의 형상만 있었을 그림자에 불의 문양이 추가되었다.

“저는 왜 카를라에게 미치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왜 얀델 당신에게도 뒤처지고 마는 걸까요. 스승님은 왜 이런 저를 위해 무모한 짓을 저지르신 걸까요. 저는 결국…짐 덩어리가 되고 마는 걸까요.”

“엘리샤….”

생각보다 무거운 내용.

엘리샤는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천재다. 하지만 최근 반년 동안 겪은 일들을 그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어찌어찌 잘 풀리긴 했지만,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엘리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던 거지.

언제나 그러하고,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현실과 이상의 낙차는 잔인한 것이리라.

조금 걱정스런 마음으로 엘리샤를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정신을 차린 이리스가 내 가슴에 뒤통수를 꾹꾹 문대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말게. 엘리샤는 그리 약한 아이가 아닐세. 주인은 그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기만 하면 되네.”

“…응.”

들끓는 마력. 원소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며 존재감을 흩뿌린다.

심상에 새겨진 이미지가 마력의 빛을 받아 생겨난 그림자. 엘리멘투스 코어가 만들어낸 환영일 뿐인 문양.

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실존하고 있었다.

“얀델. 나의 당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뇌 속에서 당신이 말해주었죠. 저는 분명 할 수 있을 거라고. 제 길은 틀리지 않았다고.”

그래. 여기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었지.

슬쩍 이쪽을 바라보더니 시원스런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엘리샤를 주변으로 피어오르던 마력이 순식간에 원드 끝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당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드리죠. 그러니 스승님 말씀대로 똑똑히 지켜보시길. 이게 제 마법이랍니다. …파이어 토네이도!”

화아악!

한 점으로 뭉쳐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확산하더니, 그대로 타오르는 불길을 자아낸다.

지면에 바짝 붙어 소용돌이치는 화염. 마치 뱀이 앞으로 기어가는 듯한 형상이다.

파이어 토네이도를 옆으로 눕힌 건가. 깔끔하고 빠르다. 무엇보다 조금 전의 엘리샤는 영창을 완전히 생략했다.

이제 막 중위 마법사에 올랐으면서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발현시키다니.

내가 평범한 중급 마법 이상의 위력을 선보이듯, 엘리샤는 영창 시간을 줄이고 보다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거겠지.

그것이 엘리샤가 추구하는 길이며 엘리멘투스 코어의 특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니까.

속으로 감탄하며 지켜보기도 잠시. 방출형 마법답게 화염의 폭풍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아쉬움 반, 감탄 반의 심정으로 박수를 치려 손을 드는 순간.

“샤프니스 허리케인!”

“어?”

곧장 이어지는 엘리샤의 두 번째 마법.

조금 전과 정확히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순수한 바람의 폭풍. 열기를 잃은 대신 예리함을 얻은 마법이 전방을 마구 난도질한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엘리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이달…웨이브…!”

두꺼운 물줄기가 맹렬한 기세로 쏘아지면 움푹 패인 구덩이를 재차 깎아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픽 쓰러지려는 엘리샤를 황급히 붙잡았다.

“으헥!”

나와 엘리샤 사이에 이리스가 낑기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처음에 약간 시간이 걸리긴 했고 마지막엔 힘겨워하다 쓰러지긴 했지만, 무려 3번이나 연달아 중급 마법을 사용하다니.

물론 마법 하나하나의 위력은 나나 카를라보다 훨씬 약하다. 하지만 이를 연속으로 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직 미숙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걸어 다니는 자연재해 같은 모습에 단번에 가까워진 것이다.

언제나 최고를 추구하며 최고에 집착하는 엘리샤. 설령 라이벌을 잃고, 스승을 잃고, 동족에게 백안시당하더라도.

그럼에도 언제나 앞을,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나아가며 소리 높여 웃는 여인.

그게 바로 내 품에 안긴 엘리샤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힘이 쪽 빠진 엘리샤가 내 어버버 거리는 모습을 보며 키득였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꽤 괜찮죠?”

“꽤 괜찮은 게 아니라 최고였어.”

지금의 엘리샤의 곁에는 카를라가 있고, 이리스가 있다. 여전히 동족에게 백안시당할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엘리샤를 긍정해주는 내가 있다.

엘리샤가 어디까지 강해질지. 얼마나 빠르게 날아오를지.

“조금 기대되네.”

나도 모르게 실실 웃으며 나온 한 마디. 하지만 어째 엘리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지금 당신의 외모로 그런 표정을 지으니 자꾸 이상한 뜻으로 들리네요.”

“…이건 페이한테 가서 따져!”

내일은 너희 차례야.

그거 아는가.

오리너구리는 시력이 좋지만 눈이 위를 향해 나 있어서 부리 밑은 보지 못한다고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동물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이런 좋은 속담을 만들어두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마는 슬픈 생물이니까.

“페이 선배…어째서…!”

“후힛! 멍청한 질문이네 후배님.”

앞머리를 늘어뜨려 눈을 반쯤 가린 채, 씨익 미소 짓는 페이. 다만 입꼬리는 묘하게 파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눌러 참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지만 페이는 그런 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그저 실험체가 필요했을 뿐이야.”

“페이 선배 스스로 해보면 되는 거잖아요!”

“후히힛….”

내 외침에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드는 페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며 시선이 마주쳤다.

페이의 까만 눈동자도 나처럼 마구 떨리고 있었다.

“…페이 선배. 설마?”

“실험체는…후배님 하나가 아니야….”

말하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페이. 그런 페이의 뒤로 수상한 기구가 하나 있었다.

위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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