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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210화 (210/230)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도 높다 높다나 볼 꼬집기에 당한 게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묘하게 퉁명스러운 목소리.

허나 틱틱 대면서도 내 옆에서 떠나지 않는 이리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 예배당은 밤이 와도 빛의 권능으로 항상 밝다며?”

“흠흠. 언제나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라고 하더구나. …뒤통수는 조금 더 길게 쓰다듬어주게. 그래. 등까지 살짝.”

고롱고롱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내 손길을 즐기는 이리스.

그러고 보니 어제 헬레나에게 정의로운 광명이 여길 유독 좋아해서 예배당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신이 마음을 둔 공간이니 조금 더 아름답게 치장했다나.

실제로 광명 대신전의 대부분은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느낌인데, 오직 이 예배당만이 세세한 장식이 달린 화려함을 자랑한다.

아름다운 양각 조각으로 가득 찬 문을 천천히 밀었다.

끼이이익.

신기하게도 허공을 미는 것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밀리는 문.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

파란색, 녹색,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유리창들.

이를 통과한 빛은 서로의 색으로 자기 주장을 펼쳤으나, 이내 서로 뒤섞여 하얗게 물들어간다.

그렇게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나온 빛이 모여 하얀색으로 빛나는 곳. 그 자리에 거대한 사자의 조각상이 있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용맹하게 울부짖는 백사자.

한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위용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아, 오셨습니까 형제님.”

먼저 와서 아침 기도 중이었던 헬레나가 이쪽을 맞이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알바오르와 길버트도 있었고.

천천히 일어난 알바오르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잠자리는 평안하셨는지요.”

“배려해주신 덕에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여인들이 뒤에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예배당에 사람이 없군요.”

“예. 얀델 님께서 필요하시다 하셨으니 오늘 하루는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

좀 미안하네. 그리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미묘해지는 내 표정을 알아챈 길버트가 껄껄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다른 예배당도 많으니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곧바로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래야죠. 하루 종일 전세 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백사자 조각상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차로 이동하는 동안 몇번이고 봐왔던 헬레나의 기도 자세.

이를 되새기며 손은 가슴팍 앞에서 깍지 끼며 마주 잡고, 머리는 살짝 숙인다.

그리고 눈앞의 거대한 백사자…아니, 이 조각이 표현하고자 했던 존재를 떠올리며 천천히 속으로 이름을 불렀다.

‘정의로운 광명이시여….’

화아아악!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건만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몸에서 솟구치는 빛무리.

“주인님?!”

“괜찮으니 다들 물러나게!”

깜짝 놀란 카를라가 다가오려는 걸 말리고 다 같이 물러서는 알바오르.

좋은 판단이다. 내 몸이 수상쩍을 정도로 빛나고 있지만, 위험하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드니까.

오히려 힐을 받을 때처럼, 혹은 태양 빛 아래서 가호에 집중할 때처럼 따스한 느낌이 차오르고 있다.

그렇게 내 안의 가호가 뿜어낸 빛이 주변을 밝히고 정의로운 광명의 조각상과 맞닿는 순간.

우웅.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순식간에 내게서 솟구친 빛이 조각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쩌적.

뒤이어 들려오는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

조각상 위에 집중되던 백색 빛이 움찔거리며 조금씩 일렁이더니, 사자의 형상을 유지하며 떨어져나온다.

신상과 똑같이 생긴 백사자가 허공에 발을 디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아아….”

“정의로운 광명께서….”

당황과 기쁨. 그리고 무한한 경외를 담은 표정으로 제 자리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알바오르와 길버트.

헬레나 또한 울 정도는 아니지만 감격했는지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내 일행들 또한 뒤늦게 저 빛으로 된 사자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힐끗 시선을 스칠 뿐, 다시 내게 고개를 고정하는 정의로운 광명.

안 그래도 어디선가 쏟아지는 빛으로 밝았던 예배당이 이젠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다.

신성함이 줄줄 흘러넘치는 것이 마치 어제 대신전을 돌며 보았던 성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다.

뭐…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강림 같은 게 아니다. 멋있긴 해도 깃든 힘은 거의 없는 껍데기 같은 거거든.

어디까지나 내게 부여한 가호의 힘과 예배당에 깃든 신성력을 공명시켜 일으킨 일종의 신탁 비슷한 것.

신탁이 내릴 때 하얀 새가 주변을 덮었다거나, 창문 없는 방에 빛이 내려왔다던가, 조각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던가 하는 그런 느낌이다.

이 경우에는 신상 형태로 뭉친 빛이 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거지만…여느 신탁이 그러하듯 정확하지 않고 두루뭉실하게 전해진다.

그나저나 이거 좀 대단하네.

의지만을 담았을 뿐, 힘은 하나도 담기지 않았음에도 전해지는 막대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말 그대로 격이 다르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분명 게임에서 사제 플레이를 할 때는 정의로운 광명을 이렇게 불렀었지.

“드높은 하늘에서 가장 영광된 분이자. 태양의 주인. 모든 선한 이들의 수호자이신 정의로운 광명이시여. 당신께 청하나이다.”

[크릉….]

이게 정답이었는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백사자.

그런 녀석에게 옆에 있던 헬레나를 들이밀었다.

“당신의 사도로 삼기에 적절한 여인입니다. 닥쳐오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기 위해 중히 써주십시오.”

[…….]

빤히 헬레나를 바라보는 정의로운 광명. 무언가를 고민하듯 앞발을 까딱거린다.

뭐, 보자마자 헬레나의 자질은 눈치챘을 테니 힘이 없어 고민하는 거겠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필요하다면 제게 주신 힘을 덜어내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헬레나의 가호는 A랭크. 내 가호를 몇 단계 랭크 다운한다면 사도급인 S까지 끌어 올릴 수 있을 터.

가호가 주는 보너스가 아쉽긴 하지만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다시 회복시켜줄 테니 잠깐 고생하면 그만이다.

나름 합리적인 방법이니 정의로운 광명도 납득할….

[크허어엉-!]

그건 안 된다는 듯이 단호하게 울부짖는 사자.

그리고는 이유를 설명하듯 연거푸 으르렁댔다.

[크릉. 킁. 크허엉]

…뭐라는지 모르겠네.

신탁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는데 너무 답답하다.

나도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띠링!

내겐 무척이나 익숙해진 종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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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당신의 말에 [안 돼! 절대 안 돼! 아무튼 안 돼!] 라며 떼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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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게 뭐람. 시스템이 신탁도 번역해줘…?

가끔 알림에서 정의로운 광명이나 다른 신들이 뭐 하는지 간략하게 알려주긴 했는데, 그래도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

[커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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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네가 내 사도가 되면 해결되는 거잖아!] 라며 고집을 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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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 사도 안 한다니까요….”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 이에 사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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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내 말이 들리는 거야?] 라며 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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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네. 들리네요. 이게 왜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거대한 사자가 고양이마냥 폴짝폴짝 뛰며 가르릉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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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그럼 내 말을 해석해줄 사람은 필요 없겠네. 너랑 이 아이만 남기고 다들 잠시 나가달라고 전해줄래?] 라고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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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얼떨떨한 심정으로 정의로운 광명의 말을 그대로 전하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예배당을 나간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텅 빈 예배당에 울려 퍼진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나와 헬레나, 그리고 굉장히 신나 보이는 거대 사자뿐.

주변을 둘러보듯 두리번거리던 정의로운 광명의 몸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광량.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새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그 형상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사자 귀와 꼬리가 돋아난 헬레나가, 복실복실한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어?”

“광명…님?”

멍청한 목소리로 눈만 깜빡이는 나와 헬레나.

우리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의로운 광명이 양팔을 번쩍 들며 울부짖었다.

[크앙 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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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이런 거 좋아하지?] 라며 으스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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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이쪽이 친숙하고 좋긴 합니다만…그….”

약간의 고민 끝에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여자셨어요? 항상 수사자처럼 갈기를 달고 계시길래 남자이신 줄 알았는데….”

[크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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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갈기는 멋있어서 둘렀을 뿐이야!] 라며 투덜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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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식이었구나.

[크앙? 크아앙!]

헬레나 사자 수인 버전 같은 모습을 한 정의로운 광명이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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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한번 둘러볼래?] 라며 자신의 갈기를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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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구비는 헬레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눈빛. 하지만 분위기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여인이 주섬주섬 목도리를 건넨다.

진짜 사자의 갈기를 떼어다 붙여둔 것 같은 복실복실한 목도리.

이게 단순한 장식이었단 말이지….

얼떨결에 받아들자 광명이 히히 웃으며 직접 내 목에 둘러준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마구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크앙! 크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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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광명이 [역시 잘 어울리네!] 라며 감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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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감사합니다. 확실히 이거 좀 멋있긴 하네요.”

인벤토리에서 꺼낸 거울로 본 내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전체적으로 기품이 추가된 것 같은 느낌.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껍데기고, 그 안에는 언제든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사나움도 희미하게 느껴진다.

척 봐도 단순한 디자인이 아닌 권능이 추가되어 변화한 인상. 상당한 고뇌와 궁리가 담겨있는 목도리다.

역시 사람이건 신이건 최종 컨텐츠는 룩덕과 커마인가.

나 또한 한때 커마에 미쳐 살았기에 그 심정은 잘 안다. 실제로 지금의 모습이 당시의 흔적이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나오던 순간. 모시는 신의 앞이라고 말을 아끼고 있던 헬레나가 파르르 떨면서 나를 가리켰다.

“그,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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