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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18화 (218/230)

묘하게 무거운 침묵 속에서 카를라가 비장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그래서.”

“응?”

“하신 건가요? 주인님이랑 성녀님이요.”

“…응.”

“몇 번이나요…?”

“글쎄. 회복 권능이 깔려있는 덕에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잘 모르겠는데.”

“허어어억!”

카를라가 루비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카를라를 대신하듯 침을 꼴깍 삼키며 말을 잇는 이리스.

“주인이여. 이제 헬레나 성녀도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되는 건가?”

“같은 신세? 아, 제대로 책임지기로 했고 헬레나 님도 동의했으니 이제 다 같은 내 여자긴 해.”

“아니, 그게 아닐세. 성녀도 이제 몰락하냐는 의미였네.”

“불길한 소리 하지 마…누가 들으면 정말 내가 몰락한 여자들만 수집하는 것 같잖아?”

“틀린 말은 아니잖나. 실제로 여기에 배경이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만.”

“쓰읍.”

그리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아무튼 이번에는 아니야. 저번에 접견실에서 들었잖아? 사교도 놈들이 광명 교단을 노리고 있고, 내가 그걸 경고한 거. 헬레나가 몰락할 일은 없을 거야.”

“흠흠. 그렇다면 다행이네. 우리도 멀쩡한 사람이 몰락하길 바라는 건 아니니 말일세.”

이리스의 말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무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뭐야. 진심으로 내가 몰락 영애 취향이라고 했던 거야? 농담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이오나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주제를 전환했다.

짝짝.

“그만 그만.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아무튼 헬레나 학생도 이제 우리 동료가 된 거니까 그렇게 알고 다음에 만났을 때 이것저것 챙겨주자구!”

그리고는 은근슬쩍 내 옷깃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뭐, 그때까지는? 우리도 수녀복 플레이라는 걸? 해봐야 하지 않을까?”

장난스러운 어조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유혹. 다른 사람들도 여기에는 동의했는지 눈빛이 조금 달라진다.

안 그래도 페이랑 몰래 먼저 했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좀 있는 것 같던데…여기서 빼는 건 안 될 짓이겠지. 다만.

“…오늘 말고 다음은 안 될까요 교수님? 권능의 도움을 받아도 3일 밤낮으로 하니까 진짜 죽을 것 같은데.”

“아하? 아하? 확실히 아무리 얀델 학생이라도 그렇게나 연속으로 하는 건 힘들겠지.”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오나였으나, 어째서인지 눈동자에 서린 요사스러움은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그거 알아 얀델 학생?”

“네…? 뭐를요?”

불안함을 최대한 숨기며 태연스레 대꾸하자,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이오나.

닫혀있던 입술이 벌어지며 그 사이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였다.

“나. 3일 동안 피를 못 마셨어.”

“아.”

“내가 빨아주면…서지 않을까?”

“…….”

그렇겠지. 목을 빨건 다른 곳을 빨건 아무튼 서긴 하겠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이젠 각오를 다지는 수밖에 없겠지.

강한 의지를 담아 호기롭게 외쳤다.

“와 바 랏!”

그래. 사흘 했는데 나흘이라고 못 하겠어?

“궤에에엥….”

사흘 했는데 나흘이라고 못 하겠냐고?

이게 못 하겠더라고.

호기롭게 와 바 랏! 같은 소리를 하던 어제의 내가 밉다!

캡틴 아메리카노도 하루 종일 할 수 있다고 했지, 나흘 내내 할 수 있다고는 안 했잖은가.

다들 만족했는지 반들반들해진 피부로 만족스레 기절한 여인들. 그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태생 마력? 지금껏 먹어 치운 영약? 태양신의 가호? 5배속으로 빨리니까 다 부질없더라.

…그래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내 승리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뿌듯함과 함께 어떻게든 창가로 향하고는 인벤토리에서 활력 포션을 하나 뜯었다.

뽕!

경쾌한 소리와 함께 뽑히는 마개. 이번에 페이가 새로 만든 레몬 맛 탄산 포션이다.

놀랍게도 맛과 탄산을 추가했음에도 효과는 변함이 없다. 아직 하급 포션으로만 가능한 듯하지만…그래도 탄산이라는 게 어딘가.

아침 햇살을 전신으로 쬐며 포션을 한 모금 마셨다.

꼴깍 꼴깍.

“캬아아….”

피곤할 때는 신맛이 온몸으로 스며든단 말이지. 거기에 탄산 특유의 청량함으로 입과 목도 즐거워졌고.

거기에 빛을 쬐며 본격적으로 가호의 회복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자, 시든 이파리에 물을 뿌린 것처럼 빠르게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몇 시간만 있으면 완전히 회복될 터.

광합성 하는 식물처럼 멍하니 햇볕을 쬐고 있자니 옆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후배님. 거기서 자려고?”

“네. 아무래도 이쪽이 저한테는 더 피로회복에 좋을 것 같아서요.”

“맞다. 후배님은 가호가 있었지? 그럼 이게 필요하겠네.”

엉금엉금 기어 벗어둔 옷가지 쪽으로 향하는 페이.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씰룩이는 것이 좀 귀엽다.

더 나올 것도 없으면서 은근슬쩍 고개를 들이미는 아랫도리를 스윽 가리고 있자니, 자신의 백의에서 꺼낸 무언가를 휙 던지는 페이.

염력으로 잡아 확인해보니 일전에 만들었다는 태닝크림이었다.

“이건…?”

“후힛. 후배님도 알잖아? 자기 전에 그거 바르고 자. 팬티는 꼭 입고. 그래야 갭이 있어서 좋잖아!”

“…….”

분명 밤새 만족시켜줬을 텐데, 내일을 기대하며 음흉하게 웃는 페이.

말없이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푸르렀으며 태양을 밝았다.

진짜 태양신의 가호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속으로 정의로운 광명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며 태닝크림을 치덕치덕 발랐다.

***

“…얀델 형제님? 그 모습은 대체?”

“솔라리스는 정의로운 광명님의 대신전이 자리 잡은 곳답게 햇빛이 강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태워봤죠.”

어깨를 으쓱이는 내 모습에 헬레나의 금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응…나도 알아. 지금 완전 흑태양처럼 보인다는 거. 자고 일어났더니 다들 막 웃더라고….

진짜 나중에 두고 보자. 태닝크림은 넉넉하니까 똑같이 태닝 시켜버려야지.

특히 페이는 마이크로 비키니만 입히고 태우게 할 생각이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던 헬레나가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평소와는 이미지가 달라지셨네요. 딱 좋은 구릿빛 피부가 정말…츄릅.”

“헬레나 님? 방금 침을….”

“자, 잘못 보셨겠지요. 제 나이가 몇인데 침을 흘리고 다니겠습니까.”

“아니. 분명 봤는데요? 입술 좀 봐봐요.”

헬레나의 턱을 붙잡아 올리고 자세히 살펴보려 하자 스윽 소매로 입가를 닦는 헬레나.

“역시 침 흘렸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증거인멸 하려는 거지!”

“모, 모함입니다! 성녀는 침 같은 거 안 흘립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예 화장실도 안 간다고 하지 그러시죠?”

“맞습니다! 성녀는 화장실도 안 갑니다!”

“…거짓말! 안 되겠다. 바로 확인해야겠어요. 화장실로 가죠!”

“앗, 아앗…그건…!”

예배당에서의 일을 떠올렸는지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뒤로 빼고 움찔거리는 헬레나.

하긴. 내 앞에서 조수를 뿜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헬레나를 밀어붙였다.

한 걸음 다가가자 한 걸음 물러나고, 두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물러나는 헬레나.

결국 도망칠 곳을 잃고 복도 구석의 벽까지 몰린 헬레나의 옆에 손을 턱 짚었다.

카를라가 좋아해서 몇번이고 해달라고 했던지라 몸에 익은 벽쿵 자세.

차마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헬레나에게 속삭였다.

“선택해주세요 헬레나 님. 순순히 사실대로 말할 건지, 아니면 저랑 같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순수를 증명하실 건지 말이에요.”

“으읏….”

한참을 움찔거리던 헬레나였으나, 이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눈을 꾹 감으며 입을 열었다.

“마, 맞습니다! 형제님을 보고 부끄럽게도 침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탐스럽게 태운 피부를 보여주시면…!”

“에.”

난데없은 급발진에 순간 멈칫한 사이, 헬레나는 이를 놓치지 않고 되레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거 아시나요 얀델 형제님? 이 적절히 태운 피부는 태양신이기도 하신 정의로운 광명님의 흔적으로 가득하다는걸.”

“그게 무슨….”

“아아! 이렇게 보기 좋은 갈색으로 태우면서 상처 하나 없고, 되려 윤기가 흐르다니! 이 얼마나 괘씸하고 부러운지…!”

이번에는 반걸음 가까워진 헬레나. 이젠 이마와 이마가 맞닿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밀착한 상태다.

살짝 턱을 치켜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술이 닿는 게 아닐까 싶은 자세.

그 상태에서 헬레나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바짝 말린 이불 같은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정의로운 광명의 신도들은 태양 빛으로 피부가 타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태운 피부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있지요.”

“그…렇군요,”

“예에. 그러니 절대 다른 여신도들에게 지금의 모습을 보이지 말아주시지요.”

“…….”

“그으…얀델 형제님과 함께 오신 다른 여성분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새로운 분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

이제야 부끄러움이 닥쳐온 건지 얼굴을 붉히고 횡설수설하는 헬레나. 그 모습을 보고서 깨달았다.

“다른 여신도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건…혹시 질투 때문인가요 헬레나 님?”

“허읍!”

본인은 자각이 없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꾹 다무는 헬레나.

그리고는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귀여우셔라.”

헬레나의 볼을 붙잡고 다시 위로 꺾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고개를 숙였다.

쪽.

새가 부리로 쪼는 듯한 가벼운 키스. 여기서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건 예상치 못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헬레나의 귀에 속삭였다.

“헬레나 님이라면…다른 제 여자들과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네요.”

“그러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는지 미묘한 표정이 된 헬레나. 그런 헬레나의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벽쿵 자세를 풀었다.

“오늘은 시간 되시죠?”

“네? 네에. 할 일이 명확하고 자금도 충분하니 회의가 금방 끝날 것 같더군요. 오늘 점심까지는 힘들겠지만…저녁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헬레나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제가 있는 방으로 와주세요. 다들 헬레나 님과 어떻게 친해지면 좋을까 고민 중이었거든요. 마침 좋은 소재가 생겼네요.”

“앗…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 이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그때 보기로 하고…지금은 바쁘신 거죠?”

“아쉽게도 그렇지요.”

“어쩔 수 없네요. 남은 일 열심히 하시고 저녁에 만나요.”

“그러지요.”

웃으며 어깨를 토닥여주자, 헬레나 또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그 뒤로는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가벼운 잡담을 이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갈림길. 어제에 이어 오늘도 회의실로 가는 헬레나에게 물었다.

“아. 헬레나 님. 혹시 여기에 마법 연습을 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다른 사제 분들과 달리 성기사 분들은 아무래도 따로 몸을 움직일 곳이 필요하니까요.”

그리 말한 헬레나는 고위 성기사들만 쓸 수 있는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저야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쓸 거 없이 중급 마법까지 뻥뻥 쏴대도 괜찮으니 좋긴 한데, 그거 그냥 멋대로 막 빌려줘도 괜찮은 건가요?”

“후후. 별걱정을 다하시네요 얀델 형제님. 전 이제 성녀랍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제 권능으로 가능하니 걱정 말고 쓰시길.”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헬레나.

그러네. 이제 헬레나가 성녀였지. 사실상 교황보다 높으신 분이니 훈련 시설 빌려주는 정도야 진짜 별거 아니겠지.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헬레나와 헤어진 뒤에는 귀빈실로 돌아가 다른 이들을 데리고 훈련실로 향했다.

그리고 엘리샤가 중위 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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