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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17화 (217/230)

“쉿.”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내 가슴팍에 코를 박고 심호흡 중인 카를라에게 물었다.

“카를라.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스읍…핫! 다, 다른 사람들이요?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언제 나오실지 모르니 돌아가면서 기다리기로 했거든요.”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사람을 시키거나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갔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잠시 우물거리던 카를라가 삐쭉 입술을 내밀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이 가장 먼저 나왔을 때 제가 맞이하고 싶었는걸요?”

“…확실히. 기쁘긴 했어.”

“그렇죠?”

헤헤 웃는 카를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고는 투닥이는 엘리샤의 팔을 잡아 조금 억지로 팔짱을 꼈다.

순식간에 얌전해진 엘리샤를 반대쪽 옆구리에 낀 채 고개를 들었다.

대화가 끝났는지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는 길버트와 헬레나. 그 둘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선…밥이나 먹으며 이야기할까요?”

예배당의 빛이 꺼지며 피로가 몰려왔듯, 허기도 몰려오더라고.

***

지금은 쓰이지 않는 회의실에서 열린 만찬.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일단 기밀이니 당연한 일이겠지.

아카데미의 식당에 비하면 검소한, 하지만 맛은 전혀 뒤처지지 않는 요리를 마구 먹어 치우던 도중.

“흐음…그러니까….”

광명 교단의 교황. 알바오르가 식사하다 말고 자신의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3일 밤낮으로 손잡고 기도를 드렸더니 헬레나가 성녀가 되었다는 거군요.”

“네. 그런 겁니다.”

차마 3일 밤낮으로 야스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돌려 말한 것이지만.

“그렇군요…아, 헬레나? 혹시 괜찮다면 성녀의 권능을 보여주실 수 있겠느냐?”

“물론 괜찮습니다 교황님.”

입가를 가볍게 닦은 헬레나가 자신의 뒷덜미를 한차례 쓸었다.

파앗.

그러자 거기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리 잡은 복실복실한 털목도리. 정의로운 광명이 은근슬쩍 내게 둘러준 것과 똑같이 생긴 디자인이다.

하지만 껍데기만 재현한 그때와 달리 이건 힘이 담긴 진짜 권능. 사도의 상징이다.

우웅.

털목도리에서 폭포수처럼 빛이 쏟아지더니 망토의 형상을 자아낸다. 그 위에 그려진 것은 빛으로 조각된 정의로운 광명의 심볼.

태양을 형상화한 것 같은 문양이 고정되는 것과 동시에, 헬레나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존재감이 한층 더 강해졌다.

“오오…정의로운 광명이시여….”

“헬레나가 정말 성녀가 될 줄이야….”

잔뜩 감격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는 알바오르와, 싱숭생숭한 얼굴로 헬레나를 바라보는 길버트.

그런 둘의 모습에 헬레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목덜미의 갈기를 만지작댔다.

“기뻐해 주시니 저도 기쁩니다만…아직 제가 부족하여 한동안 성갑의 진정한 형태는 끌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성녀님. 이 늙은이가 눈을 감기 전에 가장 밝은 빛을 뵐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배당의 빛도 한동안 안 돌아올 거라 했었지. 아니, 했었군요. 정의로운 광명님은 언제쯤 깨어나실지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확 달라진 헬레나의 기운 덕분일까, 알바오르와 길버트는 애초부터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확실히 하고 싶었던 거겠지.

이렇게 성녀임을 확인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헬레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존대를 하고 있으니까.

둘의 갑작스런 변화에 헬레나가 난처해하는 미소로 손을 저었다.

“두 분 모두 부담스럽습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시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교황이라고는 하나 결국 선출된 추기경일 뿐. 주께서 직접 선택하신 성녀님에게 함부로 말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흠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보살폈다고 하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

“공과 사! 바로 그거예요 길버트 아저씨! 지금은 사적인 자리잖습니까. 그러니 너무 그리 무게 잡지 말아주시지요. 제가 오히려 불편하답니다.”

어찌어찌 둘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 헬레나.

이럴 줄 알았다. 정의로운 광명 교단은…아니, 에우렐리아 대륙의 교단은 선신 악신 할 것 없이 광신자 집단이다.

좋은 쪽으로 미쳤냐, 나쁜 쪽으로 미쳤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H&A에서는 성직자 루트를 밟은 끝에 사도직을 부여받아 성자나 성녀가 된다면, 아예 교황과의 대화 중에 교황직을 물려받는다는 선택지가 뜰 정도.

꼭 교황이 되지 않더라도 사도가 된 주인공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려 한다. 심지어 다른 교단에서도 어지간하면 편의를 봐주는 편이고.

이유는 간단하다. 사도는 내면에 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강림이 신의 육체와 힘을 온전히 가지고 오는 것이라면, 사도 임명은 정신과 권능의 일부를 가지고 지상에 임하는 것.

인간의 몸과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신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당연히 교인 중에서도 남다른 신앙심을 가진 교황과 추기경이라면 헬레나를 극진히 모실 수밖에 없겠지.

정작 본인은 불편해 죽겠다는 표정이지만.

한숨을 푸욱 내쉰 헬레나가 낯 뜨겁다는 듯이 손부채를 부치며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예배당의 빛이 언제 돌아올지는 저도 들은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정의로운 광명께서는 며칠 뒤에 깨어나신다고 하셨으니, 그때쯤에 예배당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의로운 광명님의 말씀을 직접 듣다니…!”

“저희도 며칠 전까지 그랬지만, 다른 교단은 신탁을 받기도 힘들다고 했던가요 교황님?”

“그렇네 길버트 추기경. 지난 300년간 찾아서 클리어한 던전의 갯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회복도 더뎌진 거겠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보며 헬레나가 재차 한숨을 내쉬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알바오르와 길버트에게는 무슨 말을 하건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올 거라 생각하고 말을 돌리려는 것이리라.

아마 실제로도 그럴 테고.

“형제님. 이번에는 제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차례로군요.”

“네? 아, 내기 말이죠? 언제가 좋으세요? 여기서 좀 멀긴 한데 이오나 교수님의 텔레포트가 닿는 거리니 언제든 괜찮으니 헬레나 님의 일정에 맞출게요.”

“당장 내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가능하면 정의로운 광명께서 깨어나신 뒤가 좋을 것 같습니다.”

“아하? 성녀의 권능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으신 건가요? 좋죠.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준비야 하루면 충분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후로도 별거 아닌 잡담을 이어 나갔다.

나중에는 알바오르와 길버트에게 이제 성녀가 됐으니 어떻게 할지에 관한 이야기도 좀 나누었고.

결론만 말하자면 대외활동은 하되, 교단의 상징으로서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나와 함께 던전 공략이나 사교도 토벌에 더 힘쓰기로 정했다.

헬레나를 통해 정의로운 교단 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는데, 돈이 부족한 건 아니니 성수와 성물 같은 교단 외에는 만들 수 없는 물건 위주로 지원받기로 했다.

페이에게 주면 어딘가 활용할 방도가 있겠지. 없으면 없는 대로 써먹어도 되고.

그리고 내 쪽에서는 대신전의 방비와 성기사들의 전력을 강화해달라며 5만 골드를 기부했다.

상당히 큰돈이긴 하지만 내게 부담될 정도는 아니며, 무엇보다 충분히 지불할만한 가치가 있는 금액이다.

성직자건 뭐건 무슨 일을 하려면 전부 돈이 필요한 법. 그렇다고 이 광신도들이 교단을 위해 쓰는 돈을 횡령할 리도 없으니 안심하고 기부할 수 있다.

무사히 나 대신 헬레나를 사도로 만들었으니, 이제 남은 건 언젠가 닥쳐올 사교도 놈들의 집중 공격을 막는 일뿐.

여기까지 와서 삐끗할 수는 없지.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잠시.

대화도 일단락났고, 식사는 진작에 끝나 디저트만 몇 그릇째 먹던 중이니 슬슬 자리를 파하려 일어서는데.

돌연 지금껏 자기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말을 아끼고 있던 길버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식은 언제 올릴 예정이십니까 얀델 님?”

“어, 음….”

들켰네.

결혼식.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올려야지.

언젠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뒤에 말이다.

…그 말을 들은 길버트가 노골적으로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행히 납득해주었다.

이후에 나와 내 일행은 귀빈실로 돌아갔고. 헬레나는 교단 상층부와 이런저런 일을 의논하러 향했다.

300년 만에 등장한 성녀의 존재를 어떻게 알릴지, 식사 중에 정한 방침을 어떻게 이행할지 등.

교단 쪽에서는 이래저래 바쁠 테니 어쩔 수 없지.

이젠 헬레나도 단순한 수녀가 아닌 어엿한 상류층 인사니 빠질 수도 없고.

그런 이유로 나중에 다시 보자는 인사와 함께 헬레나와 헤어진 후. 우리에게 주어진 귀빈실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쿵! 철컥.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잠가버리는 이오나.

그녀가 검붉은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휘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주목 주목! 이제부터 ‘지난 3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얀델을 추궁하는 시간’ 이 있을 거야! 다들 착석해!”

“네? 그게 무슨…어어? 자, 잠시만요!”

당황한 내 어깨를 꽉 붙잡고 근처의 쇼파에 앉히는 이오나.

옥좌를 연상시킬 정도로 큼직하고 화려한 녀석이었는데, 그 외형만큼이나 푹신하고 편안했다.

숨겨둔 것처럼 흐릿하긴 하지만 신성력도 느껴지는 걸 봐선 고오급 쇼파에 축성까지 곁들인 거겠지.

말 그대로 교단의 귀빈이나 쓸 수 있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보물……이었을 터다.

착석하랬더니 내 주변에 빼곡히 자리 잡은 다른 여인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망설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내 왼쪽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는 카를라.

엘리샤는 조금 더 얌전히 자세로 쪼그려 앉아 오른쪽 허벅지에 턱을 괴며 이쪽을 올려다봤고.

이오나는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내 손을 깔아뭉갰으며, 페이 또한 반대쪽 팔걸이에 앉아 목덜미에 팔을 휘감았다.

마지막으로 이리스는 꼬물꼬물 기어서 내 허리 위에 올라탄 자세.

얼핏 보기에는 내가 여자를 다섯이나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이쪽이 사지를 결박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구도.

순식간에 퇴로를 막아버린 이오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있잖아. 나는 별로 얀델 학생을 독점하고 싶은 게 아니야. 아마 다들 그럴 거고!”

“엇, 네.”

“하지만 소홀히 대하면 삐칠 거야.”

“…….”

언제든 볼을 부풀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가능하면 당사자가 있을 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이것도 괜찮겠죠.”

자꾸만 주르륵 미끄러지는 이리스의 엉덩이를 붙잡아 고정시켰다. 한 손은 이오나의 엉덩이에 깔렸으니 양손에 엉덩이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내가 말했던 것처럼 3일간 기도만 한 건 아니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러쿵저러쿵 구리구리오리너구리.

정의로운 광명이 인간형으로 변한 것부터, 권능의 씨앗을 심어 내 가호를 유지하며 헬레나의 가호를 성장시키는 방법을 제안한 것까지.

시스템 덕에 번역이 가능했다는 부분만 적당히 각색해 전부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된 거야.”

“허어…설마 정의로운 광명이 인간의 형태로 변할 수 있다니. 대전쟁 때는 사자의 모습만 봐서 신기하구나 주인이여.”

“스승님의 말대로 인간형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저는 그보다 여신이었다는 부분이 더 놀랍네요.”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와 엘리샤. 하긴 그럴 만하지.

나도 H&A의 엔딩을 몇백 번은 봤건만 정의로운 광명이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여신이라는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폴짝폴짝 뛴다거나 바닥을 굴러다닌다는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거고.

다른 이들도 말은 안 했지만 다들 정의로운 광명의 예상 밖의 모습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읏, 힉, 설마….”

딱 한 명.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버린 페이를 제외하면.

“페이 선배? 왜 그러세요.”

“그으…정말 정의로운 광명께서 전부 지켜보셨어?”

“으음. 정확히는 헬레나 님이 우연찮게 발견했고 반사적으로 기도 올렸다가 슬쩍 보셨다네요.”

“…수녀복 플레이를?”

“…네. 이런 거 좋아하냐면서 인간형으로 변했을 때도 수녀복 입고 계시더라고요.”

“처, 천벌이 내릴 거야!!”

빼액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서는 페이. 어찌나 그 기세가 강했는지 팔걸이 옆으로 굴러떨어지려 하길래, 황급히 염력 마법으로 잡아당겼다.

“히야아아아악!”

“진정하세요 페이 선배!”

“어떻게 진정해! 신 앞에서 수녀복을 입고 그렇고 그런 짓을 했는데! 내가 고민을 털어놓으라며 정액 찌꺼기를 터는 것도, 자비를 구걸하다가 결국에는 자지를 구걸하는 모습도 전부 봤다는 거 아냐!”

“그러니까 괜찮다니까요! 뭐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오히려 헬레나 님이 흥미를 가지신 것 같으니 한번 해보라며 부추기실 정도였어요!”

“뭐어?! 거짓말 하지마 후배님! 날 위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상식적으로 자기 성녀한테 수녀복 플레이를 권하는 신이 어디 있는데!”

“놀랍게도 여기 있더라고요.”

“…진짜?”

미심쩍어하는 시선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멍하니 벌어지는 페이의 입.

다만 이번에는 다른 여인들이 펄쩍 뛸 차례였다.

“잠시만요 주인님. 언제 페이 양과 그런 부러운 플레이를 한 거죠?!”

“맞아! 맞아! 얀델 학생…설마 우리를 빼먹는 건 아니겠지? 당장 하자!”

허벅지를 쪼물거리며 귀엽게 항의하는 카를라와, 엉덩이에 체중을 실어 손을 꾹꾹 누르며 항의하는 이오나.

둘의 모습에 코알라처럼 팔다리를 휘감아 밀착한 이리스가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하시게. 지금은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않나.”

“예에. 스승님 말씀대로예요. 페이 양이 우리 몰래 혼자 수녀복 플레이를 한 건 괘씸하지만…그거야 저희도 다음에 입으면 될 일. 문제는 그쪽이 아니라 헬레나 사제…아니, 성녀님 쪽이랍니다.”

헬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무는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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